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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덕산:지도:코스:해설:자료모음
< 100대 명산의 산방 산행자료 >
100대 명산 선정사유 o 사자산(1120m), 사갓봉(1020m), 솟때봉(884m) 등이 솟아 있어 산세가 웅장하고 골이 깊은 등 경관이 좋으며, 평창강(平昌江)과 주천강(酒泉江)의 수계인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
백덕산 참고자료 (출처 : 숲에 ON ) 100대명산 선정사유 사자산(1120m), 삿갓봉(1020m), 솟때봉(884m) 등이 솟아 있어 산세가 웅장하고 골이 깊은 등 경관이 좋으며, 평창강(平昌江)과 주천강(酒泉江)의 수계인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 신라 때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법흥사(法興寺)와 경내에 있는 보물 제613호로 지정된 징효대사보인탑이 유명 설경 빼어난 천연원시림의 산 산행포인트 들머리는 횡성군과 평창군의 경계가 되는 문재터널이다. 문재터널 왼쪽으로 난 가파른 등산로를 따라 소로와 임도를 거쳐 25분을 가면 삼각점이 있는 작은 봉우리 923.6봉에 도착한다. 해발 1019m에 있는 헬기장까지는 25분 걸리고 완만한 능선이 이어지는 사자산까지는 별 어려움 없이 오를 수 있다. 그러나 사자산에서 백덕산과 백덕산 정상 북동쪽의 헬기장으로 가는 길에는 곳곳에 가파른 내리막이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주요산행코스 ▷ 문재-(25분)-923.6봉-(45분)-사자산-(40분)-당재(운교 갈림길)-(35분)-작은당재-(35분)- 백덕산 정상-(15분)-백덕산 갈림길(1280봉)-(45분)-묵골 갈림길-(45분)-묵골 (총 4시간 45분) ▷ 관음사-백련광산터-주계곡길-백덕산 정상-묵골 (총 5시간 25분)
영월 백덕산 등산지도
법흥사 아직 한창 불사 중인 사찰답게 "獅子山法興寺'라 현판이 달린 일주문도 새로이 세워졌는지 화려한 빛깔로 치장되어 있으며 특히 용과 코끼리가 기둥앞에 버티고 서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일주문을 지나 한참을 돌아 올라가니 넓다랗게 자리를 잡은 주차장과 중앙에 사찰 정문격인 '금강문'이 있고 그 위층으로는 대형 북(法鼓)을 설치한 '원음루'라 이름 지어진 누각이 위용을 자랑하고있다.
법흥사에서 소개하는 사찰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법흥사-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사자산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사자산 법흥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 자장율사가 중국 종남산 운제사에 모셔져 있는 문수보살의 석상 앞에서 7일간의 정진기도 끝에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문수보살로부터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가사·발우 등을 전수받아 사자산(연화봉)에 불사리를 봉안하고 흥녕사라 개창한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의 하나인 불보 사찰이다. '적멸보궁'이란 '온갖 번뇌망상이 적멸한 보배로운 궁'이란 뜻이다.
현재 법흥사의 유적으로는 옛 흥녕선원의 위세를 짐작하게 하는 3개의 석탑과 1개의 수호석불좌상, 자장율사가 수도하던 토굴, 적멸보궁, 사리탑(강원도 유형 문화재 73호), 흥녕사 징효대사 보인탑(보물 612호), 징효대사 부도(강원도 유형문화재 72호), 흥녕선원지(강원도 지정 기념물 6호)가 있고 종이가 없던 시절 인도 영라수 잎에 범어로 기록한 패엽경 등의 소중한 삼보종재가 남아있으며 법흥사 주변에는 천연기념물 제242호인 까막딱다구리가 서식한다.
금강문을 지나 왼편을 보면 극락전과 법종각이 보이고 그 사이로 산신각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 1999년부터 시작된 법흥사의 대불사 일환으로 극락전 앞에는 흥녕대탑 불사가 한창 중이다.
극락전 오른쪽 뒤로는 흥녕사 징효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보인탑(보물 612호)이 있으며 그 옆으로는 징효대사의 사리를 안치한 부도(강원도 유형문화재 72호)가 있다. 법흥사에서는 두 문화재를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징효대사 보인탑-
"징효대사 절중(826~900년)은 신라 말 구산선문 중 사자산파를 창시한 철감국사 도윤(798~868년)의 제자로 흥녕사(법흥사의 옛이름)에서 선문을 크게 중흥시킨 인물이다. 그의 부도비는 법흥사 입구 왼쪽 숲 속에 자리잡고 있다.
