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1987 |
청소년기의 데이비드 베컴에게는 오직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팀만이 존재했다. 그는 Leyton Orint 축구 클럽 선발 시합에 참가했고 Tottenham Hotrpur 학교 재학 중에는 연습시간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유니폼만을 고집했었다. |
1987-1990 |
그 당시 그의 영웅은 (지금도 그렇지만) Bryan Robson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추구 인생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 사람은 바로 그의 아버지 Ted였다. 선수출신은 아니지만 훌륭한 기본기를 갖춘 그의 아버지는 젊은 베컴에게 고된 훈련으로 단련시켰다. |
1990-1996 |
아버지는 데이비드 베컴에게 킥을 가르칠 때마다 몇 시간이 걸리고 해가 지더라도 데이비드가 올바로 찰 때까지 반복시키곤 했고 완벽한 기본기가 완성될 때까지 뛰게 했다. 이런 가르침은 베컴이 후에 프로선수가 된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
1996-1998 |
데이비드 베컴은 96/97시즌 오프닝에서 윔블던을 상대로 그 유명한 슛(57 yard)을 넣으며 두각을 나타냈다. 우연히도 그날은 데이비드가 처음으로 아디다스의 Predat boots를 신은 날이기도 했다. |
1998-1999 |
이전까지 베컴은 모든 평가 경기들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유일한 선수였지만 1998년의 월드컵은 영국만이 아니라 데이비드에게 있어서도 최악의 경기였다.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했던 베컴의 경기는 승리가 두를 달리던 그의 경력에 처음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
1999-현재 |
98/99년 시즌은 전례 없던 세 경기 우승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큰 수확을 가져왔다. 이로 인해 베컴은 유럽 및 세계에서 올해의 선수로 지명되는 쾌거를 이룩했다. |
경기출장 및 득점
92~93 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유나이티드 경기출장 0 골 0
93~94 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유나이티드 경기출장 0 골 0
94~95 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유나이티드 경기출장 4 골 0
/ 프레스턴-임대 경기출장 5 골 2
95~96 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유나이티드 경기출장 33 골 7
96~97 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유나이티드 경기출장 36 골 7
97~98 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유나이티드 경기출장 37 골 9
98~99 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유나이티드 경기출장 35 골 6
99~00 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유나이티드 경기출장 31 골 6
00~01 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유나이티드 경기출장 31 골 9
01~02 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유나이티드 경기출장 28 골 11
02~03 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유나이티드 경기출장 57 골 15
<프리미어, FA컵, 워싱턴컵, 챔피언스 포함>
주요경력
92/93, 93/94, 95/96, 96/97, 98/99, 99/00, 00/01 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쉽 우승
93/94, 95/96, 98/99 시즌 잉글랜드 FA컵 우승
98/99 시즌 챔피언스 리그 우승
96/97 시즌 프리미어쉽 올해의 신인 선수상
1999, 2001 FIFA 선정 올해의 선수 2위
1999 프랑스 풋볼 선정 올해의 유럽 선수 2위
1998, 2002년 월드컵 잉글랜드 국가대표 |
1999, 2001년 FIFA 올해의 선수 2위, 감독이 뽑은 최고의 선수
2005년 현재 레알 마드리드 소속 미드필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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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기간 | 경력내역 | |||||
1993 | ~ | 1995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잉글랜드) | |||
1995 | ~ | 1995 | 프레스톤 노스 엔드 (잉글랜드) | |||
1996 | ~ | 2003.6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잉글랜드) | |||
1998 | ~ | 프랑스 월드컵 잉글랜드 국가대표 | ||||
2002 | ~ | 한일 월드컵 잉글랜드 국가대표 | ||||
2003.6 | ~ | 레알 마드리드 (스페인) | ||||
2006 | ~ | 독일 월드컵 잉글랜드 국가대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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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연도 | 수상내역 | ||
1996 | 8월의 선수 수상 | ||
1996 | Sky Sports/Panasonic 올해의 신인상 수상 | ||
1997 | PFA 올해의 신인상 수상 | ||
1997 | UEFA 최고의 미드필더상 수상 | ||
1999 | UEFA MVP | ||
2000 | FIFA 올해의 선수 2위 | ||
2000 | Nation Football Awards 올해의 선수 | ||
2001 | Western Union MVP | ||
2001 | 영국 올해의 스포츠선수 | ||
2001 | BBC 올해의 인물상, 황금의 순간상 수상 | ||
2001 | FIFA 올해의 선수 2위 | ||
베컴 '실력도 외모만큼 최고'
2002년 4월 11일은 데이비드 베컴(30·레알 마드리드)의 축구인생에서 잊지 못할 날일 것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간의 UEFA챔피언스리그 8강전에서 베컴은 상대 미드필더 알도 두세르의 태클로 인해 발가락 골정상을 입었기 때문.
2002년 한일월드컵을 불과 50여일 앞둔 시점이었다. 베컴을 치료하기 위해 최첨단 의료진이 동원됐고, 결국 베컴은 기적처럼 재활에 성공해 월드컵 무대에 나설 수 있었다. 그리고 베컴은 아르헨티나와의 '숙명의 라이벌'전에서 페널티킥 결승골을 성공, 4년전 프랑스월드컵에서의 악몽을 훌훌 털어낼 수 있었다.
베컴에겐 수려한 외모 탓에 적지않은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녔다. 그러나 베컴의 플레이를 본다면 단순히 그를 얼굴만 잘생긴 축구선수로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 사실. 베컴의 프리킥은 세계에서 둘째라면 서럽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뛰어나며, 전방 공격수에게 정확하게 연결되는 측면 크로스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를 연발케 한다.
