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달/김호길-
잊자고 널 잊자고
해와 달을 지웠지만
문득 바라본 하늘
낙관으로 박혔구나
낮달아
하늘에 걸린
내 아픔의 문신아
-여름 낮달/문제완-
오지게 익어가는 저 뙤약볕 오이 좀 봐
구릿빛 얼굴에는 땀줄기가 샛강을 내고
울 엄마 한평생만 한 남새밭을 매고 있다
고향 떠난 자식 걱정 모래밥이 뭉클하다
부뚜막 언저리엔 늘 챙겨둔 밥 한 그릇
고샅길 끝날 때까지 목이 한 뼘 길어지고
파출부 일당으로 연명하는 막내딸이
동구 밖 낮게 떠서 핼쑥하게 내려본다
비루한 생의 허리가 꼭 너만큼 휘었다
-낮달/전윤호-
아내는 출근하고
아이들은 학교에 갔다
집이 조용해지자
거세한 고양이는 창틀 위로 올라가
잡히지 않는 새 소리를 듣는다
초록색 눈을 가진 고독이
내려다보는 한낮
결말을 아는 이야기 속에서
마지막까지 견디는 일이
이렇게 지루하다니
성공한 부자가
자신을 영웅이라 생각하는 자서전을 읽다가
몸으로 물음표를 만들고
긴 잠에 빠지다
-고요한 낮달/김종목-
소리도 없이
누가 길을 가나보다
구름이 살그머니 옆으로 비켜서면
하얀 치맛자락 바람에 달리듯
살짝 보이는
고무신 한짝
소리도 없이
누가 길을 가나보다
꿈길을 가나보다
-겨울 낮달/문 숙-
억지로 넘기고 산 것 중에
삭이지 못한 것 많고도 많았던가
언제부턴가 명치끝에 밥알이 걸린다며
대문도 열어둔 채 병원 가서 돌아오지 못한다
겨울바람이 주인처럼 들락이는 그녀의 빈집
마당가에 핀 국화가 된서리에 뻣뻣하게 굳어 있고
뒤란 대숲은 평소 그녀의 속울음 소리를 내고 있다
냉기가 들어앉은 빈방엔 알맹이가 빠져나간 옷들
윗목에는 먹다 만 사과 한 알이 그녀의
못 다한 생의 일부처럼 말라가고 있다
모두 차게 식어버린 것들
냉기에 등 떠밀려 마루를 내려서는데
그녀가 베다만 사과 한 알
언 하늘에 차가운 낮달로 걸려 있다
-낮달/오명선-
밤을 지새고
이른 새벽 산사에 오른다
누군가 나무 물고기 두드리는 소리
안개비에 젖어
날짐승 머리를 감기고 있다
저 안개비에도 내 머리는 젖지 않는다
내 그릇에 담기지 않는, 병 깊은
낮달 같은 사랑이여
-낮달/유지소-
나는 거기 있었네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거기 있었네 네가 떠나간 후에도
나는 거기 있었네 거기가 거기인 줄도 모르고
물이 흐르면서 마르는 동안 바퀴가 구르면서 닳는 동안
지구가 돌면서 밤낮을 바꾸는 동안
그동안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는 동안
나는 거기 있었네 네 머리 위에
나는 거기 있었네 비가 내리는 구름 위에
나는 거기 있었네 거기라는 말보다도 한참 먼 거기에
-낮달/장옥관-
시집간 엄마 찾아간 철없는 딸처럼, 시누이 몰래
지전 쥐어주고 콧물 닦아주는 에미처럼
나와서는 안 되는 대낮에
나와 떠 있다
떠올라서는 안 되는 얼굴이, 맑아서 보이지 않는
얼굴이, 있어도 없는 듯 지워져야 할
얼굴이 떠 있다
화장 지워진 채, 마스카라가 번진 채
여우비 그친 하늘에
성긴 눈썹처럼, 종일 달인 곰탕 속 빼죽이 솟은
턱뼈처럼 나와 걸려 있다
-낮달/안용태-
지팡이 걸음으로 배꼽마당 까지 배웅 나와
문안인사 올리고 돌아가는 막내아들 손에
무명고쟁이 속주머니 뒤 집어
꼬깃꼬깃 말아 쥔 쌈짓돈을 감추듯 쥐어 주시며
“너 형수 볼라”
