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장좌 착좌 "교회는 주일만의 교회가 아니라 생활 속에 교회와 신앙을 뿌리박고 교회 안에 사회를 심어 주고 성직자는 교회 안에 교회를 심어 주어야 합니다. 현재까지 우리 나라 천주교는 신앙을 구하러 교회에 찾아오는 방식이었으나 앞으로는 사회속으로 찾아가는 자세로 교회를 이끌도록 하겠습니다."(경향신문 1968.4.29)
교황 바오로 6세 알현
추기경 서임(로마 베드로 대성전. 1969.4.30~5.1)
"(추기경 임명 소식을 처음 들은 곳은) 일본 후지산 기슭에 있는 ''작은 자매회'' 수련원에서였지요.
죠치대학 재학 시절의 은사였던 게페르트 신부님께서 전화로 알려 주었습니다.
그 때 제가 처음으로 한 말은 ''임파서블'' (불가능하다)이라는 한마디였습니다.
교회 일로 로마에 들렀다가 일본을 거쳐서 귀국하는 길에 공항에 나가기 위해 택시에 오르기 직전이었습니다.
택시 속에서도 반신반의하면서 1킬로미터 아래쪽에 위치한 성신학교 수도원에 도착했습니다.
신자들이 꽃다발을 안겨 주며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실감으로 느껴졌습니다" ( <주간조선> 1969.4.6 인터뷰)
추기경 반지 수여
대주교 김수환 추기경 서임 (1969.4.28)
명동대성당
일본 죠치(上智)대학 유학 시절
(1941~1943)
사제서품후 어머니와 함께
군종 신부로 입대하는 형님 김동한 신부와 (대구 주교관 앞, 1951)
역경의 시절, 학병 - 앉은 이는 전석재 신부
가족사진 (1944.1)
-앞줄 가운데 추기경의 이모님과 어머니(안경 쓰신 분), 뒷줄 왼쪽 부터 셋째 형님(필수) 내외, 추기경, 넷째 형님(동한, 당시 신학생), 큰 누님, 작은누님
"우리 아버지는 내가 국민학교 일학년 때 돌아가셨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별로 많지 않은데, 마음씨 착한 전형적인 충청도 양반이셨다. 우리 어머니는 본시 성품이 곧으신 분이셨고 거짓이나 불의와는 일체 타협할 줄 모르는 분이었다. 특히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아비 없는 자식' 이라는 말을 들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그만큼 자식들 교육에 엄격하셨다. … 나는 우리 어머니가 낳은 여덟 명의 아들 딸 중 막내였다. 위의 형이나 누이들은 가난과 잦은 이사 때문에 공부를 시키지 못하셨는데 내 바로 위의 형과 나만은 그런 궁핍 속에서도 공부를 꼭 시키고 싶으셨던 것 같다. … 어머니는 자식들의 교육에는 엄하셨지만 먹는 것, 입는 것은 마치 부잣집처럼 먹이고 입히셨다. 그 대신 사치란 있을 수 없었고 심지어 엿이나 과자 같은 군것질도 할 수 없었다"
(<샘이 깊은 물>, 1984.11)
진해 성당 방문
추기경 반지 수여
서임식
"추기경 서임(로마 베드로 대성전, 1969.4.30 ~5.1)
"(추기경 임명 소식을 처음 들은 곳은) 일본 후지산 기슭에 있는 '작은 자매회' 수련원에서였지요. 죠치대학 재학 시절의 은사였던 게페르트 신부님께서 전화로 알려 주었습니다. 그 때 제가 처음으로 한 말은 '임파서블' (불가능하다)이라는 한마디였습니다. 교회 일로 로마에 들렀다가 일본을 거쳐서 귀국하는 길에 공항에 나가기 위해 택시에 오르기 직전이었습니다. 택시 속에서도 반신반의하면서 1킬로미터 아래쪽에 위치한 성신학교 수도원에 도착했습니다.
