극한 상황을 이긴 자들
‘목사님 혼자 두지 마세요. 사모님!’
어깨너머 듣고 점심 초대를 받았다.
탁 트인 맛집으로 생전 어머니 모셨던 곳이다.
공허함 달래는 식탁이지만 잊히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멍 때리다 자전거를 탔다.
등 떠미는 바람이 비를 데려왔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 속도를 냈다.
오르막길에 힘을 실었더니 왼쪽 페달이 떨어졌다.
개나리 묘역 길에 두고 걸었다.
등골이 젖었다.
예정일보다 이르게 표지 석을 놓았다. ‘
어머니 사랑합니다.’ 글귀를 보자 북받쳤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혼잣말로 흐느꼈다.
빗방울이 튀었다.
신문지로 돌비 문지르며 눈물을 훔쳤다.
바람이 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 나무들이 밤을 맞으려고 옷 갈아입을 때 일어났다.
짙은 비구름이 다다르자 어둠이 내렸다.
이튿날,
호남노회 목회자 부부 수련회 갈 채비 중에 카톡이 울렸다.
‘수련회 가시는데 엄마 계시면 목사님들 간식 비용 주셨을 텐데..
안전 운전하시고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동안 애 많이 쓰셨네요.
늘 감사하고 존경합니다.’
‘동생! 일을 접할 때마다 어머니가 눈에 밟히지 않은 날이 없네.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서 힘드네.
마음 추스르는 일상 회복이 어머니 위한 길이라 믿어.
힘내! 기도할게..’
‘국민은행으로 조금 입금했어요.
수련회 목사님들 섬기세요.’
‘그래, 고맙네. 동생도 어려운데.. 아무튼 잘 쓸게..’
그 덕에 도움 요청한 후배 손길에 힘을 보탰다.
‘천 목사님! 내게 구한 지원금 농협으로 보냈네요.
확인해 보세요.’
‘항상 후배 목사님들 사랑해 주시는 섬김에 감사합니다.’
‘담에 또 달라는 인사 같아욤 ㅋㅋ’
‘아니에요~ 충분합니다.
항상 지금처럼 옆에 계셔 주세요.’
‘은퇴도 못하겠네요. 또 드릴게요.’
‘그런 뜻이 아닌디..’
가벼운 차림으로 황 목사님 차를 탔다.
순천 학창 시절 야사를 꺼냈다.
살을 깎았던 아픔을 재밌게 들려줬다.
눈 깜짝할 사이 순천화평교회의 주차장이었다.
2탄을 기대하며 내렸다.
계단에 앉은 아기자기한 화분은 볼거리였다.
따뜻하게 영접하는 교회!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였다.
‘참 아름다워라’ 찬양하며 드린 예배에 집중하였다.
단아하게 서서 드린 대표 기도는 은혜의 강을 이뤘다.
낮은 소리의 섬세한 간구였지만 울림의 파장은 컸다.
준비된 설교는 ‘목민심서’ ‘다산 선생 지식 경영법’
책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그의 유배지 삶은 비관이 아니라 감동과 영향력이었다.
‘에스라 중심으로 예루살렘 성전 재건 위해 나선 자들,
바벨론의 안주를 포기하고 갈 수 없는 길을 따랐다.
하나님께 감동받아 온전한 예배 회복 위해 돌아왔다.
우리 목회 현실이 녹녹지 않다.
하지만 노회 행사의 자발적 후원에 희망을 보았다.
버거운 삶이지만 이 자세로 시대적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길 원했다.’
몸을 추스르고 오랜만에 배구 코트에 섰다.
‘목사님은 군살이 하나도 없네요!’
몸 관리한 결과였다.
내 마음은 돌덩어리 같아 긴장감이 떨어졌다.
집중력도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운동을 마쳐도 개운치 않았다.
저녁 볼링도 마찬가지였다.
둘째 게임에 밀려 겨우 순위에 들었다.
아침 달리기도 넘겼다.
호남 기독교 역사를 체험하는 매산등 순례 길에 모였다.
해설사를 따라 방문지 센터에 둘러섰다.
‘地不如順天’(지불여순천, 살기 좋은 땅으로는 순천만 한곳이 없다)
액자가 눈에 찼다.
첫걸음은 순천의 어머니 교회인 순천중앙교회였다.
118년 소중한 역사의 얼이 흐른 성지였다.
역대 장로 사진에서 고산 병원(1943년 개원) 최정완 원장을 드러냈다.
내 부친을 소환시켰다.
‘1972년 가을, 아버지가 방앗간 사다리에서 떨어졌다.
왼쪽 무릎 관절이 깨져 수술을 받았다.
쇠로 뚫어 추를 달아 4개월간 고산 병원 105호실에 누워 계셨다.
어머니가 대소변을 받았다.
1년 전 순천여중 3학년 누님이 파상풍으로 죽었다.
나와 연년생 누님이 순천 이모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어머니는 방앗간 일과 남은 세 동생도 거뒀다.
40대 초반의 어머니는 왜소한 여인이었다.
그 거센 풍파를 어떻게 헤쳐 냈을까?
그해 성탄절!
병원 입구에서 새벽 송을 불렀다.
아버지의 강퍅한 심령이 무너졌다.
순천중앙교회 최정완 장로님 통해 일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놀라웠다.
매일 자전거로 출근한 원장님은 직원 예배 후 진료를 보셨다.
매년 성탄절이면 새벽 송 감동을 아버지가 되새겼다.
8년 지나서 어머니가 우산교회를 나갔다.
아버지는 늦깎이로 사당동 성광교회에 등록하셨다.
별세 전, 주일 예배 다녀오시고 뇌일혈로 의식을 잃었다.
진운섭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장례를 주관하셨다.
고산 병원장도 서구식 정원으로 조성된 가옥(1923년 건축)을
교회 기증하고 백세에 떠났다.
순례 길에 조지와츠 기념관, 안력산 병원,
선교사 묘지, 코잇 선교사 가옥, 기독교 역사박물관을 차례로 들렸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선교사의 기도문은 핸드폰에 담았다.
선교 사역 중에 남편 선교사는 과로사,
세 아들은 질병으로 잃은 메리 레이번 선교사를 알았다.
신사참배 반대, 여순 사건, 한국 전쟁으로 떠난 순교자들 이름을 새겼다.
현장에서 지인에게 ‘엄마의 일기가 하늘에 닿으면’ 신간을 선물받았다.
돌아와 한참을 벼리다 어머니 아파트 식탁에서 단숨에 읽었다.
섬마을에서 30년간 쓴 이름 없는 엄마의 일기였다.
아니 가슴 먹먹한 기도였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은 손을 통해 일하심에 놀랐다.
극한 상황을 이긴 자들은 하나 같이 기도와 말씀의 도구였다.
고난에 맞서 이길 힘은 영생을 소유한 자의 몫이었다.
오늘 새벽 이 은혜 나눴다.
2024. 6. 1 서당골 생명샘 발행인 광주신광교회 이상래 목사 010 4793 0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