-징효대사 부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징효대사보인탑비의 서북쪽 약 30m 지점인 언덕 밑에 위치하고 있는 징효대사 부도는 강원도 지정유형문화재 제72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도는 8각원당형을 기본으로 삼았으며, 二板石(이판석)으로 구성된 방형의 지대석 위에 건립되어 있다. 지대석 위에는 8각 하대석이 있고 그 위에는 연화대석이 놓였는데 하대의 각 측면에는 안상이 음각되어 있다. 그 밖에도 이 부도는 중첩된 앙연, 탑신부의 문비모각양식, 옥개석의 추녀와 귀꽃의 장식수법도 고려초엽까지 통용된 수법이다. 높이267cm, 지대석의 한변의 넓이 135cn 규모의 부도이다."
징효대사 부도 뒷편에는 영월군에서 보호수로 지정되어 관리를 받고 있는 수령 200년이 넘은 밤나무 (높이 27m, 둘레 430cm) 한 그루가 그간 세파의 흔적을 안은체 옆에 있는 중요한 문화재를 지키고 있다. 겨울을 보내고 있는 고령의 벌거벗은 나무, 그 벗은 몸에서 터져 나오는 강한 카리스마는 100년도 못사는 허약한 인간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극락전 앞에 세워진 범종각, 최근 불사에 의해 만들어진듯 깨끗 깔끔하다. 대형 종신에는 연화좌 위에서 무릅을 꿇고 공양하는 모습의 비천상(飛天像)과 그 주위에 구름같이 피어 오르는 보상화(寶相花)의 모습이 바로 튀어 나올듯 살아있다.
극락전 옆 숲속에 자리한 삼성각, 다른 곳에서는 삼신각이라고도 불리는데 불교가 한국에 토착화 되는 과정에 고유의 토속 신앙과 절충되며 생긴 종교형태로 이 곳에는 칠원성군, 나반존자, 용왕대신을 모시고 있다.
심우장(종무소) 가는 길에 보이는 '만다라전' 만다라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에서 나온 말로 불화의 한 종류라는데 깊이 있게 알지는 못한다. 다만 법흥사에서 운용하는 템플스테이 프로그램 중에 '만다라 만들기'라는 프로그램이 있는 것으로 보아 혹시 그 프로그램 중에 잘 만들어진 만다라를 이 곳에 보관, 전시하는게 아닌가 짐작해본다. 아울러 현판의 내용과 글씨, 전각의 크기와 위치, 여러모를 생각해 볼 때 천년고찰 적멸보궁의 위상에 어울리는 것인지 의문을 갖으며 발길을 돌린다.
만다라전을 지나 적멸보궁 안내판을 따라 위로 오르는데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적멸보궁 안내석이 눈길을 끈다. 글씨에 멋을 내고자 함이였나 제목의 글씨체와 다르게 쓴 아래 내용의 글씨체가 어찌 그리 불편케 느껴지는가... 어리석고 속 좁은 중생의 맘이 불편키 때문이겠지...
적멸보궁은 경내 입구에서부터 5백미터쯤 올라가면 나타난다. 법흥사 인근은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도 유명한데 특히 적멸보궁으로 오르는 길 양 옆으로는 쭉쭉 뻗은 소나무 수백 그루가 장관을 연출한다. -법흥사 소개문 인용-
적멸보궁 가는 길에 온편으로 중대요사채-법문당이 보이며 그 뒤로 약사전이 보인다.
약사전 옆, 적멸보궁에 오르는 가파른 언덕길 앞에 수각이라 불리는 약수물이 삼단으로 흘러내리게 만들어져 있다. 맨 윗단의 물은 부처님 전에 올리는 물로 일반인은 절대 사용금지다. 둘째단의 물은 일반 불자의 식수용이며 맨 하단은 손을 씻을수 있는 용수로 사용된다.
