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하마 여행1 - 히코네에서 나가하마에 도착해 나가하마성에 오르다!
벚꽃철인 4월 6일 아즈치성 을 보고 히코네역에 도착해 일본 5대 국보 히코네성 彦根城
에서 마굿간 우마야 와 개국기념관 및 히코네성 박물관 을 보고는 로카바시를 건너
텐빈망루 성문을 들어서서 청종암과 시보종 종루 를 보는데 종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히코네성 텐슈가쿠 天守閣 전망대에 올라 비와호수 를 바라보고는 천수각을 내려와
니시노마루에서 북쪽에 쿠로몬잔도(黑門山道) 로 빠져 쿠로몬바시로
해자를 건너 히코네성의 정원인 겐큐엔 玄宮園(현궁원) 에서 호수와 정자 를
보는데 여긴 기온이 낮은지... 아님 지대가 높은지 벚꽃이 만개하지 않아 아싑습니다.
히코네성 을 나와 캐슬로드를 걸어 히코네역 彦根駅 에서 나가하마 長浜(장빈) 로 가기
위해 13시 48분에 출발하는 JR 오미시오쓰 (近江塩津) 행 기차에 오르는데...
차량이 10량 이나 되니 뭔가 미심쩍어 역무원에게 물으니 앞쪽 차량 에 타라고 합니다?
비와 호수 서북 오미시오쓰(近江塩津) 로 가는 기차는 승객이 많지 않을터인데 10량이나
배차하는게 이해가 가지않아 마눌을 제지하고 물어본건데 아니나 다를까... 뒷 차량은
한정거장 다음 역인 마이바라 까지만 운행하는가 봅니다? 도쿄에서 동북방향 신칸센은
기차 2대가 붙어 가다 모리오카에서 분리해 아키타와 신아오모리 로 갈라지던게 떠오릅니다.
교토에서 10량 으로 운행해 13시 53분 마이바라 米原(미원) 에 도착해 13시 56분에
앞 차량 5량만 계속해서 운행하면서 기차는 쾌속 에서 특급 特急 시라사기
しらさぎ 55号 로 신분이 바뀌는데... 14시 02분 나가하마 長浜(장빈) 에 도착합니다.
인터넷 일본열차 사이트 www.hyperdia.com 에 보면 마이바라 米原 에서는 1시간에 2대
편성으로 쾌속 기차는 9분만에 3정거장째인 나가하마 에 도착하며, 멀리 북륙
도야마 富山(부산)행 등의 특급 은 1정거장만에 나가하마 長浜(장빈) 에 서는가 봅니다?
나가하마역 인포메이션 센타 에 들러 한국인 이라고 말하니 여직원은 한류 의
영향 탓인지 엄청 친절한데.... 한글로 된 시내지도와 팜플릿 을 주니
기분이 좋아지기로 나가하마 기차역 니시구치(西口) 로 나와 호숫가 로 걷습니다.
조금 걸으니 벚꽃이 제법 피었건만 빗방울이 떨어지는게 유감인데 마침 비와 호숫가에
우뚝 선 나가하마조 長浜城(장빈성, 나가하마성) 가 보이길래 400엔을 내고
입장하는데 일본에서 대부분의 "성 천수각은 역사박물관" 으로 되어 있기 때문 입니다.
나가하마성 長浜城(장빈성)은 1336년에 비와호수변에 성채가 서고 센고쿠(戰國) 시대
1573년에 하시바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 오미 북부의 다이묘인
아사이 나가마사 를 공격한 공으로 노부나가로 부터 아사이씨의 영지 를 받게되자
히데요시는 1576년 오다니성 에 들어가지 않고 비와호 이마하마(今浜) 에 성을 쌓습니다.
새 성을 나가하마(長浜) 라고 명명하는데, 성의 부재는 아사이 가문의 거성인 오다니성
자재를 사용했으며 성하마을 조성을 위해 오다니성 주변의 주민들을 이주 시켰는데...
1615년 이이 나오마사가 히코네성 彦根城 을 축조하면서 폐성되고 성의 부재는 히코네성
덴빈망루 와 나가하마 사찰 을 축조하는데 사용되었으니 오테몬은 다이쓰지 로 옮겨집니다.
