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의 시위 사태를 폭도들의 난동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란 국민들은 자기의 주권이 침해되었다고 시위를 하고 있다 외국 언론은 그를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다.
이란 국민들도 처음에는 이렇게 큰 시위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군의 발포로 바로 옆의 시민들이 죽고 무차별 탄압으로 분노를 일으키게되었다.
5.18광주 민주화 운동의 계획된 현실상황은 박현채 교수의 ‘신군부 사전계획설’이다. ‘박정희 체제의 후계를 노리는 신군부가 경제력에서 약하고 역사적 투쟁에서 싸움의 좌절과 좌절 속에서 처절함에 익숙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좌절 속에서 체념을 배운 전남에서 집권에 필요한 신군부의 힘을 국민들에게 보여주고자 선택했다’는 것이다.
광주에서의 시민들의 분노는 탄압자제의 요구를 묵살하고 사살과 무차별 살상에 의한 광주시민들의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그 누구도 옆의 자기와 친한 사람이 죽어가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이 있겠는가?
민주화운동의 5.18이 왜 왜곡되고 광주지역의 시민 이외에는 그 내용을 잘 몰랐었는가 다음의 글을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반민주적 언론 검열과 자유언론운동
5∙17 군사쿠데타는 일반 국민들의 민주화 염원은 물론 진실을 알리려는 언론계의 민주
화 움직임도 무자비하게 유린해버린 폭거였다. 군부세력이 1980년5월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반민주적 언론검열에 맞서 검열 거부를 선언한 언론
인들을 연행하여 구속하는 폭력을 자행했기 때문이다. 이 폭력은‘언론대학살’을 벌였고,
이로부터 일반 국민들을 여론 조작 대상으로 여기는‘제도언론의 암흑기’가 시작됐다.
1964년 8월 발족한 한국기자협회가 1980년 4월 1일 새롭게 구성되고, 그달부터 언론
계에서는 언론자유실천결의를 다지는 움직임들이 전개됐다.‘10∙26사태’로 계엄령이 선
포된 이후 시작된 언론 검열에서 군계엄당국의 반 민주적 횡포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
었기 때문이다. 군계엄당국이 기사로 다루지 말라는 검열지침 중에서 상식적으로도 도저
히 납득이 가지 않는 지침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5월16일의 계엄사 검열지침이었던“학생구호 중‘김일성은 오판 말라’, ‘반공전선 이
상없다’등은 불가”, “일부 시위학생들의 교통정리, 불가”등에서 보듯이 군부집단의 불
순한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민주화를 염원하는 시위 때문에 사회 혼란이 조성되
고, 안보가 불안해지는 것처럼 여론을 조작해 사회 안정을 명분으로 내걸고 군사쿠데타
를 자행하려는 징조가 이미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 검열지침이 5공정
권에서 여론 조작을 위한 언론지침의 극치를 보여줘 국내외에 충격을 준『보도지침』의
‘원조’가 됐다는 사실이다.
언론계에서는 사회 질서유지는커녕 오히려 정반대로 사회 불안심리를 조장하는 계엄
당국의 언론 검열을 거부해야 한다는 움직임들이 나타났다. 4월 초 김영진 외신부 기자
를 기자협회 분회장으로 직선한 동양통신 기자들은 군 검열관의 검열지침을 무시하고 기
사를 내보냈다. 이로 인해 조홍래 외신 1부장이 합동수사본부에 연행됐으며, 동양통신 분
회는 계엄당국의 언론 간섭에 강력하게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4월17일오전9시동
아일보 편집국에서 열린 신문∙방송∙출판 등의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기자총회는 <자유언
론을 위한 선언문>을 통해 검열∙사찰∙압력∙간섭의 거부, 곡필아세 경계, 부당한 제재조
치에 대한 공동대처 등을 결의했다.
