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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화씨는 버스안내양으로 일하던 중 주한미군에서 근무하는 미국인 병사를 만났다. 외국인이었지만 6개월씩이나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그 성의와 나름대로 어울리는 제복이 멋져 그와 결혼을 했다. 둘 사이에서 첫째 아들 줄리어스가 태어났다. 부부는 미국으로 이주했다. 미국에서 둘째가 태어났다. 둘째의 이름은 '벤'이었다. 군인인 남편은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았고, 집에 돌아와도 술에 쩔어 지냈다. 알콜중독으로 인한 일탈과 비행을 일삼고 가족을 돌보지 않는 남편과 이혼을 감행한 김성화씨는 복지부의 도움을 받고자 했다. 하지만 복지부에서 나온 직원은 그녀를 편견으로 대했다. 그녀는 자립을 선택했다.
<김성화: (이혼에 대해) 저는 그럴 수 밖에 없었어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한번은 애아빠가 음주운전으로 투옥되고 나서 그의 고모가 저를 복지부로 데려갔어요, 그곳에서 몇 가지 질문을 하더군요, 누군가가 와서 집을 둘러보더니, “당신에겐 TV가 필요 없다, 가구도 필요 없다,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모든 것을 가져가야겟다” 라고 말했어요. 저는 “아이들이 TV를 볼것이다, 아이들이 TV를 보고싶어할것이다” 라고 반박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녀가 “아니, 그 애들에겐 TV가 필요없어” 라고 잘라말하더군요. 저는 너무 화가 났어요. "당신이 어디에서 왔든지간에 필요없으니 그냥 가세요, 제가 새로운 직장을 구하겠어요" 라고 말 한 후 그들의 도움을 받을 생각을 버렸습니다.>
<핸더슨: 어머니께서는 복지수당을 거절하셨습니다. 본인 스스로 해내시기로 결심하신거죠.>
큰아들 줄리어스의 증언에 의하면 그녀는 아들들이 등교하기 전에 출근했고 늦게까지 친구들과 놀다 들어와도 퇴근을 하지 않았다. 김성화씨는 살아남기 위해, 자식들을 부양하기 위해 새벽부터 밤 늦도록 일을 했다.
미국에서 동양인, 특히 한국인에 대한 감정은 계층별로 다르게 나타난다. 교육,및 소득 수준이 어느 정도 이상인 계층에서는 동양인에 대한 반감은 사실상 드물다. 극소수의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저소득층, 특히 흑인사회는 한인들에 대한 반감이 상당하다. 그들의 눈으로 보기에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해 그들의 일자리를 뺏고 기회를 잠식하는 ‘경쟁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흑 갈등은 91년 발생한 LA 흑인 폭동사건을 기해 표면화 되었고, 아직도 곳곳에서 충돌이 발생하고 있다. 유수의 흑인 뮤지션과 영화인들이 자신들의 작품에서 한국인들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김성화씨의 남편은 흑인이었다. 김성화씨가 미국사회에서 버텨내는 것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언어의 장벽, 문화의 상이성, 그리고 인종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녀는 힘겹게 버티며 아이들을 길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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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더슨 가족
벤 핸더슨이 격투계에 발을 들여놓은 계기는 어머니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일이 바빠 아이들의 소소한 문제까지 챙겨줄 여유가 없었던 김성화씨는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에게 괴롭힘당하는 것을 걱정했고 자기방어를 위해 무술을 배우기를 원했다. 그녀의 선택은 태권도였다. 형제는 금새 검은띠를 획득했다. 고등학교 시절에 핸더슨은 레슬링과 인연을 맺었다. 그것은 운명적인 우연이었다.
