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그는 열정을 품은 사람입니다. |
그는 정열적인 전도자였습니다. 심령이 불타는 사람이었습니다. 때는 기독교 박해 시대였습니다. 스데반이라는 믿음의 동료가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는 일이 지척에서 벌어졌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도시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빌립은 전도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그는 성경에 나타나는 최초의 순회 전도자입니다. 그의 신앙이 얼머나 모험적이었는지는, 그 말많은 사마리아 지역까지 파고들어가 복음을 전한 것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사도들보다 더 적극적이고 구령(救靈)이 열정이 뜨거운 목회자였습니다.
특히 본문 말씀을 보면 빌립이 얼마나 열정적인 사람인지 느낄 수 있습니다. 빌립은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는 성령의 지시에 즉시 일어나 남쪽으로 내려갑니다. 또 성령께서 명하시자, 에디오피아 내시에게로 달려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구원의 확신을 심어 주고는 당장 세례를 줍니다. 에디오피아 내시와 작별한 뒤에도 그는 여러 성읍을 순회하며 전도합니다. 가이사랴까지 올라가서 전도합니다. 이때로부터 20년쯤 지난 시점으로 보이는 사도행전 21장 8절에 보면 온 식구들과 함께 여전히 가이사랴에서 전도하고 있는 열정의 빌립을 만나게 됩니다. 20여 년의 세월 동안 무던히도 꾸준히 전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빌립은 평생을 복음전도자로 살았을 뿐 아니라 자신의 딸 넷을 모두 하나님의 사람으로 헌신하게 합니다.
우리의 심령을 뜨겁게 하시는 역사(役事)가 비단 오순절 계통 교회나 신비 체험이 풍성한 기도원에 가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능력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우리의 가슴 속에 성령의 뜨거운 감동과 열정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벤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뜨겁게 살아갑니다. 설교도 기도도 사역도 뜨겁게 열정적으로 해 나갑니다. 제가 종종 해보는 생각인데, 우리 하나님은 워낙 가슴이 뜨거우신 분이기 때문에 사람도 열정의 사람을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시행착오가 많은 사람입니까? 사사건건 천방지축으로 나서는 바람에 예수께 혼이 난 적도 몇 번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예수께서 그를 좋아하셨던 것은 그가 열정의 사람이었고 뜨거움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미국 목회자 중에 제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분이 두 분 있는데, 그 중 한 분이 국내에도 잘 알려진 시카고 「윌로크릭 커뮤니티 교회」(Willow Creek Community Church)를 담임하고 있는 빌 하이벨즈 목사입니다. 그는 사실상 「트리니티 신과대학」에서 4년간 공부하고 대학원 과정은 생략한 채 곧장 목회 현장에 띄어든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지금은 시카고의 상류층 마을로 이름 난 곳에서 탁월하게 목회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가 목회자들에게 늘 강조하는 말이 있습니다. “head 중심의 설교를 버리고, heart 중심의 설교를 하라”는 것입니다. 설교는 단순한 가르침이나 지침으로 끝나서는 안 되며, 사람들의 가슴을 향해 깊이 파고들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하이벨즈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구원을 언급할 때면 목이 메어 말을 잘 잇지 못합니다. 그의 가슴 속에 얼마나 뜨거운 열정이 숨쉬고 있으며 그렇겠습니까. 그 교회의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이 십자가 구원의 감격스런 소식을 들으면서 가슴이 뜨거워지고 심령의 변화를 받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벤처 목회를 하려면 무엇보다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열정과 관련하여 저희 교회 얘기를 하자면 이렇습니다. 저는 목회 방침으로서 “전도 목회. 남성 중심 목회. 초신자 중심 목회”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전체 교인의 70% 이상이 저와 함께한 성경공부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인 것도 이런 목회 방침을 잘 반영한다고 하겠습니다. 심방도 여성도들은 심방 전도사님께 맡기고 저는 주로 남성도들 위주로 실시합니다. 낮에 불쑥 회사로도 찾아가고, 대체로는 밤에 집을 방문합니다. 심방 가서는 예배부터 드리는 게 아니라 먼저 먹을 것부터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가자마자 먹을 것부터 달라고 합니다. 상대방의 얘기를 들으면서 그의 영적인 필요가 무엇인지, 신앙적 관심사가 무엇인지, 그리고 삶의 스타일이 어떠한지부터 파악합니다. 그러면서 그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해야 할지를 생각합니다. 30분이고 1시간이고 상대방의 얘기를 다 듣고 나서 “더 먹을 것이 없느냐?”고 묻고, 없다고 하면 그때부터 예배를 드립니다.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것입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에게는 “열정”이라는 특별한 재산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맨바닥에서 시작해서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하나같이 열정이 있습니다. 특수한 비법(秘法)이라든지 탁월한 방법론이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일에 대한 열정이 있기에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 목회자들을 보면 힘들이지 않고 쉽게 목회 하려는 경향이 참으로 짙습니다. 교회를 개척해 놓고도 전도도 안하고 저절로 교인이 밀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신이 무슨 조용기 목사님이라도 된 듯이, 때가 되면 몰려들 것이라고 큰소리입니다. 열심은 온 데 같 데 없고 천장 보고 누워 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공짜 심리가 팽배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 노력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하게 된 모양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교인들이 제 발로 찾아와 주기만을 바라는 목회자들의 교회는 좀처럼 부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믿음의 발자취를 아름답게 남겼던 사람들은 뜨거운 열정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열심히 살고 열심히 뛰며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설교하며 모든 열정을 교회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주를 위하여 쏟았던 사람들입니다.
#2 |
그는 단순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
목회를 잘하려면 단순해야 합니다. 단순할수록 긍정적인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설교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교인만을 양산해 낼 뿐입니다.
제가 언젠가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 목사가 쓴 책 한권을 읽으며 깊이 공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을 네 종류로 나눈 대목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첫째부류 |
"no-no people"로서 입에 “안 된다”는 말을 달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교회 내에는 이런 분들이 항상 있습니다. 예수 믿은 지 오래되었는데도 여전히 “안 된다”는 부정적인 말부터 꺼냅니다. 일단 거부나 반대부터 해보는 회의적인 사람입니다.
둘째부류 |
“yo-yo people"로서 알쏭달쏭하여 알다가도 모를 사람입니다. 긴가민가 신자입니다.
셋째부류 |
“blow-blow people"로서 말만 거창하게 하고 실제로는 알멩이가 없는 허풍선이과(科)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기도 모임 만들어 부지런히 기도하자고 실컷 바람 잡아 놓고 정작 모임이 만들어지면 본인은 나오지 않습니다. 또, 주 중에 여전도회를 중심으로 교회 대청소 한번 하게 예배 시간에 광고하라고 해놓고 본인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습니다.
넷째부류 |
“go-go people"로서 상황에 상관없이 긍정적이고 진취적이며 창조적이고도 단순하게 일을 추진해 나가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푸른 신호등부터 먼저 보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여건이 불리하고 암담해도 언제나 가능성부터 생각하며 모든 것을 긍정적인 믿음으로 해석하는 사람입니다. 짧은 목회 경력이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고고 피플”은 가정 일이나 직장 일이나 교회 일이나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구석 없이 잘해낸다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는 무슨 일을 하든 복잡한 계획을 세우거나 오랫동안 회의하거나 하지 않고 곧장 추진하는 편입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이제 다시 빌립을 보도록 합시다. 사마리아 지역에서 대부흥을 일으키고 있던 빌립에게 성령께서 난데없이 140㎞나 떨어진 가사로 내려가라고 말씀합니다(본문26절 참조). 사도들도 하지 못했던 사마리아 전도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빌립에게 갑자기 다른 지역으로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이제 한창 목회에 대성하고 있는데 멀리 다른 지역으로 옮기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사람이 살지 않는 벽지(僻地) 가사로 말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믿음의 소유자였던 빌립은 따지지 않고 순종하며 사막길을 따라 가사로 내려갑니다.
나중에 아소도로 올라간 빌립은 거기서 또 96㎞나 떨어진 가이샤라로 향합니다(40절 참조). 그리고는 성령께서 더 이상 지시하지 않으시니 그 곳에서 여생 동안 묵묵히 목회하다가 사역을 마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은 바로 “단순성”을 토대로 한 믿음일 것입니다. 가라고 하면 가고 만나라고 하면 만나고 떠나라고 하면 떠나고 머물라고 하면 머물고 20년 동안이라도 한 장소에 있으라고 하면 딴생각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빌립이었습니다.
믿음은 단순한 것입니다. 모험은 복잡한 계산에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복잡한 사람은 절대로 모험을 감행하지 못합니다. 벤처 신앙의 소유자였던 노아가 만일 방주를 건조하라시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하나님, 어떻게 방주를 산에다 지으라고 하십니까? 나중에 제대로 진수(進水)하려면 호숫가나 바닷가가 낫지 않겠습니까?” 하고 따졌다면 그를 벤처 신앙의 소유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복잡하게 믿는 사람은 목회자가 되었든지 일반 성도가 되었든지 상관없이 삶이 피곤합니다. 한 번만 생각하면 될 것을 쓸데 없이 여러 번 생각해 스스로 헷갈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단순한 사람은 손해를 볼 때 보더라도 인생은 피곤하지 않습니다. 손해 본 것에 대해서도 복잡하게 고민하지 않고 단순하게 넘겨 버리기 때문에 피곤할 이유가 없습니다.
벤처 신앙의 네 가지 축복
빌립은 열정과 단순함을 소유한 벤처 신앙인이었습니다. 이렇듯 열정적이고 단순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 때, 목회자에게는 다음 네 가지 축복이 따라옵니다.
#1 |
성령께서 우리를 일할 장소로 인도해 주십니다 |
하나님께서는 빌립을 사마리아로, 가사로, 광야로, 가이사랴로 인도하셨습니다. 여기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복음 사역자의 목회지를 정해 주시는 분이 성령이라는 사실입니다. 특히 부교역자들은 연말이 가까워지면 ‘어느 교회가 더 좋은가?’ 해서 교계 신문 광고를 뚫어져라 살피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성령께서 내 마음을 움직여서 자연스럽게 인도하실 때까지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목회지를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쫓겨나온 빌립에게도 사역할 곳이 분명히 있었던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마리아도 사막도 아소도도 가이사랴도 모두 성령께서 인도하신 빌립의 사역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꾼으로 부르신 자에게 일할 곳도 반드시 주십니다. 일꾼으로 부르시는 하나님과 일터로 부르시는 하나님은 동일하십니다. 일터는 어디엔가 있습니다. 일꾼에게는 반드시 일터가 있습니다.
목동 지구촌교회가 처음 둥지를 튼 곳이 상가의 지하 대피소였습니다. 긴급 사태라도 발생하면 언제든지 자리를 내줘야 하는 곳이 바로 대피소입니다. 그러나 대피소라는 위치가 교회 부흥에 도움이 되는 면도 있습니다. 개척 초창기에 국가적으로 선거가 유난히 많았는데 국회의원 선거다 대통령 선거다 구의회의원 선거다 해서 대피소인 저희 예배당이 선거 장소로 이용되곤 하니, 그 덕분에 교회가 알려지면서 많은 전도가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워낙 배짱이 없는 사람인지라 예나 지금이나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교회가 조금 성장하고 부흥했다고 해서 다른 지역으로 떠나거나 하지 않게 하옵소서. 입지 조건이 더 좋은 지역을 찾아 떠남으로써 초창기에 교회 개척을 위해 희생한 성도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게 하옵소서.” 지하 대피소 교회가 한창 부흥할 때도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한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도 단순하게 응답해 주십니다. 그래서 상가 교회에서 150m 정도밖에 안 떨어진 아주 목 좋은 곳에 예배당 부지를 얻게 하셨습니다.
개척 첫 달부터 8개월 동안은 화성교회로부터 보조를 받았습니다. 8개월 동안만 보조를 받겠다는 것은 창립예배를 드릴 때부터 스스로 결심한 바였습니다. 4월에 교회를 개척했으니 12월까지만 보조를 받겠다고 마음 먹고, 어느새 12월이 되자 당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이제부터는 보조를 받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교회를 유지할 테니 제 믿음을 키우시기 원한다면 후원을 중단해 주십시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보조를 중단하면서부터 하나님께서 손수 교회를 키워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암담하고 힘겨운 시절이 있었지만 그래도 돌아보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일할 곳을 예비해 두셨고, 단순한 믿음으로 나아갈 때마다 그분의 풍성한 계획들을 하나하나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개척 1년 만에 지하실에서 2층으로 올라왔습니다. 서울시로부터 2층 예배당을 너무 유리한 조건으로 낙찰받은 것입니다.
#2 |
성령께서 우리를 일할 사람에게로 인도하십니다. |
빌립은 그저 천사의 지시를 따라 순종하며 사막길로 갔습니다. 사람이 없는 사막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다 보니 복음을 깨달아야 할 사람이 빌립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광야 한복판에라도 복음을 들어야 할 전도 대상자를 준비시키고 계시는 분입니다. 사마리아에서는 수천의 군중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더니 이번에는 한 영혼을 전도하게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비록 한 영혼이지만 그 영혼이 장차 아프리카 선교의 문을 여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 곳에 많은 영혼이 있을는지 한 영혼이 있을는지, 또 우리가 앞으로 농어촌에 가서 평생 몇 십명을 놓고 목회를 할는지 아니면 도시에서 수천 명을 놓고 목회를 할는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을 우리로 만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바라고 소망하며 붙들어야 할 것은 오직 이 한 가지입니다. 성도를 많이 맡겨 주시고 적게 맡겨 주시고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를 통해서 복음을 듣고 예수 믿어야 할 사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단순한 믿음과 복음으로 충만해 있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꼭 필요한 사람을 만나게 하십니다.
