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미가 1:1-9
제목 : 개악과 심판
사랑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회중이여!
미가는 특별한 과업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보냄을 받아 하나님께 언약적인 섬김에로 되돌아가도록 요청한 사람입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에 관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과 뜻을 드러내는데 도구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미가가 선포한 예언을 우리가 이해하고 해설하는데 핵심적인 열쇠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미가는 당신의 백성을 위해 완전한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오랜 뒤에 사도 베드로가 미가와 같은 사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에, 어떠한 때를 지지하시는지 상고하니라." 미가 역시 동일한 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서 (5:1; 이스라엘의 재판관들이 막대기로 뺨을 칠 것이라)말한 뒤에, 곧바로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해서 (5:4;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말했습니다.
미가는 그리스도가 탄생하시기 700년 이전,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기 직전"에 매우 흥미 있고 중요한 시기에 살았습니다. 본문 1장 1절에서, 우리는 몇몇 특별한 인물들의 이름을 읽을 수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가 예언한 시기는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왕의 때였습니다. 우리는 또한 미가가 남 유다 왕국 갓의 블레셋 도성근처 마을인 모레셋에 살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미가는 북 이스라엘이나 남 유다왕조 둘 다 상당한 부와 번영으로 특징짓던 시대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흔히 그렇듯이 풍요로움은 믿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 시대에는 들끓는 정치적인 불화, 임박한 전쟁, 다가오는 재앙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약소 왕국들은 앗시리아와 같은 큰 열방들에 의해 삼켜 먹힐 직전에 처해 있었습니다. 동방의 바빌론과 갈대아가 점점 힘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매우 퇴폐적인 사회의 "최후의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부유합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침체가 오고 있습니다. 안정됩니다. 그러나 불안이 엄습하고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안전하고 건실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허약하고 병들었습니다. 이와 같은 시기에 미가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오늘 설교 주제를 “미가 선지자가 개악과 심판 사이에 있는 강력한 관계를 예언의 말씀으로 드러내었다"로 정했습니다. 이 주제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I. 끊임없이 계속되는 개악(改惡)-고치어 도리어 나빠지게 함.
Ⅱ. 확실한 심판의 과정
I. 끊임없이 계속되는 개악
장소: 미가가 이 기간 동안에 활동한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한 선지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상 이 특별한 역사적인 시기가 “예언의 전성기"로 일컬어져 왔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동일한 시기에 활동한 선지자로서, 호세아, 아모스, 요엘,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들을 열거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들의 활동이 대단히 많았던 시기였습니다. "최후의 몸부림" 에 적합한 마지막 경고가 선포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런 점에서 은혜로우십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의 말씀이 풍성하고도 상세하게 선포되기 전에 국외로 추방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결코 “저희들은 알지 못했습니다"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선지자들 사이에 있는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는데, 특별히 미가와 이사야 사이에 있는 비슷한 점을 더욱 많이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 두 사람 모두 남 왕조 출신으로서, 예루살렘 안팎으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주로 관심을 쏟았기 때문입니다. 미가서 4장의 일부는 예언적인 중복의 문제가 걸려 있는데, 이사야 2장의 한 단락과 거의 동일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석의하기가 힘들기도 하지만, 이것을 토론하면서 깊이 상고하고 돌아가기엔 역부족입니다.
그러하기에 미가는 이 어려운 시기에 홀로 서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미가는 확실하게 자신의 자리와 성격과 강조해야 할 바를 알고 있으며, 또한 예언적인 내용에 있어서도 그러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사야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는 말씀으로 시작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또 아모스가 북 이스라엘에서 설교한 남 유다 사람인데 비해서, 호세아는 거의 북 이스라엘을 관심을 두었던 사람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 모두에 관심을 가졌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1:1에서 “유다 열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라고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제가 생각하기로는, 미가 선지자가 상당히 강력하게 다른 사람들과 하나로 결속해 있습니다. 사마리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확실히 예루살렘에도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다 상황은 북 이스라엘에게도 중요합니다.
