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차: 2016년 8월 8일(월)
오늘 오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로마 시내에 자리 잡은 바티칸을 방문하기 때문에 평소보다 훨씬 빨리 출발하게 되었다. 6시 30분경 아침식사를 호텔 내 식당에서 해결하고 서둘러 로마를 향한다. 숙소인 피우지에서 로마까지는 대략 1시간 30분이 소요되었다. 바티칸은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 안에 위치한 작은 국가로서 높다란 성벽으로 둘러쳐 있었고 나지막한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 일행이 도착하기도 전에 벌써부터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로 벌써 긴 줄이 이어지고 있었다. 9시부터 공식적인 입장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관광객들은 미리부터 줄을 서있다. 우리 일행은 7시 50분부터 줄을 서기 시작하여 바티칸의 북쪽 성벽을 따라 입구까지 수백 미터를 전진하는데 무려 3시간이 소요되었다. 가이드님의 설명대로라면 평소 2시간 정도 기다리면 입장이 가능하다고 하였는데, 예상보다 1시간 정도 더 걸렸다. 이렇게 지체되는 이유를 나중에 알고 보니 예약자부터 우선적으로 입장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행사 차원에서 미리 예약한다면 우리도 쉽게 입장할 수 있겠지만 그게 말처럼 녹녹치 않은 일인 것 같다. 예약하여 입장하는 사람들을 살펴보니 대부분 백인 계통의 현지인 아니면 가톨릭 관련 신자들인 것 같다. 우리처럼 이역만리(異域萬里)에서 찾아온 관광객들보다는 이탈리아 현지인과 가톨릭 신자를 더 우대하는 것이 차별로 보이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바티칸박물관에 들어가기 위한 관광객들의 모습
3시간 동안 기다리는 동안 기다림에 지치지 않도록 현지 가이드님은 바티칸에 대하여 친절한 설명을 해준다. 특히 바티칸의 예술작품 중 가장 극찬을 받는 미켈란젤로가 그린 성 시스티나성당의 천정화 그림을 찍은 사진화보를 나누어주고 그림에 얽힌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갔다. 우리가 줄을 선 곳은 바티칸의 북쪽 성벽이라 쨍쨍한 여름날의 햇빛을 피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런 관광객들을 상대로 엽서 크기의 화보세트를 판매하는 길거리 상인들이 있었는데, 한때 한국에 살았던 경험이 있었는지 제법 한국어를 정감 있게 구사하여 한국인들의 환호를 받기도 하였다. 판매자의 정성이 갸륵하고 값도 저렴하다고 생각하여 나도 2가지 화보세트를 구입하였다.
* 바티칸시국(State della Citta del Vaticano): 로마 시 북서부에 있는 독립 시국(市國). 교황에 의해 통치되는 신권국가로 가톨릭교회의 상징이자, 중심이며 세계 가톨릭 신자들의 마음의 고향이다. 현재 바티칸이 있는 곳은 고대 로마인들이 ‘점(占)치는 언덕’이라 부르던 곳으로, 이곳이 교회와 연관을 맺기 시작한 것은 사도 베드로가 순교당한 후 이 언덕에 묻히면서부터이다. 그 뒤 그리스도교가 공인되면서 베드로의 묘지 위에 성 베드로 대성당이 세워졌고 5세기경에는 바티칸 궁전이 건립되기도 하였다. 이후 역대의 교황들이 바티칸 궁전 주변의 땅을 매입하였고, 8세기부터는 베드로의 세습령, 즉 교황령을 통치하는 교황의 정식 주거지가 되었다. 번창하던 바티칸은 19세기부터 주변 군주들의 침입으로 교황령이 위축되고, 1870년 이탈리아 왕 빅토르 엠마누엘 2세에 의해 로마가 점령되면서 이탈리아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후, 교황들의 교황령에 대한 전통적인 권리를 계속 주장한 결과 그 타당성이 인정되어, 1929년 2월 11일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 사이에 라테란 조약이 체결되면서 바티칸은 배타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독립국가로 재출발하였다. 면적은 0.44㎢, 둘레길이 4km이며 바티칸 궁전, 성 베드로 대성당, 바티칸 도서관, 바티칸 박물관, 바티칸 방송국 외에 교회행정과 학술. 문화. 과학 등을 관장하는 많은 건물로 이뤄진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이다. 인구는 842명으로 바티칸의 시민권은 출생에 의해서 획득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직책으로 인하여 바티칸에 상주하여야 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증서로 그 직책에서 물러나면 자동적으로 시민권도 소멸된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스위스 출신의 용병은 대략 110명 정도이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입장하게 되었다. 현지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일행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바티칸 박물관(MVSEI VATICANI)이라고 쓰여 있는 입구에 도착하게 되었다. 영국의 대영박물관,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박물관이라고 하니 이곳만 관람하면 이제 우리는 3대 박물관을 다 체험하게 된다. 입구에서부터 엄청난 인파가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고 곳곳에 중무장하고 있는 이탈리아 군인들도 볼 수 있었다. 아마도 요즘 자주 일어나는 테러에 대비하기 위한 목적일 것 같다. 입구에는 대리석으로 빚은 조각 작품이 있었는데, 알아보니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모습이라고 한다. 르네상스 시대에 바티칸을 위해 공헌한 대표적인 예술가로 평가받고 있다. 아무리 작은 나라라고 하지만 입장을 하면서 국경을 통과하는 상황이니 자못 긴장이 된다. 우리는 바티칸 박물관의 실내로 들어서며 바티칸에서 나누어주는 새로운 수신기와 리시버를 받았다.