#3 |
성령께서 우리에게 일할 내용과 방법까지 일러주십니다. |
저는 담임 목회를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도 우리 교회에 새신자가 등록하면, 세례를 받았건 안 받았건 상관없이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심방을 가서 사영리를 가지고 전도합니다. 목회 경험상 새신자 심방을 가면 열이면 아홉 가정에서는 울고 나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울고 복음을 전하는 저도 울고 또 심방을 따라간 교우도 웁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성령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전도도 그렇게 목회도 그렇고 사람이 하는 것 같지만 가만히 보면 일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 같은 분을 부러워만 할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렇게 믿음으로 전도하고 선교하고 목회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나아갈 때 성령께서 일의 방법과 기술까지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할 때 역사(役事)는 성령께서 책임 지십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분명해지는 한 가지 사실은, 목회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모든 행사를 성령께 맡기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4 |
성령께서 일의 열매까지도 맺게 하십니다. |
빌립은 예수님을 전하기만 했을 뿐인데 에디오피아 내시가 자발적으로 “세례를 베풀어 달라”로 강청합니다.
“지금이 개척 시대냐 아니냐, 지금이 전도가 되는 시대냐 아니냐, 교회가 성장하는 시대냐 쇠퇴하는 시대냐, 마이너스 성장기냐 플러스 성장기냐, 한국교회의 침체기가 아니냐” 하는 것은 복잡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나 하는 생각이고 염려입니다. 우리가 진정 복음을 위해 부름 받았다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우리에게 목회자로서의 소명을 주셨다면, 빈손이라 할지라도 전도 대상자가 없는 가사 지역이라 할지라도, 복음 거부 지역인 사마리아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일할 장소와 대상과 방법을 가르쳐 주시며 또한 열매까지 맺게 하십니다. 정신이 살아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축복하시고 함께하십니다.
2 소명 목회
소명 의식이 있는 자는 행복하다
탁월한 지도자들이 가지는 첫째 되는 공통점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소명 의식”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직종에 종사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하늘의 소명을 가지고 일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부르심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가 “구원적인 소명”이요 나머지 하나가 “헌신의 소명”입니다. 전자(前者)가 “자녀로서의 소명”이라면 후자는 “일꾼으로서의 소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신자로 불러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와 복음을 위해서 사는 제자로서도 불러 주셨습니다. 이것은 사실 놀라운 특권입니다. 소명감이 있는 사람은 늘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그의 삶에 감사의 이유가 넘치기 때문니다.
막노동을 하든 봉급쟁이로 살아가든, 자기 사업을 하든 집에서 살림을 하든, 소명감을 가지고 삶의 마당에 임하는 사람은 날마다 새 아침을 맞이합니다. 저에겐 새벽기도를 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 시간이 하루 중 아주 행복한 시간입니다. 교회 십자가와 새벽 하늘의 별들을 보며 걷자면 새 날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소명 의식이 없는 사람은 감사가 아닌 불평이 터져 나오기 쉽습니다.
소명을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는 하루 하루가 새롭고 신선하기 때문에 그는 결코 지치는 법이 없습니다. 한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살고 죽는 것은 우연도 아니요 자연스런 일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소중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목회자로서의 소명을 받는 일은 철저히 하나님의 섭리가 개입된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부름 받아 지금 그 자리에 서 있게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으셔서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불러 주시사 영광스런 복음을 전하게 하시니 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저는 열 번을 죽었다가 깨어나도 목회자가 될 것입니다. 제게 특별한 능력이나 실력이나 자랑할 만한 학벌이나 학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일 자체가 너무나 고귀하고 놓칠 수 없는 소명이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도 이 소명을 꽉 붙들고 싶습니다.
목회의 길이 특히 고귀한 것은, 이 길이 인간의 뜻으로 선택한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끄심에 순종함으로써 걷게 된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에 따라 우리를 이 영광의 자리에 불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사는 인생, 이 얼마나 멋진 삶입니까?
우리가 목회의 길에 서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자리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구체적인 이유가 무엇이며, 그 부르심의 성격은 어떠합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부르신 목적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본문(출3장) 9,10절에는 하나님께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면서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살려 주신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나일강물에 떠내려가던 모세를 구원하셨습니까? 또 하나님께서 왜 세상이라는 강물을 따라 떠내려가던 저와 당신을 구원하셨습니까? 한때는 모세로 하여금 이집트 왕실에서 최고의 학술을 익히게 하시더니, 그 후에는 또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밑바닥 훈련을 받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며, 그 후에 그를 부르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내 〔하나님〕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10절). 잃어버린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을 얻게 하고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게 하며 또 이 땅에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며 세계를 복음화하는 일에 쓰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을 기억하며, 감사함으로 하루 하루를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부르심에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약속되어 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주저주저하며 소명을 사양하고 있습니다. 본문11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모세야, 너는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네게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겠다. 40년 전에는 네 힘으로 하려고 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니 너는 분명히 성공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감당키 어려운 사명 앞에서 긴장한 채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모세에게 “내가 정녕 너와 함께하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애굽 땅에 들어서자마자 사로잡혀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함께할 터이니 두려워 말라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면 반드시 나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뒤에 줄곧 제자들과 동고동락하며 함께해 주셨듯이 말입니다. 광풍이 몰아치던 밤, 갈릴리 바다 한복판에서도 주님은 여전히 제자들 곁에 계셨습니다. 또 성난 파도를 인하여 제자들이 어쩔 줄 몰라할 때도 주께서는 바다 위를 걸으사 제자들 곁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부르신 이가 어떤 분이시냐” 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누구십니까?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 여화와 하나님이십니다.
선교사이자 아프리카 탐험가인 데이빗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평생 정글을 누빈 거리는 100만 ㎞에 달한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의 정글은 그에게 말 그대로 위험덩어리였을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맹수의 공격이 있을지 모르고, 자칫하면 길을 잃기 쉬운 데다 곳곳에 늪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고, 게다가 말도 통하지 않는 원주민들과의 미묘한 갈등과 대립을 감내하며 복음을 전해야 했으니 하루 하루가 결코 순탄치 않았을 것입니다. 수십 년의 아프리카 선교를 마무리할 때 어떤 기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선교사님, 정글이 두렵지 않으셨습니까? 맹수들과 토인들과 식인종들이 두렵지 않으셨습니까? 선교사님이 아프리카 정글을 담대하게 누비며 선교할 수 있었던 힘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때 데이빗 리빙스턴은 단 한마디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저는 마태복음 28장 20절을 믿기 때문에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이 무엇입니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입니다. 이 한 말씀만 붙잡는다면 두려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
목회자는 사명의 자리 이전에 특권의 자리에 선 자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이미 목회자로 사명을 받은 자이니 짐이 무겁고 어렵고 힘들고 고생스럽고 외롭고 고독해도 이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걸어야지. 견디다 못해 쓰러지는 날이 와도 다시 일어서서 이 길을 걸어야지’ 하는 사명감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보다 먼저 생각할 것은 이 길이 사명의 길이기에 앞서 특권의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목회자의 길은 천사도 흠모할 만한 특권의 길입니다.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출세 가도를 달리던 바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부르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알아주는 명예나 출세나 성공보다 더 큰 하늘의 영광을 바울에게 주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바울이 서 있던 그 축복의 대열에 당신과 내가 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사 우리를 그 자리에 세워 주셨습니다. 정말 신나는 일 아닙니까? 바벨론 땅에 계속 머물러 있었더라도 아브라함은 얼마든지 풍요롭게 잘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도 애굽 왕궁에 남아 있었더라면 평생을 호의 호식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바울도 주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많은 사람에게 숭앙받는 위대한 유대주의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이보다 더 영화롭고 오래 지속될 영광을 누리게 하고 싶으셨기에 그들을 삶의 자리로부터 불러내셨으며, 오늘날 저와 당신을 불러내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면 덩실덩실 춤이라도 춰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소명감을 가지고 제대로 헌신하는 자에게 하늘의 복뿐 아니라 땅의 복도 허락하신다니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것입니까? 간단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명자로 부르신 것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구원하게 하시기 위함일 뿐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더 큰 상을 주시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소명 철학을 가지고 살 때 우리는 행복한 목회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특별히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순교자들의 신앙을 관심 있게 살펴보는 편입니다. 그들은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며 나아갔던 자들이었기에 이 땅에서의 수고에는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는 자로서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두고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부디,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분명한 소명 의식은 행복한 사명자가 되게 합니다.
3 비전 목회
이유가 분명한 삶
목적 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쓰십니다. 혹자는 우리 인생을 세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첫째는 제일 낮은 차원으로서 “survival level", 즉 생존을 위해서 사는 수준입니다. 그저 살기 위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첫 번째 차원보다 조금 높은 차원으로는 “success level", 즉 성공을 위해 인생을 살아가는 수준이 있습니다. 재산이라든지 지위, 명성, 쾌락이 인생의 목적이라면 그 사람은 성공 지향적인 수준에서 인생을 살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가장 이상적인 차원으로서 “significant level", 즉 의미를 추구하며 사는 삶입니다. 내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찾으며 사는 사람, 아픔이나 고통이나 슬픔이나 어려움이 있지만 이 가운데도 반드시 하나님의 목적하심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바로 여기에 속합니다. 그저 세상 풍조에 발맞추어 나부끼는 사람들에 비하면, 늘 인생의 의미를 찾고 하나님의 계획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의 삶의 질(質)은 확연히 다릅니다.
다윗은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무엇인지 알고 살았던 사람의 대명사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도행전 13장 36절 말씀을 대단히 좋아합니다. 이 구절을 대할 때마다 목회자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간단히 요약해 볼 수도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 세대에 하나님의 목적을 섬기다가 잠들었더라.” 이 한 문장으로 다윗의 80년 인생이 한마디로 정리됩니다. 이것이 비문(碑文)이라면 이처럼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비문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다윗은 진정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생 동안 하나님의 뜻만을 성취해 드리고자 애썼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다윗과 같은 인물을 신약 시대 사람으로 한 사람 들라 한다면 바울이 해당되지 않나 생각됩니다.
바울이 소아시아와 유럽, 어디든 다니면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뚜렷한 비전과 인생의 방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 인생에 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결코 무시되거나 변경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목적이 분명하고 목표가 뚜렷한 사람이 목숨도 걸 수 있습니다. “나의 사명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명과 생명을 기꺼이 바꾸고자 했던 사람, 그가 바울 사도였습니다. 이처럼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확신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비전 있는 자의 특성
#1 |
좌절을 딛고 일어섭니다. |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오래 참지를 못합니다. 쉽게 주저앉거나 때로는 너무 쉽게 폭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아무리 어렵고 불리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결코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 (Thomas A. Edison)은 인생의 목표가 분명한 사람답게 이런 멋진 말을 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란 시간이 약간 더 걸리는 일일 뿐이다.” 무슨 일이든, 금방 좌절하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이지 인내로써 견딜 때는 못 이룰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에디슨은 그런 철학을 가지고 있었기에 지난한 발명 과정을 기쁨으로 참고 견딜 수 있었을 것입니다.
미국 「윌로우크릭 커뮤니티 교회」의 빌 하이벨즈 목사는 “인내력을 기르려면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잘 참고 넘겨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그 역시 목회를 하면서 좌절의 늪에 빠질 뻔한 순간이 많았고 그때마다 포기하고 싶은 충동을 일었다고 합니다. 달리기를 해본 사람이라면 포기의 순간이 무엇인지 잘 알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 의식이 분명하지 못했던 사울은 난관에 부딪치자 쉽사리 낙심했고 심지어 우울증세까지 보였습니다. 실의와 좌절에 쉽게 빠지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정서적인 질환 중 하나가 우울증입니다. 우울증은 이 시대에 만연해 있는 심각한 질병 가운데 하나입니다. 세대는 달라져도 우울증이 사람을 사로잡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삶의 목표가 또렷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목회자들 사이에도 우울증과 비슷하게 무력증이 유행입니다. 목회자의 무력증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교회의 비전이나 인생의 비전을 상실했기 때문에 찾아오는 듯합니다.
마국 교회의 지도자 쟌 맥스웰은 “목적을 품고 사는 사람의 중요성”을 이렇게 잘 대비시켜 줍니다.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의 차이점은 이러합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삶의 목적이 있고 비전”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꿈에 자극을 받아 그 꿈을 달성하기 위해 계속 앞으로 나가는 사람입니다.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현재만 보고 지금만 보는”사람들입니다. 오늘에 의해서만 자극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현실에 급급한 사람들입니다. 오늘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영원한 목적을 추구하면서 산다면 실패가 많더라도 좌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비전을 버리지 않는 사람의 실패는 단순한 실패와는 다릅니다.
훌륭한 사상가이기도 한 노먼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hill) 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실패자처럼 생각하면 실패자가 된다. 둘째,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으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으며, 활기 차고도 성공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 셋째, 자기 자신을 과소 평가하지 말라. 그렇게 위축될 필요가 없다. 잠재 능력을 발휘하면 어떠한 어려움도 해결할 수 있다. 넷째, 믿음을 가지고 노력하면 역동적인 창조력이 생긴다. 다섯째, 크게 기도하라. 기도하면서 일한다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사 당신이 놀라운 일을 해내게 될 테니 말이다. 여섯째, 크게 행동하라. 아무리 큰 계획도 하나님께 믿음의 손을 내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달성하신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큰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2 |
열정을 품고 살아갑니다. |
빌립과 마찬가지로 다윗도 식을 줄 모르는 열정의 소유자였습니다. 바울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몸에 질병이 있고 핍박으로 인한 아픔이 있어도 바울이 지쳤다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것은 그가 초능력을 가졌거나 우리와는 성정(性情)이 다른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비전이 있고 목적이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열정이 있는 사람은 에너지가 생기면 생겼지 지치지 않습니다. 살아야 할 목적이 있는 사람에게는 삶에 대한 남다른 열심히 있습니다. 성정이 다른 것이 아니라, 열정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어도 피곤할 뿐입니다.
저는 열심이란 말을 좋아합니다. 열심을 뜻하는 영어 “enthusiasm"은 라틴어에서 온 말로서 『엔』(“in")이란 말과 『데오스』(”God")라는 말이 합쳐져 생긴 말입니다. 즉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 곧 열정 있는 삶이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인생의 비전과 목적이 분명한 사람답게 “달려가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하나님의 열심을 품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3 |
미래 지향적인 삶을 삽니다. |
목적 지향적인 삶이란 곧 미래 지향적인 삶을 말합니다. 목적 지향적인 사람은 언제나 앞을 향해서 나아갑니다. 바울은 삶을 통해 그런 목적 지향적인 인생관을 아주 뚜렷하게 보여 준 사람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3,14).