이 당시에 참으로 이스라엘은, 과거에 하나님의 한 언약적인 민족이라고 불렸는데, 분열과 반복에 의해서 갈라졌습니다. 북쪽(10지파)과 남쪽(2지파)은 피차 제 갈 길로 가고 있었고, 심지어는 기회가 나는 대로 서로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미가는 여호와의 언약적인 한 나라로서 서로에게 공동 책임이 있는 것으로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미가는 두 나라를 향해 똑같이 개악(改惡) 중에 있으며 또 이렇게 간다면 여호와의 확실한 심판을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본보기: 심지어 누구든지 북쪽 사마리아를 본보기로 들어 어떤 용도로 남쪽 유다 왕국을 경고하는 것으로 1장을 활용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에 발생하고 있는 일(아니면 곧 발생할 일)은 특별히 예루살렘의 당면한 문제들과 관련이 있고 또 교훈을 줍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이와 같이 비교하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에스겔 23장에서와 같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는 악행을 저지르는 두 자매 오홀라와 오홀리바로 비교되었습니다). 동일한 상황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우리 역시 다른 교회들(또 “교파)의 사정들로부터 배울 수도 있고 또 이러한 사정들을 심각한 경고로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에게 재앙이 들이닥치지 않도록 주의하라! 다른 곳에서 발생하는 것 역시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미가가 유다에게 사마리아를 본보기로 들은 것은 완벽하게 타당합니다.
미가가 먼저 북 왕조의 상황을 주시하였다는 사실은 자기 고향인 유다 상황을 간과하도록 만들지 않았습니다. 미가는 고향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결점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으면서 자기 고향의 개악을 보지 못하는 일종에 광신적인 애국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선지자들은 민심을 쫓는 맹목적인 애국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확실히 미가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기쁨과 은혜가 다윗의 왕위와 유다 왕국(북 이스라엘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과 함께 있음을 알았고, 또 5장 2절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듯이, 미가는 남쪽 유다의 최고의 입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그는 심지어 예루살렘과 유다를 격렬하게 경고해야 할 더 많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심지어 예루살렘에 대해서 “더욱 지독하게(harder)" 대했습니다. 즉 미가의 주된 관심사는 자기 백성입니다. 미가는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는 타락의 실상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미가는 이 사실을 한층 더 본국 유다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소하시기 위해 강림하심: 미가는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을 동시에 언급하면서 하늘에서 “저희를 거슬러 증인이 되시려고(2절)" 거룩한 성전에서 나오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오심을 선포합니다. 여기에서 “증인이 되시려고”라는 말은 [공의가 실추된 시대인] 오늘 우리 법정에서 요구되는 공명정대한 증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가 개인적으로 고소하려는 증인으로, 즉 그의 의도는 진정으로 엄연한 사실들 제시함을 통해서 고소하려고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고소하시기 위해서 강림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강림하심은 영광스러운 반면에 동시에 심상치 않는 것입니다. 미가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심판하시기 위해서 오시는 강림하심을 계시하는 가장 큰 엄위한 능력을 보여주려고 시적인 표현과 운율을 동원해서 “산들이 녹고 골짜기들이 갈라지고"라고 말합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께서 고소하기 위해서 강림하시는 이유를 즉 “야곱의 허물을 인함이요 이스라엘 족속의 죄를 인함이니라(5절)"고 설명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특별한 이유도 없이 노발대발하는 이런 모습으로 오시지 않고, 오히려 그분의 진노는 틀림없이 이스라엘의 끊임없이 계속되는 허물과 죄에 의해서 촉발된 것입니다. “허물과 죄"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모든 진노가 사람의 죄의 결과가 아닙니까? 라고 할 정도로 단지 통상적인 이유에 붙여지는 좀 막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미가는 분명하게 일반화시키려 들지 않습니다. 즉 미가는 문제가 무엇인지 또 이 같은 악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강림하신다와 같은 강력한 표현은 결코 일반적이거나 불명확하지 않는 경우가 아니라, 매우 특별하고도 특수한 이유를 가진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허물과 죄”는 결코 모호한 개념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의 생활에서든지 아니면 개인의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거나 지적할 수 있는 특수한 행위나 사건들을 가르칩니다. 동일한 빛에서, 참된 예언이나 설교에서는 일반적인 상황에서 죄를 확실하게 한정시켜 결정하는데 있어서 정확해야만 합니다. 명확하지 않는 모호한 설교는 이점에 관해서 개혁적이지 못하며 (un-Reformed) 또 기본적으로 아무런 결과를 수확할 수 없습니다. 만일 설교가 구체적이라면, 분명히 회개도 구체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미가 자신이 던진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다음과 같이 구체화시켜 나갔습니다. “야곱의 허물이 무엇이뇨? 유다 집의 죄가 무엇이뇨?"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사마리아가 아니냐? 예루살렘이 아니냐?" (56절)
두 수도(首都): 여기에 두 수도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이 언급되었습니다. 이제 이 두도성은 두 왕국 즉 이스라엘(야곱)과 유다의 수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진짜문제 즉 병폐의 핵심이 이 두 도성 안에 놓여있다고 계시하셨습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의 죄와 유다의 허물들을 이해하는 열쇠가 있습니다. 두 나라는 이점에 관해서 똑같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기본적인 문제가 제각각 도성에 놓여 있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미가가 큰 두 도성을 바르게 평가하지 못했고 또 죄와 부패를 번식시키는 요람으로 비난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모레셋 평지의 작은 마을에서 온 시골 청년이었던 미가는 참으로 수도 안에서 목격했던 일들로 틀림없이 등골이 오싹해졌을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에 진리가 일부 들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시골에 사는 사람들(한적한 곳에 있는 농장이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농원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종종 거대한 도시 그 자체보다는 오히려 그 큰 도시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들로 인하여 충격을 받기도 합니다. 도시 사람들은 자기들 사이에 일어나는 잔학무도한 일들에 대해서 면역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미가가 의도한 것입니까, 즉 “하나님께서 대도시 생활에 대해서 진노하신 것입니까?" 여기서 도시와 시골을 대조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도회지와 지방을 대조한 것입니까?
