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음 이덕형선생은 조선왕조 역사상 최연소인 31세에 문형(文衡 :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성균관 지사 등, 세 개 기관장을 겸직하는 사람)에 추천되신 후, 문형과 영의정을 세 차례씩 지내셨을 뿐만 아니라 이웃 중국과 일본에도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임진왜란 때는 왜적이나 명나라의 장수들이 협상이 필요하면 항상 선생만을 대화상대로 지명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당대 최고의 학문과 덕망으로 선조, 광해군 양 대에 걸쳐 내외적으로 명성을 떨치셨던 분이다. 왜군적장 앞에 나아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준엄하게 꾸짖어 두려움에 질려있던 우리 군사들은 물론 서슬이 퍼렇던 왜군들까지 탄복하여 칭송을 했다는 한음 이덕형 선생은, 한 때 일부 지방에서 왕이 되실 거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조정과 백성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으셨으나 말년에는 간신들의 모함으로 삭탈관직당하여 은거지에서 나라걱정에 침식을 잊으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는데 이 때 모든 백성이 눈물을 흘렸고, 이를 본 죽마고우 백사 이항복은 “성인은 살아서는 그 뜻을 빼앗지 못하고 죽어서도 그 이름을 빼앗지 못 하는구나”고 탄식하였다. 선생은 조선 중기 명재상으로 우리 광주이씨 문중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남기신 조상 중 한 분이시다.
어릴 적에 그의 외가가 있던 경기도 포천과 진외가가 있던 경상도 상주에 가끔 부모를 따라가 머문 적이 있었는데 가는 곳마다 범상치 않은 언행으로 그 지방의 후손들에게 한음의 언행에 대한 전설이 구전되어 내려오면서 오늘날까지도 포천과 상주지방의 유림들 사이에서는 그를 추앙하는 사람들이 많아 포천의 용연서원과 문경의 근암서원에서 지금도 봄, 가을로 지방 유림들에 의해 절사가 봉행되고 있다. 18세에 진사, 생원 양과에 합격하고 20세에 부묘별시(附廟別試) 수석으로 합격하면서 관계에 첫발을 들여놓은 한음은 뛰어난 문장과 비범한 언행으로 임금인 선조와 당시의 대신들에게 많은 총애를 받게 되었다. 당시에 젊은 선비들을 상대로 한 글짓기에서는 늘 수석을 차지하게 되어 나중에는 스스로 글짓기에 나서기를 삼가 하였다고 한다. 한음보다 3년 앞서 20세 때에 진사시험에 합격한 오성 이항복(鰲城 李 恒福)은 25세 때인 1580년 알성과에 급제하여 같은 해 문과에 급제한 한음과 동시에 승문원에 발령을 받아 관계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이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모든 요직을 두루 거치고 한음이 타계 할 때까지 30여 년간을 국가의 대소사에 뜻을 같이하면서 깊은 우정을 맺게 되었다. 그가 32세 때인 임진왜란 중에는 명나라 원군을 청하는 청원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접반사가 되어 그를 따라 일선에서 온갖 고생을 하면서 명나라 군사와 같이 보내게 되었고, 정유재란 때 역시 명나라 장수 양호의 접반사로 종군하면서 일선에서 직접 명나라 군사의 작전을 도와주게 되었다. 한음은 임진, 정유 양대 왜란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명나라 군사를 따라 다니며 일선에서 전쟁을 경험한 유일한 조선의 대신이었다. 또 그가 이조 정랑으로 있던 28세 때 일본의 장수 현소와 평의지가 부산 동래에 이르러 조선과 대화하기를 청하니 선조는 한음을 선위사로 임명하여 이들과 회담하게 하였다. 이때 한음의 학문과 인품이 일본에 알려지면서 임진, 정유 양 왜란 때에는 왜적들이 조선과 회담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한음을 지목하여 협상코자 하였다. 1592년 광해군이 세자가 되면서부터 여러 사람이 고명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허락 받으려 했으나 이후 16년 동안이나 명나라에서는 광해군을 인정하지 않았다. 1603년 광해군이 왕권을 계승하자 1608년 명나라에서는 부당한 왕권계승을 조사한다며 조사단을 파견하였고 난처한 광해군은 명나라에서 명망이 높던 한음을 명나라 조사단의 접반사로 임명하여 그들을 접대하면서 자신의 왕위 계승이 불가피하였음을 설명하고 그대로 명나라로 돌아가게 하였다. 명나라 사신들이 돌아가자 광해군은 한음을 고명사신으로 임명하여 사신들이 북경에 도착하기 전에 한시바삐 명나라에 먼저 가서 자신의 왕위계승을 허락 받고 오기를 간청하였다. 왕명을 받은 한음은 북경으로 출발하여 6개월 동안 북경에 머물면서 천신만고 끝에 중국 황제의 승인을 받아오게 되었고 광해군은 명나라 황제의 허락을 받아와 왕권을 확실하게 해준 한음의 공로를 못 잊어 그를 영의정으로 삼아 대북인들의 끊임없는 탄핵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를 감싸주면서 자신의 옆에 있게 하려고 애썼다. 광해군은 1612년에 한음을 익사, 형난공신(翼社 亨難功臣)에 훈록 하고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에 책봉하기도 하였으나 그 후 정쟁의 와중에서 득세한 반대세력들에 의해 폐지되었다.
