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주의 성서해석 비판 1 - 프롤로그
2009.11.27. 14:54
서문 - 대심문관 이야기
대심문관 이야기
어느 날, 예수가 어떤 마을에 갑자기 나타납니다. 로마시대 3년 동안 사람들 사이를 편력할 때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다시 한 번 민중 속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눈 먼 자를 치료해주고 병든 자를 고쳐주며 죽은 자를 되살립니다. 사람들은 단번에 그리스도를 알아보고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놀라운 주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그러나 감격의 순간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키가 크고 허리가 꼿꼿하며 여윈 얼굴에 번뜩이는 눈을 가진 아흔 살의 노인인 대심문관이 그리스도를 어둡고 좁다란 감옥에 가둬버렸기 때문입니다. 철문을 열고 들어온 대심문관은 그리스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는 정말 그리스도냐? 네가 그리스도란 말이냐? … 네가 진짜 그리스도건 가짜건 그건 아무래도 좋아. 어쨌든 나는 내일 너를 재판에 회부하여 극악무도한 이단자로서 화형에 처할 테다. 그러면 오늘 너의 발에 입을 맞춘 민중이, 내일은 내가 손가락을 놀리기만 해도 네가 불타고 있는 모닥불 속에 앞을 다투어 장작을 던져 넣을 거다. …그들은 경탄의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며 공포에 떨면서도 그처럼 날뛰던 수억의 양떼를 진압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과 뛰어난 지혜를 가진 우리를 자랑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우리가 좋은 낯으로 손짓을 하기만 하면 그들은 기쁨과 웃음에 싸여 어린애다운 행복한 노래를 부르며 희희낙락할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그들의 죄까지도 용서해 주겠다. 어떤 죄든지 우리의 허락만 받으면 모두 속죄될 것이라고 우리는 그들에게 말해 주련다. 우리는 비밀을 간직한 채, 그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천국의 영원한 보상을 미끼로 하여 그들을 유혹할 것이다. …이제 내가 말한 것은 실현되고, 우리의 왕국은 건설될 것이다. 다시 되풀이하지만 내일이면 너도 그 온순한 양떼를 보게 되리라. 내가 손을 조금 흔들기만 해도 그들은 앞을 다투어 달려와 너를 불태울 장작더미에 시뻘건 숯덩이를 던져 넣을 테니 말이다. 그건 다시 말해서 네가 우리의 일을 방해하러 왔기 때문이야. 사실 누구보다도 먼저 화형에 처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너란 말이다. 나는 내일 너를 화형에 처하겠다. 내가 할 말은 다 했다.”
이 이야기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제5장 2절에서 둘째 이반이 셋째 알로샤에게 들려주는 <대심문관>이라는 극시입니다. 15세기의 한 작은 마을에 나타난 그리스도는 자신의 권위와 지위를 잃어버릴 것을 우려하는 대심문관에 의해 화형 당합니다. 대심문관에 의해 예수가 처형된 후, 대부분의 순진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허락만 받으면 모두 속죄된다는 것 따위의 대심문관의 가르침을 믿으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대심문관의 가르침은 예수의 가르침과 전혀 상관이 없음에도 사람들에게 진리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에서 오리가 아님에도 오리인 척하는 <미운오리새끼>임에 틀림없습니다.