바티칸 박물관은 한때 교황의 궁궐로 사용되던 건물인데,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처럼 용도변경된 것이라고 한다. 교황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건물이어서 그런지 무척이나 내부의 치장이 화려하였다. 천정과 벽면은 우아한 그림으로 칠해지고 바닥은 장식이 화려한 대리석이 깔려 있었다. 갤러리에는 수많은 조각 작품이 있는데 고대 그리스와 헬레니즘시대를 거쳐 로마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들이 즐비하였다. 이곳 박물관의 시작은 헬레니즘 시대의 걸작인 라오콘 상이 전시되면서부터라고 한다. 라오콘 상이 있다는 사실은 한국에 돌아와 인터넷 검색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전시된 조각상을 둘러보면서 재미있었던 것은 인체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조각 작품마다 성기(性器) 부분을 가리기 위해 추가로 낙엽 모양의 조형물을 추가로 붙여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본성보다는 신에 대한 경배를 우선하는 중세시대의 엄숙주의를 느낄 수 있는 흔적이라 하겠다. 관람객이 어찌나 많은지 떠밀려서 이동하게 되니 제대로 예술 작품을 감상할 겨를도 없고 겨우겨우 사진 촬영을 하게 되었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 알게 된 사실은 이곳에 라파엘로가 남긴 유명한 그림, ‘아테네의 학당’이라는 벽화가 있었는데, 이것도 보지 못하여 아쉬운 마음이다. 가이드님이 시간 관계상 생략했거나 아니면 내가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 것일 수 있다.
바티칸 박물관 내부의 모습
* 바티칸 박물관: 이 박물관은 엄밀히 말해서 바티칸 궁 몇몇 건물에 교황들이 모아 놓은 예술 작품을 전시한 곳이다. 바티칸 궁에는 총 1400개가 넘는 방들이 각각의 건물들에 나뉘어져 있다. 이 중에서 바티칸 박물관이라고 부르는 곳은 이 방들의 몇몇을 공개한 것이다. 이 바티칸 궁들은 1377년 교황이 아비뇽 유수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퇴락한 권위를 다시금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다. 그러다 보니 그 화려함과 웅장함이 극치에 달한다. 건물들은 1550년대부터 짓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거닐게 된 박물관은 1820년대에 만든 건물이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원정을 하면서 나폴리에서부터 베네치아까지 예술품을 싹쓸이해 갔다. 그러다 보니 현재 이탈리아에 남은 것이라고는 못 떼어 간 벽화나 건물에 붙어 있는 부조물이 많다. 그러나 1816년 비엔나 회의에서 유물 반환의 명령을 받았고 이때 돌아올 전시물들을 위해 지은 건물이 현재 우리가 보는 박물관 건물이다.
바티칸 박물관은 1층과 2층으로 나뉜다. 1층에는 각종 그림을 모아 놓은 회화 전시관, 피오 클레멘티노 미술관, 이집트 전시관, 키아라몬티 미술관, 시스티나 성당이 있다. 바티칸 도서관은 3년의 보수 공사가 끝나고 2010년 9월 20일 재개관했다. 2층에는 에트루리아 전시관, 지도의 방, 라파엘로의 방들이 있다. 바티칸 박물관은 교황 율리우스 2세(1503~1513)가 개인적으로 모아 두던 소장품들의 전시에서 그 기초를 찾을 수 있다. 현재의 박물관의 모습은 교황 클레멘스14세(1769~1774)와 피우스 6세(1775~1799)가 적극적으로 후원해 기초를 다졌다. 이후에 그레고리우스 16세는 이탈리아 남부 지방에서 수행되던 발굴 작업으로 발견된 고고학적 유물들을 가지고 에트루스코 박물관을 설립한다(1837). 또한 바티칸 궁궐에서 소장할 수 없던 이집트 탐사에서 발견한 고대 물품들과, 바티칸과 카피톨리노 박물관에 소장되던 물품들, 그리고 로마 시대의 석상들과 모자이크들을 소장한 이집트 박물관(1839)도 설립했다. 이후 1900년대에 박물관 모습이 정비되었고 1970년도에 들어서서 지금의 박물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2000년도에는 지금의 박물관 입구가 건립되어 본격적인 바티칸 박물관의 맥을 잇고 있다. 하지만 일반 관람객들에게 모든 전시물이 공개되지는 않는다.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성 시스티나 성당(Cappella Sistina)에 들어서게 되었다. 여기서는 그림을 보존하기 위해서인지 사진 촬영이 전면 금지되어 있다. 미켈란젤로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천정화인 ‘천지창조’와 벽면의 ‘최후의 심판’을 내 눈으로 직접 감상하게 되었다. 500년의 세월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채색(彩色)은 그 화려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그동안 여러 번의 덧칠과 복원이 이루어지면서 지금까지 그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르네상스의 천재 예술가인 미켈란젤로는 원래 조각가로 출발하였지만, 이 작품을 완성함으로써 회화(繪畫)에서도 그 천재성을 인정받게 된다. 미켈란젤로는 그림을 주문한 교황의 기대를 충족시키고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극한(極限)의 육체적 고통을 참아가며 열정을 쏟아 이 작품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크리스트교 신자라면 죽기 전에 한번 쯤 이 작품을 보아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 같은 비종교인도 이런 성화(聖畵)를 바라보면 신의 존재를 생각하게 될 정도로 경외(敬畏)감이 드는 작품이다. 여기서 독일의 문학가 괴테는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나는 그저 바라보고 놀랄 뿐이었다. 그 거장의 내적인 자신감과 남성다움 및 위대함은 어떤 표현으로도 충분치 않을 것이다.”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이라는 주제는 크리스트교에서 처음과 끝(알파와 오메가)에 해당하는 중요한 스토리이다. 이것을 한 사람이 20년의 간격을 두고 그렸으니, 예술가로서는 커다란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일행은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인해 미술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겨를이 없이 떠밀리듯 다음 장소로 이동하게 되었다. 다음은 바티칸의 중심 건물인 성 베드로 성당을 관람하게 되었다. 전 세계 가톨릭 성당 중에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하며, 한꺼번에 5만 명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여기에도 엄청난 인파가 밀려들었다. 이곳 성 베드로 성당은 120년의 건축 기간을 거쳐 완성된 건물이기에 수많은 건축가들이 관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중에는 르네상스 시대 3대 예술가 중에 하나인 미켈란젤로도 대성당의 돔(Dome)을 설계하는데 관여하였으니 건축가로서의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남긴 수많은 조각 작품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피에타 상(像)과 다비드 상(像)인데, 피에타 상이 바로 이곳 성 베드로 성당 안에 위치하고 있다. 하얀 대리석을 깎아 만들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피에타 상은 성모 마리아와 죽은 예수를 리얼하게 표현하였다. 작가의 표현대로, 돌을 조각한 게 아니라 돌 속에 있던 형상을 끄집어 낸 것 같았다. 어두운 실내 공간에서도 피에타 상은 빛을 발하였고, 조각상 앞은 붐비는 관광객들로 그야말로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고 있었다.