"교회는 주일만의 교회가 아니라 생활 속에 교회와 신앙을 뿌리박고 교회 안에 사회를 심어 주고 성직자는 교회 안에 교회를 심어 주어야 합니다. 현재까지 우리 나라 천주교는 신앙을 구하러 교회에 찾아오는 방식이었으나 앞으로는 사회속으로 찾아가는 자세로 교회를 이끌도록 하겠습니다"
(<경향신문> 1968.4.29)
착좌식이 거행된 명동 성당
*서울대교구장 착좌식 (명동 성당, 1968.5.29)
"당시 매스컴이나 사회의 관심은 한 개인에 대한 기대라기보다 가톨릭 교회에 대한 기대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어려운 고비 때마다 '교회만은' 하는 바람이 사회 저변에 깔려 있었다고 봅니다. 연륜도 짧고 주교로서도 가장 막내인 제가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된 것은 정말 뜻밖이었습니다. 그때 서울대교구는 재정을 비롯해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누군가는 져야 할 짐' 이라는 생각에 임명을 수락했습니다"
(<가톨릭 신문> 1993.4.25 대담)
진해 성당 방문
기념 상본(앞,뒤)
추기경 서임 축하 미사(성신중·고등학교, 1969.5.20)
김대건 신부 동상 제막식(절두산, 1972.5.14)
7.4 남북 공동 성명과 8.3 긴급 조치에 대한 메시지 발표(CCK, 1972.8.9)
"본인은 7.4 남북 공동 성명과 8.3 긴급 재정 명령 등으로 소연한 현 시국에 즈음하여 한국 천주교회를 대표하여 국민의 각오와 시국에 대처할 태세 정비를 촉구하는 뜻에서 다음과 같은 소신을 밝히는 바이다.
-1. 우리는 7.4 공동 성명이 영구히 전쟁 수단을 포기하고 대화로써 조국의 통일을 달성하는 디딤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남북의 정치가들이 이 약속을 성실히 지키기를 간곡히 부탁하고, 이것을 평화를 위장한 전쟁 준비의 수단이나 권력 정치의 기만 전술로 이용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민족과 더불어 엄숙히 경고한다.
-2. 최근에 실시된 8.3 긴급재정명령으로 야기된 현실 앞에서, 정부의 보호와 특혜에도 불구하고 국가 경제를 이 지경에까지 몰아붙인 책임 있는 기업인들에게 국민의 이름으로 엄중히 문책함과 동시에, 경제 제일주의를 표방한 정부가 국가를 파산지경에 이르도록 무책임하게 영도해 온 데 대하여 피를 바쳐 나라를 지키고 땀을 바쳐 봉사해 온 모든 애국 시민의 이름으로 엄중히 항의하고 맹성을 촉구한다.
-3. 국민이 개인으로나 단체로서 국가 생활과 국가 통치에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끔, 언론.출판.집회.결사.신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공명한 선거와 균등한 기회와 안정된 환경을 확보하는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만이 남북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는 담보임을 우리는 굳게 믿는다"
(<현 시국에 관한 메시지>, 1972.8.15)
지학순 주교와 함께(1974.7.23)
" '이분의 삶을 지배하였던 것은 무엇이었던가' 하고 묻는다면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인간에 대한 사랑, 나라와 겨레에 대한 애국 애족심이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 지 주교님이 유신 독재에 항거하여 일어선 동기는 남달리 강하게 지니셨던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이분은 고통받는 이가 누구이든지, 신자 비신자 관계없이 이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으며 그들을 위하여 무언가를 해주지 않고서는 마음이 편치 못한 성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특히 가난과 고통이 본인의 탓이라기보다 억압 정치와 구조 악에서 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때 이에 대한 지 주교님의 의분은 불과 같았고 정의를 위해 개혁을 위해 결연히 일어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학순 주교 장례 미사 강론, 1993.3.16)
-긴급조치 1호.4호 위반 혐의로 7월6일 구속되었다가 풀려 난 지학순 주교는 이날 '양심선언'을 하였고, 8월에 다시 투옥되었다.
목동 재개발 지역 방문
79위 순교 복자 시복 50주년 현양대회(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1975.9.28)
"순교자들은 무엇보다도 사랑의 증거자입니다. 순교는 사랑의 증거 중에서 가장 크고 훌륭한 증거입니다.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입니다' (마태 16,25) 하신 그리스도께서 몸소 실천으로 우리에게 십자가위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순교자들처럼 비록 죽음을 통한 사랑의 증거는 할 수 없더라도 우리는 제각기 자기에게 주어진 처지에서 최대로 사랑의 증거를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79위 시복 50주년과 화홰의 성년을 지내면서 이 사랑의 실천으로 개인과 공동체의 화해나 쇄신을 촉구해야 하겠습니다. 순교 복자들을 모범으로 삼고 외부 행사보다는 우리 자신의 내부의 쇄신에 중점을 두고 그리스도의 참된 모습이 더욱 빛나도록 날로 더욱 정화되고 쇄신되어 나가기를 바랍니다"
