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의 성지와 사적지를 시대와 주요 인물별로 정리한 자료입니다. 사목 1998년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베르뇌 다블뤼 주교 관련 사적지
차기진(한국 교회사 연구소 연구실장)
한국 천주교회의 성지와 사적지 (4)
베르뇌, 다블뤼 주교 관련 사적지
1. 다블뤼 신부와 공주의 교우촌
박해 시대 조선 땅에서 가장 오랫동안 활동한 선교사는 훗날 제5대 교구장에 오르는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였다.
그는 본래 류우쿠(琉球) 선교사였으나 1844년 9월에 마카오에 도착한 뒤 제3대 주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간청을 받아들여 조선 선교사가 되었고, 1845년 10월에 27세의 나이로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안내를 받아 충청도 강경에 발을 딛게 되었다. 그때부터 1866년 3월까지 그는 사제로서 11년 5개월 동안, 주교로서 9년 동안 이땅에서 생활하면서 갖가지 유형 무형의 자취와 업적을 남겨 놓았다.
조선에 도착한 다블뤼 신부는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 한양 근처의 작은 교우촌에 머물면서 조선어를 배운 뒤, 이듬해 정월부터 눈 속에 숨겨진 교우촌을 찾아 다니며 성사를 베풀었다. 그러다가 병오박해로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자 페레올 주교와 함께 충청도의 한 교우촌으로 피신하여 지내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1846년 11월 2일 성모 마리아의 보호에 감사를 드리려고 가까운 교우촌으로 거처를 옮기고 몇몇 신자들과 함께 성모 성심회(聖母聖心會)를 창설하였으니, 그 곳 이름이 곧 ‘수리치골’(현 충남 공주군 신풍면 鳳甲里)이었다.
선교사들은 성모 마리아께 대한 감사의 표시로 파리 ‘승리의 성모 성당’에 본부를 둔 ‘성모 성심회’를 조선에 설립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곤란한 것은 이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 데 적합한 장소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당시 그들에게는 경당(經堂)이 없었으므로 많은 신자들이 모이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결국 그들은 외딴 곳에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는 신입 교우 한 가족이 사는 조그마한 오막살이를 골라 잡았다.
위의 기록을 볼 때 수리치골에는 처음부터 교우촌이 형성된 것이 아니었고, 다만 신입 교우 한 가족만 살고 있던 외딴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가 이곳을 방문하여 성모 성심회를 설립함으로써 자연히 인근의 신앙 중심지가 되었으며, “주일이면 신자 몇 명이 이곳에 와서 전세계에 퍼져 있는 성모 성심회 회원들과 뜻을 모아 성모 마리아의 성화(聖畵) 앞에서 몇 가지 기도문을 외우면서 그분을 찬양하고 죄인들의 회개를 빌게 되었다.” 다블뤼 신부는 이때 수리치골 한곳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그가 담당한 지역은 공주를 비롯하여 충청도 전역과 경상도와 전라도 일부 지역으로 매우 넓었기 때문이다.
3년 뒤인 1849년 12월에는 최양업(토마스) 신부가, 1852년에는 매스트르 신부가 입국하면서 조선에서 활동하는 성직자의 수가 어느 때보다도 많아지게 되었다. 그러나 1853년 2월 3일에는 페레올 주교를 잃게 되었다. 이에 앞서 한양으로 올라와 인근에서 성사를 집전하고 있던 다블뤼 신부는 이틀 후 주교댁에 도착하여 다음날 아침 주교의 시신을 모시고 미사 성제를 드린 다음, 그 관을 한 신자에게 맡겨 놓았다가 4월 11일에야 미리내에 안장할 수 있었다. 페레올 주교가 사망한 다음 한국 교회의 장상은 연장자인 매스트르 신부가 맡아보았다.
