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신사빈 박사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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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미술(conceptual art)과 현대미술의 본질
20세기 초 ‘아방가르드’라는 이름으로 탄생한 현대미술은 다양한 형식과 내용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양식들을 산출하여 왔다. ‘모더니즘 시대의 미술 산책’이라는 주제로 지금까지 살펴본 사실주의, 인상주의, 입체주의, 절대주의, 숭고의 회화, 초현실주의 미술 등은 현대미술의 다양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들이다.
이번 글에서는 현대미술의 본질인 아방가르드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미술 양식을 다루고자 한다. 즉 ‘미술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던지며 미술의 새 지평을 연 ‘개념미술’이다. 누구나 한번은 현대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방문해 “이것도 미술이야?” 하며 의아해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만큼 동시대 미술(contemporary art)은 종잡을 수 없고 낯설며 기존의 미술 문법에 익숙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이 글에서는 ‘개념미술’의 기원과 대표적인 작품들을 살펴보며 우리의 일상과 함께 호흡하고 있지만 동시에 한없이 낯선 동시대 미술을 이해하고 현대미술의 본질을 통찰하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마르셀 뒤샹과 개념미술의 시작
20세기 초 유럽의 화가들 사이에서는 전쟁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불안으로 기존의 현실과 전통미술을 부정하려는 운동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선봉에는 다다(Dada)가 있었다. 아무 의미 없는 의성어 ‘다다’는 그 시대 유럽의 화가들이 추구한 미술의 전위적 성격을 잘 대변하는 넌센스의 말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규정하고 지배하던 전통 미학의 가치와 기준 일체를 부정함으로써 새로운 창작의 지평을 열고자 했고, 전대미문의 작품들을 실험하며 반(反)미술(Anti-Art) 운동을 전개했다.
최초의 다다 봉기는 정치적 중립국인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일어났고, 반전운동을 기치로 내건 독일의 다다이스트들이 베를린, 쾰른, 하노버 등지에서 기세를 이어받았다. 이후 파리에서 대규모 국제전이 열리며 다다는 순식간에 유럽 아방가르드 미술의 용광로가 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마르셀 뒤샹이 있었다. 그는 병 건조대, 삽, 모자걸이, 약병 등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일상 사물에 사인을 하고 작품이라 내놓으며 돌풍을 일으켰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다다의 기수가 된다.
1917년 그가 세상에 내놓은 작품 〈샘〉은 현대미술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희대의 문제작이었다. 이 작품이 이슈화된 과정도 뒤샹처럼 비범하다. 그는 기성품인 소변기에 “R. Mutt”라는 가명으로 사인하고 〈샘〉이라는 제목을 달아 6센트만 내면 누구나 전시할 수 있는 독립미술전에 출품한다. 그러나 전시 관계자들은 소변기가 설마 작품인지 모르고 전시장의 한 귀퉁이에 치워버린다. 이를 관찰하던 뒤샹은 능청스럽게 제3자의 입장으로 R. Mutt 씨의 작품 〈샘〉이 불공정하게 처리된 것을 잡지에 고발한다.
이러한 해프닝을 통해 〈샘〉은 단번에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고, 비평가들 사이에서는 곧 다음과 같은 논쟁이 일어난다. 즉, 예술가는 손수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아이디어에 맞는 사물을 선택하기만 하면 되는가? 예술가에게 중요한 것은 손재주인가 아니면 아이디어인가? 예술가가 자신의 아이디어로 선택한 기성품과 일반 기성품의 차이는 무엇인가? 논란이 쏟아지며 미술계는 혼란에 빠진다. 일상의 기성품, 즉 ‘레디메이드’(ready-made)에 작가가 사인만 하면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가를 그들은 물었고, 화가가 직접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화가일 수 있는가를 열띠게 토론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이제 미술계에서는 화가란 더 이상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디어’를 생산하고 ‘선택’하는 자들이라는 새로운 이해의 지평이 열렸다. 또한 작품을 규정하는 근거도 객관적인 미적 기준과 관계없이 화가가 작품이라고 하면 작품이 되는 시대가 되었다. 뒤샹이 〈자전거 바퀴〉라는 작품을 가리켜 “내가 바퀴에 의자를 붙이고 작품이라고 했더니 그것이 지금 뉴욕현대미술관에 있다.”라고 한 말은 그에 대한 유명한 일화이다.
뒤샹의 레디메이드 작품들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일상의 사물들이 화가의 ‘선택’에 의해 특별히 주목받는 고급 예술로 변신한 것들이다. ‘선택’의 이유도 지극히 주관적이다. 〈샘〉의 소변기는 단지 선(線)이 아름다워 선택했다고 하고, 〈자전거 바퀴〉는 바퀴가 돌아가는 것을 보는 게 즐거워서 선택했다고 한다. 〈50cc 파리의 공기〉라는 작품의 앰플병은 파리의 공기를 담아 친구에게 선물하고자 파리의 약사에게서 구입한 것이고, 〈팔이 부러지기 전에〉라는 작품의 ‘삽’은 쌓인 눈을 치우지 않으면 미끄러져 팔이 부러질 수 있다는 생각이 스쳐 선택했다고 한다.