실제로 여기에 심각하게 문제가 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은 거대한 도시가 아니라, 각 도성에 불과했다는 것을 강조해야만 합니다. 이 도성에 왕과 그 참모진들이 살고 있었고, 또 여기에서 국가 시책이 결정되고 또 우선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또한 여기에서 온 나라의 종교적인, 사회적인, 경제적인 맥박이 느껴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은 야곱과 유다의 모든 생활이 결정되고 조절되는 그야말로 핵심 요체입니다.
만일 단지 몇몇 허물과 죄라는 편파적인 사건들이 발생한 정도에 불과했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이 이 같은 깜짝 놀랄만한 노여움을 품고 오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이스라엘의 심장부(core)가 부패하여 하나님께서 토하실 것 같으셨습니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이 제각기 입안하는 정책들이나 방법들이나 방향들이 전적으로 부패하였고 또 사악했습니다.
미가는 시골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도시 생활 그 자체를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특별한 도성들이 정책들을 입안하여 집행하는 본부였기 때문에 공격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구절의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양식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미가는 질문을 던집니다. 진정한 예언적인 통찰력은 종종 문답형식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유다 집의" 그 허물이 무엇이냐? "의 집"이라는 문구는 대개가 귀족들이나 왕족들을 묘사할 때에 인용됩니다. 또 이 말은 여기에서 제도와 기구를 갖춘 공적인 왕국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집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 경우에는 미가가 유다의 귀족과 왕족들에 더욱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기본적인 문제가 무엇이며, 또 이 모든 일이 어디에서 출발되었습니까? 미가는 온 땅을 누비고 있는 온갖 종류의 죄와 사악한 태도를 목도하였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살고 있는 시골까지도 말입니다. 또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됩니다. 부패와 개악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이런 부패와 개악의 진원지를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며 또 반드시 규명되어야 합니다.
사마리아: 미가는 이 두 도성을 취하여, 또 이를 테면 시험거리로 삼아야 했습니다. 사마리아가 어딥니까? 북 이스라엘의 수도이며, 오므리 왕에 의해서 세워진 아름다운 큰 도시이며, 예루살렘을 적절하게 대신할 수 있는 높은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는 막강한 요새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연과 어우러진 미관과 장엄함이 통치자들과 거주민들에 의해서 품위가 떨어지고 또 그 면목이 잃게 되었습니다. 오므리는 선왕(先王)들보다 더욱 악하여졌고, 또 그의 아들 아합은 자기 아비보다 더 악하여져서 언약의 백성들을 바알을 섬기도록 유인하였습니다. 저는 여로보암 이후에 단과 벧엘의 금송아지와 같은 우상숭배를 하도록 부추겼다고 전에 말씀드렸습니다.
미가가 활동하던 시기에 여로보암 Ⅱ세가 치세하던 41년 동안 북 왕조에 얼마간 안정이 있었는데(여로보암의 재위 기간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력한 마지막 이스라엘 왕이었습니다. 여로보암 Ⅱ세의 재위 동안에, 하나님께서 주변의 적들로부터 이스라엘을 일시적으로 구원(relief)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로 돌아와 기쁘게 회개할 수 있는 멋진 마지막 기회를 잡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여로보암 Ⅱ세는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는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참으로 우연하거나 아니면 부차적이지 않고, 오히려 보장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으며 또 오래전의 현상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습니다. 이 일은 계속되는 개악의 과정이었으며, 여로보암 1세가 시작하였고, 우상숭배를 허용했던 여로보암 Ⅱ세에 의해서 실제 생활이 된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두 여로보암 왕 사이의 기간 동안에, 이들의 배교와 죄가 모든 것을 주관하고 또 아주 일반화되어버릴(common) 정도에 이르도록 자라버린 과정을 지켜볼 수 있습니다. 죄에서 벗어나기는커녕 오히려 죄 가운데로 더 깊숙이 빠져들었습니다.
