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문동 72현의 유래
‘두문동 72현’으로 불리는 고려수절신(高麗守節臣)에 대한 당대의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조선후기 영조대(英祖代)에 와서야 조선성리학(朝鮮性理學)이 최고조에 이르면서 거론되기 시작하
였고 비밀리 또는 구전으로 전해오던 고려수절신에 대한 기록도 성리학자와 후손들에 의해서 간행
되기 시작하였다. 두문동이라 하면 72현으로 세상 사람들은 알고 있으나 이조 헌종 정미년(1847)
에 간행한 두문동서원지에 보면 120현이라 하였는데 개성부 종봉산 아래 동두문동 48현이 있고,
개성부 만수산 아래 서두문동 72현이 있어서 합봉 120현이라 하였다. 세상에는 서두문동 72현이
元운곡 소장 서첩에서 먼저 발견되어 소문이 세상에 알려졌다 한다.
이성계가 조선왕조(朝鮮王朝)를 개창하자 고려의 조신들은 새 왕조에 출사를 거부하고 두문동에
은거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개풍군지(開豊郡誌)에 따르면 두문동(杜門洞)은 본래 북녘
땅 개풍군의 지명이다.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개성 송악산 서쪽 자락 만수산과 동쪽 보봉산(寶鳳山)
에 각각 두 곳의 두문동이 있었다. 만수산의 西두문동에는 고려의 문신(文臣) 72인이 은둔했고, 보
봉산(寶鳳山)의 東두문동에는 무신(武臣) 48인이 숨어 살며, 고려에 충성을 다짐하고 새 왕조에 출
사를 거부하였다. 이성계가 왕사(王使)를 보내서 마음을 돌리도록 설득하였으나 그들이 거부하자
화가 난 이성계가 왕명으로 동, 서 두문동을 에워싸고 섶을 쌓은 다음 불을 지르며, ‘너희 중에 백
이, 숙제와 같은 사람이 몇명이나 되는지 보자’하였으나 西두문동에 있던 고려의 문신(文臣) 72인
과 東두문동에 있던 무신(武臣) 48인은 불길 속에 안좌하여 모두 다 불에 타 죽고 말았다. 이 참혹
한 화형에 대한 일은 전해질 수가 없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세신정(洗身井, 같이 죽기로 맹세하면
서 몸을 씻었던 우물)이란 것도, 회맹대(會盟臺, 충성을 맹세하던 장소)란 것도 그 당시에 있었던
것인데 모두 두문동 안에 있었다. 1809년(순조 9년)에 당시 72인의 한 사람인 성사제(成思齊)의
후손이 그의 조상에 관한 일을 기록한 두문동실기(杜門洞實記)에는 ‘두문동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
면 광덕산 서쪽 골짜기에 있다. 고려의 문신(文臣) 72인이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지조를 지
키기 위해 이른바 부조현이라는 고개에서 조복을 벗어 던지고 이곳으로 들어가 새 왕조에 출사하
지 않았다. 그러자 조선왕조는 두문동을 포위하고 고려충신들을 불살라 죽였다고 전해진다’는 기
록이 있다.
