口碑文學部門
Ⅰ. 전 설
柳 仁 順
1. 조사의 목적 및 방법
섬강(蟾江)은 강원도 횡성군 갑천면에서 발원, 원주·여주를 거쳐 漢江으로 들어가는 길이 92.6km에 달하는 강이다. 연려실기술 지리지에 의하면 이 강은 서쪽에서는 여주의 여강(驪江)이 되고 楊根의 大灘과 月溪遷이 된다. 그리고 并灘에 이르면 北江과 합하기 때문에 속담에 二水頭라 불렸다고도 한다.
섬강은 한강의 원류에 속하는 관계로 예로부터 섬강을 이용, 소금배와 뗏목들이 오르내렸으며 이로 인한 섬강유역의 독특한 內水路邊의 문화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가정 하에 본 강원문화연구소에서는 섬강의 발원지가 되는 횡성군 갑천면에서 시작하여 횡성읍 원성군 간현리, 안창리 등을 중심으로 口碑자료들을 조사하기로 하였다.
본 조사반이 자료조사에 나선 것은 1990년 7월7일〜8일까지 양일 간에 걸쳐서였다. 7월7일은 횡성군 갑천면 매일 1리 노인정에서, 또 횡성읍 읍하리 노인정에서 답사를 했다. 7월8일은 오전 중에 원성군 호저면을 찾았으나 마침 농번기라 구연에 응할 노인들을 만날 수 없었다. 본 조사대는 다시 원성군 지정면 간현리 노인정을 찾았고, 오후에는 지정면 안창리의 김제남 신도비를 찾은 길에 김제남의 장손인 김세영옹을 만나 몇 가지 자료들을 채록할 수 있었다.
2. 조사 대상지 및 口演者
橫城郡 甲川面은 郡廳 소재지에서 東北方 20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甲川面은 晴日面, 公根面, 隅川面, 그리고 北으로는 홍천군 瑞石面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전체 면적의 72%가 산악지대이기는 하나 비교적 평야지대로 곡창지 소리를 듣고 있다. 본 조사대가 1990년 7월7일 매일 1리의 노인정을 찾아든 시간은 오전 11시40분이었다. 노인정에는 10명의 노인들이 계셨다. 조사자는 그중 이야기를 가장 구수하게 잘 하시는 분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노인들이 추천해준 분은 갑천 매일 2리 3반에서 놀러오신 서춘택(徐春澤)옹으로 73세라고 하셨다. 서춘택 옹은 어린 시절 사서를 베우셨다고 하며 ‘한 해만 더했으면 될텐데’ ‘일본사람들이 말려서’ 한학을 더 배우지 못하고 18세 때에 소학교 1학년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는 의사가 되려고 평양으로 가고자했으나 부모들의 만류로 고향에서 평생 농사만 짓게 되었다고 했다. 젊은 시절은 징용을 피해 다니느라고 한문을 다 잊었다고 하며 안타까와했다. 갑천 노인정에서 채록한 23편의 전설 자료 중 16편은 서춘택옹이 구연한 것이다. 서춘택옹의 구연자료는 ‘태기왕', ‘최치원’, ‘안삽교’, ‘이춘보’, ‘이괄’, ‘황효자’ 등 인물전설과 그외 지명 전설로 되어 있다.
한편 갑천 노인정에서 만난 朴渟甲 옹은 청나라 목극등(穆克登)과 두문강에 경계비를 세운 박 건의 9대손이라고 했다. 박순갑 옹은 청나라와 조선의 국경이 두만강이 아닌 두문강임을 강조하고 일설에 당시 조선 측의 사신이 병을 이유로 경계비룰 세우는 현장에 불참했었다는 사실을 일축한다. 박 옹은 자신이 박 건의 후손임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 했으며 ‘황소갈보’ ‘횡성 인의 항일정신’등에 대해 강조점을 두어 구연을 했다.
횡성군 횡성읍은 1979년 5월1일 대통령령 제9409호로 면이 읍으로 승격된 곳이다. 횡성읍은 군의 중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읍상리, 읍하리를 비롯하여 33개 리로 구성되어 있다. 본 조사대가 횡성읍 읍하리 노인정을 찾은 것은 1990년 7월7일 오후 5시10분이었으며 4-5명의 노인들이 계셨다. 그러나 이분들은 모두 조사자의 요청에 수줍어하시며 구연을 거부하셨다. 그중 송 찬회(74세)옹은 초상집에 갈 일이 있다며 나서시는 것을 노인정 밖까지 따라 나가 세 편의 구비 자료를 채록했다. 송옹의 구연은 능숙했으며 사전에 시간 약속이 있었으면 그분의 많은 보유자료를 채록할 수 있었으리라는 아쉬움을 갖게 했다.
원성군 지정면은 原州市에서 西北方 16km에 위치하고 있고 그 사방이 각각 횡성군 서원면, 경기도 양평군, 원성군 문막면, 경기도 여주군으로 둘러싸여 있다. 특히 지정면(地正面)은 대체로 산악지대를 이루고 있으며 섬강이 지정면을 가로질러 면 소재지인 艮峴을 비껴 흐르고 있다.
원성군 지정면 간현리 노인정을 찾은 것은 1990년 7월8일 11시40분 경이었다. 노인정에는 9명의 노인들이 계셨으나 이분들은 외지에서 찾아온 방문객을 거북해하시는 듯 했다. 술과 다과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 나가며 전설 구연자를 찾았으나 전설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듯 토막난 지명전설 만이 어쩌다가 토해질 뿐이었다. 이에 조사자는 녹음기를 들고 노인정 밖 20 미터쯤 떨어진 간이공원 벤치에 앉아있는, 一家인 듯한 길손을 찾아갔다. 노부인과 중년 그리고 새댁인 듯한 세 분의 여성과 한분의 젊은이였다. 조사자의 신분을 밝히고 간현에 사시는 분이라면 협조해주십사고 부탁했다. 그분들은 강원대학교 강원문화연구소에서 나왔다는 조사자에게 반색을 하시며 중년부인이 강원대 인문사회대 사회학과의 이태원교수 어머님이심을 밝히셨다. 노부인은 ‘욕바위’와 ‘오형제바위’의 전설을 구연해주셨다. 중년부인은 한산 이씨의 웃대 어른이 이조판서를 하신 뒤 퇴임하여 간현으로 오셨으며 간옹이라는 호에 연관, 이후 그 지방이 간옹이 사셨던 곳이라 하여 艮峴이 되었다는 지명전설을 말씀해주셨다. 그러나 중년부인은 이조판서 간옹이 누구신지에 대해서는 말씀해주시지 않았다.