인생의 목적을 품고 사는 사람은 삶을 언제나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반면 목적 의식이 불분명한 사람은 주도하면서 살기보다는 끌려다니면서 삽니다. 저희 교회도 이제까지 참 많은 교역자들이 거쳐 갔는데, 가만 보면 목적 의식이나 소명이 불분명한 사람은 무슨 일이든 의욕적으로 알아서 하기보다는 시키는 일만 합니다. 예를 들면, 의자가 비뚤어졌으니 의자 줄을 좀 맞춰 달라고 하면 의자 줄은 맞추어도 바닥에 떨어진 찬송가는 주울 줄 모르는 사람이 이에 해당합니다.
“목표가 분명한 사람, 앞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은 인생을 여행으로 생각하며 살지만, 목적이 없는 사람은 인생을 고행(苦行)으로 여기며 산다.”
바울은 갈 바가 분명했기 때문에 나그네(여행자) 의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목적 의식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목회 자체가 고행인 것입니다. 이제 묻겠습니다. 당신의 삶은 과연 목적지를 향해 가는 여행자의 삶입니까? 아니면 하루 하루를 마지못해 견뎌 가는 고행자의 삶입니까?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사람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 “나도 할 수 있다” 는 확신을 가지고 삽니다.
둘째 / 남다른 창의력이 있습니다.
셋째 / 상상력이 있습니다. 비전이 있는 사람은 늘 뭔가를 생각하면서 삽니다.
넷째 / 식을 줄 모르는 열심이 있습니다.
다섯째 / 스스로 절제할 줄 압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목회 철학이 분명한 목회자는 시간을 어설프게 분산시키지 않고, 목적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매진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 목회자들에게 맡겨 주신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영혼 구원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입니다. ‘내가 왜 교회를 개척하려고 하는가? 교회는 이미 거리마다 차고 넘치는데 나도 그 대열에 한번 합세해 보고자 교회를 세우는가? 그건 아니다. 교회를 세우는 데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가장 큰 목적은 “영혼 구원과 세계 선교”이고 그 아래 실천 강령들을 다소 공산당 냄새 나게 다음과 같이 세웠습니다.
첫째/ 전주민의 교인화 - “주님, 우리 동네 사람은 다 우리 교회에 나오게 하여 주옵소서.”
둘째 / 전교인의 신자화 - “우리 교회에 발을 딛는 사람은 모두 예수 믿고 구원받아 신자 되게 하여 주옵소서.”
셋째 / 전신자의 제자화 -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으로 멈추지 않고 다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제자로 성숙하게 하여 주옵소서.”
넷째 / 전제자의 목자화 - “모두가 다 주님과 같은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잘 보살피는 작은 예수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목회자요 강해 설교가인 제임스 보이스 목사에게 어느 교인이 이렇게 물었답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가 얼마나 성장하기를 원하십니까?” 이때 제임스 보이스 목사가 아주 멋진 대답을 합니다. 『예, 저는 우리 동네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믿을 때까지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합니다.』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비전 있는 사명자를 찾으십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은 어떤 목회자를 쓰고 싶어하실까요?
4 무릎 목회
기도의 사람들
이 그림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알버트 듈러의 「기도하는 두 손」입니다. 결국 이 기도하는 두 손의 힘이, 즉 친구의 기도의 힘이 한 친구를 세계적으로 위대한 화가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자동차 왕 헨리 포드(Henry Fofd)가 70세 되었을 때 기자가 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포드 선생님, 일생을 돌아보실 때 선생님 손으로 하셨던 일 가운데 가장 위대한 업적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기자는 이런 대답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포드의 대답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습니다. 그는 멋진 그리스도인답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가 이 두 손으로 이룬 가장 멋진 일이 있다면 그것은 두 손 모아 기도해 온 일입니다.』자동차를 발명한 것도 아니요, 자동차를 수리한 것도 아니요, 세계적인 자동차 공장을 세운 것도 아니요, 평생 두 손 모아 기도한 것이 그가 손으로 해낸 가장 위대한 일이었다는 얘기입니다.
본문 누가복음 11장은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장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론적으로 기도를 가르쳐 주시기보다는 기도의 본을 직접 보여 주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목회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무릎 목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마디로 모두들 “무릎을 꿇을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의 무릎 목회, 엘리야의 무릎 목회, 다니엘의 무릎 목회, 느헤미야의 무릎 목회, 베드로의 무릎 목회, 바울의 무릎 목회, 그리고 야고보의 무릎 목회, 야고보는 느지막이 믿음을 받아들인 사람이지만 무릎으로 산 사람이었기에 그의 별명이 “낙타 무릎”입니다.
E. M. 바운즈는 “무릎 꿇을 줄 아는 자가 가장 강한 자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한국대학생선교회 사역에도 많은영향을 끼친 바 있는 데이빗 학킹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를 방문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아주 독특한 광경을 목도했습니다. 3천여 명이 모이는 큰 교회였는데 의자와 의자 사이의 간격이 유난히 넓었습니다.
예배 시간에 성도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 있도록 의자와 의자 사이를 넓게 벌려 놓았다는 것입니다. 얼마 후 예배가 시작되었는데 장로님의 말처럼 대표기도 시간이 되니 70% 정도는 바닥으로 내려와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설교가 끝난 뒤 합심 기도 시간이 되자 새신자를 제외하고는 거의가 의자 바닥으로 내려와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크게 감동 받았습니다.
『무릎으로 사는 그리스도인』 이 책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어찌하여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토록 자주 좌절하는가. 그 이유는 기도를 너무 적게 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수많은 교회 봉사자들이 그토록 자주 용기를 잃고 낙심하는가. 그 이유는 기도를 너무 적게 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현대 교회들의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불이 꺼져 있는가. 그 이유는 진실한 기도가 너무 적기 때문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실패의 요인이 은밀한 기도의 결핍에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기도의 실천을 ‘피곤케 하는 종교 의식’ 쯤으로 간구함으로써 기도를 최대한 축소시키는 일에 스스로를 정당화시키고 있다.”
저자는 계속하여 이렇게 충고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스도를 위해 일할 수도 있고, 장시간 성경공부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아주 열렬하며 진실하며 흡족할 만큼 전도와 개인적인 교제에 힘쓸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어느 한 가지도 깊은 기도가 없는 한 진정한 효력은 기대하기 어렵다.”
사실 수많은 사건들과 일들이 기도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다 기도의 사람이요, 특별히 무릎 꿇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가만 보면, 무릎 꿇고 기도할 때 자기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렇게 하여 자기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더 확실히 깨닫게 되고 자신의 무능함을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무릎을 꿇으면 꿇을수록 분명해지는 사실입니다.
위대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기도로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서울에 있는 「명성교회」담임목사인 김삼환 목사님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 분은 정말 기도를 많이 하는 분입니다. 그 분은 학문적으로는 내세울 것이 없는 분인지 몰라도, 기도와 목회만은 얼마나 탁월하게 하시는지 모릅니다. 시카고「윌로우크릭 커뮤니티 교회」빌 하이벨즈 목사도 신학 대학에서 4년 공부한 것이 학력의 의 전부이지만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며 훌륭히 목회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 『기도하지 않고 살기에는 너무 바쁜 삶이다』(too busy not to pray)에서 너무 분주히 살아가느라 기도하지 못하는 성도가 너무 많다고 지적합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도는 아침을 여는 열쇠이며 저녁을 잠그는 자물쇠이다.” 목회자가 됐건 아니건 어떤 식으르든 세상에 영향을 주었던 훌륭한 지도자들을 보면 모두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느 책자에 따르면, 미국 초대 대통령인 워싱턴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던지 그가 기도하던 교회 나무 의자가 움푹 들어갈 만큼 기도했다고 합니다. 또 미국의 33대 대통령인 트루만은 기도로 정치를 했다고 할 만큼 기도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해결해야 할 국정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는 서류 뭉치를 들고 예배당을 찾았다고 합니다. 대통령 집무실에서 해결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 가서 기도로 해결했습니다. 또 링컨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규칙적으로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는데 기도 시간에는 막사에 흰 손수건까지 걸어 놓았다고 합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발명에 들이는 노력만큼 기도에도 힘을 썼습니다.
조지 뮬러는 방석에 구멍이 뚫릴 만큼 기도했고, 마르틴 루터는 바쁠수록 더 많이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중국 선교의 아버지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에 해가 떠오르는 시각에 허드슨은 언제나 무릎을 꿇고 있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꾸준히 기도했습니다. 헨델은 금식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메시아라는 대곡을 썼고, 강철왕 카네기는 매일같이 기도함으로 경제 불황 속에서 위대한 사업가로 부상했습니다. 늦게서야 복음을 받아들인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총감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기도의 힘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처음 신앙을 가질 때부터 마가 다락방에서 기도의 능력을 체험한 그는 그 후로도 무릎 목회에 매진했던 것 같습니다.
낙타는 날이 저물면 짐을 내리기 위해서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날이 밝으면 짐을 지기 위해 다시 무릎을 꿇습니다. 무릎의 힘으로 살아가는 목회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릎의 승리자, 무릎의 성공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기도
예수께서는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수시로 보여 주셨습니다. 무릎을 꿇을 때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이 생깁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 제자들에게 기도의 방법론이 아닌 기도의 본질을 네 가지로 일러주고 계십니다.
#1 |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
얼마나 평범한 얘기입니까? 얼마나 많이 들어 온 얘기입니까? 그런데 예수께서 주신 기도의 메시지를 가만 보면 기도에는 절대적인 믿음이 전제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비유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자기를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밤늦은 시각인데도 친구 집에 가서 떡 좀 빌려 달라고 부탁합니다. 비록 야심한 시각이지만 친구이기 때문에 문도 열어 주고 떡도 빌려 줄 것으로 믿었기에 찾아갔을 것입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예수께서 이런 비유를 드신 데에는 의도가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친구들 신뢰하기에 늦은 시간에라도 가서 부탁하는 이 사람을 보라. 그런데 너희는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얼마나 믿고 그분께 기도하느냐?’ 더군다나, 이 땅에서 믿음을 지키느라 전투하듯 살고 있는 우리를 보실 때 하늘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민망하고 측은하시겠습니까? 당신은 그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고 계십니까? 믿고 구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주십니다. 아버지를 믿으십시오.
기도할 때 우리는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을 얼마나 믿고 기도합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간단하게 말씀하십니다. “한밤중에 친구에게 달려가 떡을 달라고 할 정도의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으로 아버지께 기도해 보라.”
#2 |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
본문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은 작정이라도 하고 간 것처럼, 친구가 문을 열어 줄 때까지 끈질기게 문을 두드렸을 것입니다. 이러한 집요함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평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8절).
친구 사이에도 체면 불구하고 강청할 수 있다면, 아버지이신 우리 하나님께는 무엇을 구하더라도 떼를 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기도 지침이 무엇입니까?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아닙니까.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점층적인 강청의 원리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믿음이 부족하더라도 기도는 해놓고 볼 일입니다.
육체적으로 피곤하고 힘들어도 응답받을 때까지 강청하는 기도를 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힘들어도 숨은 쉬어야 하듯, 지칠수록 오히려 기도가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몸이 아프고 연약할 때, 아프고 연약한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있으면 더 아프고 피곤해집니다. 그러나 주의 능력을 얻고자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희한하게도 새 힘이 솟아납니다. 일이 안 될 것 같고 힘들 것 같고 끝날 것 같고 틀린 것같이 느껴질 때에도 포기하지 않고 믿음으로 계속해서 강청하는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당신에게도 이런 체험이 있지 않습니까?
기도는 이론이 아니라 체득입니다. 체득 기도의 위력을 체험하는 비결은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까지 기도하면 됩니다. 예수께서는 누가복음 18장에서도 억울한 과부의 비유를 들어 기도하는 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습니까? 저는 이 말씀이 얼마나 든든하고 좋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끝까지 기도하지 않고 도중에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응답이 오다가 말아 버립니다. 기도를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응답은 오게 되어 있습니다.
목회자라면, 실력이나 명석함이나 신학적 지식이나 유창한 설교 능력도 있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무릎 꿇을 줄 아는 자세입니다.
그냥 “기도하라” 한마디면 됐지 왜 굳이 예수님이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하셨겠습니까? 한번 기도하기 시작했으면 결말을 볼 수 있을 때까지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도의 사람 조지 뮬러는 평생 친구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했는데 한 친구를 위해서는 무려 65년 동안을 기도했다고 합니다.
#3 |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
본문 비유에 보니 이 사람은 친구 집에 가서 막연하게 떡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떡 세 덩이만 빌려 달라고 구체적으로 요구합니다. 기도가 구체적일수록 더 간절해지게 마련입니다.
존 라이스 목사님이 쓴 『기도』(The Prayer)라는 책에서 제가 배운 것 중 하나가 “구체적인 요청에 구체적인 응답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직접 체험한 진리입니다. 예수께서도 본문 8절에서 “그 소용대로 주리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구체적으로 기도할 때 기도하는 재미를 체험할 것입니다.
기도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투쟁하듯 기도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구체적으로 기도해 보십시오. 기도를 잘하는 사람을 보면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조목조목 하나님과 깊이 대화하듯 기도합니다. 구체적으로 기도할 때는 기도하다가도 계획이 떠오르고 생각이 떠오르고 아이디어가 떠오르지만, 추상적으로 기도할 때는 그런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습니다.
#4 |
사랑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
본문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은 지금 자기 자신을 위해서 밤늦은 시각에 이웃집에 떡을 빌리러 간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찾아온 지치고 허기진 친구를 위해서 이웃집에 떡을 얻으러 간 것입니다. 오랜 여행 끝에 저녁 늦게야 도착했으니 얼마나 배가 고팠겠습니까? 이 친구를 위해 지금 체면 불구하고 문을 두드리고 잠자는 사람을 깨우고 있습니다. 목회자에게 이런 마음이 필요합니다. 목회자는 자신이 돌보고 있는 양들을 위해 목자의 가슴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떠올리면서 기도할 때 그 사람들에 대해 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십니까? 사랑하지 않고 줄 수는 있어도, 주지 않고 사랑할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지 않고도 빌려 달라고 하면 체면상 빌려 줍니다. 거지가 구걸하러 왔을 때 귀찮아서 줍니다. 그러나 주지 않고는 사랑을 못합니다. 이것을 약간 바꿔서 말하고 싶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맡고 있는 교인들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부디, 사랑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열매들
#1 |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 기도하는 자들에게 좋은 것으로 주십니다. |
믿건대, 기도하는 만큼 하나님께서 반드시 좋은 것으로 후하게 주십니다. 아니, 기도보다 항상 더 좋은 것으로 주십니다.
