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경주김씨 인복종친회
 
 
 
 

카페 파이

  1.  
  2.  
  3.  
  4.  
  1.  
  2.  
  3.  
  4.  
 

회원 알림

 

회원 알림

다음
 
  • 방문
  • 가입
    1. 김민철
    2. 사람
    3. 정겨운사람
    4. 초산
    5. 촌장
    1. 민박사
    2. 김은비
    3. 여정범
    4. 김지태
    5. 김일동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역사 교양 지혜 스크랩 김천 청암사와 수도암 - 비구니들의 승가대학
성기숙 추천 0 조회 151 18.03.18 07:46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비구니의 승가대학이 있는 김천 청암사와 수도암

 

 

청암사 대웅전 영역

 

청암사라는 이름은 물이 맑아서 바위가 푸르게 보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청암사는 한국불교 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의 말사로 신라 헌안왕 3년(859)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 된 유서 깊은 천년 고찰이다.

 

인조 25년과 정조 3년에 각각 화재로 전소되는 피해를 입었으나 재건되어 불사를 이어오다가 1897년에 폐사되었다, 1900년대 초에 극락전을 복원하면서 다시 문을 열었으나 1911년에 화재로 또 다시 소실되어 이듬해 주지인 대운(大雲)스님이 복구를 하였다.

 

경내에는 두주불사하던 고봉(古峯)스님(1890~1961)의 승탑이 있으며, 일제 강점기에 박한영(朴漢永, 1870~1948)이 머물며 강론을 하는 등 불교 강원으로 맥이 이어졌다.

1987년에 강주 지형(講主 志炯)스님이 승가대학(僧伽大學)을 설치하여 비구니의 수학장(修學場)이 되었다

 

 

불령산 청암사의 일주문

 

청암사 바로 앞까지 승용차로 갈 수 있으나

천왕문 앞에 주차를 하고 대운당비각과 회당비각을 본 뒤

좁은길로 들어가는 것이 '우비천'이라는 우물도 볼 수 있고 경치도 더욱 운치가 있다

5분이면 갈 수 있다

 

 

일주문의 ‘불령산 청암사’편액은 근세의 명필 성당 김돈희(1871~1936)의 글씨이고 천왕문 오른쪽에는 회당, 대운당 2개의 비각과 청암사사적비를 비롯한 여러 개의 비석들이 나란히 서있다.

 

회당 비각의 주인공은 조선시대 화엄학에 정통한 대강백(강사의 존칭) 회암 정혜스님(1685~1741)이다.

이 비의 비문은 영조 때 우의정을 지낸 귀록 조현명(1690~1752)이 지었는데 승려가 멸시받던 조선시대에 이만한 벼슬아치가 불가의 비를 적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귀부의 조각은 뛰어난 편이 아니지만 해학적이고 명랑한 모습이다.

 

 

왼쪽 큰 건물부터 천왕문, 대운당비각, 회당비각이다

천왕문 우측에 회당비각과 대운당大雲堂 비각 및 청암사 사적비가 서있다.

화엄학으로 이름을 날렸던 회암 정혜스님의 비각은

영조 때 우의정을 지냈던 귀록歸鹿조현명趙顯命이 지었으며

대운당 비각은 청암사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대운당의 비

 

 

 

회당비각 옆의 비석중에는 "상궁정신녀천씨정공심공덕비"라는 비가 있다.

조선시대 상궁(尙宮)인 이 사람과 청암사는 어떤 깊은 인연을 맺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불사를 일으킬때의 보시와 관계가 있지 않을까 싶다

 

 

대운당비각은 청암사를 모두 보수하고 극락전을 새로 지으며 제2의 중흥기를 맞게한 대운스님을 기리는 비석을 모셔둔 곳이다

 

청암사는 조선 인조 25년(1647년) 큰 화재로 절이 전소된 것을 재건했으나 이로부터 130여년 뒤인 정조 6년(1782년) 다시 불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는 큰 피해를 입어 이때도 바로 다시 세웠다.

