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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자료실 - 종교간대화와 그리스도인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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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트(한국) 스크랩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 8, 양화진 홍보관과 기념관 (서울)
대화일치 추천 0 조회 24 09.09.19 20:2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홍보관(좌)와 한국 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관(우)

 

서울 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145- 8에 위치한 양화진 외국인 묘지는 정식 명칭이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이다. 1893년 10월 24일에 개설이 허가 되었으며 면적은 13,224 제곱미터이다. 무덤은 514 여기가 있으며, 최초의 피장 선교사는 존 헤론이다. 이곳에는 초대 선교사와 조국 근대화에 헌신한 구미 각국의 저명인사 500여명이 묻혀있는 양화진 외국인 공원 묘역에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성금으로 선교기념관을 건립하여 그들의 선교정신과 숭고한 희생 봉사의 업적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후세에 전승키 위하여 1985년 1월 14일 재단법인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협의회 제 5차 총회에서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한국 기독교선교회관을 건축키로 결의하였다. 이 사업이 1985년 6월 28일  "한국기독교 선교100주년 기념관" 기공예배를 드리게 되었으며 1986년 8월 20일 건조물 및 토목공사가 완료되고 9월 10일 조경 공사가 완공되었다. 이곳에는 선교 기념실, 자료실, 대강당, 외국인 연합교회 예배처소, 종, 소회의실 교육실, 목회자실, 부속실, 친교실,식당, 기관실, 다목적실, 야외 행사공간, 주차장, 관리인 숙소, 휴게실이 구비되어 있다. 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복음을 전해야 할 때 한국은 미개한 상태에 놓여있었다.그리하여 선교사들은 복음과 또한 문명화와 근대화 사역을 함께 수행해야 했다. 그리하여 선교사들은 의료와 교육을 병행해야 했는데 알렌은 제중원을 설치하였다. 이곳에서 언더우드,헤론, 감리교 의료 선교사 겸 목사 스크랜톤이 일하였다. 처음에는 알렌이 와서 일하였으나 밀려오는 환자를 혼자서 치료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언더우드가 약국의 일을 도와주게 되었다. 1885년 5월에 내한한 스크랜톤과 함께 같은 해 6월 헤론이 가담하였다. 부족한 약품들, 의료 재료들로서는 감당하기 역부족이었다. 날씨가 더워지고 전염병은 창궐하였다. 한국인들은 위생관념이 희박하여서 물을 끓여먹지 않아서 온 가족과 동네가 몰사하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헤론은 내한한지 5년만에 이질에 걸렸다. 그는 그곳에서 그렇게 순직했다. 이러한 제중원은 후에 미국의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의 실업가 <세브란스>가 1만 5천 달러를 희사하여 지금의 서울역 앞 대지를 구입하여 세브란스 병원이라는 이름을 갖게되고 세브란스병원이 생겨났다. 헤론은 이렇게 한국의 복음화를 위하여 의료 선교에 뛰어 들었고 그는 그렇게 이질에 걸려 질병으로 숨져갔다. 그는 5년간이라는 짧은 선교의 현장에서 사역을 감당하다가 이방 땅에서 그렇게 뼈를 묻었다. 그는 조국보다도 자신의 가족 보다도 더욱 한국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의 묘지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 JOHN W. HERON, MD/who came to Korea IN  1885/MISSIONARY PHYSICIAN/ TO/ CORT ANT LEGATIONS/DERBYSHIRE ENG,1856/ DIED/  SEOUL JULY,1890/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그는 1885년 한국에 의료선교사로 와서 1890년  7월 여름에 순교했다. 그리고 그 비문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라고 자신의 신앙을 묘비에  적어놓았다.  헤론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겠다는  선교에 대한 일념으로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 다른 사람의 병을 고쳐주었지만 자신은  그렇게 죽어갔다.  한국의 복음은 이런 사명자들의 결과로서  이루어진 것이다. 같은 곳에 잠들어 있는 많은  선교사들의 묘비에는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을 자신들의 묘비에 적으면서  순교의 길에 들어갔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A. R. 아펜젤러-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J.D. 언더우드,  "주님 ! 길고 긴 여행을 끝내고 이제 나는 안식을 얻었습니다." -G.A. 테일러,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H.B. 헐버트,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A.K. 젠슨-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 -R. 켄드릭-이곳에는 선교사들을 따라 왔다가 부모와 함께 순직한 가족들이 함께 있으며, 채 꽃피우지 못하고 부모도 함께 한국에 묻힌 아이들도 많다 이곳에 한국 복음의 선교를 위하여 숨진 사람들의 묘는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다.

 

신분별, 국적별 순교자

구분

어른

어린이

선교사

75

36

111

선교사,

군인 아닌 사람

46

10

56

미군부대와

관련된 사람

26

38

64

소속 불명

44

31

75

한국인

15

11

23

 

국명

인원수

국명

인원수

미국

265

캐나다

7

백러시아

54

스페인

4

영국

30

벨기에

4

프랑스

25

덴마크

3

한국

20

일본

1

호주

12

총계

425명

숫자에는 표지없는 무덤 80여기와 어린이는 포함되지 않았음

 

양화진 홍보관(2008.3.27 개관)


2008.3.27. 개관한 양화진 홍보관은 재)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 및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 그리고 마포구청이 함께 건립하였다.  "양화진홍보관’과 1층 ‘양화진홀’은  “조선의 밀알이 됐던 선교사들을 본받아 앞으로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빛으로 거듭나도록 도와 명실공히 기독교 최대의 성지가 되도록 함”에 개관 목적이 있다. 이재철(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 목사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과 양화진홍보관에 대해 “피선교국이 선교사들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100% 자비로 보존, 관리하는 세계유일의 선교사묘원이며 세계최초의 전시관”이라 소개하며 “앞으로도 100주년기념교회는 묘지기 사명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입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홍보관(좌)와 한국 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관(우)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홍보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한국 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한국 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관 

기념관 내부 제단       (출처- http://www.kmc.or.kr/)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한국 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관 후면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안내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안내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안내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안내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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