훗날 성리학의 ‘의리 명분론’이 강화되던 시기인 1751년(영조 27년)에는 고려에 절의를 지킨 두문
동(杜門洞) 충신을 위해 제사를 지내고 두문동비(杜門洞碑)를 세우게 하였다. 영조(英祖)가 1760
년 9월에 후릉(조선 2대 정종과 비 정안 왕후의 능) 참배차 개경(개성) 부근 동남쪽의 부조현(不朝
峴)이라는 고개를 넘을 때의 일이었다. 영조가 지명의 연유에 대해 묻자 신하들이 조선 태조가 즉
위한 직후에 고려의 유신(儒臣)들이 개경 동남쪽 고개에 올라 출사를 거부하고 이 고개에 조회 때
쓰는 관과 조복을 소나무에 걸어놓고 뿔뿔이 흩어지므로 ‘조회하지 않는 재’라는 뜻으로 부조현(不
朝峴)이라고 칭하며, 부조현(不朝峴)을 지나면 두문동(杜門洞)이 있다고 했다. 이에 영조는 그들을
기려 그 해에 부조현비(不朝峴碑)를 세우게 했다. 두문동 72현의 명단이 72명인 것은 1751년(영조
27년)에 두문동 충신을 위해 제사를 지내고 두문동비를 세우게 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두문동 72
현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두문동 72현의 최초 문헌은 고종 9년(1872년)에 나타난다. 두문동 72현
의 한 사람인 기우자(騎牛子) 이행(李荇)의 후손이 편찬한 문집(文集) ‘기우집(騎牛集) 임신본(壬
申本)’이다. 그리고 두문동 72현을 새롭게 꼽은 또 다른 문헌은 1924년에 강호석이 철종 11년
(1860)에 간행된 ‘화해사전(華海師全)’의 명단을 참조해 작성한 ‘전고대방(典故大方)’이란 인물지
(人物誌)다. 물론 두 문헌은 명단에서 큰 차이가 있다. 겹치는 인물이 30명이고, 42명이 서로 다르
게 선정되어 있다. ‘기우집(騎牛集) 임신본(壬申本)’은 정몽주를 중심으로 고려 말 충신들을 포괄
적으로 선정했고, ‘전고대방(典故大方)’은 두문동에 들어갔던 시기를 중심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정사(正史)라고 할 수 있는 규장각충렬록(奎章閣忠烈錄)중 ‘두문동 제선생실기’에 의하면 ‘고려말
충신중 입절사의(立節死義, 마지막까지 절개를 지키고 죽은 사람)한 분들이 많았고 그 나머지는 산
거야처(山居野處)하여 두문병적(杜門屛跡)하였거나, 혹은 벼슬을 주어 불러도 나아가지 않고 스스
로 정절을 지킨 분을 통칭 두문동 72현이라고 하니 대개 그 뜻이 같다고 하여 통칭하였을 뿐이지
반드시 개성 두문동에서 함께 은거하였다는 말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여조충렬록(麗朝忠烈錄) 발
문(跋文)에도 ‘중국으로 들어가 마친 바를 알지 못하고, 먼 땅에 유배되었다가 유환(宥還)되지 못
한 분이라도 두문동에서 동은(同隱)한 제현(諸賢)과 같으니 두문동에서 은거한 분이 그 수사 72인
에 미만(未滿)하여도 통칭 두문동 선생이라고 지금까지 전한다’라고 하였다. 고려숭의회(高麗崇義
會)가 발표한 72현은 무려 3백70여현이고 이미 순절한 충신까지 합하면 4백60여현에 이르고 있
다. 두문동서원지(杜門洞書院誌)와 승국명류표방록(勝國名流漂傍錄)은 그 인원을 1백16인과 1백5
인으로 각각 기록해 놓았다.
‘두문동 72현’이라는 용어의 ‘72현’은 공자의 제자를 지칭하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사기(史記) 공
자세가(孔子世家)에 ‘공자의 제자는 3,000명이었는데 몸소 육예(六藝)에 통달한 제자는 72인이었
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72’라는 숫자는 구체적인 사람의 수를 지칭하기보다는 ‘다수의 현인(賢
人)’을 지칭하는 말로 이해해야 하겠다.
<두문동 72현 관련 기록연보>
1751년 두문동비
1760년 부조현비
1774년 철감록
1783년 개성 성균관에 표절사
1809년 두문동실기 간행
1860년 화해사전
1872년 기우집
1923년 여조충렬록 간행
1924년 전고대방 간행
1934년 두문동서원지
1934년 개성에 두문동서원 창건
1935년 경현사지 간행 등이 이루어졌다.
3. 두문동 서원과 72현
두문동서원은 경기도 개성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에 위치하며 고려말 충신들이 새 왕조에 불복하고 두문동에 들어와서 마을의 동서쪽에 모두 문을 세우고 빗장을 걸어 놓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두문동 72현이 후세에 절의의 표상으로 숭앙되었고 1783년 정조 7년에 왕명으로 개성의 성균관에 표절사를 세워 배향하게 했다. 1934년 개성에 세운 두문동서원은 임선미(林先味)의 후손 임하영(林河永)이 주동이 되어 창건하였는데 고려말 불사이군 대의를 위하여 순절한 72현 및 정몽주, 이색 등 절의를 지킨 고려말충신 119위를 모신 서원이다.
