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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정보방 스크랩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산 예빈산
성성윤(6-1) 추천 0 조회 248 13.07.11 10:5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예빈산과 예봉산


山을 알려면 그 山을 떠나라고 했다. 그 산을 떠나 멀리서 바라볼 때 비로소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네 인생살이도 마찬가지다. 어떤 일에 몰두해 있으면 그 일의 호오(好惡)와 선악(善惡)을 잘 모른다. 몰두할 당시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손에서 일을 놓고 객관적 입장에서 바라볼 때 미처 보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일주일 전 검단산에 오른데 이어 이번에는 예빈산을 찾았다. 검단산에 올랐을 때는 철문봉에서 예봉산, 율리봉, 예빈산을 거쳐 승원봉으로 이어지는 산맥의 능선과 계곡을 차례로 하나하나 살펴 보았다. 관상을 보듯 산의 생김새를 세세히 살피는 것은 이제 하나의 버릇처럼 되었다. 


경춘선 팔당역이 있는 팔당2리 상팔당 마을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철교 주변 담벼락에는 때마침 인동꽃이 피고 지고 있었다. 


인동꽃


모진 겨울 살을 에는 추위를 이겨내고

흰꽃으로 피어 노란꽃으로 지는 인동꽃

 

인동(忍冬)이란 이름은 추운 겨울에도 곳에 따라 잎이 시들지 않기 때문에 생겼다. 인동꽃은 처음 흰 꽃으로 피어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노란색으로 변해서 은화(銀花), 금화(金花), 금은화(金銀花)라고도 한다.  


인동에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사이가 좋아 한시도 떨어지기 싫어하는 쌍둥이 자매가 있었다. 금화(金花)는 언니, 은화(銀花)는 동생이었다. 어느 날 자매는 열병에 걸려 연달아 죽었다. 자매의 무덤에는 덩굴 하나가 자라났다. 처음에는 흰색으로 피었다가 나중에는 노란색으로 변하는 꽃이었다. 그 후 마을에 열병이 돌았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 꽃을 달여 먹고는 씻은 듯이 나았다. 그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덩굴의 이름을 금은화라고 불렀다. 


한의학에서는 꽃봉오리를 금은화, 잎과 줄기를 인동등(忍冬藤)이라 하여 한약재로 사용한다. 해열, 해독, 항균, 항염증, 백혈구 탐식, 중추신경 흥분 작용과 혈청 콜레스테롤 강하, 궤양 예방효과 등이 뛰어나 옹종정창(癰腫?瘡), 인후종통(咽喉腫痛), 단독(丹毒), 열독혈리(熱毒血痢), 풍열감모(風熱感冒), 온병발열(溫病發熱) 등을 치료한다. 그 외 풍습성관절염(風濕性關節炎), 폐옹해토농혈(肺癰咳吐膿血, 폐농양), 장옹복통(腸癰腹痛), 서창(鼠瘡, 연주창), 나력(??, 만성임파선종창) 등에 쓴다. 유선염, 대장염, 위궤양, 방광염, 인후염, 편도선염, 기관지염, 결막염, 부스럼, 유행성 이하선염으로 인한 고열, 화농성 감염증에도 응용한다.


인동등은 해열, 해독, 경락(經絡)을 통하게 하는 효능이 있어 온병발열, 열독혈리, 옹종창양(癰腫瘡瘍), 풍습열비(風濕熱痺), 관절홍종열통(關節紅腫熱痛)을 치료한다.   


인동은 향기가 좋고 꿀이 많은 밀원식물이다. 민간에서는 해독, 이뇨, 미용 작용이 있다고 여겨 차로 만들거나 술을 담그기도 한다.


왕보리수 열매


상팔당 마을 길가에 조발조발 열린 왕보리수 열매들이 바알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잘 익은 왕보리수 몇 알을 따서 입에 넣자 새콤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히 퍼져 왔다. 고향 시골집에도 왕보리수나무를 한 그루 심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왕보리수나무는 한국,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한다. 한국에서는 평안남도 이남의 산기슭이나 들에서 자란다. 울타리용이나 관상용으로도 많이 심는다. 열매는 과일로 먹거나 잼, 파이의 원료로 이용한다. 또 열매와 뿌리, 잎은 자양, 진해, 지혈의 효능이 있다. 


왕보리수는 세 종류가 있다. 잎 표면과 암술대의 털이 떨어지고 표면에 비늘털이 없는 것은 민보리수, 잎이 거꾸로 선 바소꼴이고 어릴 때 잎 표면에 성모(星毛)가 있는 것은 왕보리수, 열매가 길이 7∼8mm, 지름 5mm인 것은 긴보리수다.


좀조팝나무꽃


어느 집 마당의 울타리로 심은 좀조팝나무의 연분홍꽃이 이쁘게 피었다. 좁조팝나무는 중부 이북의 산지에서 자라는 한국 특산식물이다. 꽃이 아름다워서 관상용으로 많이 심는다. 꽃은 산방꽃차례로 피며, 꽃색은 홍백색이나 담홍색, 또는 분홍색이다. 좀조팝나무보다 작은 종인 바위좀조팝나무는 북한의 강원도 삼방(三防)에 자생하는 한국 특산종이다.


호두


아름드리 호두나무에는 굵은 호두가 주렁주렁 열렸다. 호두나무의 원산지는 페르시아 지금의 이란이다. 중국은 한(漢)나라 때 장건(張騫)이 서역(西域)에서 들여왔다고 '제민요술(濟民要術)'에 기록되어 있다. 


한국은 고려시대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비로소 호두나무가 나타나는데, 원나라 사신으로 갔던 유청신(柳淸臣)이 처음 들여와 고향인 천안시 광덕면에 심었다고 한다. 그러나 광주 신창동 초기철기시대 유적에서 호두가 출토된 것을 근거로 원삼국시대에 유래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현재 한국에서 재배되고 있는 호두나무는 페르시안호두나무를 모수, 가래나무를 수분수로 하여 자연적으로 교배된 자연교잡종이다.


일본의 호두나무는 임진왜란 때 한국에서 가져간 것이다. 일본 중부 산악지대는 호두 산지로 유명하다. 일제 강점기에 호두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1940년 일본에서 우량품종의 호두 묘목을 많이 들여와 심었다. 이때 들어온 호두나무들은 지금도 한국에서 재배되고 있다


과실 생산을 목적으로 재배되는 호두나무는 모두 페르시안호두나무 또는 그 변종이다. 현재 호두나무는 전세계에서 재배되고 있다. 전세계 호두 공급량의 약 60% 이상은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생산된다. 