이러한 뒤샹의 지극히 주관적이고 엉뚱한 발상은 ‘미술은 고상한 것’이라는 기존의 관념을 통째로 흔들었고 진지한 미술평론가들을 우습게 만들었다. 그러한 그를 새로운 미술의 선지자로 여긴 마니아층도 있었지만, 예술의 도발자라고 혹평을 쏟아내며 전시를 막은 자들도 있었다.
이러한 소란을 뒤로하고 뒤샹은 1918년 홀연 작품 활동 중단을 선언하며 미술계를 떠난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던 체스놀이로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가 더 이상 작품활동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거수일투족 자체가 미술계의 이슈였고 그를 혹평하던 자들조차 뒤샹의 행동을 예의 주시하며 추적했다. 그들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뒤샹의 ‘선택’과 ‘결정’ 자체를 새로운 미술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뒤샹은 자신의 반-미술 행위들이 이후 어떤 파장을 일으키고 미술의 새 역사를 쓰게 될지 알고 있었을까? 그의 ‘레디메이드’ 아이디어는 이후 일상과 고급 미술 사이의 경계를 허문 팝아트(pop art)의 뿌리가 되었고, 체스 두는 것조차 미술 행위로 간주된 해프닝은 이후 행위예술(performance art)의 기원이 된다. 특히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디어를 생산하고 ‘선택’하는 정신적 행위자라는 인식의 전환은 이후 ‘개념미술’의 토대가 된다.
개념미술의 ‘개념’(concept)과 특징
개념미술의 대표적인 작가 조셉 코수스는 〈정보실〉이라는 행위예술에서 화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정보를 얻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산하는 자라는 것을 스스로 실연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화가들은 자화상을 그릴 때 주로 이젤 앞에서 붓과 팔레트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렸다. 그런데 코수스는 이젤 대신 책상을, 붓과 물감 대신 책들을 지물(attribute)로 ‘선택’하여 미술 행위가 곧 정신 행위라는 화가의 정체성 변화를 표현하고 있다. 조셉 코수스는 대학에서 언어철학을 공부하고 『철학 이후의 미술』(1969)이라는 책을 집필한 이론가이기도 했는데, 그에 따르면 개념미술가는 형태나 색채의 재료가 아니라 의미로 작업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개념미술의 비물질화 경향은 라파엘 페러(Rafael Ferrer)의 작품 〈50개의 얼음덩어리〉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미술관 안에 50개의 얼음덩어리를 설치하고 시간이 지나며 얼음이 점차 녹아내리고 마침내 증발되어 사라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아무 형상도 없는 무(無)의 추상화라 할지라도 캔버스의 나무 틀과 천, 그 위에 칠해진 물감이라는 물질은 남는데, 페러의 얼음 작품은 최소한의 물질도 남지 않은 완벽한 무(無)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개념미술의 비물질화 경향은 개념미술가 더글러스 후블러(Douglas Huebler)의 “이 세계는 이미 (미술) 오브제들로 가득 차 있다. 내가 오브제를 하나 더 만든다고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는 더 이상 거기에 더하고 싶지 않다.”1라는 말에서도 재차 확인된다.
비물질성과 순수 정신성을 추구하는 개념미술은 몇 가지 공통된 특징으로 현상하는데, 그 첫 번째 특징이 ‘레디메이드’이다. 이미 존재하는 기성품을 재활용하는 방식으로 비물질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한 예로 조셉 코수스의 작품 〈기대어 있는 유리〉를 살펴보자.
길거리의 후미진 곳에 마치 폐기된 듯한 유리판 두 장이 가로수에 기대어 서 있다. 누군가 작품이라고 알려주지 않으면 그냥 모르고 지나칠 법하다. 작가는 어떤 콘셉트로 이 레디메이드 유리판을 작품으로 ‘선택’했을까? 유리 제품은 특성상 비치는 상에 따라 표면의 이미지가 계속 변하며 고정되지 않는다는 특징을 갖는다. 작품을 보면 아이를 안고 있는 여성이 카메라로 사진 찍는 모습이 고스란히 반사되어 있는데 이 이미지는 관람자가 바뀔 때마다 매번 새롭게 변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화가는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새로운 이미지를 무한히 산출할 수 있다. 또한 매번 새롭게 산출되는 이미지의 주체가 관람자라는 점에서 작가는 관람자의 참여를 적극 유도하고 이를 통해 일상과 예술과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일상과 예술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일은 현대미술에서는 처음부터 나타난 현상이었고 음악의 영역에서도 존 케이지의 〈4분 33초〉라는 작품에서 탁월하게 표현된다. 작품의 악보가 텅 비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빈 악보를 채우는 주체는 다름 아닌 일상의 소리이다. 연주자는 〈4분 33초〉의 빈 악보를 들고 피아노에 앉지만 연주하는 대신 시계를 맞추고 4분 33초 동안 녹음을 한다. 이어 청중들은 웅성거리고 기침과 재채기 등 일상의 소리가 고스란히 녹음된다. 그리고 텅 빈 악보는 이 소리들로 완성된다. 존 케이지는 이러한 방식으로 청중을 수동적인 감상자가 아니라 작품을 완성하는 주체로 만들고 있다.
