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세에 도전을 시작한 맥도날드 창업자 레이 크록(Ray Kroc) 타인의 재능을 알아보고, 현장에서 답을 찾아라
빵 두께는 17㎜, 고기 두께는 10㎜, 총 두께는 인간이 가장 편안해하는 44㎜로 한다. 맥도날드는 초등학생이라도 작업 매뉴얼만 있으면 균일한 품질의 맛을 내는 햄버거를 만들 수 있게 했다. 이 표준화가 맥도날드의 성공을 이끈 열쇠라면 이 표준화, 세계화의 기준을 만든 이는 바로 맥도날드 프랜차이즈 시스템의 창업자인 레이 크록이다.
▶미국을 ‘맥도날드화’한 20세기 리더
1983년 미국의 잡지 <에스콰이어>는 ‘20세기 미국인의 생활 방식에 기여한 50명’을 선정했다. 그 기사는 그중 한 명을 이렇게 설명했다. “콜럼버스는 미국을 발견했고 제퍼슨은 미국을 건국했다. 그리고 레이 크록은 미국을 ‘맥도날드화(化)’했다. 미국의 이미지를 만든 것은 컴퓨터도, 핵무기도, 예술도, 과학도 아니다. 바로 햄버거이다. 레이 크록은 미국인의 입맛을 맥도날드 햄버거로 표준화했지만 그의 진정한 공로는 이른바 ‘맥도날드 시스템’이라는 프랜차이즈를 창조해낸 것이다. 그는 시대의 리더이다. 이제 우주 비행사들조차 맥도날드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맥도날드는 단순한 햄버거가 아니다. 미국 내에 무려 1만5000여 개의 매장, 한국에서만 1000여 개의 매장이 있고 전 세계에 약 3만5000여 개의 매장이 있다. 그리고 하루에 약 7000만 명의 손님을 맞고 있다. ‘맥도날드’라는 브랜드의 가치는 세계적인 기업들 사이에서도 톱10 안에 랭크되는 고부가가치 상품이다. 즉 맥도날드는 문화이고, 미국을 상징하는 것이다.
1970년 이후 전 세계는 ‘미국화’를 열망했다. 그 첨병에 선 것은 ‘할리우드 영화’, ‘코카콜라’, ‘리바이스 청바지’ 그리고 ‘맥도날드’였다. 맥도날드 매장이 문을 연다는 것은 바로 그 지역, 그 국가에 미국화의 뿌리가 내리는 시발점이 되는 셈이다. 이렇게 전 세계에 걸쳐 일종의 ‘제국’을 건설한 맥도날드. 하지만 그 화려한 바벨탑에 드리워진 그림자 또한 짙다. 또한 맥도날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은 엄연히 현재진행형이다. 정크 푸드의 대표주자, 성인병과 어린이 비만의 주범, 매장 근로자의 노동 강도에 대한 문제점, 또 지금 우리 사회에서 큰 문제로 대두된 ‘패티의 위생’ 논쟁 등 브랜드의 부정적인 시선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맥도날드는 우리에게 익숙한 생활이 된 지 오래이다. 빠르고, 간편하고, 비교적 싼 가격에 한 끼를 먹을 수 있다는, 즉 시작부터 ‘백인 노동자 계급의 한 끼’였던 맥도날드의 모토는 어쩌면 복잡한 현대 사회의 틈바구니를 파고든 절묘한 상술의 결정체인 셈이다.
레이 크록, 오늘 우리가 주목할 인물이다. 그는 맥도날드의 실질적 창업자이자, 맥도날드를 세계화한 주인공이다. 수십 년 동안 종이컵, 믹서기 영업사원으로 살던 레이 크록이 맥도날드 햄버거를 발견한 나이는 53세 때이다. 지금이야 50대 초반이면 한참 일할 나이라고 하지만 레이 크록이 살던 1950년대만 해도 50대는 은퇴를 준비하는 시기였다. 하지만 레이 크록은 그 나이에 맥도날드의 매장 확장을 위한 프랜차이즈화, 맛과 품질의 세계 표준화, 생산과 공급의 스피디한 시스템을 구축해 ‘햄버거 제국’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알려진 대로 맥도날드 브랜드는 본래 햄버거 가게를 운영하던 맥도날드 형제의 이름이었다. 이를 레이 크록이 동업 계약을 통해 지금의 맥도날드로 만든 것이다. 어떻게 보면 맥도날드 형제는 그야말로 ‘재주만 부린 곰’ 신세가 되었고 레이 크록은 맥도날드 형제의 노하우를 집어삼킨 탐욕의 비즈니스맨처럼 보이겠지만, 레이 크록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햄버거와 프랜차이즈, 그리고 패스트’의 무궁한 가능성을 간파한 능력이다. 맥도날드 형제와 다르게 그가 세계화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 차이이다.