그 뒤 점차 쇠락해 가던 청암사가 새로워지는 것은 광무 1년(1897년). 대운(大雲)스님이 8년에 걸쳐 청암사를 모두 보수하고 극락전을 새로 지으면서 제2의 중흥기를 맞았다.

그러나 보수를 끝낸 지 6년만인 1911년 9월 다시 원인 모를 화재가 일어나 극락전과 백련암을 제외한 청암사를 모두 불태운다. 그러자 대운스님은 1912년 봄에 청암사를 다시 세웠다. 그때의 모습이 지금 청암사다.

  

이런 화마를 극복하는 데는 ‘여인’들과의 인연이 큰 도움이 되었다.

숙종의 둘째 왕비인 인현왕후가 장희빈의 무고로 폐서인이 되었을 때 청암사 보광전에서 기도를 드렸고 그 인연으로 청암사는 왕실의 후원을 받았으며 조선 말기까지 상궁들이 내려와 신앙생활을 하기도 했었다.

 

 

 

김천고등학교 교정에 있는 최송설당의 동상

 

 

 

 

 

대운스님이 청암사를 두 차례에 걸쳐 보수할 때 대시주(大施主)를 한 사람이 최송설당(崔松雪堂 1855~1939)이다. 김천 출신으로 영친왕의 보모상궁이었던 최송설당은 영친왕의 생모인 엄비와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많은 재산을 모았다.

대운스님은 그녀를 통해 많은 궁녀들의 시주를 얻을 수 있었기에 짧은 기간에 큰 불사를 두 차례나 일으킬 수 있었다.

 

최송설당은 김천중고등학교를 설립하기도 했으며,여류시인으로 1922년 ‘송설당집’3권을 펴냈다.

허철회의 논문에 따르면 최송설당은 50편의 가사와 한시 258수를 지었다고 하며, 내방가사 작가 중 최다의 작품을 남겼고,은촌 조애영의 내방가사에 영향을 주고 계보를 전했다고 한다.

청암사 사천왕문 오기 전의 길 오른쪽 바위에는 ‘최송설당’ 이라는 붉은 각자가 새겨져 있다.

  

 

천왕문을 지나 청암사 입구에는 수많은 각자가 새겨진 바위벽이 있고 길 옆에 작은 샘물이 있다

 

 

 

 

경내에 들어서면 왼쪽으로 부도전이 있다

고봉 대운스님의 승탑과 조성비, 그리고 몇기의 부도가 있다

 

 

 청암사 입구에 있는 고봉스님의 승탑

 

 부도전에 있는 여러기의 승탑

 

 

 

현재 직자사의 말사인 청암사는 858년(헌양왕 2) 도선국사가 창건하였고 혜철이 머무르기도 하였다.

조선중기에 의룡율사가 중창하였고 1647년에 화재로 불타버리자 벽암스님이 허정을 내어 중건하였으며 1782년(정조 6)에 다시 불타자 환우와 대운스님이 20여 년이 지난 후에 중건하였다.

그 뒤 189년 중에 폐사가 되었다가 여러 차례 중건과 화재를 거듭한 후에

1912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고

남아있는 절 건물은 대웅전, 육화전, 진영각, 전법루, 일주문, 사천왕문 등이 있고

산내 암자로는 개울 건너에 극락암과 부속암자로는 수도암이 있다

 

  

이 석물은 비의 대석인 귀부로 보이나 파손이 심하다

 

 

청암사는 계곡을 사이에 두고 두 구역으로 나뉜다. 계곡 북쪽의 낮은 곳에 남향하여 양지바르게 자리 잡은 대웅전영역과 그 남쪽 언덕 위에 동향한 극락전·보광전 영역이다.