노부나가의 명을 받아 서쪽 오카야마의 다카마쓰성을 공격하던 히데요시에게 원군으로 가던
아케치 미쓰히데 가 교토에서 혼노지변 을 일으켜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를 죽인후
교고쿠 다카츠쿠는 미쓰히데 편에 참전해서 히데요시의 거성인 나가하마성을 공격
했는데 기요스 회의 결과 나가하마성은 시바타 가쓰이에의 조카 가쓰토요 에게 돌아갑니다.
미쓰히데가 모반해 혼노지에 주군 오다 노부나가를 공격할때 조금 떨어진 묘가쿠지에 있던
노부나가의 후계자인 장남 기후성주 노부타다 는 가신들이 후퇴하자고 할때 후퇴로에
병사를 배치했을터 사로잡히면 무사의 수치 라며 자리를 지키다 죽었는데 만약 살았으면
히데요시 따위가 권력을 잡지는 못했을 것이니 "임진왜란은 없었을 것이라...원통" 합니다!
교토에 심어둔 첩자로 부터 급보받은 히데요시는 길을 봉쇄해 미쓰히데가 모리에게 보내는
전령을 봉쇄 하자 부하들은 한시가 급하니 빨리 휴전하고 철군 하자고 할때 히데요시는
그러면 적의 의심 을 산다며... 총공격으로 다카마쓰성의 항복을 받은후 급히 회군해서는
아케치군을 격파 후 시즈가타케 전투 에서 시바타 가쓰이에에게 승리해 정권을 장악합니다!
히데요시 의 원래 이름은 기노시타(木下) 도키치로 였으나 오다가문 가신인 니와 나가히데
(丹羽長秀) 에게서 羽(하) 자를 그리고 시바타 가쓰이에 (柴田勝家) 에게서 柴(시바)를
빌리니 하시바(羽柴) 도키치로 가 되고 다시 하시바 히데요시 - 후지와라 히데요시 를
거쳐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 되니 콤플렉스와 과대망상으로 임진왜란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1983년에 나가하마성을 복원해 역사박물관 으로 사용하는데 전망대 에서는 나가하마시와
비와호 가 보이며 성터는 일본식 정원으로 공원이고 벚꽃의 명소 로 시바 료타로 의
소설 “공명의 갈림길”의 주인공 치요의 남편 야마우치 가쓰토요의 거성 으로 나옵니다.
교토 북쪽 비와호수 주변을 오미(近江) 라 부르는데 슈고(守護)는 교고쿠(京極)씨 였으나
신하인 아사이씨 와 롯가쿠씨 가 성장해 북오미와 남오미를 나누니, 아사이씨 4대
당주는 아사이 나가마사 浅井長政 로 나가하마의 북쪽 오다니(小谷)성 에 웅거 했습니다.
아사이 나가마사 浅井長政 는 29살에 오다 노부나가 에게 패해서 죽는데... 노부나가의
매제 이자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돈 이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에도막부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장인 이자 3대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외조부 가 됩니다.
오다 노부나가 가 아시카가 막부를 손에 넣기위해 교토로 올라가는 길목에 아사이 가문의
거성이 위치하니 군사력을 소비하지 않으려는 오다와 오미 남부 롯가쿠 라는 강적을
상대해야 했던 아사이씨는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 와 정략결혼해 혼인동맹 을 맺습니다.
1565년 교토의 쇼군이 살해되자 동생인 아시카가 요시아키 는 북쪽 에치젠국(후쿠이) 의
아사쿠라 요시카게 에게 피신했으나.... 아사쿠라씨가 교토 수복 의지가 없자
실망해 오와리의 영주 오다 노부나가 에게 의지해 교토로 돌아와 쇼군에 복귀 하게 됩니다.
이에 1570년 오다 노부나가 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와 함께 아사쿠라씨를 토벌 하기 위해
쓰루가의 가네가사키성 까지 진군했는데... 매제 아사이씨가 후방을 차단 하자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아사이씨의 배신(?) 에 치를 떨며 황급히 후퇴 합니다.