1854년에는 새로 쟝수(Jansou, 楊)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였다. 그때 다블뤼 신부는 충청도 유구(維鳩) 인근의 산간 마을인 ‘둠벙이 교우촌’(현 공주군 신하면 造平里)에 머물고 있었는데, 쟝수 신부가 입국하자마자 심한 뇌염에 걸렸으므로 그를 둠벙이로 데려와 보살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보살핌에도 병을 이겨내지 못한 채 1854년 6월 18일 둠벙이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렇게 볼 때 둠벙이는 다블뤼 신부가 공소로 설정한 교우촌 가운데 하나였음이 분명하고, 이곳 교우촌 신자들이 쟝수 신부의 마지막을 지켜 보았을 것이다.
2. 베르뇌 주교의 활동과 본당 중심지
다블뤼 신부는 1851년에 한때 병으로 공소 순방을 할 수 없게 되면서 어린 소년들을 신학생으로 양성하는 임무를 맡아보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1855년 초 장상 매스트르 신부가 ‘배론 성 요셉 신학교’를 설립한 후에도 별도로 계속되었는데, 그 이유는 배론 신학교가 비좁고 위험한 탓에 많은 신학생들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의 상황이 이러했을 때, 1854년 8월 5일 제4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2월 27일 요동에서 성성식을 가진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푸르티에(Pourthie, 申),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신부와 함께 1856년 초에 입국하여 3월 29일에는 한양에 도착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한양 ‘전동’(典洞, 현 종로구 견지동)에 있던 이군심(李君心)의 집에 머물면서 조선어를 배운 뒤 한양과 경기도 일대의 교우촌을 순방하였다. 전동은 앞서 매스트르 신부가 머물던 곳이기도 했으며, 한국 천주교회 최초로 성성식이 치러진 곳이기도 했다. 곧 베르뇌 주교는 교황청에서 위임한 대로 1857년 초에 다블뤼 신부를 자신의 보좌 주교로 선택했는데, 그의 성성식은 3월 25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에 전동의 주교관에서 아주 비밀리에 조촐히 거행되었다.
성성식 다음날인 3월 26일, 베르뇌 주교는 3일 동안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성직자 회의를 열고 여기에서 결의한 사항을 「장주교윤시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라는 이름으로 신자들에게 반포하였다. 그런 다음 신자들의 기도 생활과 교리 교육을 위해 다블뤼 주교와 최양업 신부에게 교회 서적을 번역하거나 저술하도록 하였으며, 1859년에는 한양에 목판 인쇄소를 세우고 그 운영을 최형(崔炯, 베드로)에게 위임하였다. 이 목판 인쇄소는 1864년 이전에 두 개로 늘어났다.
1861년 초에 조선의 성직자 수는 크게 늘었다. 리델(Ridel, 李福明) 신부 등 4명의 선교사가 새로 입국했기 때문이다. 이에 고무된 베르뇌 주교는 같은 해 10월에 조선교구를 주보이신 성모 마리아께 봉헌하면서 배론 신학교 지역을 제외한 교구 전체를 모두 7개의 지역 본당으로 나누어 전담 선교사를 임명하였다. 이때 정해진 본당들은 베르뇌 주교가 담당한 한양을 비롯하여 페롱(Feron, 權) 신부가 담당한 경상도 서북부 지역, 칼래(Calais, 姜) 신부가 담당한 경상도 서부 지역, 다블뤼 주교의 상부 내포 지역, 랑드르(Landre, 洪) 신부의 하부 내포 지역, 그리고 공주에 중심지를 둔 리델 신부와 죠안노(Joanne, 吳) 신부 지역이었다. 최양업 신부는 이에 앞서 전국의 외딴 교우촌들을 순방하다가 6월 15일에 사망하였다.