약사전 뒤에는 작고 아담한 산신각이 있다. 말 그대로 절의 산신을 모시는 집. 산신이 불교와 융합된 시기는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는데 이 또한 불교가 토속 신앙과 결합된 형태의 하나로 이해된다. 절 뿐 아니고 우리나라 큰 산을 넘는 고갯길 여러곳에는 산신각이 세워져 있으며 그 곳에는 대부분 산신(령), 호랑이, 어린 동자 등이 등장한다. 옛날, 고개를 넘어 다니던 보부상들도 호환이나 도적들의 화를 입지않게 해 달라고 고개 아래 산신각에서 제를 올리곤 하였으며 지금도 대부분 산신각에서는 일년에 한번씩 제사를 지내곤 한다. 불교를 멀리하고 유교를 가까이 하던 조선시대, 부처님께 의지하고 기도하기 보다는 산신께 의지하는 것이 더 쉬웠는지 모른다.
적멸보궁에 이르는 마지막 구간, 생각보다 가파르다. 늙고, 병들고, 여러가지 고통을 앉고 이 곳을 찾는 중생들은 이 길을 걸으며 부처님을 부르리라. 이 길을 걷는 모든 이들 성불 하소서...
적멸보궁은 높고 긴 석축을 쌓아 넓은 대지를 마련하고 그 중앙에 기와로 지은 집이다. 넓고 큰 돌들을 엮어 1단대의 지대를 마련한 위에 목조건물로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맛배집이다. 적멸보궁 기와의 입막새에는 법(法)자가 씌어져 있고 '소화(昭和) 8년 11월 준공 이라는 글씨가 양각되어 있는데, 이는 1934년에 법흥사의 기와를 굽고 새로 지었다는 뜻이다. 적멸보궁 내에는 '사자사 법흥사 적멸보궁 훈수(薰修)'라는 제목의 현판이 있다. 여기에는 '불기(佛紀) 이천구백육십육년 기묘 시월 일일'이라 씌어 있으니 적멸보궁이 1939년에 중수된 사실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적멸보궁 이전에 있었전 적멸보궁은 본래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9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법흥사 소개 인용-
적멸보궁 뒤에는 자장스님이 불사리를 봉안하고 수도하던 곳이라 전해지는 토굴과 사리탑이 있다. 적멸보궁 뒤 축대 위에 있는 석조 사리탑 왼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신라 선덕여왕 때 축조됐다고 전해지나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토굴의 외부는 뒷편의 낮은 언덕으로부터 내려오는 완만한 경사를 이용하여 그 흙으로 석실을 엎었는데 남향한 입구 쪽 정면만 높고 뒷편은 경사 때문에 약간 봉긋한 모양의 원형으로 마치 무덤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봉토의 높이는 1.48미터이며 외곽의 지름은 4-72-5.77미터이다.
적멸보궁 안에는 불상이 모셔있지 않다. 대신 창을 통하여 연화봉 어딘가에 묻혀있는 사리를 향해 참배를 할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안에는 들어가 보지는 못했으며 사진 또한 찍을수 없었으나 밖에서 보는 적멸보궁 만으로도 부처님의 가피를 입을 것 같은 성스러움이 가득하다. 법당 안에서 '석가모니불'을 부르는 스님의 독경 속에 부처님을 참배키 위한 참배객들의 행렬은 끝없이 이어지는 듯 하다.
적멸보궁의 구경을 마치고 내려 오는길, 수각에서 K가 약수 맛을 보고있다. 사무실 근무를 하다 영월까지 내려온 친구. 성당에서 세례까지 받은 신심이 깊은 친구. 오늘 좋은 공부 했다고 즐거워한다. 경내로 내려 오는 길에 친구가 묻는다. "근데 적멸보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지?"
내려오며 약사여래전을 둘러봤다 약사여래전은 제2보궁으로 석가모니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연화봉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소나무 숲과 저 멀리 구봉대산 의 높고 낮은 봉우리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만들어낸 와불(臥佛)의 형상을 바라볼 수 있는 복지(福地)에 자리하고 있다고 사찰은 설명하고있다. 이 곳에는 과거 약왕보살로서 일체 중생의 아픔과 슬픔을 치료해 무명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약사십이대원(藥師十二大原)을 세우시고 수행하여 부처님이 되신 약사여래불을 봉안하고있다 한다.
경내 구경을 마치고 일주문을 통해 다시 속세로 나오는데 일주문의 현판이 바뀌었다. "獅子山門興寧禪院" 정면에서 보면 법흥사 현판이요 뒤에서 보면 흥년선원 현판이다.