현대경제일보에서는 수습8기생 기자들이 5월 6일 대자보를 통해 진정한 언론인상과
양심적이고 용기 있는 기자정신의 회복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를 계기로 기자협회 현대
경제는 5월 12일 기자 총회를 열고 언론자유를 위한 적극적인 투쟁을 다짐했다. 이들은
사실보도∙기관원 출입금지∙계엄사의 검열 철폐∙1975년 해직된 동아∙조선 기자들의 복직 등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중앙일보는 5월7일‘사북사태’취재 중 계엄사 요원들에게 집단구타당한‘탁경명 기자 사건’기사를 빼라는 언론검열단의 요구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이 기사 부분을 백지상태로 두고 신문을 제작하면서 2백여 명의 기자와 PD들이‘자유언론실천대회’를 가졌다. 전남매일신문에서는 5월 12일 박화강, 손정연, 윤유석, 유제철 기자 등이 편집국에서 중역들의 위협적인 만류에도 불구하고 <언론인으로서 의 자성과 새로운 다짐>을 통해 자유언론실천 등 4개항을 결의했다. 문화방송은 5월 12일과 13일 보도국 총회를 갖고, 계엄령의 즉각 철폐, 언론검열 전면 거부, 언론자유 가로 막는 내부요소 제거, 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결성, 1975년 해직언론인의 원상회복 등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러한 언론자유수호의 진정한 실천과 투쟁을 위해서는 이 의지가 국민에게 공개되어야 한다는 정상모 기자 등의 발의가 채택돼 5월 14일밤9시 <뉴스의 현장> TV프로를 통해“지금까지 언론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점을 깊이 반성하고 앞으로 민주언론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다”는 내용의 보도가 나갔다. 언론자유 수호 결의가 내부적인 다짐에서 머물지 않고 언론에서 공개적으로 보도된 것은 처음이었다. 마침내 한국기자협회는 5월16일 신문회관 회의실에서 기자협회 회장단, 운영위원, 분회장, 보도자유분과위원회 연석회의를 열고 자유언론 실천대책을 협의한 뒤 언론검열 거부를 결의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 내용은 5월 20일상오0시를 기해 언론검열을 거부하며, 계엄당국이 강압적으로 나올 경우, 전국의 신문, 방송, 통신 기자들은 전면적인 제작 거부에 돌입한다는 것이었다. 계엄당국이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한 것은 언론검열 거부 결의가 나온 다음 날인 5월17일상오0시부터였다.
5∙18광주항쟁과 제작 거부 사태
비상계엄령의 전국확대와 함께 몰아친 5∙17 검거 선풍에서 언론검열 거부에 앞장 선
언론인들이 연행됐다. 이날 밤 기자협회의 부회장단인 이흥기(KBS정치부), 정교용(중앙일보 외신부), 고영재(경향신문 사회부), 이수언(부산일보 정치부), 감사 박정삼(서울경제 취재부), 편집실장 김동선, 편집실 기자 안양로 등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당했으며, 김태홍 회장은 8월27일 전남 강진에서 체포됐다. 노향기 부회장은 피신 42일만에 성북경찰서에 자수했다.
5월 18일 전남대생들이 비상계엄 확대조치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계엄군은 무자비한 진압작전에 나서 학생들을 잔혹하게 살상했다. 이처럼 한국전쟁 이후 가장 처참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음에도 당시 언론은 이를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미국 CBS기자 등이 촬영한 비디오 테이프를 한국의 방송사에 보내줬음에도 이런 내용은 방송되지 않았다. 광주의 한 시민이 문화방송 본사로 전화를 걸어“계엄군이 집까지 들어와 청년들은 물론, 노인들까지 살생하고 있다. 이게 어느 나라 군대냐”며 절규했으나 방송의 침묵은 계속됐다.
광주항쟁 이틀째인 19일 참극의 현장을 직접 목도한 전남매일신문의 일부 기자들은 이날 오후 5시 긴급회의를 가졌다. 이들은 다음날 신문에‘19일의 잔학상’이 보도되지 않을 경우 제작 거부 및 기자직 사퇴를 하기로 결의했다. 이 결의에 따라‘19일의 잔학상’을 기사화한 편집판이 윤전기에 걸렸으나 중역실 간부가 달려와 판을 거꾸로 엎어버렸다.
154 |다큐 6월항쟁판을 다시 짜 2시간 늦게 나온 이날 신문의 보도는‘잔혹한 19일’이아닌‘조용한 19일’이었다. 신문이 발행된 후인 오후 3시께 편집국에서는 전 기자들이 참석한 긴급회의가 소집됐다. ‘조용한 19일’로 왜곡된 신문제작 과정에 대한 항의와 함께‘광주의 실상’을 알리지 못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모든 기자가 사직을 결의했다.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단한줄도싣지못했다. 이에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1980년 5월 20일 전남매일기자 일동)
광주항쟁 4일째인 5월 21일 전남매일신문의 문은 굳게 닫혔다. 자유언론운동에 앞장
섰던 박화강, 손정연, 윤유석, 유제철 기자 등 6명은 진실을 알리기 위한 지하신문을 만들
기로 의견을 모았다. 취재∙편집∙인쇄∙인쇄기 임대∙신문 배포 등 6개조로 나뉘어 이날
저녁 8시께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러나 전 시가지가 총성으로 뒤덮여 모임 자체가 불가
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조차 무산되고 말았다.