#2 |
아버지를 믿고 강청하는 믿음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속적이고 구체적으로 기도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
예수께서 본문에서 이 점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저자 누가는 특별히 기도와 성령의 역사를 강조합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골자가 무엇입니까? “기도+성령=기적”, 이것입니다. 의사로서 기적을 얘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성령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모든 지식 위에 뛰어나신 성령께서 일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강해 설교가의 대가인 워런 위어스비 (Warren W. Wiersbe)는 이렇게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잘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할수록 성령께서는 그 말씀을 더 잘 가르쳐 주십니다.” OM 선교회 총재이신 조지 버워는 선교사로 지원할 만큼 복음에 대한 열정이 있는 사람들도, 성경공부나 신학 강좌나 선교 세미나에는 잘들 참석하면서 기도회에는 유난히 저조한 참여율을 보인다고 합니다. 구세군의 창설자인 윌리엄 부드(William Booth)는 이렇게 충고합니다. “모든 것이 당신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일하고 모든 것이 당신 기도에 달려 있는 것처럼 기도하시오.”
5 맨발 목회
맨발의 위력
모세의 호렙산 불꽃 체험기는 아주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19세기의 유명한 복음전도자였던 무디(D. L. Moody)는 모세의 120년 인생을 이렇게 세 단계로 나눕니다.
첫 번째 40년 / 스스로를 대단한 존재로 생각했던 단계입니다.
두 번째 40년 /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여기며 인생을 체념했던 단계입니다.
세 번째 40년 /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아닌 자를 쓰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단계입니다.
무디가 이렇게 해석하기 전에 스데반은 벌써 사도행전 7장 30절에서 모세의 인생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40년이 차매」천사가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이 구절에서 우리는 스데반이 모세 인생의 두 번째 단계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디안 광야로 쫓겨간 모세가 그 곳에서 양을 치면서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완전히 깨달을 때까지 40년을 침묵하고 계셨다가 마침내 호렙산으로 찾아오셨습니다. 모세는 이 날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함으로써 인생의 새로운 도약을 하게 되며,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힘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때부터 떨기나무의 불곷럼 타오르는 모세의 열정적인 제3의 인생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아직도 스스로를 대단한 존재로 여기며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제 미디안 목장에서의 모세처럼 우리는 진정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새롭게 깨닫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아닌 자”를 들어 쓰기를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모세처럼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 두 과정이 우선 되어야 할 것입니다.
#1 |
꺼지지 않는 능력의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
성령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갑론 을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의 능력을 직접 체험하는 일입니다.
모세는 인생의 모든 꿈을 포기한 채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양들을 치고 있었습니다. 미디안 땅에서 십보라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아들딸 낳고 양들을 기르다 보니 그전에 가졌음직한 패기나 야망이나 비전은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지내는 동안 어쩌면 모세의 마음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조차 희미해져 가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젊은 날의 모세는 “히브리 민족”이라는 말만 들어도 피가 끓던 의협심 강한 청년이었으나 이제 팔순이 된 모세에게는 “하나님”도 “민족”도 “사명”도 낯설고 생소한 단어가 되어 버린 지 오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미디안에서 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호렙산 기슭까지 양무리를 끌고 갔던 모세는 그 곳에서 신비한 광경을 보게 됩니다. 떨기나무에 분명 불이 붙었는데 기이하게도 나무가 전혀 타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온이 높고 습도가 낮은 사막 기후에서는 가시덤불에 불이 붙는 일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불붙은 나무가 타지 않는 것은 신비 그 자체였습니다. 모세는 한참 동안 넋을 놓고 보다가 가까이 다가가 보기로 했습니다. 발걸음을 떼는 순간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음성이 들려 옵니다. “모세야 모세야”(4절). 40년 만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이 장면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떨기나무는 힘없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동시에,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꿈을 잃고 실패와 무력감 속에 살았던 사람, 모세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떨기나무는 가시덤불을 말하는데, 나무 중에서도 가장 쓸모 없는 것이 가시덤불이지만, 이런 가시덤불에도 여호와의 불이 임하시니 놀라운 빛을 발하게 되었다고 해석합니다. 가시덤불이 쓸모 없는 나무이듯 우리 인생이 바로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지 않는 이상, 우리의 인생은 그런 가시덤불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런 체험을 한 지 4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 신명기 33장 16절에서 40년 전 호렙산의 체험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땅의 보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 가시떨기나무 가운데 거하시던 자의 은혜로 인하여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 모세는 눈을 감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빌며, 떨기나무같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던 자신에게 찾아오신 그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금 언급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세가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된 시점입니다. 즉 모세 스스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깨달았을 때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아닌 자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아무 힘도 없는 자에게 더 큰 능력을 주십니다. 아무 실력도 없다고 깨달을 때 더 큰 권능을 주십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더욱 크게 나타납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마른 막대기를 쓰시는 분이고 타다 만 부지깽이를 쓰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간다면 우리가 속한 곳이 곧 하나님의 산, 시내산이 될 것입니다. 당신이 서 있는 그 곳에서 하나님을 체험함으로, 그 곳이 21세기의 시내산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나무 중에서도 가장 하찮고 별 볼일 없는 떨기나무 같은 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능력이 임할 때는 꺼지지 않는 불, 계속해서 활활 타오르는 불이 될 수 있습니다. 호렙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경험한 모세는 이 날 이후 40년 동안 (120세의 나이에도 눈이 흐려지지 않을 만큼) 지치지 않고 타오르는 불과 같은 활화산 인생을 삽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 곁에서 3년 반 동안 철저한 제자 훈련을 받았지만, 그들이 정작 능력 있는 제자의 삶을 살게 된 것은 오순절 성령의 불을 체험한 이후였습니다.
떨기나무를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멋진 나무도 많은데 하나님께서 왜 하필 떨기나무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셨을까요? 일반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연기만 자욱한 법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떨기나무에서는 연기 없이 신령한 불만 환하게 타오름으로써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났습니다. 시골부엌에서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 보면, 불을 피울 줄 모르는 사람이 불을 피우면 정작 붙어야 할 불은 안 붙고 연기만 무성하여 기침과 눈물로 고생만 합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연기만 피워 다른 사람 눈에서 눈물 나게 합니다. 가시덤불은 하나님 앞에 쓰임 받지 못하면 사람이나 찌를 뿐 유익을 끼치지 못합니다. 저나 당신이나 가시덤불과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안에서 무한히 멋진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라는 기가 막힌 특권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2 |
맨발의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두 번째로 나타나십니다. 모세가 이 희한한 광경을 좀더 가까이서 살피려고 떨기나무 근처에 갔을 때 하나님께서 다정한 목소리로 모세를 부르십니다. 4절입니다. “모세야 모세야.” 그러자 모세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5절). 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하십니까?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배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했던 모세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훌륭한 강해 설교가요 목회자로서 세계적으로 많은 영향를 끼치고 있는 워런 위어스비는 이런 말을 합니다. “무슨 일이건 하나님 없이 그 일을 하는 사람은 비참하게 실패하든지 아니면 더 비참하게 성공하게 되어 있다.”
“모세야, 40년이라는 세월 동안 양치기로 지내면서 무엇을 배웠느냐? 네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터득했느냐? 이제부터는 맨발로 시작해라. 역사(役事)는 나 여호와가 이루는 것이지 네가 하는 게 아니다. 구원은 오직 내게만 있는 것이다.”
가만히 보면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맨발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아도,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는 명령을 받들어 위대한 행보를 내딛지 않습니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말씀은 빈손 내지는 맨몸으로 가라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또 야곱은 집에서 도망나와 밧단아람에서 20년 동안 맨바닥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훈련을 받습니다. 요셉을 크게 쓰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를 형들의 손에 팔려가게 하시고 보디발의 종으로 지내게 하시는 등 맨발로 인생을 시작하게 하시기는 다니엘이나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것과 동일하게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수5:15참조). “여호수아야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여리고 성의 정복 여부는 이스라엘의 군사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능력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네 신을 벗어서 맨발로 시작해라. 모세도 그렇게 하였다.” 기억해 보건대,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널 때도 제사장들은 신을 벗은 채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맨발의 믿음이 절대 필요합니다. 맨발의 신앙으로 제대로 훈련받은 목회자는 어느 사역 현장에서든지 (사람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조건을 갖추었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중요합니다.
6 피 목회
펠리커니즘과 걸레
신학적 입장은 완전히 다르지만 그래도 인간적으로 희생적인 삶을 살았던 아프리카의 아버지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는 “펠리커니즘”(Pelicanism)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펠리컨이라는 새는 아주 특이한 습성을 가지고 있는데, 죽을 때 부리로 자신의 가슴을 쪼아 피를 쏟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쏟은 피를 새끼들에게 먹여 놓고 자신은 서서히 죽어 간다고 합니다. 슈바이처는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을 일컬어 펠리커니즘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걸레주의 목회” 걸레라고 하는 것은 필요할 때는 쥐어짜기도 하고 바닥에 대고 박박 문질러 쓰기도 하다가, 다 쓰고 나면 어떻게 합니까? 누가 걸레를 꼬까옷 모시듯 얌전히 갖다 놓습니까? 대개는 구석에 집어 던져 놓습니다.
최동진 목사님 말씀이, 가만 보면 목회자나 걸레나 처지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도 필요할 때는 얼마나 희생적으로 일해야 합니까? 자기 자신을 목회에 쏟아 바쳐야 됩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건강을 잃거나 하여 제 힘을 발휘하기가 어려워졌을 때 교회는 오래 못 기다린다고 합니다. 빨리 사임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그럴 때 시험들 것 없습니다. ‘나는 걸레다’ 생각하고 언제든지 훌쩍 떠나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목회는 피 목회입니다. 예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목회, 순교의 목회, 희생의 목회를 모두 포괄하는 한마디를 찾으라면 저는 “피 목회”라는 말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참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워런 위어스비 목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축복(blessing)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 흘림(bleeding)이 있어야 한다.
낮은 자리에서 얻는 존귀함
예수께서 유대인의 최고 명절인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다는 소식을 들은 유대인들은 이때까지도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생각했기에 큰 기대감으로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12장 12,13절이 묘사하고 있는 바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입성하신다고 하니 굉장한 사건이 벌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고, 때마침 유월절 예배에 참석하러 왔던 헬라인들까지도 이럴 때 예수님을 미리 알현해 두면 앞날 큰 유익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헬라인들이 같은 고향 출신인 빌립을 찾아가서 우리에게도 한번 예수님을 알현시켜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본문 20,21절 내용입니다. 이에 빌립은 제자 훈련반의 부반장격인 안드레에게 협조를 구해 이들을 예수께로 데리고 갑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모인 무리에게 전혀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본문 말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기대에 영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영광의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먼저 고난의 자리로 내려가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께서 들고 있는 소박한 예가 밀알 얘기입니다. 이 장에서는 이 밀알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의 목회 원리인 “피 목회”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
자기를 죽일 줄 알아야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
밀알에게는 죽는 날이 곧 사는 날입니다. 모든 밀알은 오직 죽음을 거쳐야 생명으로 싹튼다는 원리입니다. 각 씨앗에는 신비로운 생명의 배종이 들어가 있지만 그 씨가 살아 있는 한 생명은 그 안에 갖혀 있을 뿐입니다.
자기 주장이 강할수록 대인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며 그런 사람일수록 더 외로움이 큰 법입니다. 똑똑하고 학벌도 좋고 인물도 잘 생겼으니 그야말로 흠잡을 데가 없는 사람인데 주변에 사람이 별로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주장이 강하다 보니 친구가 붙지를 않는 것입니다.
자아(自我)가 강한 사람일수록 잃는 것이 많고 상처를 쉽게 받고 외로움도 짙습니다.
본문 말씀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구절에서 외로움과 풍성함의 대칭적 격차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는 사람은 계속 혼자 남게 되는 반면, 자기를 죽일 줄 아는 사람은 그 곁에 사람들이 모이게 마련입니다. 자신을 죽일 때 인생이 풍요해집니다. 그렇기에 인생은 살기 나름입니다.
“사람의 인격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스티로폴 인격’입니다. 스티로폴이 무얼 흡수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물에 놓아도 둥둥 뜨고 도무지 융합할 줄 모릅니다. 그렇다고 시멘트에 붙기를 하나, 융화가 안 되니까 뿌드득뿌드득 소리만 요란하고, 또 잘못 건드리면 바스러져 주위를 지저분하게 만들기 일쑤입니다. 그런 반면, ‘스펀지 인격’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스펀지는 누르면 눌렸다가 다시 손을 놓으면 원상 복귀하는가 하면, 물에 놓으면 물을 빨아들이고 잉크를 떨어뜨리면 잉크를 빨아들이고 기름을 떨어뜨리면 기름을 빨아들이는 등 뭐든지 다 흡수하면서도, 언제든 자기 모습을 되찾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이 가져야 할 인격은 바로 이 스펀지와 같은 인격일 것입니다.” 당신의 대인 관계는 얼마나 부요합니까?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어 가고 있습니까? 당신은 얼마나 자아(自我)가 죽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밀알이 죽기 위해서는 춥고 어두운 땅속에 파묻혀야 합니다. 밑바닥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2 |
자기를 희생하는 자가 영원한 기념이 됩니다. |
예수님의 말씀은, 밀알의 비유에서 좀더 적극적인 차원으로 이어집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25절).