레이 크록은 창업 이후 단 한 번도 현장을 떠나지 않은 리더였다. 그는 매일 새로 문을 연 매장의 실적을 체크하는 것은 물론, 매장의 주방, 화장실, 좌석 등을 돌며 휴지 하나 떨어진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레이 크록이 신앙처럼 믿는 것이 있다. 맥도날드 회사의 모든 방에 걸려 있는 액자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다.
‘인내 없이 이룰 수 있는 일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 재능만으로는 안 된다. 위대한 재능을 가지고도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많다. 천재성으로도 안 된다. 성공하지 못한 천재는 웃음거리만 될 뿐이다. 교육으로도 안 된다. 세상은 교육받은 낙오자로 넘치고 있다. 오직 인내와 결단력 그리고 끈기만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
레이 크록은 타고난 재능보다 노력을, 많은 공부를 한 지식박사보다 현장을 뛰어다니는 실무자의 가치를 인정한 리더이다. 그가 맥도날드를 지금의 ‘완성품’으로 만들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인내, 노력, 도전을 기본으로 한 인재 발굴 능력, 현장을 파악하고 기업을 지휘할 수 있는 솔선수범의 헌신적인 성실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20세기 가장 논쟁적 리더 중 한 명이 바로 레이 크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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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노이주 데스플레인에 있는 맥도날드 뮤지엄. 맥도날드 초기 매장의 모습이다. 사진 Bruce Marlin
▶30년 경력 세일즈맨의 성공 전략 레이 크록은 1902년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평범했다. 그의 어린 시절 유일한 기억이자 평생의 습관을 들인 인물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유독 청소와 설거지를 싫어했고 실제로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집안의 모든 청소와 설거지는 레이 크록의 몫이었다. 어린 크록은 청소, 설거지를 통해 청결과 위생에 대한 관념을 갖기 시작했고 이는 훗날 그가 맥도날드를 창업하고 가장 강조한 매장의 청결과 위생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다.
또한 레이 크록은 어려서부터 이것저것 물건을 파는 데 소질이 있었다. 소다수, 악기 등 다양한 품목을 주변에 팔았고 또한 장사 수완도 뛰어나 동네에서는 그를 공상가, 도전자를 뜻하는 ‘대니 드리머(Danny Dreamer)’라고 불렀다. 또래에 비해 조숙하고 사회를 일찍 경험한 것이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자 레이 크록 역시 군 입대를 자원했다. 하지만 고등학생 신분이라 입대를 하기엔 나이가 어렸다. 레이 크록은 학교를 중퇴하고 나이를 속여 가며 자원했지만 결국 거절당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적십자사의 구급차를 운전하기도 했고 클럽의 피아노 연주자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러다 종이컵 세일즈를 하기 시작했고 얼마 후 믹서기를 파는 영업 사원이 되었다. 고단한 삶이었다. 그러나 레이 크록은 매일 밤 잠들기 전에 꼭 하는 것이 있었다. 그는 ‘긍정의 힘’이란 녹음테이프를 매일 들었다. 그리고 희망을 잃거나 ‘한 번의 기회가 온다’는 기대를 포기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이를 지켜본 그의 아내 에델조차 레이 크록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레이 크록은 멀티 믹서기를 주로 팔았다. 한 번에 많은 양의 셰이크나 주스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기기였다. 하지만 영업은 신통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전표를 점검하던 레이 크록은 깜짝 놀랐다. 한 가게에서 무려 6개의 멀티 믹서기를 주문한 것이다. 도대체 어떤 물건을, 어떻게 팔고 있기에 이렇게 많은 멀티 믹서기가 필요한 것일까. 레이 크록은 그 가게를 방문하기로 했다.