이들 가운데 리델 신부의 본당 중심지는 ‘진밭’(현 공주군 사고면 新永里)에 있었고, 죠안노 신부의 본당 중심지는 앞에서 말한 둠벙이에 있었다. 리델 신부는 이때 충청도 동북부와 전라도, 경상도 지역을 담당하였으며, 죠안노 신부는 주로 공주 지역과 충청도 서북부 지역을 순방하였다. 그리고 랑드르 신부의 본당 중심지는 ‘황모실’(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好音里)에 있었는데, 이곳은 본래 매스트르가 담당했던 지역으로 그는 1858년에 사망하여 황모실 교우촌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본당 분할은 얼마 안되어 와해되고 말았다. 죠안노 신부와 랑드르 신부가 1863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조선 입국 이후 둠벙이 교우촌에서 생활하던 죠안노 신부는 병을 얻어 오랫동안 리델 신부에게 보살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1863년 4월 13일 병이 악화되어 그곳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어 리델 신부는 6월 19일에 또 다른 동료의 죽음을 전해 듣게 되었으니, 그것은 황모실에서 열병으로 고생하던 랑드르 신부가 그 전날 사망했다는 것이다. 당시 리델 신부는 죠안노 신부의 최후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였다.
부활 축일 전날 죠안노 신부가 너무나 쇠약해져 있었으므로 종부성사를 주고 그와 함께 밤을 지샜습니다. 그동안 그는 기도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입술에서는 자주 화살기도와 천주께 대한 열렬한 갈망의 말이 새어 나왔습니다. … 4월 13일 월요일 정오쯤에 그는 두 번 하늘을 향해 눈과 팔을 올리고 미소짓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내 저녁 7시 반에 조용히, 그리고 아무런 동요없이 그의 아름다운 영혼을 천주께 바쳤습니다.
31세의 젊은 나이에 병사한 죠안노 신부의 시신을 신자들은 둠벙이 교우촌의 동쪽 골짜기에 안장하였다. 이후 그의 무덤은 1970년대 초 유구 본당의 크랭캉(강 요한) 신부에게 발견되었고, 그의 묘비를 건립한 이래 지금까지 그곳 산 중턱에 남아 있으며, 이름없는 교우촌 신자들의 무덤 몇 기가 그 아래로 함께 조성되어 있다. 한편 랑드르 신부의 시신은 황모실에 안장되었다가 1970년 4월 30일에 매스트르 신부의 유해와 함께 합덕 본당 경내로 이장되었다.
3. 병인박해와 베르뇌, 다블뤼 주교
최양업 신부가 사망한 뒤 다블뤼 주교는 그의 지역을 맡아 경상도를 순방하였다. 그러면서 1857년부터 계속해 온 한국 순교자들의 자료들을 수집하는데 노력하였으니, 이것이 유명한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다. 그는 이 자료들을 1862년에 1차로 정리하여 파리 외방 전교회 본부로 보낸 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자료들을 정리하면서 계속 보완 자료들을 수집하였다. 그러나 1863년 초에 그 자료를 보관해 놓았던 ‘판서골’(현 충남 보령군 미산면 삼계리)의 주교댁에 화재가 일어나 그 안에 있던 자료들이 모두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이후 다블뤼 주교는 ‘신리’(현 당진군 함덕읍 新里)와 그 이웃의 ‘거더리’(현 예산군 고덕면 上官里)를 오가며 생활하였다.
한편 베르뇌 주교는 거처를 전동에서 ‘태평동’(太平洞, 현 서대문구 서소문동)으로 옮겨 홍봉주(토마스), 이선이(李先伊) 등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이 무렵에 그는 파리 외방 전교회 본부로 보낸 1865년의 연말 보고서에서 한국 천주교회의 총 신자 수를 2만 3천명으로 보고하는 기쁨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과 희망은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로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박해 초기에 베르뇌 주교는 이선이의 밀고로 자신의 거처에서 체포되었고, 3월 7일(음력 1월 21일)에는 3명의 선교사와 우세영(알렉시오) 등과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하여 신자들이 ‘와서’(瓦署, 현 용산구 한강로 3가의 왜고개 인근)에 안장하였다. 주교의 시신은그 후 1899년 10월 30일에 발굴되어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에 안치되었다가 명동 대성당을 거쳐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옮겨졌다. 순교 직전 베르뇌 주교는 옥문 앞에 몰려들어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웃고 놀리지 마시오. 당신들은 오히려 울어야 할 것이요. 우리는 당신들에게 영원한 행복을 마련해 주려고 왔었는데, 이제는 누가 천국의 길을 당신들에게 가르쳐 주겠소. 정말로 당신들은 불쌍하오.
