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 신공기의 성격> 신공에 관한 기록은 위지에 나오는 왜 여왕 히미코에 대한 기록과 일치하도록 만들어졌다. - 津田左右吉 홍원탁《백제와 대화일본의 기원》P62에서 재인용 |
1.섭정 원년 3월 이런기록이 있다.
“2월 壬申朔, 황후는 길일을 택하여 재궁에 들어가 신히 神主가 되었다.”
⇒이 기록뒤에는 신공이 신과 통하여 이야기하는 장면으로 신공 정권의 성격을 말하는 것
뒤이어 나오는 이 기록
“연후에 吉備臣의 선조 압별(鴨別)을 보내 熊襲國을 쳤다. 얼마 안 되어 저절로 복종했다”
⇒이 기록은 신공의 영스러움을 외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중애천황은 신의 가르침을
따르 지 않아 결국 죽었으나 신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위 기록을 적은 것
하지만 이 기록의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이후 우백웅취(羽白熊鷲)에 대한 정벌, 土蜘蛛 전유진원(田油津媛)에 대한 토벌 등
또한 위의 의도와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신공기가 나타내는 것>
신공기를 읽고나니 무척이나 많은 부분이 후세에 왜곡되었음을 느낄수가 있었다.
신공기에 神이란 존재를 등장시킴은 신공정권의 콤플렉스 때문이라는 느낌조차 들었다. 중애천황의 사망이유를 神의 계시를 무시했기 때문이고, 신공이 항상 승리하는 이유 또한
神과 결부시켜 기록했다. 이것은 신공이 등극 하는데에 뭔가 정당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2.신공 5년에 나타난 이야기
“신라왕이 微叱許智伐早를 데려오기 위해 汗禮斯伐, 毛麻利叱旨, 富羅母智등을 사자로
보내 조공했고, 毛麻利叱旨들은 몰래 微叱許智伐早를 배에 태워 신라로 보냈다.
이에 속은 갈성습진언(葛城襲津彦)은 毛麻利叱旨등 신라 3인을 불태워 죽였다”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박제상전과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특히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박제상의 이름인 모말(毛末)과 모마리질지(毛麻利叱旨)는
그 이름 조차 비슷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5세기의 일로 적힌 이야기가 일본서기
에는 3세기의 일로 기록되어있다는 것은(2주갑을 인상해도 4세기이다) 일본서기의 조작
이라는 이야기밖에 이해할 수 없다.
※《신찬성씨록》에는 습진언의 성을 갈성의 木씨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문정창님은 백제 木씨와 결부시키고 있다. 습진언을 목만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였
으나 이 기록은 무엇인가... 이 이야기자체가 조작된 이야기이므로(연대가) 갈성습진언의
등장 또한 거짓일까?
3.신공기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신라정벌이다.
신공정벌의 이유를 일본서기는 백제의 공납품을 신라가 빼앗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전쟁의 원인치고는 너무나도 사소하다. 뿐만 아니라 문정창님의 지적대로 신라를 공격하
는데 卓淳(일본학자들의 지명비정에 따르면 대구)에 집결한 것이나, 신라를 공격하는데
차지 한 땅은 신라가 아니라 가야지방이었다.
4.섭정(攝政)을 69년이나?
攝: 대신할 (섭)
말 그대로 왕을 대신해 정치를 하는 것으로 왕의 아들이 성장하면 그 아들(태자)에게 왕위
를 넘겨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69년이나 섭정했다는 것은 상식면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삼국지》왜인전에는 비미호 →일여(壹與)로 기록하고 있다.
일본서기 신공기에 위지를 인용한 것을 보면 비미호=신공을 강조하기 위함일텐데 정작
왜인전에 등장하는 일여는 일본서기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유는?
<江上波夫의 제 2회 일본건국> 응신이 축자출시니라는 것은《記․紀》기 전하는 내용이고, 한편 그 대능묘가 기내의 하내(河內)에 있고, 그 비정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응신이야말로 북구주로부터 기내로 진출하여 그 곳에 야마토조정을 창시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말하는 水野祐․井上光貞들의 추정은 상당히 이유가 있는 것 같이 생각된다. 그것은 고분시대 후기의 개시와도 연대적으로 상응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제 1회 일본건국의 주역이 숭신천황이고, 제 2회 주역은 응신천황으로서 함게 그 시호에 神의 문자를 가지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라고 느껴진다. 숭신․응신 이외에 神이 붙어 있는 시호를 부여받은 천황은 가공의 정복자인 신무․신공뿐이다. 江上波夫《기마민족국가》P184 임길채《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중)P61에서 재인용 |
<응신천황(應神天皇)>270년~310년
응신에 관한 이야기는 신무의 동방 이동에 관한 이야기를 그대로 되풀이 하고 있는데, 이것은 똑같은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G.L Barnes《Protohistoric Yamato》 홍원탁《백제와 대화일본의 기원》P64에서 재인용 |
1.재위 2년: 仲姬를 皇后로 하였다. 妃를 누구로 하고 자식이 몇 명인지에 대한 이야기
2.재위 3년: 겨울 10월 蝦夷가 조공을 바쳤다. 蝦夷로 하여금 廐坂道를 신설
11월 각지의 어민들이 소요를 일으키자 아담련(阿曇連)의 선조 大濱宿禰를
보내 소요 진압
백제 진사왕(辰斯王)이 서서 귀국(貴國)의 天皇에게 무례하였다.
