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한국의 불교역사
1. 신라(新羅)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것은 고구려 17대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372)이다. 이로부터 12년뒤에는 15대 백제 침류왕(枕流王) 원년(384)에 전해졌고, 폐쇄적이었던 신라는 23대 법흥왕(法興王) 14년(527)에야 불교를 받아들였다.
신라가 이렇게 늦게 불교가 전해진 것은, 첫째 중국과는 지리적으로 가장 멀었고 둘째는 신라인들은 기질이 완강했고 외래사상이나 신앙을 받아들이는데 신중했다.
그러나 일단 수입되고 난 다음 수용하기에는 매우 적극적이었다.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150년 가량 늦게 전해진 신라가 삼국 중 가장 발전했다. 이는 신라인의 기질의 원인인가 생각된다.
이 같은 바탕 위에서 24대 진흥왕(眞興王)과 같이 불교를 보호한 왕과 원광(圓光), 자장(慈藏), 의상(義湘) 등 수많은 고승들이 출현하여 신라불교는 발전했다.
특히 진흥왕은 우리나라 역사상 불교를 보호한 대표적 왕으로 만년에는 왕위를 물려주고 왕후와 함께 삭발했다. 화랑제도를 창설하여 인재를 양성했고 불교정신을 통해 나라를 훌륭하게 다스리는 데도 큰 업적을 남겼다. 국민들의 출가를 승인했고 흥륜사 황룡사 같은 큰 절을 지었다. 또 고구려의 혜량(惠亮)스님을 모셔와 승통(僧統)으로서 교단을 맡아 통솔케 하는 등 불교의 기초를 잘 다져주었다.
한편 스님들에게 중국 유학을 장려하고 그들이 귀국할 때에는 불사리나 경전 등을 많이 가져 왔다. 그래서 신라 불교는 날이 갈수록 내용이 풍부하고 충실해 졌다. 이와 같이 신라 불교는 진흥왕에 의해 국교로서 손색없는 토대를 굳히게 되었다. 게다가 원광 자장 원효 의상과 같은 대 사문이 속출하여, 삼국 중 가장 불교가 앞선 나라로 발전하였다.
당시의 큰 스님들은 불도를 닦아 학덕을 높이 쌓았을 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와 국민들의 생활에 크게 영향을 끼침으로써 나라의 발전과 국민정신의 단결과 순화에 크게 이바지 했다. 원효 스님은 불교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뛰어나 중국에서는 해동(海東)의 석가(釋迦)라고 찬양하였다. 또 무애 박을 들고서 노래하고 춘추며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불법을 알림으로써 가난뱅이 거지나 더벅머리 아이들까지도 모두 불교를 알게 되었다. 왕실과 귀족 중심이 었던 불교를 귀천의 차별 없이 온 국민이 다 믿고 받들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신라 불교는 온 국민의 불교가 되었다. 당시의 신라인들은 불교를 개인만의 안락을 비는 데 그치지 않았다. 불교를 믿는 것이 곧 나라를 위하는 길이고 나라를 위하는 길이 곧 불교를 믿는 것이라고 호국적 신앙 정신을 바탕으로 더욱 이상적 불교 국가를 만들려고 하였다.
이는 신라인들이 이상으로 그리던 국가사회를 불국사(佛國寺)나 황룡사(黃龍寺) 9층 탑으로 표현해 놓았다 .
신라인들의 생각이 이러했기 때문에 국민의 정신적인 단결을 이룩했고 이를 바탕으로 마침내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불교문화 (佛敎文化)가 찬란하게 꽃피웠던 것이다.
2. 고려(高麗)
태봉(泰封)국의 왕 궁예(弓裔)의 신하였던 왕건(王建)이 여러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고려의 태조가 되었다. 왕건은 나말(羅末)의 고승 도선(道詵827ㅡ898)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도선은 사탑비보(寺塔裨補)사상으로 난세를 구하고자 한 스님이었다.
왕건은 왕위에 오르자 고려국을 세우게 된 것은 부처님의 보살핌의 덕이라고 확신하고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였다. 아울러 국운의 융성과 국민의 안녕을 위하여 불교 보호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태조의 정신이 그대로 역대 왕들에게 이어져 마지막 공양왕(恭讓王)에 이르기 까지 불교를 믿지 않는 왕이 없었으며 여러 가지 불교 행사가 성행했다.
고려는 신라의 불교를 그대로 이어받아 처음부터 불교국가로 출발하였으므로 불교에 관한 모든 것이 전 시대와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밖으로 외적의 침입이 잦아지고 나라 안에 어지러운 일이 잇따라 일어나자 부처님의 가호를 비는 행사가 잦아졌다.
고려 시대에 부처님의 힘을 빌어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대표적인 것은 두 차례에 걸쳐 대장경을 만든 일이다. 첫 번째는 제8대 현종(顯宗 1010ㅡ1031) 때였고 두 번째는 제23대 고종(高宗1214ㅡ1259) 때였다.