 

대웅전 영역에는 지방 문화재로 지정된 1900년대 초에 세운 청암사 대웅전(경북 문화재자료 제120호)과

조선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다층석탑(경북 문화재자료 제121호) 그리고 승가대학의 중심을 이루는 육화원이 있으며 극락전영역에는 조선시대 사대부 가옥형태의 극락전과 인현왕후의 원당이었던 보광전(경북 문화재 자료 제288호)이 있다

 

청암사는 학풍 또한 드높았던 곳으로 박한영 스님, 고붕 스님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 학승들이 강론처로 삼았으며 전성기에는 300명 이상의 학인이 있었다. 그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영남에서 으뜸가는 불교강원으로 손꼽히고 있으며 비구니들의 승가대학이 들어서 있다

 

비구니들의 승가대학은 청도 운문사, 공주 계룡산 동학사, 수원 봉녕사, 전남 화순 유마사  등 여러 곳이 있지만 이 곳의 분위기는 학문을 닦기에 가장 좋은 곳이 아닐까 싶다

 

    

 

 

대웅전(大雄殿).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대웅전 안에는 목조석가여래좌상과 후불탱, 산신탱, 신중탱, 칠성탱, 독성탱 등 여러 점의 탱화와 소종(小鐘), 수번(繡幡)이 있다고 하는데 문이 닫혀 있어 볼 수가 없었다.

 

대웅전의 연혁은 신라 헌안왕 3년(859)창건, 조선 인조 25년(1647년)에 제 2차 중창, 정조 6년(1782년)에 제 3차 중창을 거쳐 유지해 왔는데 일제시대인 1911년 9월 21일 밤의 화재로 전소되어 대운대사가 이듬해 봄부터 3년에 걸쳐 제 4차로 중창한 것이 지금의 대웅전이다.

대운대사가 4차 중창을 끝내고 1912년 중국 청나라 말 강소성 영흥사으로부터 석가상을 조성 받아 대웅전에 봉안하고 1914년에는 보전이 이루어졌는데 협시보살 없이 혼자 모셔졌으며 불상은 붉은색 계주와 진홍빛 가사 안자락 등 청나라 말기 불상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석상과 주련

 

대웅전 앞에는 해태상인지 사자상인지 분명하지 않은 석상이 양쪽에서 대웅전을 지키고 있다.

청도 운문사 대웅전(구) 앞에도 이와 비슷한 상이 있는데 대웅전과 이 석상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청암사의 대웅전은 청기와로 지붕을 덮었으며 특이하게 주련이 별도의 판자에 적거나 새겨 붙이지 않고 기둥에 바로 적혀있다. 사자상(?) 뒤의 대웅전 기둥에 주련이 적혀 있는 것이 보인다 

 

 

 

대웅전의 오른쪽에 있는 육화료

 

  청암사 승가대학이라는 팻말이 기둥에 붙어 있다

 

 

스님들의 신발 번호표

 

육화료(六和寮)

 

 

새을(乙)자 형에 귀틀을 지닌 전각으로서 108평이나 되는 넓은 방을 가진 승가대학의 중심을 이루는 건물이며 스님들의 대방채로 쓰이고 있다

(대방채-스님들이 요사와 선방, 그리고 강당의 역할까지 다용도로 쓰이는 집) 

 

육화란 깨달음을 구하고 깨끗한 행을 닦되, 서로 친절하고 경애하는 신(身), 구(口), 의(意), 계(戒), 견(見), 이(利) 등 여섯 가지 법으로서 화합하여 마침내 사자굴 안에서는 모두 사자가 되고, 전단나무 숲에서는 순전히 전단나무가 되어야 한다는 승가의 실천 내용이라고 한다.

  

1. 신화공주(身和共住)- 남의 희생을 전제로 자기만 잘 살려고 하지 말아라

2. 구화무쟁(口和無諍)- 모든 다툼은 입에서 비롯되니 서로 말을 조심하라

3. 의화동사(意和同事)- 자기 주장만 내세우고 남의 주장을 무시하지 말라

4. 계화동수(戒和同修)- 만인은 평등하니 모든 계율을 잘 지켜라

5. 견화동해(見和同解)- 옳은 것을 그르다고 그른 것을 옳다고 왜곡하지 말라

6. 이화동균(利和同均)- 모든 이익은 공동체 구성원에게 골고루 나누어라

  

 

다층석탑(多層石塔)

 

  

 4층으로 세워진 다층석탑의 상층 기단에는 활짝 핀 연꽃이 조각되어 있고

갑석의 탑신받침에는 복련의 작은 연꽃이 새겨져 있다.