늘 자기부터 챙기고 자기만 생각하며 자기 몸을 사리는 사람은 나중에 가서는 여러 사람에게 잊혀지는 존재가 됩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라는 말에서 ‘생명’은 헬라어로 『프쉬케』(psuche). 즉 “자아”(ego)를 가리킵니다. 자존심만 내세워 자기 몸을 아끼는 사람은 어느 누구에게도 아름답게 기억되지 않는 존재로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에서의 ‘생명’은 헬라어 『조에』(zoe)를 번역한 말로서, “한 번밖에 없는 고귀한 인생”을 가리킵니다. 자기 인생을 미워한다는 것은 증오한다는 말이라기보다는, 덜 값어치 있게 여긴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한 번 살고 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고귀한 인생을 아끼지 않고 희생할 때 그 인생이 영원히 기념될 것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역사적으로 희생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영원히 기념되고 있습니다. 왜 그토록 그리스도인들이 사도 바울을 존경하며 그 분을 그리워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희생을 본받아 살았기 때문입니다.
희생 없이 성공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귀한 양들을 이끌어가야 할 목자들입니다. 양은 앞에서 이끌고 가야지 몰고가서는 안 됩니다. 목사는 양을 위해서 언제나 기꺼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하며, 언제나 앞장 서서 양을 이끌고 갈 수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가 깨지지 않으면 교인이 상처 받습니다. 목회자가 부서지지 않으면 교인이 대신 부서져야 합니다. 내가 스펀지가 되면 다 받아들일 수 있지만 스티로폴이 되면 다른 사람이 대신 부서져야 합니다.
“당신의 삶을,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을 가지고
측정해 보십시오.
마신 포도주에 의해서가 아니라 쏟아 부은 포도주에 의해서,
왜냐하면 사랑의 힘은 사랑의 희생 속에 있으며
가장 많이 고통을 당한 사람이
가장 많이 줄 것을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요,
가장 많이 희생을 당한 사람만이
가장 많이 고통을 당한 사람만이
가장 많이 줄 것을 소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
예수님처럼 섬기는 자가 존귀하게 됩니다. |
자신의 명예와 영광만을 추구하며 큰 기대감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운집한 큰 무리들을 예수님은 청천 벽력 같은 말씀으로 압도하시다가 26절에 와서는 광장히 적극적이고 희망적인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결국, 예수께서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걷는 자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존귀함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섬기는 자를 좋아하십니다.
예수께서 26절 말씀에서 약속하고 있는 하나님의 축복은 두 가지입니다. 우선, 천국에서의 복락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그리고, 높여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다윗은 이 진리를 미리 터득했기 때문에 평생토록 희생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반스라는 전도자는 “내 인생을 녹슬게 하느니보다는 태워 버리는 것이 훨씬 더 좋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듯이 인생은 다음 두 가지 길 중 한 길을 걷게 마련입니다. 녹슬어서 못 쓰게 되는 인생이든지, 아니면 닳아서 못 쓰게 되는 인생이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어떤 인생을 사느냐 하는 선택은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강해 설교자이자 탁월한 목회자 워런 위어스비는 “성숙하는 것이 떠나는 것보다 쉽다. 만일 도망간다면 다음 장소에서도 같은 문제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왜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성장하기를 원치 않는가.”
한 알의 밀알이 되고자 하는 헌신된 마음을 가진 목회자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대입니다. 고(故) 박윤선 목사님의 목회 정신은 한마디로 “침묵 정진”(沈黙精進)이었습니다. 오직 주님을 위해 묵묵히 사역의 길을 걸어가는 목회자야말로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참목자일 것입니다.
7 21세기 목회
주님이 친히 세우시는 교회
“지금은 교회를 세울 때가 아니다. 지금은 개척할 때가 아니다”하는 것은 인간적인 생각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분께서 친히, 특별히 교회의 머리 되시는 예수께서 친히 “지금도 세워 가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철학과 함께 주님의 교회에 대한 확신을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주님이 직접 세우시고 주님이 직접 다스리시며 주님이 직접 축복하시고 주님이 직접 성장시켜 주시며 부흥 운동을 일으켜 주십니다.
비전이 분명하십니까?
목회자라면 세계 교회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는 늘 파악하면서 교회를 이끌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현대 교회의 가장 큰 관심거리가 예배 문제입니다. 특별히, 예배 의식(儀式)에 대한 필요성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는, 영성(靈性)이 살아 있는 예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는 예배에 대한 욕구가 점점 커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예배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일주일 동안 생존 경쟁의 장(場), 투쟁의 장에서 거의 녹아웃되어 돌아온 성도들에게 교회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예배를 통한 회복밖에는 없습니다. “예배에서 성공하면 모든 것에서도 성공하지만, 예배에서 실패하면 모든 것에서도 실패합니다.” 예배에서 힘을 얻는 성도는 그리스도인답게 기운 있게 어깨를 펴고 세상 앞에 나아갈 수 있지만, 예배에서 실패하면 교회가 아무리 열심히 성경 공부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제자훈련을 시킨다 해도 무력함을 느끼게 됩니다.
21세기 교회는 종전까지 교회들이 지향하던 것과는 달리, 성장하는 교회보다는 건강한 교회를 지향합니다. “전교인의 사역자화”가 교회의 모토가 되고 있습니다. 요즘 미국에서는 “건강한 교회 4H 운동”이라는 것이 한창인데,
첫째 / “head"- 하나님 말씀을 지식적으로도 정립한다.
둘째 / “heart" - 가슴에는 뭉클한 감동을 준다.
셋째 / “hand" - 손과 발로 직접 실천한다.
넷째 / “health" - 이렇게 될 때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된다.
옛날에는 동네가 다 내려다보이는 언덕이나, 산 위에 교회를 많이 세웠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갈수록 교회와 지역 사회의 거리가 좁혀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런 추세에 발을 맞추는 것인지 미국 교회들이 요사이 이름을 많이 바꾸고들 있는데 특히 “커뮤니티 처치”(community church)라는 명칭을 선호하는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이제는 교회가 지역 사회를 위해 봉사함으로써 관계를 세워야 하며 그렇게 할 때 전도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오늘만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원래부터 취해야 했던 자세입니다. 모든 교회는 지역을 위해서 봉사하는 교회, 사회를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비치이고 소금이므로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섬길 책임이 있습니다.
만일 한국 교회가 기존 교회의 구태(舊態)를 벗어버리지 못한다면 조만간 교회는 더 이상 젊은층들을 끌어들이지 못하는 구닥다리가 될는지 모릅니다. 젊은이들을 교회로 끌어들이지 못하면 또 하나의 “에베소 교회 신드롬”이 재연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노후화하고 만다는 말입니다. 새 시대를 향한 새로운 도약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처음 설립할 때부터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뭔가 분명한 교회 창립의 비전이 있어야 되고 철학이 있어야 되고 목표가 있어야 되고 교인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 방향성이 있어야 합니다. 하다 못 해 작은 사업을 시작해도 막연하게 뛰어들지는 않는 법입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사업 철학과 구상과 전망과 미래의 비전을 가지고 시작하게 마련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교회를 이끌어가고 세우는 데 어떻게 그렇게 가볍게들 생각할 수 있습니까?
내가 세우는 내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이 세우시는 주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또 목사 자신이 ‘이것은 주님의 교회이다’라는 의식이 분명할 때 교인들도 목사를 신뢰하게 되고 교회의 비전에 헌신하게 됩니다. 앞을 향해 나가는 뚜렷한 목적과 방향성이 있을 때 교인들은 함께 성장하게 되고 그것이 교회를 건강하게 만듭니다. 이제는 개인이 교회를 건강하게 만듭니다. 이제는 개인이 교회를 세우는 시대가 아니라 교단적으로 교회가 교회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개척 철칙 세가지
#1 |
전도 지역을 잘 설정해야 합니다. |
교회를 세우려면 우선은 지역 설정부터 잘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목회자도 마케팅 철학을 좀 알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울 때도 지역 선정을 좀더 종합적으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장이 넓어야 고기도 많고 다양하지 않겠습니까?
지역민의 특성도 잘 분석해야 합니다. 목회자의 목회 스타일과 지역 주민의 특성이 맞을 때 좀더 효과적인 목회가 이루어지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사실입니다.
#2 |
전도 대상은 불신자를 목표로 해야 합니다. |
교회의 성장은 무엇보다도 불신자를 전도함으로써 이루어지는게 바람직합니다. 과감하게 한번, 예수 믿지 않는 불신자에게 목회 초점을 맞춰 보시기 바랍니다. 목회가 정말 재미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변화되고 구원받는 것을 옆에서 함께 경험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 즐거움인지 모릅니다.
우리나라의 개신교 신자가 몇 %인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아직도 예수 믿고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 80%나 남아 있다는 것이 중요한 과제일 것입니다.
진정 성장하는 교회라면 “수족관 전도”에 힘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수족관 전도란 제가 만든 말로서 이쪽 어항에 있는 고기 잡아다 저쪽 어항으로 옮기듯 교인들의 전입을 통해 전도 효과를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들은 수족관 전도가 아닌 어장 전도에 힘써야 합니다.
교인 양육과 관련해서 저의 목회 철학은 “변화. 성숙. 헌신” 이 세 가지로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 예수 믿게 해서 변화받게 하고 성숙한 신자 되게 해서 주님께 헌신하는 삶 살게 하면 그것으로 다 된 것입니다.
교인들이 변화받고 성장하고 헌신하면 교회가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렇게 성장한 사람들은 열정도 남다릅니다. 한번은 이 교회로 한번은 저 교회로 옮겨 다니는 사람들은 헌신도 잘 안합니다.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가기만 잘합니다. 교회 내 묵은 닭들은 알도 못 낳고 한다는 일이 햇닭들 쫓아내는 일만 합니다. 다른 교회 오래 다니다 저희 교회로 온 사람을 저는 “묵은 닭”이라 부릅니다. 묵은 닭은 어서 어서 잡아 먹는 게 상책입니다. 가만 두면 햇닭 신자가 낳은 알까지 쪼아먹습니다. 햇닭 신자가 전도해 온 사람을 시험 들게 하는 사람들이 누구냐면 묵은 닭 신자들입니다. 묵은 닭은 말씀으로 새롭게 갱신시켜 햇닭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성장하는 교회는 언제나 새신자를 등록시키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반면, 성장하지 않는 교회는 옛 사람을 다시 등록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살아남기 위한 교회 (survive church)인가” 아니면 “번창하고 흥왕하는 교회(thrive church)인가” 알아보려면 목회자의 목회 철학을 점검해 보면 금방 나옵니다.
#3 |
교회와 지역 사회는 공동 운명체임을 알아야 합니다. |
교회는 지역 사회를 위해서 개방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자들인 동시에, 세상으로 보냄 받은 자들입니다. 목회지가 시골이건 산간 벽지이건 해외 선교지이건 간에 그 지역에 그 교회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 지역이 복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가 지역을 살릴 수 있어야 하고 교회가 동네를 살릴 수 있어야 하고 교회가 지역 사회를 책임 지고 이끌어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결코 산 위로 숨어 들어간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심지어 산속에 있던 절들도 동네 속으로 들어오고 있는 상황인데 이런 때에 교회는 더욱 부지런히 지역 사회 속으로 파고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그 동네 자체를 하나님이 거하실 만한 기름진 마을로 만드는 것입니다. 지역 사회를 향해 구원의 문을 열어 주는 작업으로서 교회가 사회를 봉사할 수 있는 일들은 무궁 무진하다고 생각합니다.
21세기 목회 노하우
첫째/ 전도 목회
목회자부터 전도에 앞장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목회자들의 취약점은 전도를 좀처럼 안한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밖으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부름 받았다면 복음을 위해서 인생을 걸어야지, 교회 현판은 붙여 놓고 생활비 벌러 다니는 것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마누가 장학금”으로 목회하는 사람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배경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셔야 합니다.
“선교 지향적인 교회를 세우기로 했으면 목회자부터 그런 삶을 실천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교인들에게 설교하기 전에 나 자신부터 그렇게 살아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결단하고 살아 보니 하나님을 한층 더 잘 깊이 체험하게 되고, 설교도 더 설득력있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복음을 위해서 부름 받았다면 전도에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수준 높게, 성경신학적으로, 고차원적으로 전한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 윤리, 하나님 나라 건설, 세계 선교 동향,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 제자도, 지도력에 대해서 설교하는 것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설교 가운데, 오늘 처음 나온 사람 예수 믿게 하기 위한 복음의 메시지가 얼만큼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고려해 볼 사항입니다. 바울 같은 성령신학의 대가(大家)도 설교의 핵심은 언제나 “주 예수를 믿으라”는 것에 두었습니다. 자신의 설교를 한번 평가해 보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현대인들은 ‘정서적인 것’과 ‘관계적인 것’에 갈급해 하고 있습니다.
학교에 다니지 않아도 시골에 살아도 세계 돌아가는 소식 다 알 수 있을 만큼 정보화가 이루어졌다 해도, 현대인에겐 여전히 가슴의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초자연적인 신비체험을 더욱 갈망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그들의 텅 빈 영혼을 채워 줄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는 말이 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데는 현대인의 이러한 심리가 오히려 더 좋은 배경이 되어 줄 수 있습니다. 영적(靈的)인 갈급함은 오직 복음에 의해서만 해갈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인격목회
장기적으로 볼 때는, 목회자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이 그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목회 방법보다는 목회 원리에 더 강조점을 두셨던 것 같습니다. “산상수훈”이라고 하는 마태복음 5~7장은 예수님의 제자훈련 대헌장입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은 목회 기술을 가르쳐 주시기보다 “사람됨”에 초점을 맞추고 계십니다. 설교를 잘하고 못하는 것은 잠깐의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교인들에게 목회자의 인격이 얼마나 전달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실력이 없어서 쫓겨나는 목회자보다는 인격에 결격 사유가 있어서 쫓겨나는 목회자가 더 많지 않습니까?
성장하는 교회의 목회자들은 대부분 한 교회에서 장기 목회를 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기성 교회에 부임해서도 얼마든지 인격을 통해 교회를 갱신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떠나는 것보다는 성숙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품과 기질과 날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앉혀 놓고 원리나 기술이나 방법이나 전략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사람됨을 강조하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 변화목회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목회 내용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예배를 통한 삶의 변화를 강조하십니다. 특별히 예수께서 강조하시는 것이 “예배의 영성(靈性)”입니다. 요한복음 4장은 “예배 갱신 대헌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사람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바뀌고 세계관이 바뀌고 인생관이 바뀌고 철학이 바뀌고 사업의 원리가 바뀌고 직장 생활의 원칙이 달라지고 대인 관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예배에 집중해야 합니다.
