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흥립 훈련대장 무슨 말이냐? 반정군을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소탕하라는 군의 엄한 명령을 안 듣고 백기를 들으라니? 네가 군인으로서 불복하고 반정군에 동조하여 부귀를 꿈꾸었단 말이냐? 하늘은 네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죽기를 맹세하고 책임을 완수하는 자는 부귀와 영화가 따르나 네 같이 반역하는 자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이 될 것이다.”
“장군님의 옥채를 보전하기 위하여 반정군에 가담하였습니다. 제 목을 베어주십시오?”
“반역에 가담한자가 이유가 구차스럽구나? 내 칼이 더러워질까 네 목을 치기도 아깝구나? 임금을 지키지 못한 이 죄인의 목을 어서 쳐라!”
위 대화는 1623년 3월 12일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임금의 안위를 보호하고 국군 총사령관인 전상의(全尙毅) 내금위어모장군(內禁衛禦侮將軍)과 반정군에 가담한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 간에 주고받은 말이다. 이흥립은 전상의 장군의 말처럼 10개월도 못되어 다음 해 또 이괄(李适)의 난(亂)에 동조하여 난이 평정되자 처형되었다.
전상의(全尙毅)장군은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투철한 군인정신과 애국정신으로 임금에 충성한 죄로 관직을 박탈당하고 향리로 쫓겨 가야 했다.
▴제 2 미움 - 반정에 가담 않은 죄로 좌천발령을 받다.
그는 2년 후 인조(仁祖) 3년(1625년) 정3품에서 정4품인 개천군수로 좌천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장군은 죽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뜻밖의 발령에 임금이 죽일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나라에 충성할 기회를 준 임금께 감사하는 북향 4배를 올리고 바로 부임하였다. 이어서 구성도호부사(龜城都護府使) 겸 좌영장(左營將)이 되었다. 전장군은 흐트러진 관위를 정비하고 변방방어에 극력 대비하였다.
▴제 3 미움 - 상관이 화약고에 불을 질러 끝까지 싸울 기회를 박탈당하다.
1616년 만주에서 건국한 후금(後金)과 조선은 광해군의 적절한 외교정책으로 큰 마찰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으로 바뀌었고, 요동(遼東)을 수복하려는 모문룡(毛文龍) 휘하의 명(明)나라 군대를 도왔기 때문에 두 나라 사이는 갑자기 멀어지게 되었다. 명나라를 치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후금은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정벌하여 후환을 없앨 필요가 있었다. 이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후금으로 달아난 이괄(李适)의 잔당이, 광해군은 부당하게 폐위되었음을 주장하면서 군세가 약한 조선을 침략할 것을 종용하였다. 드디어 인조 5년(1627년) l월 13일 아민(阿敏)이 이끄는 3만의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기습 공략하였다. 의주 절제사 이완(李莞) 등이 급히 나아가 통판 최몽량(崔夢亮) 등 수하 장수들과 버텼지만 중과부적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1월 17일 후금의 3만 대군은 곽산의 능한산성을 포위하였다. 이 싸움에서 선천절제사 기협(奇協)이 피살되고 정주절제사 김진(金搢), 곽산절제사 박유건(朴惟健)이 사로잡히면서 능한산성도 무너져 버렸다. 의주를 공격한지 1주일도 안되어 후금의 군대는 선천, 곽산, 정주를 지나 청천강에 도달하였다. 청천강의 안주성은 후금의 군대가 평양을 지나 개성, 한양으로 이어지는 중요 요새지였다. 의주가 침략당하자 평안병사 남이흥은 급히 주변의 제 군사를 안주성으로 모이게 했다. 당시 안주성에 모여든 사람은 평안병사 남이흥(南以興)을 비롯 구성부사 전상의(全尙毅), 강계부사 이상안(李尙安), 용천부사 이희건(李希建), 개천군수 장돈(張暾), 맹산현감 송덕종(宋德宗), 태천현감 김양언(金良彦), 박천군수 윤혜(尹惠), 영유현령 송도남(宋圖南) 등 안주변의 수령과 그들의 군사들이었다.
평안병사 남이흥은 구성부사 전상의, 안주목사 김준 그리고 안주성에 집결한 여러 수령들과 함께 후금 군에 대한 방어 전략을 수립하였다. 평안병사 남이흥은 안주목사 김준에게 중영(中營)을, 구성부사 전상의에게 각각 남영(南營)을 사수할 것을 명령하였다.