비교적 안정되고 번성한 미가 당대에도, 북 이스라엘 왕조는 여호와 하나님께 순수하게 섬기려는 쪽으로 돌이키지 않았다는 것은 아주 분명합니다. 두 명의 여로보암 왕이 개혁을 하고자 몸부림치는 일말의 단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모든 생활의 영역에서 단지 끊임없이 계속되는 개악만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이 모든 개악이 사마리아가 지지해주고 보증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심장부이자 유력인사들이라고 할 수 있는 사마리아에 사는 통치자들, 성직자들, 정책 입안자들, 부유하고 영향력을 행세하는 사람들이 이 개악의 과정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적으로 후원해주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예루살렘의 상황은 사마리아의 상황과 비교할 때에 본질적으로 달랐습니까? 예루살렘이 사마리아에게 없는 어떤 이점이 있었습니까? 확실히 성전(聖殿)이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성전이 예배드리는데 전적으로 유지되고 있었습니까?
우리는 정확하게 미가 선지자가 언제 이 말씀을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만일 이 메시지가 요담의 재위 동인이라면, 우리는 요담(JOTHAM)이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 왕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담은 강력한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열왕기하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당이 제하여지지 않았더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즉 이 일은 유다 왕조의 대부분의 왕들에 의해서 무시되었습니다. 달리말해서 요담이 유다에 횡행하고 있는 개악된 예배(산당)를 묵인해버렸습니다. 만일이 사건이 아하스(AHAZ) 재위에 일어났다면, 미가의 맨 마지막 예언이 이 기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가는 7장 7절에서 자신의 활동을“내가 내 허물을 인하여 초태생 즉 맏아들을 드릴까?"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하스의 정치적인 수법이 능란할 뿐 아니라, 이방신에게 완전하게 굴종하여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였고, 앗수르의 다메섹의 제단을 그대로 본을 떠와서 여호와의 단을 만들었습니다. 이 모두가 너무 혐오감을 일으키게 해서 언급할 가치조차도 없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은 태연자약하게 우상을 숭배하는 도시였고 또 유혈이 낭자하였습니다. 수많은 미가의 예언들이 이 시기와 결부시키는 것은 상당히 적절합니다. 왜냐하면 이 기간 동안 예루살렘을 쉽게 사마리아와 비교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개악 과정 우리는 의심의 여지없이 “두 도성에는 계속되는 개악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명제를 수립할 수 있습니다. 귀족과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들은 의도적으로 백성들을 유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그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는데 적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평화의 도성이 유혈이 낭자한 도성이 되었습니다. 또 세멜(Shemer)의 언덕은 부정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죄와 사악함이 도성 안에서만 아니라, 온 땅(전국)에 넘쳐흘렀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과정이 유다와 이스라엘의 모든 영적인 생활을 궁극적으로 파괴시키려고 멈추지 않고 도도히 흘러갔습니다.
확실히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과정을 멈추시고자 시도하셨습니다. 매년 사마리아와 예루살렘 두 수도에, 선지자들이 임박한 심판을 경고했었고 또 백성들로 하여금 되돌아와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왕들과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듣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개악이 시작되었을 때에, 개악을 멈추게 하기엔 지극히 힘들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너무 빨라 자라고 또 너무도 빨리 생활 방식으로 자리를 잡도록 만들어버리기 때문에, 개악은 억제하기가 아주 힘이 듭니다. 개악의 과정에 사로잡히게 되면, 사실상 퇴락의 신속함을 거의 알아차리지도 못하게 됩니다. 때때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만이 확실하게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을 섬기는 것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이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시어, 백성들이 행동을 취하려고 할 때에, 자신들은 종종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고 또 마음에 내키지 않습니다. 또 이 개악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모든 표징이 땅에서 사라지게 될 그 다음 세대까지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이 개악에 대한 유일한 대답은 개혁이라는 완전한 방향전환 즉 단순하게 옛 것이며 또 견고한 토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만일 개악이 끊임없이 진행되는 과정이거나 항상 되돌리기 어려운 것이라면, 개혁도 반드시 계속되어야만 합니다. 종교개혁이란 단순히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또 새로운 방향으로 정책을 변경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이러한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개악이 극으로 치닫게 될 것이며, 또 확실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서 추방되어 외국에서 포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단지 개악 때문만 아니라, 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에로 돌아가려는]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고 또 하나님께 순수하게 예배드리고자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 가운데로 떨어진다는 것이 최악이 아니라, 오히려 죄 안에 머무는 것이 하나님께서 참으실 수 없는 일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말씀을 듣지 않고 고집부리는 행위를 결코 묵과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한 주요한 불평과 선택하신 백성들을 포로로 보내시는 첫번째 이유는 이스라엘이 개혁하기를 거절하는데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로 이스라엘과 유다를 경계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돌이켜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 나의 명령과 율례를 지키되 내가 너희 열조에게 명하고 또 나의 종 선지자들로 너희에게 전한 모든 율법대로 행하라 하셨으나, 저희가 듣지 아니하고 그 목을 굳게 하기를 그 열조가 하던 것과 같이 그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니라." (열왕기하 17:13-14)
