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에 관한 시모음 33)
고사목에도 매화는 다시 피고 /은영숙
너를 찾아 가는 길, 섬진강 쪽빛 물비늘 아직은 벚꽃 터널이 빗장을 열지 않았다
줄지어 산마다 가득 봉우리 여는 매화 마을 수 십 년 자란 검은 고목이 연륜을 자랑하듯
잔가지 팔 벌려 홍매화 백매화 하늘 보고 만면에 희열을 토한다
몸은 낡아 쓰일 곳 없다 외면 하지만 그늘에 쉬어가는 정인들 모습 그림 같고
꽃술 찾아 나비들의 내밀한 사랑의 포옹
매화아씨 고운자락 묵화 치는 화가들의 하얀 도화지에 미광으로 꿈을 엮어
몽환으로 안겨주는 봄은, 고사목에도 매화는 다시 피고!
매화가 피었다 /박성우
어제는 바람 끝에 온기가 앉았더니
오늘은 계단 옆으로 매화가 피었다
바람결에 우르르 몰려가는
어눌한 걸음걸이
그러나 모나지 않은 말본새
곱기도 하여라
나는 저 매화가 이어준
소중한 연(緣)이 하나 있어
아직 어리석은 제자가 안쓰러워
계절마다 다녀가시는 귀한 걸음이 있어
저 어눌한 걸음걸이가 밉지가 않다.
고결한 매화의 봄 /박소정
고혹적인 그대는
몇 겁의 세월을 닦으셨기에
이생전생 먼 길을 넘나들며
화양연화 봄날 매화입니까.
그믐밤도, 보름밤에도
긴 밤을 서성인 수많은 밤
몇 겁의 번뇌를 초탈하셨기에
또 다시 봄날을 선물하십니까.
진리를 깨우치는 초자연 세계
선악의 세속에 초월하는 꽃으로
머나 먼 피안의 강을 건너셨기에
다시 환생한 이승의 매화입니다.
현세의 육안으로 스며드는 봄
몇 겁의 생사번뇌를 닦으셨기에
몇 겁의 번뇌망상을 성찰하셨기에
그대는 고결한 봄의 정령입니까!
고목에 핀 매화 /안정순
백 년을 사는 동안
더덕더덕 붙은 고뇌
굵어진 세월의 흔적
알알이 맺힌 사연
송이송이 망울 되어
그리움으로 피어나
한 백 년 작은 소망
겸손히 핀 하얀 미소
향기마저 곱구나
벌 나비 오던 걸음
숨죽이며 다가앉아
귀를 쫑긋이
고목의
이야기보따리
해가는 줄 모른다.
매화와 매실 /최두석
선암사 노스님께
꽃이 좋은지 열매가 좋은지 물으니
꽃은 열매를 맺으려 핀다지만
열매는 꽃을 피우려 익는다고 한다
매실을 보며 매화의 향내를 맡고
매화를 보며 매실의 신맛을 느낀다고 한다.
?
꽃구경 온 객도 웃으며 말한다
매실을 어릴 적에는 약으로 알고
자라서는 술로 알았으나
봄을 부르는 매화 향내를 맡고부터는
봄에는 매화나무라고 부르고
여름에는 매실나무라고 부른다고 한다.
물매화 /안정순
다섯 개의 붉은 입술
하얀 치마 곱게 차려입고
고운 임 언제나 오시려나
온 밤이 새도록
다섯 손 모아 빌고 빌어
손끝에 맺힌 이슬방울
깊은 산기슭에
나뭇잎 사이로 간간이
비집고 들어온 햇살
눈 비비며 왔다가
산골짜기 맑은 물에
부스스한 낯만 씻고
긴긴 목을 늘이며 혹여
그리운 임 오실 부푼 꿈에
환한 미소 짓네요.