현대판 미운오리새끼
15세기가 한참 지난 오늘 날, 대심문관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지만 <대심문관>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운오리새끼가 마치 태초부터 내려온 종교적 진리인 것처럼 위장한 채 더욱 은밀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예수를 끊임없이 화형 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문자주의라는 보이지 않는 이름으로 대심문관과 맞먹는 권위를 가지고 목사의 설교, 교회의 성경공부 교재, 각종 기독교 서적, 그리고 일상적인 행동과 언어생활 속에서 세밀하면서도 강력한 위력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현대판 미운오리새끼가 사랑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부르짖은 예수의 소중한 가르침들을 헤집어 놓으면서 한국 기독교는 사람들의 신뢰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최근의 조사에 의하면 한국교회를 ‘신뢰 한다’는 응답자는 18퍼센트에 불과한 반면, ‘불신 한다’는 응답자는 무려 50퍼센트에 육박했습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종교가 없는 사람 중에는 단 3퍼센트만이 개신교회를 신뢰한다고 밝혀, 비 기독교인가운데 개신교에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명확해 졌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아프가니스탄에서 기독교인 23명이 피랍되었을 때, 피랍 인들의 건강을 염려하거나 귀환을 기원하기보다는 그들을 비난하는 여론이 들끓었던 것도 한국 기독교에 대한 대중들의 불신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문자주의라는 오늘날 미운오리새끼의 정체가 무엇이며, 그들이 어떤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정신을 훼손시키고 있는지 알아내어 미운오리새끼가 만들어 놓은 종교적 도그마를 깨부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를 지탱해온 생명력이었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예수의 중요한 가르침들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되어 머지않아 한국 기독교가 척박한 세상에 희미하지만 강력하게 내뿜고 있는 그리스도의 빛을 모두 잃어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문자주의 성서해석 비판 1 - 프롤로그 (한국대안교회연구소) |작성자
문자주의 성서해석 비판 2 - 성경이 틀렸다?
2009.11.27. 14:57
1.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어라
기독교인에게야 성경이 매우 중요한 책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모세가 홍해를 가른 이야기, 태양을 멈춘 이야기, 물고기 두 마리로 수많은 사람의 배를 채워 준 예수의 기적 이야기, 사람이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이야기 등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책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특히, 현대 과학을 신봉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초자연적인 이야기들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잘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이야기들을 허무맹랑하다고 치부해 버릴 수 없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믿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거의 유일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삼삼오오 모여 성경을 공부하고 목사님이 성경을 손에서 놓지 않기를 권유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에게는 한 가지 과제가 주어집니다. 그것은 성경을 바람직하게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의 몇몇 구절을 인용해 사람들의 몸과 마음, 그리고 돈을 뜯어내는 무시무시한 사이비 종교에 빠져들거나 “내가 하나님이다. 내가 예수다.”라는 사람들처럼 자기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되어 “나를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성경을 바람직하게 이해하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 왔으며, 이에 대한 크고 작은 논쟁도 있었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바람직한’ 성경 이해는 “말씀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자”는 문자주의 해석입니다. 즉 성경 구절이 문자 그대로 참이며 오류가 없기 때문에 성경을 문자 그대로 신뢰하여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윌리엄 블랙스톤은 《축자적 해석Literal Interpretation》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성경 해석 방법이 필요합니다. 문자적인 해석방법은 성경 말씀을 말씀하신바 그대로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견해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문자적인 해석은 성경의 계시는 말하는 사람이나 기록하는 사람이 명확한 언어를 사용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을 계시해 주셨으며, 그 계시는 인간의 대화를 관장하는 보편적인 법에 의해 기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은 바르고 정직한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문자주의 해석이 가지고 있는 권위와 파워는 막강합니다.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성경에 그렇게 써져있어.”라는 말보다 더 권위 있는 말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서로 거친 논쟁이 오갈 때에도 이 말과 함께 그에 해당하는 성경 구절을 보여주면 상대방은 입을 다물어버립니다.
2. 성경이 틀렸다?
