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종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종교의 자유”에 관한 일반적인 논의를
함이 순서일 것이다.
대부분의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우리 헌법은 규정하고 있다.
헌법제20조(종교의 자유) 1.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2.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
(1) 종교의 개념
종교의 개념을 一義적으로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절대자(신과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과 그에 대한 귀의, 내세와 피안에 대한 우주관적인 확신과 영
혼의 구원에 관한 신념을 포함한다. 이 개념 설정은 주로 기독교를 염두에 둔 것
이다.
톨스토이는 그의 종교론에서,“내게 있어서 종교란, 우리들 각자의 의식에 눈 뜨
는 場인 우주현상의 배후 내지 그것을 초월한 궁극적 실재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뜻한다.”
그러나 종교에 관한 위의 견해가 만인에게 옳은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종교의 의미를 규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천인천색, 만인만색으로 규정되는 것이 종교의
개념인 이상, 내 개인의 의사를 여기에 표출한 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2) 종교의 자유의 내용
종교의 자유에는,
(가) 신앙의 자유
“신앙을 가지는 자유”와 “신앙을 가지지 않는 자유”
신앙선택, 신앙변경(개종), 신앙포기, 신앙고백, 신앙
침묵의 자유 등이 이에 속한다.
(나) 종교활동의 자유
1) 종교적 행사(行事), 의식(儀式)의 자유
종교상의 예배, 기도, 종교적 모임, 의식 행사를 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2) 선교와 종교교육의 자유
3) 종교적 집회결사의 자유
(3) 종교의 자유의 주체
종교의 자유의 주체는 “국민”이 아니라, “인간”이다. 따라서 외국인도
종교의 자유는 철저하게 보장 되어야 한다.
(4) 국교부인과 정교분리의 원칙
국가는 어떤 특정종교를 국교로 인정할 수 없으며,종교적으로 중립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며, 국가가 종교에 간섭하거나, 또는 특정종교를
우대하거나 박해하여서는 안 되고, 또한 종교도 국가에 대하여 종교적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국교를
인정하는, 예외적인 나라(예컨대, 영국)도 있지만, 대다수의 나라는 국교를
부인한다.
한 때, 어느 지방자치단체의 장이, “그 지방자치단체를 하느님께 봉헌한다”
는 망언을 한 적이 있었다. 참으로 서글픈 우리의 정치수준이다.
(5)종교의 자유의 형법적 보호
종교범죄에 대한 형법적 보호를 어느 범위에서 인정할 것인가는 종교적, 세계관적
가치의 담당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결정되지 않을 수 없다. 국가와 종교가 일치하는
때에는 종교에 대한 범죄는 동시에 국가에 대한 범죄로 되어 무겁게 처벌받지만, 국
교 이외의 종교는 이에 의해 보호받을 수 없게 된다.
우리 나라는 국교를 부인하고 있으므로, 국가가 일정한 한계에서 종교를 형법에 의하여
보호하게 된다. 이에 관한 형법규정으로는, 형법 제158조(장례식,제사,예배, 설교방해죄
등), 형법제159조(사체, 유골, 유발오욕죄), 형법제160조(분묘발굴죄), 형법제161,162조
(사체 등 손괴, 유기,은익영득죄), 형법제163조(변사체검시방해죄) 등이 있다.
최근 인터넷 언론 등 일부 언론에서 제기되고 있는, 국민의 사랑을 온 몸에 받던 정치
인, “노 회찬의 죽음”을 둘러싸고, 자살설과 타살설이 대립하고 있는 바, 만약 타살
설의 입장에 선다면, 위 형법규정들의 적용여부가 논의 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종교의 자유에 대해, 대략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는 국민의 1인인 동시에, 한
인간이기도 하기에, 종교의 자유를 가지고 있음은 당연하다. 정교분리원칙은 이해하지만
정치가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소승은 의식적으로 정치에 관한
소회를 단편적으로 피력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
그러나 소승이 비록 정치적인 견해를 피력하는 때에도, “승려”라는 신분을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음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정치적 견해를 얘기하는 그 근저에는 대승불교의
핵심사상인 “보살정신”이 바위처럼 언제나 굳건히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이제 “개종(改宗)에 관하여 논의해 보자.