흥녕선원(흥녕사)은 법흥사의 전신이다. 신라 말에서 고려 초까지 번성하던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로 한창 번성 할 때는 이 곳에서 수행하던 스님의 숫자가 2000을 넘었다고 하며 공양쌀을 씻으면 쌀뜨물이 십리 밖 무릉도원까지 이르럿다고 한다. 천년 전 영화를 다시 꿈꾸는 법흥사. 그들의 슬로건은 夢堂緣必이다.
영월 백덕산(白德山;1,350m) 산행기 백덕산은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평창군 방림면과 평창읍, 그리고 영월군 주천면과 수주면 하여, 3개 군, 5개 읍면에 걸쳐 있으나 산문이 영월 쪽으로 열려 있고, 백덕산의 주찰인 법흥사 역시 영월 쪽에 있어서 영월의 산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나 산행은 대부분 평창 쪽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해발 1,350m로서 규모가 큰 산이고, 산세는 비교적 험한 편이며, 대체로 육산과 골산의 중간 형태를 취하고 있다.
서-남 사면 곳곳에는 암릉의 깎아지른 절벽이 많고 계곡이 깊어 아직도 태고의 원시림이 보존되고 있으며, 이들 암릉 사이를 비집고 자란 노송과과 기암괴석의 멋진 조화가 아름다운 풍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에 비해 북-동 사면은 육산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서 산세가 순하며 수림이 우거져 예부터 민초들의 의지처가 되어 왔다. 그리하여 백덕산을 옛날엔 사재산(四材山)이라 했다고 한다. 즉 동쪽엔 꿀(석청), 서쪽엔 옻나무, 남쪽엔 전단토, 북쪽엔 산삼 등이 나서 네 가지 진귀한 물품이 나오는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여기서 전단토(田丹土)란 흉년에 사람이 먹을 수 있는 하얀 흙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이처럼 예로부터 가난한 민초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제공해 주고, 산자락엔 적선을 권하는 법흥사를 품고 있어서 백 가지의 덕을 다 갖춘 산이라고 하여 한자로 백덕산(百德山)이라고도 한다.
산줄기는 한강기맥에서 갈라진 가지가 횡성의 태기산(1,261m)을 지나 청태산(1,200m)과 오봉산(1,126.2m)를 거쳐 문재(800m)에서 백덕산으로 이어진다. 백덕산 가까이 치악산(1,288m)이 있어서 그 유명세에 가려 덜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들어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1,000m 넘는 능선이 5km 이상 뻗어 있어서 능선 종주의 멋이 있고, 겨울철에 눈이 한번 왔다 하면 무릎까지 빠질 정도로 쌓여 심설산행의 대상지로 각광을 받는다. 겨울철 눈 쌓인 봉우리마다 피어나는 은백의 설화가 아름다워서 산 이름조차 백덕산(白德山)이 된 것이다.
산행 들머리는 북쪽 문재 방면과 남쪽 법흥사 방면 두 곳으로 나누어진다. 법흥사 쪽 들머리로 가려면 중앙고속도로로 가서 신림 IC에 내려 우회전하여 88번 도로를 따라 영월 쪽으로 진행을 하면서 신림터널과 황둔리, 그리고 솔치터널을 지나 20분 정도 가면 주천면에 이른다.
거기서 주천 시가지 가운데를 가로질러 서북쪽으로 빠져나가면 평창으로 가는 82번 도로에 이어지고, 82번 도로를 따라 400-500m 가면 왼편으로 주천강(평창강) 다리를 건너는 411번 도로가 갈라진다. 거기서 다리를 건너 411번 지방도에 들어서서 법흥사 이정표를 따라 14km 정도 북서쪽으로 들어가면 법흥사에 이르는데, 법흥사로 들어가는 10여km의 법흥리 계곡은 소나무를 비롯한 수목이 울창한 청정지역이어서 여름철엔 피서객으로 넘쳐난다.
그리고 법흥사 전방 2km 지점의 대촌 버스 정류장(종점)에 이르면 그 일대가 제법 넓은 교차로이고, 갈림길이 있으며, 한쪽에 커다란 산행안내판과 ‘구봉대산 구봉의 의미’를 설명한 안내판이 서 있다. 거기서 주변을 잘 살피면 왼편에 법흥사 쪽을 가리키는 돌비석이 서 있고, 오른편 넓은 길처럼 보이는 곳이 관음사(흥원사)로 향하는 길이다. 오른편 관음사로 향하는 길로 들어서면 곧 이어 좁은 1차선 도로로 변한다. 그런데 관음사가 최근에 흥원사로 사찰 이름을 바꾸었다.