오늘: 물론 그때에 비해서 오늘 우리 현실은 많이 다릅니다. “예루살렘”은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즉 영적인 성전이며(에베소서 2:21, 22), 어린양의 “시온산(계시록 14장)"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 우리 생활의 개혁은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그의 백성에게 선포되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부터 날마다 시작해야만 하고 또 계속 그 말씀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은 교회가 반드시 건전해야 하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순전하게 전달되어야 하고, 교리나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을 완전하게 섬기는 참되고 신실한 교회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생활이 계속해서 개혁되어야 한다는 사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오늘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이미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것과 유다에게 발생하였던 일들은 단지 우리를 경고하기 위한 틀림없는 본보기이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0:11). 이 모든 것이 더욱 더 필요하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던 모든 예언의성취로서 우리 주님께서 이제 성육신하셨고, 또 이제 친히 당신의 영을 통해서 “참 이스라엘인 모든 사람들을 당신에게로 모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장구한역사가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경은 완료되었으며, 또 하나님의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성경과 또 항상 개악이 시작되는 역사 속에서, 이런 현상은 우리 시대에도 동일한데, 개악이 하나님의 모든 참된 예배를 파괴시킬 때까지 어떻게 개악이 항상 계속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 어느 시점에] 한 번 신실한 그 자체가 계속해서 신실하리라고 보증할 수 없다는 것을 특별히 주목해야 합니다. 참된 신앙과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계속해서 투쟁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반복해서 “우리 생활 속에 어떤 개악이 있지는 않는가? 가정에서나 혼인생활에서나 가족 간에 가장 친밀한 관계 속에서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일탈한 것이 있지는 않는가? 어떤 관계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지는 않는가? 성경적이지 못한 습관이 있지는 않는가? 우리가 특정한 죄를 묵과하면서 살고자 하는 위험이 있지는 않는가? 우리의 태도가 여전히 모든 생활을 시작하고 또 무엇인가를 처음으로 계획하는 시점에서 먼저 하나님을 섬기고자 적극적으로 방향을 잡지 못한 것은 아닌가? 왜냐하면 우리의 태도는 우리의 방향을 결정하고, 우리 방향은 생활의 경로와 결과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를 자문해야 할 것입니다. [매일 이런 자문을 하여]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에로] 되돌아오거나, 그렇지 않으면 개악 깊숙이, 그것도 그 속도나 범위도 인식하지 못한 채로, 개악에 빠져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역시 그리스도인의 생활만 아니라, 삶의 다른 영역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끼칩니다. 교회의 공적인 예배 시에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어떤 일탈이 있지는 않습니까? 각 교회들이 함께 조직한 연대에서 교회들 간에 서로 교제가 진지하고도 신실하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혹은 비 성경적인 요인들이 교회들 한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제외하고는 “현 상태로" 유지되어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행습과 입장이 이 규범과 자로서 계속해서 체크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미가 선지자가 살았던 "포로 전" 시대에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구속 역사에서 진전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훨씬 더 많이 알고 있고 또 훨씬 더 많이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dispensation)는 다양한 방식으로 미가가 살던 당대보다 더 풍성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친히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누가복음 12:48)"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 부요함은 우리에게 더 많은 의무를 지웁니다. 우리는 이미 과거지사가 되어버린 많은 제도들과 의식법으로부터 이미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확실하게 이것들이 조금이라도 “쉬운 방식으로 완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진실로 영적이어야만 하며 또 하나님의 계시와 전적으로 일치해야 합니다.
만일 사람들이 이미 달란트와 풍성함에 따라서 피차 섬기도록 요구받았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에게 훨씬 더 많이 요구하실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우리가 “개혁교회 신자(Reformed)"로 살도록 요구받았다면, ---또 이렇게 하면서 우리는 성경적인 겸손을 반드시 유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주권적인 기쁨에서 [개혁교회 신자가]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개악의 상태로 빠져들어 가서, 계속적으로 자기 성찰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하기를 거절하고, 개악된 과정에 남아있고자 고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확실한 의로운 심판을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계속되는 개악은 언제나 확실한 심판으로 응답되었기 때문입니다.