紀角宿禰, 羽田矢代宿禰, 木菟宿禰를 보내 그 무례함을 책하였다. 이 때문에
백제국은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
紀角宿禰는 ‘아화’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갔다.
일본정부에 의해 세워진 새로운 백제정권?
광개토태왕비문에 신묘에 왜가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를 반영?
3.재위 5년: 가을 8월 13일 제국(諸國)에 명하여 海人部, 山守部를 정하였다.
겨울 10월 伊豆國에 과하여, 배를 만들게 하였다,
배가 되자 시험삼아 띄었더니 바다에 떳다. … (생략)
4.재위 7년: 가을 7월 고구려인, 백제인, 임나인, 신라인이 같이 내조하였다.
⇒김성호님은 비류백제의 말왕 응신의 망명사건으로 보고 있다.
武內宿禰에 명하여 諸韓人들을 거느리고, 연못을 만들게 하였다.
재위 7년(276년)시 武內宿禰의 나이는 중애천황 사망시 107세+신공 69년+응신 7년째)183세
그래서 그 못을 한인지(韓人池)라 한다.
<비류백제의 응신망명> 1)비류백제: 온조와는 또 다른 세력 한성쪽에 나라를 세운 온조가 처음부터 해상세력을 키웠을리 만무하다. 차라리 처음부터 해안가(인천)에 도읍한 비류가 해상진출에는 용이했을 것이다. 2)응신천황: 비류백제의 末王이다. ․비문의 백잔(百殘): 온조의 백제 잔국(殘國): 비류의 백제 →응신망명의 倭 ․비문에서 보면 신묘년(391)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잔□□신라를 속국으로 삼았다고 하였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락 6년 고구려의 공격목표는 왜가 아닌 잔국(殘國)이었다. 이것은 비문이 殘國=倭를 전제하에 쓰여졌기 때문이다. ․영락 6년의 사건으로 응신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 영락 6년조 마지막 부분: 58성과 7백 촌을 얻고 잔왕제(殘王弟)와 대신 10인을 잡아 도읍으로 개선하였다. ․영락 9년, 10년조의 신라국경에 왜인이 가득찼다에서 왜는 침략한 왜가 아닌 일본서기 응신 14년(413) 궁월군 일행이었다. 즉 비류백제가 멸망하고 그 유이민의 대규모 망명 이었던 것을 비문에서 왜로 적은 것이다. 김성호《중국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1500년》P372~421 |
5.재위 14년: 봄 2월 백제왕이 봉의공녀(縫衣工女)를 바쳤다.
진모진(眞毛津)이라고 한다. 이가 래목의봉(來目衣縫)의 선조이다.
이 해, 궁월군(弓月君)이 백제로부터 내귀하였다.
그리고 주하여 “신이 자기나라 120縣의 인민을 거느리고 귀화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라사람이 방해하여 다 가라국에 머물러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김석형님은 백제 →일본 중간에 가라국이 위치? 라는 의문을 던졌다.
이 문단은 신라가 남해를 차지하고 있어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가는 것을
신라가 방해했다는 뜻으로 꼴이 되는데, 당시 신라가 과연 그런 국력을 지니고
있었는가
이에 갈성습진언을 보내 궁월의 인민을 가라로부터 불렀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 습진언을 돌아오지 않았다.
※갈성습진인은 신공 5년(205년)에 처음등장한다. 응신 재위 14년은 283년으로 78년이
지난후이다. 신공 5년 임무를 띠고 활동을 한 것을 보면 당시 장년이었을 것인데...
6.재위 15년: 가을 8월 6일 백제왕이 아직기를 보내, 양마 2필을 바쳤다. 그것을 경(輕)의
판상(坂上)의 마굿간에서 기르게 하였다. 아직기로 사육을 관장하게 하였다.
말을 본격적으로 기르게 된 기록이다.
삼국지 왜인전은 3세기 초~중순까지의 기록이다.
삼국지 왜인전에는 일본열도에 말이 없다라고 했는데
이 기록에(3세기 말)는 말이 있다고 하였다.
말의 기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말을 기른 곳을 구판(廐坂)이라 한다. 아직기는 또한 능히 경서를 읽었다.
그래서 태자 토도추랑자(菟道椎郞子)의 스승으로 하였다.
椎郞子는 皇后의 아들이 아닌 妃의 아들
천황은 아직기에게 “그대보다도 나은 박사가 또 있는가”라고 말하였다.
“왕인(王仁)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분이 낫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상모야군(上毛野君)의 선조인 황전별(荒田別)과 무별(巫別)을 백제에 보내어
왕인을 불렀다. 아직기는 阿直岐史의 시조다.