1층 탑신에는 좌불상이 한 면에 한 기씩 새겨져 있다

 

 

 

 1층 탑신에 새겨진 좌불상

 

 

 

청암사 주지 대운대사가 청암사 중건(1912년)시 성주땅 어느 논바닥에 있던 것을 옮겨 왔다고 전해지는

조선 후기의 탑이다.

 4매의 지대석위에 2층 기단으로 되어있고, 1층 옥신에는 4면에 좌불이 1구씩 양각되어 있다. 각층 옥신에 비해 옥개석이 넓으며 옥신 받침이 없어 다소 불안정하고 옥개석의 전각은 반전되었으며 상륜부는 일부만 남아 있다.

아래층 기단이 너무 높고 위층 기단은 너무 좁아 안정감이 없으며 지붕돌과 몸돌의 비례감이 맞지 않아 전체적으로 가냘프면서도 불안정해 보이나 약간은 쾌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 탑이다.

높이는 4.21m 이다

원래 오층탑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1개 층의 옥개석과 탑신을 수합하지 못하여 4층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이름을 다층탑이라 부른 것 같다. 아무래도 4층탑이라고는 할 수 없으니까.......

 

  

극락전(極樂殿)

 

 

극락전은 대웅전에서 앞쪽으로 보이는 언덕 위에 보광전과 함께 있다.

따라서 대웅전 앞의 극락교를 건너 계단을 따라 조금 올라야 한다  

 

극락전 앞에는 채전밭이 펼쳐져 있다

 

사대부집의 일반가옥을 닮은 극락전-솟을 대문이 이채롭다

 

 

특이한 형태의 극락전 건물 뒷면

극락전 건물은 앞에서 보면 ㄱ 자 형태이나 뒤에서 보면 ㄷ자 형태를 지닌 특이한 구조이다

 

극락전의 계좌난간

 

극락전 마루 구석에 놓여있는 불두

 

극락전은 입구의 텃밭과 돌담, 그리고 솟을 대문 등의 건축 구조가 사찰이라기보다는 마치 양반집 사랑채 같은 편안함을 준다. 

 

극락전이 있는 건물은 조선시대 숙종의 왕비였던 인현왕후가 무고를 당해 폐위된 뒤 복위를 기다리며 한 많은 세월을 보냈던 곳이다.

그래서인지 건물에도 궁궐 건축양식이 부분적으로 남아있는데 풍혈과 계좌난간등 사대부 가옥에서만 볼 수 있는 한옥구조이다.

인현왕후에 대한 배려로 지어진 건물을 후대에 극락전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인조 25년(1647) 화재로 전소된 것을 재건한 것으로 고종 9년(1905)에 주지 대운당(大雲堂) 용각화상(龍覺和尙)이 정면 3칸, 축면 2칸으로 중수했는데 다포양식과 익공양식을 절충한 전통적인 건축양식이다.

특히 툭 튀어 나온 계자난간이 매우 아름답다.

 

일설에는 고종 9년(1905) 대운스님이 빨간 주머니를 얻는 꿈을 꾼 뒤 한양에 가니 어느 노보살님이 대시주를 하며 자기가 죽은 뒤 3년간 염불해 주기를 원하였다. 이리하여 쇠락한 극락전을 중건하고 萬日會를 결성하여 염불소리가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고 한다

 

* 일반인들은 극락전 내부에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

 

 

 

보광전 (普光殿)

 

 

인현왕후의 원당, 보광전

 

 

  보광전 계단 앞에 있는 연꽃문양의 '배례석'은 청암사 주변의 '쌍계사지'에서 옮겨온 것이라 한다

 

 

극락전 남쪽에 있는 보광전은 인현왕후가 조선 숙종15년(1689)에 장희빈의 무고로 폐위되자 원당(願堂)으로 건립된 것으로서 폐위된 인현왕후의 상궁들이 보시를 하여 지었다고 한다.