교토로 퇴각하기 위해 노부나가는 10여명 부하들만 데리고 먼저 떠나고 3만의 병사들이
뒤를 따르는데 문제는 추격하는 아사쿠라와 아사이 연합군을 막아야 했으니 이
죽음의 전투 를 자원하여 맡은게 신참 하시바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입니다.
히데요시는 임무완수 후에는 금을 상으로 받았다는데 훗날 모반을 하는 아케치 미쓰히데
(明智光秀) 도 쓰루가의 가네가사키성 에서 히데요시와 함께 신가리 (殿 뒷부대) 로
남았으니... 두 무장은 이 전투 수행으로 오다 가문에서 기반 을 잡게 되며 두사람이
본진 철수를 위한 시간을 번 후에 후퇴할 때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엄호 했다고 합니다.
오와리국 노부나가 가 미노국 사이토씨 를 공격할때 오다와 아사이씨 가 동맹이고 반대편은
미노와 롯가쿠씨 였는데... 아사이 가문은 에치젠(후쿠이)의 아사쿠라씨와는 선대 부터
동맹 이라 아사이는 오랜 동맹을 지키는 의리 때문에 처남 노부나가를 공격 했던 것입니다.
쇼군 요시아키 는 노부나가가 권력 을 휘두르자 아사이, 아사쿠라씨 연합 에 미요시씨와
가이(야마나시) 의 다케다 신겐, 주코쿠의 모리 테루모토, 사찰세력 오사카 혼간지와
엔랴쿠지, 그리고 용병 세력인 사이카 까지 승낙해 "노부나가 1차 포위망" 이 결성 됩니다.
카네가사키 전투에서 3천명을 잃은 노부나가는 비와호 남쪽 롯가쿠씨를 굴복 시킨후
매제 아사이씨를 응징 하기 위해 1570년 6월 28일 동맹인 도쿠가와군 과
함께 2만 8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비와호수 오다니성 小谷城(소곡성) 에 도착합니다.
아사이는 아사쿠라씨와 연합해 18000여명의 군대가 결집하니 오다는 양동작전 을 펴서
支城(지성)인 요코야마성 橫山城 을 포위 공격해 아사이· 아사쿠라 연합군
을 끌어내서는 아네가와강에서 접전 하니..... 아사쿠라씨와 도쿠가와가
맞붙고 오다군과 아사이씨가 격돌하니 처절한 아네가와 전투 姉川戰鬪 입니다.
아사이군의 선봉인 이소노 가즈마사 는 오다군의 선봉 사카이 마사히사 부대를 돌파 해서
파죽지세로 기노시타(하시바) 히데요시 와 시바타 가쓰이에 진을 격파하여 오다군
13단 진중 11단 까지 쳐부수는 맹공을 보였으나 이나바 잇테쓰 구원으로 위기를 벗어납니다.
혼다 타다카츠 가 이끄는 도쿠가와군은 병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아사쿠라군의 공격에
잘 버텼는데..... 이는 아사쿠라 요시카게가 측실 고쇼쇼 를 총애해서 함께
시간을 보내느라 출전조차 하지않아 아사쿠라군이 사기가 떨어졌던 때문으로 보입니다.
도쿠가와군의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는 아사쿠라군을 패퇴시킨 후에 오다군에 가세 하자
아사이군도 패퇴하니... 사상자는 오다 연합군 800명에 아사이 연합군 1300 명으로
치하라 (血原, 핏빛 평원) 와 치가와 (血川, 핏빛 강) 라는 지명 까지 생겼다고 합니다!
아시가루 (足軽) 로 참가해 아사이씨로 부터 간죠(感状) 를 받을 정도로 큰 전공을 올린
도도 다카도라 (藤堂高虎) 는 아사이씨가 멸망한후 주인을 바꿔가며 다이묘 에
올라 이요 이마바리번의 초대 번주 가 되는데....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전공 을 세웁니다.