광주항쟁에 대한 언론의 침묵 사태를 맞아 광주항쟁의 진실 보도가 보장될 때까지 5월20일
부터 제작을 거부하자는 움직임이 중앙일보와 동아일보 등 각 신문, 방송, 통신사로 퍼져나갔다. 문화방송은 기자협회 분회 관리위원회의 제작 거부 결의에 따라 이날부터 제작 거부에 돌입했다. 이날 제작 거부로 오전 8시 라디오 뉴스 광장의 경우 5~6분밖에 방송을 채우지 못해 나머지 10여 분은 뉴스 대신 클래식 음악으로 나갔다. 밤 9시 TV뉴스 프로도 대폭 단축됐다. 방송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중앙일보와 동양방송, 동아일보, 동아방송 등도 20일부터 제작 거부에 들어갔다. 동양통신이 5월19일 제작 거부를 결의한 데 이어 합동통신도 20일 제작 거부 돌입을 선언하고, 검열을 받기 위해 계엄사 검열단에 나가 있던 기자들을 철수시켜버렸다.
첫댓글 <군부세력이 1980년5월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반민주적 언론검열에 맞서 검열 거부를 선언한 언론
인들을 연행하여 구속하는 폭력을 자행했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검열 거부를 선언한 날자를 물어봐 주세요.
중앙일보와 동양방송, 동아일보, 동아방송 등도 20일부터 제작 거부에 들어갔다. 동양통신이 5월19일 제작 거부를 결의한 데 이어 합동통신도 20일 제작 거부 돌입을 선언하고, 검열을 받기 위해 계엄사 검열단에 나가 있던 기자들을 철수시켜버렸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5월 17일자 포고령에 따르면 언론의 사전 검열은 1980년 5월17일 자정을 기해, 즉 5월 18일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위의 검열거부 선언문은 5월 16일 작성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물어야 할 질문은 5월 15일 유시민 시위대가 시민버스 탈취하여 순경들을 깔아죽인 것을 보도하지 않은 것은 운동권에 불리하였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검열 때문이었는지입니다. 좌빨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저 검열 거부 선언문은 김대중 일당이 작성한 것이고, "한국기자협회 운영위원·분회장·대의원연석회의"는 유령 명의라는 사실을 말해 주어야 합니다. 제가 몇 개의 자료들을 공개했었지만
당시 간첩들이 광주사태 선동할 목적으로 제작한 삐라나 김대중 세력이 붙였던 대자보는 모두 동일한 패턴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결의〉〈행동지침〉혹은 <행동강령>의 패턴이 판에 박은 듯이 동일합니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6_1000.html 에 가보시면 밑에서 세번 째에 <언제까지 눈뜬 봉사처럼 소리 죽이고 참아야 하나/전남대 자유언론투쟁위원회 1980.5.16>가 있습니다. 전민봉기를 위해 운동권이 언론을 장악케 하려는 시도가 그때 진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현재 5.18측에서는 이 자료를 사이트에서 없앴습니다. 그러나 제가 인쇄된 그 문건을 그대로 보관하고 있습니다.
좌빨들에게 저 검열거부 선언문 작성자가 언론이었는지 김대중 일당이었는지 물어보세요. 작성자가 김대중 일당이었으며, 전민봉기 선동 명분을 쌓기 위해 유령 명의를 사용한 것이기에 좌빨들 편에서 몹시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6_1000.html 외에도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6_2000.html 에서 민주투쟁위원회 등의 명의를 조사해 보면 모두 실제로는 유령 명의입니다. 실제로 그토록 무수한 단체들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간첩들과 김대중 일당이 작성하고 유령 명의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동아일보 등이 제작거부에 들어갔다고 했는데, 광주사태 당시 신문들을 제가 캡쳐해서 보관하고 있어요. 사이트에도 몇 개 올려놓았습니다. 동아일보 광주 주재 김영택 기자는 보도할 것 다 했습니다. 김영택 기자는 시민군 편 기자였는데 도대체 무슨 제작 거부가? 오히려 검열은 시민군 편에서 했습니다. 기자 카메라를 빼앗아서 폭도들에게 불리한 사진 있으면 카메라와 필름을 시민군이 통째로 압수했습니다. 시민군이 그토록 심하게 검열했다는 사실은 시민군 대장 박남선씨의 증언록에도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언론의 자유가 기자들 카메라와 필름을 통째로 빼앗는 것인지 좌빨들에게 물어야지요.