선조 말년에 이르러 붕당정치가 심화되고 삼사( 三司 : 홍문관,사헌부, 사간원을 이르며 왕이나 대신의 잘못을 지적하여 임금에게 바로잡기를 주청하는 기관)의 관헌들이 파당의 이해에 따라 탄핵 상소문을 올리는 일이 잦았다. 이때 한음도 여러 차례의 무고한 탄핵을 받았고 선조의 큰아들 임해군의 비리를 비판하였다 하여 선조의 눈 밖에 나면서 승승장구하던 그도 한직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왕위를 계승하자 당파간의 정쟁이 극심해 지면서 삼사의 상소문과 이에 따른 국문으로 조정이 조용할 날이 없게 되고 이런 와중에 영창대군 죽이는 것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한음도 삭탈관직을 당하여 낙향하게 되었으며 한달간 침식을 잃고 나라 걱정만 하시다가 1613년 10월 향년 53세로 돌아가셨다.
출생지 한음선생은 조선 제13대왕 명종17년(1561) 2월12일 서울의 성명방(誠明坊: 지금의 중구 남학동)에서 지중추부사 이민성(李民聖)과 영의정 유전(柳典)의 동생인 문화유씨(文化 柳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용산구 동자동과 후암동의 경계가 되는 고개를 송경재 또는 쇠경재, 한자로 송경현(誦經峴)이라 하는데 그것은 선생이 이 고개 부근에 살면서 경전(經典)을 낭송하던 소리가 들렸다는 말에서 연유한 이름이다. 한경지략(漢京識略) 각동조(各洞條)에 ‘송경현(誦經峴)이 남대문 밖에 있는데, 그 곳에 한음 이덕형이 살던 집이 있다.’라고 기록되었다. 한음 이덕형선생은 조선왕조 역사상 최연소인 31세에 문형(文衡 :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성균관 지사 등, 세 개 기관장을 겸직하는 사람)에 추천되신 후, 문형과 영의정을 세 차례씩 지내셨을 뿐만 아니라 이웃 중국과 일본에도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임진왜란 때는 왜적이나 명나라의 장수들이 협상이 필요하면 항상 선생만을 대화상대로 지명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당대 최고의 학문과 덕망으로 선조, 광해군 양 대에 걸쳐 내외적으로 명성을 떨치셨던 분이다. 왜군적장 앞에 나아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준엄하게 꾸짖어 두려움에 질려있던 우리 군사들은 물론 서슬이 퍼렇던 왜군들까지 탄복하여 칭송을 했다는 한음 이덕형 선생은, 한 때 일부 지방에서 왕이 되실 거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조정과 백성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으셨으나 말년에는 간신들의 모함으로 삭탈관직당하여 은거지에서 나라걱정에 침식을 잊으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는데 이 때 모든 백성이 눈물을 흘렸고, 이를 본 죽마고우 백사 이항복은 “성인은 살아서는 그 뜻을 빼앗지 못하고 죽어서도 그 이름을 빼앗지 못 하는구나”고 탄식하였다. 선생은 조선 중기 명재상으로 우리 광주이씨 문중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남기신 조상 중 한 분이시다.
