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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손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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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자료실 스크랩 한국의 성지(서울 천주교 성지)
비손강 추천 0 조회 0 06.12.26 11:3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서울 명동성당

 


명동성당 지하 성지


서울 대교구 주교좌 성당이며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이자 심장이다. 이곳은 한국 교회 공동체가 처음으로 탄생한 곳이자 여러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기도 하다.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은 1784년 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한 뒤 귀국한 때로부터 치지만 그보다 4년이 앞선 1780년 1월 천진암에서는 권철신을 중심으로 하는 강학회가 열렸고 여기에서 당시의 저명한 소장 학자들은 천주학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 해 가을, 서울 명례방에 살던 통역관 김범우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에 입교하고 자신의 집에서 교회 예절 거행과 교리 강좌를 열게 된다. 그럼으로써 수도 한복판에 겨레 구원 성업의 터전을 닦았고, 바로 이곳에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산 역사인 명동 대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승훈, 정약전 3형제, 권일신 형제 등이 이벽을 지도자로 삼아 종교 집회를 가짐으로써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됐으나 이 신앙 공동체는 이듬해 형조 금리(刑曹禁吏)에게 발각돼 김범우가 경상도 단장으로 유배되면서 해체됐다. 그 후 1882년 명동은 한미 수호 조약의 체결로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될 것을 예견한 제7대 교구장 블랑 주교에 의해 성당 터로 매입된다. 블랑 주교는 이 곳에다 우선 종현 성당을 설립, 운영하면서 예비 신학생을 양성하는 한편 성당 건립을 추진해 한불 수호 통상 조약(1886년)을 체결한 이듬해인 1887년 5월, 대지를 마저 구입하면서 그 해 겨울부터 언덕을 깍아 내는 정지 작업을 시작하였다. 원래 이 터에는 판서(判書)를 지낸 윤정현(尹定鉉)의 저택이 있던 곳으로 바깥채만 60여 칸이 되는 대형주택을 처음에는 그대로 이용하다가 헐고 언덕을 깎아내려 대지를 만들었다. 1883년에 김 가밀로의 명의로 종현(鍾峴) 일대의 대지를 구입하여 당시의 교구장 블랑(Blanc) 주교는 우선 신학생 교육을 위한 종현서당을 설립, 운영하였으며, 이후 풍수지리설과 관련하여 한국 정부와 토지 분쟁이 있었으나, 1890년 이를 마무리 지었다. 블랑 주교의 뒤를 이은 뮈텔(Mutel) 주교는 1892년 8월 5일 기공식을 갖고 한국 교회를 위해 일했던 주교와 선교사, 은인들의 명단을 머릿돌 밑에 묻고 머릿돌을 축성하여 고정시켰다. 성당의 설계와 공사의 감독은 코스트(Eugene Coste,高宜善) 신부가 맡아 진행하였다. 그러나 1896년 2월 코스트 신부가 선종함에 따라 프와넬(Poisnel) 신부가 업무를 이어받아 성당 건축을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1898년 5월 29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성당 축성식을 갖고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봉헌하였다. 역사적으로는 한국 근대 건축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 첫 고딕 양식 건축물(사적 제258호)로 기록되어 있다. 성당의 건축 과정에서 많은 신자가 무료로 노력 봉사를 하였으며, 성당의 건축에 쓰인 벽돌은 청나라의 벽돌공을 데려다가 만들었다. 1945년 광복을 기점으로 하여 성당 명칭은 종현 성당에서 명동 성당으로 바뀌었다.