문자주의 해석의 성경적인 근거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씌어졌다고 말하는 디모데후서 3:16절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유능하게 하고, 그에게 온갖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16)
문자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많이 인용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목회자 마틴 로이드 존스는 그의 저서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에서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의하면 성경은 성경 중에 특정한 책들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고 다른 책들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모든 성경 문자는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66권의 작은 책들로 구성되어 있는 성경은 약 40여명의 사람들에 의해 기록됐습니다. 신약성경만 보더라도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4권의 복음서를 기록하였고 바울이 여러 개의 편지를 썼으며 베드로와 야고보 등도 성경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자주의에 따르면 성경을 쓴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그대로 받아 적었을 뿐입니다. 로이드 존스의 말대로 성경의 모든 문자는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저자는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성경 저자가 아니라 ‘기자記者’입니다. 이에 대해 몇몇 교회에서는 성도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다음과 같은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손자를 불러 먼 친척에게 편지를 쓰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잠시 후 편지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편지는 누구의 편지가 되는 것입니까? 당연히 그것은 할아버지의 편지이지요. 비록 손자가 그것을 썼어도 내용을 읽는 사람은 그것이 손자가 보낸 편지가 아니라 할아버지의 마음이 기록 된 할아버지의 편지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성경은 하나님이 당신이 택하신 사람들로 하여금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1)
문자주의에 의하면, 하나님은 성경 기자들을 도구삼아 직접 문자 하나하나에 영감을 불어넣어 쓴 성경에 오류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는 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로이드 존스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하나님께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성경의 권위는 바로 이 하나님의 영감에 기초한다. 성경이 주장하는 바는 성경에 포함된 모든 것이 영감된 기록이고, 따라서 무오無誤하고 틀림이 없는 기록이라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문자주의, 즉 성경 축자 무오설의 주장처럼 성경의 기록은 틀린 것 없이 문자 그대로 완벽 할까요? 성경의 모든 기록은 사실만을 말하고 있을까요?
축자 무오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유감이지만 성경의 문자 기록들에는 많은 오류와 모순이 있습니다. 이 오류들은 기독교인이던 기독교인이 아니던, 성경을 자세히 보다보면 언젠가는 마주칠 수밖에 없는 오류들입니다. 지금부터 성경에 나타나는 오류와 모순들을 몇 개 살펴보겠습니다.
문자주의 성서해석 비판 3 - 예수의 거짓말
2009.11.27. 14:59
1. 예수의 거짓말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다. 제자들이 길을 내면서 밀 이삭을 자르기 시작하였다. 바리새파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어찌하여 이 사람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릴 때에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를 너희는 읽지 못하였느냐? 아비아달 대 제사장 때에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사장들 밖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제단 빵을 먹고 그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마가복음 2:23~26)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마가복음 2:27)라는 통쾌한 말로 유명한 장면입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르자 바리새인들은 왜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기냐고 쏘아댑니다. 그러자 예수는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른 제자들을 변호하면서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 다윗도 그런 적이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예수의 말은 틀렸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먹어서는 안 되는 제단 빵을 먹었을 때는,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가 아니라 아히멜렉 때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의 사무엘상에 이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다윗은 놉으로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렀다. 아히멜렉이 떨면서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물었다. “동행자도 없이 어떻게 혼자 오셨습니까?”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임금님의 명령을 띠고 길을 떠났습니다. …… 그런데 지금 제사장님이 혹시 무엇이든 가까이 가진 것이 좀 없습니까? 빵 다섯 덩이가 있으면 저에게 주십시오. 그렇게 안 되면 있는 대로라도 주십시오.”…… 제사장은 그에게 거룩한 빵을 주었다. 주님 앞에 차려 놓은 빵 말고는, 다른 빵이 달리 더 없었기 때문이다. (사무엘상 21:1~6)
그렇다면 마가복음에서 언급한 아비아달은 누구일까요? 사무엘상에 의하면 아비아달은 아히멜렉 제사장의 아들입니다. 다윗은 자신에게로 도망쳐온 아비아달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함께 지내자고 이야기하는데 다윗과 아비아달의 에피소드는 그게 전부입니다.
“아히둡의 손자이며 아히멜렉의 아들인 아비아달은 거기서 피하여 다윗에게로 도망하였다.”(사무엘상 22:20)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거짓말을 한 것일까요? 아니면 역사서로 유명한 구약 성경의 사무엘상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분명한 것은 사무엘상의 내용과 마가복음의 내용이 둘 다 사실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성경 본문 비평학자 바트 어만은 그의 저서 《성경 왜곡의 역사MISQUOTING JESUS》에서 이 문제로 인해 발생했던 에피소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문자적으로 무오하다고 생각했던 당시의 바트 어만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복잡한 이론을 전개했었습니다.