조사자가 채록된 자료를 정리하며 이태원교수에게 한산 이씨 간옹에 대해 묻자 그분은 조선조 인조때 淸白吏 李溉 선생이며 이태원 교수는 이기선생의 15대 손이라고 했다. 조사에 응해 주셨던 노부인은 이 기선생의 13대손,李重求씨의 부인 최규옥씨로 개성 호수돈 여고 출신이며 중년 부인은 이 기 선생의 14대손 李日馥 선생의 부인 宋慶鎬씨로 이태원 교수의 어머니셨다. 흔히 송와선생으로 통칭되는 李溉 선생의 호는 松高艮雄이며 그는 토정 이지함의 삼촌이 되는 분이라고 했다. 어떠튼 최규옥 송경호 두분의 구연은 비록 3편에 불과했으나 그분들은 드물게 만날 수 있는 좋은 구연자들이었다. 같은 간현리에서 만난 여성 구연자 김순옥씨는 자손들을 모두 결혼시키고 노인정에 바로 붙은 옆방에서 기거를 하고 계신 분이었다. 안창에서 태어나 간현 으로 시집온 후 계속 간현에서 살아오셨다는 김순옥씨는 이야기를 구수하게 잘 하시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며 토막난 이야기들을 해주셨다.
원성군 지정면 안창리를 찾은 것은 같은 날 오후 3시경으로, 연홍부원군 김제남의 신도비(神 道碑)가 있었다. 안창리에서는 마침 김제남의 종손이 되는 김세영(67세)씨를 만났다. 인천 동도 중학교를 졸업했다는 김세영씨의 이야기는 조리정연하고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면서도 효과적인 구연으로 조사자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사자들의 귀가시간 관계로 더 많은 자료를 채록하지 못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섬강유역의 구비자료조사 ——內水文化의 독특한 특징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역시 더 많은 일정 속에서 더 많은 구연자들을 만났었다면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었다.
3. 채록자료
(1) 횡성군 갑천면 매일1리
①태기왕 설화
성이 있는데 태기왕이 거기와 있다가 (녹음불량-조사자)감자벌로 쳐올라가니까 그거만 보고서 올라오나 안 올라오나 보고 있는데 그래 그 나중에 올라갈 수 없으니까 허수애비를 만들어서 잔뜩 그 감자버덩에다 세워놓고 왜놈 군사 행세를 하고 저 뒤로 쳐들어 와서, 태기왕이 망해서 멸원 가서 멸하고, 삼동거리 가서 삼동강이 나고 그랬다.(멸원하고 삼동 거리가 어디 있어요?-조사자)저기 평창 봉평에 있어요.
-徐春潭 73세-
②갑천의 유래
갑천이라는 얘기는 어느 때 장사가 그랬는지 모르지만 갑내라는 물에서 갑옷을 씻어서 갑천이라고 한다 그런 에기도 있어요.
-徐春潭 73세-
③이답산
옛날에 임금님이 밟았다 그런 얘기가 있이요(어느 임금님이 밟았나요?-조사자)그건 잘 몰라요.
-徐春潭 73세-
④태기왕과 소금산
태기왕 적에 군인들이 먹다가 남겨 진 소금을 쌓아 놓은데, 어느 사람이 가서 삼신산을 갔다가 담배를 피우는데 담배를 피고 담배대를 바위에 떠니까 하얀게 나와서, 소금 갈아서 먹어보니까 소금이 있더라 그런 얘기가 있어요.
-徐春潭 73세-
⑤선바위 전설
(조사자가 삼대리에 있다는 선바위의 전설을 요구했다.)
섶에 있었는데요. 그게 넘어갔어요(언제요?-조사자)한 10년 넘었는데요(바위 섰을 때 보셨지요?-조사자)봤지요.(어떻게 생겼어요?-조사자)선바위가 기레기가 다섯 길이 정도 되고 둘레는 그저 두 아람 넘을 거예요(어떻게 넘어 갔어요?-조사자)그냥 저절로 넘어 갔어요. 그게 가운데는 뚱뚱하고요. 안으로 뾰족해요 그런게 퉁그러지면서 넘어갔어요.
선바위 전설은요 요 근방에 그거 보다 조그만 바위가 섰었는데 그전에 노부할머니라는 이가 빨래줄을 메고 빨래틀 널었다. 그런 거만 있어요.
-徐春潭 73세-
⑥부엉 바위
(갑천 부근의 이름난 바위 이야기를 해달고 했다)
동네 이름이 부엉바위라고 있어요. 바위가 뒤에 있지요. 그래서 거기가 부엉 바위라고 지금 이름을 불러요. 부엉이가 새끼를 쳐갔다. 그 부엉이가 새끼를 쳐가서 그래 부엉바위라고 그래요.
-徐春潭 73세-
⑦봉덕사의 탑과 마을 소
태기산 밑에 봉덕사라는 절이 있어요. 그 절 앞에 나오면 탑이 하나 있어요.
그게 아마 댓층 될께요. 그게 밭 가운데 서 있어요. 그 위에 밭에다 탑을 세울라고 전부 닦아 놨는데 밤에 저절로 소가 땀이 나서 보니까 그걸 거의다 욈겨놔서 거기 탑을 세웠다 그래요.(소는 움직이지 않고 땀만 홀리고 있었는데, 그럼 소의 혼이 가서 옮긴 거예요?)예, 그렇게 욈겼다는 얘기가 있구요.
-徐春潭 73세-
⑧의담
여기 올라가면은요, 갑천리 가며는 이담(의담ᅳ조사자)이라고 있어요. 이병(의병)이 들어와서 지나갈적에 돌메이를 하나씩 갖다놓은 게 그게 그만큼 많다 돌멩이가 많아요. 아주 커요(왜 그렇게 돌맹이를 갖다가 놓았어요?ᅳ조사자)이병들이 지나가다가 갖다놓은 숫자가 그렇게 많다고 그래요.