호두에는 지방과 단백질, 비타민(B1, B2, C, E)이 풍부하다. 칼슘, 인도 많다. 호두는 뇌세포를 활발하게 하고 기억력을 증진시키는 건뇌식품이다. 호두에는 불포화지방산의 일종인 오메가3가 많이 함유되어 있으며 주성분은 알파-리놀렌산이다. 알파-리놀렌산 등의 불포화지방산은 동맥경화 예방의 효능이 있다. 또, 호두의 풍부한 무기질과 비타민B1은 피부 미용, 노화 방지, 강장 효과가 있다. 


호두는 그대로 먹기도 하고 맥주 안주로도 좋다. 호두과자, 호두빵, 호두두부, 호두엿, 호두장, 호두죽, 신선로 등 각종 과자나 요리에 첨가되기도 한다. 호두 기름은 식용 외에 화장품이나 향료의 혼합물로 이용된다.   


호두는 한약재로도 쓰인다. 호두의 성숙한 과실을 한약명으로 호도육(胡桃肉) 또는 호도인(胡桃仁)이라고 한다. 보신고정(補腎固精), 온폐정천(溫肺定喘), 윤장(潤腸)의 효능이 있어 폐신허해수천식(肺腎虛咳嗽喘息), 신허요통각약(腎虛腰痛脚弱), 대변조결(大便燥結), 석림(石淋, 요로결석), 소변빈삭(小便頻數), 양위(陽?, 정력감퇴), 요퇴산련(腰腿酸軟), 유정(遺精, 몽정, 활정), 허한해천(虛寒咳喘) 등을 치료한다. 음허화왕(陰虛火旺)하거나 담열해수(痰熱咳嗽), 대변이 묽은 사람은 피한다.


상팔당 마을에서 바라본 율리고개


상팔당 마을에서 앞으로 가야 할 산길을 바라보니 저 멀리 율리고개가 눈에 들어왔다. 저 고개에서 왼쪽으로 가면 예봉산, 오른쪽으로 가면 예빈산이다. 


우리네 인생길 앞에도 수없이 많은 갈림길이 기다리고 있다. 때로는 중대한 갈림길에 서야 할 때도 있다. 이때 선택을 잘 해야 한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길을 잘못 선택한 결과 삶의 실패를 맛볼 수도 있다. 그래서 자신의 선택을 평생 후회할 수도 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는 법이다.


앵두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미 자루 나도몰래 내던지고

말만 들은 서울로 님을 찾아서 

이쁜이도 금순이도 담봇짐을 쌌다네. 

     

마루가 있는 집 마당의 우물가에 심은 앵두나무에 조발조발 달린 앵두가 바알갛게 익었다. 앵두를 볼 때마다 김정애가 부른 노래 '앵두나무 처녀'가 떠오르곤 한다. '앵두나무 처녀' 노랫가락이 귀에 익은 사람은 분명 중년 이상의 연령층일 것이다. 


'앵두나무 처녀'에는 한국 산업화 과정의 슬픈 이면이 담겨 있다. '동네처녀'들의 '바람'은 사실 '님을 찾아서' 가는 그 '바람'이 아니었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시골의 '이쁜이 금순이'는 돈을 벌어 가난을 면하기 위해 ' 일자리를 '찾아서' '물동이 호미 자루 나도몰래 내던지고 말만 들은 서울로' 올라갔던 것이다. 청계천 피복공장에서, 가리봉동 봉제공장에서 청춘을 바친 '이쁜이 금순이'는 지금 무엇이 되어 살고 있을까?  


민간에서는 앵두나무의 열매와 가지를 약재로 쓴다. 열매는 이질과 설사에 효과가 있고 기운을 북돋우며, 가지의 재를 술에 타서 마시면 복통과 전신통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좋은 한약도 많은데 이질, 설사, 복통, 전신통에 굳이 앵두와 앵두나무 가지를 쓸 필요가 있을까?  


노랑어리연꽃


상팔당 마을 위쪽에 있는 작은 연못에는 '물의 요정' 노랑어리연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물 위에 뜬 방패 모양의 잎 사이로 올라온 꽃대마다 호롱불처럼 밝은 노란색의 꽃을 하나씩 피워 올렸다. 꽃잎에는 레이스처럼 가느다란 노란색 털이 촘촘히 달려 있었다.  

 

어리연꽃은 노랑어리연꽃보다 작고 앙증맞은 흰색 꽃이 핀다. 꽃의 가운데 부분은 노란색이다. 꽃잎의 안쪽과 가장자리에는 흰색 털이 어리어리하게 달려 있다.

 

삭막한 도시에서 물이 있는 공간은 환경 또는 생태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정원의 연못에 노랑어리연꽃을 심으면 은은한 정취를 즐길 수 있다. 또, 옹기나 돌확에 노랑어리연꽃을 심어서 정원 한쪽에 두거나 집안에 들여 놓고 감상해도 좋다. 다른 연꽃과 마찬가지로 노랑어리연꽃도 연못에 심을 때는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노랑어리연꽃은 번식력이 왕성해서 순식간에 연못을 뒤덮어버리므로 다른 수생식물의 생장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개체수를 적절하게 조절해야 한다.      

 

노랑어리연꽃의 잎과 줄기, 뿌리를 한의학에서 행채(?菜)라고 한다. 해열해독(解熱解毒), 이뇨소종(利尿消腫)의 효능이 있어 임질, 고열, 부종 등을 치료한다. 부스럼이나 종기에는 생잎을 찧어 환부에 붙이기도 한다. 

 

싸리꽃

 

마을을 벗어나 숲이 우거진 계곡으로 들어섰다. 시원한 냇물이 흐르는 계곡의 평평한 암반 위에는 등산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계곡의 물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쯤 갈림길을 만나 오른쪽 율리고개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대부분의 등산객들이 예봉산으로 올라간 까닭에 예빈산으로 가는 산길은 한산했다.

 

율리고개로 오르는 산기슭에는 홍자색 싸리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국민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 가을이 되면 담임선생님은 학교 청소용 빗자루를 만들어야 한다면서 싸리나무를 한 단씩 가져오라고 했다. 그런 날은 학교가 파하자마자 집에 돌아와 뒷산에 올라가 낫으로 싸리나무를 베어 오던 기억이 난다. 


옛날 싸리나무는 사립문의 사립짝이나 울타리, 발, 소쿠리, 다래끼, 채반, 삼태기, 바구니, 빗자루 등을 만드는 요긴한 재료였다. 싸리나무의 잎은 가축의 사료, 줄기에서 벗긴 껍질은 노끈이나 섬유 재료로 쓰기도 했다. 꽃은 꿀이 많아 밀원식물로 이용되었다. 싸리꿀은 어느 지역이든 상관없이 최상품의 꿀로 인정받는다. 