1975년 영국 레이튼스톤에서 태어난 베컴은 어린 시절 몸담았던 맨체스터와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16세에 유소년팀에 입단할 때부터 스타플레이어로 성장할 때까지, 베컴은 언제나 맨체스터의 붉은 셔츠를 입고 있었다.
1995년 4월 리즈 유나이티드와의 홈경기에서 프로데뷔전을 가진 베컴은 이듬해 주전으로 발돋움, 알렉스 퍼거슨 사단의 간판 미드필더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베컴은 어린 시절부터 스타군단의 집결체 맨체스터에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이 당시 유로96 체코의 깜짝 준우승을 이끌었던 카렐 포보르스키를 제치고 오른쪽 날개로 입지를 굳혔다.
이후 베컴은 맨체스터가 1998-99시즌 챔피언스리그, 프리미어리그, FA컵을 석권할 때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세계 정상급 미드필더의 반열에 올라섰다. 국제축구연맹(FIFA)에서 수여하는 '올해의 선수'와 '프랑스 풋볼'지가 선정하는 '올해의 유럽선수'에서 각각 2위를 차지하는 등 최고의 한해를 보냈다.
그러나 베컴은 유독 월드컵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아르헨티나와 16강에서 격돌한 프랑스월드컵에서는 퇴장을 당하며 8강 좌절의 멍에를 홀로 감수해야만 했다. 부상에서 빠르게 회복, 출전이 가능했던 한일월드컵에서도 사실 그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프리킥과 크로스는 크게 위협적이지 않았다. '베컴이 풀백으로 변신했다'며 그의 소극적인 플레이를 꼬집기도 했다.
독일월드컵을 맞는 베컴의 각오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또한 현재 베컴은 최고의 컨디션을 과시중이다. 올시즌 챔피언스리그와 프리메라리가에서 거듭되고 있는 칼날 크로스와 정교한 프리킥은 그의 건재를 증명하고 있다. 또한 스티븐 제라드, 프랑크 람파드 등으로 구축된 최강의 중앙미드필더진은 베컴이 측면 역할에 집중할 수 있는 발판이다.
스벤 고란 에릭손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은 "레알 마드리드의 성적과는 상관없이 베컴만큼은 좋은 시즌을 보내고 있다"고 그의 최근 활약에 만족감을 나타냈다. 가는 곳마다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축구계의 공식 미남' 베컴. 그의 오른발이 제대로 작동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40년만에 월드컵 우승에 도전하는 잉글랜드의 희비도 엇갈릴 전망이다.
★ 데이비드 베컴의 성장 과정
축구선수들 중에는 뛰어난 외모로 먼저 눈길을 끄는 선수들이 간혹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월드스타' 데이비드 베컴이 아닐까?
영화배우에 버금가는 외모에 만만찮은 실력까지 겸비한 그는 어렸을 적부터 탁월한 재능을 보인다. 잉글랜드인들이 자국 역사상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명으로 꼽는 데이비드 베컴은 1975년 5월2일 영국 Leytonstone(리튼스톤)에 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열렬한 팬이었고, 그들의 주장 브라이언 롭슨을 우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어린 벡스(베컴의 애칭)의 마음에 가장 강인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선수는 바로 글랜 호들이었다.
12살이 된 그는 '보비 찰튼(기사작위까지 받은 전설적인 잉글랜드 축구스타) 축구기술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차세대 축구스타의 탄생을 예고했다.
그리고 시상식이 거행된 곳이 바로 지금의 소속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홈그라운드인 올드 트래포드 경기장이다. 데이비드 베컴은 에섹스(Essex)주의 대표로 활약하기도 했으며 토튼햄 핫스퍼 유스팀에서 본격적인 선수 생활의 첫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여전히 벡스의 마음을 꽉 쥐고 있는 팀은 붉은 유니폼의 Manchester United(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다.
★ 축구인생의 시작
스파이스 걸스의 전 멤버였던 '포쉬' 빅토리아의 남편으로, 그리고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축구 스타로 잘 알려져 있는 데이빗 베컴은 1975년 리튼스톤(Leytonstone)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열렬한 팬이었고, 그들의 주장 브라이언 롭슨을 우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어린 벡스의 마음에 가장 강인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선수는 바로 글랜 호들이었다.
12세때에 '보비 찰튼 축구 기술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을 정도로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그는 에섹스(Essex)주의 대표로 활약하기도 했으며 토튼햄 핫스퍼 유스팀에서 본격적인 선수 생활의 첫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여전히 벡스의 마음을 꽉 쥐고 있는 팀은 붉은 유니폼의 맨유였다. 16세가 되던 1991년, 그는 마침내 연습생 신분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할 수 있었다.
FA 유스컵 우승을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낸 베컴의 특징은 유난히 정확한 킥과 넓은 시야였다. 그러나 성인팀에는 에릭 캉토나, 라이언 긱스등과 함께 공격을 주도하던 오른쪽 날개 칸첼스키스가 버티고 있었고, 그는 좀 더 선배들의 경기를 지켜보는 시간을 가져야만했다.
★ 축구선수로서의 성장기
16살이 되던 1991년, 청소년 대표팀에 발탁된 그는 여러 클럽에 입단을 시도하다 1991년 7월 8일 자신이 축구를 시작하면서 항상 꿈 꿔오던 잉글랜드 최고의 명문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연습생 신분으로 입단한 그는 경기를 읽는 시야와 패싱, 그리고 정확한 프리킥과 슛팅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이면서 주위의 시선을 받기 시작한다.