-徐春潭 73세-
⑨적을동의 봉덕사
그 순덕왕 시절에 어는 여주지가 스님이 와서 절을 크게 짓고 있었어요. 절을 짓고 있는데 그 절에서 하루밤에 큰 이심이, 용이 그 법당으로 기어 들어온 것을 칼로다 들이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걸 갖고 죽이고서 그 다음에 올라온 것이 저 신대리라고 있습니다. 신대리에 시방 봉덕사가 있어요. 신대리 그 봉덕사에서 결국은 그 절이 다시 일으켜졌다 순덕왕 시절에 그래서 시방 현재 그 증거로서는 그 탑이 있는데 3층인데, 전부 망가진게 현재 탑이 산재해 있는게 있습니다. 글씨도 보이지 않고요 모두 깨져버리고요, 절터가 보여요 그래서 적을동이 옛날부터 피난지 시절 그리고 새을 자가 든 동이라는 것은 언제나 피란지로 사용했었다 그래서 6.25 사변 당시에도 인민군이란 것이 하나도 거기 들어오지 않고…
-朴淳甲 72세-
⑩저고리골과 지네
같은 곳인데 적을동을 저고리골이라고 해요. 오만분의 일 지도에서는 저고리골 행정 명칭은 적을동이지요 저고리골 유래는 거기 큰 지네가 있답니다. 지네가 있어 가지고 갈 꺾을 적에 갈 꾼이 가면 갈꾼을 하나씩 지네가 없앤다구 그런 말이 났어요. 갈 꺾으러 가면 일꾼을 가령 내가 열을 올려주면 숟깔을 열을 다 안먹는다고 합니다. 넣고서 오는 족족 일반이 알면 거기다 갈을 안꺾으니까. 그렇게 했다는 얘기가 있어요.
-徐春潭 73세-
⑪구리뜰A
근데, 보가 이 시장으로 쭉 내려가면 물 막는 보수로가 있는데 그게 어떻게 해서 된냐 하면, 옛날에 겨울에 눈이 많이 왔을 적에 호래이가 언제 끌고 나간 길이다 그기야. 봇길이 그리뜰 구리뜰 그래서 구리뜰이라고 해요.
-朱泰會 81세-
⑫구리뜰B
구리뜰은 여기 평야 이름인데 이것이 구한국 시절에 농사를 짓는데 용이 글루다 길을 트고 가서 보도랑을 내고 가서 구리뜰이다. 구리뜰이라고 부롭니다.
-朴淳甲 72세-
⑬황소갈보
옛날에 여기에 황소갈보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여기에서 막걸리 사발이나 놓고 주막거리에서 오고가는 손님에게 술이나 한 잔씩 팔고 어렵게 살고 있었는데, 그 기미년 독립만세를 부르는데, 횡성이 군소재지니까 원님이 살고 있는데 장날 독립만세를 부르니까, 왜적에 쫓겨 도망을 왔는데 숨도 차고하니 주막집에 왔는데, 주막집에서 술을 마시면서 얘기를 했다고. 우리가 이렇게 해야겠다고 모의를 했다구. 그 여자가, 주막집하던 황소갈보라는 여자가 원래 옹장하고 옛날에 장사라 이거야. 여장군이지. 그 여자가 이제 선봉으로 나서서 만세를 불렀단 말이지. 그래 그 날 그 여자도 붙들려가 옥살이를 했단 말이야. 그래 죽었는데 그래 그 손이 없어서, 그래 산소가 공동묘지에 묻혔는데 일본놈들이 없애서 산소를 잃어버렸지. 그래서 금년에 우리 면에서 군에서 주선해서 유공자의 묘소를 등한시 한다는 것은 후손의 수치다. 구해야 한다고 해서 묘를 찾아서 묘를 이장시키고 비를 세웠지. 한치 저수지 옆에 횡성 고개 넘어가는 왼손 쪽으루다 조그만 계곡에 있어요. 거기 비석에 다 써 있어요.
-朴淳甲 72세-
⑭박 건의<별정곡>과 두문강 경계비
저 문막면 동하리라고 있습니다. 동하리. 동하리에 뒷산이, 산소가 저의 선대이지만 박 건이라는 부자 분이 묻혀 있는 곳이지요. 그 양반이 우리 한국 당시에 귀양도 갔지만 그 팔도감사를 다 지낸 분이세요. 그분의 특이한 일이 중국 사신으로 갈 적에 중국 사신으로 갈 적에 그 ‘별정곡’지은 것이 있어요. 지금 찾지는 못했는데 그 분이 왜 사신으로 갔냐면 한·만 국경을 표시하기 위해서 결국 백두산 경계비를 세우기 때문에 목극동이라는 중국사람과 같이가 가지고 경계비를 세운 것이 두만강이 아니고서 거기 두문강이라고 있습니다.
결국에서 두문강에다 세웠는데 근데 일한 합방 이후에 만주 정벌하는 바람에 일본놈들이 다 집어먹을려고 그 비석을 없앴다고 합니다. 두문강에다가 그때이죠. 내한데 지금 종손이 마흔 한 살인데 산도 일부 팔아먹고 그랬는데 내게 9대조인데, 그래서 그것이 우리나라 역사편찬위원회 에서도 그것을 알고 있어요. 그분의 산소가 동하리에 있습니다.(두문강이라고 하셨지요?-조사자)네. 두문강이라고 합니다. 근데 역사편찬위원회라던가 두분에 한 분이, 그분이 사람을 시켜서 경계비를 세웠느니 갔느니 안 갔느니 하는데 실제 우리가 알기로는 그분이 갔다온 데는 거시기 는 중국사신으로 들어갈 적에 ‘별정곡’이라는 데는 별정곡 지은 것을 찾게되면 강원대학 어디로 부쳐달래면 강원대학으로 부쳐드릴거예요. 근거가 되는 것은 두문강 경계때문에 그 양반이 중국사신으로 가신거니까(어디는 보니까 토문강이라고 하던데요-조사자)두만강이 아니라 두문강 이에요. 그 역사적인 것을 모르겠고 그분이 들어가면서 지은 거예요. 언문으로 되어 있어요.