베르뇌 주교가 순교한 지 4일 뒤에는 거더리에서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었으며, 이튿날에는 위앵(Huin, 閔) 신부가 ‘쇠재’(현 충남 예산군 봉산면 金峙里)에서, 오메트르(Aumaitre, 吳) 신부가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함께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이후 그들은 군문효수형의 판결을 받고 황석두(루가), 장주기(요셉) 등과 함께 충청도 ‘갈매못’(현 충남 보령군 오천면 永保里의 고마 수영)으로 이송되어 3월 30일에 순교하였다. 그 뒤 황석두를 제외한 4명의 시신은 남포(南浦) ‘서재골’(현 충남 보령군 미산면 平羅里의 서짓골)로 옮겨져 안장되었고, 1882년에 일본 나가사키로 옮겨졌다가 명동 대성당을 거쳐 1967년에 절두산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때 경상도 지역의 교우촌을 순방하던 리델 신부는 박해 소식을 듣고는 공주 진밭으로 돌아와 숨어 있다가 ‘버시니 교우촌’(현 공주군 신풍면 仙鶴里)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5월 18일에는 인근의 열심인 과부 집에서 페롱 신부를 만날 수 있었다. 여기에서 그들은 ‘목천 서들골’(현 충남 천안시 목천면 松田里)에 피신해 있던 칼래 신부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런 다음 리델 신부가 먼저 중국으로 피신하기로 하고, ‘관불 옹기점 교우촌’(현 충남 공주군 유구면 鹿川里)을 거쳐 7월 1일에 아산 용당리에서 배를 타게 되었다. 그 뒤 페롱과 칼래 신부도 중국으로 탈출하였다.
이렇게 베르뇌, 다블뤼 주교와 선교사들이 순교한 뒤에도 박해는 계속되었다. 특히 1866년 9월과 11월 사이에 발생한 병인양요(丙寅洋擾)로 흥선 대원군은 선참후계(先斬後啓)의 법령을 반포하였으며,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함이 거슬러 왔던 양화진(楊花鎭) 인근의 잠두봉에는 새 형장이 조성되었다. 이후 1866년 10월 22일(음력 9월 14일)에 이의송(프란치스코) 가족이, 10월 25일에 황해도 출신의 박영래(요한) 회장이 효수된 것을 비롯하여 이곳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는데, 이때부터 잠두봉은 ‘절두산’(切頭山)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4. 계속되는 박해와 순교
박해가 계속되면서 전국에서 신자들이 체포되어 각 도의 수부(首府)나 군사들의 주둔지인 진영(鎭營)에서 희생되었다. 먼저 흥선 대원군이 1866년 11월 21일 천주교도들을 남김없이 색출해 내도록 전국에 명한 이틀 뒤인 11월 23일에는 성연순 등이 ‘강화 진영’에서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전라도에서는 정문호(바르톨로메오), 조화서(베드로) 등 6명이 체포되어 형벌과 문초를 받은 뒤 1866년 12월 13일(음력 11월 7일)에 ‘서문 숲정이’(현 전주시 진북동의 옛장대)에서 순교하였다. 또 조화서의 이들 조윤호(요셉)는 전주 ‘서천교 장터’(현 전주시 동완산동)에서 매를 맞아 순교하였다.
경기도에서는 광주 유수가 거처하던 ‘남한산성’(현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에서 정은(바오로)을 비롯하여 여러 순교자가 탄생하였으며, 수원과 죽산의 ‘이진터’(현 경기도 안성군 일죽면 죽림리), 남양 등지에서도 많은 신자들이 칼날 아래 희생되었다. 또 대구 ‘관덕정’(현 대구시 중구 남산 2동)에서는 1867년 1월 21일에 이윤일(요한)이 군문효수형을 받았고, 경상남도에서도 정찬문(안토니오) 등이 순교하였다. 충남 지역에서는 손자선(토마스)이 1866년 3월 30일에 공주 ‘황새 바위’(현 충남 공주시 교동)에서 순교한 이래 해미와 홍주 진영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처형되었다.