1954년, 레이 크록이 찾아간 곳은 샌버너디노의 햄버거 가게인 ‘맥도날드 바비큐’였다. 레이 크록은 그곳에서 ‘새로움’을 발견했다. 그가 영업 사원으로 수많은 음식점을 상대했지만 이 같은 곳은 처음이었다. 맥도날드 바비큐는 햄버거 등 9가지 메뉴를 빠르고, 저렴하게 만들어내고 있었다. 물론 음식은 질과 양은 가격 대비 수준급이었다. 또한 매장 내의 모든 물품도 종이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일회용품이었다. 레이 크록은 그곳을 운영 중인 맥도날드 형제를 만났다. 그들은 레이 크록에게 “우리가 주문을 잘못했다. 멀티 믹서기 6개가 아닌 8개를 갖다 달라”고 말했다. 그만큼 햄버거와 같이 판매하는 밀크 셰이크가 많이 필요했던 것이다.
맥도날드 형제, 리처드와 모리스 맥도날드는 원래 동부의 뉴햄프셔 출신이었다. 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한창 붐을 일으키던 극장 사업을 하기 위해 1933년 캘리포니아로 갔다. 그리고 LA 글렌데일에서 4년간 극장 사업을 했지만 실패했다. 그 과정에서 맥도날드 형제는 극장보다 극장 앞 핫도그 가게가 장사가 더 잘된다는 것을 알았다. 1937년, 형제는 캘리포니아 아카디아 ‘에이드룸’이란 핫도그 판매점을 열었다. 장사는 잘됐다. 그리고 캘리포니아에 사람이 몰리고 경기가 좋아지자 급격히 늘어난 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햄버거 가게를 열었다. 바로 ‘맥도날드 바비큐’였다. 이때가 1948년이었다. 이들은 빠르게 만들어내고, 일회용품을 사용하고, 셀프 서비스 시스템을 이용해 단가를 낮추었다. 그들이 파는 햄버거 값은 단돈 15센트였다.
장사가 잘되자 맥도날드 형제에게도 지점을 내자는 제안이 많았다. 형제는 약 10개의 지점을 냈지만 맥도날드 형제가 운영하는 가게 외에는 그리 큰 이익을 내지 못했다. 지점은 프랜차이즈 시스템을 완벽하게 적용하지 못했고, 맥도날드 형제 역시 사업을 확장하는데 큰 관심이 없었다. 레이 크록은 직감적으로 이 사업의 성공을 예감했다. 그는 햄버거와 밀크 셰이크를 사기 위해 줄을 길게 서는 손님들을 보고 ‘이 식당을 전국의 각 도로변에 세우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 형제를 설득했다. 오랜 만남과 설득 끝에 레이 크록과 맥도날드 형제는 프랜차이즈 사업의 계약서에 사인했다. 조건은 매장 이름, 메뉴, 매장 구조, 운영 방식, 금색의 노란 색 아치까지 모든 것은 맥도날드 형제가 쓰는 것을 그대로 쓴다는 조건이었다. 세 사람은 손을 마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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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세,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다 레이 크록의 아내 아델과 그의 친구들은 새로운 사업계획을 말렸다. 그들은 53세의 레이 크록에게 “그 나이는 새롭게 뭔가를 시작하는 나이가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레이 크록은 듣지 않았다. 그는 1년여의 준비 끝에 1955년 4월15일, 시카고의 디플레인스에 맥도날드 1호점을 열었다. 맥도날드 제국의 시작인 것이다.
레이 크록은 매일 1호 매장에 출근했다. 그는 직접 청소도 하고 음식도 관리하면서 프랜차이즈 사업에 대한 매뉴얼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레이 크록은 맥도날드의 모토를 만들었다. ‘품질, 서비스, 청결, 가치 QSC&V(Quality, Service, Cleanliness & Value)’ 등이다. 또한 그는 “완벽이란 성취하기 매우 어렵다. 하지만 나는 맥도날드에 완벽을 바란다. 맥도날드에게는 목표로 하는 완벽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즉 품질, 서비스, 청결, 가치의 명확하고도 완벽한 기준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사업은 점차 안정되기 시작했다. 이제 레이 크록은 각 지역에 맥도날드 지점을 세우는 작업에 착수 했다.