아사이군은 엔도 야오쓰네등 가신과 나가마사의 동생 까지 전사했지만 여력은 있었으니
히에이산 승병대 와 오사카 혼노지 를 비롯한 승려 집단과 손을 잡고는
비와호수 시가현에서 다시 전역을 펼치니 이른바 시가의 진 (志賀の陣) 이라고 합니다.
9월 노부나가 가 미요시와 이시야마 혼간지 토벌 을 위해 셋쓰로 가니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아사이군과 함께 사카모토로 쳐들어가자 오다군은 모리 요시나리 와 노부나가의 친동생
노부하루 까지 전사하니 분노한 노부나가는 히에이산 엔랴쿠지(연력사) 를 불태워 버립니다.
아사쿠라씨 는 오미로 돌아왔다가 교토의 히에이산에 고립된 오다군 과 대치하는데
세불리함을 느낀 오다 노부나가 가 자존심을 접고 교토의 아시카가 쇼군에게 납작 엎드리니
노부나가와 강화 를 맺으라는 쇼군의 칙령 이 아사쿠라 요시카게 에게 내려집니다.
이 시기 노부나가 는 쇼군 요시카게 에게 엎드려 절한 후 이렇게까지 말했답니다.
天下は朝倉殿持ち給え。我は二度と望みなし.
"천하는 아사쿠라님이 가지시옵고, 저는 두번 다시 천하를 바라지 않겠나이다."
노부나가 는 나가하마 남쪽 사와산성을 지키는 아사이가의 맹장인 이소노 가즈마사 가
배반할 것이라는 거짓 정보 를 흘리니..... 미끼에 걸려든 아사이씨가 의심 하자
헤어나기 힘들다고 생각한 이소노 가즈마사 는 그만 진짜로 오다군에게 항복 해 버립니다.
1572년 7월 노부나가는 5만 대군 으로 출정해 아사이씨의 오다니 (小谷) 성을 포위하자
아사쿠라 원군 이 도착해 대치에 들어가는데, 10월 가이국(야마나시)의 다케다 신겐
(武田信玄) 은 2만 7000명 대군으로 동쪽인 도쿠가와 영지 도토미 를 공격해 들어옵니다.
그러니 아사이-아사쿠라 연합군은 퇴각하는 노부나가를 공격 할 절호의 기회 인데
우유부단한 아사쿠라 요시카게 는 병사들이 피로하고 눈이 많이 쌓였다는
핑계로 에치젠으로 퇴각해 버리자 아사이씨는 병력이 적어서 움직이지도 못합니다.
하마마쓰 인근 미카타가하라에서 1만 1천 도쿠가와군을 쳐부수고 미카와로 진격한 가이국
의 다케다 신겐이 병사 하자... 1573년 노부나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3만으로
침입하니 아사쿠라 요시카게 는 2만으로 대적하나 오타케 토리데에서 대패해 후쿠이시
이치조다니로 후퇴하니... 전투 12일만에 아사쿠라 5대 100년의 영화는 잿더미 가 됩니다.
후쿠이의 아사쿠라 요시카게 가 남긴 절명시는.... 七轉八倒四十年中 無他無自 四大本空
"일곱번 넘어지고 여덟번 쓰러진 40년 인생, 나도없고 남도없으니 모든 것이 허무하다."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목은 교토의 고쿠몬에 효수 되었는데, 노부나가는 요시카게의
두개골 을 가져다 아사이 나가마사 의 것과 함께 연회 시에 "술잔" 으로 썼다고 합니다.
홀로된 오미 近江 의 아사이 나가마사 는 오다니성(小谷城) 에서 항전 하는데, 노부나가는
매제 나가마사에게 항복을 권유하지만 나가마사는 자존심 때문에 끝까지 저항하니
히데요시의 주선 으로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 모녀를 성에서 내보내 주고는 자결
하는데 훗날 장녀는 히데요시의 후처 요도기미 가 되고 3녀는 2대 쇼군의 부인 이 됩니다!
아사이 나가마사 는 배반이 판치던 센고쿠시대에 보기 드문 의리의 무장으로 전국무쌍 이나
전국 바사라 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하며, 오이치 는 나가마사와 운명을 같이하려 했으나
결국 세 딸을 데리고 성을 나오니 이후 오다씨 제1 가신인 시바타 가쓰이에와 재혼 합니다.