싸리나무는 불이 잘 붙고 화력이 좋아 땔감이 귀하던 시절 화목으로도 많이 이용되었다. 잘 마른 싸리나무는 연기가 거의 나지 않는다. 그래서 남부군 파르티잔(빨찌산)들은 산악지대의 은거지를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싸리나무를 때서 밥을 지었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도 빨찌산들이 토벌대에 발각되지 않기 위해 싸리나무를 이용해서 밥을 짓는 장면이 나온다. '태백산맥'은 정의감에 불타는 젊은이들의 피를 끓게 만들었던 소설이다.   


싸리나무는 한국과 일본, 중국, 우수리강 등지에 분포한다. 키는 3m까지 크고, 지름이 큰 것은 3㎝에 달하는 것도 있다. 그렇다면 싸리나무로 만들었다는 사찰의 일주문이나 대웅전의 기둥은 과연 진실일까? 나무의 세포를 현미경으로 조사한 결과 함양 장수사 조계문(용추사 일주문)은 느티나무, 제천 무암사 극락보전의 기둥과 공주 마곡사 대웅전의 기둥은 소나무, 김천 직지사 일주문은 전나무로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순천 송광사 비사리구시, 사찰은 아니지만 울산 만정헌의 기둥도 느티나무였다. 


싸리나무 가운데 흰색 꽃이 피는 것을 흰싸리고 한다. 흰싸리는 설악산 화채봉 기슭에서 발견되었다. 잎 뒷면에 털이 빽빽하게 나서 회백색으로 보이는 것은 털싸리(var. sericea)다. 털싸리는 바닷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싸리나무의 줄기와 잎, 뿌리는 해열, 이수(利水), 윤폐(潤肺)의 효능이 있어 기침, 백일해, 임질, 소변불리(小便不利) 등을 치료한다. 한의사들은 거의 쓰지 않는다.


광릉골무꽃


줄딸기


검단산에서도 보았던 광릉골무꽃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꽃 두 송이가 나란히 붙어서 피어 있는 모습이 마치 다정한 연인처럼 보였다. 길가 풀섶에는 줄딸기가 익어가고 있었다. 줄딸기 하나를 따서 입에 넣으니 상큼달콤한 맛이 났다. 


줄딸기는 덤불딸기 또는 덩굴딸기(蔓?), 만경현구자라고도 한다. 한국과 중국, 일본 등지에 분포한다. 한국에서는 북부 고원지대를 제외한 전국 산과 들의 양지에서 자란다. 열매는 과일 그대로 먹기도 하고 식용 또는 약용으로 쓴다. 꽃은 밀원이다. 


딸기의 종류는 매우 많다. 산딸기줄딸기, 복분자딸기, 멍석딸기, 곰딸기, 흰땃딸기, 땃딸기, 뱀딸기, 좀딸기, 겨울딸기, 수리딸기, 맥도딸기, 멍덕딸기, 거지딸기, 함경딸기, 장딸기, 검은딸기, 가시딸기, 섬딸기, 오엽딸기, 단풍딸기 등이 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산딸기, 곰딸기, 멍석딸기, 복분자딸기, 줄딸기 등이다. 그 외 청수리딸기, 흰곰딸기, 청멍석딸기, 사슨딸기, 나무딸기, 복딸나무, 청복분자딸기, 제주장딸기, 노랑장딸기, 거제딸기, 거문딸기 등의 변종도 많다. 겨울딸기와, 검은딸기, 가시딸기는 제주도, 맥도딸기는 전남 신안군 맥도, 거제딸기는 거제도와 거문도, 거문딸기는 거문도, 함경딸기는 함경도, 오엽딸기는 경북 금오산, 단풍딸기는 충남 안면도 지역 특산종이다. 

 

복분자딸기의 채 익지 않은 열매를 건조한 것을 한약명 복분자(覆盆子)라고 한다. 음력 5월에 익은 열매가 검붉은색을 띠므로 오표자(烏?子), 대맥매(大麥?), 삽전표(揷田?), 재앙표(栽秧?)라고도 부른다. 복분자의 유래는 이렇다.


옛날에 신혼부부가 있었다. 어느 날 새신랑이 이웃마을에서 볼일을 보고 돌아오다가 배가 고파서 우연히 길가에 열린 덜익은 산딸기를 배가 부르도록 따먹었다.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자고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오줌을 누는데, 오줌줄기가 얼마나 센지 요강이 뒤집어지고 말았다. 그 후 이 산딸기를 먹으면 오줌줄기에 '요강(盆)'이 '뒤집어진다(覆)'고 해서 '복분자(覆盆子)'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한의학에서 복분자는 수삽약(收澁藥) 중 고정축뇨지대약(固精縮尿止帶藥)에 속한다. 보신고정(補腎固精), 축뇨의 효능이 있어 신허유뇨(腎虛遺尿, 요실금), 소변빈삭(小便頻數, 다뇨증), 양위조설(陽?早泄, 조루증), 신허유정(腎虛遺精, 유정, 활정) 등을 치료한다. 그 외 시력감퇴, 백내장, 불임증, 난임증, 야맹증(夜盲症), 탈모, 머리털이 일찍 세는 증, 피부노화에도 응용할 수 있다. 최근 연구 결과 복분자의 항염작용, 항산화작용, 항헬리코박터파이로리작용이 밝혀졌다.


복분자는 약성이 따뜻하므로 음허양항(陰虛陽亢), 신허유화(腎虛有火), 뇨량감소(尿量減少), 소변단삽(小便短澁) 등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 성욕과다항진증에도 사용을 금한다. 

 

율리고개


예봉산-예빈산 주능선인 율리고개 사거리에 올라섰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예봉산, 오른쪽으로 가면 예빈산, 뒤로 넘어가면 남양주시 조안면 조동이다. 


율리(栗里)란 지명을 보면 옛날 이곳에는 밤나무가 많았을 것이다. 밤나무가 많은 마을, 곧 밤마을이 한자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밤 율(栗)'에 '마을 리(里)'를 써서 율리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율리고개 주변 산기슭에는 여러 그루의 아름드리 밤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소나무 보호수


율리고개에서 예빈산으로 오르는 능선길에서 가지를 멋지게 펼친 소나무 보호수를 만났다.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소나무를 빙 둘러서 울타리를 쳐 놓았다. 소나무 밑둥에 철조망까지 감아 놓은 모습이 볼썽사나워 보였다. 사람들이 얼마나 오르내렸으면 철조망까지 쳐 놓았을까! 소나무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노루오줌


소나무 보호수 바로 옆에는 순백색의 노루오줌꽃이 이제 막 피어나고 있었다. 아직 꽃이 다 피지 않아서 노루오줌인지 흰숙은노루오줌인지 구분할 수는 없었다. 꽃대가 꼿꼿하면 노루오줌, 꽃대가 옆으로 수구러지면 흰숙은노루오줌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긴 꽃대에 수많은 작은 꽃들이 모여서 피는 노루오줌은 은은한 멋이 있어 초여름의 산객들에게는 반가운 꽃이다. 


