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湖南)의 강개(慷慨)한 충절(忠節)의 선비가 많으니 도이(島夷)(왜놈)의 변(變)에 있어서 몸을 돌보지 않고 창의(倡義) 한 자 왕래가 빈번하여 인(仁)을 행(行)하여 생명(生命)을 버린 자 돌아 보건데 또한 많다. 내가 일찍이 진주(晉州) 촉석루(矗石樓)를 지나면서 “천지유인삼장사(天地有人三壯士)”의 시(詩)를 보고 무릎을 치면서 감탄하고 사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김판관(金判官) 오재공(吳齋公) 행실(行實)을 보니 충의공(忠毅公) 최경회(崔慶會)와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과 복수장(復讎將) 고종후(高從厚)들과 같이 같은날 진주(晉州)의 임진란(壬辰亂)때 순절(殉節)하였는데 상상하건데 그 임난(臨難)에 빛남을 취(取)하여 죽음 보기를 돌아간듯 하였으니 절의(節義)를 후세(後世)에 병칭(並稱)하였다. 김공(金公)도 마땅이 같은 장사(壯士)로서 마땅이 네분이어야 할것인데 가만히 생각건대 대저 공만이 홀로 제공(諸公)들의 대열(隊列)에서 누락된것이 괴이하다.
대개 그 후손이 영체(零替)하여 다만 수삼(數三)의 잔약한 후손만이 있어 타향(他鄕)에 유락(流落)하여 전래(傳來)한 서적을 유실(遺失)하여 남은것이 없었는데 이제 다행이 공의 녹권(錄卷)이 그의 외손 양씨(梁氏)의 집에서 나오니 휘(諱)는 학포(學圃)요 양팽손(梁彭孫)은 바로 공(公)의 고모부(姑母夫)다. 학포(學圃)의 손자 산숙(山璹)은 이에 공의 내종질(內從侄)이다. 그때 순국(殉國)한 사실이 녹권(錄券)중에 병연(炳然)하니 창의사(倡義使) 제공(諸公)들과 같이 회자(膾炙)하여 칭미(稱美)함을 얻지 못한것은 이 어찌 현회(顯晦)함이 때가 다름이 아니리오. 이제 그의 “평생위국의백일조단애(平生爲國義白日照丹哀)”의 글귀를 외움에 천재(千載)의 아래 자연(自然)히 충의(忠義)의 눈물을 금(禁)할 수가 없는지라. 아_ 공(公)의 순강(純剛)하고 정직(正職)한 기운으로서 살아서는 충절(忠節)의 선비가 되었고 죽어서는 충열(忠烈)의 혼(魂)이 되었으니 유사(遺事)가 비로소 세상에 나타난 것은 가히 그의 기절(氣節)이 마침내 가히 민몰(泯沒)하지 않음을 본 것이요, 그 또한 지금까지 기다림이 있었던 것이요 또한 어찌 후세(後世)에 천양(闡揚)치 아니함을 알리오. 공(公)의 아들 시엽(時燁)이 부친(父親)께서 적에게 죽음을 원통하게 여겨 항상 복수(復讎)의 뜻을 품고 풀을 묶어서 허수아비를 만들어 수길(秀吉)과 청정(淸正)의 도적이라 이르고 날마다 어지러이 쏘고 칼을 빼어 허수아비의 머리를 참(斬)하여 간데 끝에 메달아 돌아오면서 체읍(涕泣)하고 시(詩)가 있으니 “어떻게도 마땅히 왜적(倭賊)을 파(破)하여 하여금 우리 동방(東方)을 편안케 하리라”고 하였다. 또 병자(丙子)년 호란(胡亂)을 당하여 임금께서 도성(都城)을 버리고 딴 곳으로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의로움을 떨쳐 의병(義兵)을 모집(募集)하여 바로 남한산성을 향하여 겨우 천안에 도착 하였는데 화의(和議)가 이미 이루어짐을 듣고 크게 놀라 말에서 떨어져 실성통곡(失聲痛哭)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동해(東海)를 밟을지언정 좌임인(左袵人) (미개인을 말함)은 되지 않으리라 하고 절식(節食)한지 오일 만에 죽으니 이일이 조정(朝廷)에 알려져 첨정(僉正)에 증직(贈職)되었으며 공의 장손 함(涵) 은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였고, 차손 준(浚)은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벼슬길에 올라 서울에 있었는데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난(避難)할 때 임금의 수례를 수행(隨行)하였으니 모두 공(功)이 있었다.
아름답고도 위대(偉大)하도다. 일문(一門) 삼대(三代)의 충의(忠義)가 어떻게 이처럼 열열(烈烈)하고도 병병(炳炳)하리오. 공(公)의 육대손 석(錫)이 나에게 서문(序文)을 위촉(委囑)하므로 돌아 보건데 내가 우루(愚陋)하여 감히 감당할 바가 아니였으나, 그러나 생각하건데 나의 육대조 이신 참판공(參判公) 휘(諱) 용제(容濟) 또한 정유(丁酉)의 난리(亂離)에 있어서 병사(兵使) 이복남(李福男) 이하 칠충신(七忠臣)과 같이 같은날 용성부(龍城府)에서 사절(死節)하였으나 홀로 포양(襃揚)의 은전(恩典)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 또한 같은 일로 자최도 같은지라 그윽히 느낀바가 있으므로 드디어 서(序)하노라.
첫댓글영광일가님, 설 잘쉬셨는지요! 귀중한 자료 감사합니다. 자료를 다운받아 대충 읽어보니 오재공(梧齋公) 행장(行狀) 해석문 등에 목향(牧鄕), 익호(謚號), 행석성현익(行石城縣益) 등 글자를 잘 못 해석한 곳이 몇 군데 보입니다. 원문 글자와 대조하여 보았으면 하는데 혹 원문(복사본)을 구할 수 있겠는지요?
첫댓글 영광일가님, 설 잘쉬셨는지요! 귀중한 자료 감사합니다. 자료를 다운받아 대충 읽어보니 오재공(梧齋公) 행장(行狀) 해석문 등에 목향(牧鄕), 익호(謚號), 행석성현익(行石城縣益) 등 글자를 잘 못 해석한 곳이 몇 군데 보입니다. 원문 글자와 대조하여 보았으면 하는데 혹 원문(복사본)을 구할 수 있겠는지요?
원본이 국립중앙도서관에 있음이 확인돠군요( 金判官梧齋公文集 [著者未詳] 金錫 1922 chi 古2511-10-186 고전운영실 (6층) 고서 )
전남대 도서관에도 원본이 있다는데 복사가능할지는! 김태희박사의 가락의 역사와 왕손에 필사본수록
감사합니다. 집에 있는 컴퓨터로 중앙도서관 원문 자료( 金判官梧齋公文集 [著者未詳] 金錫 1922 chi 古2511-10-186 고전운영실 (6층) 고서 ) 를 볼 수가 있습니다.
알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