1992년 팀 을 F.A. Youth Cup 우승으로 이끈 그는, 그해 리그 컵 대회 브라이튼과 경기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성인팀의 후보 선수가 된다. 그러나 성인팀에는 에릭 칸토나, 라이언 긱스등과 함께 공격을 주도하던 오른쪽 날개 칸첼스키스가 부동의 주전 자리를 꿰차고 있었기에 그는 좀 더 선배들의 경기를 지켜보는 시간을 가져야만했다. 그러던 중 1994년 1득점을 기록하며 4대0의 승리를 이끈 유럽 챔피언스리그 갈라타사라이(Turkey)전은 유럽축구계에 그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995년 4월2일 Leeds United(리즈 유나이티드)와의 홈경기를 통해 프리미어리그 1부리그에 공식 데뷔한 그가 실제로 데뷔한 것은 이보다 2년 반정도 전의 일. 1992년 10월1일 리그컵인 럼블로우즈 컵 2라운드 Brighton(브라이튼)과의 원정경기에서 베컴은 경기 종료 20여분을 남겨놓고교체되어 들어가 경기를 무사히 치렀던 것이 그가 실제로 데뷔하게 된 경기였다.
베컴은 1995년 4월, 리즈 유나이티드와의 홈경기에서 마침내 프리미어 리그 데뷔전을 치르게 된다. 주전 오른쪽 윙으로 활약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크게 일조했던 그는 '올해의 신인 선수상'을 차지했던 96/97 시즌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윔블던과의 시즌 개막전에서 골키퍼 설리반을 농락시키는 그 유명한 60야드짜리 초장거리슛을 성공시키면서 수많은 전세계 축구팬들을 놀라게 하며 그의 스타 등극을 축하하는 축포가 되었고 그해 9월 잉글랜드 국가대표로 선발되는 영광의 시발점이 되었다.
베컴은 어느덧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그리고 잉글랜드의 미래를 이끌어 갈 대표적인 기대주로 손꼽히게 되었다.
그러한 그의 활약은 금새 당시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이었던 글랜 호글의 눈을 사로잡았고 1996년 9월1일 그는 Moldova(몰도바)와의 경기를 통해 A매치 데뷔전을 치루게 된다. 베컴은 전에도 청소년 대표팀과 21세 이하 대표팀에서 뛴 경력이 있었지만 성인대표팀으로써 출전하는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같은 해 그는 팀의 유로피안 컵 준결승 진출과 프리미어리그 우승에 일조한다.
96년 9월에는 몰도바와의 경기를 통해 A매치 데뷔전을 치렀고, 나날이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며 소속팀에서도 자신의 굳건한 입지를 다져나갔다. 이 젊은 미남 스타에게는 한마디로 거칠것이 없었다.
특히 97년 2월, 첼시와의 경기에서 터뜨린 대포알같은 중거리포는 유럽의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의 오른발을 떠나 골문을 향해 무시무시한 직선을 그리며 날아간 볼은 눈깜짝할 사이에 득점으로 연결됐고, 그 시속이 무려 97.9마일(약 157km)로 측정되었다. 이쯤되면 야구에서도 '강속구'가 아닌, '광속구'를 던지는 투수들의 직구 스피드에 버금가는 수치라 할만했다. 96/97시즌을 지나면서 그는 더 이상 '신인'이 아닌 불변의 '물건'임을 입증한다.
98 프랑스 월드컵을 앞둔 시점에서 베컴은 이미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젊은 스타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글렌 호들 감독은 90년대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미드필드의 재능 폴 개스코인을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시키는 결단을 내리게 되는데, 그는 이미 과다한 알코올 섭취로 인한 체중 증가를 비롯해 사생활에서 여러가지 문제를 일으키며 '예고된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중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데이빗 베컴은 대표팀의 새로운 중심이 될만한 선수로 자연스럽게 주목받았다. 화려함보다는 정확함을 장점으로 하는 그의 재능은 폴 개스코인의 그것과는 확실히 다른 종류의 유형이었지만 리더로서의 자질만큼은 더 나은 듯 보였다. 항상 성실하게 연습에 임하고, 기본적으로 자신을 빛내기 위한 개인기나 득점보다는 동료를 빛내주기 위한 어시스트와 패스에 주력하는 그의 플레이 스타일은 팀 전체를 조직적으로 단합시키는데 적합한 성격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했다.
★ 시련의 98 프랑스 월드컵. '공공의 적'으로 전락한 데이비드 베컴!
결국 감독의 신뢰와 능력을 인정 받으며, 잘 나아가던 그의 이름은 당당히 '98 프랑스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도 포함됐다. 하지만 그는 월드컵에서 너무나도 많은 감정들을 겪어야 했다. 축구에 커다란 열정을 갖고 있는 잉글랜드 국민들 모두가 데이비드 베컴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도대체 그는 왜 '공공의 적'이나 마찬가지인 신세로 전락해야만 했을까?
때는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의 프랑스 월드컵 16강전. 포클랜드 전쟁과 마라도나의 '신의 손 사건'으로 인해 여러모로 웃을 수 없는 역사를 지니고 있는 두 팀은 그야말로 전쟁을 방불케하는 혈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전반전에만 총 4골이 터져나오며 2:2로 팽팽한 균형을 이루었던 양팀의 상황은 후반전을 알리는 휘슬이 울린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부터 극명하게 대조되고 있었다.
전반에 베컴이 보여준 활약은 뛰어났다. 특히 마이클 오웬의 '원더골'을 특유의 정확한 패스로 어시스트했던 장면은 축구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후반 1분, 시메오네에게 밀려 넘어진 베컴은 흥분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채 경미한 보복 행위를 가했고, 설령 그것이 상대 선수에게 육체적인 해를 입히지는 않았을지라도 명백한 비신사적 행동이었음을 부정할수는 없었다. 닐센 주심이 꺼내든것은 레드 카드. 순식간에 경기의 흐름은 수적 우위를 확보한 아르헨티나쪽으로 기울어갔다.