-朴淳甲 72 세-
⑮최 고운 선생의 재치
어느 산간 벽지에서 사는 가난한 선비가, 선비라고 하면 사서삼경 다 본 선비라고 합니다. 이 양반이 과거를 보러 대국에 들어갔는데 글제가 나올 줄 알았는데 글제가 안 나와요. 보니까 선비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는데, 가만히 보니까, 단상에 아주 꽃같은 여자가 나와서 네 번을 웃고서 내려가거든, 그게 글제란 말이야. 그러니 그게 무얼 상관 하는지 알 수가 있나요. 그래서 가만히 앉아 보니까 대국 선비가 하나 있는데, 쓰는 데 보니까 선비들은 지금 보면 대강 짐작을 알 수가 있잖아요. 누가 잘 쓰는 지. 사희라. 네 번 웃으니까 기쁘다. 그래 사희라 글제를 쓰고 글을 짓는 데 대한에 보우감이요 크게 가므는데 단비를 만났고 또 타향에 봉고인이요, 저 수천 리 밖에 나가 고향사람 만나 좋은 것 아니요? 동방에 황촉야요, 고을방에 촛불밤이요. 그러니까 첫날 밤이니까 좋은 거예요 또 금방에 괘명신이라금방 과거를 볼때니까 좋다. 그래 가만히 최 고운 선생이 보니까 그게 다 맞거든요 그래서 그걸 차적을 해서 고쳐서 하는데, 그 다섯 자 글자거든요. 그래 ‘대한에 보우감’을 ‘7년 대한에 보우감’이라고 7년을 더 넣고, 또 ‘타향에 봉고인’ 을 ‘천리타향에 봉고인이라’. 또 ‘동방에 화목야과’를 ‘무월 동방에 화혹야과’ ‘달없는 동방에 화촉야라’ 또 ‘소년금방에 괘명신이라’ 젊어서 과거를 했다. 그러니까 시관이 둘을 다 들여다 보니 다 잘 지었는데 다섯 자 쓴 사람보다 두 자를 더 쓰니 장원이거든요. 그래 최고운 선생님이 장원급제를 했어요.
그러니, 대국 선비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대국서 내가 왜 두 자를 못 넣었느냐. 그러고 내가 죽어야지 그러고 자결을 했어요. 죽어서 그 원혼이 최고운 선생을 따라다니면서 그 사람이 “꼭 내 글을 따라 지은 것이지 저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 따라 다니는 거야. 따라나오는데 여관에 들어 자다가 화장실에서 대변을 보고 있는 데 뭐이 잡아당겨요,아래를.
“니가 내 글을 차적한 것이지 네가 진 것이 아니지 않느냐?”
하고 그러니까
“내가 지었다’’
“꼭 그러냐?”
고 하니까
“내가 지었다’’
대국선비가 그 귀신 하는 얘기가 “그럼 내가 글귀를 낼 터이니 네가 답을 못 써내면 내가 죽이겠다. 그러니 귀신 귀자 다섯을 운자로 넣어서 여기서 지어놔야지 네가 살아가지, 그렇잖으면 죽는다”
그러니까 짓겠다고 그래서 ‘이매망양은 사서괴라그래 귀신 귀자가 다섯이 들어가잖아요. 그래서 최고운 선생님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어요.
-徐春澤 73세-
⑯장사 안 삽교 이야기
직품이 안 직간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요. 근데 이분이 장사인데 어느 날,봄날인데 변소에 가서 대변을 보고 앉았더니까 뭐이 노란게 앞에서 이렇게 지나가요. 보니까 갈가지 새끼거든요. 호래이. 그래 요런 발직한 놈 하고서 훔켜 잡아서 다리에다 찌고서 대변을 보고 나오니까 죽어버렸단 말이예요. 그래 그걸 죽은 놈을 마당가에, 대추나무에 걸어 놓고선 들어가 앉았는데 며느리가 식전에 일찍 일어나서 물을 길러나가다 보니까 호래이가 대추나무에 걸렸거든. 아 온통 야단이거든. 그래서 그냥 두려니까 동네사람도 모이고 그 죽은 호래이를 보고 놀래니, 그래 젊은 사람들이 모이니까 옛날에 나막신이라는게 있어요. 그걸 신고 앉아서 그 소 짐싣는 바가 있거든요. 그걸 하나 쥐고 쪼그리고 앉아서 느이 이걸 좀 잡아당겨 봐라 하니까 여섯이 쥐고서 잡아당기니까 호래이 죽을 때처럼 나막신이 달막달막 하더라 그런 얘기가 있어요. (그 장사 이름 이?-조사자)안삽교 안직간이라고 그래요. 그 얘기는요 아주 오래된 얘기가 아니예요. 그래 그 쬐그만 갈가지도 장정 여섯 명의 힘을 가졌다는 거예요. 그래 그분 네는 눈을 뜨고 안 다녔댑니다. 눈을 뜨면 눈에서 불이 활활 나와서요.
-徐春澤 73세-
⑰이 춘보 이야기
아주 가난하게 사는데 봄새에 남구를 하러 가니까, 산에 뭐 이상한게 있어. 보니까 무꾸같이 뵈어요 무꾸. 흰 무꾸. 그래 캐서 보니까 엄청나게 커요. 큰 걸 캐서 놓고 나무(테이프를 뒤짚다. 그동안 녹음되지 못한 부분을 다시 해달라고 부탁하다-조사자)홍천의 이춘보인데, 어렵게 살았는데, 나무를 하러가서 무꾸같은 이상한게 있어서 캐가지구는 나무를 해가지고, 그걸 나무 위에 얹고 짊어지고 오니까 마침 그 옛날에 아전이라는 세금 받으러 다니는 사람이요. 세금을 못 물어서 밀려가지고 있는데 왔거든요. 그 깜짝 놀랠테지요 속으로. 그래 놀래서 세금을 받으러 와서 보이 나무틀 해 젊어지고 오는데, 나무 위에 그게 무꾸가 아니라 동자심이요. 심. 에삼을 캐서 오는데 엄청나더라구요. ‘그래 어서 캐가지고 왔느냐’ 그러니까 ‘아 남구하러 갔다가 산무꾸가 있어서 하나 캐왔다’고 아. 그게 동자심이란 말예요.