코수스의 〈기대어 있는 유리〉도 마찬가지이다. 유리는 백지이고 유리에 매번 반사되는 관람자의 모습은 백지 위에 그려지는 그림이다. 이렇게 청중이나 관람자의 참여로 작품이 완성되는 ‘참여미학’은 현대예술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데 예술을 위한 예술의 울타리를 벗어나 일상과의 경계를 허물고자 하는 현대 예술가들의 의지이자 시대정신이라고 볼 수 있다.
개념미술의 두 번째 특징은 기록(document)이다. 라파엘 페러의 〈50개의 얼음덩어리〉도, 조셉 코수스의 〈기대어 있는 유리〉도 사진이나 영상으로 기록해놓지 않으면 작품이 존재했다는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 얼음은 녹아서 사라져 버리고, 유리판도 전시가 끝나고 치워버리면 더 이상 작품이 아니다. 따라서 개념미술에서 기록은 필수적이다. 간혹 미술관의 개념미술 전시실이 사진과 기록 파일들만 즐비한 사무실 같이 보이기도 하는데 바로 개념미술의 비물질성과 레디메이드라는 특성 때문이다.
개념미술의 세 번째 특징은 언어(language)이다. 조셉 코수스의 〈아이디어로서 아이디어로서의 미술〉(1968)이라는 작품을 보면 특정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사진으로 확대해 여과 없이 전시하고 있다. 선택된 단어들은 ‘언어’(language), ‘이미지’(image), ‘의미’(meaning), ‘무’(nothing), ‘정의’(definition), ‘매개’(medium), ‘오브제’(object), ‘가치’(value), ‘이상’(idea), ‘복제’(copy), ‘자기’(self) 등 작가의 관심을 끄는 것들인데 이 역시 일종의 레디메이드이다. 이미 사전에 쓰인 글을 재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언어 작품의 콘셉트는 단어 자체보다는 동어반복의 제목에서 암시되고 있으며 코수스의 다른 작품 〈하나이면서 세 개인 XX〉연작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하나이면서 세 개’라는 문구 다음에 의자, 탁자, 램프, 붓, 삽, 톱, 망치, 시계 등 일상의 도구들이 따라오며 〈하나이면서 세 개인 의자〉, 〈하나이면서 세 개인 탁자〉등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의자’니 ‘탁자’니 하는 오브제는 그 자체로는 사실 아무 의미가 없고, 오히려 ‘하나이면서 세 개’라는 문구에서 작품의 의미를 추적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미술이란 무엇이고 시각예술이 표현할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를 가능하게 만드는 매우 상징적이고 철학적인 작품이다. 이 중에서 〈하나이면서 세 개인 의자〉를 예시로 살펴보자.
〈하나이면서 세 개인 의자〉
작품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른쪽부터 보면, 의자 ‘chair’의 사전적 의미가 사진으로 확대되어 있고, 가운데에는 실제 의자가 세워져 있으며, 왼쪽에는 실제 의자를 찍은 사진 의자가 실물과 똑같은 크기로 확대되어 있다. 기존의 미술이라면 ‘의자’라는 제목으로 하나의 재현된 장면만 제시되었겠지만, 코수스는 의자라는 동일한 오브제를 가지고 의자란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이상적인 ‘언어’ 의자와 ‘실제’ 의자와 재현된 ‘사진’ 의자의 세 가지 형태를 모두 시각화하고 있다. 이로써 코수스는 사물의 ‘재
현’(representation)이라는 미술의 전통적 표현방식을 넘어서고 있는데, 이는 플라톤으로 소급되는 모방론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모방’, 즉 미메시스(mimesis) 개념은 플라톤의 이분법적 세계관에서 온 것으로, 이상(idea)과 현실(res)을 나누고 현실이 이상의 ‘모방’이라는 플라톤의 사유에서 기인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상의 모방인데 예술가는 모방된 세상을 다시 모방하는 자들이다. 이로부터 미술 행위는 모방한 것을 또 모방하는 행위이고 이상과 두 단계나 떨어져 진리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규정된다. 그래서 플라톤은 사람들이 진리로 나아가는 데에 미술이 방해만 된다고 보았고, 이상 국가에서 화가들을 추방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친다. 플라톤의 이러한 논리 전개는 이후 수천 년간 구축된 로고스 중심의 진리 체계를 낳았고, 여기서 미술은 진리와 동떨어진 것으로 암암리에 비하되어 왔다.