전국의 산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루오줌은 여러해살이풀로 습기나 물기가 많은 곳에서 잘 자란다. 노루오줌의 꽃색은 흰색, 연분홍색, 연보라색, 붉은색, 홍자색 등 여러 가지다. 크기도 15㎝ 정도에서 1.5m까지 다양하다. 노루오줌은 뿌리에서 오줌과 비슷한 지린내가 난다. 그래서 노루오줌이란 이름이 붙었다. 노루오줌은 홍승마, 홍삼칠, 큰노루오줌, 왕노루오줌 등의 이명이 있다. 꽃말은 '기약 없는 사랑, 연정'이다


범의귀과(Saxifragaceae)의 노루오줌속(Astilbe)은 한국, 일본, 중국 등 주로 동아시아에 분포하며 일부가 북미에 자생한다. 노루오줌은 현재 약 14종이 알려져 있다. 유사종까지 포함하면 약 150종을 헤아린다. 외국에서 절화식물로 이용하는 '아스틸베(Astilbe)'는 노루오줌을 육종한 것이다.  


노루오줌속의 속명인 Astilbe는 그리스어로 ‘없다(without)’는 의미의 ‘a’와 ‘탁월하다(brilliance)’는 뜻의 ‘stilbe’의 합성어다. 어원에서 보듯이 꽃이 작아서 돋보이지 않는 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노루오줌의 영어명 'False Spirea'는 작은 꽃들이 모여 핀 모습이 조팝나무를 닮은 데서 유래했다. 'False Goat's Beard'는 노루오줌의 또 다른 영어명이다. 'Goat's Beard'는 눈개승마의 영어명인데 꽃이 염소 수염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노루오줌은 눈개승마와 비슷하다. 그래서 눈개승마에 '가짜(False)'를 붙여서 명명한 것이다. 울릉도에서 재배하는 삼나물이 바로 눈개승마다. 


한국에 자생하는 노루오줌속은 노루오줌, 숙은노루오줌, 흰숙은노루오줌, 둥근노루오줌, 진퍼리노루오줌, 한라노루오줌, 외잎승마 등이 있다. 숙은노루오줌은 꽃이 옆으로 기울어진 모습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홍승마(朝鮮紅升麻)라고도 한다. 흰숙은노루오줌은 꽃이 흰색이다. 둥근노루오줌은 숙은노루오줌에 비해 잎이 작고 둥글며, 꽃과 열매는 다소 크다. 전남과 황해도, 함북에 분포하는 특산종이다. 진퍼리노루오줌은 충북 속리산, 경기 광릉, 강원 향로봉, 함북 경성에서 자라는 특산종이다. 꽃은 엷은 도색(桃色)이다. 한라노루오줌은 키와 잎이 작고 꽃이 연분홍색이다. 제주도 특산종이다. 외잎승마는 근생엽이 홑잎으로 압록강 상류와 일본에 분포한다.  


노루오줌은 토양을 덮어 풍수해를 방지해 주는 지피식물로 이용가치가 매우 높다. 호반이나 천변에 심으면 지피식물로서의 기능 뿐만 아니라 경관도 아름답게 조성할 수 있다. 노루오줌은 다른 숙근초와 함께 심어도 잘 어울리고, 교목이나 관목의 그늘 아래 심어도 좋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노루오줌을 공원이나 식물원, 정원에 많이 심고 있다. 


노루오줌의 어린순은 나물로 먹고, 전초를 술로 담그기도 한다. 노루오줌의 전초와 꽃은 한약재로 쓴다. 한의학에서 노루오줌의 전초를 소승마(小升麻)라고 한다. 소승마는 거풍(祛風), 해열(解熱), 진해(鎭咳) 작용이 있어 풍열감모, 기침, 두신통(頭身痛) 등의 치료에 쓴다. 노루오줌의 뿌리를 적승마(赤升麻)라고 한다. 적승마는 활혈거어(活血祛瘀), 해독진통(解毒鎭痛) 작용이 있어 타박상, 관절염, 근육통, 근골산통, 위통, 수술 후 동통, 독사교상(毒蛇咬傷) 등을 치료한다. 


예빈산 정상


햇볕은 쨍쨍 내려쬐었지만 활엽수들이 빽빽하게 우거진 숲길은 그늘이 져서 그런지 그리 덥지는 않았다. 한동안 가파른 산길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드디어 예빈산(禮賓山, 590m) 정상에 올라 섰다. 한북천마지맥(漢北天馬支脈) 끝자락에 솟아 있는예빈산은 직녀봉(織女峰)이라고도 한다. 예빈산은 남양주시 와부읍(瓦阜邑) 팔당리와 조안면(鳥安面) 능내리(陵內里), 조안리(鳥安里)의 경계를 이룬다.  


전설에 따르면 견우와 직녀가 1년에 한 번 이 산봉우리에서 만났다고 한다. 전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직녀봉 바로 옆에는 견우봉(牽牛峰, 584m)이 비슷한 높이로 솟아 있다. 견우와 직녀의 사랑이 얼마나 간절하고 애틋했으면 영원히 헤어지지 못하도록 두 산봉우리로 나란히 솟아났을까!  


헬기장을 닦아 놓은 정상에는 그 흔한 표지석도 없고 이정표만 세워져 있었다. 북쪽 주능선에는 율리봉과 예봉산(禮蜂山, 683.2m), 철문봉(喆文峰, 630m)이 솟아 있었다. 강과 산이 생긴 이래 예봉산과 예빈산은 저 도도하게 흐르는 한강을 굽어보았을 것이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예전에는 직녀봉 안내판이 있었던 모양이다. 안내판의 기록에는 '예빈산은 검단산과 함께 한성백제의 강역을 수비하던 외오성(外五城)이 있던 산이었고,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기우제를 봉행하던 명산이었다. 많은 시인 묵객들이 예빈산을 소재로 한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다산 정약용, 장약전, 정약종 형제가 유년시절 산책하며 웅혼한 기상을 키운 곳이며, 정화성 선사는 항일의병을 도모하다 한때 견우봉 아래 도정암에 피신하기도 하였다. 몽양 여운형 선생 또한 봉안마을 주민의 도움을 받으며 견우봉 아래 천연암굴에서 피신했던 역사의 향기가 서린 곳이다.'라고 되어 있다. 


예봉산과 철문봉


예봉산은 예빈산과 2.3km 떨어져 서로 마주보고 있다. 예봉산 주능선은 북쪽으로 철문봉과 적갑산(赤甲山, 560m)을 지나 새재에 이른 뒤 남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운길산(雲吉山, 610m)으로 이어진다. 또 예봉산 주능선은 남동쪽으로 율리봉(栗里峰, 580m)을 지나 예빈산에 오른 다음 견우봉, 승원봉(475m)을 거쳐 능내리로 내려선다. 보통 적갑산-철문봉-예봉산-율리봉 전체를 예봉산, 직녀봉-견우봉-승원봉 전체를 예빈산이라고 부른다.     