1955년 1호점을 연 레이 크록은 1959년까지 불과 4년 만에 100여 개의 식당을 새로 오픈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다. 각 지점의 프랜차이즈 로열티가 너무 싸 지점은 장사가 잘되는데도 본점의 영업 이익이 늘지 않았던 것. 레이 크록은 맥도날드 본사가 지역 매장을 매입하고 이를 점주에게 임대하는 방식으로 시스템을 바꾸었다. 그러자 맥도날드 본사의 자산도 커지면서 임대 수입도 늘어나는 효과를 낳았다. 그러자 일부 언론에서는 ‘맥도날드는 햄버거를 파는 회사가 아니라 햄버거 가게를 임대하는 부동산 회사’라는 비난이 생기기도 했다.
1958년, 1억 번째 햄버거가 판매되었다. 그리고 1959년 위스콘신 주 퐁뒤라크에 맥도날드 100호점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0년 맥도날드의 지점 수가 200개를 돌파했다. 레이 크록은 깊고 많은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장사는 잘되어 맥도날드 지점을 내겠다는 점주들은 줄을 섰고 본점의 이익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레이 크록에게는 꿈이 있었다. 그는 “맥도날드의 황금 아치를 교회의 십자가만큼 미국에 많이 세우는 것이 내 목표”라며 그 야심 찬 꿈을 감추지 않았다. 레이 크록은 좀 더 전문화 된 메뉴 개발, 프랜차이즈 시스템의 정립 등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맥도날드의 성공을 위해서는 본사, 가맹점, 재료 공급자의 비전이 공유되고 협력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판단했다. 또한 이를 통해 각 지점마다 똑같은 시스템, 서비스, 메뉴의 표준화 작업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레이 크록의 구상은 일명 ‘햄버거 학교’로 결실을 맺었다. 이 학교에서는 약 30여 명의 교수진이 맥도날드 매장의 매니저, 예비 점주들에게 집중적인 교육을 실시했다. 매장의 전반적인 관리부터, 품질, 노무, 고객, 재료 관리 등을 배웠다. 그리고 교육과정을 수료하면 ‘햄버거 전공, 프렌치 프라이 부전공’이라는 학위를 받았다. 이 햄버거 학교는 지금까지 약 7만여 명을 교육했고 시드니, 뮌헨, 런던 등에 분교를 두고 있다. 레이 크록은 햄버거 대학에서의 교육을 통해, 비전 공유, 메뉴의 표준화, 시스템의 효율성 등 지금의 맥도날드의 모든 매뉴얼을 전파하고 또 정비해나갔다. 맥도날드에서 일명 ‘성경’이라 부르는 매뉴얼북은 처음 약 70페이지에서 지금은 약 700페이지 분량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집중 교육이 맥도날드의 통일성, 표준화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레이 크록이 이처럼 맥도날드의 맛과 품질에 대한 표준화에 집착하는 것은 ‘맛에 대한 이질감’을 없애기 위한 목표 때문이다. 누구나 낯선 곳에서 먹는 음식에 대한 거부감과 부담감이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 황금아치의 맥도날드를 발견하는 순간, 대중들은 맥도날드의 보편적인 맛을 떠올리며 햄버거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어진다. 바로 프랜차이즈의 기본 중에 기본을 레이 크록이 강조한 것이다. 맥도날드는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맥도날드의 모든 것을 인수받다 1961년 레이 크록의 인생을 바꿀 사건이 일어난다. 레이 클록은 맥도날드 형제와 새로운 계약을 맺는다. 그것은 레이 크록에게는 신의 한 수였다. 계약 내용은 맥도날드 형제가 그동안 브랜드 사용료로 매년 받던 매출의 0.5% 로열티를 포기하는 대신에 현금으로 270만 달러를 받는다는 것. 맥도날드 형제는 세 후 각자 100만 달러씩 받을 수 있었다. 이는 맥도날드 형제가 향후 15년 정도 받는 로열티 금액이었다. 큰 금액이었다. 레이 크록의 변호사는 “너무 비싼 금액이다”라며 말렸지만 레이 크록은 이를 단박에 수락했다. 그리고 맥도날드 상표권, 황금아치, 조리법 등을 비롯한 모든 권리를 형제에게서 인수했다. 이 로열티를 맥도날드의 매출로 계산하면 15년 뒤에는 50만 달러, 1980년대 500만 달러, 지금 같으면 매년 1억 달러 이상의 고정적인 수입이 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맥도날드 형제는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른 셈이었다.