살아생전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며
문안인사 따라 온 내 친구 효정이 애비가
이 광경 무심코 바라보고
왈칵, 봇물 같은 울음 내려놓고 말았지요
아들딸 손자손녀 문안 올 때 받은 아껴 모은 용돈
이승에서의 전 재산,
쉰이 넘은 자식을 아직도 막내라서
널 두고 우째 눈 감을꼬,
널 두고 우째, 우째 하시드니
섣달 초이레,
그리 무거운 짐 아직 벗지 못하셨는지
날도 저물기 전 낮달로 와서
메마른 감나무가지 어루만지고 있네요
-낮달/이문재-
일터는 동쪽에 있어야 한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동트는 걸 보며 집을 나서고
노을을 향해 돌아와야 한다고 하셨다
언제나 앞이나 위에
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낮달이 떴다
늙은 아버지가 나를 낳으신 나이
나는 아직 아버지가 되지 못하고
동가숙 서가식 동문서답
그러나 낮달이 낮잠을 잘 리 없다
낮에도 하늘 가득 별이 떠 있는 것이다
낮에도 총총한 별을 생각하면
나를 관통하는 천지 사방의 별빛들을 떠올리면
내가 중심이다 너와 내가 우리가
저마다 분명하고 힘차고 겸손한 중심이다
낮달을 보며 중얼거린다
이것을 누가 당신에게 읽어 줬으면 좋겠다
당신이 이것을 누구에겐가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
-낮달/이가영-
생강나무 그늘을 보면 매콤한 냄새가 난다
아롱거리는 냄새 맡고 있으면
어느새 생강꽃은 은근한 햇볕에
샛노란 카레 빛깔로 북적북적 끓어오른다.
꽃샘추위 물러가고 배곯은 머리 흰 바람
자박자박 무료급식소 용케 알고 찾아온다
두류공원 시계탑, 그 앞에 나무 사이사이
신문지 깔고 앉은 바람이 생각보다 많다.
서로 모르는 비둘기도 구름도 한 자리에 모이는 날,
입맛 잃은 백양나무 두 그루처럼 나도
북적거리는 그 자리에 힐끔거리며 서 있었다,
세상의 길이 반들반들하다.
부축해 온 바람이 말끔히 비운 접시를 땅에 떨어뜨릴 때
몸보다 마음이 먼저 봄하늘에 오백년 된 쪽배로 떠 있다.
-낮달/박종인-
건너 뛴 혈압약이 친정어머니를
병원시트에 눕혔다
머리맡 링거 병은 낮달처럼 떠있고
골 깊은 얼굴을 바라보며
울가망한 얼굴들이 둘러앉았다
하늘 귀퉁이 희미한 낮달
거기 달이 있었던가
하늘을 바라보던 때는 한참을 지났다
우리는 모두 바람이거나 구름이었다
맥박을 따라 똑똑 링거액이 떨어지고
흐린 망막에 초점이 돌아온다
몸을 한 바퀴 돌아나온 달빛이
주르르 눈물로 흘러내린다
달빛 한 줌 스며들어
가라앉은 어머니를 들어올린다
-벼랑 위의 낮달/이용헌-
제비가 집을 짓는다
변산반도 민박집 처마 아래
제비가 집을 짓는다
‘서해민박’이라 쓰인 견고딕체 간판 위에
제비가 집을 짓는다
‘서’ 자도 아니고 ‘해’ 자도 아닌
‘민’ 자 건너 머무를 ‘박泊’ 자 위에
제비가 곰비임비 방점을 찍는다
초여름의 땡볕이 등줄기에 쏟아지는 오후
갯바람도 개 혓바닥처럼 헉헉대는 산기슭
제비는 제 침을 퉤퉤 뱉어 뭉친 흙으로
잠시 머물 토담집을 짓는다
난생처음 지어보는 집
한철 쓰면 비워줘야 할 벼랑 위의 집
한 번 떠난 여자는 다시 돌아오지 않고
간밤 파도와 깡소주 퍼대다 일어난 민박집
제비가 온종일 낮달을 찍어 나른다
허공에서 완성되어가는 저 반달 같은 집 한 채