무진년(1868)에는 독일 상인 오페르트의 덕산 굴총 사건(德山掘冢事件)으로 박해가 재연되었다. 대원군은 다시 한 번 이 사건을 빌미로 천주교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이미 체포되어 있던 신자들에게 역률(逆律)을 적용하여 처단하였고, 배교한 경우도 유배형에 처하였다. 이때 먼저 오페르트에게 협력한 손경노(요한), 이영중 등이 체포되어 보령 갈매못에서 효수형을 받았다.
이어 한양의 포도청과 각 도의 감영에 신자들을 수색, 체포하도록 하는 명이 내려졌다. 그 결과 우선 중국을 왕래했던 교회 밀사 장치선 등이 처형되었고, 굴총 사건이 일어난 충청도 덕산과 해미 일대는 물론 서울의 포도청과 절두산, 경기도의 수원, 죽산, 남양, 충청도의 공주, 홍주, 충주, 청주, 전라도의 전주, 나주, 여산, 경산도의 대구, 울산, 진주, 황해도의 해주, 황주, 함경도의 영흥 등지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이처럼 무진박해와 관련된 순교 사적지는 그 어느 박해 때보다도 많게 되었다.
당시 조정에서 내린 명령은 주로 참수형이었지만, 지방에서는 주로 교수형이나 장살, 생매장 등 남형(濫刑)을 적용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교수형으로 순교한 신자들이 많았는데, 이 형벌에는 구명이 있는 큰 돌(일명 형구돌)이나 벽에 뚫은 구명에 줄을 넣고 순교자의 목을 얽어맨 다음 반대편에서 줄을 당기는 방법이 있었고, 한 번에 많은 신자들을 처형할 경우에는 두껍고 큰 널판 가운데로 여러 구명을 뚫고 줄을 꿴 다음, 신자들의 목을 구명에 넣도록 하고 양쪽에서 줄을 당겨 죽이는 방법이 있었다. 또 생매장의 예는 충청도 순교자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는데, 수부인 공주에서는 행해지지 않고 지방인 홍주나 해미 진영에서만 적용되었다.
무진박해는 1869년에 이어 1870년대 초까지 계속되다가 잠잠해지게 되었으나, 1871년에 미국 함대가 내침하는 ‘신미양요’로 재개되었다. 이때 대원군은 그 함대를 격퇴한 다음 6월 12일(음력 4월 25일)자로 명을 내려 서울의 종로와 8도 각 지역에 척화비(斥和碑)를 건립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서양 오랑캐가 침범해 오면 싸우거나 화친해야 하는데,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글귀를 새기도록 하여 척사 사상을 고취시켰다.
물론 양요 사건은 조선의 위정 척사 의식을 더욱 고착시키면서 천주교를 서양 세력의 앞잡이로 인식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대원군은 ‘위정’이 아니라 ‘척사’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고, 적어도 천주교에 대해서만은 위정에 필요한 교화 정책을 전혀 쓰려고 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아울러 그는 천주교 신자들을 매국자로 매도하고 처형함으로써 병인박해를 집권의 한 방편으로 이용하였고, 이것은 북경 조약 이후 더욱 강하게 드러난 조선 사회의 위기 의식이나 위정 척사사상과 맞물려 정당성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반면에 교회 내적으로 볼 때, 우선 병인박해는 최대의 박해로 유례없이 많은 순교자들을 탄생시켰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최후의 박해였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다음으로 이 박해 때문에 한국 천주교회는 다시 한 번 침체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박해가 복음의 씨앗을 더 멀리 뿌리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박해 과정에서 깊어져 간 순교 신심은 훗날 순교터와 순교자들의 무덤들이 사적지로 조성되면서 순교자 현양 운동과 함께 현대의 교회로 이어지게 되었다. 다만, 병인박해 순교자 중에서 24위만이 시성되었을 뿐이므로 아직 시성되지 못한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하고, 관련 사적지들을 개발하는 일이 과제로 남아 있다.
<차기진, 사목 239호(1998년 12월), pp.98-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