레이 크록은 이제 맥도날드의 진정한 오너가 되었다. 그는 맥도날드가 더 확장되고, 세계화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최소한의 메뉴, 비용 절감의 시스템, 운영의 효율성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1966년 주식을 상장했다. 시가 총액은 한 달 만에 2배로 뛰었다. 그리고 좌석을 갖춘 매장도 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레이 크록은 TV광고를 통해 맥도날드를 ‘백인 노동자의 식당’에서 ‘가족이 함께하는 식당’으로 이미지를 바꾸기 시작했다. 1967년 맥도날드의 최초 해외 지점이 푸에르트리코에 문을 열었다. 1호 매장을 연 지 12년 만에 맥도날드가 드디어 세계로 진출한 것이다.
1968년 맥도날드에서 ‘빅맥’이 출시되었다. 사실 이 상품은 펜실베니아 유니언타운 맥도날드 점장인 짐 델리게티가 최초로 만들어 출시했었다. 큰 인기를 얻자 레이 크록은 이를 맥도날드의 공식 메뉴로 등록했다. 맥도날드가 세계 최대가 된 것은 바로 레이 크록 회장의 강력한 리더십도 있지만, 그와 함께 가맹점의 독자적인 경영과 의견을 수용하는 레이 크록의 유연한 리더십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바로 빅맥이었다. 빅맥은 출시 1년 만에 약 50억 개가 팔리면서 맥도날드의 주력 상품이 되었다. 그리고 이른바 ‘빅맥 지수’를 만들어냈다. 빅맥 지수는 현지의 물가에 따라 가격이 책정되는 빅맥의 가격 비교를 통해 각 나라 통화의 실질적인 가치를 측정하는 경제지표다. 맥도날드는 단순한 햄버거를 넘어 문화로, 때로는 경제적 가치 측정의 기준이 된 것이다.
1976년 맥도날드는 창립 20주년을 맞았다. 그해 맥도날드는 22개국 약 4200여 개의 매장에서 매출 10억 달러를 달성했다. 레이 크록 회장은 1977년 맥도날드의 선장 자리를 프레드 터너에게 물려주었다. 프레드 터너는 1955년 레이 크록이 문을 연 맥도날드 1호점의 종업원 출신이었다. 즉 햄버거를 팔던 종업원이 맥도날드의 회장이 된 것이다. 이후에도 레이 크록은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휠체어를 타고 매일 사무실에 출근했다. 그리고 새로운 가맹점이 문을 열면 첫 날의 실적을 보고 받는 것을 거르지 않았다. 1984년 1월 레이 크록은 83세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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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 | 타인의 재능을 알아보고, 현장에서 답을 찾아라 맥도날드를 바라보는 시선은 사실 복잡하다. 맥도날드의 근본인 패스트 푸드에 관한 시도를 한 장본인은 레이 크록이 아닌 맥도날드 형제였다. 분명 맥도날드 형제는 ‘맥도날드 바비큐’를 어떻게 운영하면 비용이 절감되고, 이익을 많이 낼 수 있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식당의 훌륭한 운영자였다. 반면 일개 영업 사원이었던 레이 크록은 맥도날드 형제의 시스템을 이해하고 이를 사업화할 안목을 갖고 있었다. 또한 그는 이 패스트 푸드 시스템의 성공에 대한 확신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디테일 경영’을 창안해내는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비록 레이 크록이 맥도날드 형제의 공과 노하우를 270만 달러라는, 맥도날드의 성장세를 보면 ‘헐값’에 가로챘다는 탐욕의 경영자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레이 크록은 비범한 리더이자 CEO였다. 그는 맥도날드 성공의 두 가지 날개를 구축했다. 첫 번째는 ‘인재의 발굴’이다. 레이 크록은 맥도날드 종업원 출신의 프레드 터너를 영업과 경영의 후계자로, 그리고 해리 소네본을 재정 관리 책임자로 영입해 맥도날드의 시스템을 논리적, 경영학적으로 완성했다. 리더의 최우선 조건인 인재의 발굴과 적재적소 기용에 있어 레이 크록은 완벽하게 성공한 셈이다. 사람들이 레이 크록보다 오히려 프레드 터너 회장 임기 시에 맥도날도가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더 성장했다고 평가하는 것이 그 증거인 셈이다.