매화 /송정숙
나는
섬진강에 가야해요
겨우내 묵묵히 흐르던 강물 엮어
곱게 핀 매화가 나는 부르니
봄처녀 버선발로 사뿐히 오기 전에
하얀 미소 찾아가야 해요
나는
섬진강에 가야 해요
북풍 찬바람 올올이 엮어
가는 그대 서러워 곱게 피고 지는
꿈속에 꽃이 나는부르니
두근대는 가슴 사라지기 전에
밤 기차를 타고 가야해요
나는
섬진강에 가야 해요
낮은 집바람막아주며
정다운 마음 사라지지 말라고
겨울 보내며 가슴에 새기는 꽃
매화가 나를부르니
봄이 성큼 오기 전에
촉촉한 눈빛으로 가야 해요
매화(梅花) /임재화
그대는 아시나요?
다섯 잎 치마폭을 치켜들고서
가슴속 깊은 곳에는 임 향한 마음에
서글픈 사연 들어 있으니
우리는 전생(前生)의 인연으로
금생(今生)에도 이렇게 잘 어울리는
한 쌍인 것을 말 이예요.
그대는 아시나요?
넉넉한 얼굴 다섯 폭 치맛자락에
한 폭의 수묵화를 그리고 싶은 마음을
당신의 모습 속에 그리움이 가득 들어 있으니
지난겨울 몹시도 매서운 추위를
용케도 잘 견디셨습니다.
그 추웠던 지난겨울에
여린 가지에 올망졸망 붙어서
새봄이 다시 찾아올 때를 기다리며
가슴속에는 열정을 가득 품고 있었고
따스한 봄기운이 찾아온 지금
그대의 속내에는 열린 사랑이 충만함을
진작부터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지금쯤은
어릴 적 고향 집 언덕 위에서
오직 그대의 넉넉하게 열린 가슴과
품위 있고 우아함이 넘쳐흐르는 하얀 매화꽃이
그윽한 모습으로 빛나고 있겠지요.
梅花 /유국진
긴 긴 겨울 밤
님 생각에
잠 못 이루어
창을 열면
은하수는 왜 저리 먼지....
하늘과 땅 사이에
님과 나 둘 뿐인데
萬里燈 불빛만
梅花香에 붉구나.
매화 /은파 오애숙
내가 널 만난 건 참으로 어이 없게
중 3 수학여행 때 화투 그림이었지
내 어린 시절에도 추석이면 친척과
화투놀이 통하여 여러 번 봤었지만
그땐 관심이 없어 현실의 꽃인 줄도
네 소중함 몰라 내겐 그저 만화그림
하지만 너의 참 모습 눈 속에 피어난
설중매 이기에 환희 속에 높인다네
불의에 굴하지 않는 선비 정신처럼
눈 속에서 꽃 피우겠다는 약속으로
봄을 기다리는 자의 봄의 전령사며
4군자 매란국죽 가운데 으뜸! 일세
매화꽃나무 아래 매화꽃 /김종미
매화꽃나무 아래
여인 하나가 쪼그리고 앉아 오줌을 눈다
매화꽃나무 밑둥치에 뽀얀 매화꽃 피었다
아찔한 매화꽃향기를 질펀하게 덮어가는
뜨겁고 습한 향기 중년이다
생살을 찢어내는 것이 꽃피는 것 아니더냐
이 추위에 덜컥덜컥 꽃을 피워대는 철없는 이것들아
너무 일찍 가랑이를 찢어
나의 청춘은 시퍼런 열매를 매단 채 시퍼런 잎사귀에 가려진 아우성이었다
여인의 스카프는 조잡한 삶의 무늬를 감추고
세차게 펄럭인다
끌끌끌 몇 번이나 혀를 차듯 매화나무 밑둥치를 치는
초승달 엉덩이가 부풀어 오른다
매화꽃 살냄새를 풍기던 그 얼굴은 가물거리지만 아무렴
두 손 털어버린 중년은 다시 시작하는 청춘이라고
여인 하나가 탱글탱글한 엉덩이를 걷어 올린다
바람 한 대가 끼익 브레이크를 걸고 멈추더니
그녀를 태우고 달린다
스카프의 무늬가 하늘에서 확 펼쳐졌다
매화와 산수유 입술 터졌다 /강대실
처마 밑 고드름 끝에선
송알송알 땀 영그는 소리
눈 덮인 텃밭에선
쫑긋쫑긋 마늘순 기지개 켜는 소리
깨어진 얼음 사이론
낮게 흐르는 피아노 소리
강바람에 실려오는
산까치 짝꿍 부르는 소리에
매화와 산수유 입술 터졌다.