이 사실은 후에 대들보에 적힌 26명의 상궁들 이름을 발견하게 됨으로 알려지게 되어 청암사에서는 지금도 이 26명의 상궁들에 대한 제를 올린다고 한다

 

정면3칸, 측면2칸의 작은 건물로 보광전 안에는 42개의 손으로 중생들의 고통을 두루 만진다는 '목조 42수 관세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보광전의 기왓장도 대웅전 지붕의 기와와 마찬가지로 청기와로 올려 건물에 대한 격식을 매우 높혔음을 알 수 있다.

  

보광전의 벽면은 나무 판자로 되어 있다

 

정갈스럽고 아름다운 극락전과 보광전의 담장

 

 

청암사는 인현왕후 복위 이후 조선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청암사와 수도암이 있는 불령산(佛靈山)은 국가보호림으로 지정되었고, 조선 말기까지 상궁들이 내려와 불공을 드리고 시주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이패드로 수강을 하고 있는 비구니 스님들

 

전국 유수대회에 참가한 청암사 승가대학 스님들

<위의 사진은 불교신문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현재 청암사 승가대학의 비구니 스님학생들은 컴퓨터 네트워크만을 통하여 수업을 하고 있으며 체력단련으로 틈틈히 유수를 배워 전국대회에 출전, 입상을 한 바 있다

 

 

청암사의 경내 배치도

 

※  청암사는 김천시 증산면에 위치하고 있으나 김천IC로 나오는 것보다 왜관IC를 빠져나와 성주읍을 거쳐가거나 성주IC를 빠져나와 찾아가는 것이 더 편리하다.

 

 

 

 

청암사의 산내 암자 - 수도암(修道庵)

 

수도암의 대적광전

 

 

수도암 관음전. 오른쪽 뒤 작은 건물이 나한전이다

 

 

 

수도암은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청암사의 산내암자로 철철이 수행자들이 모여드는 살아있는 수행처이다.

수도산 8부 능선인 해발 1080m에 세워진 암자로 청암사와 같이 통일신라 헌안왕 3년(859년)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풍수의 원조인 도선국사가 이곳에 절터를 잡고 너무 좋아 사흘 밤낮으로 춤을 췄다는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 옥녀가 비단을 짜는 형국)의 명당이라고 한다.

대적광전 앞에서 멀리 보이는 가야산 상봉은 실을 거는 끌게돌이 되고, 뜰 앞의 동서 양탑은 베틀의 두 기둥이 되며, 대적광전 불상이 놓인 자리는 옥녀가 앉아서 베를 짜는 자리가 된다는 얘기다.

 

도선국사는 이 도량에 앞으로 무수한 수행인이 나올 것이라 하여 산과 도량 이름을 각각 수도산, 수도암이라 칭하였다고 전한다.

그 이후  백 여년 전부터 부처님의 영험과 이적이 많다 하여 사람들은 수도산을 불영산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대적광전의 석조 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307호), 약광전의 석불좌상(보물 제296호), 대적광전 앞에 동서로 하나씩 뚝 떨어져 자리 잡은 삼층석탑(보물 제297호)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3층쌍탑 사이에는 한 기의 석등과 ‘창주도선국사’ 새김이 있는 돌기둥이 있다.

 

수도암은 성철스님이 머물다 가신 곳이기도 하며 경북 제일의 수도처로 꼽힌다. 대적광전 옆의 큰 건물이 여기 모인 스님들이 좌선하고 생활하는 수도선원이다.

 

  

대적광전(大寂光殿)

 

 

 

 

 

대적광전과 약광전 앞의 광명대(석등)및 선돌

 

대적광전에서 내려다 본 요사체

 

 

대적광전은 축대도 낮고 기둥도 짧아 지붕에 눌리는 감이 있다. 어쩌면 높은 지대에 위치하는 점을 고려하여 일부러 그렇게 지었는지도 모르겠다. 탑의 탱주처럼 중간중간 기둥돌을 세운 가구식 축대는 낮은 대로 4면에 잘 남아 있다.