두 번째는 레이 크록이 항상 강조한 ‘현장 경영’이다. 레이 크록은 영업 사원 출신답게 직접 매장을 살펴보면서 매뉴얼을 완성해 나갔다. 그의 디테일 경영의 모든 것이 살아있는 현장에서 만들어진 경험인 것이다. 한번은 맥도날드의 성장세가 주춤해지면서 적자까지 예상될 정도로 부진했다. 레이 크록은 그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얼마 후 레이 크록은 각 부서 간부들이 현장을 확인하지 않고 사무실에서 서류만으로 일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레이 크록은 즉각적인 조치를 취했다. 그는 간부들의 사무실에서 푹신한 가죽 의자의 등받이를 모두 톱으로 잘라내라는 지시를 내렸다. 회사는 발칵 뒤집혔다. 간부들은 당황했다. 그리고 일부 간부는 “레이 크록이 미쳤다” “사장은 독재자다”라고 반발했지만, 레이 크록은 강하게 그리고 굽힘 없이 밀고 나갔다. 간부들은 사무실을 떠나 현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각 매장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시정하면서 회사는 적자에서 벗어나면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레이 크록은 “그 동안은 간부들이 가죽 의자에 앉아 지시만 내리면서 점검을 하지 않았다. 현장에서 지시가 어떻게 이행되는지 점검하지 않는다면 지시는 아무 의미 없는 것이다”라고 현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레이 크록은 자신의 성공을 만든 3가지 요소를 손꼽았다. 첫째는 ‘종이컵’이다. 그는 17년간의 종이컵 영업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을 줄 수 있는 판매의 기술을 익힌 것이다. 또 하나는 ‘수첩’이다. 그 수첩에는 그 동안 만난 사람들의 식성, 기호 등 상세한 내용을 기록해 인맥을 넓혀나갔다. 그리고 세 번째가 바로 ‘쓰레기통’이다.
레이 크록의 이러한 리더십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레이 크록은 말한다. “경쟁 업체를 이기기 위해 그 회사에 스파이를 심어야 한다는 제안도 받았다. 하지만 내 결정은 간단하다. 경쟁 업체의 운영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그들의 쓰레기통을 뒤지면 되는 것이다. 새벽 2시에 경쟁사의 쓰레기통을 뒤져보면 전날 고기와 빵을 얼마나 썼는지를 알 수 있고 이를 통해 자연히 매출도 짐작할 수 있다. 그 안에 사실 모든 것이 다 들어있는 것이다.”
타고난 재능, 학식보다 끈기와 인내를 더 큰 미덕으로 여기는 레이 크록. “고객의 시간을 절약해주는 패스드 푸드점은 성공한다. 남의 시간을 1분 낭비할 때마다 나의 수익은 1달러씩 줄어 든다”고 강조했을지언정, 그의 성공 뒤에는 긴 시간 동안의 준비와 노력이 있었다. 레이 크록 리더십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그의 말이 있다. “사람들은 내가 53세 늦은 나이에 사업을 시작해 하룻밤 사이에 돈방석에 앉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할리우드의 스타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수 년 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노력하다가 때를 만나 큰 성공을 거둔다. 내가 하루아침에 돈방석에 앉았다는 것은 맞는 말일지 모르지만 그 뒤에는 30년에 걸친 긴긴 밤이 있었다.”
레이 크록, 그는 30년을 준비하고, 기회를 잡고, 그 기회를 성공으로 이끈 리더인 것이다.
레이 크록
미국의 사업가
[ Ray Kroc ]
출생 - 사망
1902.10.5. ~ 1984.1.14. |
1955.4.15 맥도날드 정식 프랜차이즈 제1호점을 시카고 근교에 개점하다
어느 작은 주방용품 회사의 영업자인 그의 일과는 시카고 인근의 여러 식당을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그 회사에서는 한꺼번에 다섯 잔의 밀크셰이크를 만들 수 있는 신제품 멀티믹서를 내놓았지만 판매는 신통치 않았다.