성 베드로 성당 안은 곳곳에 성인(聖人)들을 위한 제단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성 베드로 조각상이 있는 곳이었다. 탐방객들은 이곳에서 베드로의 발을 만지며 지나가는데 행운이 주어진다는 믿음 때문이라고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발을 만졌던지 돌이 닳아 발가락의 형태가 무디어질 정도이다. 성당 내부는 대체로 어두운 편이었는데, 도움(Dome)과 아치형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햇빛은 더욱 찬란한 느낌을 주었다. 이런 장면을 보면서 건축(Architecture)이란 확실히 예술의 한 장르라고 느껴진다.
세계최대의 성당이라고 하는 성베드로 성당
우리 일행은 흩어져 관람을 하고나서 약속 장소인 성 베드로 광장(Piazza San Pietro)의 한 쪽으로 모이게 되었다. 성 베드로 성당 앞쪽에 펼쳐져 있는 광장은 바티칸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중요한 공공장소이다. 마치 열쇠 모양으로 조성된 공간으로 주변에는 원형의 회랑(回廊)이 감싸고 있다. 광장 가운데에는 오벨리스크와 분수대가 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성 베드로 성당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우리 일행은 그늘이 드리워진 회랑의 계단에 모여서 길거리 장사꾼들이 판매하는 물병(1유로)을 구입하여 마시고 있었다. 모두들 관람하느라 지친 기색이다. 한 여름에다가 대리석으로 포장된 바닥에서 복사되는 열기까지 더하니 더위를 더 느끼게 되는데, 신기하게도 그늘에만 들어가면 더위가 사라지는 느낌이다. 뜨거운 여름날인데도 공기는 건조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특성이라 하겠다. 성 베드로 성당과 그 앞쪽으로 이어지는 광장은 동쪽을 향하여 조성되어 있는데, 해가 떠오르는 곳을 중시하는 로마인들의 전통을 계승한 듯하다.
*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1564, 89세. 이탈리아 피렌체 공화국 카프레세 태생.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조각가, 화가, 건축가이다. 대표작을 시기별로 정리하면, 조각 작품인 바쿠스 상, 피에타 상, 다비드 상이 만들어지고 그 뒤에 벽화인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 등이 차례로 완성되었다.
미켈란젤로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유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 유모의 남편이 석공이었던 덕분에 미켈란젤로는 어린 시절부터 작업장을 드나들며 돌이 어떤 형상으로 바뀌는 과정을 즐겨 보곤 했다. 가난한 마을 행정관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요즈음의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아들이 그저 학업에 열중하여 집안을 일으킬 고급 관리가 되길 원했지만, 바람과 달리 아들이 미술에 눈을 뜨자 크게 분노하였다. 아버지는 후원자들의 비위나 맞추며 살아갈, 기껏해야 손재주 좋은 장인으로 살아가길 원하는 아들을 매질을 해가며 막아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자식 이기는 장사 없다고, 아버지는 결국 아들의 손을 이끌고 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잘 나가는 화가이자 금세공업자였던 기를란다요의 공방으로 찾아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아들이 훗날 후원자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후원자들과 맞장을 뜰 정도의 위대한 미술가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과 나머지 두 아들이 벌여놓은 이런저런 사고들을 미켈란젤로가 피땀 흘려 번 돈으로 열심히 막아 주리라는 것도. 열세 살 무렵부터 기를란다요의 공방에서 그림을 배운 그는 금세 스승도 질투할 만큼 그 실력이 일취월장했고, 먼 훗날 그 스스로 밝혔듯이 “거기서 나는 아무것도 배운 게 없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1년 만에 공방을 떠나게 된다.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의 실세인 메디치 가문이 산마르코 성당 정원에 세운 조각학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로렌초 메디치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으며 조각에 전념할 수 있었다. 당시 피렌체뿐 아니라 각 도시 공국 그리고 교황청의 지도자들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를 전범으로 삼는 고전주의에 크게 경도되어 있었고, 앞 다투어 고전 조각이나 유물, 문헌 들을 수집하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자연스럽게 메디치 가문이 모아놓은 고전 조각들의 아름다움에 크게 고무되었다. 미켈란젤로는 볼로냐, 시에나 등에서도 활동했지만 주 무대는 단연코 피렌체와 로마였다. 스물다섯 남짓한 나이에 로마에서 〈피에타〉를 완성하면서 세간의 환호성을 자아낸 그는 피렌체로 돌아와 40년 동안 방치되었던 골칫덩어리 대리석으로 4미터 높이의 〈다비드 상〉을 만들어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았다. 로마의 교황 율리오 2세는 그를 불러 자신이 죽어 묻힐 공간, 즉 영묘 장식을 주문했다. 조각가로서의 자부심에 불타던 미켈란젤로는 의욕적으로 제작에 착수했다. 그해 1505년 4월, 서른 살의 미켈란젤로는 카라라에 여덟 달 동안 머물면서 대리석을 캐서 로마로 돌아왔다. 그는 40여 점 이상의 영묘 조각과 청동 부조들로 교황의 무덤을 꾸밀 예정이었으나 교황은 제때 제작비를 지불하지 않았고, 미켈란젤로가 평생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브라만테와 함께 성 베드로 성당 재건축에만 열을 올릴 뿐이었다.