두문동 72현 명단(諱)
1) 두문동 표절실 순절반 봉안 (杜門洞 表節室 殉節班 奉安) : 17분
송암(松菴) 박문수(朴門壽) 죽산인(竹山人), 휴암(休菴) 임선미(林先味) 순창인(淳昌人),
원촌(遠村) 조의생(曺義生) 창령인(昌寧人), 용호(龍湖) 맹호성(孟好性) 신창인 (新昌人),
두문자(杜門子) 성사제(成思齊) 창령인(昌寧人), 산광(山狂) 조대운(曺大運) 창령인(昌寧人),
퇴우당(退憂堂) 신익지(申翼之) 평산인(平山人), 신귀제(愼歸齊) 신이(申彛) 평산인(平山人),
성사(省事) 신우(申瑀) 평산인(平山人),복애(伏崖) 국유(鞠濡) 담양인(潭陽人),
밀직(密直) 고천상(高天祥) 개성인(開城人), 악은(岳隱) 심원부(沈元符) 청송인(靑松人),
이우당(二憂堂) 이경(李瓊) 하빈인(河濱人), 적암(積巖) 서중보(徐仲輔) 장성인(長城人),
직랑(直郞) 신순(申珣) 평산인(平山人), 온수감(溫水監) 신기(申淇) 평산인(平山人),
태학생(太學生) 현계생(玄繼生) 의창인(義昌人)
2) 두문동 표절실 항절반 봉안 (杜門洞 表節室 抗節班 奉安) : 31분
수은(樹隱) 김충한(金沖漢) 경주인(慶州人), 농은(農隱) 민안부(閔安富) 여주인(驪州人),
어은(漁隱) 이치(李致) 합천인(陜川人), 뇌은( 隱) 전귀생(田貴生) 담양인(潭陽人),
해은(海隱) 이유(李裕) 옹진인(甕津人), 송은(松隱) 구홍(具鴻) 능성인(陵城人),
앙천제(仰天齊) 곽추(郭樞) 청주인(淸州人), 송촌(松村) 송인(宋寅) 남양인(南陽人),
도총제(都摠制) 고천우(高天祐) 개성인(開城人)채미헌(採薇軒) 김오륜(金五倫) 정선인(旌善人),
다의당(多義堂) 채귀하(蔡貴河) 인천인(仁川人), 전서(典書) 박침(朴枕) 밀양인(密陽人),
천은(川隱) 이맹예(李孟藝) 옹진인(甕津人), 모려당(慕麗堂) 변숙(邊肅) 원주인(原州人),
고죽제(孤竹齊) 조안경(趙安卿) 함안인(咸安人), 신답(新沓) 서보(徐輔) 이천인(利川人),
해은(海隱) 박심(朴諶) 면천인(沔川人), 법촌(法村) 박령(朴寧) 면천인(沔川人),
복애(伏崖) 범세동(范世東) 랑야인(琅耶 人), 황의옹(黃衣翁) 신안(申晏) 평산인(平山人),
양촌(陽村) 원선(元宣) 원주인(原州人), 덕곡(德谷) 조승숙(趙承肅) 함안인(咸安人),
집현전랑(集賢殿郞) 신감(申鑒) 평산인(平山人), 미산(眉山) 성단(成단) 창령인(昌寧人),
음촌(陰村) 김약시(金若時) 광산인(光山人), 직제학(直提學) 조유도(曺由道) 창령인(昌寧人),
쌍회당(雙檜堂) 도동명(陶東明) 순천인(順天人), 감무(監務) 임탁(林卓) 라주인(羅州人),
송은(松隱) 이명성(李明誠) 공주인(公州人), 모은(茅隱) 이오(李午) 재령인(載寧人),
존암(尊庵) 이수생(李遂生) 수안인(遂安人)
3) 두문동 표절실 정절반 봉안 (杜門洞 表節室 靖節伴 奉安) : 7분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 흥해인(興海人), 문하평리(門下評理) 변빈(卞斌) 초계인(草溪人),
밀직(密直) 이성인(李性仁) 안성인(安城人), 영호군(領護軍) 채옥택(蔡玉澤) 평강인(平康人),
충제(忠齊) 최문한(崔文漢) 강릉인(江陵人), 한림(翰林) 이탕휴(李湯休) 영천인(寧川人),
현령(縣令) 허징(許徵) 양천인(陽川人)
4) 두문동 순절실 순절반 봉안 (杜門洞 殉節室 殉節班 奉安) : 11분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영일인(迎日人),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성주인(星州人),