<유신잔재 청산> <유신잔재 및 그 세력을 일소하기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것을 다짐한다.> 등의 표현이 는 것 언론인이 쓴 것이 아니라, 김대중 일당이 쓴 것이었습니다. 김대중 일당의 전민봉기 선동 논리가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는 유신잔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표현은 김대중 일당들만 쓰던 표현이었지 언론인들이 쓰는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유신잔재 청산>이란 말은 5월 22일을 기해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전복시키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좌빨들에게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전복시키겠다는 의미의 이 선언을 어디서 누가 했느냐고 물어 보세요. 그냥 김대중 일당이 장구치고 북치고 혼자 다 한 거였어요.
5.18측이 인터넷에서 없앤 자료들도 있지만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6_1083.html 에서 북치고 위의 검열 거부 선언문에서 장구친 것입니다. 실제 작성인은 동일인이었으니 혼자 북치고 장구친 것입니다.
<5월16일의 계엄사 검열지침이었던“학생구호 중‘김일성은 오판 말라’, ‘반공전선 이상없다’등은 불가”> 이거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도대체 '김일성은 오판 말라’라는 시위 구호가 5월 16일 혹은 그 이전에 등장한 적이 있는지 물어보시면 됩니다.
<4월17일오전9시 동아일보 편집국에서 열린 신문?방송?출판 등의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기자총회는 <자유언
론을 위한 선언문>을 통해 검열?사찰?압력?간섭의 거부> 이 선언문 수신자가 전두환이었느냐고 물어봐 주세요. 물론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1980년 4월의 시국에 대해 설명드려야 하겠습니다. 계엄령 하에서는 당연히 언론 검열이 있습니다. 계엄 정국이란 군정을 말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것이 불가능한 모순이 있었습니다. 10.26비상계엄은 최규하 권한대행이 선포한 것이기에 최규하 대통령이 계엄 해제를 하지 않는 한 비상계엄은 유지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통치권자의 판단에 따른
권한이었기에 운동권이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운동권이 그것을 부정하면 그 운동권 수가 많은 만큼 최규하 대통령의 지지기반은 허약해지고 맙니다. 그리고 군인들 편에서 비상계엄 하에서는 죽을 고생입니다. 장교들도 몇 달 동안 밤에 잘 때 군화를 벗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4월에 미군과 합동으로 팀 스프리트 훈련이 있었습니다. 팀 스프리트 작전 하나만으로도 갑자기 업무량이 폭주하여 무척 고되었습니다. 여기에 계엄사 업무의 모순점이 군 내부에서 자각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비상계엄 하에서는 당연히 계엄사가 행정, 입법, 사법의 주체가 되어 정치와 경제 정책까지 총지휘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왜 군사전문가들이 비전문적인 분야의 정책을 총괄해야 하는 것인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모순을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5월 중순 경에 최규하 대통령께 국보위 설치를 건의드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보세요. 만약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었으면 미군정 시대처럼 다시 군정 시대가 열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6월에 국보위가 설치되었습니다. 그리고 사회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국보위 위원이 되었으며, 군인들은 군사 분야에서만 위원이 되었습니다. 즉, 각 분야의 일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 손에 맡기자는 제안이었는데, 그 석달 기간의 국보위의 활동은 대단히 성공적이었습니다.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에 석 달 기간의 인수위 활동이 있었는데, 바로 그 모형을 국보위에서 따왔을 만큼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군정을 끝내는 유일한 방법이 국보위였습니다. 최규하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언제까지 지속시킬지 아무도 몰랐고,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통치의 주체가 계엄사령관인지 최규하 대통령인지 잘 모르는 애매모호함이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물 계엄이었습니다. 물 계엄 하에서 무슨 언론 통제가 있었나요? 그리고 5월에 나온 국보위 안도 비상계엄 하에서의 군정을 더욱 축소시키자는 취지였고, 또 당시 비상계엄 해제로 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국보위가 빠르게 사회를 안정시킨
덕에 몇 달 만에 비상계엄 해제가 가능하였으니까요.