미켈란젤로는 교황이 영묘 조각에서 관심이 멀어진 이유가 브라만테의 꼬드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교황의 변심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심지어 브라만테 일당이 자신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그는 로마를 떠나버린다. 하지만 교황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율리오 2세는 미켈란젤로가 훗날 표현했듯이 ‘목에 줄이 감긴 채 용서를 빌 것을 강요’하면서 그를 다시 불러들였는데, 오죽하면 당시 피렌체의 지도자 피에르 소데리니(Pier Soderini, 1450~1522)에게 그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피렌체를 침공하겠다는 엄포까지 할 정도였다. 결국 미켈란젤로는 마침 볼로냐를 방문 중인 율리오 2세를 찾아가 고개를 조아려야 했고, 볼로냐에서 교황의 동상을 제작했다. 안타깝게도 이 동상은 훗날 볼로냐를 침공한 프랑스의 루이 12세가 대포알을 만들기 위해 파괴해버렸다. 이후 교황은 미켈란젤로를 로마로 불러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장식을 명령했다. 평소 화가이기보다 조각가로 불리길 원했던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의식해 “만약 회화가 조각보다 고귀하다고 쓴 사람이 다른 사물도 그 정도 수준에서 이해한다면, 그는 우리 집 하녀만도 못하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한사코 천장화 작업을 맡지 않으려 했다. 심지어 라파엘로에게 이 일을 맡기는 게 어떻겠냐고 슬쩍 발을 빼기도 했지만 교황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이 고집스러운 주문이 자신을 시기한 라이벌 브라만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대형 프레스코화 제작에 경험과 관심이 적은 자신으로 하여금 이 일을 기어이 맡게 해서 실패를 유도하려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브라만테에 대한 분노 탓에 미켈란젤로는 붓을 들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는 한 시대에, 한꺼번에 너무 많은 천재들이 태어난 르네상스 시대 미술가들의 경쟁심이 완성한 것이다.
그가 교황으로부터 주문받은 그림의 내용은 천지창조. 문제는 미켈란젤로가 노아에 관한 이야기 세 점을 완성하고 나서 벌어졌다. 교황이 약속한 월급을 제때 주지 않자 미켈란젤로는 붓을 던지고 로마를 떠나버린 것이다. 교황의 명을 어기고 떠난 미켈란젤로의 소식을 듣고 화가 난 교황은 대체 얼마나 대단한 그림을 그렸는지 보기나 하자고 성당으로 들어와 천막을 들췄다. 그리고 그 그림 앞에 교황은 무릎을 꿇고 만다. 평평한 조각이 마치 조각을 한 듯 입체감이 느껴지고 그림 속 주인공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색채는 화려한 가운데 위엄을 잃지 않았으며, 내용이 전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성서 속 글자로만 있던 천지창조가 화면으로 구성되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교황은 그림 앞에 무릎을 꿇고 당장 미켈란젤로를 불러오라 명령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교황의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그 미안하단 말을 듣기까지 6개월, 미켈란젤로는 다시 로마로 돌아와 천장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시스티나 성당으로 다시 돌아온 미켈란젤로는 처음으로 예배당 바닥에서 자신의 그림을 올려다보게 되는데 여기서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자신이 그림을 그릴 땐 사람들의 표정, 손짓 하나, 나뭇잎 하나 세세하게 표현을 했는데 밑에서 보니 그 모든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천장화는 세밀한 작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부분을 얼마만큼 강조할 것인가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이후에는 내용의 중심에만 초점을 맞춰 그리게 되는데 천지창조 내용 초반부로 올수록 그림이 간단해 보이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던 것이다.
천장벽화를 완성한 후 피렌체로 돌아온 미켈란젤로는 이런저런 대작들을 완성하던 중 다시 로마로 불려가 시스티나 성당 제단 정면에 결국 그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역작 〈최후의 심판〉을 완성했다. 그로부터 약 23년 동안 그는 브라만테를 이어 라파엘로까지 손을 댄 성 베드로 성당 재건축에 동원되어 돔 설계를 완성했고, 건축가로서도 그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는 기량을 과시했다. 그는 1564년에 89세의 나이로 로마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론다니니 피에타〉를 미완으로 남긴 채 생을 마감했다.