(당일 미사 강론)
사제 수품 25주년 기념 미사(1976.9.15)
철거민촌 방문(양평동, 1977.4.7)
철거 앞둔 양평동 '복음자리'에서 마지막 미사
서독 주교 회의 의장 회프너(HÖffner) 추기경 방한(1978.3.4)
"제가 그리스도교 사회학을 배우고 익혀 그 기반을 닦기까지 저는 그분(회프너 추기경)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교회의 사회 교리의 원리에 관한 그분의 강의는 지금까지도 매우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분은 '그 빛은 진리요, 그 목적은 정의요, 그 원동력은 사랑' 이라는 교회의 사회 교리를 외치셨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적용하셨음을 저는 확신합니다. 사회 교리는 이론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실천을 위한 기초이며 동기입니다. 실천은 사회 교리에 대한 신뢰를 주고, 그것을 확산시키는 하나의 효과적인 방법인 것입니다. … 그분은 수많은 학문적 업적과 활발한 사목적 활동을 통해서 교회의 구성원 모두에게 그들 개개인의 역할과 소명과 환경에 따라 정의와 평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항상 용기를 북돋워 주셨습니다. 그분은 평신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행실로 현세 삶을 활기 있게 하도록 격려하셨습니다. 그분은 사회 교리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 그리스도인의 시각을 전하도록 사회의 의사 결정 과정에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특별히 고무하셨습니다"
(회프너 추기경 서거 10주년 추모강연, 2000.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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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즉위식(1978.10.22)
"우리는 하느님께서 뽑기를 원하신 분을 교황님으로 선출했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추측, 현대 과학에서 자랑하는 컴퓨터의 계산 결과가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분인 폴란드 출신의 보이티야 추기경이었습니다. 450여 년 만에 탄생한 비이탈리아인 교황님을 모시는 그 시간, 신자들의 열광적인 환성,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 말씀을 하시는 교황님의 패기에 찬 모습. 모두 잊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교회 역사에 새 장이 펼쳐지는 감격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교황님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닫힌 문들을 여십시오!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의 힘을 믿고 그분께로 힘차게 나아갑시다. 두려워하지 말고 국가와 경제의 경계, 정치 체제 및 여러 문화의 넓은 광장, 문명과 발전의 경계의 문을 여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는 인간의 배후에 무엇이 있는지 아십니다. 오직 그분만이 아십니다'라고 외치셨습니다"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신앙 대회(여의도, 1981.10.18)
한국 주교단 교황청 정기 방문(로마, 1980.10.14~23)
마더 데레사 수녀 방한(1981.5.3~6)
추기경 회갑 축하연(뉴욕 퀸즈 성당, 1982.5.4)
인류 복음화성 회의 참석(로마, 1983.4.19~22)
순교자 유해 참배(절두산 성당, 1984.5.3)
시성 청원
"지극히 공경하올 교황 성하, 자모이신 성교회는 복자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와 바오로 정하상 외 101위 한국 순교자들을 전세계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이 성인으로 받들어 공경할 수 있도록 성하께서 친히 성인 명부에 올려 주시기를 청원하는 바입니다"
성 김대건 신부 동상 제막식(필리핀 마닐라, 1986.5.22)
가톨릭 농민회 20주년 축하연(명동 성당, 1986.11.2)
상계동 철거민들과의 성탄 미사(1986.12.24)
명동 성당의 예수 성심상 축복식(1987.11.22)
제44차 세계 성체대회(1989.10.4~8)
-장엄 미사(여의도, 1989.10.8)
제44차 세계 성체대회(1989.10.4~8)
-'평화의 날' 행사(올림픽 체조 경기장, 1989.10.4)
제44차 세계 성체대회(1989.10.4~8)
-교황 이한(1989.10.9)
평화방송 개국 축하 리셉션(롯데 호텔, 1990.4.16)
'평화의 집' 방문(금호동, 1990.6.16)
출소자들의 재활 가족 공동체인 '평화의 집'을 방문한 추기경은 '제2의 평화의 집'을 마련하기 위해 남방 셔츠를 만들고 있는 봉재방을 둘러보며 격려하였다.
한국 주교단 교황청 정기 방문(로마, 1990.10.10~20)
'내 탓이오' (교구청 앞마당, 1990.9.24)
한국 천주교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가 펼친 신뢰 회복 운동에 동참하여 '내 탓이오' 스티커를 승용차 뒷 유리에 붙이고 있다.