결국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끝에 아쉽게 패배한 잉글랜드는 눈물을 삼키며 고국행 비행기에 올라야했다. 대표팀에 적지 않은 기대를 걸었던 국민들은 결코 승부차기 실축자들인 폴 인스와 데이비드 배티를 탓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어리석은 행동으로 인해 퇴장을 자처하며 동료 선수들에게 체력적인 부담을 안겨주었던 데이비드 베컴에게 엄청난 수위의 비난을 퍼부었다. 언론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결코 베컴을 지칭할 때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얼간이(Stupid Boy)'라는 대명사를 대신 사용했다.
콜롬비아와의 조별예선 3번째 경기에서 특유의 정교하고 그림같은 프리킥으로 그의 첫 A매치 득점을 기록할때만 하더라도 새로운 스타의 탄생은 이미 예고되었던 일 같았다. 앤더튼과 베컴의 공존을 선택한 호들의 판단은 현명했다. 거친 태클과 파이팅 넘치는 폴 인스의 파트너로는 비슷한 스타일의 데이비드 배티보다는 넓은 시야와 정교한 킥, 패스등이 돋보이는 베컴쪽이 더욱 적합해 보였다. 그리고 주력이 좋은 앤더튼은 부상으로 인해 제 컨디션을 유지하지 못하던 맥마나만을 대신하여 확실하게 오른쪽 측면을 책임지는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모든것은 아르헨티나와의 16강전, 베컴의 그 어리석은 행동에서 어긋나버리고 말았다. 그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A매치 첫 레드카드였고, 엄청난 좌절이었던만큼 마음고생도 심했다.
잉글랜드 대표팀으로 돌아오는 것, 예전의 지지를 다시 얻는 것, 그리고 스스로 자신감을 찾는 것이 힘든 일이 될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몇몇 전문가들은 월드컵에서 그가 일으킨 문제들로 인해 그는 다시 영국 축구팀으로 돌아오기 힘들 것이라고 예언했고 98/99 시즌이 시작되자 경기장에서도 많은 비난이 쏟아졌다.
설상가상으로 소속팀 방출설과 레알 마드리드 이적설 등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마음을 굳게 먹은 그는 그러한 발언들이 잘못되었음을 입증하려는 듯 열심히 경기에 임했고, 베컴이 홈팬들의 야유를 환호로 바꾸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 데이비드 베컴의 명예 회복! 더 이상 '얼간이 베컴'은 존재하지 않았다!
Leicester City(리시스터 시티)와의 시즌 첫 경기에서 그의 '트레이드마크'격인 휘어들어가는 프리킥으로 득점에 성공하며 팀을 패배에서 건진다. 그런 베컴은 매경기마다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팀의 승리를 주도했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지난 97/98 시즌에 아스날에게 내준 리그 왕좌 탈환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계속했다.
90분내내 놀라운 기동력을 선보이며 공,수 양면에 걸쳐 맹활약을 펼친 베컴은 특히 결정적인 순간에 빛을 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부메랑처럼 휘어드는 크로스는 '검은 투톱' 드와잇 요크와 앤디 콜의 머리 위로 어김없이 떨어졌고, 프리킥 감각 또한 절정에 달했다. 많은 사람들은 베컴이 축구 선수로서 해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것 중 하나인 '트리플 크라운(자국 리그(프리미어리그), FA컵, 유럽 챔피언스 리그등 3개 대회 우승)'을 주도해낼 수 있을거라 확신했다.
리그 마지막 경기에 이르러서야 아스날을 따돌리고 우승을 확정지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바이에른 뮌헨과의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잊을 수 없는 명승부를 치르게 된다. 이 경기는 데이비드 베컴 자신이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라고 할 만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경기였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바이에른 뮌헨의 마리오 바슬러에게 프리킥 골을 허용한 이후, 전광판 시계가 멈출때까지 1:0 스코어가 계속 유지되고 있던 상황으로 그야말로 '절대절명'이었다.
이 때 테디 셰링엄의 동점골이 극적으로 터져나왔고, 바로 1분뒤에는 솔샤르의 역전 결승골이 맨유의 팬들을 광기로 몰아넣었다. 이것은 '각본없는 드라마'라는 상투적인 표현으로는 100%를 담아낼 수 없는 환상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데이비드 베컴은 침착하고 일관되게 좋은 경기를 펼쳐 그의 소속팀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프리미어 리그, FA컵, 유럽 챔피언스 리그를 동시에 제패하며 트리플 크라운에 성공했고, 파우메이라스와의 도요타컵에서도 승리를 거머쥐며 4관왕의 위업을 달성했다. 단연 그 중심에는 데이비드 베컴이 서 있었다. 더 이상 '얼간이 베컴'은 존재하지 않았다.
베컴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퍼거슨 감독과의 인연은 떼려야 뗄 수 없다. 퍼거슨 감독은 지금의 베컴이 있기까지 그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고 지원해준 든든한 후원자다. 베컴이 장기인 미드필드에서의 크로스 패스를 보다 정교하게 다듬고 툭하면 시비거는 못된 버릇에서 신중하고 과묵한 성격으로 탈바꿈한 것도 퍼거슨 감독의 지도영향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베컴은 00/01 시즌을 끝으로 용퇴(勇退)를 한다는 소문에 퍼거슨 감독의 후임이 확실하게 정해질 때까지 맨체스터와 연장계약 협상을 하지 않겠다고 나서 구단관계자들을 애태우게 하고 있다.
★ 세계 최고의 플레이어 '데이비드 베컴!'