*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화, 천지창조: 제작 기간은 1508년부터 1512년까지 만 4년 6월이 걸렸으며, 그의 나이 30대 시기에 완성하였다. 중간에 교황 율리오 2세가 경비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아 14개월 동안 작업이 중단되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이 짧은 작업 기간은 실로 경이로울 정도다. 라파엘로가 수많은 조수를 기용하여 거의 협업에 가까운 작업을 했다면 미켈란젤로의 조수들은 그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조수’의 역할만 했을 뿐, 극히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을 미켈란젤로 혼자 힘으로 그렸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가로 14미터, 세로 41미터의 공간에, 그것도 바닥이나 벽도 아닌 천장에 무려 343명에 달하는 인간군상과 배경을, 대충이 아니라 ‘완벽하게’ 그려 넣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다.
작업이 유화가 아닌 프레스코화라는 점도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을 입증한다. 프레스코는 벽면에 회반죽을 바른 뒤에 그것이 마르기 전에 안료를 입혀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빨리 그림을 그려야 하고 수정이 필요한 경우 그 부분을 죄다 뜯어내야 한다. 따라서 가능한 한 빨리 정확하게 그려야 하는, 굉장한 기술이 필요하다. 게다가 미켈란젤로는 그 이전까지 제대로 된 프레스코화 작업을 해본 적도 없었다. 그는 약 18미터 높이의 비계를 만든 뒤 그 위에서 작업했다. 좁은 공간에서 고개를 뒤로 젖히고 그림을 그리느라 나중에는 고개를 앞으로 숙일 수도 없을 지경에 이르렀고, 시력 저하에 욕창을 비롯한 온갖 후유증을 다 앓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은 미켈란젤로가 78세 되던 해에 그의 전기 《미켈란젤로의 생애》(1553)를 발간한 제자 화가이자 작가인 아스카니오 콘디비나 미켈란젤로를 광적으로 숭배하던 바사리가 만들어낸 다소 과장이 섞인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는 그림 실력은 둘째 치고 체력적으로도 인간 승리임에 틀림없다. 실제로 그는 작업을 하는 동안 가족이나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자주 자신이 ‘이제껏 겪은 것 중에 가장 심한’ 육체적 피로에 시달린다고 고백하곤 했다. 미켈란젤로는 원래 천장과 벽이 연결되는 부분에 12사도의 모습을 담고, 중앙은 적당한 장식을 그려 마감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교황에게 바뀐 구상을 전했다. 율리오 2세는 흔쾌히 이 천재의 변덕을 이해했고, 이번엔 “네 마음대로 하는 주문”을 했노라 공언했다. 미켈란젤로는 출입문 쪽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따라서 《창세기》의 연대 상으로 보면 오히려 뒷부분에 해당하는 일곱 번째 그림부터 그린 셈이다. 첫 작업은 〈대홍수〉였다. 이어 〈노아의 제사〉와 〈만취한 노아〉, 그리고 〈아담과 이브의 유혹과 추방〉, 〈이브의 창조〉를 완성한 뒤 교황이 월급을 지급하지 않자 6개월 동안 로마를 떠나 제작을 중단한 그는 1511년에 한 차례 작업 상황을 공개한 뒤 〈아담의 창조〉부터 작업을 재개했다. 아마도 미켈란젤로는 아담과 이브에 관한 중앙 부분을 그리면서부터 어차피 바닥에서 세부적인 그림까지 세세하게 볼 수 없는 점을 감안해 인물의 크기를 확대했고, 상대적으로 등장인물의 수도 가급적 줄여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어 1512년 그는 〈땅과 물을 가르심〉, 〈식물의 창조, 해와 달의 창조〉, 〈빛과 어둠을 가르심〉까지 차례로 완성하였다. 스스로 조각가임을 주장했던 그는 처음엔 실력 있는 베테랑 화가도 덤비기 힘든 프레스코화 작업이 상당히 부담스러웠겠지만, 날이 갈수록 작업 속도는 빨라졌고, 질적인 면에서도 흠잡을 바 없는 완벽을 보여주었다.
* 성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 최후의 심판(The Last Judgment): 미켈란젤로가 61세 나이에 시작하여 5년에 걸쳐 완성한, 예수의 재림과 끝을 그린 프레스코(1536-1541) 벽화.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의뢰를 받아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완성하고 20여 년이 지난 뒤 같은 예배당의 벽에 그린 프레스코화이다. 천장화와 달리 〈최후의 심판〉은 매우 음울하고 비극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분노에 찬 그리스도 앞에서 죄를 빌고 있는 인물들의 고통스럽고 공포에 떠는 모습은 작가 자신이 최후의 날을 예감한 듯하다. 그리스도의 아래쪽에 그려진 수염을 가진 노인은 순교자 바르톨로메오로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얼굴 가죽은 미켈란젤로 자신의 초상이라고 한다. 말년에 점점 종교에 귀의하며 자신의 지상의 과업이 한낱 무가치한 것임을 자책했던 미켈란젤로는 여기서부터 그러한 고백을 시작하고 있는 것 같다. 로마 바티칸 시스티나 예배당에 소장되어 있다.
* 성 베드로 대성당(Basilica Vaticana): 바티칸 시국 남동쪽에 있는 대성당을 말한다. 성지 가운데 하나이자 기독교 세계의 모든 교회 가운데 가장 거대한 교회로 유일무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개신교를 제외한 기독교의 전승에 따르면, 서기 67년에 순교한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자 로마의 초대 주교, 즉 교황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대성당을 건립했다고 한다. 성 베드로의 시신이 대성당의 제대 아래에 묻혀 있는 까닭에 옛날부터 교황이 선종하면 그 시신을 제대 아래에 안치해오고 있다. 대성당은 4세기 이래 이 장소에 있었다. 대성당의 건설은 1506년 4월 18일에 시작되어 1626년에 완료되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그 종교성과 역사성, 예술성 때문에 세계적인 순례 장소로 유명하다. 르네상스부터 바로크에 이르기까지 미켈란젤로를 포함하여 수많은 예술계의 거장들이 주임 건축가 직책을 계승하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지은 건축 작품으로서 당대의 가장 거대한 건물로 여겨진다. 로마의 모든 초창기 성당들처럼 성 베드로 대성당 역시 입구가 동쪽에 있으며 후진(後陣)은 서쪽 끝에 있다.