코수스의 〈하나이면서 세 개인 의자〉는 그렇게 비하된 미술의 역할과 표현의 한계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미술은 실제 ‘의자’를 단지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의자란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이상’(idea)의 의자와 이상을 모방한 ‘현실’(res)의 의자, 그리고 현실의 의자를 모방한 ‘이미지’ 의자를 모두 동시에 보여줄 수 있는 매체임을 당당히 보여주고 있다. 즉 플라톤의 생각처럼 ‘모방의 모방’에 한정되지 않고 모방의 기원인 ‘이상’과 이상을 모방한 ‘현실’ 모두를 아우르는 매체로서 미술이 진리의 담지자도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코수스의 이 작품은 ‘이미지’와 갈등을 빚어온 기독교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된다. 세상을 창조한 성부 하나님은 피조계 밖에 계신 초월적 존재로 상상되었으며, 그래서 하나님을 감각계 안의 사물로 형상화하는 것은 율법에서 우상시하며 금하고 있다. 그러나 문자언어로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하나님은 말씀(word)으로 만물을 창조하고 말씀으로 스스로를 계시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씀이 육화하여 세상 현실 속으로 임하였고 그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는 이제 더 이상 말씀만의 종교도 아니고 문자로만 표현할 수 있는 종교도 아니다. 사람의 형상을 한 하나님, 살과 피의 육체와 감각을 지닌 하나님은 이미지로 표현될 수 있는 하나님이다.
코수스의 〈하나이면서 세 개인 XX〉연작은 동일본질이지만 세 위격(person)으로 현현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을 시각화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말씀’만의 종교라면 가장 오른쪽의 이상(idea)으로서 ‘문자 하나님’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말씀이 육화된 그리스도의 종교는 현실(res) 하나님과 이미지 모두를 아우른다. 코수스의 작품은 기독교의 이 점을 새삼 상기시켜 준다.
현대미술과 실존
전통적으로 시각예술은 사물의 모방이라는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현대 미술가들은 이 규정을 벗어나려 했고 새로운 표현의 영역을 찾아 계속해서 실험해 왔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빛을 그리며 보이지 않는 세계로의 첫발을 내디뎠고, 입체주의 화가들은 보이는 사물의 해체를 통해 보이지 않는 추상의 세계를 열었다. 절대주의 미술에서는 급기야 보이는 세계를 완전히 지운 무(無)의 회화를 산출했고, 뒤샹으로 소급되는 개념미술은 붓과 물감조차 포기한 비물질성을 추구하며 정신 활동으로서의 미술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했다. 그리하여 동시대 미술은 더 이상 모방하는 기술(테크네)의 측면에서 평가되지 않는다. 개인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예술의 진정한 가치로 평가받는 시대가 되었고, 이로써 뒤샹이 예언한 대로 작가가 “이것은 예술이다.”라고 하면 예술이 되는 시대가 완전히 구현되었다.
이러한 동시대 미술을 바라보며 현대미술의 역사는 자유 추구의 역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진(眞)과 선(善) 중심의 사유 체계에서 미술가들은 끊임없이 자유롭고자 했고, 헤겔의 사변 시스템에서 산출된 “미술의 종말론”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현대미술의 역사를 새롭게 썼다. 자유를 추구한 화가들이 도착한 곳은 자기 자신이었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화가들은 내면의 소리에 집중했고 그 소리를 시각적으로 계시하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현대 미술가들은 더 이상 신과 성인(聖人)을 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에는 실존의 흔적이 담겨 있다. 실존은 이성적 사유의 끝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다. 현대 미술가들은 그 영역을 스스로 체험하며 밝히는 자들이다. 그 점에서 현대미술은 실존의 증거이다. 아방가르드적 성격 때문에 때로는 충격으로 다가오지만 그러하기에 그들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일상의 관습은 깨지고 작품은 실존과 존재를 성찰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한 점에서 현대미술은 준(準) 종교화의 성격을 갖는다.
* 신사빈 박사님의 연재 “모더니즘 시대의 미술 산책”을 마무리합니다. 그동안 좋은 글 보내주신 박사님께 감사드립니다.-편집부
주(註)
1 Jonathan D. Fineberg, Art Since 1940, Strategies of Being (New York: Harry N. Abrams, Inc, 1995), 336.
신사빈|독일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미술사의 신학』, 역서로 『예술의 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