인제(麟齊) 이종학(李種學) 한산인(韓山人), 이유헌(理猷軒) 신득청(申得淸) 평산인(平山人),
초옥자(草屋子) 김진양(金震陽) 계림인(鷄林人),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 경주인(慶州人),
부사(府事) 손등(孫登) 밀양인(密陽人), 헌납(獻納) 하경(河敬) 진양인(晉陽人),
경제(敬齊) 홍로(洪魯) 부계인(缶溪人), 중랑장(中郞將) 이초(李初) 정선인(旌善人),
운암(雲巖) 차원부(車原부) 연안인(延安人)
5) 두문동 항절실 항절반 봉안 (杜門洞 抗節室 抗節班 奉安) : 33분
목은(牧隱) 이색(李穡) 한산인(韓山人), 손암(遜菴) 최윤덕(崔允德) 탐진인(耽津人),
석계(石溪) 최첨노(崔添老) 경주인(慶州人), 청송당(靑松堂) 도응(都膺) 성주인(星州人),
고산(孤山) 공은(孔隱) 곡부인(曲阜人),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중인(李中仁) 용인인(龍仁人),
조은(釣隱) 이옹(李邕) 아산인(牙山人), 병제(丙齊) 남을진(南乙珍) 의령인(宜寧人),
송은(松隱) 장안세(張安世) 인동인(仁同人), 동포(東浦) 맹희도(孟希道) 신창인(新昌人),
만육당(晩六堂) 최양(崔瀁) 전주인(全州人), 회곡(檜谷) 최호(崔瑚) 평양인(平壤人),
두노(杜老) 최유강(崔有江) 경주인(慶州人), 도총제(都摠制) 박덕공(朴德公) 죽산인(竹山人),
금은(琴隱) 조열(趙悅) 함안인(咸安人),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 남평인(南平人),
오은(梧隱) 김사렴(金士廉) 안동인(安東人), 퇴제(退齊) 신우(申祐) 아주인(鵝州人),
좌윤(左尹) 손호정(孫孝貞) 밀양인(密陽人), 절제사(節制使) 이옥(李沃) 양성인(陽城人),
동강(東岡) 이린(李璘) 원주인(原州人), 송은(松隱) 박천익(朴天翊) 밀양인(密陽人),
둔옹(遯翁) 최이(崔邇) 경주인(慶州人), 건곡(虔谷) 조유(趙瑜) 옥천인(玉川人 ),
정은(正隱) 옥사온(玉斯溫) 의춘인(宜春人), 호은(湖隱) 허기(許麒) 김해인(金海人),
묵은(默隱) 정희(鄭熙) 하동인(河東人), 죽송오(竹松塢) 서견(徐甄) 이천인(利川人),
여강(驪江) 윤충보(尹忠輔) 무송인(茂松人), 보승(保勝) 최원(崔原) 수원인(水原人),
호촌(壺村) 신포시(申包翅) 고령인(高靈人),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 원주인(原州人),
금은(琴隱 ) 이양소(李陽昭) 순천인(順天人)
6) 두문동 정절실 정절반 봉안(杜門洞 靖節室 靖節班 奉安) : 20분
농암(籠巖) 김주(金澍) 선산인(善山人), 안정백(安定伯) 라천서(羅天瑞) 안정인(安定人),
사암(思菴) 민유(閔愉) 여흥인(驪興人), 경은(耕隱) 전조생(田祖生) 담양인(潭陽人),
자포옹(自逋翁) 김전(金鈿) 안동인(安東人), 삼가(三可) 조공(趙珙) 자천인(自川人),
회정(晦亭) 전자수(全子壽) 담양인(潭陽人), 악은(岳隱) 노신(魯愼) 함풍인(咸豊人),
한천자(漢川子) 신아(申雅) 평산인(平山人), 만은(晩隱) 홍재(洪載) 풍산인(豊山人),
순은(醇隱) 신덕린(申德隣) 고령인(高靈人), 상서(尙書) 이춘계(李春啓) 합천인(陜川人),
상서(尙書) 맹유(孟裕) 신창인(新昌人), 묵제(默齊) 양우(梁祐) 남원인(南原人),
수운암(睡雲菴) 송교(宋郊) 여산인(礪山人), 불강(弗降) 김약(金약) 광산인(光山人),