* 피에타 상: '피에타(Pietà)'는 이탈리아어로 슬픔, 비탄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의 죽음을 맞은 성모 마리아의 슬픔을 뜻하며, 기독교 예술을 대표하는 주제 중의 하나이다. 주로 성모 마리아가 부활하기 전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안고 비통에 잠긴 모습을 묘사한 예술 작품으로 나타난다. 성모 마리아의 양편에 사도 요한과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다른 인물들이 묘사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성모 마리아와 예수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미켈란젤로는 북유럽 양식에서 영향을 받아 성모의 무릎 위에 그리스도의 몸을 가로로 늘어뜨렸으며 피라미드식 구도와 상세한 인물묘사를 통해 장엄함과 고통, 위대한 순종 등을 동시에 나타냈다. 미켈란젤로는 20대의 나이로 피에타를 조각했는데, 대리석 안에 들어있는 형상을 끌로 찾아냈을 뿐이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성 베드로 광장: 바티칸의 가장 큰 자랑거리 중의 하나는 성 베드로 성당 앞의 광장이다. 이 광장은 알렉산드로7세 재위 시(1665~1667)에 베르니니가 1667년까지 12년의 공사 기간 동안 완성한 것이다. 이 광장은 우선 완만하게 경사가 지도록 했는데 그 이유는 성당 앞에서 거행되는 여러 종교 의식을 잘 보이게 함과 미켈란젤로의 돔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전체적으로 팔을 벌려 모든 신도를 감싸 안는 모양을 지니고 있다. 가장 넓은 곳의 크기는 240×340m이고 양 좌우에 15m 높이의 기둥이 총 284개가 들어서 있다. 그 위에는 베르니니의 제자들이 만든 높이 3.2m 크기의 성인상이 140개가 있다. 또한 가운데에는 오벨리스크가 있는데 이 오벨리스크는 원래 네로 전차 경기장에 있던 것으로 1585년에 도메니코 폰타나가 이곳으로 옮겨왔다. 이 오벨리스크는 전형적인 해시계 역할을 하기 때문에 아직도 광장 바닥에는 시간을 나타내는 표시가 있다. 분수가 두 개 있는데 광장 입구에서 성당을 바라보았을 때 오른쪽에 있는 분수는 마데르노에 의해 1613년에 제작되었고 왼쪽의 분수는 베르니니에 의해 1675년에 제작되었다. 이 광장을 만든 베르니니는 미켈란젤로가 만든 캄피돌리오 언덕에서 모형을 가져왔다. 바티칸 대성당에서 천사의 성으로 바로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길은 1950년에 만들어졌다. 바로 화해의 길(Via della Conciliazione)이다. 그리고 광장을 돔에서 바라보면 광장 바닥에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줄이 나 있는데 이유는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계산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매우 치밀하게 만들었다. 대략 이 광장에 최대 30만 명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바티칸 관람을 마치고 국경선(?)을 통과하여 가까운 곳에 위치한 중화요리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세계 최대 인구를 가진 나라답게 중국인은 어디를 가나 거주하는 것 같다. 로마에서 먹는 중화요리도 푸짐하고 맛있게 느껴진다. 점심식사 후 우리 일행은 본격적으로 로마 구도심 관광을 하게 되었다. 선택 관광이긴 하지만 우리 일행은 모두가 참여하게 되었다. 우선 6명씩 조 편성을 하여 벤츠 승용차(SUV 차량) 5대 정도를 이용하여 도심 투어를 시작하였다. 우리 가족은 운 좋게 1호차를 타고 달리게 되었다. 고대 로마의 유적지 6곳을 둘러보게 되는데 그 코스는 다음과 같다.
❶ 치르코 마시모(Circo Massimo): 로마시민들은 이곳 경기장에서 도박을 즐겼다고 하니, 요즘으로 말하면 경마경기에 돈을 거는 것과 비슷하다하겠다. 그 화려했던 시절의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금은 볼 품이 없다.
*치르코 마시모는 고대로마의 마차 경기장으로 영화 ‘벤허’에 나오는 장소. 길이가 약 700m에 가까운 거대한 운동장으로 지금은 주로 집회 장소로 많이 이용된다. 2006년 이탈리아가 월드컵에서 우승했을 때 우리나라의 서울 시청과 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밤새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기도 하였다. 치르코 마시모에서는 수많은 유적들이 발굴되었는데 특히 현재는 로마 시내 여러 곳에 산재해 있는 오벨리스크들이 발견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기원전 7세기에 만들어졌으며 25만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말 이 치르코 마시모가 유명한 이유는 이곳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죽고 아피아 가도를 따라 있는 카타콤베에 시신이 묻혔다. 지금은 한적한 풀밭으로 남아 앉아서 쉬어 가기에 적당한 곳이다.
고대로마시대에 경마경기가 열렸던 곳
❷ 포로 로마노(Foro Romano): 폐허에 가까울 정도로 훼손이 많이 되어있는 유적지인데, 당시 로마의 심장부와 같은 곳이다. 복원하지 않고 무너진 그대로 보존하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문화재 정책이 돋보인다.