내가 거주하는 곳에는, 거의 기독교 광신도수준(?)이라고 생각되는, 가까운 친척형제자매들이 살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다른 종교의 길을 가는 사람, 그것도 타종교의 전문 수행자인 “늙은 불교승려”에게 기독교(개신교)로 개종하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불교승려가 기독교 신자에게, 자신의 개종을 명시적으로, 미리 의논한다든가,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종교에 관하여 깊은 회의감을 드러낸 경우와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한, 정상적인
판단능력을 가진, 염치 있는 인간이라면, 80줄에 들어선 늙은 승려에게, 어떻게 감히 기독교로의 개종을 권유한다는 말인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나에게 개종을 집요하게 권유하는 그들을 광신도로 규정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6.25 한국전쟁 이후, 나는 그들을 몇십년 간 만난 적이 없지만, 풍문으로는 그들의 행태에
대해서 대충 알고 있었다. 내가 경상도를 떠나, 고향땅인 영월 쪽에서 내 마지막 삶을 살고자 했던 것은, 인간의 정리로선 이해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수구초심(수구初心)이 그런 의
미가 아니겠는가? 여우도 죽을 때는, 그가 태어난 고향 언덕을 향하여, 머리를 둔다는 데,
하물며 인간임에랴...!
부처님께서도 마지막 유행길을 북녘으로 잡았던 것은, 어쩌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부처님의 마지막 여행길의 북쪽 끝에는 부처님의 고향이 있었지만, 부처님은 끝내 고향땅에 다다르지 못한 채, 80평생의 떠돌이 인생을 길 위에서 마감하지 않았던가?
至心歸命禮 尸羅角城 受 單供於純陀 沙羅鶴樹 示 雙趺於迦葉
摩耶痛泣 梵衆悲哀 雙林涅槃相 是我本師 釋迦牟尼佛...!
(지심귀명례 시라각성 수 단공어순타 사라학수 시 쌍부어가섭
마야통읍 범중비애 쌍림 열반상 시아본사 서가모니불...!)
나는 경상도 땅을 떠나기 얼마 전에, 친척 아우에게, 몇십년 만에 전화를 걸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기독신앙은 대단했다. 전화를 건 사람이 “나”라는 것이 확인되자 말자, 그는 다짜고짜,
“형이(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미리 예상은 했었지만,
이 정도까지라고는 상상도 못했기에, 나는 그저 어안이벙벙했다.
겨우 아우의 말하는 틈을 비집고 들어가, 나는 이렇게 말했다.
종교 얘기는 오늘로 끝내자! 혹시 언젠가 상면하는 날이 있더라도.....
경상도를 떠난 다음, 나는 내 삶의 마지막 종착지로 고향 땅, 영월로 가고자 했지만,
뜻대로 되는 세상사가 아니지 않은가...? 루쏘의“에밀”어딘가에 이런 말이 있다.
“누구나 고향에서 삶을 마감하고 싶어하지만,
때로는 고향 아닌 타향에서 살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내 경우가 그런 경우”라고 스스로 위안하면서, 고향 접경지역인 이곳에 온지, 벌써
4년이 넘었다. 그러나, 몇년 전, 이곳에 온지 1년이 되도록, 친척 아우에게 전화연락도 안 했다.
그를 만나면 또 개종하라는 말을 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끝내 사촌간의 우애에 이끌려, 전화를 했더니, 또 “개종얘기”를 하지 않겠는가... 참으로 이처럼 답답한 일이 어찌 흔한 일이겠는가! 그 친척 아우의 나이도 내년이면 77세가 되는데...
이곳으로 온 지가 4년이 넘었지만, 친척 아우를 만난 것은 2번 뿐이다. 물론 만날 때마다,
그 아우는 걔종을 권유하곤 했다. 며칠 전, 초인종이 울렸다. 나를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 터라, 누군가 하고 나가봤더니. 뜻 밖에도 대문 밖에서,
“오빠, 저, 영희예요.”라는, 상기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누이의 나이도 60대 초반이 훨씬 넘은 나이라고 했다. 평생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말로는 많이 듣던, 그러기에 잠재의식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아련히 그리운 누이였다.
그 누이 뒤에는, 나에게 늘 개종을 권하던 친척 아우 부부가 숨은 듯 서
있었다.
반가운 마음 일색으로 그들을 방으로 안내했음은 당연한 일...
또 교회 이야기를 하는 아우... 좌우간 그간의 안부인사가 끝났다.
누이가 말하기를, 밖에서 식사나 한 끼 하자고 하길래, 반가운 마음에
마음에 따라 나섰다.