법흥사(法興寺)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자장율상에 의해 창건된 유서 깊은 절이다. 즉 당나라에 유학을 갔던 자장율사가 중국 종남산 운제사에서 수도를 하던 중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전수 받아와서 우리나라에 모신 것이 양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등의 적멸보궁인 것이고, 또한 법흥사(처음엔 흥령사라 했음)를 창건하여 여기에도 진신사리를 모심으로써 불보사찰이 되게 하였다.
법흥사 적멸보궁
그리고 신라 말에 이르러 도윤 철감(道允澈鑑;798~868)국사가 중국의 남천(南泉)선사로부터 선(禪)을 전수 받아 와서 신라 말 구산선문(九山禪門)이 흥기할 때 법흥사에서 구산선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사자산문을 개창하였다. 이어 철감국사의 제자인 징효(澄曉;826~900)대사에 이르러서 사자산문이 더욱 번창하여 한 때 2천명이 넘는 승려가 법흥사에서 공부할 정도로 대찰이었다고 한다.
현재 법흥사에는 징효대사 보인탑(보물 제612호) 외에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으나 철감선사 부도(국보 제57호)는 전남 화순의 쌍봉사에 있다. 그것은 철감선사가 후에 쌍봉사를 창건하고, 거기서 입멸하였기 때문이다. 법흥사 주변엔 수 백 년 된 거송이 밀집해 있어서 유서 깊은 법흥사의 연륜을 한층 돋보이게 하고, 흥원사가 있는 법흥리 계곡 상류인 백련계곡 역시 삼림이 울창하고, 소와 담이 수없이 이어져 있고,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아름답기 그지없다. 더구나 이 계곡엔 사람의 발길이 많이 닫지 않아 산고청수(山高淸水)한 곳이어서 선경을 방불케 하여 산행의 의미를 더해준다.
버스종점 갈림길에서 흥원사 방향으로 2km 정도 올라가면 작은 주차장이 있고, 주차장에서 오른편으로 신선바위봉으로 해서 백덕산으로 향하는 길이 갈라진다. 그리고 다리 건너 흥원사(해발 420m)를 거쳐 올라가서 백년광산(몰리브텐 광산)터를 지나 10여분 올라가면 길이 갈라진다. 거기 이정표에 ‘법흥사 입구 2.1km, 백덕산 1코스 5.6km, 백덕산 2코스 3.8km’라 적혀 있다. 이정표의 1코스란 당재나 작은 당재를 거쳐서 올라가는 것을 말하며, 2코스란 서쪽 방향에서 백덕산 남릉으로 올라가는 직등 코스를 말한다. 그런데 법흥사 쪽은 어느 코스로 올라가든 경사가 가파르고, 위험한 곳이 많아서 이쪽으로 산행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이에 비해 북쪽 문재는 국도 42호선 횡성군 안흥면과 평창군 방림면 사이에 있는 해발 800의 고갯마루로서, 여기서 산행을 시작하면 해발 고도가 높아 그만큼 수월하다. 더구나 위험한 곳이나 가파른 곳이 없고, 편안한 능선 길이 이어져서 단체 산행의 경우에는 대개 문재 쪽으로 간다. 문재 쪽으로 접근을 하려면 영동고속도로 새말 IC에서 빠져나가 우회전하여 42번 국도를 따라 동쪽 안흥, 평창 쪽으로 가야 한다. 42번 도로를 따라가면 얼마 가지 않아서 고갯길이 시작되며, 이 고개가 전재이다. 처음 가는 사람은 이 전재를 자칫 문재로 착각하는 수가 있다. 문재와 전재의 차이점은 문재엔 터널이 있으나 전재엔 터널이 없다. 전재를 넘어가면 찐빵으로 유명한 안흥이고, 안흥을 지나 조금 가면 고갯길이 다시 시작된다. 이 고개가 안흥에서 방림, 평창 방면으로 넘어가는 문재이다. 정상엔 문재터널이 있고, 터널을 빠져나가자마자 바로 오른편에 작은 공원이 있는 거기가 산행기점이다.