첫 번째는 현종 원년에 침입한 거란군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었다. 거란의 성종(聖宗)이 의주와 신천을 빼앗고 평양성을 포위하자 법언(法言 ?ㅡ1010) 등 스님들 까지 나서서 적을 물리쳤으나 외적은 도성인 개성까지 침입하였다. 왕은 나주로 피난가면서 국난을 극복하고 외적을 물리칠 힘을 부처님께 기원하기 위해 대장경판조성(大藏經板造成)을 착수하였다.
그 뒤 적이 퇴각하고 나서도 9대 덕종(德宗), 10대 정종(靖宗)을 거쳐 11대 문종(文宗)에 이르기까지 약 40년간에 걸쳐 대장경의 판각을 완성하였다. 모두 1,106부 5,048권이었다. 이것을 고려 구 장경, 또는 초조장경(高麗初彫藏經)이라 한다. 이 대장경판은 대구 팔공산(八公山) 부인사(符仁寺)에 봉안하고 나라를 지키는 상징이 되었으며 아울러 불교 신앙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러나 23대 고종(高宗) 19년에 몽고군이 쳐들어와 경주 황룡사 9층탑과 함께 불탔다.
고종은 몽고군의 침입을 피하여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으나 부인사에 있던 대장경판이 몽고군에 의해 소실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대장경판을 판각하기로 했다. 부처님의 가호로 전 국민의 뜻을 모아 외적을 물리치고자 고종 23년에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고 판각에 착수했다. 강화의 대장도감 본사(本司)와 진주의 분사(分司)에서 16년간에 걸쳐 대장경판을 완성시켰다. 총 81,258매의 판목에 양면을 새겨 면수는 162,516면이며 여기에 실린 경의 총 분량은 1,512부 6,791권이다. 현재 해인사(海印寺)의 대장경판으로 고려재조장경(高麗再雕藏經) 또는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이라고 한다.
3. 조선(朝鮮)
고려 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절대적인 보호와 온 국민의 숭앙을 받아 전성기를 누렸던 불교는 조선조에서는 사정이 급격히 하락하게 되었다. 이 미 고려 말기부터 불교를 배척하는 상소문을 올려 온 유생들이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왕조를 건국한 후부터 정책적으로 불교를 탄압하게 되었다. 조선조 5백 년 동안 배척을 당하고 스님들은 핍박과 천대를 받는 법난(法難)이 계속되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불교의 종교적 역할은 여전하여 나라와 겨레에 적지 않은 공헌을 끼쳤다.
첫째는 한글의 보급과 이를 통한 국민정신의 계도(啓導) 역할이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서문과 같이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과 다른데 문자는 중국 글을 쓰고 있어 국민들이 읽고 쓰기에 불편하다는 데 있었다. 따라서 모든 국민들이 글자를 쉽게 익혀 마음대로 읽고 쓰게 하기위해 한글을 창제한 것이다. 훈민정음이 반포된 3개월 후에 왕은 김수온(金守溫)(1409~1481)에게 명하여 부처님의 일대기인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짓게 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7월에는 수양대군이 이를 한글로 번역하였다. 또한 왕은 손수 한글로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지었다. 이것들이 모두 훈민정음 반포 초기에 간행된 한글 불교 서적들이다.
한글 불서의 간행은 특히 세조 때에 와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세조는 즉위 7년에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신미(信眉)(생몰연대미상) 등 당대의 고승들과 함께 불교 경전을 번역하여 출판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능엄경(楞嚴經)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금강경(金剛經) 등 여러 국역 불전들이 간행되었는데, 이들은 오늘날 한글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다.
둘째는 스님들의 구국 활동이다. 조선 시대는 국가의 정책으로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탄압하여 스님들은 도성 출입이 금지 되고 팔천(8賤)으 로 신분을 격하 시켰었다. 그러나 정책적인 불교 탄압에도 불구하고 스님들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 마다 나라를 구하고자 분연히 일어섰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임진왜란 때는 휴정 서산(休靜 西山 1520~1604) 대사를 비롯하여 유정 사명(惟政 四溟 1544~1610), 처영 뇌묵(雷黙 雷黙 생몰연대미상), 영규 기허(騎虛 騎虛 ?ㅡ1592) 스님등이 각각 평안도와 강원도 전라도 충청도에서 의승병(義僧兵)을 모아 왜적을 물리치는 데에 선봉(先鋒)이 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때는 벽암 각성(碧巖 覺性 1575ㅡ1660)스님이 의승병 3천명을 모았으며, 명조 허백(明照 虛白 1593~1661)스님 등의 의승장 들의 활약은 눈부신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난이 끝난 뒤 서울의 방비를 튼튼히 하고자 북한산성(北漢山城)과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쌓았으며 또 그 산성(山城)을 지켰다.
이처럼 조선불교는 정책적 탄압과 갖은 핍박에도 불구하고 대중 속에 더욱 더 뿌리를 내렸으며, 겨레에 많은 공헌을 하여 진리의 등불을 밝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