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예천군민회(在京醴泉郡民會)
1. 재경예천인들의 정서와 자긍심.
“예천”은 757년(신라 경덕왕 16년)에 예천군이 되었고, 지금까지 약 1,250여년을 유구한 역사와 전통으로 면면히 이어 온 “새천년 희망의 땅”이다.
이는, 대소 양백간(백두대간과 낙동정맥-문수맥)의 생명의 고장이자, 인물의 고장이며, 곧 희망의 고장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천에는 지명과 관련한 유명한 전설이 있다. 예천읍 주고개(酒峴, 일명 쥐고개)엔 근래까지 주천(酒泉,일명 박샘)이 있었다. 그 주천에는, “옛날 어느 추운 겨울날 어떤 부인이 남편에게 줄 술을 사서 항아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는 급히 산고개를 올라가다가 넘어져서 그만 항아리가 깨어져 술을 쏟고 말았다.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에 한참 울다가 앞을 보니 기이하게도 구덩이에 술이 괴어 있었단다. 그 술을 바가지에 담아 갔는데, 그 이튿날도 이곳을 지나다가 보니 또 술이 괴어 있는 것이 아닌가! 계속 술이 나오자 삽시간에 소문이 인근에 퍼지고, 이 샘에서 나는 술은 한 잔 마시면 술이지만, 두 잔을 마시면 취하며, 세 잔을 마시면 물이 된다고 하여 주민들은 늘 관심을 갖고 살피면서도 오래오래도록 애용하였다. 그러나, 이 고갯길을 지나던 한 나그네가 목이 말라 이 물을 한 잔 마셨더니 물이 아니고 술이었는데, 그 맛이 하도 좋아 다시 한 번 마셔보니 얼큰하게 취하게 되었다. 그래서 욕심이 솟구쳐 계속 마셨더니 샘에 있는 술이 모두 물로 변하고 말았다“는 전설이다.
따라서, 예천(단술 예-醴, 샘 천-泉)은 전설과 같이 주고개(주현)의 주천(술 주-酒, 샘 천-泉 *참고로 인공적으로 파면 우물 정-井이다. 전북의 정읍-井邑이 그러하다.)과 맥락을 같이 하며, 예천의 상징성, 정체성, 정서적 만족감은 물론 자연과 인간의 관계, 상부상조, 사랑과 평화, 희생과 봉사, 도덕과 예절, 고향의 멋과 맛을 엿볼 수 있다.
거기다가 백두대간의 백두산, 태백산, 소백산과 학가산(인물봉)의 정기를 타고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태어나고, 넓적다리에 해당하는 하늘과 땅을 잇는 나라의 중요한 비행장이 있고, 옛 서울 나들이 육로와 철로, 삼강 회룡포의 수로가 있었고, 제2의 개성이라 할 상권이 있었다.
그 역사의 바퀴는 약포 정탁의 임란 당시 홍의장군 곽재우와 광산(광주) 충장공 김덕령 장군을 천거하고, 충무공 이순신을 너무도 유명한 신구차서를 통해 죽음으로부터 명랑대첩을 이룩케 한 기개를 빼놓을 수가 없고, 근현대사의 소용돌이에서 동학혁명의 영남 중심지역이자, 형평사운동의 중심이었으며,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박열 의사 포함) 또한 안동과 함께 중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유사 이래 처절했던 동족상쟁의 한과 아픔을 한층 겪고 있는 고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앞으로 그 생명의 땅을 이어갈 희망인 곤충연구소(박물관)가 있고, 요지에 천문대가 있고, 세계적인 국궁과 양궁(장)이 있고, 삶의 애환을 느끼던 삼강주막이 있으며, 세금을 내고 장학금을 주는 석송령 동수가 있고, 근세사의 백년일기 저상일월이 있다. 더욱이 경북도청이 안동과 경계지역에 들어와 역사적 흐름을 뒷받침하여 새시대 비젼을 실천하고 있다.
그 외에도 두루 헤아릴 수 없겠지만, 30만 재경예천군민의 정서와 자긍심은 “새천년 희망의 땅-정겨운 예천산하”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2. 재경예천군민회의 발자취
역사상 유래없는 동족간의 오랜 비극의 포연만이 겨우 사라진 직후인 1954년의 어느 가을날..! 참으로 눈물겹고도 안타깝던 시절은 하늘만이 겨우 맑아 보였다. 고향의 보릿고개를 떠나온 물 설고 낯 설기만 한 객지 서울땅..! 아무리 둘러보아도 고향 까마귀는 어디에도 없었던 듯하다.