예봉산은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팔당리와 조안면 조안리, 진중리에 걸쳐 있는 산이다. 옛날 산을 위해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서 예봉산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산신령을 모시는 산이라 해서 '영산'이라고도 부른다. 지역 주민들은 예봉산을 '사랑산'이라고 불러왔는데, 철마산과 구분하기 위해 '큰사랑산'이라고 한다. '작은사랑산'은 예봉산 동쪽에 있다는데..... 동쪽이라면 아마도 운길산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해동지도'와 '동여도', '대동여지도'에는 예빈산(禮賓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해동지도에는 예봉산과 예빈산 전체를 예빈산으로 표기하고 있다. 조선시대 외국 사신에게 연향(燕享)을 베풀어 주고 종실과 재신(宰臣)들의 음식물 공급을 관장하던 관서인 예빈시(禮賓寺)에 목재벌채권이 있었기 때문에 예빈산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또, 옛날에 배를 타고 한강을 오르내리던 길손들이 삼각산이 보이는 이곳에서 임금에게 예를 갖추었다 해서 예빈산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청구도'와 '대동지지'에는 '예봉산(禮奉山)', '조선지지자료', '조선지형도'에는 예봉산(禮蜂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는 일제 강점기인 1911년 조선총독부가 '동국여지승람'을 본따 조선의 지명을 정리한 것이다. 현재의 이름은 '조선지지자료'에 예봉산(禮峯山)으로 기록되면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잃어버렸던 예빈산이라는 산이름을 오늘날 다시 되찾았다. 윗 봉우리는 예봉산, 아랫 봉우리는 예빈산으로 사이좋게 나란히 솟아 있는 모습이 반가왔다. 예빈산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잃어버리거나 엉뚱하게 뒤바뀐 지명은 전국적으로 수도 없이 많다. 잃어버린 지명을 되찾으려는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 그게 민족혼을 되살리는 길이다.


철문봉에도 정약용 선생 형제들의 일화가 전해 온다.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형제는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 마재 마을의 본가인 여유당에서 집 뒤 능선을 타고 예빈산과 예봉산을 넘어 이 봉우리까지 와서 '학문(文)'의 도를 '밝혔다(喆)'고 하여 철문봉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정화성 선사의 속명은 신성(申成)인데, 다산의 학문과 도를 따라 세상을 밝히고자 호를 스스로 철문(喆文)이라 지었다는 것이다. 그는 다산의 후학을 자처하여 항일 의병을 주도하다 익산의 용화산 신용사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정화성 선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율리봉은 정화성 선사가 지었다는 '강역산유기'에 밤나무가 많은 마을에 있는 산봉우리라 하여 명명한 것이라고 한다. 율리고개와 마찬가지로 밤나무와 연관이 있는 산명이다. 적갑산은 절터가 있어서 예로부터 적골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절골산이었을 것이다. 절골산->적골산->적갑산으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절골의 유래를 모르고 적갑산으로 기록한 것이 그대로 굳어진 예라고 볼 수 있다. 적갑산은 예봉산이나 운길산과 연계 산행시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산이다. 


한강과 팔당대교


유구한 세월을 흘러온 한강은 오늘도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삼국시대 한강은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치열한 쟁탈지였다. 한강을 차지하는 세력이 한반도를 지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에는 운무가 잔뜩 끼어 시야가 매우 좋지 않았다. 팔당리와 팔당대교, 한강은 그런대로 보였지만 강 건너편의 하남시와 미사리조정경기장은 희미하게 보였다. 도봉산과 삼각산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검단산은 나무에 일부 가려져 전체적인 모습을 시원스럽게 조망할 수 없었다.  


한강변에 자리잡은 팔당(八堂)의 유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예봉산과 검단산의 산세가 험하고 수려하여 선녀가 한강변에 내려와 놀던 자리가 여덟 곳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 여덟 개의 당집을 지었다고 해서 '팔당'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팔선녀를 낳았기 때문에 '팔당'이라 했다고도 하고, 큰 고목이 '八'자처럼 쓰러져 있어서 '팔당'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문헌을 통한 팔당이란 지명의 변천을 살펴 보자.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이 마을을 '파당(巴塘)', 정약용의 맏아들 정학연(丁學淵, 1783~1859)은 '팔당(八塘)', 조선 순조 때 사람인 한진호(韓鎭戶, 1792~미상)는 팔당(八堂)으로 기록하고 있다. 적어도 순조 때 이미 현재의 팔당(八堂)이란 지명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팔당 마을 강변은 원래 바다처럼 드넓은 나루터였던 까닭에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바다나루', '바당이', '바다이', '바댕이', '바대이' 등으로 불렸다. '바당'은 '바다'의 경상도, 제주도, 함경도 방언이다. 또, '바당'은 '바닥'의 강원도, 평안도 방언이기도 하다. 바당이->파당->팔당으로 변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기린초꽃


예빈산 정상의 바위틈에는 기린초가 활짝 피어 있었다. 기린초는 돌나물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그래서 돌나물처럼 바위틈에서 잘 자란다. 꽃이 아름답고 생명력이 강해 정원에 심어도 좋다. 기린초는 봄에 연한 잎을 나물로 먹는다. 맛은 약간 쌉쌀한데 떫은 뒷맛이 남는다. 상추 등의 채소로 쌈을 싸먹을 때 곁들이면 별미를 맛볼 수 있다. 줄기와 뿌리, 잎은 한약재로 쓴다. 


운길산과 북한강


예빈산과 견우봉 중간쯤 암릉지대에 이르자 북동쪽으로 시야가 트이면서 운길산과 그 앞을 흐르는 북한강, 두물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양주(楊州) 천마산(天麻山)에서 뻗어나온 산줄기에 솟아 있는 운길산은 남양주시 와부읍 진중리와 송촌리, 시우리 경계에 자리잡고 있다. 남양주시 조안면과 양평군 양서면은 북한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운길산은 '동국여지승람'에는 조곡산으로 되어 있고, 그 후에 나온 '수종사중수기'에는 운길산이라고 적혀 있다. '바람이 산에 머문다'고 하여 '운길산(雲吉山)'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수종사에서 바라보는 팔당호의 풍경이 아름다워서 조선시대의 문인 서거정은 '동방의 사찰 중 전망이 제일'이라고 극찬했다. 