Ⅱ. 확실한 심판의 과정
“고쳐지지 않는 상처들” 미가는 먼저 개악된 정책을 입안하고 불의를 시행한 주체로서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게 한 다음 잠시 동안 단지 사마리아에 대해서만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사마리아로 들의 무더기 같게 하고 포도 심을 동산 같게 하며 또 그 돌들을 골짜기에 쏟아 내리고 그 지대를 드러내리라.”(6절)이 사실적인 표현으로 미가는 계속해서 자만심에 차 있는 도성의 완전한 파괴에 대해서 상세하게 기술합니다. 그는 “이렇게 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식으로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정반대로 미가는 크게 슬퍼하고 비통해 하면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애통하고 애곡할 것이라.”(8절) 미가는 사마리아와 북 이스라엘이 확실하게 패망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이 일로 인하여 크게 슬퍼했습니다. 사마리아가 전적으로 반역하여 이스라엘의 원수로서 고통을 당할 때에, 미가 역시 고통스러웠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 죄로 인하여 깊은 수렁에 내던져질 때에 누가 기뻐하면서 환호성을 지를 수 있겠습니까? 미가 역시 죄된 존재였기에 돌을 던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미가는 근심과 애통함으로 사마리아의 임박한 파멸을 바라본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상처는 고칠 수 없도다."(9절) “사마리아의 상처" 혹은 자구적으로 “사마리아의 재앙들'인데, 그것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로운 심판으로 사마리아에게 고통을 받게 하실 모든 것을 복수를 사용하여 표현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비록 고통스럽긴 하지만, 육체의 상처나 아니면 전염병과 같이 치유할 수 있는 상처나 질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느리면서도 꾸준하게 생명 전체를 파괴시키면서 확산되는 치명적인 상처나 아니면 치유할 수 없는 질병에 걸리는 방식으로 시달릴 수도 있습니다.
사마리아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은 명백히 작지 않았고, 오히려 총체적인 것이었습니다. 사마리아는 전적으로 망가지고, 완전하게 황폐화 되어서, 사마리아가 서 있었던 기초까지 다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백성들은 강제로 외국 땅으로 끌려가게 되어, 이 지역에서 다시는 사람을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사마리아는 결코 이스라엘 민족의 수도라고 자랑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심판이 필시 너무 가혹하지 않느냐?"고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얼핏보면 이 심판이 상당히 모질게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사마리아가 스스로 이 모든 일을 초래했다고 말해야만 합니다. 사마리아가 자청하여 죄짓기를 고집함으로 치유 받을 수 없었습니다. 사마리아는 말씀과 하나님의 영의 치유하는 능력으로 "고침"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마리아의 죄는 사마리아 존립의 요체를 갉아 먹는 암과 같았습니다. 이스라엘에 뿌리박힌 죄된 생활양식에 대한 유일한 치유가 도저히 불가능하게 보여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심판을 야기 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첫 번째 조치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최후의 방책이었습니다. 오랫동안 하나님께서 참으시면서 관용을 베푸셨으나, 이제 "그 양이 찼습니다." 하나님께서 "충분하다"고 말하실 때에 언약 백성의 생활 속에 때가 임한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고의적으로 거부된다면, 최종적으로 그의 진노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고쳐지지 않는 죄된 태도는 치명적인 상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의 본질적인 성격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더디 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이 지나간 것이 아니라 단지 지체된 것 일뿐입니다. 그러나 항상 하나님의 심판은 정확하게 그 범죄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전적으로 의로우며 또 적합하게 형벌을 내리십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고쳐지지 않는다면, 고쳐지지 않은 상처에 타격을 입히게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대해: 이 심판은 사마리아 도성에 멈추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미가는계속해서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9b절)"고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분명히 유다 국경지역에 멈추지 않았고, 개악이 가시화된 곳에는, 결국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이며, 심지어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까지도 임하게 될 것입니다.