스토리 교수에게 제출한 학기말 논문에서 나는, 비록 마가가 이 사건이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일어났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사실 아비아달 대제사장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아비아달이 주인공 중 하나인 성서 본문 속에서 일어난 것을 의미한다는 취지로 매우 길고 복잡한 주장을 전개했다. 관련된 그리스어 단어의 의미를 근거로 대단히 복잡한 주장을 펼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스토리 교수가 내 주장을 높이 평가할 것이라고 굳게 확신했다. 왜냐하면 그는 틀림없이 나와 마찬가지로 성서에 오류 따위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훌륭한 기독교인 학자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토리 교수는 내 논문 말미에 간단한 한 줄 평을 써놓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한 마디는 나를 정통으로 꿰뚫고 지나갔다. 그는 이렇게 적어두었다.
“마가가 그냥 실수한 것이겠지.”
스토리 교수의 말처럼 이 단락에서 발생한 오류의 원인은 단지 성경을 쓴 마가의 실수 때문입니다. 예수가 틀린 것도 아니고 사무엘상의 내용이 틀린 것도 아닙니다. 로이드 존스는 “하나님의 영감은 성경의 기자가 기록을 함에 있어 과실을 저지를 수 없도록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감독을 받았다.” 라고 이야기하지만 마가복음의 이 구절에서만큼은 마가의 과실이 명백합니다. 이 단락은 성경이 문자적으로 무오하지 않으며 실수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2. 두 개의 탄생 이야기
성경을 기록한 사람의 실수 외에도, 성경에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네 권의 복음서들은 많은 부분에서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데 그 중 몇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다. 그런데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말하였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 헤롯왕은 이 말을 듣고 당황하였고, 온 예루살렘 사람들도 그와 함께 당황하였다. (마태복음 2:1~3)
그 때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온 세계가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는데,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시행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고향으로 갔다. 요셉은 다윗 가문의 자손이므로, 갈릴리의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에 있는 베들레헴이라는 다윗의 동네로, 자기의 약혼자인 마리아와 함께 등록하러 올라갔다. 그 때에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는데, 그들이 거기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되었다. 마리아가 첫 아들을 낳아서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혀 두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2:1~7)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탄생 이야기입니다. 조금만 읽어봐도 두 복음서의 이야기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한 번쯤 나올 법한 헤롯왕의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고 마태복음에는 호적 등록 이야기나 구레뇨의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한데 두 이야기의 시기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기원전 4~5년에 탄생했습니다. 실제로 예수는 이 때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4년 즈음에 요셉과 마리아가 호구조사를 위해 갈릴리에서 베들레헴으로 이동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 무렵에는 호구조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기록한《업적록》에 의하면 그 당시 호구조사는 세 번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그 자신과 아그리파가 집정관이었던 기원전 28년.
두 번째는 가이우스 켄솔리누스와 가이우스 아시니우스가 집정관이었던 기원전 8년.
세 번째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섹스투스 아풀레이우스가 집정관이었던 서기 14년.1)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로마사 연구에만 매진해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시오노 나나미는 자신의 걸작《로마인 이야기》에서 누가복음의 훈훈한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합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본적지로 돌아가는 길에 예수가 태어났다는 것은 아름다운 에피소드지만, 사실 이 무렵에는 국세조사가 실시되지 않았다.”
그녀는 예수가 태어난 때와 호구조사가 실시된 때의 시간차가 너무 크다는 것과 당시 유대의 상황이 독자적인 호구 조사가 어려운 때였음을 지적합니다.