퇴휴당(退休堂) 선윤지(宣允祉) 보성인(寶城人), 어일(漁逸) 민유의(閔由誼) 여주인(驪州人)
사인(舍人) 이조(李條) 경주인(慶州人), 군사(郡事) 민보문(閔普文) 여주인(驪州人)
7) 서원에 봉안안된 두문동 절신 : 24분
우현보(禹玄寶), 유순(柳洵), 조견(趙견), 허석(許錫), 이수인(李守仁), 길재(吉再), 조홍(趙 洪), 이사경(李思敬), 이행(李行), 이양중(李養中), 김육록(金六鹿), 변귀수(邊貴壽), 안종약 (安宗約), 김준(金俊), 윤육(尹陸), 민보(閔普), 임극(林隙), 신석(申釋), 신자악(申自嶽), 김 위(金瑋), 박의중(朴宜中), 박태시(朴太始), 길인적(吉仁迪), 반(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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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두문동보다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 말이 더 익숙하다. 사실 두문불출은 두문동에서 생긴 말이다. 두문동에 들어가서 꼼짝하지 않고 나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고려 말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하고 고려 왕조에 충성을 다짐한 72명의 현자들이 두문동에 은거해 꼼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도 이방원이 주축이 된 개국세력이 산에 불을 지르고 몰아댄 바람에 죽거나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
두문동의 존재는 고려 말, 조선 초기에는 부각되지 않았다. 새 역사의 창조에 동참하지 않은 반골들이었을 뿐이다. 그러다 그들의 존재가 역사의 수면 위로 떠오른 시기는 성리학의 ‘의리 명분론’이 강화된 조선 영조 때다.
영조가 1760년 9월에 후릉(조선 2대 정종과 비 정안 왕후의 능) 참배차 개경 부근의 ‘부조현(不朝峴)’이라는 고개를 넘을 때의 일이었다. 영조가 지명의 연유에 대해 묻자 신하들이, 조선 태조가 즉위한 직후에 고려의 유신(儒臣)들이 출사를 거부하고 이 고개에 조복을 벗어놓고 달아났다고 해 부조현이라고 칭하며, 부조현을 지나면 두문동이 있다고 했다.
이에 영조는 그들을 기려 그 해에 부조현비를 세우게 하고, 1751년(영조 27년)에는 고려에 절의를 지킨 두문동 충신을 위해 제사를 지내고 두문동비까지 세우게 했다.
이때 처음으로 두문동 72현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그런데 350여년이나 지난 뒤인데, 두문동에 들어간 명단이 그때까지 잘 남아 있어서 72현이었을까? 그건 아니다.
우리 안의 영웅을 꼽았다고는 하지만 동국 18현, 즉 동쪽나라 18현에서 알 수 있듯이 두문동 72현 또한 중화사상의 그림자 안에 있다. 공자의 제자이며 중화의 대표적인 현인으로 72현이 꼽히는데, 그에 견줄 만한 상징적인 존재로 72현을 두문동 충신으로 꼽은 것이다.
그 때문에 두문동 72현의 명단이 72명으로 고정된 최초의 문헌은 고종 9년(1872년)에 나타난다.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기우자(騎牛子) 이행(李荇)의 후손이 편찬한 문집 ‘기우집(騎牛集) 임신본(壬申本)’이 그것이다.