베컴은 1999년 UEFA 탑 랭킹 감독들이 뽑은 '올해의 최우수 선수'에 선정되면서 주가가 최고로 상승했다. 플라티니, 요한 크루이프 등 당대를 휘저은 최고의 스타들만이 선정된다는 최우수 선수에 24살에 불과한 베컴이 선정됐다는 그 사실 하나만 하더라도 베컴의 뛰어난 활약을 방증한다.
또한, 1999년 히바우두의 뒤를 이어 FIFA가 선정하는 '올해의 선수상'과 프랑스 풋볼이 주관하는 '올해의 유럽 선수상'에서 모두 2위를 차지하는 영예를 누린 베컴은 세계 최고의 선수 반열에 그 이름을 당당히 올릴 수 있었다.
베컴의 주특기는 누가 뭐래도 강력하면서도 정확한 슈팅이다. 영국대표팀에서 프리킥과 코너킥을 도맡아 하고 있는 베컴은 슈팅 자체로 상대방에게 큰 위협을 가하고 있다. 그의 정확한 센터링을 받은 헤스키, 오웬등의 헤딩슛은 영국대표팀의 주공격루트로 잡아가고 있다.
그리고 99년 3월 4일 그는 Brooklyn(브루클린)의 아버지가 되었고, 그해 맨체스터는 꿈의 3관왕을 차지한다. 같은해 99년 7월 4일 영국 인기 여성그룹 Spice girls(스파이스 걸즈)의 멤버인 Victoria adams(빅토리아 아담스)와 결혼함으로써 그는 12개월만에 완전히 명예회복을 하게 된 셈.
그리고 지난 벨기에와 네덜란드에서 공동 개최 된 Euro 2000에서 베컴의 눈부신 플레이는 전세계 팬들에게 자신의 입지를 더욱 강하게 각인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잉글랜드의 득점은 베컴의 발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뛰어난 패싱력과 프리킥 능력을 보 여준 대회였다.
잉글랜드는 비록 포르투갈과의 첫경기에서 루이스 피구의 마법 같은 중거리 슛팅과 누노 고메스의 일격에 3-2로 무릎을 꿇었지만, 이 경기에서 베컴이 보여준 수준은 매우 놀라웠다. 그는 폴 스콜스의 헤딩 선제골과 맥마나만의 연속골을 정교한 크로스 패스로 어시스트했고, 특유의 시원스러운 롱패스로서 경기를 주도하는 카리스마를 발휘하기도 했다.
독일과의 경기에서는 32년만의 감격적인 승리를 결정짓는 앨런 시어러의 헤딩골을 어시스트하며 물오른 패싱 감각을 과시했다. 하지만 잉글랜드는 루마이아에게 패하면서 8강 진출에 실패하며 축구 종가의 이름에 먹칠을 했고, 사람들은 다시금 대표팀의 수준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기도 했었던 아쉬운 대회로 기억됐다
-- 베컴, 그리고 바이에른 뮌헨과의 명승부 --
데이빗 베컴이 홈팬들의 야유를 환호로 바꾸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레스터 시티와의 개막전에서 터뜨린 득점을 포함, 그는 매경기마다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팀의 승리를 주도했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지난 97/98 시즌에 아스날에게 내준 리그 왕좌 탈환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계속했다.
90분내내 놀라운 기동력을 선보이며 공,수 양면에 걸쳐 맹활약을 펼친 베컴은 특히 결정적인 순간에 빛을 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부메랑처럼 휘어드는 크로스는 '검은 투톱' 드와잇 요크와 앤디 콜의 머리 위로 어김없이 떨어졌고, 프리킥 감각 또한 절정에 달했다. 많은 사람들은 베컴이 축구 선수로서 해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것 중 하나인 '트리플 크라운(자국 리그, 컵, 챔피언스 리그등 3개 대회 우승)'을 주도해낼 수 있을거라 확신했다.
리그 마지막 경기에 이르러서야 아스날을 따돌리고 우승을 확정지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바이에른 뮌헨과의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잊을 수 없는 명승부를 치르게 된다. 마리오 바슬러에게 프리킥 골을 허용한 이후, 전광판 시계가 멈출때까지 1:0 스코어가 계속 유지되고 있던 상황은 그야말로 '절대절명'이었다. 이 때 테디 셰링엄의 동점골이 극적으로 터져나왔고, 바로 1분뒤에는 솔샤르의 역전 결승골이 맨유의 팬들을 광기로 몰아넣었다. 이것은 '각본없는 드라마'라는 상투적인 표현으로는 100%를 담아낼 수 없는 환상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이윽고 프리미어 리그, FA컵, 챔피언스 리그를 동시에 제패하며 트리플 크라운에 성공했고, 파우메이라스와의 도요타컵에서도 승리를 거머쥐며 4관왕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리고 데이빗 베컴은 단연 그 중심에 서있었다. 더 이상 '얼간이 베컴'은 존재하지 않았다.
1999년, 히바우두의 뒤를 이어 FIFA가 선정하는 '올해의 선수상'과 프랑스 풋볼이 주관하는 '올해의 유럽 선수상'에서 모두 2위를 차지하는 영예를 누린 베컴은 유로 2000에서도 그 진가를 발휘하며 세계 최고의 선수 반열에 그 이름을 당당히 올릴 수 있었다. 잉글랜드는 비록 포르투갈과의 첫경기에서 루이 코스타의 마법과 누노 고메스의 일격에 3-2로 무릎을 꿇었지만, 이 경기에서 베컴이 보여준 수준은 매우 놀라웠다. 그는 스콜스와 맥마나만의 연속골을 정교한 크로스 패스로 어시스트했고, 특유의 시원스러운 롱패스로서 경기를 주도하는 카리스마를 발휘하기도 했다.