21세기 교회는 특별히 예배 갱신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메시지는 변해서는 안되지만 방법은 시대에 따라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진리는 불변이지만 진리를 담는 그릇은 얼마든지 가변적일 수 있습니다. 다윗 시대 때는 비파와 수금 가지고 찬양을 했고 오늘날은 오케스트라로 찬양을 돕듯, 예배에도 얼마든지 이런 식의 형태 변형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이렇듯 그릇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배를 드리는 사람 모두가 구경꾼이 아니라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사도 성도도 모두 한마음, 한 영(靈), 한 믿음, 한 말씀, 한 비전으로 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하는 예배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히 요청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모두 다 가슴이 닫혀 있습니다. 얼마나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교회에 오는지 모릅니다. 직장에서는 눈치 보느라 맘껏 웃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긴장하다가 집에 옵니다. 그러나 그 긴장을 풀지 못한 채 교회에 온다면 은혜 받을 가능성은 아주 적어집니다. 그래서 그들의 가슴을 활짝 열어 젖힘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쏟아 부어 힘과 패기를 회복하게 할 수 있는 역동적인 예배가 필요합니다.
릭 워렌은 이런 세태에 개탄하며 “아트(art)로서 예배드리고 말고 하트(heart)로서 예배드리자”고 말합니다. 기교적이거나 기술적인 예배가 아니라, 예배드리는 자의 가슴이 모두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열려 있는 예배, 이런 예배에 생동감이 있으며 바른 영성이 있습니다. 진부하고 전통에 매이며 퇴보하는 교회일수록 예배에 생기가 없습니다. 예배에 생기가 있으면 성도는 딴전을 피울 수가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성도가 예배에 몰입하지 못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목회자의 책임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설교가 실제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자기가 하고 싶은 설교를 하고 있는가 아니면 청중의 필요를 인식하며 설교하고 있는가?”라는 주제를 놓고 참 많이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주로 자신의 관심을 끄는 주제를 가지고 설교를 준비합니까, 아니면 성도들의 실제적인 필요를 인식하면서 설교를 준비하고 있습니까?
21세기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 아니라 회중들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읽어 가며 목회를 해야 합니다. 성도의 필요를 민감하게 인식하는 목회가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요즘같이 경제적으로 힘들 때 교인들의 상황이 어떤지, 교회 내 실직자는 얼마나 되는지, 사업에 실패한 사람이 있는지, 하루 살기가 어려운 사람들은 없는지를 제대로 파악하여 그들에게 과연 어떤 메시지가 필요할지 고민하며 설교를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인들의 상황은 아랑곳없이, 들으려면 듣고 말려면 말라는 식으로 무조건 선포적인 설교를 하다 보면 설득력을 잃기가 쉽습니다.
목자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지금 “내 양들이 무엇을 먹고 싶어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제대로 된 목자라면 양이 무엇을 먹고 싶어하는가에 관심을 두지, 자신이 먹고 싶은 것에 우선적인 관심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목자가 매번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양에게 먹인다면 목자는 살이 찔는지 모르지만 양은 소화가 안 돼서 고생할 수 있습니다. 풍요로움 속에서 배고픔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목회자는 양을 양으로 생각해야지, 양을 목자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목회자가 성도에게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는 면에서 설교 역시 성육신이 필요한 영역입니다.
당신은 설교가 복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설교하고 있습니까?
스코틀랜드 정통 장로교 교회 온 윌리엄 블랙 목회의 두 가지 큰 원리 한가지는 “목회가 무엇인가?”, 또 다른 한가지는 “스코틀랜드의 전통적인 강해 설교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양들의 필요에 맞춰 미리 설교 계획을 짤 때 성도뿐 아니라 목회자 자신도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요즘 미국에서는 한 주제를 놓고 8~12주 정도 설교하는 게 일반적인 추세라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너무 긴 걸 싫어하니까 이 정도면 식상하지도 않고 좋다고 합니다.
목회자들은 신학교에서 잘 배운 걸 잘 써 먹어야 되는데 잘못 써 먹는 경향이 있습니다.
격려하는 설교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합니다. 믿음을 올곧게 세워 주고 소명을 심어 주며 깨어진 인간 관계를 회복시켜 주고 사랑을 회복시켜 줄 수 있는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라”는 식의 명령투 설교보다는 독려하고 격려하는 설교가 요청됩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신학적인 강론보다는 현대 문화와 인간의 현실을 이해하는 차원의 설교에 가까웠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설교는 교리적으로 오류를 찾아볼 수 없는 정확한 것이었지만 청중의 마음을 무겁게 했던 반면, 예수님의 설교는 듣는 이로 하여금 해방감과 희망, 용기, 가능성을 얻고 돌아가게 했습니다.
설교자는 무엇보다도 영혼을 사랑해야 합니다. “설교하는 것은 사랑해도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과연 사랑하고 계십니까?”
마음에 상처를 받아서 치유가 필요한 사람, 지금 사업이 부도 나서 회복이 필요한 사람, 좌절을 딛고 다시 일어나야 할 사람, 질병 가운데 시달리고 있는 사람, 가정 파탄이라는 시련을 이겨 내야 할 사람, 설교할 때 과연 그런 사람들을 마음 중심에 두고 말씀을 전하십니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암울한 상황에서 다시 우뚝 일어서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설교자인 당신의 심중에 차고 넘칩니까? 때로는 그들의 아픔을 생각하며 설교 중에 눈물을 쏟기도 하십니까?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설교하다가 우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간절한 사랑의 마음이 아닌, 단순히 설교하는 것 자체가 즐거워서 하는 설교는 회중의 아픈 심장을 어루만지기에는 역부족일 것입니다.
지적하고 비판하는 설교보다는 세워 주고 희망을 심어 주는 설교가 더 필요할 때입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까지도 정죄(定罪)하는 말씀을 하시기보다는 오히려 믿어 주고 격려해 주며,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8:11)고 권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실패할 것이 뻔한 제자들을 바라보면서도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14:12)고 말씀하사 소망을 심어 주고 용기를 얻게 하셨습니다. 선포하는 설교보다는 호소형(설득형) 설교가 필요할 때입니다. 비판보다는 창조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비판할 때가 아니라 희망을 심어 줘야 할 때입니다. 부정의 언어 대신 긍정의 언어를 말하고 용기를 심어 줘야 할 시대입니다.
넷째/ 양육 목회
예수님은 사람을 키우는 데 철저하게 온 힘을 드리신 분입니다.
어떤 목회학 책에 보니, “잡초를 제거하는 일 때문에 너무 노심초사하지 말고, 오히려 좋은 풀을 기르십시오. 그것이 잡초를 제거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풀이 자라다 보면 잡초는 곧 죽게 되어 있습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에 말썽 부리고 말 잘 안 듣고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사람들이 있다 해도 포기하지 말고 사람을 키우고 양육하는 데 힘을 쏟으라는 말입니다. 문제를 제거할 것인가 축복을 자라게 할 것인가는 목회자 하기 나름입니다. 가지 치기하듯 매일같이 이 사람 치고 저 사람 치고 이 사람 자르고 저 사람 자르고 하다 보면 목회에 발전이 없습니다.
목회자들이 은근히 폐쇄적인 성향이 짙어서, 자기 마음에 안들거나 비위에 거슬리거나 또 자기 양들이 잘 안 크는 것 같으면 그 사람을 마치 믿음이 없고 영영 틀려먹은 사람처럼 생각해서 자꾸 가지 치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모난 성도가 은혜롭고 아름다운 형상으로 성숙하는 과정을 차마 경험하지 못하고 (이것이 비길 데 없는 목회의 즐거움인데도 말입니다) 그를 다른 곳으로 밀어 버리고 맙니다. 아무리 가능성 없어 보이는 양이라도 다른 교회로 가기를 바라지 말고 열심히 양육하십시오. 잡초를 뽑으려고 하지 말고 좋은 풀을 키우려고 하면 잡초는 자연적으로 죽게 되어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양육을 하기 위해서는 목자의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지휘봉을 들기보다 수건을 허리에 두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베드러전서5장 4절에 보면 예수님을 가리켜서 “목자장”이라고 언급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베드로는 목양이 뭔지 제대로 터득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베드로를 찾아와 따뜻한 불을 피워 주면서 젖은 옷을 말려 주고 허기진 배를 채워 주고 생선을 구워 주시는 등, 결국 목양을 통해서 사람을 변화시키고 성장시키시던 예수님을 묵상해 보십시오.
목자의 심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섯째 / 사역 분담 목회
예수께서는 또한 전파하고 가르치고 봉사하는 총체적인 사역을 이뤄 나가셨습니다. 사역을 분담하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무디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열 사람 몫의 일을 하는 대신 열 사람의 일꾼을 키우겠다.”
더디더라도 사람을 잘 키워 놓으면 장기적으로 볼 때 훨씬 효율적입니다. 교회 사역은 어디까지나 분담 체제 아래 행해져야 합니다. 직분자를 세우는 것이 성경적인 목회방법입니다. 사역은 목사 혼자 하는 게 아닙니다. 백성의 일을 재판하는 일로 모세가 하루 종일 분주한 것을 보고 장인 이드로가 그의 일을 대신하여 줄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울 것을 권면하였듯이, 사역을 분담하는 일은 구약시대 때부터 내려온 성경적인 방법입니다.
사실 21세기 교회는 단순한 ‘분담 체제’에서 ‘적소 위임 체제’(segments into niches)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이제 교회는 구도자 (seekers)를 성도(saints)로 만들어야 하고, 소비자(consumers)를 기여자(contributors)로 만들어야 하고, 소비자(members)를 사역자(ministers)로 만들어야 하고, 청중(audience)을 군사(army)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한마디로 21세기 교회는 거래적 목회(transaction ministry)에서 변혁적 목회(transformation ministry)로 갱신되어 나가야 합니다.
여섯째 / 차세대 목회
이제는 기성 세대를 붙잡고 목회하기보다는 앞으로 올라오는 새로운 세대를 목표로 목회할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무리 20세기말 문화가 빚어 낸 새로운 세대라고는 하지만, 그들에게도 복음을 통한 영적인 변화는 필요하며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그들이 헌신된 하나님 나라의 주역이 되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맡겨진 새로운 세대를 바라보면서, 제대로 목회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이제 모든 진부한 옷들을 벗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선 한 사람의 사역자로서 두려운 마음으로 목회에 임할 때입니다.
영혼을 돌보는 사람으로서 원칙은 있어야 될 게 아닙니까? 우리의 관심이 어디에 가 있습니까? 한 영혼이 구원받고 변화받고 성장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헌신하는 것이 과연 우리의 주요 관심사입니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예수께서는 오늘도 끊임없이 교회 세우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부디, 하나님의 교회를 이 땅 위에 세우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자라게 하는 데 진력하시기를 바랍니다.
8 사명 목회
다시 생각하는 헌신
사명감이 분명한 사람은 헌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르심의 철학이 뚜렷한 사람, 소명 의식이 분명한 사람은 기도하게 되어 있고, 그 사명을 다하고자 헌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헌신은 하라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사명감을 불어넣어 줄 때 하게 되어 있습니다. 헌신이 무엇입니까? “관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라는 바울의 고백에서 우리는 ‘헌신’이라는 것을 세 가지로 기술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 헌신은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둘째 / 헌신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헌신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셋째 / 헌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보너스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이라는 큰 은혜말고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명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이 일 때문에 우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이 우리에게 또한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까? 나 같은 사람이 하는 사역 때문에 하나님이 흡족해 하신다면 세상에 이것보다 더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하느냐 부흥하지 않느냐를 떠나서 내가 하는 이 사역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면, 아니 이렇게 거창하게 얘기할 것도 없이, 내가 하는 이 사역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더 이상 바랄 게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헌신의 기초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관제와 같이 내 인생이 소리 없이 말없이 표 없이 흔적 없이 쏟아 부어진다 할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라 여러분도 나와 함께 기뻐해 보십시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 바로 참된 헌신입니다.
선한 싸움 : 당신의 삶은 투쟁인가?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기가 사명이 있었기 때문에 헌신을 다하면서 선한 싸움을 싸우고 살아왔다고 고백합니다. 사명 철학을 가지고 목회하는 사람은 최선을 다합니다. 사명감이 있는 사람은 최선을 다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특별히 신앙 생활을 영적인 싸움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과, 마귀와, 죄와, 자신과 더불어 싸우는 영적 전쟁터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경건하게 인생의 사명을 마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영적 싸움을 치러야 합니다. 죄악된 옛사람의 본성과, 내 기질과, 지극히 인간적인 자아(自我)와 싸워야 합니다. 때로는 너무 피곤해서 새벽기도회를 갈까 말까 고민할때도 있는데 이것 역시 사소하지만 싸워야 할 영적 싸움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싸움들이 나쁜 싸움이 아니라 “선한 싸움”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최선을 다할 것인가 말것인가, 제대로 할 것인가 적당히 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에 부딪칩니다. 그러나 좀 피곤하더라도, 목이 아프더라도, 온몸이 뻐근하더라도, 좀 지치고 힘들더라도, 손해를 보더라도, 상처를 받거나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여러 가지로 비참함을 느낀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정말 하나님과 교회와 성도와 복음과 주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면 반드시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싸움이며 내면적인 싸움이고 선한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목회자로서 어떻게 해서든지 성결하고 순결하고 진실하게 살고자 최선을 다하여 선한 싸움을 싸워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싸울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혈기의 싸움도 아니요, 육적인 의견 다툼도 아니요, 자존심 다툼도 아니며 오직 “영적인 싸움”, 즉 “선한 싸움”입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해서는 날마다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최선책을 선택하고 있는가, 아니면 차선책을 선택하고 있는가?” 여기에 따라서 싸움의 결과가 달라집니다.