*공공장소라는 뜻을 갖는 포로(Foro)는 포럼(Forum)이라는 단어와 연결된다. 팔라티노 언덕과 연결되어 있는 포로 로마노는 고대 로마 시대의 민주 정치와 상업, 법률의 중심지였다. 포로 로마노는 여러 황제를 거쳐 오면서 발전했지만, 5세기경 로마가 분열되고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이곳 대부분의 건물들이 훼손되었다. 하지만 여러 시대를 거쳐 온 다양한 시대의 흔적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얼핏 보면 폐허와 같은 모습이지만 지금까지도 발굴 작업과 복원 작업이 계속되고 있고, 예전의 번성했던 로마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장소로서는 최고가 아닐까 싶다.
로마시내에 남아있는 고대로마의 유적, 포로 로마나
❸ 판테온 신전: 도움(Dome) 형식 건축물의 원형을 보여주는 건물인 것 같다.우선 그 규모에 압도가 되는데 가운데 기둥도 없이 지탱하는 건축물의 비법이 놀랍기만 하다.
*‘신(神)’을 그리스어로 theos라고 한다. ‘판테온’은 Pan(모든)+theos(신)+on(건물, 장소를 나타내는 그리스식 접미사), 즉 ‘모든 신(神)들에게 바쳐진 신전’, ‘범신전’이란 뜻이다. 판테온은 지금도 원래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고대 로마의 건축물이다. 그리고 판테온은 현재 성당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고대 로마의 건축물 가운데 원래의 기능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건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물론 경배의 대상이 ‘모든 신’에서 ‘유일신’으로 바뀌었지만. 판테온은 역사적인 인물의 묘소로도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초대 왕을 비롯해 1520년 37세의 나이로 요절한 르네상스 천재 예술가 라파엘로의 묘소도 있다. 판테온의 정면 윗부분에는 라틴어로 “M.AGRIPPA.L.COS. TERTIUM FECIT”이라고 쓰여 있다. ‘세 번째(TERTIUM) 집정관(COS=CONSUL) 루키우스의 아들(L) 마르쿠스 아그리파(M. AGRIPPA)가 했다(FECIT)’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이는 아그리파가 집정관을 세 번째 지낼 때인 기원전 25년에 세웠다는 의미이다.
판테온은 원래 기원전 27년에서 25년 사이에 아그리파가 자신이 세운 공공목욕장 바로 옆에 ‘복수의 유피테르(Jupiter Ultor)’ 신에게 바치기 위해 세웠는데, 실제로는 아우구스투스에게 지어 바친 것이다. 이 신전은 당시 로마 시민들이 국가에 대한 긍지를 갖게 하기 위해 지은 상징적인 건축물로, 이곳에는 유피테르 신상을 비롯해 다른 여러 신들의 석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율리아 씨족의 수호신인 일곱 개 행성의 신들이 있었는데, 전쟁의 신 마르스와 베누스 신상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조상신인임을 돋보이게 했다.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의 석상도 이곳에 안치할 계획이었으나 아우구스투스의 단호한 반대로 포기했다고 한다. 아그리파가 세운 판테온은 여러 번의 화재로 전소되어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복원했지만, 서기 110년경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판테온을 아예 완전히 새로 지었다. 하드리아누스는 로마제국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다른 민족의 문화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으며, 건축에 매우 조예가 깊은 황제였다. 판테온을 황제 자신이 직접 설계했는지 아니면 다른 건축가가 설계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든 그의 입김이 세었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런데 하드리아누스는 판테온을 본래 아그리파가 세웠다는 사실을 청동 글씨로 판테온 입구 윗부분에다가 그대로 붙이게 했다. 반면 건축가로서의 능력을 자만하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자신의 이름을 어디에도 새겨 넣지 않았기 때문에 판테온의 건축가 또는 판테온을 세운 건축주로서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이름은 2000년 동안 완전히 잊혔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판테온을 완전히 다른 형태의 건축으로 복원했다. 아그리파가 세웠던 판테온은 원통형이 아닌 직사각형 평면의 신전으로 여겨지며, 입구는 현재와 달리 남쪽을 향해 있었다고 한다.
도움(Dome) 형식의 건축물의 원형을 보여주는 판테온 신전의 외관
❹ 트레비 분수(Fontana di Trevi) : 뜨거운 여름날 도심의 분수는 여행객의 심신을 시원하게 해준다. 화려한 대리석으로 빚은 조형물에 물을 품어 올리는 트레비 분수는 로마의 명물이 아닐 수 없다. 로마는 곳곳에 분수가 설치되어 있는데 미관상 또는 도시의 열기를 식혀주는 실용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트레비 분수에는 관광객들로 넘쳐나고 주변 상가에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즐비하다. 우리 일행도 가게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먹으며 더위를 식혔다.
*고대의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명한 ‘처녀의 샘(Aqua Virgina)’으로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들에게 물을 준 한 처녀의 전설을 분수로 만든 것이다. 분수의 정면 오른쪽 위에 이런 일화를 담은 조각품이 있다. 고대 로마 시대는 풍부한 수원과 총 14개의 거대한 수도망이 있었고 로마 전역에 물을 공급했지만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많은 이민족들이 침입하면서 이 수로망을 파괴했다. 그로 인해 물 부족 현상이 발생했다. 이런 물 부족은 15세기 이후에 들어서면서 새로이 로마를 재정비하려던 교황들이 여러 수도교와 분수를 만들면서 해소되었다. 그중에 제일 유명한 것이 바로 이 트레비 분수이다. 평범했던 이 분수는 1732년 교황 클레멘스13세가 니콜라 살비(Nicola Salvi)에게 명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트레비 분수의 아름다움은 바로크 양식의 마지막 최고 걸작품이라고도 한다.