명동 성당이 준공된 후 그 지하 묘역에는 기해·병인박해 당시 믿음을 지킨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치해 왔다. 1900년 9월 5일에는, 1899년에 왜고개(瓦峴, 현 용산 군종 교구청 인근)에서 발굴되어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에 안치되어 있던 베르뇌(Berneux, 張) 주교 등 7명의 순교자 유해와, 1882년에 남포 서들골(현 충남 보령군 미산면 평라리의 서짓골)에서 발굴되어 일본으로 보내졌다가 1894년에 용산 신학교로 옮겨진 성 다블뤼(Daveluy, 安) 주교 등 4명의 순교자 유해를 대성당 지하 묘지로 옮겨 안치하였다. 이어 1901년 11월 2일에는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첫 입국해 기해년 1839년 9월 12일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가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의 형을 받은 후 한강변 모래밭에 매장된것을 순교한지 약 20일 후 칠팔 명의 신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세 분의 유해를 거두어 지금의 서강대학교가 소재한 노고산에 4년간 매장했다가 그 후 유해는 1843년에 삼성산으로 이장됐다가 다시 1901년에 이곳 명동성당 지하 묘지로 모셔졌다. 1909년 5월 28일에는 남종삼(요한)과 최형(베드로)의 시신을 왜고개에서 발굴하여 지하 묘지로 옮겨 안치하였다. 이들 중 훗날 복자, 성인품에 오른 이들의 유해는 1967년에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다시 옮겨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대성당 지하 묘지는 성인들의 유해가 안치되었던 성스러운 곳이다. 또 지금까지 지하 묘지에 안치되어 있는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의 순교자 푸르티에(Pourthie, 申) 신부,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신부의 유해가 순례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서울 삼성산 성지

 


삼성산 성지

 



 

삼성산 성지


삼성산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軍門梟首)의 형을 받고 순교한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范) 주교와 성 베드로 모방 나(羅) 신부, 성 야고보 샤스땅 정(鄭) 신부의 유해가 1836년부터 1901년 11월 2일 명동 성당 지하 묘소로 모셔질 때까지 묻혀 있던 묘자리이다. 본래부터 삼성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던 이곳은 앞날을 예고하듯 세 분의 순교 성인이 묻힘으로써 명실공히 삼성산(三聖山)의 품위를 갖추게 되었다. 삼성산이라는 명칭은 신라 때의 명승 원효(元曉) ·의상(義湘) ·윤필(尹弼) 등 3명이 수도한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는 설과 고려 말기에 불교계를 이끌던 나옹(懶翁-1320∼1376), 무학(無學-1327∼1405)과 인도승려 지공(指空-?∼1363) 스님 등이 이곳 삼성산에 올라가 각기 자리를 잡고 수도, 전진했다는 연고로 삼성산(三聖山)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한국 천주교회사상 처음으로 이 땅에 발을 디딘 외국인 성직자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 후 30년만인 1831년 조선의 천주교회는 중국 북경교에서 독립해 '조선 교구'로 설정된다. 이어서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인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가 입국함으로써 조선의 교우들은 주문모 신부 이후 한 세대가 훨씬 지나서야 목자에 대한 갈증을 풀게 된다. 