운길산 중턱에는 조선조 쿠데타로 왕위를 찬탈한 세조가 절 이름을 지었다는 수종사(水鐘寺)가 있다. 세조가 뱃길로 금강산을 다녀오다가 이수두(二水頭, 양수리)에서 하룻밤 머무르게 되었는데, 한밤중에 난데없이 종소리가 들려왔다. 이를 기이하게 생각한 세조는 이튿날 마을 주민을 불러 종소리의 출처를 물었더니 '근처에 종은 없고 종소리가 날 만한 곳은 운길산의 오래된 절터가 한 곳 있을 뿐이다.'라고 대답했다. 


세조가 즉시 관원을 시켜 운길산을 탐사하게 했더니 뜻밖에도 절터의 바위동굴에 18나한상이 앉아 있고, 바위틈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관원에게 이 사실을 보고받은 세조는 1460년(세조 6)에 왕명으로 그 자리에 절을 짓게 하고 수종사라는 이름을 내렸다.   


수종사 석조 부도를 고쳐 세울 때 발견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는 보물 재259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불교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당시 청자유개호(靑磁有蓋壺), 금제구층탑(金製九層塔), 은제 도금 사리기(銀製 鍍金 舍利器)가 발견되었는데, 금제구층탑과 은제 도금 사리기는 청자유개호 안에 들어 있었다. 왕실에서 발원한 수종사 5층석탑은 보물 지정이 예고되어 있다. 세조가 수종사 창건 기념으로 심었다는 수령이 5백년이 넘은 거대한 은행나무도 있다. 


견우봉 정상


견우봉은 예빈산에서 가까운 거리였다. 정상에는 산을 오른 사람들이 돌을 하나 둘 가져와 쌓은 것으로 보이는 돌탑이 있었다. 탑을 높이 쌓는 것은 인간의 소원을 하늘에 전달하기 위해서다. 돌무더기처럼 보이는 저 탑의 돌 하나, 바위 하나에도 그 누군가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으리라.   


두물머리


견우봉에서 승원봉쪽으로 몇 발자욱 내려서자 가슴이 다 시원해질 정도로 전망이 뛰어난 바위가 있었다. 전망대 바위에 올라서자 드넓은 팔당호와 두물머리, 조안면 능내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북한의 강원도 금강군 옥발봉에서 발원한 금강천은 남쪽으로 흘러 철원군에서 금성천(평강군 장바위산 발원)과 합류한 뒤 화천군 화천읍 휴전선 부근에서 북한강이 되고, 양구군 쪽에서 흘러오는 서천(양구군 동면 팔랑리 돌산령 발원)과 수입천(양구군 수입면 청송령 발원)이 합류하면서 파로호를 이룬다. 그 후 북한강은 춘천 의암호에서 소양강(홍천군 내면 명개리 만월봉 발원, 일설에는 고성군 수동면 삼치령 발원, 인제군 서화면 무산 발원설은 오류임)이 합류하고, 경기도 가평군에서 가평천(가평군 북면 적목리 발원)과 홍천강(홍천군 서석면 수하리 응봉산 발원)이 합류하여 서쪽으로 흐르다가 외서면 청평리에서 조종천(가평군 하면 상판리 발원)이 합류한 뒤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 두물머리에 이른다. 317.5km를 흘러서.....


강원도 태백시 금대봉 검룡소에서 발원한 골지천은 정선군 임계면에서 임계천(임계면 임계리 두리봉 발원)과 합류하여 서쪽으로 흐른다. 골지천은 정선군 여량면 아우라지에서 송천(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 황병산과 매봉 사이 발원)과 합류하여 조양강이 된다. 북평면에서 오대천(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 발원)과 합류한 조양강은 정선읍 가수리에서 동대천(정선군 고한읍 고한리 함백산 발원)과 만나 동강이 되어 남서쪽으로 흐른다. 동강은 영월 동쪽에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흥정리 흥정산에서 발원한 흥정천은 원길리에서 덕거천(봉평면 덕거리 1211m봉 발원)과 만난 뒤 남쪽으로 흐른다. 용평면 계방산에서 발원한 속사천은 용평면 도사리에서 도사천(용평면 도사리 63번지 발원)과 합류하여 남서쪽으로 흐른다. 흥정천과 속사천은 백옥포리 의풍포에서 만나 평창강이 된다. 평창강은 남쪽으로 흐르다가 안미리에서 대화천(평창군 대화면 신리 백적산 발원)과 안미천(대화면 하안미리  1192m봉 발원)방림리에서 계촌천(평창군  방림면 계촌리 청태산 발원)을 합쳐 평창읍에서 심하게 곡류하면서 영월군으로 흘러간다. 평창강은 영월군 서면에서 주천강(횡성군 둔내면 화동리 태기산 발원)과 합류한 뒤 서강이 되어 남동쪽으로 흐른다. 서강은 영월 서쪽에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동강과 서강은 영월읍에서 만나 비로소 남한강이 시작된다. 남한강은 남서쪽으로 흘러 충청북도 단양군으로 들어간다. 단양군에서 서쪽으로 흐름을 바꾼 남한강은 제천시를 거쳐 충주에 이르러 국내 최대 규모의 인공호수인 충주호를 이룬다. 원서천(제천시 백운면 운학리 백운산 발원)과 제천천(원주시 신림면 성남리 치악산 남대봉 발원)은 충주시 산척면 석천리 합천에서 만나 주포천이 되어 명서리 삼탄에서 충주호로 흘러든다. 


충주시 서쪽 탄금대 부근에서 달천(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속리산 문장대 발원)이 합류한 남한강은 북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경기도 여주로 들어간다.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과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경계에서 섬강(횡성군 둔내면 태기리 태기산 발원)이 합류하고, 여주군 점동면에서 청미천(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사암리 문수봉 발원)이 합류한 남한강은 북서쪽으로 여주군을 지나는 동안 북내면에서 금당천(양평군 지평면 지평리 발원), 흥천면에서 양화천(이천시 설성면 대죽리 마국산 발원)과 복하천(용인시 양지면 제일리 발원)이 흘러든다. 양평군으로 들어온 남한강은 흑천(양평군 청운면 도원리 성지봉 발원)과 만나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두물머리에 이른다. 375km를 흘러서..... 


7백여 개의 하천과 강은 남과 북으로 흘러 저 양수리(兩水里) 두물머리(二水頭)에서 합류하고, 남동쪽에서는 용인시 처인구 호동 용해곡에서 발원한 경안천이 흘러들어 마침내 큰 강 곧 한가람이 된다. 두물머리에서 만나 하나로 어우러지는 남한강과 북한강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적이었다. 