전장군은 남영인 백상루(百祥樓)에 진을 치고 전투 준비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 하여 갔다. 적이 몰려올 곳에 대포를 포진하였다. 포탄과 화약을 철저히 점검하였다. 그리고 백병전을 대비하여 창, 칼을 쓰는 병법 훈련연마에 땀을 흘리고, 붙잡고 넘어트리는 기술을 습득하도록 하였다. 1대 5의 담력 훈련을 하였다. 명중을 요하는 사수의 훈련도 빼놓지 않았다. 곽산의 능한산성을 무너뜨린 후금의 선봉대가 관서지방을 유린하면서 청천강을 넘어 안주 성에 도착한 것은 1627년 1월 20일 이었다. 소리소리 지르며 진군해오는 수많은 적의 기세가 대단하였다. 전장군의 휘하 장졸들이 겁에 질려 벌벌 떠는 병사도 있었다. 전쟁이 벌어지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필승하겠다는 병사들의 자신감이다. 이러한 자신감을 주기 위하여 군율을 철저히 지킬 것을 강조하였다.
“오늘 전투는 반드시 승리하여야 한다. 그래서 적이 두려워 함부로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적이 강한 기세로 몰려오지만 우리는 외부의 지원을 기대하기가 힘든 상황이다. 우리는 아무리 강한 적이 온다하여도 우리의 임무는 우리강토를 쳐들어오는 적을 한 놈도 남김없이 이 땅에서 몰아내는 것이다. 화살을 아끼고 포탄을 아껴서 유효 사거리가 될 때까지 적을 유인하여 섬멸하여야 한다,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것은 무기를 얼마나 효과 있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지금 부족한 것이 무기이니 화살하나 포탄 한 발이라도 낭비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평안평사 남이흥은 전장군의 부대에게 풍부한 무기와 넉넉한 군사를 주지 못하였다. 그래서 당시 전장군은 어려운 상황에서 기적을 이뤄내야만 했다. 따라서 전장군의 전술은 적을 가장 가까이 유린하여 가장 효과적인 무기를 사용하는 방법뿐이었다. 이러한 전장군의 전술은 기적을 이뤄냈다. 기세 넘치게 달려들던 청군은 보기 좋게 꼬꾸라졌다. 전장군의 휘하 장졸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대승리를 거두었다. 적들은 얕보고 거침없이 돌진해 왔다. 교만한 무리들이 바로 성 아래에까지 다다랐다. 전장군은 군령을 내렸다.
“대포를 발사하라. 기름을 던져라. 불화살을 쏴라.”
청군은 순식간에 독 안에 든 쥐가 되어 꼼짝 못하고 모두 대포에 맞아 죽고, 창자가 터져서 피투성이가 되어 아우성치며 죽어갔다. 포탄소리는 하늘을 진동하고 적병들은 크게 무너져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전장군은 교전 첫날 대승리를 거두었다. 전장군의 휘하 장졸들은 군율을 잘 지켜 성 아래까지 적병을 유인하여 섬멸하였다. 일제히 대포를 발사하는 전술이 적중했다. 병졸들의 사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적을 보고 두려워하는 병사는 한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도망가는 적들을 추격하였다. 전장군은 승리에 도취한 군졸들을 불러드렸다. 전장군은 장병들을 다독거렸다.
“교만해서는 안 된다. 적병의 전술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함부로 진격하는 것은 위험하오니 성을 굳게 지키고 기회를 보아 적을 섬멸하라.”
태산같이 명령하였다.
이튿날(21일) 새벽 적들은 성벽을 타고 넘을 수많은 사다리와 석포를 앞세우고 대규모적으로 쳐들어왔다. 전투는 어제와 같이 치열하였다. 적병은 인해전술을 감행하였다. 앞에서 죽은 자의 시채를 넘고 넘어서 계속 돌진해 왔다. 적병의 시체는 어제보다도 더 많이 쌓여갔다. 전장군 휘하 장졸들도 전사자가 늘어갔다. 그러나 전장군은 최전방에서 진두지휘하였다.
“대포를 쏴라. 기름을 퍼부어라. 불화살을 쏴라.”
적병들을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 전투가 백병전으로 숨 가쁜 순간이 전개되니 전장군 진영의 전사자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늘어만 갔다. 치열한 전투는 벌써 오후를 넘기고 있었다. 병기는 보급되지 않고 포탄과 화살은 거의 다 떨어져 가는 상황이 되었다. 이 때 평안병사 남이흥은 김준 곁에서만 싸우면서 “싸울 군사와 병기마저 없으니 화약고에 불을 놓고 자결하자.” 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전장군은 평안병사 남이흥의 주장에 반대하였다.
“만약 먼저 화약고에 불을 지르면 적을 이롭게 하고, 오히려 우리의 남은 병사가 최후까지 싸울 수 있는 병기를 잃게 됩니다. 이는 적의 사기만 높여주는 격이 됩니다. 남은 병사를 수습하여 최후의 순간까지 우리의 강토를 침범한 적병을 한 놈이라도 없애야 합니다.”