믹서기 팔던 크록, 맥도날드 형제의 가게를 보고 사업가 감각이 발동
레이 크록이 시카고 디플레인스에 개장한 맥도날드 1호점.
지금은 맥도날드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캘리포니아 주 샌버너디노의 작은 드라이브인 식당에서 이 신제품을 무려 8대나 구입했다는 사실을 알고 호기심을 느낀다. 직접 방문해 보고 나서야 그는 왜 이 가게에서 멀티믹서를 그렇게 많이 샀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햄버거와 밀크셰이크를 사는 손님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던 것이다.
사업가 특유의 감각으로 그는 이 식당을 전국의 도로변마다 세우면 ‘딱이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식당 주인 형제에게 프랜차이즈 사업을 제안했고, 양측은 변호사를 대동하고 만나 계약 조건을 결정했다. 매장 이름을 비롯하여 메뉴, 매장 구조, 운영 방식, 심지어 일종의 상징물인 금색 아치까지도 원래 주인 형제가 쓰던 것을 그대로 계승하기로 합의했다. 계약서 작성이 끝나자 새로운 동업자 레이 크록은 식당 주인 형제와 악수를 나누었다. 그 식당의 이름은 주인 형제의 성(姓)을 그대로 따서 쓰고 있었다. 바로 ‘맥도날드’(McDonald’s)였다.
맥도날드라는 유명한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 식당의 창안자는 모리스(1902-1971)와 리처드 맥도날드(1909-1998) 형제다. 뉴햄프셔 출신인 이들은 1920년대에 캘리포니아로 와서 영화업계에서 일하다가 1937년에 처음 식당을 차린다. 1948년에는 메뉴와 서비스를 대폭 줄이는 대혁신을 이룩하여, 햄버거와 프렌치프라이와 음료수를 손님들이 직접 가져가게 하는 대신, 가격은 낮추고 음식의 질은 높인 셀프서비스 매장을 만든다. 식당이 성업 중이던 1954년, 레이 크록이라는 사람이 이들을 찾아온 것이다.
53세의 나이에 맥도날드 사업을 시작해 매일 아침 직접 청소하기도
레이 크록은 1902년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사업 재간을 발휘하여 소다수며 악기 장사를 해서 돈을 벌었다.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전쟁에 나가려 했지만, 나이가 어려서 입대가 거절되자 일종의 편법으로 적십자의 구급차 운전기사가 된다.당시 그의 동료 중에는 월트 디즈니라는 만화가 지망생이 있었고, 역시 시카고 출신인 또 다른 청년 어니스트 헤밍웨이 역시 비슷한 수법으로 전쟁터에 나갔다가 부상을 당해 졸지에 ‘상이 용사’ 대우를 받았다.
맥도날드 간판 앞에서 햄버거를 먹는 레이 크록
이후 주방용품 회사에서 일하던 인연으로 맥도날드라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은 크록은 아내와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955년 4월 15일, 자신의 연고지인 시카고의 디플레인스에 맥도날드 제1호 지점을 개장한다. 물론 맥도날드의 최초 매장은 샌버너디노의 본점이고, 그 외에도 크록을 만나기 전에 맥도날드 형제가 허가한 10여 개의 프랜차이즈 지점이 따로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맥도날드가 시작된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제1호 매장은 바로 디플레인스 지점이다. 전혀 새로운 사업에 뛰어든 그때, 크록의 나이는 무려 53세였다. 앞으로 갈 길은 멀었지만, 일단 첫 걸음은 뗀 셈이었다.
하지만 크록의 새로운 사업이 시작부터 일사천리 성공 가도를 달린 것은 아니었다. 프랜차이즈 권리료가 비교적 저렴했기 때문에, 한동안은 본사의 수입이 몇몇 지점의 수입을 합친 것보다도 적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맥도날드는 각 지역 매장을 본사에서 소유하고 점주에게 장기 임대하는 방식을 취했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맥도날드는 햄버거를 파는 게 아니라, 햄버거 파는 가게를 임대하는 부동산 사업자”였던 것이다. 청결 관리를 철두철미 강조한 크록은 매일 아침 제1호 매장에 나가 직접 청소를 할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 “완벽이란 성취하기 매우 어렵다. 하지만 나는 맥도날드에 완벽을 바랐다.” 그는 “품질, 서비스, 청결, 가치”(QSC & V)라는 기준을 입버릇처럼 되뇌곤 했다.