 

네 층의 앞면 계단과 소맷돌이 신라의 고식이며 축대와 잘 어울린다. 아마도 이 축대와 계단은 신라시대까지 그 만든 시기가 올라갈 것 같다.

옆면과 뒷면은 덤벙주초를 놓고 정면은 네모지게 깎은 주춧돌을 놓았는데 양쪽 모서리의 초석 두개만 다른 것보다 높게 놓은 것이 특이하다.

  

 

김천 청암사 수도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金泉 靑巖寺 修道庵 石造毘盧遮那佛坐像)

  <보물 제307호>

  

 

 

대적광전 안으로 들어서면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석조비로자나불상이 있다.

 

앉은키의 높이가 251cm, 머리의 높이만 70cm에 이르러 석굴암 본존불에 버금가는 엄청난 크기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불상을 불당골이라는 거창의 한 마을에서 만들어 옮겨올 때 그 크기가 너무 커서 쩔쩔매고 있는데 한 노승이 나타나더니 등에 업고 마구 달리더란다. 그런데 그만 수도암 입구에 다다른 노승은 칡넝쿨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화가 난 노승이 불상을 내려놓은 뒤 산신을 불러, “부처님을 모셔가는데 칡넝쿨이 웬말이냐? 앞으로는 절 주위에 일체 칡이 자라지 못하도록 하라”고 호통을 치고 사라져 버렸다. 그 뒤로 지금까지 수도암 근처에는 칡이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이 불상은 크기만이 아니라 조각수법도 상당하다.

 

민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작지만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얼굴은 네모나며 풍만하고, 긴 눈·작은 입·평평한 콧잔등에서 위엄있는 모습을 살펴볼 수가 있다

 

옷주름은 시원시원하면서도 규칙적인 반복을 피해 자연스러우며. 지권인을 한 손 모습도 매우 사실적이다. 왼쪽 어깨 뒤로 척 넘어간 법의자락은 금세 팔락하고 뒤집힐 듯 생생하면서 큰 몸짓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맵시가 있다.

하지만 옆에서 보면 앞뒤 무릎의 폭이 너무 좁아 불안정해 보인다,

 

 

 

 

광배는 남아 있지 않으며, 대좌는 팔각연화좌이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래쪽은 연꽃을 엎어 놓은 모양으로 8각형을 이루고 있다. 맨 위에는 반원형에 가까운 연꽃이 2줄로 교차되어 있고, 앞면에 3마리의 사자상과 용머리 같은 것이 새겨져 있어 독특하다.  

김천 청암사 수도암 석조보살좌상(金泉 靑巖寺 修道庵 石造菩薩坐像-보물 제296호

 

 

석조보살좌상이 있는 약광전

 

대적광전 오른쪽 법당이 약광전이다.

 

 

 

이 약광전에 모셔져 있는 높이 1.54m의 고려시대 석불좌상이다.

머리에 원통형의 관(冠)을 쓰고 있어서 보살상처럼 보이지만, 광배와 대좌가 있고 신체 각 부분의 표현으로 보아 여래상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무늬 없는 원통형의 관을 쓴 불상은 새김이 아주 얕은데 얼굴은 단아한 모습이나 눈이 마모되어 표정을 읽을 수 없다.

 

약간 움츠러든 어깨는 좁은 편이고 그 두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법의자락은 희미하며 양 어깨에 걸쳐져 있는 옷의 주름은 도식적이고, 손모양은 두 손을 무릎 위에 나란히 모아 보주인지 꽃인지 구분이 애매한 물건을 들고 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에는 연꽃무늬·덩쿨무늬·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배 모양을 한 이른바 주형 광배인데, 두광의 무늬를 가운데로 올수록 한 단씩 높여가며 도드라지게 새긴 것이 특이하다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臺座)는 4각형으로 윗부분에는 연꽃이 활짝 핀 앙련모양을, 아랫부분에는 연꽃을 엎어 놓은 복련모양을 조각하여 놓았다.

 도식적으로 처리된 옷주름, 형식적인 광배와 대좌의 표현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생각된다.