7.재위 16년: 봄 2월 왕인이 왔다. 태자 토도추랑자의 스승으로 하였다. 여러 전적(典籍)을
정실인 대초료가 아닌 소실인 추랑자에게 더 기대를 한 것인가?
왕인에게서 배웠다.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왕인은 서수(書首)등
의 시조이다.
이 해, 백제의 아화왕이 훙(薨)하였다. 천황은 직지왕을 불러 “그대는
본국으로 돌아가 왕위를 계승하시오”라고 말하였다.
또 동한(東韓)의 땅을 주어 보냈다.
8월 平群木菟宿禰, 的戶田宿禰를 기라에 보냈다.
정병을 주어 詔하여, “습진언이 오래 돌아오지 않는다 반드시 신라가 방
해하여 체류하고 있을 것이다. 그대들은 빨리 가서 신라를 치고, 그 길
을 열어라.”고 하였다.
木菟宿禰들은 정병을 보내 신라의 경계에 이르렀다. 신라왕이 겁이
나서 복죄하였다. 그래서 궁월의 인민들을 거느리고, 습진언과 같이
돌아왔다.
⇒일본의 국력은 백전백승? 앞에서 나온 궁월군 기록은 남해권을 신라가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인데… 신라를 단번에 치고 가라에 머물고 있던 궁월군을 데리고 왔다
라는 것은 백제<신라<왜의 순서가 아닌가
8.재위 20년: 가을 7월 왜한직(倭漢直)의 선조 阿知使主와 그 아들 都加使主가 그의 무리
17縣을 거느리고 내귀하였다.
응신 22년 신라의 군사가 일본에 왔다. 즉 명석포(明石浦)에 들어갔다. 명석포는 대판(大阪_에서 겨우 100여리이다. 적간관의 동쪽에 하나의 언덕이 있다. 왜인이 이것을 가로되, “이것이 백마분이다. 옛날 신라병에 깊숙이 일본에 들어왔다. 일본인이 강화를 청하여 군사를 풀 것을 원한 결과, 흰말을 베어 맹약을 하고, 그 말의 시체를 이 언덕에 묻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석문(李石門)《부상록(扶桑錄)》일본시행 기록 ⇒조선 통신사 이경직(李景稷)이 쓴 기록이다.(1617년) 조선사람들은 일본서기의 기록을 그대로 믿은 것일까? 왜 당시 德川幕府사람들은 응신 22년이라고 한 것일까... 일본서기 응신 22년에는 신라군과의 전쟁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이 지역에 남아있는 전설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 그렇다면 중국 곳곳에 남아있는 고구려관련 전설들의 성격과 유사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 |
9.재위 25년: 백제의 직지왕이 薨하였다. 그 아들 구이신(久爾辛)이 왕이 되었다.
왕은 나이가 어렸다. 목만치(木滿致)가 국정을 잡았다. 왕모와 간음하여 무례
보통 목만치를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목협만치와 동일시 한다.
하지만 삼국사기에서는 목협만치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문정창님은 목만치를 백제 木씨이고 왜의 소아씨의 조상으로 주장한다.
한 일이 많았다. 천황이 듣고 불렀다.
왜의 천황이 백제의 실권자를 맘에 안든다하여 소환한다?
이 문구자체가 백제⊂왜라는 것으로 왜곡이라 생각한다.
10.재위 28년: 9월 고구려왕이 사자를 보내 조공하였다. 그리고 표를 올렸다.
고구려는 광개토태왕(391~)시절에 와서야 남해에 진출하였다. 297년은 봉상왕시절로 아직 요동진출전이다. 그러므로 이 기록은 후세에 고구려가 일본과 통한 어느 사건을 적은 것일 뿐이다.
그 표에 “고구려왕이 日本국을 가르친다.”라고 하였다
그때 태자 菟道椎郞子가 그 표를 읽고서 화를 내어 표의 무례함을 고구려
사자를 책하고 표문을 찢어버렸다.
11.재위 37년: 2월 1일 아지사주, 도가사자를 吳에 보내, 縫工女를 구하게 하였다.
아지사주들이 고구려에 건너와 吳에 가려고 하였다.
고구려에 갔으나 길을 몰라 길을 아는 자를 고구려에 청하였다.
⇒왜 오땅으로 가는데 고구려를 거치려 하였을까...
신라 - 왜가 적대관계라 하더라도 백제, 가야 - 왜는 긍정적 관계가 아니었던가...
가야나 백제의 도움을 받아 가면 될 텐데 왜 고구려땅까지 갔을까...
이것은 왜 →고구려 →吳이기 때문이 아닐까?
12.재위 39년: 2월 백제의 직지왕이 그 누이 新齊都媛을 보내어 섬기게 하였다.
직지왕은 응신 25년에 사망하였다고 하였는데 왜 또 등장하는가...
13.재위 41년: 2월 15일 천황이 明宮에서 崩하였다.
그때나이 110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