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아에서 가져온 정용섭 목사님의 요한계시록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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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요한계시록 (11)
3: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도둑 같이’ 이른다는 표현은 공생애 중에 예수께서 가르치신 비유에도 나옵니다. 요한은 교회에 전승되던 그 비유를 기억하고 있다가 이 구절을 기록했을 겁니다. 마 24:43절입니다.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바울도 비슷한 내용으로 말한 적이 있습니다.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살전 5:2) 이런 상황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종종 일어납니다. 갑자기 암 선고를 받기도 하고,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기도 하고, 자식을 잃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경험하는 순간이나 시적 영감을 경험하는 순간도 졸지에 들이닥칩니다. 성경 말씀을 깊이 깨닫는 순간도 그와 같습니다. 사실은 갑자기 일어나는 게 아니라 이미 그런 조짐이 있었으나 사람이 느끼지 못했을 뿐이겠지요. 우리는 미래에 대해서 완전히 무능력한 존재들이니까요.
도둑같이 그 순간이 온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우리를 두렵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안심시키기도 합니다. 그 순간이 우리의 계산서대로 오는 게 아니니까 우리는 미리 걱정하지 말고 맞을 준비만 하면 됩니다. 그 준비가 바로 위 구절이 말하는 ‘일깨지’(watch)입니다. 이미 2절에서 ‘일깨어’라고 했습니다. 정신 차리라는 뜻입니다. 새번역은 이렇습니다. “만일 네가 깨어 있지 않으면 … ”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게 깨어 있는 것일까요? 가장 원초적인 대답을 찾는다면, 죽음이 눈앞에 닥쳤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정신 차림의 시작이겠지요. 그 죽음을 우리의 마지막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이라는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사람이야말로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게 실제로 가능한가요? 어떻게 우리는 그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처음부터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는 질책을 당한 사데 교회에도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있었다고 하네요. 아무리 세상이 세속화해도 거기에 휩쓸리지 않는 소수의 사람은 있는 법입니다. 아무리 많은 교회가 본질을 잃어도 여전히 본질에 천착하는 적은 수의 교회는 있는 법입니다. 그들이 누군지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으나 위기가 닥치면 드러납니다. 평소에 믿음이 하늘까지 뻗친 듯이 큰소리치던 목사가 불치병에 걸렸다 해서 하나님을 부정할 수도 있고, 평소에 교인들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 교인이 죽음 앞에서 더 모범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흰옷은 주님의 재림으로 실현될 영광스러운 생명을 가리킵니다. 영광스러운 생명이라는 표현도 손에 잘 잡히지 않습니다. 손에 잘 잡히지 않는 게 어디 이런 성경과 신학 개념뿐이던가요. 첨단 물리학의 정점인 양자역학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하더군요. 양자가 작동해서 나오는 결과만 과학적으로 측정할 뿐이지 그 이유는 증명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양자의 세계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부정되지 않듯이 영광스러운 생명도 어떤 이들이 실감하지 못한다고 해서 부정되지 않습니다. 손에 잡히는 것만이 실재한다는 생각은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를 앞에서 시인하리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생명책’이 여기에 등장합니다. 바울은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빌 4:3)라고 썼고, 계 20:12절에는 “또 다른 책이 있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리니”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생명책은 그야말로 상징이고 은유입니다. 이를 마치 족보처럼 실제의 기록물로 보면 곤란합니다. 자칫 신자들을 위협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목사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생명책에서 지워질 수 있다는 식으로 위협합니다. 그런 위협에 속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위협하는 분이 아닙니다. 위협적인 표현이 성경에 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가리키는 반어법입니다. 마라톤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당신은 인생이 무언지를 모르고 사는 거야.’라고 말하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던 사람은 그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게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압니다. 그게 바로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걱정에 떨어지지 않아도 됩니다. 바울의 다음 말씀을 기억해두십시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
3: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귀 있는 자’라는 표현은 고대 유대인들의 관용어로 보입니다. 예수께서도 이런 표현을 자주 쓰셨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1:15, 막 4:9, 23) 들을 귀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는 귀가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당연합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 내라.”(사 43:8) 그렇다면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겠지요. 시편 기자는 열국의 우상을 이렇게 조롱합니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들의 입에는 아무 호흡도 없나니 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것과 같으리로다.”(시 135:16~18)
다른 운동도 마찬가지인데, 제가 평생 즐겼던 테니스 운동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라켓을 휘두를 때 힘을 빼는 일입니다. 코치나 선배가 “힘을 빼세요.”라고 아무리 말해도 그걸 알아듣지 못하는 동호인들이 제법 많습니다. 자기 딴에는 힘을 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힘을 줍니다. 힘을 빼는 거와 주는 것의 미묘한 차이를 느끼지 못합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인 셈입니다. 우리의 삶과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요일 4:8)라는 말씀이나 하나님의 선한 능력이 우리를 감싸고 있다는 말씀도 그냥 귀에 들리는 게 아닙니다. 잠결에 무슨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듯한 수준에서 조금씩 더 진도를 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에 소리를 더 분명하게 들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되겠지요. 이게 억지로 되는 게 아니라서 그리스도교에서는 ‘은혜’를 구하라고 말합니다.
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이제 여섯 번째로 요한은 빌라델비아교회에 편지하는 명령을 듣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빌라델비아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는 겁니다. 그 사자는 헬라어 ‘ἀγγέλος’의 번역입니다. 앙겔로스는 angel(천사), messenger(메신저)라는 뜻입니다. 요한이 이 편지를 직접 해당 교회에 들고 가는 게 아니라 중간에 그런 역할을 해줄 사람이 있어서 이렇게 표현한 것일지 모르겠군요. 아니면 당시의 관용적인 표현일 수도 있고요.
그에게 말씀을 주시는 이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입니다. 예수를 다윗의 후손으로 보는 전통이 교회에 있었기에 이런 표현이 가능하겠지요.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철저히 구약을 배경으로 세워나갔습니다. 구약을 배격하려는 시도도 적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구약을 그리스도교의 경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게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겁니다. 잘한 결정입니다. 구약과 유대교 전통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극복했습니다. 바울도 사도행전에서 자신이 유대 전통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했습니다. 예수를 선지자로만 보는 유대교와 메시아로 보는 그리스도교 사이에 신앙적인 대화가 가능할까요? 어느 정도로 가능할까요? 더 나아가서 예수를 유대교와 똑같이 선지자로 보는 이슬람교와는 어떤 관계를 설정해야 할까요?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모두 유일신 신앙을 견지하고 모세오경을 경전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차이점은 차이점으로 놓아두고 공통점을 넓혀가는 작업만이라도 이어가야 하지 않을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