두물머리에서 하나가 된 한강은 남양주에서 홍릉천(남양주시 진건읍 배양리 발원), 구리시에서 왕숙천(포천시 내촌면 신팔리 수원산 발원)을 받아들인 뒤 서울로 들어간다. 서울을 지나는 동안 강남구와 송파구 경계에서 탄천(용인시 기흥구 청덕동 발원), 성동구 두모교에서 중랑천(경기도 양주시 산북동 불곡산 발원), 영등포구 성산대교 서쪽에서 안양천(경기도 의왕시 왕곡동 백운산 발원), 서울 은평구와 경기 고양시 경계에서 창릉천(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삼각산에서 발원), 강서구에서 개화동에서 굴포천(인천 부평구 부평동 철마산 발원)을 받아들인 한강은 경기도로 빠져나간다. 한강은 북서쪽으로 흘러 임진강(강원도 법동군 용포리 두류산 발원)과 합류한 뒤 강화도에서 서해로 흘러들어간다. 


서해로 간 한강수는 바다와 하나가 된다. 바다에서 증발한 수증기는 다시 하늘로 올라가 구름으로 떠돌다가 한반도의 금강산, 설악산, 태백산, 오대산, 소백산, 월악산, 속리산, 삼각산에 비가 되어 내릴 것이다. 비는 다시 산과 들을 적시고 시내가 되고 내가 되고 강이 되어 바다에 이르고..... 물의 순환은 계속된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누구나 나고 자라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 내 죽은 몸은 동물이든 식물이든 미생물이든 그 누군가의 먹이가 되어 살이 되고 피가 되어 새로운 생명으로 되살아날 것이다. 또 그 생명은 죽어서 누군가의 먹이가 되고...... 생명의 순환은 계속된다.  


저기 저 두물머리에서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하나가 되듯이 남한과 북한도 분단의 철조망을 걷어치우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 통일이 어렵다면 연방제라도 해서 사람들이라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것도 못하는 남한과 북한 참 못난 나라, 못난 사람들이다. 남북 통일이 안되는 것은 통일을 반대하는 세력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남한과 북한 모두 통일을 반대하는 세력을 몰아내고 남북 통일을 이루는 세상을 꿈꾸자. 나는 열차를 타고 북한을 지나 시베리아와 중국 대륙를 횡단해서 유럽이나 중앙아시아, 중동, 서남아시아로 가는 꿈을 꾸곤 한다. 얼마나 즐거운 상상인가!  


승원봉과 능내리, 팔당호


견우봉에서 승원봉을 거쳐 능선을 따라 내려가면 조안면 능내리에 이른다. 능내리는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확(韓確, 1403 ~ 1456)의 묘가 있어서 '능안' 또는 '능내'라고 하였다고 한다. 한확은 누이가 명(明) 성조(成祖)의 여비(麗妃)가 되자 명나라에서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을 하사받았다. 그는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인 계유정난 때 세운 공으로 정난공신 1등과 서성부원군에 책봉되고 우의정에 올랐다. 계유정난이 성공하자 한확은 명나라에 가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양위(讓位)라고 설득시켰다.


능내리에는 '마현(馬峴)'이란 마을이 있다. 광주분원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어서 말을 타고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았던 데서 마현이라 불리게 되었다. 마현은 마재라고도 한다. 


마현은 다산 정약용이 태어난 마을로 널리 알려져 있다. 1783년 22세에 초시에 합격한 정약용은 정조의 총애를 받아 희릉 직장(禧陵直長)으로 벼슬을 시작해서 이후 10년 동안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경기 암행어사(京畿暗行御史),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 동부승지(同副承旨), 좌부승지(左副承旨), 곡산 부사(谷山府使), 병조 참지(兵曹參知), 부호군(副護軍), 형조 참의(刑曹參議) 등을 역임하며 승승장구하였다.


이 시기 정약용은 1789년 한강의 배다리(舟橋)를 준공시켰으며, 1793년에는 수원성과 기중가(起重架)를 설계하였다. 또, 고마고(雇馬庫)를 개혁하고, 가좌부(家坐簿) 제도를 개선했으며, '마과회통(麻科會通)'을 저술했다. 


한편 정약용은 23세부터 이벽(李檗), 이승훈 등을 통해 서학(西學)을 접하고 천주교에 입문하였다. 그러나 당시 천주교 신앙은 성리학에 기반을 둔 조선의 봉건적 정치 사회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어 지배층으로부터 격렬한 비판과 탄압을 받았다. 정조가 죽은 다음 해인 1801년(순조 1년) 신유사화가 일어나자 최초의 조선천주교 회장이었던 그의 셋째 형 정약종(丁若鍾, 1760~1801)은 참수를 당하고, 천주교도였던 둘째 형 정약전(丁若銓, 1758~1816)도 흑산도로 귀양을 갔다. 정약용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해 2월 포항의 장기로 유배된 정약용은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으로 다시 문초를 받고 11월에 강진으로 옮겨졌다. 


1808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의 다산초당에 자리를 잡은 정약용은 천여 권의 유교 경전을 쌓아 놓고 중국 선진(先秦) 시대에 나타났던 원시 유학을 연구함으로써 성리학의 사상체계를 극복해 보려고 노력했다. 사서 육경 등 유교 경전에 대한 연구와 저술을 통해서 그는 근본으로 돌아가 자신을 수양하고 나아가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했다. 그의 경집과 문집은 대부분 유배지에서 저술된 것이다. 


또 유배지에서 정약용은 조선 왕조의 사회적 모순들을 개혁하기 위한 방안을 구상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 '경세유표(經世遺表)'와 '목민심서(牧民心書)'는 바로 경세를 위한 구체적인 사회개혁 실천 방안이 담겨 있다. 유배에서 돌아오기 1년 전에 쓴 '경세유표'는 행정기구 개편을 비롯하여 관제, 토지제도, 부세제도 등 모든 제도의 개혁 원리와 실천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가 경세치용과 이용후생으로 나라를 개혁해서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했던 것은 부국강병이었다. 


유배지에서 돌아오던 해에 완성한 '목민심서'는 목민관인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책이다. 이 책은 '목민을 위한 아전 단속 방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수령을 등에 업은 아전들의 횡포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대통령, 국회의원, 장관 뿐만 아니라 지방자치단체장과 공무원들에 이르기까지 각종 이권과 관련하여 뇌물수수 사건이 끊이지 않고 벌어지고 있다. 뇌물공화국이란 오명이 사라지지 않는 한 '목민심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정약용은 1818년 가을 57세 때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마현으로 돌아왔다. 유배에서 풀려난 이듬해 그는 '흠흠신서(欽欽新書)'를 저술했다. 한국 최초의 율학 연구서인 이 책은 살인사건을 심리하는데 필요한 실무 지침서로 법의학과 사실인정학, 법해석학을 포괄하는 일종의 종합재판학적 저술이다. '경세유표'와 '흠흠신서', '목민심서'는 정약용의 대표작으로 일표이서(一表二書)라고 한다.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 따르면 정약용의 저작은 경집 232권과 문집 267권, 모두 499권에 이르는 방대한 것이었다. 정약용은 고향 마현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15년 동안 자신의 저작들을 교정하고 편집하여 182책 503권의 가장본 '여유당집(與猶堂集)'을 완성하였다. '여유당집'이 완성되자 맏아들 정학연은 추사 김정희(金正喜)에게 교정을 부탁했다. 1883년(고종 20)에는 왕명에 의해 '여유당집'이 전사되어 규장각에 수장되었다.