그러나 평안병사 남이흥은 전장군의 간곡한 상고에도 불구하고 병졸을 시켜 화약고에 불을 질렸다. 전장군이 끝까지 싸울 수 있는 기회조차도 박탁해 버렸다. 그리고 평안병사 남이흥은 불 속에 뛰어들었다. 이어서 안주 목사 김준도 불 속에 뛰어들었다. 이를 따르던 군졸들의 상당수도 불에 뛰어들었다. 수많은 포탄과 화살이 불에 타 없어져갔다, 이를 본 전장군은 통곡하였다.
“아무리 군대는 명령이라지만 싸울 기회마저 박탈하십니까? 군인은 전장에서 최후까지 싸우다 죽는 것입니다. 군인은 마땅히 전장에서 나라를 지키다 죽는 것이 명예로운 것입니다.“
전장군은 통곡하고만 있을 시간조차도 없었다. 살아남은 병사들과 남은 포탄과 활, 화살을 수습하여 최후의 일각까지 싸울 준비를 하였다.
“불 속에 뛰어들지 않고 끝까지 남아서 우리 강토를 침범한 적을 한 놈이라도 더 없애겠다는 네들의 강철 같은 애구투지가 가상하다. 참으로 고맙다. 그러나 나라를 지키다 목숨을 다하는 것도 뜻있는 일이지만 살아남아서 오늘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기록으로 남겨 훗날 오랑캐들을 막아내는 방책을 세우는 것도 뜻있는 일이다. 그러니 살길을 도모하는 자는 어서 빨리 여기를 빠져나가라.”
몇 사람은 전장을 빼져나갔다. 그러나 대부분의 장졸들은 전장군과 함께 싸울 각오로 떠나지 않았다. 남이흥과 김준이 지키는 중영은 이미 함락되었다. 청군은 화약고가 불타는 것을 보고 춤을 덩실덩실 추며 승리감에 도취되어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그들은 남영으로 몰려들었다. 전장군은 최후의 명령을 내리고 백상루에 올라 적군을 향하여 활을 당겼다. 화살을 3개를 한꺼번에 쐈다. 수많은 적병이 나가떨어졌다. 전장군과 함께한 장졸들도 대포를 발사하고 최후의 일각까지 적병을 향해 기름을 퍼붓고 불화살을 쐈다. 상황은 날이 저물어 눈앞을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런데도 적들은 물밀듯이 몰려왔다. 끝내는 장졸들은 모두 전사하고 전장군 한 사람만 남아서 싸웠다. 적의 화살이 장군의 왼쪽 다리에 명중되었다. 날은 이미 저물었다. 더 쏠 화살이 없었다. 적병은 장군을 포위하고 장군을 노려보고 있었다. 전장군은 칼을 놓았다. 그리고 임금이 계시는 곳을 향해 갑옷과 옷깃을 여미고 4배를 올렸다.
“임금님! 나라를 지켜내라는 어명을 성실히 이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죄인은 목숨을 바쳐 임금님께 사죄합니다.”
전장군은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찔러 높은 백상루 아래로 떨어졌다. 적들도 혀를 쩍쩍 차며 ‘군인이란 저렇게 깨끗하게 목숨을 버리는 것이구나!’하고 적장(敵將)들도 나라를 위한 충신(忠臣)의 기계(奇計)에 감탄하였다. 그들은 장군의 장엄한 죽음에
“충신열사의 시신은 일반병사와 함께 둘 수 없다.”
하고 백상루 앞에 묻어두고 그 옆에 <전상의 장군 지묘>라는 나무 말뚝을 세웠다.
▴제 4 미움 - 죽은 후에도 나라에서 홀대(忽待)하다.
청군은 평양(平壤)을 거쳐 황주(黃州)에 이르자 인조는 강화도로,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난하고 곧이어 정묘강화를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나라에서는 안주성 전투에서 5일 동안이나 버티어낸 전장군에 대하여 난이 끝난 후, 1627년 2월 7일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추증(追贈)되고 이어서 안주(安州)로부터 출생지인 광주(光州)로 시신(屍身)을 옮기어 동년 7월 26일 무등산 서쪽 평두산(平頭山)에 예장(禮葬)하였다. 숙종(肅宗) 8년(1682년) 장군의 충절(忠節)을 기리기 위하여 전몰지(戰歿地)인 안주(安州)의 충민사(忠愍祠)에 받들게 하고, 숙종(肅宗) 10년(1684년)에는 충신정려(忠臣旌閭)를 명하였다. 헌종(憲宗) 15년(1849년) 광주(光州)의 경렬사(景烈祠) 와 제주(濟州)의 귤림서원(橘林書院)에도 배향(配享)되었다.
