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119,000원▲ 7,500 6.73%)그룹이 12일 부회장단과 사장단에 대한 대규모 인사를 단행했다. 과거 정몽구 회장과 함께 그룹의 성장을 이끌었던 주요 인사들이 퇴진하거나 자리를 옮기고 정의선 총괄 수석부회장 체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음을 알리는 인사다.
이번 인사에서는 최근 실적 부진과 잇따른 품질 논란에 대한 문책, 미래 신기술 개발을 위한 혁신 시도가 적극 반영됐다. 그룹의 연구개발(R&D)을 책임졌던 부회장들이 퇴진하는 대신 고성능차 개발과 자율주행차 전문가들이 승진해 주요 보직에 임명됐다.
◇ ‘그룹 2인자’ 김용환 부회장, 현대제철로…양웅철·권문식 R&D 부회장 퇴진
현대차그룹은 김용환 기획조정 담당 부회장을 현대제철(44,950원▲ 1,150 2.63%)부회장에 임명했다. 그 동안 현대제철을 이끌어 온 우유철 부회장은 현대로템(27,200원▼ 1,450 -5.06%)부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 부회장은 이른바 ‘MK의 남자’로 꼽힐 정도로 정몽구 회장의 최측근으로 일해온 인물이다. 그룹의 안살림과 전략을 책임지면서 현대·기아차가 글로벌 5위권 자동차 메이커로 성장하는데 상당한 공을 세워 그룹 안팎에서 실질적인 ‘2인자’로 꼽히기도 했다.
자동차 업계에서는 김 부회장이 현대제철로 자리를 옮기게 되면서 정의선 총괄 수석부회장이 그룹 경영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됐다고 분석한다.
한 업계 관계자는 "김 부회장이 현대차그룹에서 30여년간 일하며 그룹 사정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바로 퇴임을 시키지는 않은 것으로 안다"며 "현대제철 부회장으로 보직을 변경한 것은 예우 차원의 인사로 해석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기아차 연구개발담당 양웅철 부회장과 연구개발본부장을 맡아 온 권문식 부회장은 자리에서 물러나 자문으로 위촉됐다. 양 부회장과 권 부회장 역시 정몽구 회장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며 현대차그룹의 성장을 이끈 인물들이다.
그러나 최근 자율주행차와 전기자동차 등 미래 신기술 경쟁에서 뒤처지고 지난해부터 세타2 엔진의 결함이 발견되는 등 품질 문제도 불거지면서 결국 자리를 떠나게 됐다. 게다가 글로벌 시장 수요가 세단에서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으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지만, 세단 중심의 라인업을 제 때 바꾸지 못한 점도 두 부회장이 퇴진하게 된 이유로 꼽힌다.
그룹 관계자는 "최근 자율주행차를 포함한 미래 신기술 경쟁이 본격화 되고 있는 점이 반영돼 내연기관차 전문가였던 연구개발(R&D) 담당 부회장들의 퇴진이 결정됐다"며 "연구소에서도 상당한 규모의 후속 인사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 알버트 비어만, R&D 본부장으로…정의선 영입한 외부인재들 전면에
두 부회장들이 떠난 자리는 정의선 부회장이 직접 영입한 외부 인재들로 수혈된다. 알버트 비어만 현대·기아차 차량성능담당 사장이 신임 연구개발본부장에 임명했으며 지영조 전략기술본부장 부사장은 사장으로 승진했다.
알버트 비어만 사장은 BMW에서 30여년간 고성능차 개발을 담당한 전문가로 2015년 4월 현대차그룹에 합류했다. 그는 1983년 BMW그룹에 입사해 고성능차의 주행성능과 서스펜션, 구동, 공조시스템 등의 개발을 담당했고 BMW의 고성능 브랜드인 M 연구소장을 역임했다. BMW의 고성능차인 M3와 M4 등이 그의 손을 거친 차종들이다.
지영조 사장은 미국 브라운대에서 기계공학 석사, 응용수학 박사학위를 받은 인물로 글로벌 컨설팅업체인 맥킨지와 삼성전자(40,550원▲ 300 0.75%)를 거쳐 현대차에 합류했다. 비어만 사장과 함께 정의선 부회장이 공들여 영입한 인사로 현재 현대차그룹의 자율주행차 개발을 위한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룹 관계자는 "외국인 임원을 연구개발본부장에 임명한 것은 처음으로, 실력 위주의 글로벌 핵심 인재 중용을 통한 미래 핵심 경쟁력 강화 의지가 반영된 인사"라며 "지 사장을 승진 임명한 것도 전략기술본부의 위상을 강화해 스마트시티, 모빌리티, 로봇, AI 등 핵심과제 수행과 전략투자에 박차를 가하기 위한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그룹의 R&D 본부인 남양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앞으로 내연기관차의 성장을 이끌었던 기계공학 전문가들의 시대가 지고 자율주행 개발을 주도하는 전자공학 전문가들이 중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 내년 하반기 ‘세대교체 바람’ 더 거세질 수도
이 밖에 현대차그룹은 전략기획담당 정진행 사장을 부회장으로 승진시켜 현대건설(56,100원▲ 300 0.54%)부회장으로 보임했다. 또 박정국 현대케피코 사장을 현대모비스(193,500원▲ 16,000 9.01%)사장에, 이건용 현대글로비스(129,500원▲ 10,000 8.37%)경영지원본부장 전무를 현대로템 부사장으로 발령했다.
현대·기아차 기획조정2실장 여수동 부사장은 사장으로 승진, 현대다이모스-현대파워텍 합병 법인 사장으로 발령했다. 신임 현대오트론 대표이사에는 문대흥 현대파워텍 사장이, 신임 현대케피코 대표이사는 방창섭 현대·기아차 품질본부장 부사장이, 산학협력 및 R&D 육성 계열사인 현대엔지비 대표이사에는 이기상 현대·기아차 환경기술센터장 전무가 각각 내정됐다. 현대캐피탈 코퍼레이트 센터부문장 황유노 부사장은 사장으로 승진했다.
이와 함께 현대·기아차 생산개발본부장 서보신 부사장을 생산품질담당 사장으로, 홍보실장 공영운 부사장은 전략기획담당 사장으로 각각 승진, 보임했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이번 인사는 최근 중국 및 해외사업 부문의 대규모 임원 인사에 이어 그룹의 미래 경쟁력 강화를 위한 그룹 차원의 인적 쇄신을 추진하기 위해 이뤄졌다"며 "전문성과 리더십이 검증된 경영진들을 주요 계열사에 전진 배치함으로써 대대적인 인적 쇄신 속에서도 안정감과 균형감을 유지했다"고 말했다.
한편 양웅철, 권문식 부회장 외에 생산품질담당 여승동 사장, 현대모비스 임영득 사장, 현대다이모스 조원장 사장, 현대제철 강학
서 사장, 현대로템 김승탁 사장 등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룹 관계자는 "이번 인사는 정의선 부회장이 본격적으로 전면에 나서 현대차그룹을 이끌게 됐음을 의미하는 만큼 ‘구(舊) 세대 인사’로 분류되는 인물들은 언제든 교체 대상에 오를 것"이라며 "내년 실적이 눈에 띄게 개선되지 못할 경우 하반기에는 큰 폭의 쇄신인사가 또 단행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