가만 보면 사람에게는 차선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최선은 아무래도 힘들고 대가가 비싼 반면 차선은 좀 편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성결한 삶을 위해서, 매일 매일 자신과의 내적 싸움에서 최선을 다해 분투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날마다 나를 쳐서 복종시킨다”는 말은 콜로세움에서 맹수와 싸우던 선수가 쓰던 말입니다. 즉, 맹수를 쳐야 자신이 살 듯이 이제 바울은 자신이 영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자신을 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타협하지 않겠다는 이 싸움의 정신을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교부(敎父)이면서 신앙 개혁을 일으켰던 아타나시우스가 얼마나 멋있는 말을 합니까? “온 세상이 나를 반대한다면 나도 온 세상을 반대하겠노라.”
특별히 목회자에게 진실은 생명과도 같습니다. 지키기 어려운 말은 인사나 겉치레로라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킬 수 있는 말만 하며 못 지킬 말은 안해야 합니다.
최근에 발표된 미국의 최우수 3대 기업이 7-Eleven과 IBM과 맥도날드 햄버거입니다. 이들 세 기업 모두 아주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 경영하는 회사들입니다. 이들 기업이 최수우기업으로 선정된 첫 번째 이유가 이 기업들의 신실성 때문이라고 합니다.
누가 보지 않더라도 진실해야 합니다. 남의 차를 조금이라도 긁어 놓았다면 차에 메모를 남기고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입니다.
작은 정직이 한 영혼을 주께로 이끄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정말 사명을 가지고 목회의 현장에 나가 있는 우리라면 무엇을 하든지 선한 싸움을 싸우는 자세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달려갈 길 : 혹시 걷고 있지 않은가?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달려갈 길을 마쳤다”는 것은 곧 “사명을 마쳤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마쳤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지금 주께서 주신 직임과 사명을 다 완수했다는 승리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철저한 사명감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마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지런하게 사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싶습니다. 열심히 사십시오.
헌신이 무엇입니까? 열심히 사는 겁니다. 사명 철학이 분명한 사람은 부지런하게 삽니다.
식상한 질문 같지만 헌신(獻身)이 뭡니까? 몸을 바치는 겁니다.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의 로마서 강해를 읽었는데 저자가 로마서 12장 1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을 가지고 개인적인 표현이라서 어떨지 모르지만 용서하고 들어주십시오. 저에게는 정말 재능도 학벌도 무슨 탁월한 특기도 심지어 건강도 없습니다. 남들처럼 다재 다능한 기술이 있는 것도, 훌륭한 배경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면에서 자격 미달이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목회자로 불러 주셨기 때문에, 주님의 일을 위하여 복음 전하는 자로 불러 주셨기 때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 몸을 드리는 일입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재능도 재주도 실력도 학벌도 재물도 아니요, 오직 몸을 드리는 일뿐입니다.
저는 늘 이런 마음을 품고 살아갑니다.
“주여 내가 드릴 것 없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있나이다. 이 몸은 드릴 수 있나이다. 이 몸은 주님 앞에 드릴 수 있나이다.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목회자가 사업을 해서 하나님께 돈을 떠안겨 드리겠습니까?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도 하나는 있단 말입니다. 하나라도 있으니 감사한 것입니다. 몸은 드릴 수 있지 않습니까? 좀 피곤하거나 힘들어도, 지치고 졸려도, 우리가 정말 목회자라면 다른 성도들에게 본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새벽기도 때 몸만이라도 갖다 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와서 꾸벅꾸벅 조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헌신은 몸을 바치는 겁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이셨지만 동시에 제물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으로서 흠 없는 비싼 송아지 하나님께 갖다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목회자는 몸뿐 아니라, 무엇이든 앞장 서서 바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의 일입니다. 상가를 분양받아야 하는데 저도 적은 액수나마 헌금을 하고 싶은 소원이 간절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가운데 저도 모르게, “주님, 저도 천만 원 정도 헌금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구체적인 간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참 신비한 분이십니다. 신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도대로 역사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놀라운 체험을 통해 배짱을 두둑히 키워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훈련들을 점점 강도 높게 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바치십시오. 몸을 드리십시오. 있는 것 다 바치십시오. 목회자는 우선 교회에서 생활을 책임져 주지 않습니까.
헌신의 유익
헌신이 무엇입니까? 네비게이토 총재를 역임한 제리 화이트가 그리스도인의 헌신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책 내용을 그대로 옮겨 봅니다.
“나는 지난 25년 동안 수백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복잡 다단한 인생길을 어떻게 헤쳐나가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영적으로 풍성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생명을 부지해 가기에 급급한 사람도 있었다. 선명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미미한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영적으로 말라 시들어 버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기쁨을 누리며 격려를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평하고 투덜대기만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갈수록 영적인 깊이를 더해 가고 성숙한 인격으로 변화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천박하고 완고해져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더욱 은혜가 넘치고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저 나이만 먹어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영적으로 크게 성장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는 사람들을 비교 관찰하면서 그와 같은 차이점을 가져오는 분기점이 도대체 어디 있는가 찾아보았다. 나는 그것이 바로 헌신에 있다고 믿는다.”
인생의 중요한 시점에서 헌신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인격과 신앙에 현저한 차이가 나타난다는 것을 제리 화이트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헌신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헌신입니다. 주님께서 분부하신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 헌신입니다. 사명 있는 사람은 헌신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헌신의 유익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해 봤습니다.
#1 |
헌신은 성장을 보장합니다. |
믿음이 자라기 원한다면 헌신해 보십시오. 머리만으로의 헌신은 온전한 성장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몸과 마음의 헌신이 있을 때 고른 성장이 이루어집니다.
#2 |
헌신은 성화(聖化)를 보장합니다. |
하나님께 헌신할수록 결국 하나님과 가까워집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성품도 우리의 인격도 주님을 닮아 갑니다. 목회를 오랫동안 했어도 헌신하지 않는 목회자들은 성화되지 않는 것을 주변에서 봅니다.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목회자들이며 평생 예수 믿어도 성화되지 않을 사람들입니다.
헌신을 안할수록 내 편에 서게 되고, 헌신할수록 주님 편에 서게 되어 있습니다. 헌신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자기 편에 자기 입장은 자기 생각에 자기 사정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그들의 고백은 항상 “아직은 헌신할 때가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아야 할 것은 그런 태도가 평생 가기 쉽다는 것입니다. 반면, 헌신하는 사람은 항상 주님 편에 교회 편에 섭니다. 헌신하는 사람은 교회와의 사이에 바리케이드가 없습니다. 헌신은 하면 할수록 주님과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을 불러 일음킵니다. 해볼수록 느낄 수 있는 사실입니다.
#3 |
헌신은 성공을 보장합니다. |
하나님께 헌신하고 망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평신도가 되었건 목회자가 되었건 선교사가 되었건 어떤 사역자가 되었건, 헌신하면 결국은 다 복 받고 흥왕하며 성공하게 되어 있습니다.
헌신하고 망한 사람을 제가 보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그의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37:25). 하나님께서는 그분 보시기에 의로운 자, 헌신된 자의 자손이 비참하게 사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십니다.
헌신은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헌신을 하면 할수록 믿음이 커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멘입니까? 헌신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기 때문입니다. 헌신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형통하게 하십니다.
한국의 훌륭한 목회자들을 보십시오. 대부분 젊어서부터 헌신한 분들입니다. 젊었을 때 물불 가리지 아니하고, 조그만 시골 교회 하나를 위해서도 인생을 쏟아 바치고 헌신할 때, 작은 것을 귀하게 여길 때, 하나님께서 큰 것도 믿고 맡기심을 아시기 바랍니다.
지켜야 할 믿음 : 믿음을 붙들고 있는가?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 믿음을 지켰으니.” 사명이 있는 사람은 신조(信條)가 분명합니다.
오늘날 사명자로 부름 받은 우리는 신조가 분명해야 합니다. 바울처럼 말입니다.
“내가 …믿음을 지켰으니.” 사명을 위해서라면 우리 기본적인 신앙의 노선과 신앙의 입장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혹시 이런 생각이 은연중에 우리를 유혹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신조니 신앙의 노선이니 필요없고, 꿩 잡는 게 매라고 우선 숫자를 불리고 봐야 한다. 우선 교회부터 크게 짓고 봐야 한다.” 그러나 교회 성장은 조금 더디더라도 결국에 가서는 “내가 믿음을 지켰노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흐뭇한 사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역의 위대한 모본이었던 바울은 초지 일관되게 말합니다. “내가 … 믿음을 지켰으니.”
초지 일관되게 자기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욥이 뭐라고 합니까? “나는 단정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죽기 전에는 나의 순전함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욥27:5).
바울이 끝까지 하나님 편에 서는 신앙을 지키게 된 원동력이 어디 있습니까?
아브라함 링컨이 노예 해방을 위해서 전쟁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남북 전쟁 당시, 인권 옹호를 위해서, 노예 해방을 위해서,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 선한 철학을 가지고 전쟁을 이끌어 갔던 북군의 전세가 점점 기울어졌습니다. 남군이 승세를 잡기 시작합니다. 그때 참모들이 링컨에게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각하, 아무래도 하나님께 우리 편이 되어 주시기를 간구해야 되겠습니다.” 이때 링컨이 했던 유명한 답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우리 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우리가 끝까지 하나님 편에 서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이제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바울이 끝까지 하나님 편에 서서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명자로서 최선을 다해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늘의 면류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8절 참조). 승리의 면류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면류관, 상급,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면류관을 바라볼 때 우리도 바울과 같이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며 믿음을 지키는 멋진 승리의 대열에 서게 될 것입니다.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9 선교 목회
선교의 모범을 보인 교회들
목회자는 교회를 세울 때부터 분명한 목적과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신학교를 졸업하고, 때 되어 강도사 고시 치르고 목사 안수 받고, 기존 교회 부교역자로 부임하려다 좀 양이 안 차서 교회를 개척한다는 식으로 시작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교회를 세우거나 담임하려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분명한 목회 비전과 철학과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세 가지 교회 모델을 설정했습니다.
#1 |
“안디옥 교회처럼 성령 충만한 성도들로 선교하게 해주옵소서.” |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을 때 선교는 이루어집니다.
#2 |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적은 힘으로도 선교하게 해 주옵소서.” |
아무리 적은 힘이라도 선교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힘을 가지고도 많은 일을 감당한 것으로 칭찬을 받았습니다. 선교는 돈 가지고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얼마든지 적은 힘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3 |
“빌립보 교회처럼 조용하고 초지 일관하게 선교하게 해 주옵소서.” |
1세기 교회들 가운데는 바울의 선교를 돕다가 중단하는 교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무엇이라고 감사의 편지를 쓰고 있습니까?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빌4:15). 처음부터 나중까지 초지일관하게 선교를 후원하는 교회가 빌립보 교회밖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선교한다고 떠들거나 과시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가만 보면 교회 일도 말없이 하는 사람이 제대로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빌립보 교회는 참 매력 있는 교회입니다.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변함없이 선교를 돕는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어디쯤에 있는지 알기 힘들어 헌금을 전달하기 곤란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끝까지 바울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후원했을 빌립보 교회의 열심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목사 자신부터 조용히 말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면 교인들도 무슨 봉사 무슨 헌신을 하든 목사를 따라 말없이 행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 보고 하면 피곤하지만 주님 보고 하면 지치지 않습니다. 목회는 저 높은 곳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나아가는 것이지 옆을 보면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는 교회 사역의 중추이다
저는 한 가정과 함께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선교 정신과 정책을 분명히 선언했습니다. 선교는 슬로건이 아니라, 실제로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척하면서부터 선교에 마음의 중심을 두었던 데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유학을 위해 캐나다에 도착하자마자 제가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이 오스왈드 스미스 선교사가 시무하는 「피플 교회」였습니다. 전부터 이 교회는 꼭 한 번 구경하고 싶었습니다. 이 교회는 세계에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기로 유명한 교회입니다. 현재는 700여 명이 넘는 선교사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피플 교회는 일반 예산보다 선교 예산이 3배 더 많습니다. 제가 처음 방문했을 때가 12년 전일인데, 그 당시 일반 재정이 25만 불이었던 데 반해 선교 재정은 75만 불이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 교회도 선교에 있어서만큼은 피플 교회를 본받는 교회가 되게 하리라 처음부터 마음 먹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비록 저희 교회가 작은 교회이긴 하지만 작년에는 선교 예산으로 49%, 그 외의 성전 건축비 및 일반 예산으로 51%를 지출하는 쾌거를 올렸습니다. 아직도 피플 교회를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지만 말입니다. 제 목표는 물론, 선교 예산을 일반 예산의 세 배 이상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나아갈 길
첫째 / 모든 나라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막16:15).
오스왈드 스미스는 말합니다. “전도하지 않는 교회는 화석처럼 되고 말 것이다.” 또 한 전도학자는 말합니다. “전도하기를 멈추는 교회는 복음적인 교회로 남아 있지 못할 것이다.” 세계 교회의 추세를 보십시오. 전도하지 않는 서구 유럽의 교회들, 그 밖의 전도하지 않는 교회는 다 사양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아무리 서구 유럽의 모든 교회가 문을 닫는 것 같아도 전도의 열정을 품은 교회는 오히려 흥왕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 대칭 구조가 참 기가 막힙니다. 신세대들이 모두들 교회를 떠나는 것 같아도 전도하는 교회에는 매주 새 신자가 몰리게 되어 있습니다.
혹시, “국내 전도도 못하면서 무슨 해외 선교냐, 더군다나 지금 이렇게 환율 변동으로 인해 경제가 어려운 판에 무슨 선교냐, 지금이 그런 배부른 소리할 때냐?” 하는 생각을 한다면 오스왈드 스미스의 글을 그대로 읽어 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은 ‘그러나 이 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직 구원받기도 전인데 왜 가야만 되는가?’ 라고 질문할지도 모르겠다. 국내에도 얼마나 할 일이 많은지 모른다. ‘외국인 선교하러 가기 전에 국내에 있는 사람들에게 완전히 전해야 되지 않겠는가?’ 내가 가는 곳마다 어디서든지 그런 질문을 받았다. 나는 서너 가지 다른 질문을 하면서 그것에 대답해 보려고 한다. 첫째 데이빗 리빙스턴은 왜 스코틀랜드를 떠나 아프리카로 갔는가? 둘째 윌리엄 캐리는 왜 영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영국을 떠나 인도로 가야만 했는가? 영국 사람들 중에는 그 때까지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매우 많이 있었는데도, 영국은 그 당시 영적인 침체에 빠진 시기였는데도, 왜 그는 영국을 복음화하지 않고 인도로 갔는가? 미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기 전에 아도니람 저드슨은 왜 아메리카를 떠나 버마로 가야 했는가? 어찌하여 바울은 팔레스틴에 있는 자기 동포들을 전도하기 전에 유럽으로 이방 땅으로 선교를 하러 가야 했는가?