식사 중에도 몇 번인가 그 친척 아우의 교회얘기는 이어졌지만,누이는
교회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식사하러 가기 전, 누이가 봉투에 든 책 한 권을 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오빠, 제가 온 성의을 다해 드리는 책이니,
저를 생각하셔서 잘 읽어주세요!”책은 대봉투에 들어 있었다.
순간, 뇌리를 스치는 생각, “이거 교회에 관한 책이구나...!”
함께 간 사람들 3인은 시킨 식사를 반도 먹지 않았지만, 나는 깨끗이 그릇을 비웠다.
귀한 음식을 남겨서야 되겠는가...?
억지 식사를 한 끼 하고, 집으로 돌아온 후, 누이가 남긴 책을 보았다.
물론 교회에 관한 책이었다. 책 제목은 《성경은 사실이다》였다.
제목이 그럴진대, 내용은 다 아는 사실일 것이기에,
그대로 책 쌌던 큰 봉투에 넣어두었다.
누이가 왔던 날,반가운 마음에 빠져, 허술한 옷 차림으로 따라 나섰다가 심한 감기에 걸렸다. 그들이 다녀간 다음 다음 날(12월 18일) 누이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그녀의 후의를 생각해서라도 내 명확한 의사를 나타내는 것이 도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다음이
그녀에게 보낸, 메시지 전문이다.
《영희야...!
엇그제 너와 처음 만난 날, 반가운 마음에 허술한 차람으로 외출했다가
잠깐 방심한 사이에 심한 감기가 왔구나.
네가 아끼는 책이기에, 나도 소중히 여긴다. 책 제목이 “성경은 사실이다.”이구나.
너희들 말 뜻대로 부연설명한다면, “성경은 길이요, 생명이다.”쯤 되겠구나.
기독교 만이 세상 유일의 진리라고 믿는 사람들은 흔히들 “기독교는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고들 말한다.
인간생활 전체를 얘기할 때, 보통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라고 말하며, 사회에
존재하는 종교현상은 문화영역의 한 분과임이 분명하다. 이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다.
우리 역사순서로 따질 때, 대표적 종교가 불교와 기독교가 있다. 또 이슬람교(마호멧교)
무교(무속신앙), 힌두교, 자이나교도 있다.
불교에도 소승불교와 대승불교가 있고, 기독교에도 루터의 종교개혁을 기준으로 구교와
신교가 있고, 신교에도 무수한 종파가 있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 온 지는 1600여 년
이 지났고, 기독교는 길게 잡아야 200여년 정도이고, 개신교 기준으로는 100년 남짓하다.
모든 종교에는 그 나름이 교리가 있고 계율이 있다. 10계명은 기독신자들에게나 통용되는
것이고, 불교계율은 불교신자들에게만 그 준수를 요구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종교
의 자유가 있다. 타인이나 공중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대한민국 국민은 어떤 종교를
가지든지 자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네가 믿는 종교 만이 진리이고 타인의 종교
는 그릇되었다고 매도한다. 그 대표적 슬로건이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섬찍한 문구
다.
서양역사의 대부분은 전쟁의 역사이고, 그 중심에는 늘 기독교가 있어왔다. 기독교 최고의
황금률은, “원수를 사랑하라.”와 “왼 뺨을 때리면, 오른 뺨도 내주라.”는 계율이라고
생각한다. 불교에도 그런 내용의 말이 있다. “인욕제일도 선수제아인.”- “도에 이르는
데는 참는 게 제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아상, 인상을 버려라.”는 수행지침이다.
글자 제한으로, 잠시 멈춘다.
영희야, 내 것이 중하고 귀한 것이라고 생각된다면, 타인의 사상이나 생각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타인에게 시키지 말라!”는, 논
어의 말씀은 만고불이의 진리가 아니냐? 세상 사람 모두가 이처럼 생각할 때, 세상엔 평화
가 오리라.
나는 지금 감기 때문에 몹시 불편하다. 너는 나보다는 나이가 어리지만, 그래도 이미 인생
의 후반부에 들어섰다. 네 삶의 후반이 아름답기를 기원한다. 겨울이 점점 깊어간다. 겨울
이 오면, 봄도 머지 않겠느냐?
If Winter comes,
Can Spring be far behind?