살아남은 자, 산 자는 살아서 다 모여라. 최성원, 김정식, 윤위현과 두 사람! 모두 다섯이 무교동 조양상사 본사에서 재경예천군민회의 전신인 예천향우회를 태동 시켰다.
초대 회장은 최성원, 조양상사 회장이었고, 김정식은 남선전기(주), 윤위현은 국회통신사장... 최성원 회장은 3대까지 삭막한 허허벌판에서 향우회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그들은 고향사람들이 서울 나들이 한 번 가보는 것이 소원이었으며, 중앙선 열차 타고가면 서울 청량리역이라는 이름이나 듣던 시절, 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서울 땅에서 눈물겨운 생존경쟁을 치를 때 고향까마귀들이 모여 같이 살자고 울고 웃었다!
이어서 4대 회장은 임업계의 거목으로 잘 알려진 김영준이다. 서울농대를 졸업하고 산림국장과 임업시험장장을 거쳐 5․16후에는 서울시 부시장, 경제기획원 차관보를 거쳐 농림부장관을 역임했다. 아울러 한국전력사장과 한국중공업 사장을 겸직하기도 했으며, 가야 고분 발굴과 가야사 복원에 기여하며, 가락김씨 중앙종친회장도 맡았다.
재경예천향우회는 5대 강석래 동해보험사장의 물심양면의 노고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으며. 특히 6대에서 10대까지 5대에 걸쳐 회장을 역임한 시멘트가공업체인 재건상사의 권중섭 회장의 공로가 참으로 지대하다. 그는 탄탄한 기업가로서 뿐만 아니라 예천향우회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또한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 고향의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여 밝은 내일을 위해 희망의 불씨를 키워 주었다.
11대는 나라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현석호 회장이다. 1934년에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재학중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해서 일제 치하의 전남 화순군수, 황해도 산업과장, 충남 광공부장을 지냈다. 해방후에는 중앙경제위원회 기획관, 국방부장관, 내무부장관을 역임하고 3대, 5대 고향 예천지역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그리고 1977년에는 카톨릭 평신도로서는 최고영예인 로마교황청의 기사대장 칭호와 공로훈장을 받고 카톨릭문화연구원 이사장도 맡으며, 관련 저서가 많다.
12대 회장은 우리나라 항공사의 초석을 이루고 작고한 손영을이다. 손회장은 일제하에서 일본 동경항공학교와 응곡육군비행학교를 졸업하고, 조종사시험에 합격, 전투비행사과정을 수료하였다. 해방후엔 다시 육군사관학교 5기와 육군대학을 졸업하고는 육군항공대를 창설하고, 동 대학 교장을 역임했다.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여 전매청장을 지내기도 했다. 아울러 17세때 일본 광도관서 서예대전에 입상할 만큼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리고, 13~18대까지 6대에 걸쳐 회장을 역한 김명회 회장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뉴욕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연세대학교 대학원장과 9대 국회의원, 청주대학교 총장을 지냈으며, 국제연합과 국제의원연맹 한국대표를 지내며, 대한유도회장, 핸드볼연맹회장, 대한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을 역임했다. 종래는 한국학술연구원장으로서 한국을 세계만방에 알리는데 지대한 공이 있다.
19대는 박상영 회장이다. 박회장은 예천지역의 제헌국회의원을 지내며, 당시 혼란기를 극복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특히, 대한민국 교육법 제정에 선도적 역할을 다하고, 전쟁통인 1951년에 군경원호회를 창설하였으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영남방직 상임고문과 협성제지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20~21대는 변우량 회장이다. 그는 미국 칼스테이트대학의 철학박사로서 그리스도신학대학의 교수, 9~10대 국회의원을 지낸 기독교계 명칼럼니스트이자 웅변가이기도 하다. 서울 새문안교회 장로로서 한국장로신문에 고정칼럼을 게재하고, 각종 강연, 강의는 물론 ‘길을 묻는 나그네에게’ 등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노익장을 과시하며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
22대 회장은 우리나라 공직자의 표상, 이두호 회장이다. 1964년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재학중인 1963년 제1회 행정고시에 합격하였으며, 국방부와 감사원을 거쳐 주로 보사부에서 차관과 환경청장을 역임했다. 서울대에서 보건학 박사도 취득했다. 공무원 사회에서는 본받아야 할 공직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사회초년생부터 군민회에 발을 들여놓고 온갖 희로애락을 함께 하였으며, 김명회 회장과 함께 귀감이 되어 따르는 후배들이 많다. 당뇨협회장을 지냈지만 당뇨지병으로 그의 군민회에 대한 열정만큼이나 고인이 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23대는 서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경향신문 사장과 영남일보 사장을 지낸 장명석이다. 한국의 대표적 언론이다. 장회장 또한 훌륭한 인품과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군민회를 잘 이끌었으며 역시 따르는 후배들이 많다.