복음의 밭은 국내만도 아니요, 해외만도 아닙니다. 복음의 밭은 온 세상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명 주시는 대로, 도시에서 목회할 사람은 도시에서, 농어촌으로 갈 사람은 농어촌으로, 학교로 갈 사람은 학교로, 해외로 갈 사람은 해외로, 공장이나 회사로 갈 사람은 공장이나 회사로, 공공 기관으로 갈 사람은 기관으로 가면 됩니다. 세상이라는 밭은 하나입니다. 일터가 구분될 뿐입니다. 그리스도인 최고의 임무는 복음을 내어 주는 것입니다.
둘째/ 모든 사람
예수님의 선교 전략이 무엇입니까? 마가복음 16장 15절에 보니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 모든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전도는 철저히 사람 중심입니다. 개인 영혼 중심입니다. 선교가 뭡니까? 가서 생명을 구하는 것입니다. 선교는 성부의 명령이요 성자의 명령이요 성령의 명령입니다.
성경에 보면 가장 큰 명령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 명령”입니다. 기독교 문화를 심든지, 아니면 복음을 들고 선교사로 나가든지,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이 마음이 있으십니까? 왜 목회자가 되려고 합니까? 큰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어 보는 것이 혹시 꿈이었습니까? 나도 훌륭한 목회자가 되어 보겠다. 나도 역사에 길이 남는 목회 업적을 남기겠다는 마음이 있습니까? 다 좋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스스로에게 가장 기본적인 것을 물을 때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바울이 왜 선교사가 되었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를 강권하였기 때문입니다. 왜 목회자가 되기를 소망하셨습니까? 목회를 사랑하기 이전에 생명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윌리엄 캐리는 인도로, 리빙스턴은 아프리카로, 데이빗 브레이너는 피를 흘리면서도 멕시코 인디안 속으로, 저드슨은 미얀마로, 언더우드는 우리 나라 땅으로 왔습니다. 심지어 아펜젤로는 목포 앞바다에서 한 영혼을 살리려다 결국 익사하지 않습니까? 예수 없이 죽어 가는 영혼에 대한 절박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외 선교 현황을 보면 미국이 1위 인도가 2위 영국이 3위 한국이 7위입니다. 한국은 119개 국가에 3,300명의 선교사를 113개 단체를 통해 보내 놓고 있습니다. 선교는 교회가 여유 있을 때 하는 일이 아닙니다. 영혼 구원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에, 다른 것 절약을 하더라도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저희 교회가 이제 10년째 되어가는데 가만 보면 1년에 적어도 농어촌 교회 한 곳 이상씩은 땅을 사주든지 건축을 지원하든지 합니다. 천만 원에서 이천만 원만 헌금하면 교회 부지 한군데 사 드리는 것 간단히 해결됩니다. 교인들은 의미 있고 값있는 일 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냥 너무 구태 의연하게 절기마다 부활절 헌금 하자 맥추감사헌금 하자 하지 말고, “전라남도 고흥의 저 시골 교회가 예배당이 없어서 새마을 회관을 빌려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데 우리 이번 맥추감사 헌금은 한번 힘을 합쳐서 그 교회 예배당 땅을 사 드립시다” 해보십시오. 그러면 교인들도 마음이 뜨거워져 더 열심히 동참합니다. 자극을 주고자 드리는 말씀이니 용서하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저희같이 작은 교회도 평균 한 달에 천오백만 원이 선교 후원금으로 지출됩니다.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말씀드립니다. 전도와 선교는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부 록
「지구촌 교회」의 개척 모델
1. 교회 개척의 복된 소명을 받자
목회는 어려운 것만은 아닙니다. 어렵게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개척도 어려운 것만은 아닙니다.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오늘도 교회를 계속 세워 나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적 은사, 곧 교회 개척의 은사를 사모할 필요가 있습니다. 목사로서, 교회 개척의 소명을 받는 것이 제 소망입니다. 또 누구든지 교회를 개척하고자 한다면 적극적인 응원을 보내고 싶습니다.
2. 목회 철학을 분명히 정립하자
우리는 자신의 목회적 은사를 빨리 발견하고 개발하여 활용해야 합니다. 사람마다 기질과 체질이 다르듯, 교회 역시 목회자의 철학에 따라 얼마든지 개성 있는 교회로 부상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3. 교회 비전 설정을 확립하자
현대인들은 비전 있는 교회를 찾고 있습니다. 특히 사람들은 목적이 분명한 교회를 선호합니다. 이것이 21세기 교회의 동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회 이름을 짓는 것에서부터 분명한 비전을 갖고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그 나름대로의 비전에 따라 교회 표어나, 교패, 주보나 헌금 봉투, 서식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특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인들은 비전과 목적이 분명한 교회를 찾고 있고, 또 그런 교회에서 일생을 바쳐 헌신하기를 원합니다.
1) 교회의 창립 이념과 목표, 미래 비전과 전략을 확실하게 제시하라
사람에게는 정기적인 비전 전달과 비전 공유가 필요합니다. 꿈은 나눌수록 구체적이 되어가고, 또 더 커져 가는 성질이 있습니다. 또 지역 복음화와 개인적 성숙, 더 나아가서 총동원된 평신도 사역을 이루기 위해 다단계 성장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곧 「전주민의 교인화, 전교인의 신자화, 전신자의 제자화, 전제자의 목자화」입니다. 우리 지구촌 교회는 필라델피아의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의 교회 성장 비전을 업그레이드하여,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계속적이면서도 건강한 성장을 이루고자 전주민의 교인화부터 시작하여 전교인의 목자화라는 사역 철학을 실행해 왔는데, 이것이 바로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와 같은 교회론임을 새삼스럽게 발견하게 됨으로써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2) 목회자로부터 마태복음 6장 33절을 교회적으로 순종하자
지구촌 교회는 아파트 단지 내 상가 지하 대피소에서 초라하게 시작한 교회입니다. 보증금 200만 원으로 얻은 24평짜리 공중 대피소가 첫 예배당이었습니다. 저는 애당초부터 ‘소명과 믿음만 있으면 돈이 없어도 상관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벤처 목회를 시도했기 때문에, 창립예배 헌금부터 선교비로 전용하고 곧바로 선교위원회를 조직하여 창립 첫 달부터 농어촌 교회 두 곳과, 선교 단체 두 곳을 정기적으로 후원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선교 재정은 일반 재정과 완전 분리하여, 교회 선교 사역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 운영했습니다.
저희같이 작은 교회로서도 1년에 1개 교회 이상의 예배당 건축을 지원할 수 있어서 지금까지 18개 예배당을 짓는 귀한 성과를 올렸습니다. 현재는 교회 재정의 50%를 선교비로 활용하고 있는데, 올 9월에 착공하는 2천 평 이상 규모의 「지구촌 선교 센터」를 완공하게 되면 21세기의 새로운 대륙 선교를 이끌어 갈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4. 전도 지역을 잘 선정하자
어느 지역에서든지 교회는 동네 입구에 있을수록 좋고, 특히 아파트 단지에서는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안으로 들어오려고는 하지 않는다는 점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첫째로, 이 지역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가?
둘째로, 이 지역에는 어떤 형태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가?
셋째로, 이 지역에는 어떤 교회들이 있는가?
넷째로, 교회 위치는 적절한가?
5. 처음부터 총체적 목회를 시도하라
일반적으로 교회 성장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목회자들의 스타일을 분석해 보면, 예배 중심의 목회보다는 공부나 교제 중심의 목회 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려면 처음부터 예배 중심으로 출발해야 합니다. 아내만 앉혀 놓고 예배 드리는 경우가 생길지라도 예배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누구든지 나와서 참여할 수 있도록 열린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특히 예배드리는 사람들 모두 다 하나님을 체험하고, 새 힘을 얻고 돌아갈 수 있는 역동적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6. 목회 초기부터 전도에 주력하라
개척 교회가 무엇입니까? 전도하는 교회가 개척 교회입니다. 목회자가 교회를 개척해 놓고 전도는 안하고 사람들이 저절로 구름떼처럼 몰려오기를 바라는 것은 감나무 밑에 가만히 누워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도 ‘개척 전도 목회’를 하셨고(막1:38). 사도들 역시 개척 전도 목회를 했으며(행2:14), 바울은 더 더욱 개척 전도 목회에 주력한 것(롬15:17~21)을 뚜렷히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도 목회를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뭐니뭐니해도 성경공부입니다. 특히 성경공부를 통한 불신자 접촉과 변화의 열매는 참으로 신비하기만 합니다. 성경공부는 반드시 현대적 적용과 실천으로 이끄는 매우 쉽고 단순한 공부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엄청난 유익과 재미와 보람 때문에 저는 개척 후 지금까지도 성경공부 교재를 제가 직접 만들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목회자 자신이 직접 만들어야 자기 교회 교인들의 필요에 따라 성숙 지향적 목회를 이끌어 갈 수 있고, 거기다가 온 교회를 평준화된 성숙과 동일한 체질로 형성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만큼 힘은 들지만, 그러나 힘들이지 않고 무엇인들 이루겠습니까? 수고하는 만큼 거두어 들이는 것은 만고 불변의 원리입니다. 목회자가 직접 만들어서 이끌어 가는 성경공부야말로 전 교인의 평준화된 성숙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루어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7. 리더십 패러다임을 자신 있게 형성하라
현대 목회는 그 어느 때보다 전문성에 따른 위임목회가 필요한 때입니다. 목사 혼자서는 도저히 모든 것을 다 잘할 수가 없습니다. 철저한 분담 사역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목회는 완전한 위임을 통한 팀 사역이었습니다. 또한 전교인의 동원화가 현대 교회 성장의 핵심 주제입니다.
8. 설교를 통한 교회 성장에 주력하라
교회 성장의 원동력은 뭐니 뭐니 해도 목회자의 설교에 있습니다. 특히 현대 목회는 인간 이해를 전제로 하는 설교 개발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분석해 보면 언제나 인간 이해를 핵심으로 전개해 나가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현대인들에게는 격려하는 설교가 필요합니다. 즉, “‘어떻게 하라!’는 명령식 설교보다는, ‘어떻게 되기를 원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될 수 있는가?’” 하고 격려해 주는 설교가 필요합니다. 선포식 설교보다는 호소형 설교가 가슴 속 깊이 파고들어갑니다. 설교하다가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있습니까?
특히 당신은 자기가 하고 싶은 설교를 하십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필요를 인식하며 설교하십니까? 교회의 성장 속도와 교인들의 성숙도에 따라서 방향을 설정하고 이끌어가는 설교 진행이 효과적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설교의 커리큘럼을 짜야 합니다. 주제별, 교리별, 상담형 시리즈, 사회적 이슈에 따른 상황 대처 설교, 그리고 주기적인 강해 설교 등입니다. 저는 이것을 ‘예방 목회’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9. 양육, 즉 사람 키우는데 최선을 다하라
저는 ‘목회’라는 말보다는 ‘목양’(牧羊)이라는 말이 훨씬 더 성경적인 본질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목양은 사람을 키우고 돌보시는 데 철저히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훈련이었는데, 그것은 ‘사람 됨의 훈련’(마5~7장)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선 일꾼 양성보다, 인격 양육에 우선하셨습니다.
제자훈련이란 어떤 전문적 기능인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성숙하게 하는 것입니다. 참된 목양은 하나님의 사람을 키워 가는 것입니다.
10. 영성 목회를 지향하라
저는 지구촌 교회를 시작하면서부터 교인들의 영적 체험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참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는 영적 체험이 필요합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영성(靈性)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 체험과 성령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는 개척 초기부터 지금까지 해마다 두세 차례에 걸쳐서 새벽기도 부흥회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때마다 얼마나 놀라운 영적 부흥과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지 항상 신선하고 신비롭습니다. 특히 새신자들이 언제나 새로운 영적 체험을 통해 근본적 변화를 경험합니다. 21세기는 영적 대결의 목회를 요구합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영적 전쟁이 치열한 시대입니다. 혼합주의와 종교 다원주의를 통한 힘의 규합과 영적 공격이 사방에서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더욱 영성 목회가 절실하고 시급하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11. 미래목회를 지향하라
지난 몇 해 동안 착실히 준비 작업을 해 온 지구촌 선교 센터가 올 9월에 착공됩니다. 무엇보다도 교회의 총체적 선교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글로벌 콤플렉스”로 지어집니다. 주일 예배용 건물이 아니라, 일주일 내내 개방하고 활용하는 하나의 종합관이 될 것입니다. 지역 사회를 위한 개방과 함께 청소년 문화를 위해 최대한 활용될 것이며, 또 그들의 공부를 위한 독서실고, 교인들의 모든 생활 분야에까지도 봉사하는 곳이 될 것이며, 선교 단체 사무실과 여덟 채의 선교사 아파트도 들어설 것입니다. 특히 직장인들과 주민들 및 청년들을 위한 “라브리”라는 휴게실 운영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와 더욱 가깝고 친숙해지도록 도울 것입니다. 교회는 담이 없어야 하고, 항상 열려 있는 도피성과 시은소가 되어야 한다. 이런 지구촌 선교센터의 꿈을 실현해 보려고 미력하나마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벤처 목회는 반드시 꿈을 이루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12. 피 목회를 하자
아프리카의 펠리컨이라는 새는 자기가 죽을 때 자기 가슴팍을 날카로운 부리로 다 파헤쳐 피를 쏟아 자기 새끼들을 먹이고 죽는다고 합니다. 이것을 “펠리커니즘”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목회는 한마디로 피 목회였습니다. 그분은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다 내놓으시고 바치셨습니다. 오늘 이 새대는 피 목회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아무런 희생도 치르지 않은 목회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워런 위어스비가 말하는 대로, “어떤 축복(blessing)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만한 피흘림(bleeding)이 있어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