정묘호란 때 순절한 대표적인 인물은 품계로 볼 때 평안병사 남이흥, 안주목사 김준, 구성도호부사 전상의였다. 그러나 안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16인의 위패를 모셨던 안주 충민사의 주벽은 평안병사 남이흥과 안주목사 김준 그리고 우후(虞候) 박명룡이었다.
어째서 전상의 장군은 그 주벽에서 제외되고 있었을까? 최후의 일각까지 국토방위에 충성을 다한 장군을 죽은 후에도 왜 홀대하는 것일까? 뿐만 아니라 숙종 10년 전라관찰사 이사명(李師命)이 장군의 손자였던 유항(有恒), 유성(有成)의 호소를 중앙에 청하여 정려의 은전과 사당의 건립을 요청했다. 그러나 특별히 정 려만 내리고 사당 건립에 대해서는 김준의 사당에 배식(配食)하라는 명이 있을 뿐이었다. 전상의 장군은 품계로 안주목사 김준과 똑 같이 정3품인데 김준의 사당은 지어주면서 어째서 전장군의 사당은 지어주지 않고 더부살이를 하라고 하였을까?
전상의 장군은 광해군 때에는 내금위어모장군겸사복(內禁衛禦侮將軍兼司僕)이 되어 광해군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던 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조반정은 장군의 삶에 커다란 좌절을 안겨주었다. 인조반정 후 관직이 박탈되고 2년 후에 품계가 정3품에서 정4품인 개천군수로 좌천당하였다. 그러나 전장군은 정치적인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정묘호란을 맞아 최 일선에서 가장 용감하게 싸우다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당시 안주목사 김준(金浚)은 인조반정에 참여한 공으로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가 되고 이괄의 난 후 봉산군수를 거쳐 안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이에 반하여 전상의 장군은 ‘광해군 곁을 끝까지 지켰던 죄로 홀대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5 미움 - 충민사 건축시기가 장군을 왜곡하다.
충민사는 1977년 광주 지역민들의 뜻(5·18민주화운동 이전)을 모아 장군의 묘소를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32호로 지정하고, 1982년 6월 28일 착공하여 1985년에 준공하였다. 전장군의 충절에 비하여 너무도 늦은 감이 있으나 우리 후손들이 독립된 사당에 우러러 모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충민사에는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을 비롯하여 수의문, 정려각, 장군의 유물을 전시한 유물관 등이 있다. 충민사가 건축되든 해는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하든 때(1980-1988)였다. 5·18민주화운동 때 광주·전남 지역민은 본이 아니게 많은 학살을 당하였다. 그래서 당시 정권탈취에 목표를 둔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를 몹시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광주시민은 엉뚱하게도 ‘충민사는 전대통령이 자기 가문을 빛내기 위하여 고려 때 왜구를 몰아낸 보잘 것 없는 한 장군을 영웅화시키기 위하여 사당을 짓고 있다.’는 왜곡된 소문을 믿고 있었다. 필자도 2008년 5월 24일 충민사를 참배하기 전까지는 이 소문을 믿고 있었다. ‘전상의 장군님! 정말 죄송합니다. 그동안 무관심으로 참배 한 번 못한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고 참배를 올렸다. 전상의 장군에 대한 사실을 알고 나서 너무도 부끄러웠다. 우리 강토를 지키시다가 목숨을 바치신 전장군에 대한 왜곡(歪曲)이 더 이상 되어서는 절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향 광주의 정신이 그냥 전통적으로 내려 온 것이 아니고 전상의 장군 같은 분들의 애국정신에서 이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시에서는 광주고등학교 앞에서 직선로 광주대교를 넘어 월산로타리까지 1,970m를 ‘구성로‘라고 명명하여 전상의 장군을 항상 우리의 생활 속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 있다.
전상의 장군은 우리광주의 자랑이다. 조선(朝鮮) 선조(宣祖)8년(1575년) 광주(光州) 구동(龜洞)에서 전용(全蓉)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용력과 무술이 뛰어난 장군은 선조 36년(1603) 29세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의 초임 발령 이후 내외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광해군(光海君) 9년(1617)에는 오윤겸(吳允謙)과 함께 회답사(回答使)로 일본(日本)에 건너가 임진·정유(壬辰·丁酉)왜란(倭亂)때 끌려간 동포 150여명을 귀국시키는데 공을 세우고, 내금위(內禁衛) 예차(豫差) 및 어모장군(御侮將軍)을 봉직한 광주의 자랑스러운 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