그리고 두문동 72현을 새롭게 꼽은 또 다른 문헌은 1924년에 강호석이, 철종 11년 (1860)에 간행된 ‘화해사전(華海師全)’의 명단을 참조해 작성한 ‘전고대방(典故大方)’이란 인물지(人物誌)다.
물론 두 문헌은 명단에서 큰 차이가 있다. 겹치는 인물이 30명이고, 42명이 서로 다르게 선정되어 있다. ‘기우집’은 정몽주를 중심으로 고려 말 충신들을 포괄적으로 선정했고, ‘전고대방’은 두문동에 들어갔던 시기를 중심으로 좁혀 뽑아 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와서 우리는 왜 다시 두문동 72현을 찾아나서려 하는 것일까? 두문동 72현은 단순히 충절을 지킨 상징적인 인물로 전해오는 것은 아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중앙을 떠나 은둔생활을 했고, 그 은둔지를 중심으로 한 가문이 새롭게 형성돼 지역사회의 정신적 지주 구실을 하게 된다. 조선 후기에 예학이 강조되고 보학(譜學)이 강화되면서, 두문동 72현을 조상으로 둔 후손들이 선조를 기리는 작업도 많이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들의 이름이 이 땅의 한 지리적인 공간과 동행하고 있다
1917(杜門洞遺史)
번호
성명
두문동제현록1928(杜門洞實記)72현
1937(杜門洞書院志)
1969(杜門洞書院誌)
호
관
조선의 개국에 반대해 개성 만수산(현 송악산)기슭에 있는 골짜기인 두문동에서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바치며 지조를 지킨 분들의 명단(72현 포함)이며, 이 분 들은 후세에 절의의 표상으로 숭앙되었고, 1783년(정조 7)에는 왕명으로 개성의 성균관(成均館)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배향하게 하였답니다
1
고천상(高天祥)천우의 형
31
5
11
11
제주,개성
2
고천우(高天祐)
24
20
26
26
도총제
제주,개성
3
공은(孔은)
71
72
곡부
4
곽추(郭樞)
98
24
24
청주
5
구홍(具鴻),초명;成斗
34
9
23
23
능주,능성
6
국유(鞠{衣+需})
66
59
10
10
담양
7
길재(吉再)
2
25
68
야은
문하주서
선산
8
김광치(金光致)
87
락성
9
김륜(金淪)
99
116
광산
10
김사렴(金士廉)
74
83
84
오은
안렴사
안동
11
김승길(金承吉)
93
12
김약시(金若時)
15
40
42
42
직제학
광산
13
김영비(金英庇)
48
50
희천
14
김위(金?),김엽(金燁)
57
68
15
김자수(金自粹)
13
41
61
61
상촌
대사성
경주
16
김자진(金子進)
79
사평
광산
17
김전(金鈿)
106
105
안동
18
김제(金濟)
71
백암
평해군수
선산
19
김주(金澍)
37
102
101
롱암
예부상서
선산
20
김준(金俊)
52
54
21
김진양(金震陽)
35
60
60
경주,계림부
22
김충한(金沖漢)
40
31
18
18
수은
예의판서
경주
23
김훈(金勳)
108
매헌
태자담사성
진주
24
남을진(南乙珍)
4
45
74
75
참지문하부사
의령
25
도동명(陶東明)
64
44
44
쌍회일
장령
순천
26
도응(都膺),초명;兪
70
70
71
字;자운
좌평찬성사
성산
27
라천서(羅天瑞)
81
103
102
안정
28
로신(魯愼),초명;哲
109
108
함풍
29
류번(柳藩)
59
벽은
봉익대부,동지밀직사
진주
30
류순(柳珣)
11
문화
31
맹유(孟裕)
62
113
112
문과상서
신창
32
맹호성(孟好性)
63
4
4
룡호
신창
33
맹희덕(孟希德)
61
전교령
온양
34
맹희도(孟希道)
76
77
孟裕의 자
35
문익점(文益漸)
69
82
83
우문관제학
남평
36
민보문(閔普文)
56
61
117
120
여흥
37
민안부(閔安富)
19
66
19
19
농은
예의판서
여흥
38
민유(閔愉)
104
103
여흥
39
민유(閔楡)
88
부원군
40
민유의(閔由誼)
101
118
여주
41
박녕(朴寧)
17
35
35
朴宜中의 孫
42
박덕공(朴德公)
80
81
죽산
43
박문수(朴門壽)초명;文柱
9
1
1
1
찬성사
죽산
44
박심(朴諶)
38
18
34
34
면천
45
박천익(朴天翊),박익(朴翊)
72
70
88
89
송은
예부시랑중서령
밀양
46
박침(朴?)