공원엔 커다란 산행안내판이 서 있고, 그 앞 길가에 차량 10여대를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서 승용차로 갔다면 거기 주차해 두고 산행에 들어가면 되며. 공원 남측 등산로 도입부분을 잘 가꾸어 놓아서 정감이 간다. 산행에 들어가면 처음부터 가파른 길로 시작되고, 오르막을 10여분 올라가면 임도가 나타난다. 이 임도는 지금의 문재 터널이 뚫리기 전의 옛날 42번 국도이다. 그리고 거기 이정표는 위쪽을 가리키며 ‘백덕산 5.6km’라 적혀 있다.
그런데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올라가면 문재 터널 위 옛날 문재로 가게 된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굳이 멀리 우회해서 옛날 문재로 가야할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이정표가 가리키는 반대 방향으로 임도(구도로)를 따라 아래쪽으로 50여m 내려가면 다시 등산로가 이어진다. 그리하여 가파른 길을 15분 정도 더 올라가면 주능선에 닿는다. 일단 주능선에 올라서면 길이 순해지면서 완만한 오르막내리막이 이어져서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다.
주능선을 따라 7~8분 올라가면 925m봉에 이른다. 925m봉에는 삼각점(평창 401, 1989 재설)이 있고, 전에는 전망도 괜찮아서 전망대라 불리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수림에 가려 전망이 신통치 않다. 그리고 20여분, 한 차례 내려갔다가 올라가면 시야가 사방으로 트이는 헬기장(1,005m)에 닿는다. 산행기점에서 50~60분 걸리며, 정상을 제외하고는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다.
오봉산
앞쪽으로는 진행해야 할 백덕산 주능선이 보이고, 뒤쪽으로는 오봉산(1,126.2m)이 가까이 있으며, 멀리 동쪽으로는 안정감이 있어 보이는 가리왕산(1,561m)의 카리스마가 대단하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치악산(1,288m)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헬기장의 화강암 4각기둥 이정표엔 ‘정상 3.4km, 당재 2.2km’라 새겨져 있다.
치악산 능선
그런데 백덕산 주능선을 걸어가면 어쩐지 치악산 능선과 많이 닮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같은 산줄기라는 점도 있고, 골산과 육산의 중간 형태라는 점도 그렇고, 암릉도 같은 층암 계통이며, 좁은 능선과 오르내림의 형태마저 비슷하여 전체적인 분위기가 치악산 능선과 많이 닮아 있다.
헬기장에서 30여분, 한 차례 내려갔다가 올라가면 1,125m봉 아래 삼거리에 이른다. 거기서 오른편(남서쪽)으로 뻗은 능선 상에는 1,126m봉, 1,168.9m봉, 1,130m봉, 1,160m봉(일명 사자산), 1,075m봉 등이 연이어 있다. 삼거리 이정표엔 이 능선 쪽(오른편)을 향해 ‘사자산 정상’이라 적혀 있고, 왼편을 가리키며 ‘백덕산 3.4km’라 적혀 있으며, 또 다른 이정표엔 ‘문재터널 2.7km’라 적혀 있다.
거기서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왼편으로 직진하는 길이고, 10여분 진행하면서 1,125m봉을 오른편으로 우회하여 봉우리 위로 올라가면 남-서쪽으로 시야가 활짝 열리는 멋진 전망대이다. 발 아래로 법흥리 골짜기가 내려다보이고, 1,160m봉(일명 사자산) 쪽으로 뻗은 서남쪽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법흥리 계곡
그리고 다시 10여분 진행하면서 또 하나 비슷한 높이의 바위봉을 왼편으로 우회하여 진행하게 된다. 이 두 번째 바위봉이 5만분지1 지형도 상에 사자산으로 표기한 1,120m봉이다.
그런데 어떤 지형도는 1,120m봉에서 10여분 진행한 지점의 1,181m봉을 사자산이라 표기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최근엔 1,125m봉에서 남서쪽으로 뻗어가 능선 상의 2.5km 거리에 위치한 1,160m봉을 사자산이라 한다. 바로 삼거리 이정표에 ‘사자산 정상’이라 표기한 그 봉우리이다. 헌데 불교에서는 사자를 진리 혹은 부처님의 상징이라 여겨 신성시하여 고승의 위대한 설법을 사자후(獅子吼)라 하기도 한다. 이런 연유도 있고, 또 법흥사가 신라 말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자산파를 일으킨 연유도 있어서 불가에서는 오히려 주봉이 있는 백덕산을 사자산이라 한다.