‘그래 날 줄래느냐’고 ‘아, 난 그까짓 거 내버릴래다 이상해서 가지고은 것이라고 가지고 가시라’고 ‘그러면 이걸 날 주면 세금이 얼마간 밀렸는데 그걸 내가 다물어줄테니 달라’고 ‘아이고, 세금은 내가 돈 벌면 낼테니 그냥 가지고 가라구!’
그래 그 사람이 세금을 면제해 주기로 얘기를 하고 그 삼을 가지고 와서 가만히 생각하니 아전으로 다니면서 그런거나 받아드리는 사람이 지금의 군수지요. 원한테다 바치면, 자기가 계급이 올라가서 잘 될테니까, 그걸 갖다 원한테다 바쳤지요. 바위 옷을 싸서 잘싸고 싸서 갖다 바치니까, 군수는 또 ‘내가 이걸 높은 데다 바치면 도지사가, 감사가 되겠으니’ 감사한테다 또 바쳤지요. 감사는 그걸 또 받아가지고 나라에 갖다 바치면 그때는 운현대감이구 운현대감에게 갖다 바치면 큰 벼슬을 하나 하겠으니까, 운현대감한테로 가는데 이거를 싸고 싸서 서울로다 보내는데 지금은 뭐 교통이 좋으니까 차로다 보내지만 옛날에는 지고 갔거든요(-녹음불량-조사-자)이춘보라는 사람이 가난하게 사니까 지고 가다 저물어서 그 영업집에 가서 자고가자고, 자고가자고 하니까 자고 가긴한데 지금 우리집에는 죽은 사람이 많고 그러니 우떻게 자느냐고, 못 잔다고 그러니 오도가도 못하고 어떻게 해요. 있어도 좋으니까 자겠다고, 그러니 그럼 그러라고, 그럼 신체를 치워줄 수 있느냐고 돈은 내가 요구하는대로 줄테니 치워다우. 그래 들어가면서 치우면서 보니까 거기 아주 싸고 싼게 있거든요.
그게 뭔가하고 풀어보니까 자기가 캐온 산무꾸란 말이요. 그게 우연히 그때 그 사람이 그걸 갖다가 그 운현대감한테 바치니 운현대감이 받아보니 동자삼인데 참 좋거든요. 저게 쑥맥인데 그냥 내려보내면 도루가서 천대를 받겠거든요. 없이 품이나 팔고 그러니 그래 거기서 양반으로 가르치는데 오티나 잘 입히고 관을 씌키고 그래서 부려먹는 종들에게 얘, 얘, 하라고 시키면 소리가 안 나와서 여보시요 그래. 그래 하도 그러니까 어디 나도 그래 보겠다고.
“얘 뭐 좀 가지고 오너라”
그러니까
“예,예”
그래, 아, 야 뭐가 되는구나. 그래서 차차 되드래요. 양반이 그래서 양반을 맨드러 내려보냈대요. 그게 다 그사람 복인데 세금 좀 까주겠다고 해가지고 가 잘 살려고 여기 바치고 저기 바치고 한게 그예 그 사람 손으로 들어가서 잘되었다는 얘기예요.
-徐春澤 73세-
⑱이 괄 장군
이 괄이 서석 사는데, 이 괄이 아버지가 죽을 적에
“내가 죽거들랑은 아무데 소(沼)가 있는 데 소에다 바루 묻지 말고 꺼꾸루 묻어다구”
자꾸 유언을 했는데 가만히 아들이 자기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 생각하니 어떻게 차마 거꾸로 묻을 수가 없어서 소가 이렇게 있는데, 거꾸로 묻어야 시체가 소로 들어가서 성국이 될텐데 그렇게 못 묻고 바로 묻었어요. 바로 묻을 적에 자기 어머니가 있으니까 어머니를 나가라고 그러고 그 부인이죠, 자기 아버지가 운명할 적에 마누라를 나가라고 그래곤 얘기 하는데
“내가 죽거들랑 소 있는데 꺼꾸로 묻어다고”
그래고
“어느 봉에는 도토리 서 말,어느 봉에는 콩 팔 서 말을 묻어라.”
아들이 가만히 생각하니까 꺼꾸로 묻을 수 없어서 바로 묻었어요. 그래고 그렇게 하고
“이 손가락에 금이 퍼런 줄기가 올라가는데 이 금을 지나서 쑥 올라가거든 네가 나서라.”
이 사람이 그래 놓고는 손금을 보니까 여길 못 올라가고 여기쯤 왔는데, 성질이 급하니까 칼로 쪽 째기니까 이게 그만 올라온거죠. 그래서 기병을 해가지고는 역적 노릇을 해 나라를 치러 나간거죠. 그래서 나가서 쳐나가는데 나라에 잡혀서 역적으로 몰려서 죽었지요.
이 괄이는 죽고 그 묘를 조사해서 팠는데 가서 파니까, 이게 바로 묻었으면 쉽게 내려가 용이 돼서 물에 들어가 자기가 용이 되어 올라가면 아들을 도와 줄려고 그랬는데 이게 등을 넘어가 물을 찾아 갈래니 엄청나게 시일이 걸렸죠. 그러니까, 묘를 파니까 굴이 뚫려서 그걸 찾아 올라 가니까 용이 다 돼서 꿈틀거리면서 물로 들어가야 되는데 못 들어가고 죽었는데, 그 팔을 묻은 것은 땡비가 돼가지고 파는 사람을 쏴서 못 파게 할려고 팔을 묻고, 도토리를 묻고, 그래, 이 괄의 아버지가 그렇게 알기는 알았는데 이 괄이가 시키는 대로 않해서 이 괄이가 아니라 꽹팔이 가 됐다 그러죠.