54
57
29
29
밀양
47
박태검(朴泰儉)
23
죽산
48
배상지(裵尙志)
22
58
49
49
백당
사복사사
흥해
49
범세동(范世東)
96
36
36
낭야(일명금성)
50
변구수(邊龜壽)
50
52
장연
51
변숙(邊肅)
37
16
31
31
원주
52
변윤(卞贇)
50
50
초계
53
서견(徐甄)
21
47
94
95
장령
이천
54
서보(徐輔)
36
33
33
이천
55
서중보(徐仲輔)
41
15
14
14
이천,장성
56
선윤지(宣允祉)
100
117
보성
57
설응(薛凝)
69
암곡(巖谷)
순창
58
성부(成溥)
14
62
41
41
형조총랑
창녕
59
성사제(成思齊)
7
2
5
5
보문각직제학
창녕
60
손등(孫登)
62
62
밀양
61
손효정(孫孝貞)
85
86
밀양
62
송계(宋桂)
49
밀양
63
송교(宋皎)
91
전서
64
송교(宋郊)
98
115
여산
65
송인(宋寅)
102
25
25
남양
66
송주(宋柱)
51
려산
67
신감(申鑑)
40
40
평산
68
신기(申淇)
16
16
평산
69
신덕린(申德隣)
28
112
111
순은
예의판서
고령
70
신득청(申得淸)
59
59
평산
71
신순(申珣)
15
15
평산
72
신아(申雅)
110
109
평산
73
신안(申晏)
10
19
37
37
배록제(排祿霽)
종부령
평산
74
신우(申瑀)
9
9
평산
75
신우(申祐)
84
85
아주
76
신이(申彛)
8
8
평산
77
신익지(申翼之)
7
7
평산
78
신포시(申包翅)
58
97
98
덕린의 자
79
신호안(申浩晏)
11
지신사(신안의 종질)
평산
80
심연(沈淵)
105
합문지후
청송
81
심원부(沈元符)
16
72
12
12
전리판서
청송
82
안성(安省)
83
직제학
83
안원(安瑗)
110
공조전서
순흥
84
안종약(安從約)
51
55
이조참의
순흥
85
양우(梁祐)
115
114
남원
86
엄O(嚴O)
104
65
87
옥사온(玉斯溫)
91
92
의춘
88
우현보(禹玄寶)
12
단양
89
원보(元寶)
44
28
원주
90
원선(元宣)
38
38
원주
91
원천석(元天錫)
3
34
99
운곡
진사
원주
92
윤규(尹珪)
53
53
파평
93
윤충보(尹忠輔)
97
95
96
무송
94
이경(李瓊)
60
13
13
이우당
화주목사
하빈
95
이륜(李倫)
46
63
96
이린(李璘)
87
88
원주
97
이맹예(李孟藝/芸/)
33
10
30
30
이유의 자
옹진
98
이명성(李明成)
80
46
46
감찰어사지제고
공주
99
이사경(李思敬)
27
42
송월당
사재감
전의
100
이사지(李思之)
65
려은정
낭장
벽진
101
이색(李穡)
1
24
67
67
목은
문하시중,한산부원군
한산
102
이석지(李釋之)
86
남곡
보문각제학
영천
103
이수(李(艸/脩})
116
119
경주
104
이수생(李遂生)
26
43
48
48
존암
수안
105
이수인(李守仁)
29
성주
106
이숭인(李崇仁)
7
57
57
성주
107
이양소(李陽昭)
77
100
진사
108
이양중(李養中)
20
49
석탄
형조참의
광주(廣州)
109
이여량(李汝良)
103
좌정언
성산
110
이연(李涓)
101
111
이오(李午)
47
47
재령
112
이옥(李沃)
86
87
양성
113
이옹(李邕)
73
74
아산
114
이우(李祐),이유(李裕),초명;德裕
43
26
22
22
옹진
115