그리고 이 일대의 지혈이 연화봉(915m) 한군데로 다 모이는지라 연화봉 자락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법흥사의 적멸보궁이 위치해 있고, 그 연화봉의 모산이 백덕산인 만큼 불가에서는 더욱 백덕산을 사자산이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자산을 지칭하는 봉우리에 대해 의견이 정리되지 못한 채 구구한 것이 사실이나 어느 봉우리를 사자산이라 하든, 백덕산 능선 상에 있음이 틀림없으므로 대체로 백덕산이라 하면 사자산까지 포함한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봉우리의 이름이야 어떻든 이렇듯 은밀한 곳까지 찾아와서 적멸보궁을 지은 자장율사의 집념에 감탄할 따름이다. 길도 없고, 교통편도 없었던 그 당시 사나운 짐승들이 우글거리는 산속을 제대로 된 장비나 먹거리도 없는 상태에서 이 오지에 터를 잡을 때까지 얼마나 헤매고 고생했을까, 종교적 신념이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법흥사 적명보궁 진신사리 묻힌 곳(굴은 자장율사가 수행하던 곳이라 함)
1,120m봉에서 정상을 향하여 가는 동안 가끔 오른편으로 천길 단애가 나타나서 남-서면의 수주면 법흥리 쪽의 전망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방을 둘러보거나 북-서쪽을 볼 수 있는 곳은 초입의 헬기장뿐이다. 특히 여름철엔 수림이 우거져 더욱 답답한 산행을 해야 한다. 그래서 백덕산은 겨울 산행의 적지라 할 수 있다.
당재
그리고 주능선을 따라 1,125m 삼거리에서 45분, 산행기점인 문재에서 2시간 10~20분 진행하면 당재 삼거리(1,148m)에 이른다. 백덕산 산행기에 늘 당재가 등장하지만 막상 현지에 가면 ‘당재’라 표기한 것이 전혀 없고, 이정표에 ‘백덕산 2.0km’라 표기한 것이 그곳이 당재임을 짐작케 하는 유일한 자료이다. 따라서 처음 가는 사람은 거기가 당재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지나치게 된다.
과거 당재에서 남쪽으로 관음사(흥원사)와 법흥사로 내려가는 길이 갈라졌으나 지금은 그쪽에 ‘등산로 없음, 위험지역’이라 적힌 표지판이 가로막고 있으며, 이정표엔 ‘백덕산 2.0km, 비네소골 3.0km’라 적혀 있어 삼거리인 셈이다. 그러나 여러 지형도엔 여기가 4거리인 것처럼 표기되어 있다.
그건 그렇고 당재에서 봉우리를 왼편으로 우회하면서 오르막을 20여분 올라가면 큰 노송 두 그루가 지키고 있는 쉼터가 나타난다. 남-서쪽으로 시야도 열려 있어서 대개 여기서 쉬었다 간다.
작은 당재(운교 4거리)
그리고 소나무 쉼터에서 다시 15분 정도 올라가면 운교4거리인 ‘작은 당재’에 닿는다. 이곳에도 거기가 ‘운교4거리’이거나 ‘작은 당재’란 표식은 전혀 없다. 다만 이정표로 짐작할 따름이다. 거기 이정표엔 ‘관음사 3.2km, 법흥사 4.0km, 백덕산 1.2km, 비네소골 3.1km’라 적혀 있고, 화강암의 4각기둥 이정표엔 ‘문재 4.6km’라 적혀 있다. 이 작은 당재에서 오른편으로 흥원사와 법흥사로 내려가는 길이 갈라지지만 이 길 역시 가파르고 위험한 곳이므로 주의해서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반대편으로는 비네소골로 해서 운교리로 내려갈 수 있다.
먹골 삼거리
작은 당재(운교4거리)에서 20여분 올라가면 1,275m봉 아래 ‘먹골삼거리(1,262m)’에 닿는다. 거기 이정표에 ‘백덕산 0.5km, 헬기장 0.3km, 먹골 4.7km’라 적혀 있다. 운교리 먹골마을을 현지에선 오히려 묵골이라 한다. 허긴 먹의 한자음이 묵이니 묵골이라 해도 결국 뜻은 같은 말일 것이다.
먹골삼거리에서 오른편(남쪽) 정상을 향하여 1~2분 가다가 보면 완전히 N자로 굽은 굴참나무가 길을 막고 있다. 어쩌다가 그렇게 굽었는지 보는 이마다 한 마디씩 한다. 먹골삼거리에서 정상을 향하면 처음 10여분 동안은 편안한 능선 길이 이어지지만 나머지 10여분 구간은 심한 너덜지대이므로 조심스럽게 올라가야 한다.