제도의 개혁과 왕도정치의 구현으로 사회를 개혁하려 한 정약용은 혁명가라기보다는 온건개혁론자였다. 그에게 있어 개혁의 목표는 뚜렷했지만 개혁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이나 수단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또, 그가 중요시했던 '민'도 정치적 주체로서의 '민'이 아니라 통치와 보호의 대상으로서의 '민'이었다. 그는 흘륭한 임금이 들어서고 자신이 임금을 보좌하면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당시 사회적 모순의 근본적 원인이 전제왕조 정권에 있었음을 인식하지 못했다. 정약용이 양반으로서 전직 관료 출신이어서였을까? 시대가 너무 빨랐던 것일까?    


검단산


바로 앞에는 승원봉이 솟아 있고, 한강 건너편에는 검단산이 우람한 모습으로 솟아 있었다. 저 건너 하남시 배알미리와 창우리 한강변 어딘가에 '도미(都彌)의 아내' 설화가 전해 오는 도미진(渡迷津)이 있었을 것이다. 도미의 아내는 저기 어딘가에서 도미를 찾아 배를 타고 한강을 떠내려갔을 것이다. 


저 두미강(斗尾江)에서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겨울철마다 잉어몰이가 성행했다. 검단산과 예봉산 사이의 좁은 협곡을 두미협(斗尾峽)이라 하고, 그 강을 두미강(斗尾江, 斗迷江, 되미강) 또는 도미강(渡迷江)이라 했다. 두미강은 양쪽으로 검단산과 예봉산이 솟아 있어 물살이 빠르고 수심이 깊어 잉어가 놀기에 좋고, 겨울에 얼음이 얼면 오랫동안 녹지 않아 잉어가 동면하기에 적당하므로 해마다 음력 11월부터 12월까지 이곳에서 잉어몰이가 성행했다. 


두미강 잉어몰이의 역사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부부가 4대째 가업으로 계승했다.'는 1910년생 봉안 마을 주민 이재만 옹의 증언에 의하면 조선 말기에도 잉어몰이가 행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마을 주민들은 겨울철 강물이 얼기 시작하면 잉어몰이를 위한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날짜와 첫몰이 장소, 입담이 좋은 영좌, 얼음 위에서 나무토막으로 잉어를 모는 머리괴, 그물의 주인으로서 모든 경비를 대는 그물주 등을 정하고 어구를 준비했다. 잉어몰이에서 그물은 보통 열두 번을 쳤다. 그래서 '두미강 열두 바탕 잉어몰이'라고 한다. 


잉어몰이가 시작되면 영좌가 그물을 칠 자리를 정하여 열두 명의 몰이꾼들을 요소요소에 배치하였다. 그 다음 상류와 하류 두 곳에 강을 가로질러 5m 간격으로 얼음에 구멍을 뚫은 뒤 먼저 하류에만 그물을 쳤다. 영좌의 지휘로 머리괴들이 상류에서 떡메로 얼음장을 내려치면서 내려오면 갑작스런 굉음에 잠자던 잉어들이 놀라 하류로 몰렸다. 바로 그때 머리괴들은 상류에 그물을 재빨리 내려 잉어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했다. 잉어떼가 그물에 갇히면 낚시로 낚아 올렸다. 


첫 바탕에서 잉어잡이가 끝나면 아랫 그물은 그대로 두고 윗 그물만 걷어 다음 바탕의 하류에 치고 다시 잉어를 몰아넣었다. 이렇게 해서 열두 바탕이 끝나려면 보통 3~4개월이 걸렸다. 그런데 얼음이 풀릴 때쯤 상류에서 얼음이 떠내려와 첫 바탕을 친 곳에 쌓였다. 잠에서 덜 깬 잉어들은 얼음 속으로 들어가는 습성이 있어서 이때 잉어몰이를 한 바탕 더 하기도 했다. 이를 '쇠 속 털어 먹는다'고 하였다. 


잉어몰이 낚시는 당시 두미강 주변 마을 주민들에게 큰 사업이었다. 1930년대 낚시꾼들은 5~10원의 입장료를 내야만 얼음낚시를 할 수 있었다. 잉어몰이 철에는 하루에 5백~1천여 명의 낚시꾼들이 몰렸다. 잉어몰이가 끝나면 그물주는 영좌와 머리괴들에게 만원의 보수를 주었다. 당시 큰 암소 한 마리 값이 7천원 정도였으니 두미강 주변 마을 주민들에게는 큰 소득원이었다. 이처럼 두미강 잉어몰이는 자연환경과 농한기를 이용한 생계 수단이자 마을 공동체 놀이였다. 그러나 두미강 잉어몰이는 1973년 12월 팔담댐이 완공된 뒤로는 얼음이 얼지 않아 그 명맥이 끊어지고 말았다. 


  털중나리


활활 타오르는 정열 터뜨리듯 피어나

오롯이 순결한 마음 님에게 들킬세라

부끄러운 듯 살포시 고개숙인 털중나리


견우봉 정상에 털중나리 한 송이가 다소곳이 피어 있었다. 털중나리는 백합과(Liliaceae) 가운데 섬말나리계통의 한 종이다. 섬말나리계통에는 참나리, 중나리, 털중나리, 애기중나리, 당나리, 말나리, 솔나리, 큰솔나리, 울릉도에 자생하는 섬말나리와 응달나리 등이 있다. 


털중나리는 한국과 중국 북동부에 분포한다. 한국에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자생한다. 꽃이 아름다워 관상용으로 많이 심는다. 이른봄에는 어린 싹과 비늘줄기를 식용하고 참나리와 함께 한약재로도 쓴다. 


참나리와 중나리, 털중나리는 어떻게 다른가? 참나리는 꽃이 크고 붉은색이 강하며, 검은 주아(珠芽)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중나리는 꽃의 크기가 참나리보다 조금 작고 주아가 없다. 참나리의 꽃무늬는 흑자색의 타원형으로 꽃잎 전체에 분포한다. 중나리의 꽃무늬도 참나리와 비슷하다. 참나리와 중나리는 주아의 유무로 구별할 수 있다. 털중나리는 꽃의 색이 황적색이며, 줄기와 잎에 잔털이 있다. 그리고, 불규칙한 꽃무늬는 꽃잎의 일부에만 분포한다. 잔털의 유무와 꽃무늬의 분포로 중나리와 털중나리를 구별할 수 있다.  


예빈산에 올라 능내리 마현을 바라보며 다산 정약용을 생각하다. 


2013.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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