<어느날 화장실을 가는데 레슬링부 코치가 ‘이봐 여기로 오라구! 렛츠고~’ 라고 말했고 저는 무슨 영문인지 몰랐어요 그야말로 ‘웽???’ 이었죠, 알고보니 레슬링부 코치는 저를 지각한 팀원으로 생각하셨나봐요, 저는 그냥 그렇게 레슬링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해보니까 재미있더라구요. 시작하자마자 저는 꽤 잘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것봐라, 꽤 괜찮잖아?" 라고 생각하면서 파고들게 됐죠.>
레슬링을 배우기 시작한 초기의 핸더슨에 대해 그의 고교시절 레슬링 스승은 아래와 같이 말했다.
<마이크 브레슬러(고교 레슬링부 코치): 처음 출전시킨 토너먼트에서 이 친구가 우승을 해버린 겁니다. 뛰어난 레슬러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듭했습니다, 선수로써의 성장과정에서 그가 몇명의 도저히 이길 수 없을것 같은 선수들을 상대해 업셋을 일으키는것을 보았어요, 그것이 그의 특징입니다. 이길 수 없을것 같은 상대를 이겨버리는것 말씀입니다.>
핸더슨은 대학때 까지 레슬링을 계속했고 전미 8강까지 주어지는 올아메리칸에 선정된다. 핸더슨의 MMA파이터를 목표로 한 것은 대학시절부터였다. 2006년 11월 핸더슨은 프로 MMA무대에 등장했다.
2007년 3월 31일, 미국 콜로라도의 한 지역에서 열린 Battlequest 5: Avalanche 라는 대회에서 당시 2전 2승(1KO, 1SUB)을 거두고 있던 벤 핸더슨은 록키 존슨이라는 선수를 상대로 싸웠다. 존슨은 당시 9전 5승 (0KO 4SUB) 4패의 전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상대는 단신이었고 왼손잡이 핸더슨은 라이트 잽, 더블잽을 몇번 보여준 후 태클로 트랜지션을 걸었다. 상대가 상단 타격을 의식하게 유도하고 하단 태클을 거는 방식은 정석이다. 사전 준비 없이 그냥 들어가는 태클보다 성공률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존슨은 숙이며 들어오는 핸더슨의 목에 길로틴을 거는 척 하다가 다스 초크로 변환을 걸었고 아나콘다 피니쉬로 핸더슨을 잠재웠다. 핸더슨은 정신을 잃을 때까지 항복 하지 않았다.
2006년 11월에 데뷔한 핸더슨은 프로 전향 4개월여, 경기경력으로는 3전째에 이렇게 첫 패전의 맛을 서브미션으로 보았다.
이후 두 경기에서 연속으로 1라운드 서브미션승을 거두며 전적을 5전 4승 (1KO 3서브미션) 1패 (서브미션패)로 향상시킨 헨더슨의 여섯번째 상대는 마이크 마에스타스였다. 마에스타스는 당시 7전 5승 1무 1패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 선수는 데뷔전에서 패배, 2전에서 무승부를 기록하고 나머지 다섯경기에서는 연승을 거두던 중이었다. 내용도 2KO와 2서브미션승이 있었다. 그는 헨더슨보다 5cm 가량 키가 컸다.
마에스타스와 핸더슨은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두 선수의 경기는 기본적으로 클린치와 그라운드에서 벌어졌지만, 그렇다고 스탠딩에서의 박력이 없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흔히 지루해지기 쉬운 클린치-그라운드 공방에서 불꽃이 튀었다. 헨더슨의 특징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점이다.