백덕산 정상은 두 개의 암봉이 우뚝 솟은 쌍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상 봉은 4~5평 정도의 공간에 정상 표지석과 오래된 삼각점(11 복구, 77.7 건설부)이 있으며, 이정표에 ‘당재 2.3km, 법흥사 3.8km’라 적혀 있다. 산행기점인 문재에서 5.8km, 3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1,005m봉 헬기장 이후 정상에 이르기까지 수목이 짙어서 제대로 전망을 즐길 수 없었으나 정상에 올라서면 이런 답답함을 한꺼번에 씻어주는 시원함이 있다. 정상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백석산(1,364m) - 잠두산(1,243m) - 백적산(1,142m)으로 이어지는 우람한 산줄기와 그 너머 백두대간의 장대한 능선이 시야에 들어오고, 특히 겨울철엔 동북쪽으로 덩치 큰 가리왕산의 눈 덮인 모습이 장관이다.
가리왕산
그리고 서쪽으로는 치악산 능선이 거대한 성곽처럼 펼쳐져 있고, 동남쪽 저 멀리엔 소백산록 줄기가 아스라이 보인다. 남쪽으로는 금수산(1,016m)의 낙타 등처럼 생긴 봉우리들이 그 특유의 자태를 뽐내고 있으며, 그 너머로 월악산(1,094m)이 희미하게 보이고, 아래쪽으로는 법흥리 계곡이 한눈에 들어온다. 백덕산은 큰 산이므로 여러 모로 코스 변경이 가능하고, 상당히 힘든 코스를 선택할 수도 있다. 그 대표적인 코스의 하나가 정상에서 서남쪽의 신선바위봉(1,089m)과 사자암으로 뻗어내린 능선을 따라 가는 길이다. 이 능선 길은 상당히 까다로운 곳이므로 조심스럽게 가야 한다. 그리고 정상에서 용바위 쪽으로 해서 흥원사(관음사) 방향으로 내려갈 수도 있으나 이 역시 가파르고 조심스러운 곳이다.
1,275m봉
그래서 대개 먹골 방향으로 하산하는 것이 정석이다. 정상에서 다시 먹골삼거리로 되돌아가서 1,275m봉을 지나 10여분 내려가면 널따란 헬기장(1,225m)이 나타난다. 통신용 안테나가 서 있는 헬기장은 비교적 시야도 열려 있어서 쉬었다 가기 좋은 곳이다. 그래서 대개 여기서 점심식사를 한다.
헬기장에서 15분 정도 내려가면 왼편에 돌출한 바위봉이 나타나는데, 그 암벽을 잘 살피면 바위벽에 동판으로 만든 진혼비가 붙어 있다. 동판에는 「고 공00 1936, 7, 10(음) 1996, 1, 21 산, 바람, 눈, 비 하느님과 공알렉시오 평택에서 산을 좋아하는 후배들이」라고 양각되어 있다.
망인은 아마 천주교 신자인 듯, ‘공’은 성씨이고, ‘알렉시오’는 천주교에서 말하는 본명인 듯하며, 멀리 평택에서 추모동판을 제작하여 이곳까지 찾아와서 붙여놓은 후배들이 대견스럽다. 그러나 내용에 생략이 지나치고, 비약이 많은 문맥이어서 도무지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가 힘들다.
먹골재
동판이 있는 곳에서 6~7분 내려가서 봉우리 하나를 왼편으로 우회한 후 15분 정도 내려간 안부가 먹골재이다. 거기 이정표에 오른편으로 ‘원당마을’을 가리키고, 왼편으로 ‘먹골 2.0km’라 적혀 있다. 원당이란 평창군 오지 마을이다. 이어서 5~6분 내려가면 다시 이정표가 나타나면서 ‘먹골 1.5km’라 적혀 있고, 이후 4~5분 내려가면 임도에 내려선다.
임도를 가로 질러 내려가서 폐광된 금광 터를 지나면 계곡의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며, 정상에서 5.2km, 1시간 40여분 내려가면 먹골마을에 닿으면서 산행을 마감하게 된다. 산행거리 11km, 산행시간 5시간, 쉬는 시간 포함하면 6~7시간 정도 걸리는 알맞은 하루 산행 일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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