여기 나오는군요. <마침내 한국기자협회는 5월16일 신문회관 회의실에서 기자협회 회장단, 운영위원, 분회장, 보도자유분과위원회 연석회의를 열고 자유언론 실천대책을 협의한 뒤 언론검열 거부를 결의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제가 그 시점을 몇번 물어본 이유가 광주사태 도중에 언론거부를 하였다는 것인지, 김대중이 전민봉기를 선동하고 있던 때에 언론 거부를 하였다는 것인지 알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알았으니 분명하게 답변을 드릴 수 있는데요. 자, 그 당시 운동권 언론인들의 성명서를 제가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은 제가 언제고 공개하려던 자료들이었으니까요. 당시 운동권 언론은 최규하 정부를
전복시키려 했습니다. 여기 그들의 성명서들로 제가 그 증거를 제시하겠습니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6_1083.html 에 보시면 그 선동의 시작은 "언론인에게 보내는 메세지"입니다. <10.26사태가 부마민중봉기로 대표되는 민중투쟁의 결과> 이런 표현은 언론인이 사용해서는 아니되는 표현이었습니다. 왜 부마사태를 부마민중봉기라고 부릅니까? 탈북자 5.18증언록에 보면 북한군 특수부대로 구성된 간첩들이 부마에서 민중봉기를 일으킨 과정이 서술되어 있는데요. 언론이 부마사태를 부마민중봉기라고 부를 때 그것은 이미 좌익사관의 주장이지, 객관적 보도가 아닙니다.
<10.26과 그 이후 유신잔당이 서둘러 민주화를 운위하는 것도> 이 말은 최규하 대통령의 민주화 일정을 가리키는 말인데요, 일국의 대통령을 유신잔당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12.12재판 판결을 뒤집혀져야 합니다. 12.12-5.18 재판 판결은 전두환이 유신정권에 반기를 들자 광주 시민들이 유신정권을 수호하려 하였다는 것인데요. 그런데 당시 운동권이 최규하 대통령을 유신잔당이라 부르며 비하했습니다.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이런 표현은 사용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하는 우리들도 대한민국 국민이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최규하 대톨령을 유신잔당으로 비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자 이 성명서가 대학언론인일동 명의로 발표되었는데요. 이것은 명의 도용이었습니다. 실제 작성자는 김대중의 전민봉기 거사 준비를 하던 일당이었습니다. 당시 모든 운동권 성명서들은 김대중 세력이나 간첩들이 작성하였던 것이고, 여러 단체의 명의를 도용하여 발표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명의 도용을 민주 언론으로 이해하지 않지요. 제가 당시 운동권 성명서들은 모두 김대중 일당이 작성하였다는 증거들을 제시하다 시간 여건 때문에 뒤로 미루었는데요. 약간의 자료들이 http://www.bookstore21.net/korean/12-12/document/5-16.htm 과 http://www.bookstore21.net/korean/dajabo/pre-518/5-4.htm
등에 있습니다. 언제고 시간 여건이 될 때 제가 자료들을 공개할 것입니다. 그라고, 좌빨들이 언론통제 운운하면 저에게 크게 걸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김대중의 내란 음모의 증거물들로서 당시 운동권 언론인 섬영서들을 모두 보관하고 있으니까요.
좌빨들에게 이것 좀 물어봐 주시겠어요? 5월 16일 서울에서 유시민 시위대가 시민버스 탈취하여 순경들을 깔아죽인 것, 그리고 5월 19일 광주의 폭도들이 버스로 순경들을 깔아죽인 것 등을 그때 국민들은 모르고 있었는데, 운동권 기자들이 자기네에게 불리하여 신문에 안 실은 것이었는지 아니면 언론 통제 때문에 못 실은 것인지 답변을 해달라고 하세요.
참, 저 위의 언론반 반장 걸재 사진 말인데요. 5월 17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각 장군들에게 반장직을 하나씩 떠맡겼습니다. 그리고 그날 늘어난 계엄사 업무별로 각 장군들이 자기에게 맡겨진 반 문건에 서명했습니다. 이것은 계엄사 상부로부터 하달된 새 임무를 준수하겠다는 표현, 즉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시키는 대로 따르겠다는 표현이었어요. 그간 좌빨들에는 전두환이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다고 사기치는 좌빨들이 있었는데, 그 서명 문건은 전두환은 계엄사 하급 부서 반장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줍니다. 그리고 좌빨들은 전두환이 5.17일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했는데
도대체 무슨 쿠데타가 상급 기관으로부터 하달된 문건에 서명이나 하는 쿠데타인가요? 포고령 각 항은 계엄사에서 정하고 언론반 등 하위기관 기관장은 상부 명령대로 움직입니다. 군인이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쿠데타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