이유인(李維仁),(李惟仁)
55
60
51
51
안성
116
이종학(李種學)
32
58
58
린제
(이색의 자)
한산
117
이중인(李中仁)
72
73
룡인
118
이초(李初)
65
65
정선
119
이춘계(李春啓)
114
113
합천
120
이치(李致),초명;敢
106
20
20
어은
문과사인
합천
121
이탕휴(李湯休)
54
54
녕천
122
이행(李行)
6
46
기우
대제학,이조판서
려흥,려주
123
이O계(李O桂)
36
경주
124
임귀록(林貴{木+?})
89
나주
125
임녕(林寧)
39
126
임선미(林先味)
30
4
2
2
휴암(休菴)
순창
127
임탁(林卓)
47
48
45
45
나주
128
장안세(張安世)
8
75
76
송은
정헌대부,덕녕부윤
인동
129
장O(張O)
67
130
전귀생(田貴生)
32
6
21
21
뢰은
담양
131
전오륜(全五倫)
12
39
27
27
형조판서
정선
132
전자수(田子壽)
108
107
순지의 자
133
전조생(田祖生)
8
105
104
경은
담양
134
정광(程廣)
82
건천
시사
135
정몽주(鄭夢周)
22
56
56
연일
136
정온(鄭溫)
100
137
정희(鄭熙)
93
94
하동
138
정희량(鄭熙良)
30
묵은
하동
139
조견(趙?)
5
27
송산
안렴사
평양
140
조공(趙珙)
45
44
107
106
문하부사
백천
141
조대운(曺大運)
6
6
창녕
142
조승숙(趙承肅)
35
13
39
39
부여감무
함안
143
조안경(趙安卿)
42
21
32
32
함안
144
조열(趙悅)
81
82
함안
145
조유(趙瑜)
94
90
91
옥천
146
조유도(曺由道)
43
43
창녕
147
조윤(趙胤)
99
148
조의생(曺義生)
29
3
3
3
원촌
창녕
149
조철산(趙鐵山)
95
150
조충숙(趙忠肅)
76
덕곡
함안
151
조호(趙瑚)
78
79
평양
152
조희직(曺希直)
78
정언
153
주유(周瑜)
107
도은
진사
상주
154
차원부(車原{兆+頁})
23
66
66
운암
련의대부
연안
155
차O(車O)
64
156
채귀하(蔡貴河)
17
14
28
28
다의당
호조전서
인천
157
채왕택(蔡王澤)/옥택(玉澤)/
90
52
52
령호군
평강
158
최문한(崔文漢)
85
53
53
충숙왕부마
강릉
159
최양(崔瀁)
68
38
77
78
소육(昭六)
대제학(정몽주생질)
전주
160
최원(崔原)/源/
96
97
수원
161
최유강(崔有江)/崔江/
79
80
경주
162
최윤덕(崔允德)
68
69
탐진(耽津)
163
최이(崔邇)
89
90
경주
164
최첨로(崔添老)
69
70
경주
165
최칠석(崔七夕)
92
대마도에서 大勳
전주
166
최해(崔瀣)
25
33
졸제
제학
전주
167
하경당(河{敬/木}當)
63
63
168
하자종(河自宗)
75
병조판서
진주
169
한철충(韓哲沖)
67
몽계
전법판서
청주
170
허금(許錦)
18
56
야당
전리판서
양천
171
허기(許麒)
73
92
93
호은
익위장군
김해
172
허휘(許徽)/許徵/
84
55
55
현령
양천
173
현계생(玄繼生)
17
17
의창
174
홍로(洪魯)
109
64
64
경제
한림학사
부계(缶溪)
175
홍재(洪載)
111
110
풍산
176
OO
71
숫자는 등재 순서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