독일과의 경기에서는 32년만의 감격적인 승리를 결정짓는 알란 쉬어러의 헤딩골을 어시스트하며 물오른 패싱 감각을 과시했다. 하지만 잉글랜드는 8강 진출에 실패하며 축구 종가의 이름에 먹칠을 했고, 사람들은 다시금 대표팀의 수준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1분
잉글랜드와 그리스가 맞붙은 2002 월드컵 지역 예선 마지막 경기. 전광판의 시계는 이미 멈춰있었고, 양팀의 스코어는 2:1로 그리스가 앞서있는 상황이었다. 이미 수차례의 프리킥을 득점으로 연결시키지 못했던 데이빗 베컴이 살며시 공을 그라운드위에 올려놓는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서는 일말의 동요도 느낄 수 없다. 언제나처럼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듯 보인다.
왼팔로 크게 원을 그리며 특유의 유연한 오른발 스윙이 이어졌다. 공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고, 올드 트래포드 스타디움에 모여든 팬들은 곧 열광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동점골이 터진 것이다. 베컴은 포효했다. 이는 분명 잉글랜드 축구 역사에 오래도록 남을만한 명장면이었고, 베컴은 자기 자신조차 믿을 수 없다는듯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불과 3년전만해도 얼간이 소리를 들어야했던 그가 모든 잉글랜드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는 순간이었다.
독일과 핀란드의 무승부로 인해 잉글랜드는 월드컵 본선에 직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베컴은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던 1999년에 이어 다시금 '최고의 한해'를 맞이하는 중이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프리미어 리그 3연패를 달성했고, 위와 같은 명장면을 연출해내며 대표팀에서도 최고의 활약을 펼쳐보였기 때문이다.
FIFA 올해의 선수는 루이스 피구의 손을, 프랑스 풋볼 올해의 유럽 선수는 마이클 오웬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2001년의 데이빗 베컴은 분명 최고였다. 지난 2000년에 "올해 최고의 선수는 베컴이었다" 라며 지지를 보냈던 독일 축구의 살아있는 역사 프란츠 베켄바우어 또한 승부를 결정짓는 그의 힘에 온갖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렇다. 베컴의 무서움은 바로 승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갖추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축구가 결국 득점으로 승패가 갈리는 종목임을 생각한다면 무섭도록 정확한 셋트 플레이 능력과 최고 수준의 어시스트, 그리고 미드필더로서 비교적 높은 득점력을 갖추고 있는 베컴은 여러모로 매력적인 선수일 수 밖에 없다.
그리스전에서의 드라마틱한 결승골을 포함해 그가 터뜨린 수많은 결정적인 순간에서의 득점과 어시스트들은 이러한 사실을 너무도 확실하게 증명해주고 있다.
시간과의 싸움
01/02 시즌 챔피언스 리그 8강전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32강전에서 자신들에게 충격적인 2연패를 안기며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에게 설욕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기 때문이었다. 맨유는 이 승부에서 통쾌한 복수에 성공했지만 승리의 기쁨도 잠시, 그보다 더욱 큰 재난을 맞이하게 된다.
원정에서 맞붙은 1차전에서 2:0으로 승부를 마무리 지으려던 순간, 데포르티보의 간판 스트라이커 디에고 트리스탄은 데이빗 베컴에게 강력한 백태클을 선사했다. 다행히 전치 3주 수준의 부상에 머물렀지만, 당시의 태클 장면은 베컴의 선수 생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수위의 위험도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성을 잃었던 트리스탄은 정중하게 사과했지만, 베컴은 월드컵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가볍게 여길 수 없는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데포르티보와의 2차전에 맞춰 가까스로 복귀한 그에게 더욱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이번에도 사건은 상대 선수의 백태클에서 비롯되었다. 전반 16분, 아르헨티나 출신의 미드필더 알도 두셰르는 트리스탄의 그것에 못지 않은 태클을 시도했고 베컴은 그라운드에 쓰러져 좀처럼 일어나지를 못했다. 정밀 진단 결과, 발등뼈에 골절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회복까지는 전치 8주의 시간을 요했다. 월드컵이 6월부터 시작되고, 부상을 당했던 시점이 4월초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야말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 그리고 시간과의 싸움을 다짐해야 할 시기였다.
무엇보다도 중요했던건 경기 감각을 되찾기 위해 더해지는 시간적인 문제였다. 따라서 베컴은 부상 치료와 함께 최대한으로 체력적인 부분을 유지할 수 있는 특수한 프로그램을 병행함으로써 상처가 아무는 동시에 무리없이 경기에 임할 수 있도록 힘을 기울여야만 했다. 이는 분명 극도의 정신력을 필요로 하는 과정이었다.
에릭손 감독은 스티븐 제라드로 하여금 베컴의 대비책을 마련하려 했지만, 제라드마저 부상으로 인해 월드컵 출전이 불가능해짐으로써 주위의 반응은 더욱 예민해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베컴은 무리없이 부상에서 회복해나갔고, 마침내 스웨덴과의 첫경기에 출전할 수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잉글랜드 대표팀은 한숨을 놓을 수 있었다.
---베컴의 활약상---
이제 한 명의 축구 선수라고 하기엔 너무 유명해진 데이비드 베컴의 장점이라면 프리킥 때를 비롯한 중거리 슈팅 능력과 오른쪽에서 자로 잰 듯 정확히 날리는 크로스, 끊임없이 피치를 누비는 활동력이라고 하겠다.