가톨릭대학 신학대학장 이·취임 미사(가톨릭대학, 1991.9.2)
레지오 마리애 창립 70주년 기념 미사(잠실 종합 운동장, 1991.9.7)
"믿음과 겸손과 사랑, 이것은 레지오 마리애의 정신이요 특성입니다. 그 때문에 레지오 마리애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지식이나 지위의 고하, 신분상의 구별도 없이 누구나가 참여할 수 있는 보편성을 띠고 있습니다"
(당일 미사 강론)
동두천 성당 봉헌 및 축하식(1992.10.18)
영화<서편제>를 관람하고(단성사, 1993.5.25)
-왼쪽부터 정일성 촬영 감독, 주연 배우 오정해, 임권택 감독, 추기경
성탄 구유 경배(명동 성당, 1993.12.24)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첫 미사(명동 성당, 1994.4.24)
"필리핀의 전 대통령이신 코라손 아키노 여사가 연초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 저는 이곳에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미사를 드리겠노라고 약속한 바가 있습니다. … 여러분들은 고향과 가족을 두고 여러분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머나먼 나라인 한국으로 떠나 왔습니다. 여러분은 때로는 향수병으로,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떨어져 있음으로 해서 힘드시리라고 생각합니다. … 설상가상으로 여러분은 때때로 부당하거나 혹독한 대우를 받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는 끔찍한 일이며, 저는 그와 같은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길 바라고 기도합니다"
(당일 미사 강론)
안동교구 설정 25주년 기념 신앙 대회(안동시민 운동장, 1994.5.29)
서울대교구 사제 서품식(올림픽 체조 경기장, 1994.7.12)
장익 주교 수품 및 춘천교구장 착좌식(춘천 죽림동 성당, 1994.12.14)
평화방송 케이블 TV 개국 축하 행사(평화방송, 1995.3.1)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학생들과의 만남(교구청, 1995.6.5)
<열린음악회>출연 (가톨릭대학교, 1995.9.12)
추기경은 이 자리에서 <애모>를 열창하였는데, 공식적인 음악회에서 처음으로 가요를 불러 관객들의 호응을 받았다
영화<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관람 후 전태일 모친 이소선 여사와 함께(서울극장, (1995.12.3)
미국 가수 마이클 잭슨의 방문(집무실, 1996.10.14)
백두산 천지에서
"(백두산은) 민족의 영산이라는 말답게 참으로 신비로운 곳이다. 천지가 구름 사이로 오락가락하는 것이 마치 하느님께서 인간과 숨바꼭질하는 것 같았다. 천지 건너편의 북녘 땅을 바라보면서 민족 분단의 아픔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꼈다"
김대건 신부 유해 앞에서 기도(상하이 金家巷 성당 내 김대건 신부 기념관, 1997.8.21)
한국 주교단 교황청 정기 방문(로마, 1996.3.20~26)
독도 방문(1996.4.23)
청년 성서 모임 젊은이 큰 잔치 미사(목동 성당, 1996.9.1)
기념 표징(emblem)
청소년들이여, 꿈과 희망을! (KBS 홀, 1997.10.9)
서울대교구 전산 개발 1단계 완료 개통식(1997.12.24)
추기경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전자 우편으로 성탄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성탄 미사(효경원, 1997.12.23)
김수환 추기경 교구장 착좌 30주년 및 명동 성당 축성 100주년 기념 현수막
명동 성당 축성 10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한 내빈들과 함께(1998.5.29)
명동을 떠나며(1998.6.22)
"송별 미사 강론에서 저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참으로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사도 바오로와 같이 저도 여러분을 위해서라면 피를 흘리고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습니다' "
(<생활성서> 창간 15주년 기념 미사 강론, 1998.8.3)
정진석 대주교 제13대 서울대교구장 착좌식(명동 성당, 1998.6.29)
화훼 마을 화재 현장 방문(장지동, 1992.2.15)
2월15일 설날을 맞아 화재로 임시 천막 생활을 하는 화훼 마을 주민들을 방문하여 이재민들을 위로하고 있다.
첫댓글내가 추기경님한테 결정적으로 한 눈에 반한 데는 계기가 있었다. 언젠가 추기경님이 KBS ‘열린 음악회’를 관람하러 오셨을 때 일이다. 여자 진행자가 그 분께 마이크를 들이대며 노래 한 곡을 부탁했다. 추기경님은 별 머뭇거림 없이 마이크를 잡으시더니 담담하게 김수희의 ‘애모’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라는 가사의 대중가요가 추기경님의 목소리로 불려지자 희한하게도 성가곡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어느 설교나 강론보다도 위대하게 들렸다. -조영남-
첫댓글 내가 추기경님한테 결정적으로 한 눈에 반한 데는 계기가 있었다. 언젠가 추기경님이 KBS ‘열린 음악회’를 관람하러 오셨을 때 일이다. 여자 진행자가 그 분께 마이크를 들이대며 노래 한 곡을 부탁했다. 추기경님은 별 머뭇거림 없이 마이크를 잡으시더니 담담하게 김수희의 ‘애모’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라는 가사의 대중가요가 추기경님의 목소리로 불려지자 희한하게도 성가곡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어느 설교나 강론보다도 위대하게 들렸다. -조영남-
그리고 추억이 있는 한 당신은 나의 친구요. 라고 노래하시던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영원 안식을 누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