아니, 반쪽짜리 내 방 한 칸
-낮달 크로키/이영식-
맨발이다, 저 한낮의 순례자
닳고 닳아
미농지처럼 얇아진 알발
구름 조각보로 슬며시 감싸보는데
오늘밤
들림을 꿈꾸는 노파의 묵기도 속에는
하늘 강 거룻배로 떠오는데
빈 밥그릇 핥던 누렁이가
풀쩍 뛰어올라 물고 떨어지는
흰 뼈 한 토막
외눈이부처 손바닥 위인 줄도 모르고
벌새는 윙윙 속도전이다
쉿! 지상의 꽃들 낮거리를 시작한다
-낮달/나호열-
바람이 슬며시 옷자락을 당기듯이 당신을 생각할 때
오래된 구두를 깁고 잇는 내 모습이 어른거린다
슬픈 짐승의 가죽 같은 가슴은 피의 더운 색깔을 지워버리고
단단히 동여매었던 이야기는 실밥이 터져버렸다
아직은 걸어야 할 길이 더 남았다는 듯이 내가 깁고 있는 것은
구두가 아니라 구두의 전생
문장이 되지 않는 긴 강을 바라보거나 매듭이 풀리지 않는 바람을
잡아 보는 것 그것들이 나에게 기쁨이 되기까지 아니, 잊혀지기까지
얼마나 깊은 뒤안길이 필요했을까
그리하여 가끔 밑창을 뚫고 걸음을 절룩이게 만들었던 구두를 벗어
구두가 껴안았던 못을 경배한다
멀리 간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주 떠나버린 것도 아니었다
생각의 구두점처럼 당신의 발자국은 내 가슴에서 맴돌았던 것이다
낡아서 더 이상 기울 수도 없는 추억은 푸르다
출렁거리는 하늘에 기우뚱 낮달이 기운다
-낮달/전태련-
해가 신다 벗어놓고 간 빛바랜 신발이
서쪽 하늘에 버려져 있다
삼백육십오 일 너무 오래 신어 헐거워진 신발 한 짝
벗겨진 줄도 모르고 귀가가 늦어진 해는 황급히 집으로 돌아가고
개밥바라기 별 하나 밥풀처럼 붙어 있다
-낮달의 비유/문태준-
내 목숨이 서서히 무너지고 싶은 곳
멀리서 온 물컹물컹한 소포
엷은 창호문과 성글은 울
찬물 한 그릇이 있는 마루
꽃도 새도 사람도
물보다 물렁하게 쥐었다 놓는,
식었던 아궁이가 잠깐만 환한,
내 귓속에 맑게 흐르는 이별의 말
자루에서 겨처럼 쏟아져 내리다 흰빛이 된 말
-낮달/이영식-
거울 속처럼 고요한 날
양지바른 블록담 아래
노인들이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빈 부대자루처럼 접힌 몸
번갈아 의자에 부렸다 세우며
명함판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햇발 참말 좋아
잎새들 초록초록 혀를 내미는데
이승의 끝자리, 마지막
그 밤을 지킬 모습이라니!
얼굴은 오래된 놋쇠 빛이 되고
끊었던 담배에 손이 자꾸 가는데
주름 활짝 펴 웃으라는
빵모자 사진사의 주문에
덩굴장미만 벙긋벙긋 피어나는
날도 억수 좋은 날
영정처럼 떠 있는 돛배 하나
늙은 복사나무 가지에 걸립니다
-낮달/이 규 리-
무슨 단체 모임같이 수런대는 곳에서
맨 구석 자리에 앉아 보일 듯 말 듯
몇 번 웃고 마는 사람처럼
예식장에서 주례가 벗어놓고 간
흰 면장갑이거나
그 포개진 면에 잠시 머무는
미지근한 체온 같다 할까
또는, 옷장 속
슬쩍 일별만 할 뿐 입지 않는 옷들이나
그 옷 사이 근근이 남아 있는
희미한 나프탈린 냄새라 할까
어떻든
단체 사진 속 맨 뒷줄에서
얼굴 다 가려진 채
정수리와 어깨로만 파악되는
긴가민가한 이름이어도 좋겠다
있는가 하면 없고, 없는가 하면 있는
오래된 흰죽 같은
[돌샘 이길옥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