이 전공으로 히데요시 는 노부나가 로 부터 아사이 나가마사 가 다스렸던 북오미국
의 영지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여기 비와 호숫가에 나가하마성 長浜城(장빈성)
을 증축하고는 자기 인생에서 처음으로 "한 성의 성주" 가 되니 비로소 고향에
있던 부인 네네와 노모 를 나가하마성으로 모셔오는 것이니 크게 우쭐댔다고 합니다.
1582년 노부나가가 죽으니 권력투쟁이 벌어져 시바타 가쓰이에는 히데요시의 공격을 받아
패하자 오이치 는 후쿠노쇼조에서 남편 가쓰이에와 함께 자결 하는데, 이때 과거
오타니성이 함락될 때 목숨을 걸고 단신으로 적의 성에 들어가 네 모녀를 구출했던
히데요시 는 마에다 도시이에 에게 명하니... 오이치를 설득해서는 세 딸을 넘겨받습니다.
히데요시 는 "꾀" 가 무궁무진하니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교토로 올라가 일본을 제패하려는
야심으로 2만 5천 대군이 오다씨의 영지 오와리(나고야)를 공격해 왔을때는 척후로
활약해 적의 본진 위치와 상태 를 파악하니, 오다 노부나가는 1천 결사대 를 이끌고
방심했던 요시모토의 본진 6천이 머문 오케하자마를 기습해 목을 베고 대승 을 거둡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적의 성을 포위하기 위해 성을 쌓을때 히데요시는 스스로 빚을내 현금
을 풀어서 돗내기 식 으로 돌 을 구하고, 또 성벽 구간을 나누어 쌓으면 그날 바로
일당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순식간에 성을 쌓는 과업을 완수해 근거지로 삼아 적의
성을 함락하고 상금으로 받은 금은으로 미리 빌렸던 빚을 갚아 신용을 유지했다는데...
가신들이 물품 구매시 이득을 취할때 히데요시는 자기돈을 보태 구입해 신임 을 받았다는?
고베와 오카야마 영주들은 서쪽에서는 모리군, 동쪽에서는 오다군의 압박 을 받았는데
야마구치와 북규슈에 히로시마등 6국을 지배한 모리씨 에 투항한 오카야마의
다카마쓰성 을 공격할 때 히데요시 는 성을 포위한후 상류와 하류에 댐 을 쌓아
일거에 터뜨려서는... 배를 타고 수공으로 성벽 을 넘어가는 새로운 공격법을 보입니다.
돗토리성 을 공격할 때 히데요시는 출진 전에 상인을 풀어 돗토리의 쌀을 모두 사들인후
진격해 마을을 약탈 방화 함으로써 백성들이 돗토리성으로 피신 하도록 유도하고는
성을 포위 하니... 쌀 재고 가 부족한데다가 일반 백성 까지 성내로 들어왔으니
굶주리는데 히데요시는 방책 을 세운후 공격하지 않고 굶어죽도록 만들었던 것이지요!
또 오다 노부나가가 암살된후 시바타 가쓰이에 와 싸울때에 히데요시는 후방인 이즈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병력을 대거 빼내 시바타군을 안심 시킨후 밤을새워 재진격 하는데
미리 도중의 마을 촌장들에게 돈을 풀어 주민들이 햇불을 들고 길을 밝히도록 하고
군데군데 주먹밥과 물을 마련하게 해서 다음날 아침 시즈가타케에 나타나 승리를 거둡니다!
이런 전술 들은 초창기를 제외하면 히데요시가 혼자 했다기 보다는 구로다 간베에 와
다케나가 한베에 같은 지장들을 수하에 두고 그들의 머리를 활용했는데... 손자병법
(孫子兵法) 에 지피지기백전백승 (知彼知己百戰百勝) 이라고 했으니 히데요시의 성공
에는 적을 면밀히 연구하고 파악한데 있으니 오늘날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다고 봅니다!
첫댓글 일본역사로 도배를 하는건 적절하지 못한건 아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