어릴 적에 그의 외가가 있던 경기도 포천과 진외가가 있던 경상도 상주에 가끔 부모를 따라가 머문 적이 있었는데 가는 곳마다 범상치 않은 언행으로 그 지방의 후손들에게 한음의 언행에 대한 전설이 구전되어 내려오면서 오늘날까지도 포천과 상주지방의 유림들 사이에서는 그를 추앙하는 사람들이 많아 포천의 용연서원과 문경의 근암서원에서 지금도 봄, 가을로 지방 유림들에 의해 절사가 봉행되고 있다. 18세에 진사, 생원 양과에 합격하고 20세에 부묘별시(附廟別試) 수석으로 합격하면서 관계에 첫발을 들여놓은 한음은 뛰어난 문장과 비범한 언행으로 임금인 선조와 당시의 대신들에게 많은 총애를 받게 되었다. 당시에 젊은 선비들을 상대로 한 글짓기에서는 늘 수석을 차지하게 되어 나중에는 스스로 글짓기에 나서기를 삼가 하였다고 한다. 한음보다 3년 앞서 20세 때에 진사시험에 합격한 오성 이항복(鰲城 李 恒福)은 25세 때인 1580년 알성과에 급제하여 같은 해 문과에 급제한 한음과 동시에 승문원에 발령을 받아 관계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이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모든 요직을 두루 거치고 한음이 타계 할 때까지 30여 년간을 국가의 대소사에 뜻을 같이하면서 깊은 우정을 맺게 되었다. 그가 32세 때인 임진왜란 중에는 명나라 원군을 청하는 청원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접반사가 되어 그를 따라 일선에서 온갖 고생을 하면서 명나라 군사와 같이 보내게 되었고, 정유재란 때 역시 명나라 장수 양호의 접반사로 종군하면서 일선에서 직접 명나라 군사의 작전을 도와주게 되었다. 한음은 임진, 정유 양대 왜란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명나라 군사를 따라 다니며 일선에서 전쟁을 경험한 유일한 조선의 대신이었다. 또 그가 이조 정랑으로 있던 28세 때 일본의 장수 현소와 평의지가 부산 동래에 이르러 조선과 대화하기를 청하니 선조는 한음을 선위사로 임명하여 이들과 회담하게 하였다. 이때 한음의 학문과 인품이 일본에 알려지면서 임진, 정유 양 왜란 때에는 왜적들이 조선과 회담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한음을 지목하여 협상코자 하였다. 1592년 광해군이 세자가 되면서부터 여러 사람이 고명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허락 받으려 했으나 이후 16년 동안이나 명나라에서는 광해군을 인정하지 않았다. 1603년 광해군이 왕권을 계승하자 1608년 명나라에서는 부당한 왕권계승을 조사한다며 조사단을 파견하였고 난처한 광해군은 명나라에서 명망이 높던 한음을 명나라 조사단의 접반사로 임명하여 그들을 접대하면서 자신의 왕위 계승이 불가피하였음을 설명하고 그대로 명나라로 돌아가게 하였다. 명나라 사신들이 돌아가자 광해군은 한음을 고명사신으로 임명하여 사신들이 북경에 도착하기 전에 한시바삐 명나라에 먼저 가서 자신의 왕위계승을 허락 받고 오기를 간청하였다. 왕명을 받은 한음은 북경으로 출발하여 6개월 동안 북경에 머물면서 천신만고 끝에 중국 황제의 승인을 받아오게 되었고 광해군은 명나라 황제의 허락을 받아와 왕권을 확실하게 해준 한음의 공로를 못 잊어 그를 영의정으로 삼아 대북인들의 끊임없는 탄핵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를 감싸주면서 자신의 옆에 있게 하려고 애썼다. 광해군은 1612년에 한음을 익사, 형난공신(翼社 亨難功臣)에 훈록 하고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에 책봉하기도 하였으나 그 후 정쟁의 와중에서 득세한 반대세력들에 의해 폐지되었다.
선조 말년에 이르러 붕당정치가 심화되고 삼사( 三司 : 홍문관,사헌부, 사간원을 이르며 왕이나 대신의 잘못을 지적하여 임금에게 바로잡기를 주청하는 기관)의 관헌들이 파당의 이해에 따라 탄핵 상소문을 올리는 일이 잦았다. 이때 한음도 여러 차례의 무고한 탄핵을 받았고 선조의 큰아들 임해군의 비리를 비판하였다 하여 선조의 눈 밖에 나면서 승승장구하던 그도 한직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왕위를 계승하자 당파간의 정쟁이 극심해 지면서 삼사의 상소문과 이에 따른 국문으로 조정이 조용할 날이 없게 되고 이런 와중에 영창대군 죽이는 것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한음도 삭탈관직을 당하여 낙향하게 되었으며 한달간 침식을 잃고 나라 걱정만 하시다가 1613년 10월 향년 53세로 돌아가셨다.
출생지 한음선생은 조선 제13대왕 명종17년(1561) 2월12일 서울의 성명방(誠明坊: 지금의 중구 남학동)에서 지중추부사 이민성(李民聖)과 영의정 유전(柳典)의 동생인 문화유씨(文化 柳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용산구 동자동과 후암동의 경계가 되는 고개를 송경재 또는 쇠경재, 한자로 송경현(誦經峴)이라 하는데 그것은 선생이 이 고개 부근에 살면서 경전(經典)을 낭송하던 소리가 들렸다는 말에서 연유한 이름이다. 한경지략(漢京識略) 각동조(各洞條)에 ‘송경현(誦經峴)이 남대문 밖에 있는데, 그 곳에 한음 이덕형이 살던 집이 있다.’라고 기록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