“예수가 탄생한 것으로 되어 있는 기원 1년을 전후해서는 로마의 국세조사가 실시되지 않았다. 멀리 떨어진 속국이니까 시간차가 있었다고 해도, 8년의 차이(기원전 8년의 호구조사)는 너무 크다. 또한 유대의 독자적 조사였다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당시 유대는 헤롯 대왕이 죽은 뒤 내분 상태에 있어서 국세조사를 할 계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호구조사를 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또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호구조사는 국가에서 세금을 제대로 징수하기 위해 하는 것인데 바보가 아닌 이상 먼 곳에 사는 사람까지 불러서 호구조사를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현명했던 로마인들도 현재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호구를 조사했습니다. 김용옥은 《기독교 성서의 이해》에서 원적原籍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호구조사는 없었다고 단언합니다.
“누가의 기록이 비상식적이라는 것은 모든 호구조사는 원적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고 거주하고 생활하고 있는 현주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원칙에 비추어도 알 수 있다. 옛날에 자동차가 있지도 않았고, 목수 신분의 요셉은 만삭에 가깝도록 배부른 마리아를 데리고 터덜터덜 700리길을 걸어갔을 텐데, 그것도 단지 원적 호구조사에 응하기 위하여 ... 좀 상상하기가 어렵다.”
또한 예수가 탄생했을 때의 시리아 총독은 구레뇨가 아니라 퀴리니우스(Publius Sulpicius Quirinius)였습니다. 구레뇨는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을 지내고 난 한참 후 서기 6년 이후에 시리아를 통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3. 축자무오론자들의 억지 반론
로이드 존스가 “성경의 난제들과 모순들이라고 하는 많은 문제들이 고고학과 성경의 더 자세한 언어학적 파악의 결과로 지난 몇 년 동안 설명되었다.”고 주장하는 바와 달리, 오히려 역사적 고증과 고고학에 의해 누가복음의 사실성이 비판을 받게 되자 성경 축자무오론자들은 어떻게든 누가복음의 사실성을 수호하기 위해 여러 가지 주장을 해 나갑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저자들의 목적은 분명히 실제로 일어난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가장 충실하고 객관적으로 역사적 진실을 기록했다.”고 말하는 리 스트로벨은 《예수는 역사다》에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예수 탄생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도 기원전 4년 즈음에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이 아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지는 못합니다.
“제리 바르다만이란 저명한 고고학자가 이 점에 관해 많은 연구를 했다. 그는 소위 ‘가는 글씨의’ 글자라고 부르는 매우 작은 글씨체로 구레뇨라는 이름이 적힌 동전을 발견했다. 이것은 그가 BC 11년부터 헤롯 왕이 죽은 후까지 수리아와 길리기아의 총독으로 지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구레뇨란 사람이 분명히 두 명이었다는 뜻이다.
추가로 연구를 해보았을 때 켐브리지 대학교에서 교수로서 있었던 故 윌리엄 람세이가 유사한 이론을 제안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다양한 비문을 살펴본 결과, 구레뇨라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는데 시간적으로 별도로 두 차례에 걸쳐 수리아를 통치했으며 그 기간에 더 이른 인구 조사 기간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른 학자들은 누가의 본문이 “이 인구 조사가 구레뇨가 수리아를 통치하기 전에 행해졌다.” 라고 번역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 문제는 해결된다.
그 문제는 원하는 만큼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았다. 그러나 맥레이와 다른 사람들이 몇 가지 가능한 설명을 제시했다고 인정해야만 했다. 나는 예수 출생 기간 동안 인구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지금도 이상하게 생각되지만 사람들이 고향에 정말로 돌아가야만 했다고 자신 있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리 스트로벨은 몇몇 학자들의 주장을 예로 들며 누가복음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고 따라서 모순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구레뇨가 두 명이었다, 한 명의 구레뇨가 두 번 통치를 했다, 성경을 구레뇨가 수리아를 통치하기 전에 행해졌다고 번역해야 한다하는 주장들이 모두 다르고 그 증거도 겨우 ‘아주 작은’ 글씨로 구레뇨라고 적혀 있는 동전을 하나 발견했다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하나쯤 만들어 낼 수 있는, 주먹구구식 주장입니다. 이 책 스스로도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마음에 걸렸는지 “이상하게 생각되지만” “자신 있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라는 자기 모순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 본 것처럼 누가복음의 예수 탄생 이야기는 여러모로 역사적 사실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예수가 기원전 8년이나 서기 14년에 태어나지 않았으며 당시 시리아의 총독도 구레뇨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경 축자 무오설의 주장대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기록이 모두 사실이라면, 예수가 기원전 4년에 태어났다가 18년 후인 서기 14년에 또 태어나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연출될 것입니다.