핸더슨은 클린치에서 강하다, 그리고 테익다운 능력이 준수하며, 웬만해선 테익다운을 내주지 않는다, 스탠딩에서 중심이 높은 관계로 상대와 강한 충돌이 일어났을 때 넘어지는 장면을 가끔 보이는데(에드가 전에 뿐만 아니라 여러 경기에서 간혹 이런 모습을 보인다), 이런식으로, 혹은 일반적인 형태로 테익다운을 내주더라도 금방 탈출한다. 그리고 상위포지션을 잡으면 격렬한 페이스로 파운딩을 내려치고 서브미션을 시도한다. 상위에서 공격적이다 보면 포지션 싸움이 약해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핸더슨은 그라운드에서의 공격력에 비해 포지션 점유 및 유지 능력이 매우 우수하다. 기본적으로 고교시절부터 수련을 시작한 아마츄어 레슬링의 경험과MMA랩(소속팀)의 유술기, 그리고 막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싸우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핸더슨은 클린치에서부터 그라운드 게임에 체력을 아끼지 않고 사용한다. 핸더슨의 그라운드 플레이가 지루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 점이다. 그는 그라운드에서 쉬지 않고 공격을 퍼부으며 상대의 탈출 시도를 저지 하는데 이 과정에서 양선수의 공방이 아주 볼만해 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보기보다 훨씬 어려운 방식이다. 상대보다 체력수위가 한 차원 높지 않은 선수가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후반에 가서 경기는 엉망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핸더슨의 특징 제 1 번은 우수한 체력과 레슬링-유술 능력을 바탕으로 한 클린치-트랜지션-그라운드 속도전을 벌여 상대를 꼼짝 못하게 얽어버리며, 상대의 체력을 쭉쭉 빨아낸다는 점이다.
1라운드는 핸더슨이 상위포지션을 유지하며 파운딩을 위주로 상대를 공략했다. 하지만 2라운드에서는 상대에게 백을 내주고 리어네이키드 초크를 당하기 직전까지 몰렸다. 거의 걸린 듯 했지만 핸더슨이 겨우 탈출했다.이 부분, 즉 상대의 서브미션시도에 잘 당하지 않는다는 점도 핸더슨의 경기구조에서 매우 중요한 포인트다.
즉 그라운드에서 적극적으로 공격을 시도하는 핸더슨은 필연적으로 상대에게 서브미션기를 구사할 찬스를 많이 주게된다. 만약 핸더슨이 서브미션 방어가 약하다면, 이러한 운영은 수준높은 유술가를 만났을 경우 독이 될 수 있다. 마크 콜먼의 경우가 딱 그런 예로 볼 수 있는데, 그는 상대를 테익다운 시키고 상위포지션을 유지하면서 파운딩으로 상대를 공략하는 전법을 사용했다. 이 선수는 그렇지만, 하위에서 시도되는 서브미션기에 취약했고 결국 노게이라와 효도르에게 당했던 것이다. 노게이라와 효도르를 넘기고 누르기는 했지만 공격을 하다가 서브미션기의 역습에 당했다는 얘기다.
핸더슨은 유술기에 대한 방어능력이 아주 높다. 이것을 핸더슨의 특징 2번으로 놓기에 무리가 없을 듯 하다.
그라운드에서 적극적이면서 유술에 잘 걸리지 않는다는 점은 극도로 중요하다. 첫 패배를 서브미션으로 당한 후, 특별히 주의하게 되지 않았겠는가 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3라운드에 지친 상대를 하위에 놓고 팔꿈치 파운딩으로 두피에 깊은 자상을 입힌 후, 핸더슨은 피투성이의 마에스타스의 등뒤에서 리어네이키드 초크를 잡아 경기를 마무리했다. 매우 훌륭한 내용의 경기였다. 이 경기를 통해 핸더슨의 자질이 업계에 널리 알려졌다.
이후 두 경기를 더 이긴 핸더슨은 7승 (1KO 5서브미션) 1패의 전적으로 마이너 무대를 졸업하고, UFC로 가는 등용문인 WEC로 진출했다.
WEC 데뷔전에서 2라운드 서브미션승을 거둔 핸더슨의 전적은 9전 8승 1패 1KO 6SUB이 되었다. 다음 상대는 당시 5승 1패를 기록하던 쉐인 롤러였다. 롤러는 데뷔전에서 패배를 당한 이후 5경기에서 연승을 거두던 중이었다. 2KO, 3SUB로 모든 경기를 피니쉬했으며 모든 피니쉬가 1라운드에 나왔다. 가장 길었던 경기가 3분이었고 짧았던 경우는 16초만에 끝을 보기도 했다.
벤 핸더슨 대 쉐인 롤러 (10전, 2009년 4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