미가가 말하는 방식은 전시(戰時)에 전투를 연상시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적들의 군대와도 같이, 먼저 국경을 넘고, 그 다음 땅(유다)을 점령하고, 마지막으로 수도를포위하여 “나의 백성" 즉 예루살렘의 모든 문에 막을 것입니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미가의 근심이 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에 임박하고 있는 확실하고도 피할 수 없는 파멸인 하나님의 심판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애닮은 것은 그는 자기 나라의 국경을 가로질러 종국에는 예루살렘에 이르게 될 동일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가는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깊은 개인적인 연민과 임박한 여호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의 괴멸시키는 결과를 크게 두려워했다는 점에서 모든 다른 선지자들과 동일합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계적으로 옮겨 적는" 로봇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하게 인격적인 방식으로 감정으로나 영적으로 가담하였습니다. 미가는 심지어 다윗의 성이자 오실 다윗의 후손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임할 임박한 심판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생각하면서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루살렘에 임박한 심판을 선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미가의 소명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미가는 중요한 구분을 하나 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의 낫지 않는 상처 위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실제로서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는 종료된 문제이며, 막이 내렸다." 사마리아는 단지 남쪽 예루살렘을 향한 경고를 그림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언급했습니다. 예루살렘에게 아직 얼마간의 시간과 기회가 있습니다. 비록 시간이 쏜 살같이 지나간다고 할지라도, 그 양이 아직 다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미가는 이미 사마리아가 피할 수 없는 임박한 동일한 심판을 또한 두 번째로 이제 유다와 예루살렘에게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시적으로 “내 백성의 문”이라고 묘사되었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이스라엘의 심장부를 공격하고자 한다면, 또 여기가 실제적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생활이 시작되는 곳이기에, 예루살렘은 첫 번째 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문은 예루살렘 도성(나라)에 들어 올 수 있는 관문일 뿐 아니라, 공적인 업무들 즉 온갖 사업상의 문제들, 사회적인 문제들이 다루어지고, 심지어 어느 정도 종교적인 문제들이 그 문에서 확정되는 공적인 광장이었습니다. 이 문에서 도성의 공적인 생활이 계획되고 실현됩니다. 이런 측면에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문"인데, 왜냐하면 예루살렘에서 유다의 경제, 사회, 문화 생활이 [유다 전역으로] 번져나가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이 만일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게 된다면, --사마리아는 확실하게 심판을 당하게 될 것이지만- 남쪽의 다윗 왕국 또한 끝이 날 것입니다. 만일 이 문을 빼앗긴다면, 그 도성을 잃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만일 예루살렘이 함락당한다면, 유다도 끝입니다.
그래서 “내 백성의 문”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심장부로 가는 길은 예루살렘을 경유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성전이 있고, 또 거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엄위와 권능으로 좌정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세상 안에서 이스라엘의 입지와 중요성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는 예루살렘에 대한 모든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을 보는] 누구든지 당신의 백성들 한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임재를 틀림없이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그저 평범한 한 도시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친히[당신]드러내시고 또 사랑하시는 도성이며, 이 도성은 하나님의 도성(시편 87)으로서 지역적인 중요성만이 아니라, 모든 역사와 온 백성의 내력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곳입니다. 만일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여 파괴자의 손아귀로 빠져 들어가게 된다면, 구원의 역사가 위기를 맞게 됩니다. 예루살렘의 파멸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향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마리아가 파멸되면, 심각한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파멸한다면, 모든 것이 멈추어버리고 맙니다.
미가가 어떻게 자신이 연루되었는지를 드러내는 것에 대해서 주목해야 합니다. 미가는 “내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유다나 예루살렘과 아무런 상관이 없거나 아니면 초월해 있지 않고, 오히려 하나였고, 한 언약 안에 속해 있었고, 한 예배를 드리도록 부름을 받았고, 그러하기에 수치와 굴욕도 공유해야 했습니다. 미가는 마음이 갈기갈기 찢겨졌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예배에서 일탈된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의 백성이며, 또 여호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스스로 초래하는 것 역시 자기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신실한 자들만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몹시 그리스도의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교회가 타락할 때에 실제적으로 깊이 비탄해합니다.
예루살렘이 평안하지 않기 때문에, 유다 역시 평안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가는 다른 사람들이 보고 알고자 하지 않는 것 즉 여호와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사실을 보고 알았습니다. 사람의 개악과 하나님의 심판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개악이 계속된다면, 심판은 확정적입니다. 개악이 총체적이라면, 심판은 모든 것을 관통하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그의 백성의 문인 예루살렘"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탄원: 이 빛에서 우리는 미가의 모든 예언의 말씀이 하나의 큰 탄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내 백성은 여호와께로 되돌아갈지어다." 오래 참으시고 자비로우신 여호와와 같은 이가 없습니다. 그분은 끝까지 인내를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진노의 가공스러움도 여호와와 같은 이가 없습니다. 사마리아는 사실상 최후의 통첩을 받았습니다. 또 예루살렘에 대해서 한 시간 미치지 못하는 11시가 다 되어갑니다. “예루살렘아, 너무 늦기 전에 너희는 보지 못하느냐, 너희는 회개치 아니하느냐?" 이 일은 실제적으로 범상치 않습니다. 제가 지적했듯이, 미가 당대에 많은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때는 “예언의 전성기였습니다. 왜냐하면 참으로 11시가 다되었기 때문입니다.예언의 전성기라는 말은 실제로 교회 생활이 저급한 수준으로 전락되었다는 말과 상응합니다.