문자주의 성서해석 비판 4 - 제자들과의 만남
2009.11.27. 15:16
1. 첫 번째 제자들과의 만남
예수의 탄생 이야기보다 더 명확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예수가 첫 번째 제자들인 시몬과 안드레를 만나는 장면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이야기는 비슷하지만 요한복음의 이야기는 전혀 다릅니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중략)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가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마가복음 1:14~18)
다음 날 요한이 다시 자기 제자 두 사람과 같이 서 있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서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하고 말하였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하는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갔다.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물으셨다.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그들은 “랍비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와서 보아라.” 그들이 따라가서, 예수께서 묵고 계시는 곳을 보고, 그 날을 그와 함께 지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시몬 베드로와 형제간인 안드레였다. 이 사람은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서 말하였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소.” 그런 다음에 시몬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요한복음 1:35~42)
마가복음에서는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던 시몬과 안드레를 예수가 부르는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안드레가 예수를 먼저 따라가고 나중에 형 시몬을 예수께 데리고 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에서는 예수가 세례 요한이 감옥에 잡힌 뒤에 제자들을 만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요한이 옥에 갇히기 전으로, 세례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냅니다.
그렇다면 그 중 어느 것이 사실일까요? 예수를 비롯해 시몬과 안드레가 모두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렸던 것이 아닌 이상,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세 개의 복음서 모두 사실일 수는 없습니다.
2. 두 번의 성전 정화사건?
성전을 깨끗하게 한 사건, 즉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는 이야기는 네 권의 복음서에 모두 나옵니다. 그러나 복음서들은 서로 다른 시간에서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과 다른 복음서와의 차이가 두드러집니다. 복음서별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 요한이 붙잡힘 -> 첫 번째 제자를 부름 -> 왕의 신하의 아들이 병 고침을 받음 ->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임(오병이어 사건) -> 물 위를 걸으심 -> 예루살렘 입성 -> 성전을 깨끗하게 함
마가복음 : 요한이 붙잡힘 -> 첫 번째 제자를 부름 -> 오병이어 사건 -> 물 위를 걸으심 -> 예루살렘 입성 -> 성전을 깨끗하게 함
누가복음 : 요한이 붙잡힘 -> 왕의 신하의 아들이 병 고침을 받음 -> 오병이어 사건 -> 예루살렘 입성 -> 성전을 깨끗하게 함
요한복음 : 첫 번째 제자를 부름 -> 성전을 깨끗하게 함 -> 왕의 신하의 아들이 병 고침을 받음 -> 오병이어 사건 -> 물 위를 걸으심 -> 예루살렘 입성
공관 복음(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과 성전을 깨끗하게 한 사건이 거의 뒷부분에, 클라이막스처럼 등장합니다. 반면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성전을 깨끗하게 한 사건은 2장 13절부터 등장합니다. 이는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이며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히기도 전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이 사건이 이렇게 빨리 등장하는 이유는 다른 복음서에서 비중 있게 다루는 예루살렘 입성 사건을 특별하게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을 자세히 보면 예수가 예루살렘, 가버나움, 갈릴리 할 것 없이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으며 공관 복음의 예수보다 자유로워 보입니다.
[출처] 문자주의 성서해석 비판 4 - 제자들과의 만남 (한국대안교회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