트레비 분수의 중앙에 있는 근엄한 모양의 부조물은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이며, 양쪽에 말을 잡고 있는 두 명의 신은 포세이돈의 아들인 트리톤이다. 종종 테베레 강이 범람해서 이곳까지 물에 잠길 때가 많자 바다의 신을 만들어 이를 막고자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분수 왼쪽에 날뛰는 말은 풍랑을 상징하고, 오른쪽의 말은 고요한 물을 상징한다. 건물 제일 위를 보면 라틴어로 ‘CLEMENS VII’라고 클레멘스의 이름이 적혀 있고, 그 아래에 AQVAM VIRGINEM이라고 적혀 있는데 ‘처녀의 샘분수’라는 것을 명명하고 있다. 양쪽에 있는 4개의 여인 조각상은 4계절을 상징한다.
로마시내에 있는 트레비 분수
❺스페인 광장(Piazzadi Spagna):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배경으로 여주인공 오드리 햅번이 아이스크림을 먹는 장면이 연상된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보수공사로 인해 계단으로 올라갈 수 없어 그냥 스페인 광장에서만 주변을 감상하였다.
*17세기에 이 광장 주변에 스페인 대사관이 자리를 잡음으로써 현재의 이름이 붙게 되었다. 전반적인 양식은 화려한 로코코(Rococo) 양식이다. 이 스페인 광장과 계단은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오드리 햅번’이 걸어 내려왔던 곳으로 이 영화 이후부터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졌다. 그러나 원래부터 이 광장은 수많은 세계적 예술가들이 쉬어 가던 곳이었는데 괴테, 발자크, 키츠, 셸리, 바그너 등이 즐겨찾던 곳이기도 했다. 스페인 계단 정면으로 나 있는 콘도티 거리에는 세계의 명품 브랜드숍들이 가득 차 있어 보는 이들을 한껏 매료시킨다. 특별히 쇼핑을 하지 않더라도 눈이 즐거운 곳이다.
로마시내에 위치한 '스페인광장'의 모습
❻콜로세움(Colosseum)과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콜로세움은 대경기장이라는 뜻이라고 하며, 약 5만명 정도가 입장할 수 있다고 한다. 지금은 많이 파괴되어 원형을 볼 수 없다. 가까운 곳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위한 개선문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를 모방하여 나폴레옹 개선문도 파리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플라비아누스 황제 때 세워진 것으로 원래는 플라비아누스 원형경기장이라고 불렸다. 70~72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 공사를 시작해 80년 티투스 황제 때 100일간의 경기가 포함된 제전을 위해 공식적으로 헌정되었다. 82년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최상층을 덧붙여 공사를 완성했다. 여분의 떠받치는 힘을 더하기 위해 적당한 언덕을 파서 세운 이전의 원형경기장과는 달리 콜로세움은 돌과 콘크리트로 세운 완전한 독립구조물로서 가로, 세로가 각각 190m, 155m에 이르며 5만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이 경기장에서 수천 회에 걸친 검투사 시합과, 맹수들과 인간의 싸움, 모의 해전 같은 대규모 전투장면이 실연되었다. 중세 때에는 낙뢰와 지진으로 손상되었으며 반달족에 의해 더욱 심하게 파손되었다. 대리석으로 만들었던 좌석과 장식물들은 남아 있지 않다.
로마의 상징인 콜롯세움(원형 경기장)
로마(Roma)라는 단어를 거꾸로 읽으면 기묘하게도 사랑(Amor)이라는 단어가 된다. 로마를 알면 알수록 사랑하게 될 것 같다. 로마 시내구경을 마치고 우리는 콜로세움 근처에서 전세버스에 승차하였다. 가면서 로마의 옛 성벽도 볼 수 있었는데 도시 방어를 위한 시설인 것 같다. 로마 시내에는 다른 유럽의 도시들처럼 작은 크기의 경차가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좁은 도로를 감안한 현명한 선택일 것 같다. 우리나라 같으면 건물을 허물고 도로를 넓히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곳에서는 도시의 원형을 가급적 지키려고 하는 것 같다. 로마 시내에는 다른 도시처럼 전봇대가 보이질 않고 모든 상업용 간판은 건물의 1층에만 허용하고 있으니 도시경관이 무척이나 깔끔해 보인다. 도로의 바닥재로는 화산암 블록을 깔았는데, 반질반질한 모습에 궁금하여 알아보니 300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한다. 우리나라처럼 아스팔트를 깔게 되면 여름의 뜨거운 열기에 녹아내릴 수 있어 석재(石材)를 사용한다고 한다.
로마시내를 내려다본 모습. 고대로마의 모습이 연상되며 하나의 커다란 박물관같은 느낌이 든다.
로마의 지도를 살펴보니 도시를 관통하며 이탈리아의 서해로 흐르는 테베라 강이 있는데, 뱀처럼 구불구불 흐르는 이른바 사행천(蛇行川)이다. 유럽의 주요 도시마다 큰 강이 있지만 모두가 자연하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처럼 직강화 공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놀랍게 느껴진다. 자연을 최대한 원형대로 유지하면서 인간과 조화를 이루고 살아가려는 유럽인들의 의식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오늘 일정은 오후 5시에 끝내고 우리는 숙소인 피우지로 향한다. 오늘 하루도 엄청난 볼거리를 경험하게 되어 뿌듯한 느낌이다. 저녁식사로는 현지 식(食)으로 미트볼과 파스타를 먹게 되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