사람들은 이 개악의 진행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멀리 떨어져있어서 임박한 심판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가의 멸망에 관한 예언을 믿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귀를 닫고 돌아서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하나님께서 최후까지 “예루살렘아, 사마리아를 보라. 그리고 너 자신을 살피라. 너희가 시대의 표적으로부터 교훈을 받지 않는다면, 또 너희가 계속적으로 개악하고 개악가운데 발을 당구고 있는 다면, 나의 심판이 확실하게 임할 것이니라”고 외치시고 또 경고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사마리아가 먼저 돌아서야하고, 그 다음은 예루살렘이 따라 돌아서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죄된 생활을 따랐습니다. 즉 이 말은 심판도 따른다는 말입니다.
시간문제? 이 말은 여러분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정통(바른 교리 위에 서 있는) 교회가 불과 몇 년 뒤에 다른 교회 즉 자유주의 교회로 전락되었다는 말을 듣곤 합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 모든 것은 동일한 경로를 밟습니다. 예루살렘이 사마리아 단지 몇 발자국 뒤에 있었던 것과 같이, 우리 또한 예를 들면 지금 다른 “개혁교회" 뒤에 단지 몇 보 뒤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같은 진술 안에 진리가 있습니다. 시간은 많은 상처를 치유합니다. 그러나 시간은 또한 악화시키든 개선시키든 변화를 가져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난날에 전 영역에 영향을 끼쳤던 많은 교회들이 단지 기독교의 흔적만 남기고 사라져버렸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로 하여금 안팎으로 눈을 부릅뜨고 경계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모든 개악이 시작되는 지점 즉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라도 더 하거나 아니면 빼서, 이로부터 벗어나는 일보(一步)를 주시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나를 비껴갈 것이고, 우리의 특권이 자동적으로 계속될 것이라고 상상하지 마십시오. 여호와께서는 당신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선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죄 가운데서 고집을 피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반해서 행하고, 감사하는 구체적인 열매를 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심판이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임한 것과 같이,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엄습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보다 좀 더 일찍 방황했던 다른 사람에게 먼저 임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을 비껴가지 않을 것입니다. 개혁교회라는 사실 그 자체가 우리를 그 길 위에 머물게 할 것이라고 보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항상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이 교회에 산 지체로서 남아 있게 될는지에 관한 것입니다(주의 날 제 21 주일).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이 우리가 이 은혜를 상실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개혁: 거듭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모든 일에 더 진지해야 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은 여호와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로 파멸되었습니다. 그분은 두도성과 그들의 죄를 싹 쓸어버리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심판 안에서, 동일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강력한 개혁을 일구어내십니다. 여호와께서 죄와 불순종의 포로에서 신실한 남은 자들을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남은 자들을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새롭게 섬길 수 있도록 자유케 하시고 새롭게 만드셨습니다(re-formed). 이 방식으로 여호와께서 오실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셨고, 그리고 그분은 인격과 사역으로 완전하게 자신을 드리셔서 하나님의 모든 심판을 짊어지셔서, 오늘 우리가 그의 영과 말씀을 통해서 감사가 넘치는 섬김으로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생활로 개혁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미가는 단순히 계속되는 개악과 확실한 심판만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이것이 진실하다면, 그가 선포한 예언의 말씀은 단지 절망만 일으켰을 것입니다. 미가는 또한 어떻게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심판과 진노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영화로움으로 꾸준하고도 강력하게 역사하시는지를 보았습니다. 이 지상의 예루살렘에서, 이 하나님께서 거룩한 도성 즉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지은 새로운 성전을 짓고 계셨습니다.
그때나 오늘이나 미가의 예언의 말씀은 이런 하나님의 인격적인 말씀으로 견고하게서 있습니다. 이 말씀 즉 여호와께서 미가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신 바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이 말씀으로] 경고를 받고 경책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개악은 심판을 이끌어냅니다. 자비도 끝이 없을 뿐 아니라, 가공스러울 진노하심에도 하나님과 같은 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격렬하게 심판하심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같은 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개혁을 일구어 내시고 또 이스라엘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한 축복으로 이끄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최후의 심판을 짊어 지졌고 또 지금부터 영원토록 충만한 구원을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