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왕버들과 요양병원
권예자
왕버들과 요양병원
권예자
생명은 존귀하고 아름답다.
안동 도산서원 앞엔 수령이 400년을 훌쩍 넘는다는 왕버들 두 그루가 세월의 역경을 이겨낸 우람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구불구불 휘어지고 늘어진 가지가 긴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데 마치 커다란 구렁이 몇 마리가 얼크러져 있는듯하다.
아래로 휘어진 가지엔 여러 개의 쇠기둥을 세워 가지가 땅에 닿지 않도록 떠받치고, 여기저기 영양제까지 꼽고 있다. 사람들은 장관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왜 그런지 가엽고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는 귀한 수종이거나 기념이 되는 나무인데 자생이 어려워서 보호받는 나무들이 여럿 있다. 어떤 나무는 본래의 나무가 죽는 경우를 대비해서 옆에 비슷한 모양의 새끼 나무를 기르는 곳도 있다. 생명존중 사상에서 보거나 식물 연구목적으로 보아도 좋은 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나는 그런 나무를 볼 때마다 서글픈 생각이 드는 걸 어쩔 수 없다.
도산서원 왕버들은 과연 인간의 도움을 받아 오래오래 영원토록 살고 싶을까? 어쩌면 그가 가지를 자꾸 땅으로 떨어뜨리는 것은 인간의 도움으로 살기에도 지쳐서 땅에 눕고 싶어서는 아닐까?
모든 생물은 때가 되면 세상과 작별한다. 큰 나무라고 또 보호수라고 해서 다를 것도 아니다. 혹여 나무가 오래 산 것에 대한, 또는 그를 오래 살게 한 인간의 능력을 자랑하고 싶은 욕심이 나무들을 지치게 하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요즘 요양병원에 가면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한 노인 환자들이 눈도 뜨지 못하고 누워있는 것을 보게 된다. 가족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물론 스스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의사소통도 못 하니 살아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들이 평생 쌓아온 지적, 사회적 위치가 휴지가 되고, 재산도 내 것인지 남의 것인지 모르게 사용된다. 간병인에게 볼기를 얻어맞고 반말지거리를 들으며 그저 호흡만 유지하고 계신 살아있는 미라가 된 노인들. 어쩌면 곧 닥칠 우리 모두의 미래 같아 소름이 돋는다.
그래도 도산서원 왕버들은 가지를 받쳐주고 영양제를 주면 잎도 피고 꽃도 피고 아름다운 그늘도 만들어준다. 좋은 사진의 배경도 되어준다. 아직은 병원치료를 잘하면 회복될 환자 수준이다. 그러니 지탱할 수 있을 만큼 돌보아주는 것이 마땅하다. 노인 환자들도 정성껏 치료해서 의식이 돌아오고 거동하게 된다면 노년을 즐길 수 있도록 해드려야 한다.
그런데 요즘은 그게 자꾸 이상한 방향으로 변질하여가는 느낌을 받는다. 요양병원에서 위독해지면 대형병원으로 옮겨 응급 처치하여 위기를 넘기고, 다시 요양병원에 돌아가 식물처럼 누었다가 위독해지면 또 대형병원으로 간다. 이런 반복적 되풀이로 의식 없는 삶이 계속된다. 말하자면 인간 아닌 인간으로 수명만 연장되면서 가족들 생활까지 곤궁해지기에 이른다. 어느 경우에는 집에서 돌보면 그런대로 살아가실 노인을 병원브로커가 끼어들어 이곳저곳 옮겨 다니다 병이 악화되어 유명을 달리하기도 한다.
<세계일보 기사 캡쳐'백세 시대의 슬픈 자화상'(2012.10.03)>,
60대가 나쁜 것이 아니고, 노인을 모시는 건 노인뿐. 젊은이는 아예 모시지 않으므로...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은 노인 인구가 많은 요즈음 꼭 필요한 중요 시설이다. 그런데 그 곳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문제다. 어느 면에선 원래의 취지와는 다르게 현대판 고려장 장소가 되기도 한다. 극히 드믄 일이겠지만 모시기 싫은 노인을 내다 버리는 곳으로 그곳을 이용하기도 한다는 말이다.
누구는 재산 있는 어머니를 자신이 모신다면서 노인의 동의를 얻어(?) 재산을 가로챈 후에 기억력 상실을 치매로 몰아서 싸구려 요양원에 넣어 버렸다. 그러다 열악한 환경에서 모친이 돌아가시자 호화 장례식장으로 모셔서는, 대단한 효자인 것처럼 울고불고하며 조의금을 챙기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것이 부모자식의 관계라니 참 슬픈 일이다.
하지만 모든 자식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함께 성경공부 하는 어느 자매님은 노인 장기요양등급 2급인 아흔 다섯의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호스피스 봉사자기도 한 그녀는 어른을 잘 모시기 위해 요양보호사 교육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녀 역시 노인이어서 최근 들어 자신이 환자가 되기에 이르렀다. 어쩔 수 없이 모시던 시어머님을 휴양림 안에 있는 시설과 평판이 좋은 요양원에 입원시켰다. 물론 여러 형제들의 동의하에 함께 장소를 물색했고 번갈아 드나들고 있다.
그녀는 집을 떠나신 시어머님이 마음에 걸려 이틀이 멀다 하고 방문하고 있다. 그때마다 어르신은 그간 요양원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일이나 새로 배운 지식을 들려주신단다. 또 친구들이 많아서 좋다고 하신단다. 바람직한 일이다.
언젠가 읽은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100년 전에는 인간의 평균 수명이 50세 정도였으나, 2010년에는 80.8세로 급격히 연장되었다고 한다. 2012년 영국의 BBC는 "2150년에는 인간 평균 수명이 150세까지 연장된다."고도 했다.
반가운 일이어야 하는데 걱정이 앞선다. 건강하지 못한 장수는 축복이 될 수 없으니 그때는 또 어떤 일이 생길는지. 죽음준비학교, 임종노트 쓰기 등 좋은 권유들이 많지만, 의식 없는 환자들에게야 무슨 도움이 될까. 비록 병마와 싸우더라도 최소한 인간의 권위를 지키며 떠나고 보내야 하는데.
그러고 보면 아직도 싱싱한 왕버들을 보며 요양병원을 생각하는 나 자신이 참 한심스럽다. 이럴 시간에 가벼운 운동이라도 하고 책이라도 읽어서 정신이 몸보다 먼저 떠나지 않도록 잘 준비해야 하는데 말이다.
그래도 생명은 존귀하고 아름답다. ♣♣
첫댓글 생각을 많이하게 하는 글이네요...사진이 있어서 보기에 좋기도 하고요... 저도 친정엄마를 모시고 있는데 버거울 때는 별별 생각이 다 들거든요...
이유님, 내일 혹시 예술인 신년 하례회에 오시나요?
책을 아직 못보내서...
@권예자 정보가 없습니다ᆢ
권예자 수필가님의 글을 읽고 마음을 가다듬어 봅니다.
카페가 썰렁해서 전에 올렸던 글을 가져왔답니다.
권예자님! 읽어보니 공감되는 글이군요. 슬픈 현실을 잘 알려주셨습니다.
저의 이모님도 얼마 전에 식물인간으로 요양병원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네 선생님.
우리는 지금 아픈 장수는 축복이 아닌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실 너무 오래 살가봐 걱정하시는 분도 많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