24대는 대전고등법원장을 지내고 영진의 대표변호사로 활동 하는 정용인이다. 서울대 법학과와 동 대학원,미국 캘리포니아 웨스턴법대 수학하였으며, 김종창 전)금융감독원장과 함께 예천대창중고등학교 출신으로 입지전적인 공직자이다.
25대는 박대일 나토상사와 대원물류 회장으로서 누구보다 군민회에 대한 사랑이 컸다. 군민회 산하에 정심회와 기우회회장도 하면서 군민회의 화합에 진력하였으며, 특히 군민회 자산확보에도 앞장 서서 군민회관을 매입하여 운영한데 공헌이 크다.
26대 유일실업 김동대 회장 또한 젊은 시절부터 군민회 활동을 하며, 늘 서울 객지타향에서 예천인들의 화합과 물심양면 도움에 앞장섰다. 외유내강의 지도력으로 어렵던 시절 군민회에 빛나는 발자취를 남겼다.
27대 삼신인터내셔날 변정구 사장은 우리나라 사무용 금속가구의 대명사라 할 기업인이다. 한국금속가구협동조합 이사장을 지내며, 국민대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도 했다. 그 또한 남다른 향토애로 군민회의 친목과 발전에 힘썼다.
28대 회장은 고려대 화학과 출신 이원교 비룡 회장이다. 비룡은 최첨단 소재 캐미칼 공법으로 수처리 기술개발로써 녹색기술산업의 선도적 기업이다. 그는 특히 고향의 어린 후배들을 위한 장학사업 지원과 도서관(문고)지원에 남다른 애착을 지속적으로 보내고 있다.
29대는 김선도회장으로서 야외체육시설과 놀이시설을 설치하는 경일산업 운영과 글로벌시대에 맞춰 동종업계의 조합장을 지내며, 사업에 열정을 다하고 있다.
30대는 박찬중 대성주류판매 회장이다. 우리나라 주류판매의 선도적 기업을 운영하는 그는 서울지역주류판매협회장을 지내며, 군민회에 대한 친목도모와 화합의 열정은 가히 남다르다 할 수 있었다.
31대는 세계한인무역인협회장으로서 말레이시아에서 헤니권코퍼레이션 회사를 운영하는 권병하이다. 그는 외국에 있으면서 재경군민회장을 한 특이한 경우이다. 그의 군민회에 대한 관심은 참으로 감탄 할만하다.
현재는 32대 손경목 회장(66세)체제로서, 이제 갓 6월1일부로 출범하여 조직과 사업계획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는 유통업체인 <주>유림상사 대표이사이며, 외유내강형의 자수성가한 경영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오랜 기간 면민회장과 군민회 부회장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으며, 그로 인해 금년 재경예천군민회 총회에서 회장으로 추대 되었다. 혼란하고 어려운 시대인만큼 재경군민들의 기대도 크고, 본인도 실로 어깨가 무거움을 느낀다고 한다.
아울러, 재경예천군민회조직에는 수석부회장과 상임부회장, 12개 읍면민회가 있고, 특별직능단체로 정심회, 예시회, 예법회, 예경회, 교우회 등이 있으며, 수도권지역 군포, 부천, 고양 예천군민회와도 활발한 협력과 교류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 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재경예천군민회가 임직원들만의 힘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고, 여기에는 재경예천출신의 반세기에 걸친 각고의 노력하에 이만큼 발전하게 된 것을 묵과할 수 없다,
여기에는, 가장 먼저 우리나라의 경제 주역 황병태 전)주중대사, 장두섭 전)아세아자동차 사장, 신국환 전)산자부장관, 김광옥 전)금옥건설 회장, 권오호 전)서울시 총무국장, 김문석 전)국회의원, 반형식 전)국회의원, 김두선 전)서울시 교육위원회 의장, 김주일 전)주일공사,조기흥 평택대 총장, 이면우 전)지적공사 사장...참으로 잊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그 가운데 현재도 활발한 지원을 물심양면으로 아끼지 않는 전)대구경북시도민회장이며, 경한코리아 사장인 이상연이다. 그는 각급 동창회 지원은 물론 어린 후배들은 위한 장학사업비, 급식시설비, 양궁육성비등 두루 거금을 지속적으로 지원하여 시쳇말로 장사꾼과 사업가는 여실히 다르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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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소중하게 재경군민회 역사를 자세하게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