 

약광전석불과 직지사약사전석불, 구미금오산 약사암 석불은 같은 사람이 만들어 3형제 석불이라고 한다. 그래서 한 석불이 재채기를 하면 따라서 재채기를 하고 슬픈 일이 있을 때는 같이 눈물을 흘렸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도 전해온다

 

 

 

대적광전 앞에서 바라다보이는 가야산

 

 

수도암 대적광전 앞에서 산봉우리를 보면 가야산이 보인다. 멀리 뒷쪽으로 보이는 연꽃모양의 봉우리가 가야산이고 그 아래에 해인사가 있다.

해인사에 계시는 조계종 종정스님이신 법전스님께서 가야산을 넘어서 수도암까지 오가시며 불사를 하셨다고 하는데.......

 

마치 연꽃모양으로 보이는 이 봉우리를 불자들은 바로 연꽃이라 부르는데 철마다 빛깔을 바꿔가며 피어올라 눈 내리는 겨울에는 백련, 단풍드는 가을에는 홍련, 녹음지는 여름에는 청련, 그리고 꽃피는 봄에 황련이 핀다고 한다.

 

 

김천 청암사 수도암 동ㆍ서 삼층석탑(金泉 靑巖寺 修道庵 東ㆍ西 三層石塔)

     <보물 제297호>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쪽에 서 있는 쌍탑으로, 신라 헌안왕 3년(859)에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설이 전해오는 이 탑은 앞 뜰이 좁아서 탑과 법당과의 거리가 가깝다.

 

이 두기의 탑은 통일신라 중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며 동서로 떨어져 나란히 서 있으나 그 양식은 서로 같지 않다

다소 서로간의 형태적인 차이를 보이는 이 쌍탑은 각 부 규모의 축소와 형식의 간략화가 나타나며, 특히 초층탑신의 조각장식으로 인해 조성시기는 9세기로 파악된다.

동탑의 경우 기단부 면석이 금이가 있으며, 옥개석이 약간씩 깨어진 상태이다. 서탑은 지대석이 지면으로부터 틀어진 상태이며, 하층기단의 깨어진 부분을 미숙한 수법으로 메운 부분이 있다. 그리고 두 탑 모두 상륜부는 보주 이상의 부재가 결실된 상태이나, 다행히 전체 형태를 훼손할 만한 큰 손괴는 없다. 

 

 

 

 

동탑(東塔)

 

 

 

 

 

 

 

 

 

 

 

동탑은 단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기둥을 얕게 새기고 면석을 가득 채우는 안상이 하나씩 4면에 새겨겼다.

 

탑신부에서는 1층 몸돌이 위가 좁고 밑이 넓은 독특한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각 면에는 4각형의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두고 그 안에 여래좌상을 한분씩 높은 돋을새김으로 새겼다. 손 모양으로 보아 남쪽은 약사여래, 동쪽과 서쪽은 비로자나, 북쪽은 석가여래인 듯하다.

 

남쪽과 서쪽의 불상 입술에는 붉은 연지빛이 약간 남아 있어 예전에는 불상에 단청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2·3층의 몸돌에는 각 모서리 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몸돌과 지붕돌의 비례는 대체로 무난하고 층급받침은 아래로부터 넷·넷·셋이다

상륜으로는 노반과 보륜 하나, 보주가 남았다. 규모는 서탑보다도 작아 3.76m이지만 안정감은 이쪽이 한결 낫다.

 

 

 서탑(西塔)

 

 

서탑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다. 1층 몸돌에 비해 2층 몸돌이 크게 줄었으나 3층 몸돌은 2층과 비슷하다. 하층기단 갑석의 폭이 별로 차이가 없어 안정감을 잃고 있으며, 지붕돌이 몸돌에 비해 지나치게 넓고 얇은 대신 몸돌은 너무 작아서 균형이 맞지 않는다.