국가 대표팀
1997년 9월 몰도바와의 경기에서 국가대표로 데뷔한 이래 대표팀 명단에 꾸준히 이름을 올린 베컴은 98년 프랑스 월드컵 16강 아르헨티나 전에서 퇴장을 당하며 팬들과 언론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유로 2000을 거친 그는 2002년 한일 월드컵 예선부터 대표팀 주장을 맡으면서 한 단계 성숙한 모습을 보였는데, 특히 그리스와의 유럽 예선 최종전 인저리 타임에 꽂아넣은 프리킥은 잉글랜드의 본선 직행을 알리는 기적 같은 골로 많은 이들의 가슴에 남아 있다. 이후 챔피언스리그에서 큰 부상을 당하며 월드컵 본선 출전이 불투명했지만, 빠른 치료 덕분에 회복하여 본선 아르헨티나 전에서는 복수의 페널티킥을 넣는 등 팀을 8강으로 이끄는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유로 2004 예선에서는 5골을 터뜨리며 맹활약했지만, 본선 프랑스전과 8강 포르투갈전에서 연이어 페널티킥을 실축하는 등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클럽
동런던의 레이튼 스톤에서 출생했음에도 베컴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오랜 팬이었다. 92년 FA 유스컵 우승을 계기로 본격적인 유나이티드의 일원이 된 그는 리그와 FA컵을 석권한 95~96 시즌부터 팀 내에서 위치를 확고히 굳혔으며, 96~97 윔블던과의 시즌 첫 경기에서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 준 하프라인 골을 넣게 된다. 한편, 베컴에게 기억에 남는 한 해라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트레블(챔피언스리그 우승, 프리미어 리그 우승, FA컵 우승)을 달성한 98~99 시즌을 들 수 있는데, 그 해 베컴은 FIFA에서 선정한 올해의 선수상 투표에서 히바우두에 이어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2001년에도 그는 루이스 피구에 이어 2위에 랭크되었다. 베컴은 2002/03 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프리미어리그에서 아스날에게 빼앗긴 타이틀을 되찾는데 주역이 되었으며, 개인적으로도 6번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지금 그의 소속팀이 된 레알 마드리드에게 8강에서 지기 전까지 2득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2003년 여름 3,500만 유로의 이적료에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2003/04: 베컴은 정확한 패스와 성실한 자세로 중앙 미드필더로서의 새로운 역할에 빨리 적응해 팬들의 신뢰를 얻었으나, 그 해에 레알 마드리드는 단 1개의 트로피도 획득하지 못했다.
베컴과 관련된 그외의 이야기들
▷ 몇몇 헐리우드 스타 부부들만큼이나 숱한 화제를 불러모으는 데이빗 & 빅토리아 베컴 부부는 서로 첫눈에 반한 사이였다며 서슴없이 옛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데이빗 베컴은 TV를 통해 스파이스 걸스를 지켜보면서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 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과거를 회상하지만, 자신의 경기를 보기 위해 찾아온 빅토리아와 잊을 수 없는 첫만남을 갖고 난 이후부터는 오래전부터 함께 지내온 것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고 한다.
▷ 98 월드컵 16강전에서 데이빗 베컴의 레드 카드에는 아르헨티나의 노련한 미드필더 디에고 시메오네의 오버 액션 또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두 선수는 2002 월드컵 '죽음의 조' 에서 다시금 운명의 만남을 갖게 된다. 베컴은 경기 전 인터뷰에서 "시메오네를 축구 선수로서 존경하고 있다." 라며 담담한 반응을 보였고, 시메오네 또한 벡스의 기량을 칭찬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의 경기. 마이클 오웬이 얻어낸 페널티킥을 베컴이 준비하자 시메오네가 슬며시 다가와, "저쪽으로 차는게 좋을거야. 저쪽." 이라며 고도의 심리전을 시도해왔다. 하지만 그는 침착하게 성공시켰고, 경기 후 인터뷰에서 "시메오네는 신사적인 사람이다. 그와 나는 서로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경기후에 악수를 나누었다." 라며 더 이상 악연이 계속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 사우스햄튼을 대표했던 공격수 맷 르 티시에는 데이빗 베컴이 96/97 시즌 윔블던과의 경기에서 성공시켰던 60야드 득점을 가리켜 "자신의 보아왔던 득점 중 가장 아름다웠던 장면" 이라 표현했다. 골키퍼 설리반의 키를 훌쩍 넘기며 골문으로 빨려들어간 아름다운 곡선은 르 티시에뿐만이 아닌 여러 축구인들을 감동시켰는데, 맨유의 전설 보비 찰튼 또한 "근래 보기 드문 놀라운 골" 이라는 찬사로써 후배의 활약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 첫째 아들 브루클린이 태어나는 순간 베컴은 복잡하게 얽혀드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는 잉글랜드 여성들이 뽑은 가장 섹시한 축구 스타로 선정되는등 여러모로 매력적인 남성임이 분명하지만, 결코 여성 편력이 심한 인물은 아니다. 언젠가 빅토리아는 모 방송사와의 토크쇼를 통해 "남편이 내 속옷을 입고 경기에 출전한다" 라는 푼수끼있는 발언을 내뱉은적이 있다. 그로 인해 베컴은 '게이 기질'이 있는것이 아니냐는 의심의 목소리를 감당해야했지만 오히려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유명 게이 잡지의 표지 모델로 출연하는가 하면, 가끔씩 아내와 함께 게이바에 출입하는 모습을 내비추며 당당함을 통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보이는 베짱을 과시하기도.