-徐春澤 73세-
⑲부자 고 하일과 도깨비
대동상업학교 재단인데, 우리가 몇 마지기를 제가 소작을 했어요. 그래서 그 집의 일을 아는데, 옛날에는 두 내외가 살면서 먹고 살게 없어서 꼭 남의 집에 다니며 옛날에는 논밭갈이를 해 주며 품을 팔았어요. 그래. 저녁을 먹으러 오라고 그러는 걸 저녁을 먹으러 안 갔대요. 자기 혼자만 다 먹으면 자기 부인이 굶으니까, 안가면 그 일한 집에서 저녁을 갖다주곤 했데요. 이러면 서 살았는데 그 애기 듣기론, 하루는 저녁에 누가 자기를 찾드래요. 그래 나가니까 하얀 노인이 이만한 보따리를 맡기면서 이걸 아무 날 찾아갈테니 말아달라고 그래 그걸 말아두었대요. 그런 데 올 땔 기다리니 안 오더래요. 그래 펴보니 그게 돈이드래요. 그래 그때 그돈을 가지고 땅에 투자를 했다는 거예요. 땅에 투자해서 부자가 돼서, 그래 서울로 올라간 거예요. 그래 서울에 학교를 하나 설립했는데 대동학교예요. 그 아들이 재단 이사장이 됐을거예요(도깨비 덕분에 부자가 됐군요-조사자)
-南漢祐 75세-
⑳횡성사람이 깍쟁이라 불린 이유
(횡성이 일제시대 항일운동하던 도시임을 환기시키며 이에 관련된 얘기를 요청 했다.-조사자)
횡성이라는데는 고대고대 깍쟁이라는 소리도 나고 했지만, 특수한 성질이 있습니다. 왜 그러냐고 하면 강릉서 서울 다니는 경강 도로가 여기가 중심이고, 여기가 점심 먹는 뎁니다. 여기가 횡성읍이 지금 도로가에서 점심 먹는 장소이기 때문에 여기에 늘 무어 일본놈이고 뭐고 왕래가 심한데, 횡성사람으로서는 특이하게 그 뭐 거시기 일본놈하고는 전혀 붙지를 못하게 횡성사람이 그렇게 얘기를 하고서네, 그렇게 되어서 이렇게 되어가주구시네, 일본놈이 여기서 두 사람 밖에 읍내리에서 두 사람 밖에 못살았어요. 일본사람으로 장사하는 것으로서(장사를 못하게 했다 그거죠?-조사자) 네, 물건을 아주 안 사가요. 여기 일본놈이라고 할 것 같으면 아주 물건을 안 사가고 그래서 그 일본놈들이 연구한 것이 이제 그 깍재이 소리가 난 유래가 둘매기그 짧게 한 것이 옛날에 왜 둘매기 입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둘매기 짧게 한 것이 저 동대문 밖의 올라온 놈들은 둘매기 짧게 한 것은, 말짱 횡성놈이다. 깍재이다. 그렇게 횡성 사람을 이를테면 일본놈들이 선전을 해서 미워했지요. 그래서 그 깍재이 유래는 거기서 그때부터 나온거지요. 깍재이라고 둘매기 짧게 입고 올라오면 하여튼 일본놈이 여기 와서 붙지를 못했어요. 여기도 제2 개성이라고 불렀답니다. 특히 그 민족주의 사상이 저어 벽지 산골에 사는 사람이 무서웠어요.
-朴淳甲 72세-
㉑도둑놈재
서원서 양평으로 가며는 도적놈고개라고 있는데 도둑이 하 많아서 도둑놈고개라고 합니다.
-徐春澤 73세-
㉒황효자와 호랑이
황효자라는 사람이 있는데 어답산이라고 거기다 함정을 파놨어요. 그래 호래이가 빠졌는데 동네 사람이 그 빠진 것을 알고는 몸둥이를 하나씩 들고가서 그것을 잡을라고 그랬어요. 위험하니까 못 잡고 있는데 그 황효자의 꿈에 그 호래이가 현몽을 해요. 그 황효자가 빨리 쫓아가서 위험하니까 그러지말고 돈을 내가 당신네 달라는대로 줄테니까 나한테 팔아라. 그러니까 자기네는. 잡기도 위험하니까 얼핏 그러라고 당신은 사가지고 어떻게 할까냐 그러니까, 내야 어떻게 하든지 팔아라 그래 팔었어요.
동네사람들은 다 가라 그러고는 호래이를 끌어내놓고 그 호래이가 황효자가 타고다니던 호래이더라는 거예요. 그 호래이가 죽을라고 함정에 빠진게 아니고 황효자가 효자라서 호래이를 타고 다닌것을 발표할라고 그 함정에 와 빠졌다. (왜 호랑이가 황효자를 태워요?-조사자)옛날부터 효자는 호래이등을 타고 다녔다고 그래요.
-徐春澤 73세-
㉓매일리의 梅花落地穴
(조사자가 명당이나 집터 잡는 얘기를 요구했다)
집터 잡는 얘기라면 또 한 마디 해드리지요. 자기 아버지가 삼형제를, 아들 삼형제를 두었는데, 아주 그 지관이 용해요. 근데 못살구 그렇게 간고하니까 아들네가 모여서 얘기가, 아버지를 보고 아버지가 남의 집터도 잘 잡아주고 그러는데 왜 우리는 못 사느냐 그러거든요. 그래 아버지가(녹움불량)그래 매화낙지혈이라 매화꽃이 땅에 떨어진 형국이 있다. 그래서 그거 구하려고 술해 왔었거든요. 그런데 저 건너 고등학교 있지 않아요? 그 고등학교 자리가 매화낙지혈이라 지금 이제 모르니까요. 그 큰 부자 아니예요. 고등학교니까 그래고들 떠들지요 매화낙지혈.
-徐春澤 73세-
(2) 횡성읍 읍하리
①고 하일이 부자된 사연
고 창한(고 하일씨의 부친)씨가 원래 가난하다가 전설에 내려오는 말이 옷어른들 하시는 말씀이, 어디 가다가 원주 나가는 거기에서 횡재를 해가지고 부자가 됐다 이거요. 통소만 불며 돌아당기민 이래 하다가(통소만 불며 다니던 분이세요? 직업은 없으시고요-조사자)그럼 직업도 아무 것도 없으면서 그러다가 횡재를 해가지고 그랬지. 그게 인제 옛날에는 소장사들이 보따리를 싸가지고 걸어다닐 때니까 이제 비행장 말하자면 침해골이라고 있어요. 용천어리라고 있어요. 옛날에 용이 나갔다는 거기를 돌아 가다보니 보따리를 얻었다, 그거지. 그게 말하자면 돈 보따리지. 이래 가지고 고 창한씨가 서울로 올라간거지
-조형원 70세-
②용소
용이 나갔다고 해서 용소가 된거지. 왜정 때 거기서 활을 쏘면 마산이라는 곳에 가서 꽂히고 말하자면 장사들이지.