홍매화 터지다 /김진수
그 일이 터진 것은 지난 밤이었다
비명은 스타카토로 끊어졌다
주변은 일시에 사위었고 열렸던 문과 창은 깃을 여몄다
112 경광등이 눈알을 번뜩이고
처음 있는 일이 아니란 듯
현장을 둘러보는 고양이의 눈빛은 헐렁하다
뜨악한 표정의 외눈박이 CC TV는 임의성 없는 그림만 방영한다
낡은 외등은 기억이 없다고 깜빡깜빡하고
담장 위로 빼꼼한 백목련
자기도 피해자라며 멍든 얼굴 꼿꼿이 세운다
먼저 터진 산수유와 백 매화 몇몇
입이라도 맞춘 듯 알리바이가 토씨 하나 어긋나지 않았다
원이 완성된 밤이었으므로
분명 목격자가 있었을 터
뽑아 올린 고양이의 촉이 닿은
유리창에 덧대어진 뽁뽁이(에어 캡) 속을 감추지 못한다
부푼 눈망울 속 증언들이 세세하고 한결같다
하나씩 눌러 터트릴 때마다
피는 꽃, 잎잎이 붉게 멍 들었다
홍매를 만난 아침 /박재숙
달빛 온기 쬐며
기다린 아침
봄 연지빛
향기 머금은
앙다문 입술
댓돌 위에
흰 고무신 한 켤레
눈부신 햇살 속엔
옹알이하는 매화 한 송이
설중매 /노천명
송이 송이 흰빛 눈과 새워
소복한 여인모양 고귀하여
어둠 속에도 향기로 드러나
아름다움 열꽃을 제치는구나
그윽한 향 품고
제철 꽃밭 마다하며
눈 속에 만발함은
어늬 아낙네의 매운 넋이냐
홍매화 /최상섭
梅山嶝 후미진 언덕배기
칼바람이 할퀴고간 가지마다
피빛으로 맺혀든 꽃봉오리
섣달 그믐밤을 흐느껴 운다
東川에서 解氷된
희미한 훈풍은 햇살실어 날라다
잔설덮인 꽃비늘 톡톡 털어내고
노란 속눈썹 흔들어 깨우니
여린 꽃망울이 발갛게 웃는다
철모르는 벌들은
매향에 탐매되어 은은하고
격조높은 향기실어 나르는데
내마음은 아직도 황량한 벌판
눈길을 걷는 겨울나그네
설중매 /이명희
고매의 성근 가지 휘청거림 멈춘 자리
간절함 깊은 곳에 살며시 뜨는 꽃 빛
아득한 기슭을 핥는 설풍의 목이 시리다
파르르 떠는 꽃잎 어르는 햇살 아래
소리 없는 소리로 듬성듬성 풀어놓은
겹겹이 환한 눈부심 누구를 위함인가
속살을 드러낸 채 웅크린 굽은 등짝
한사코 비집고 나온 빛바랜 기억 찾아
숫눈길 발자국 찍으며 연분홍 열반에 든다.
설중매(雪中梅) /권혁동
裸木 가지마다
눈雪인 듯 꽃인 듯
시린 등 기대고 환하게 웃고 있다
언 발 딛고 선 서투른 몸짓이
애처로워서 더욱 곱다
철 이른 가출이라
야단이라도 맞을까봐
살짝 고개 숙인 얼굴
너울로 가리고 있는 걸까
그래도 예쁜 자태 숨길 수 없는
그대 소복 입은 소녀여
설중매 /박종순
건너편 산자락에
잔설이 보이는데
아름다운 여인의 집
앞마당엔 설중매가
피었네
꺾어질 듯
뻗어있는 가지마다
소담하게도
피었구나
너의
모습에 눈부시고
너의 향기에
취하겠네
그래도 나는 나는
그 여인이 더
아름답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