▷ 데이빗 베컴은 어린 시절부터 글렌 호들을 존경해왔지만, 가장 가까운 곳에서 '친구'와 '스승'의 역할을 동시에 소화해낸 라이언 긱스에게도 친근감과 경외심을 동시에 느낀다. 99/00 시즌 레알 마드리드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챔피언스 리그 8강전을 앞두고 상대 수비수 호베르투 카를로스가 "베컴은 돌파력이 없는 반쪽짜리 선수" 라는 혹평을 내렸던 것을 비롯, 그는 윙어로서 부족한 개인기때문에 종종 비판적인 시각에서 평가되어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베컴은 긱스를 스승삼아 몇가지 트릭과 기술을 배웠고, 레알 마드리드와의 8강전에서는 자신을 비난했던 호베르투 카를로스를 포함해 3~4명의 수비수를 돌파하고 득점을 올리는 보기 드문 장면을 연출해냈다. 망신을 당한 카를로스는 경기가 끝난 후, "그것은 심리전이었다. 베컴은 의심할 필요가 없는 최고의 선수" 라는 변명과 함께 "베컴이 레알 마드리드로 왔으면 좋겠다" 라는 마음에 없는(?) 찬사를 늘어놓기도 했다.
▷ 잉글랜드의 한 기자는 과거 보비 찰튼(잉글랜드)과 조지 베스트(북아일랜드)가 같은 대표팀의 유니폼을 입고 뛰지 못한 시절을 가리켜 '대영제국의 비극'이라는 표현으로써 아직도 가시지 않은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와 함께 '새로운 베스트' 긱스와 '새로운 찰튼' 베컴이 함께 뛰지 못하는 현재의 상황과 대표팀의 취약한 왼쪽 라인을 예로 들어 라이언 긱스의 존재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했는데, 베컴은 "긱스와 같은 뛰어난 왼쪽 날개가 필요하다" 라며 잉글랜드의 많은 축구인들과 생각을 같이했다. 에릭손 감독 또한 기자들에게 "세계의 유명 축구 스타중에서 딱 한명만 잉글랜드 스쿼드에 포함시킬 수 있다면 누구를 선택하겠는가?" 라는 질문에 서슴없이 "라이언 긱스" 라고 대답했던적이 있다. 그러나 긱스 본인은 웨일즈와 잉글랜드에 관해 질문을 받는것을 결코 달가와하지 않는다.
▷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에 관심이 많은 동남아 지역에서는 일찍부터 데이빗 베컴의 동상이 세워졌을 정도로 그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2002 월드컵 이후, 한국과 일본에서도 주가가 한창 상승하고 있는 중. 특히 일본에서는 '베컴 열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젊은 세대층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나타냈는데, 데이빗 베컴이 월드컵에서 선보인 모히칸 스타일의 머리 모양이 유행하는가 하면 베컴과 관련된 티셔츠, 축구화, 열쇠고리등의 상품이 엄청난 판매고를 기록하며 불티나게 팔려나갔을 정도라고 한다.
베컴 '실력도 외모만큼 최고'
2002년 4월 11일은 데이비드 베컴(30·레알 마드리드)의 축구인생에서 잊지 못할 날일 것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간의 UEFA챔피언스리그 8강전에서 베컴은 상대 미드필더 알도 두세르의 태클로 인해 발가락 골정상을 입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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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컵 예선 전적 |
예선 8경기에 선발로 출전했다. 2004년 10월 9일 웨일스전, 2005년 3월 30일 아제르바이잔전에서 각각 1골씩을 기록했다. |
- 클럽 히스토리 |
92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프로 데뷔전을 치렀고, 2003년 여름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뒤 현재까지 활약 중. |
- 스카우팅 리포트 : 공격력 |
베컴은 팀의 주장으로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자랑한다. 그의 최대 강점은 자로 잰듯한 패스와 크로스. 역습을 위해 길게 내주는 패스의 전개 속도 및 성공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또 오른쪽 측면을 돌파한 후 올려주는 크로스의 정확성 역시 세계 최고다. 또한 동료와 짧게 주고받는 패스 게임도 아주 세밀하다. 그러나 드리블 실력은 패스 능력에 비해 많이 떨어진다. 드리블 스피드와 드리블 기술이 월드컵에 출전하는 공격형 미드필더 중 보통 수준이다. 베컴의 별명은 ‘황금의 오른발’이다. 폭발적인 파워와 컴퓨터같은 정확성을 갖춘 그의 프리킥은 단연 세계 최고. 뿐만 아니라 오른발 인프런트로 감아찰 때 스핀의 각도 역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페널티킥, 코너킥 역시 베컴이 대부분 전담한다. 그러나 문전 기회 때의 골 결정력, 헤딩슛 능력은 다소 부족한 편이다. |
- 스카우팅 리포트 : 수비력 |
공격 성향이 강한 선수치고는 하프라인부터 수비에 열심히 가담하는 편이다. 볼을 가진 상대와의 1대1, 팀 디펜스 응용 능력 등은 보통 수준이다. |
- 2006 월드컵 전망 |
베컴은 잉글랜드 부동의 공격형 미드필더다. 한때 션 라이트-필립스의 강력한 도전을 받았지만 지금은 주전과 백업으로 두 선수 사이에 역할 분담이 끝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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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상대팀 | 장소 | 결과 | 출전여부 |
2004.03.26 | 북아일랜드 | 홈 | 4-0승 | 선발출전 |
2004.09.04 | 오스트리아 | 원정 | 2-2무 | 선발출전 |
2004.09.08 | 폴란드 | 원정 | 2-1승 | 선발출전 |
2004.10.09 | 웨일스 | 홈 | 2-0승 | 선발출전(1골) |
2004.10.13 | 아제르바이잔 | 원정 | 1-0승 | 명단제외 |
2005.03.30 | 아제르바이잔 | 홈 | 2-0승 | 선발출전(1골) |
2005.09.03 | 웨일스 | 원정 | 1-0승 | 선발출전 |
2005.09.07 | 북아일랜드 | 원정 | 0-1패 | 선발출전 |
2005.10.08 | 오스트리아 | 홈 | 1-0승 | 선발출전 |
2005.10.12 | 폴란드 | 홈 | 2-1승 | 명단제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