-송찬희 74세-
③태기왕과 소금벽
태기왕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그 내용은 모르지만 태기왕이 서하지라고 와서 피난하다가 지고 돌아와서 쫓겨왔지 그래서 저 삼동거리서 멸했지. 우리는 무식해서 태기왕 역사는 모르고 소금이 한 벽속에 쌓놓고. 한 벽속이 전부 소금이래.
-송찬희 74세-
④나무꾼과 호랑이
옛날에 안홍면에 서사리가 있어요 거기에 조그만 마을이 있는데 그때가 시방 50년 전 쯤 되요. 마실의 총각 아이가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나무를 베어놨다가 나무로 가려 놨다가 겨울에 갖다 때요. 져다가. 겨울에 그걸 지러갔더니 무슨 짐승이 나오더래. 그래 개만한 짐승이 나오더래 그래 낫을 가지고 입을 곽 찍었대. 입을 찍었는데 말이야 서로 잡아당기는데 그놈은 그놈대로, 총각은 총각대로 잡아당기는데 잡아 당기다 잡아당기다 못 잡아댕겨서 지게고리에 칭칭 감 아가지고 떡하니 나무 맨꼭대기에 싣고서 내려오는데 저녁때 동네서 노인네가
“아이쿠 너 호랑이 잡았구나”
그랬대. 그래 그 호래이 소리에 겁이나서 헉 하고 나자빠지더래 거기서 저는 호래인지 모르고 잡았지. 그래 까무라쳤다가 살아났는데 호래이를 잡아서도 죽은 것을 보고 호래이 소리를 듣고 놀랐대.
-송찬희 74세-
(3)원성군 지정면 간현리
①오형제 바위
바위가 다섯 개 있어요. 오형제 바위. 거기 밑에 굴이 있어요. 옛날에는 굴에 배가 들어가고 그랬대요.(굉장히 큰 바위인가 보죠?一조사자)예. 철길이 나기 때문에 여기서 소금 같은 것도 댕기고 배로 운반해서 장마때까지 배가 가지. 장마 뒤에는 소금배가 가지 못했대요.
-李東變 73세-
②섬강의 유래
요 위로 올라가면 바위에 올라앉아 있는게 두꺼비, 요런게 두꺼비와 똑같이 생겼어요. 그래서 섬강이라고 불러요. 바위 꼭대기에 두꺼비같이 생긴 것이 올라 앉아 있어요. 그래서 두꺼비 섬 자 섬강이라고 불러요. 그래서 홍성서부터 여기까지를 섬강이라고 불러요.
-李東變 73세-
③욕바위 A
옛날에 감사가 가마타고 지내가는데 백성이 욕을 했대요. 그래서 감사가 찾아 올라가니 아무도 없드래요 그래서
“욕바위로구나”
그래서 바위가 욕을 했다구해서 욕바위가 됐어요.
-李東變 73세-
④노루고개
노루가 나오는 고개래서 노루고개라고 합니다.
-柳東九 75세-
⑤범님굴
범이 나오는 굴이예요. 범님이 나와서 범님굴.
-柳東九 75세-
⑥베틀바위
바위가 아주 넓은데 밀에서 굴에서 베를 짯어요. 그래서 베틀바위라고 합니다.
-柳東九 75세-
⑦똥구멍 바위
바위가 아래가 그렇게 생기고 똥구멍 같이 생겼어요 가보면 알아요.
-柳東九 75세-
⑧치마바위
바위가 넓적하게 생겨서 치마바위에요. 바위 아래 굴에서는 호랭이가 살아요.
-李東變 73세-
⑨욕바위B
감사가 바위 있는데를 지나가니까 정치를 잘못해서 그 국민이 바위 밑에 이래 섰다가 그냥 지나가니까 이렇게 나서서 막 욕을 해. 바위서 나서서. 그래서 욕바위래.
-최규옥 79세-
⑩오형제바위B
오형제바위는 강에 있어요. 굴곡이 생겨서 다섯 개가 있어서 그러는가 본데요. 비가 와서 모래가 메어서 그안이 푹 들어가서 그렇게 되었나봐.
-최규옥 79세-
⑪간현(艮峴)의 유래
간현이 한산 이씨-그러니까 艮이란 艮자가요, 그 저희 웃대 할아버님께서 이조판서를 하시고 하야 하실 때 이 간현을 인제 사패지지로 인제 은퇴하신 거지요. 그 어른 아호가 간옹(艮翁) 이시거든요 그 아호가요. 이제 그 어른 이름을 따라 간현은 艮자를 따서 艮峴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저희 선대이시지요.
-宋慶鎬 64세-
⑫중다라니바위와 신선바위
거기 인제 이 바우가 이렇게 생겼으며는, 거기 중같은 형체가 이렇게 사람갈이 까꾸로 매달려 있어. 스님이라고 중이라고 했으니까는 그래서 중다라니가 되었고, 중이 이짝에 인제 이 건너에 큰 바우가 신선바우라고 있어. 인제 중이 선녀들이 내려와 노니까 중이 겁탈하러왔다가 까꾸로 떨어져서 죽어서 그렇게 중다라니라고 하는데 중 형상이 이렇게 매달려 있어. 이렇게 자세히 보며는 둥그런게 보여 그래서 중다라니고 인제 신선바위라는데 그쪽 이렇게 펀한 바위가 있어. 옛날 노인들이 그래 그전에 선녀들이 거기 내려와서 노는데 중이 그래서 인제 벌받아서 떨어져 죽었다고 그래.
-金順玉 65세-
⑬데련님 산소
안창에 데련님 산소하고 부원군 산소가 있어요.
옛날에 아이를 낳아 놓으니까 어끼에 날개가 나고 천정에 덜컥 붙더래. 인제 그런 애가 나면 역적이 되거든. 그래서 부모가 죽였대. 칼로다 몸을 잘랐더니 다시 붙드래. 왜 불태면 나는 재있지 않우? 그 재를 뿌려서 죽였대. 그 무덤이 데련님 산소래.