- Shelley, Ode to the West Wind(쉘리의 西風賦에서)
같은 하늘 아래에서
덧없는 나그네 합장》
이렇게 긴 문자 메시지를 쓰기는 난생 처음이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답장이 왔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로 시작되는 장황하기
그지 없는 성경구절의 인용이 끝난 후, 이런 말을 덧붙였다.
오빠,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기가 심하게 걸리셨다니 죄송합니다.
조리 잘 하시고 쾌차하식를 기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여기에 답장을 보냈다.
《“그래 잘 읽었다. 세상과 우리 삶을 통찰하는 눈은, 보는 자의 시각에 따라 다르다.
진심으로 부탁하노니, 기독의 시각으로만, 세상을 재단하면, 안 된다. 앞으론 더 이상
성경귀절을 인용하지 않아도 된다. 높이 오르는 갈매기가 세상을 더 넓게 보듯이, 너도
푸른 창공을 나르는 대 자유인이 되거라.종교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내자!
잘 있거라.》
휴... 하고 한 숨 돌리고 있는데, 또 답장이 왔다.
《“저는 오빠가 이곳으로 이사오셨다는 얘기를 듣고,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 했습니다. 오빠! 마음을 비우시고, 제가 드린 책을 다시 자세히 읽어
보세요. 반드시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알게 되고, 좋은 날을 맞이하실
거에요.”》
나는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답장을 썼다.
《“참, 너도 어지간 하구나. 내 고향 땅이 영월 아니냐? 수구초심이라고,
여우도 죽을 땐, 고향 언덕을 향하고 죽는다고 하지 않느냐? 나도 고향이
그리워 이리로 왔단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에 있어서
일방적으로 이스라엘만 두둔해선 안 된다.
더 이상 내 삶에 대해서 왈가왈부 하지 말기 바란다.
나는 아무 때 가도 후회없이 갈 날을 고대하며 살고 있다.
더이상 나에게 교회 얘기 하지 말기 바란다.”》
이 후로는, 친척들로부터도, 영희 누이에게서도, 아무 연락이 오지 않고 있다.
몇마디 첨언하면서 지루한 말을 끝맺을까 한다.
오늘의 불교수행자들, 특히 승려들은 자기 소임을 다 하고 있을까? 나아가 스스로
불자라고 자처하는 재가불자들은 어떠한가? 불교포교를 목적으로 설립한 인터넷 상
의 모임들, 소위 까페라고 통칭되고 있는 단체들의 실상은 어떠한가?
모든 종교의 궁극은 “나눔(보시)의 실천”에 있다는 것이 불변의 내 신념이다.
나눔의 실천이 없는 깨달음(성불)은 공허한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것이 지금까지
내가 가꾸고 다듬어 온 신념의 전부이다.
나눔에 있어서는 어떤 조건도 있어선 안 된다. 바로 “응무소주 이행기심, 응무소주
행어보시(應無所住 而行其心, 應無所住 行於布施)”이다. 나는 지금까지 참가했던 까페
에서 여러 번 강퇴를 당했다. 나를 강퇴시킨 그들의 의도는 명백하다.
나를 강퇴시킨 이유는 “나로 인해 그들의 세속적, 금전적 이익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불자들 사이에 꽤 많이 알려진, 수행자라는 자들도, 탐욕스럽기는 매 한 가지다. 나는
이들에게 저항했고, 그들은 이미 얻어진 기득권을 바탕으로 나를 배척했다.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 이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던가?
소위 “종교까페”라는 곳들... 그들 중 불교까페들 가운데,
순수한 구도의 길을 가는 까페가,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불자라고 스스로 말하는 사람들 중,
참다운 불자는 몇 명 쯤이나 될까?
아직도 감기 기운이 많이 남이 있다.
감기가 빨리 떠나지 않는 이유는 노쇄함에 있을 것이다.
그래도 사는 날까지는 열심히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바람직한 불교수행자(특히 승려)의 모습》은 어떠 해야 할까?
(1) 어떤 종류의 물욕도 가져선 안 된다.
(2) 불교의 계율은 가급적 지켜야 하지만, 계율의 노예가 되진 말라.
지범개차(持犯開遮)가 자유로운 경지에 오르도록 노력하되,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의 경지를 언제나 추구하라.
승려가 가져야 할 마음 가짐이 어찌 이것 뿐이랴...?
매 순간 순간, 조심하여야 할 것이다!!
화엄성중이시여,
언제나 굽어 살피소서!!
가야산 대덕사
기신지은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