이들 세 성직자는 상복(喪服)으로 얼굴을 가리고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밤낮으로 험한 산길을 걸으며 복음 전파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불과 1년 사이에 신자수가 9천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던중 외국 선교사의 입국 사실이 알려짐에 따라 교우들에 대한 탄압이 가열되고 가엾은 어린양들의 희생이 늘어나자 목자들은 가슴 깊이 피눈물을 흘린다. 앵베르 주교는 수원의 한 교우집에 피신하던 중 모방, 샤스탕 두 신부를 불러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단념하고 몸조심을 당부한 다음 각자 소임지로 돌려보냈다. 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의 책략으로 인해 거처가 알려져 포졸들이 들이 닥친다. 그는 화(禍)가 여러 교우들에데 미칠 것을 염려해 스스로 잡힌 몸이 되고 두 신부에게도 자헌 치명(自獻致命), 곧 스스로 관헌에 나아가 신앙을 고백한 후 순교하기를 권했다. 기해박해(1839년)가 시작되고 세 명의 외국인 사제는 38년 전, 주문모 신부가 그랬던 것처럼 새남터에서 희광이의 칼 끝에 이슬이 되고 만다. 이 때 앵베르 주교의 나이 43세,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5세로 동갑이었다. 이들의 시체는 사흘 동안 버려져 있다가 한강변 모래톱에 묻힌다. 교우들이 유해를 거두고자 애쓴 지 나흘째 되는 날 세 명의 교우가 시체를 훔쳐 내려다 그중 한명이 붙잡혀 옥에 갇히고 만다. 그 후 스무 날 가량 지난 뒤 7-8명의 교우가 죽음을 무릅쓰고 감시의 눈을 피해 유해를 거두는 데 성공한다. 교우들은 유해를 큰 궤에 넣어 노고산(老姑山)에 임시로 매장하였다. 그리고 4년 후, 당시 파수를 피해 유해를 훔쳐 낸 교우 중 하나인 박 바오로가 가문의 선산인 관악산 줄기 삼성산에 유해를 이장한다. 박 바오로는 이 사실을 아들인 박순집에게 알려 주고 그 자신도 일가들과 함께 병인박해의 와중에서 순교하게 되니 1868년 3월 절두산에서의 일이다. 이 때 가까스로 화를 면한 박순집은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이 묘소를 고증해 명동 성당 지하묘소로 옮길 수 있도록 하는 산 증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순교한 가족들의 시신을 찾고 베르뇌 주교를 비롯해 브르트니에르·볼리외·도리 신부 등의 시신을 새남터에서 찾아내 용산 왜고개에 이장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부터 4년간 박순집의 가문은 16명의 순교자를 배출했고, 자신은 1982년 82세를 일기로 선종하기까지 인천 교회의 창설에 여생을 바쳤다. 16세 때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 들어가 우리 나라 최초의 수녀가 된 박 사베리오(1872-1966년)는 박순집의 막내딸이기도 하다. 한편 박순집 일가를 기념하기 위한 비가 절두산 순교 기념관 정원에 세워져 있어 순례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삼성산에 1834년부터 1901년까지 58년간 묻혀 있던 세 성직자는 1925년7월 25일 시복되었다. 1970년 5월 김수환 추기경과 고(故) 노기남 대주교, 오기선 신부는 이곳에 세 분의 매장지임을 확인하고 이를 기념하는 소형 비석을 그 자리에 세웠다. 또 1981년 9월에는 신림동 본당 교우들에 의해 구상 시인의 헌시와 비문이 새겨진 현재의 비석이 세워졌다. 1984년에는 한국 천주교 2백주년을 기해 세 성직자가 시성의 영광에 오른다. 이를 기념해 사적지 부근의 땅 1만 6천여 평을 매입, 1989년에 그 유해를 다시 천묘해 축성식을 가졌다. 그리고 1992년에는 신림본동 본당에서 분리, 삼성산 본당이 신설됐다.