-金順玉 65세-
(4) 원성군 지정면 안창리
①연흥 부원군 산소와 그의 손자
(최승순교수께서 안창에 김제남의 묘가 있는 까닭과 인목대비의 출생지에 대해 질문하셨다)
대비의 출생지는 여기가 아니고 서울 이시지요. 왜냐하면 저희 연홍께서 인조 반정후 신원된 후 그전에는 역적으로 몰리셨으니까, 참 그야말로 본 사람이 있으니까 알았지요. 그야말로 신원이 된 다음에 이제 서울서 사뭇 배를 타고 올라오면서 산자리를 보고 올라오다 여기각 좋다. 그래서 여기다 모시는데 박상이 왜 유명한 양반 있지 않아요. 지관 그 양반이 여기다 자리를 잡았어요 (그러니까 여기가 원 연안 김씨들 세거지는 아니군요-최승순교수)네, 그렇지요. 사패지로 모시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지요(그런데 여기에 연안 김씨들 큰 집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게 어디 있었어요?一최승순교수)저집터에요(아흔 아홉칸 짜리 집이 있었다는데 저 집터에요?ᅳ최승순교수)그게 그런데 6.25 사변 때 다 소실이 되었어요(그거 누가 살던 집이예요? 연안 김씨 가운데-최승순교수)종손이 살았지요(김제남공 직계?一최교수)네. 그 직계 종손이지요.
(김제남의 직계 손자가 살게된 내력을 요구했다. 이때 직계 손자는 김제남 공의 맏아들의 후 손들이다.)
네 그분들이 어디서 살았냐 하면 치악산 영원사, 그 영원사에서 두 분이 피신했어요. 두 분의 외가가 흥업면 저 뭐야 매지리가 아니라 원주서 흥업 가재면 거기가 성정리?(조사자들이 미리 준비해간 지도를 제시했다)
(녹음불량)거기 사셨대요. 이제 두 분이 남성서 외가댁으로 두 분이 피신을 어떻게 했느냐하면, 서울서 시녀들이 데리고 내려왔단 말이예요. 외가로. 두 분이 피신을 하는데 외할아버지가 외할머니 한테도 알리지 않고 벽장에다, 사랑 다락에다 이렇게 두 형제분을 한 분은 아홉살이고 한 분은 열두 살이니까 서로 장난을 할꺼 아니예요? 근데 거기다 두셨는데 전설로 우리가 듣기로는 이 양반이 아침 저녁으로다 그전에는 안으로 들어가 잡수셨는데 꼭 내다달라 잡수시었거든요. 그러니 이 양반은 안 잡수시고 외손자를 드렸단 말이예요. 비밀이 탄로 날까봐, 그래 가지고 꼭 주막에 나가서 사 잡수시거나 약주를 잡숫거나 이렇게 했고 그래 가지고 외할머니가 하루는 사랑이 고요한데 뭐이 통탕통탕 소리가 난다 말예요. 이래 보니까 문 여는 소리가 딱 나니까 조용하단 말예요. 그래서 문새가 열렸는데 이렇게 보니까 타리개 비선이 보인다 말예요. 이렇게 보니까 사가에서는 신지 못하는 버선이란 말예요. 그래서 외조부가 들어오셨는데 어째 사랑에서 소리가 나고 문틈으로 보니까 궁에서 신는 타리개 버선이 보이더라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래 그날 저녁으로 두 분을 내쫓으셨어요. 그래 남성 삼거리에 와서 두 형제분이 붙들고 우는데 중이 지나가다가
“느덜 웬 애들이 이렇게 울고 있느냐?”
하니까
“우린 부모도 잃고 올데갈데 없어 울고 있다”
그러니까
“그럼 나한테로 가자”
해서 영원사로 가서 피신을 하셨어요. 그뒤 나이가 한 이십 세되고 한 이십 쯤 넘고해서 신원이 되셔서 나오셨는데 그렇게 해서 피신을 하셨어요. 그 두 분은 천자 석자 군자 석자 형제 두 분이예요.
-김세영 67세-
⑮인목대비와 선조대왕의 만남
임진왜란 때 북쪽으로 쫓겨가셨잖아요. 그럴 적에 배를 타는데, 배를 참 그때 이 양반이 당돌 하신 분이야. 인목대비께서 말이야. 왜냐면 임금이 배를 타셨는데 거기를 올라오실려고 한단 말이야. 이 양반이 임금이 타셨으니까 신하들이 않된다. 이거야
“아이 아버지가 탄 배에 자식이 못 탈 배가 있느냐?”
그래 가지고 올라오니까 선조께서 보니까
“아! 그건 옳은 말이다. 타라고”
그래 태워가지고 가셨데요. 그래 가지고 그후에 알게 되가지고 이제 선조대왕 원빈이 돌아가시고 후빈이 되어 들어가셨습니다.
-김세영 67세-
⑯연홍부원군 김제남 신도비와 거북이
(조사자가 신도비 탑신을 떠받치는 거북이가 머리를 뒤로 돌리고 있는 이유를 물었다.)
왜냐하면 중직(牌職)을 받으셨지않아요. 영의정. 저희도 자세한 내용은 모르는데 살아서 영의정을 지내셨으면은 거북이 머리가 똑바로 나갔을텐데 중직을 받으셨기 때문에 거북이 머리가 고개를 이렇게 돌렸다는 그런 말이 전해오고 있어요.
-김세영 67세-
⑰인목대비의 어머니
그 양반이 제주도에 귀양가서 계실 적에, 참 제주목사한테 별 거시길 다 당하셨단 말예요. 모욕을, 모욕을 다 당하셨는데, 하도 괘씸하니까 아 거기 가서 딴거 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술을 빚어가지고서는 참 나루터에 내다 팔으셨다 그랬단 말예요. 그런데 그 양반이 하도 거시기 하니까 나중에 신원이 된 다음에 하도 괘씸하니까 “나는 제주목사의 목을 말 꽁지에 베어다는 걸 봐야 올라가지 그전에는 못 올라간다!” 역사에는 그런게 안 나와 있지만 그런 얘기가 있어요. 그래서 결국은 제주목사의 목을 베어 달았다는 얘기가 있어요.
-김세영 67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