 

 

 

1층 몸돌의 4면에는 모서리에 새긴 우주보다 도드라지게 보살상을 새겼으나, 마모가 상당히 진행되어 세밀한 부분을 살필 수는 없다. 지붕돌의 층급은 차례로 1층 다섯, 2층 다섯, 3층 넷이다. 상륜은 노반·보륜·보주만이 남았다. 전체 높이가 4.26m밖에 되지 않는 작은 규모이다.

 

 

석탑을 지키는 묘(猫)보살

사찰에서 키우는 고양이인 모양인데 처음부터 우리 일행을 따라다니더니

석탑 위에서 예쁜 포즈를 취해주었다

 

 

 

앞에는 높은 돋을새김으로 연꽃을 앉힌 배례석이 있다

 

광명대(석등)

석등이라는 용어는 일본사람들이 붙인 명칭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옛부터 '광명대'라고 불렀다

 

 

'창주도선국사(창主道詵國師)'라는 새김이 있는 선돌

 

두 탑 사이에 화사석이 반쯤 깨어진 석등 하나와 자연석에 가까운 돌기둥이 하나 있다. 석등은 옥개석과 상륜이 담박한 맛을 풍긴다. 돌기둥에는 '창주도선국사(창主道詵國師)'라는 새김이 있다.

 

 

※ 수도암은 청암사에서 승용차로 약 30분 거리에 있다.

     청암사에서 도로 나와 수도리 마을로 가서 조금은 가파른 고갯길로 올라야한다.

     승용차가 오르기는 하지만 길이 좁고 가파르기 때문에 조심을 해야 한다.

     수도리 마을에 차를 주차시키고 걸어서 오르면 약 40여분이 걸린다

 

     청암사에서 등산을 하여 수도암까지 가려면 2시간은 족히 걸린다고 한다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년~1701년)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년~1701년)는 조선의 왕 숙종의 계비이다.

성은 민(閔), 휘호는 효경숙성장순원화의열정목인현왕후(孝敬淑聖莊純元化懿烈貞穆仁顯王后).
여양부원군 민유중과 은성부부인 송씨의 딸이다. 인경왕후가 죽은 1년 뒤인 1681년 계비가 되었다.
그녀가 태어날 때 집안에 광채가 났다고 하며 출산직후에 향긋한 향기가 났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녀의 큰아버지는 그녀가 너무 아름답고 착하여 일찍 사망할 것이 염려되었다고 한다.

 

당시 중전 인경왕후가 죽은 후 1년 후에 대비 김씨와 서인세력들의 추천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성품이 뛰어난 그녀가 궐로 입궐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입궐 후 소생을 잉태하지 못하여 스스로 숙종에게 후궁들을 들이라고 하였으며 후궁들을 자신의 동생처럼 여기고 항상 행복해하였다.
그 후 숙종이 병석에 눕게 되자 대비 김씨가 기도를 올린다고 하였으나 겨울에 몸이 상할까 염려되어
자신만이 기도를 올려도 충분할 것이라고 하였으나 대비 김씨가 이 말을 따르지 않고 기도를 올렸다가 대비는 곧 사망하고 만다.

그 후 소생들이 나타나지 않자 궁인 장옥정을 숙원에 올리고 후에 소의, 희빈에 올리는데도 도움을 주었으나 왕세자를 낳은 희빈은 기고만장해져서 믿음감이 두터웠던 숙종과 그녀를 갈라놓아 자신이 나라의 국모가 되었다.

하지만 국모가 된 지 10년 채 되지 않아 장희빈의 죄가 밝혀져 그녀는 신망을 잃었고, 결국 폐위된 민비가 다시 궐로 들어가 중전이 된다. 그후 장희빈도 희빈으로 강등되었다가 폐서인되어 사약을 받는다.

하지만 몸이 많이 상한 그녀였던 터라 궐에 들어오고 얼마 안 가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무덤은 서오릉 중 하나인 명릉(明陵)이며 숙종, 인원왕후와 함께 묻혀 있다.

 

 

 
다음검색
댓글
  • 작성자 18.03.18 07:46

    첫댓글 ㅎㅎㅎㅎㅎㅎㅎ

  • 18.03.18 07:48

    ㅋㅋㅋㅋ

  • 18.03.19 11:06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