 


서울 서소문 성지

 


서소문 성지

 

103위 순교 성인들 중 44명의 성인 성녀와 124위 시복시성추진 대상자중 25명과 함께 수많은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한국 최대의 순교지가 바로 서소문 밖 네거리이다. 한국 교회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은 바로 이곳에서 "월락재천수상지진(月落在天水上池盡)", 즉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있고 물은 솟구쳐도 연못에서 다한다."라고 하여 굽히지 않는 신앙을 증거한 바 있다.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숨져 간 순교자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중 성인품에 오른 이만도 44명으로 이들은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39년 기해박해,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온갖 고통 속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희광이의 칼 아래 스러져 갔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서소문 밖 형장이 기억하는 첫 인물은 만천(蔓川) 이승훈이다. 그는 한국 교회 최초로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훗날 조선 교회의 베드로로서, 본명이 의미하는 반석(盤石)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조선 교회의 반석으로 전교에 힘쓰던 그는 신유박해의 서슬로 최필공·정약종·홍교만·홍낙민·최창현 등과 함께 포졸들에게 잡혀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간다. 사회적 명망이 높은 이들 여섯 명의 당당한 태도와 굳센 신념은 그들을 쳐다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경탄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 그중에서 정약종은 약현·약전·약용 형제와 함께 이승훈의 처남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평신도 사도직 단체라고 할 수 있는 명도회의 회장을 역임한 그는 강직한 성품과 뛰어난 통찰력으로 주자학과 도가 사상을 깊이 탐구했다. 그러나 그는 마침 서양문물과 함께 들어온 한역 천주교 서적들을 손에 넣게 되고 주어사 강학회를 통해 천주교를 수용한다. 같은 때 강완숙을 비롯한 여교우들도 한꺼번에 참수된다. 최초의 여신도 회장이자 주문모 신부를 숨겨 준 죄목으로 아들 홍필주와 함께 체포된 강완숙은 몇 번이나 주리를 틀리면서도 주 신부의 거처를 함구하다가 다른 4명의 여교우와 함께 이승훈 등이 처형된 그 자리로 끌려 나간다. 1839년의 기해박해 때에도 서소문 밖 형장에서는 순교자들의 피가 강물처럼 흘러내렸다. 이 때 처형된 이들 중에서 41명이 성인품에 올랐는데 그중에는 성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 김제준도 포함돼 있다. 그는 고문의 혹독함에 굴복해 한 번 배교한 후로는 더욱 굳건한 신앙으로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과 그의 누이 정정혜 그리고 정하상과 같이 북경을 여러차례 다녀온 유진길과 불과 13세의 나이로 부친과 함께 순교한 유대철 소년 역시 기해박해 때의 순교자이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 네거리는 또다시 피로 물든다. 베르뇌 주교 등 외국 선교사들이 순교하던 바로 그 날 여기서는 남종삼, 홍봉주가 피를 흘린다. 그리고 이들의 머리가 네거리 말뚝에서 채 내려지기도 전에 최형·전장운의 목이 잘린다. 서소문 밖에서의 순교사는 대략 세 단계로 나뉘어지는데, 첫 단계는 신유박해 초기부터 지도층 신자들을 대상으로 시작되었다. 그 결과 1801년 2월 26일에는 첫 순교자가 서소문 밖에서 탄생하였다. 한국 교회의 반석인 이승훈(베드로)과 명도회의 초대 회장인 정약종(아우구스티노) 등 6명이 순교한 것이다. 그로부터 석 달 뒤에는 여회장 강완숙(골롬바) 등 남녀 신자 9명이 순교하였고, 10월과 11월에는 황사영(알렉산델)의 '백서' 사건과 관련하여 황사영, 현계흠, 황심(토마스) 등 5명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이렇게 서소문 밖의 작은 개천가에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진 뒤에야 박해는 막을 내렸다. 두 번째 단계는 기해박해 때로, 1839년 4월 12일에 성 남명혁(다미아노) 등 5명과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던 성 김아기(아가다) 등 4명이 이곳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이어 6월 이후에도 계속 순교자가 탄생하였으며, 8월 15일에는 성 정하상(바오로)과 유진길(아우구스티노)이 다시 이곳에서 참수되었다. 이때 조선 교회의 지도자요 밀사 역할을 하던 정하상은 미리 체포될 것을 예상하고 "상제상서"(上帝相書)를 작성하여 품안에 지니고 있었는데, 이를 조정 관리들이 발견해 냄으로써 자연스럽게 '천주교가 진교(眞敎)'라는 호교론이 알려지게 되었으나, 박해로 눈이 먼 그들은 이를 묵살해 버리고 말았다. 기해박해 때의 처형은 11월 24일에 성 정정혜(바르바라) 등 7명이 순교의 화관을 받은 뒤에야 끝나게 되었다. 세 번째의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사람은 남종삼 성인 등 3명으로 나타난다. 전국적으로 가해진 대박해 임에도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가 적은 이유는, 아무 때 아무 곳에서나 신자들을 체포하거나 투옥하고 처형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기록에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이름 모를 은화(隱花, 숨은 꽃)들이 서소문 밖의 형장에서 아무도 모르게 순교의 영광을 바쳤으리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이들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다. 다만 그들 모두 양같이 순하게 칼을 받았고 신음도 원망도 없이 오직 천주를 행한 한마음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것만 미루어 헤아릴 뿐이다. 지금은 서소문 시민 공원으로 단장돼 있는 이 순교의 현장에는 103위 성인의 탄생을 본 1984년, 한국 천주교 현양 위원회에서 세운 순교자 현양탑이 하늘로 치솟아 건립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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