햄버거 대학 만들어 점주들 교육한 크록,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인물 100인'에 선정
레이 크록이 설립한 햄버거 대학. 레스토랑 경영 프로그램등 매장 매니저 및
예비 점주들에게 햄버거 체인점 운영에 대한 노하우를 가르친다.
1960년에 맥도날드의 지점 수는 200개를 돌파한다.
1961년에는 본사에 일명 ‘햄버거 대학’(Hamburger University)을 만들어서 전국 각지의 점주들을 모아 서비스 교육을 하고, 그 과정을 마친 사람에게는 ‘햄버거 전공, 프렌치프라이 부전공’으로 학위도 수여했다. 1963년에는 맥도날드의 마스코트인 어릿광대 ‘로날드 맥도날드’가 탄생함으로써 다른 기업보다 한 발 앞서 ‘아동 고객’을 공략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여전히 낯설지만, 로날드 맥도날드는 한때 산타클로스에 버금갈 정도로 미국 어린이에게는 큰 인기를 누렸다. 1966년에 맥도날드는 주식을 상장했고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주가는 두 배로 뛰어오른다. 기존의 드라이브인 방식을 탈피하여 오늘날과 같은 ‘좌석’을 갖춘 매장을 최초로 개점한 것도 같은 해의 일이었다.
크록이 자서전을 발표한 1976년에 맥도날드는 창립 20여 년 만에 총수입 10억 달러를 넘어섰고, 22개국에 4,177개 매장을 거느리고 있었다. 1980년대에는 총수입 100억 달러에 매장 1만 개를 돌파했다. 2008년을 기준으로 맥도날드의 총수입은 200억 달러 이상이며, 119개국에 3만 1,000개 이상의 매장이 있다. 레이 크록은 <타임> 지가 선정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인물 100인’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1984년 1월 14일, 크록은 8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러나 맥도날드의 행보는 이후에도 거침없이 이어졌다.
미국 어린이에게 큰 인기를 누린 맥도날드의 마스코트 로날드
"콜럼버스는 미국을 발견, 제퍼슨은 미국을 건국,레이 크록은 미국을'맥도날드화'했다"
“콜럼버스는 미국을 발견했고, 제퍼슨은 미국을 건국했고, 레이 크록은 미국을 ‘맥도날드화’ 했다.” 1983년에 레이 크록을 “20세기 미국인의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50인” 중 하나로 선정한 <에스콰이어> 지의 기사 중 한 대목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맥도날드를 향한 찬사보다는 비난을 찾아보기가 더 쉽다. 영화 <슈퍼 사이즈 미>에서 충격적으로 묘사된 것처럼 패스트푸드는 비만과 성인병의 주범으로 악명이 높다. 하지만 초기에만 해도 맥도날드는 15센트라는 저렴한 가격에 비교적 양질의 음식을 제공한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명성을 얻었다. 햄버거나 프렌치프라이가 ‘양질의’ 음식이라고? 물론 그 당시의 다른 음식에 비해서는, 그리고 가격 대비 품질로는 그랬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뭐가 문제일까? 오늘날 패스트푸드가 곧 ‘정크’(쓰레기) 푸드로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생활방식 자체가 반세기 전과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 고열량 식품은 활동량이 많은 사람에 적절한 반면, 오늘날의 현대인(특히 미국인)은 활동량이 많지 않다는 게 핵심이다. 아울러 ‘패스트푸드’보다 ‘슬로푸드’가 좋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전자에 비해 후자는 더 많은 돈과 시간과 정성이 들기 때문에 종종 기피 대상이 된다. 결국 패스트푸드를 둘러싼 논란의 책임은 판매하는 기업 뿐 아니라 구매하는 고객에게도 있다. 더 싼 가격에, 더 많은 양의, 더 맛 좋은 음식을 얻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고객은 심지어 자신의 건강마저도 종종 외면해 버리기 때문이다.
크록은 맥도날드 시스템의 고안자는 아니었지만
역사는 그를 맥도날드의 진정한 아버지로 기록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패스트푸드 업체들이 다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불공정 행위를 해왔다는 논란은 오래 전부터 있어온 것이다. 가령 맥도날드는 이른바 비정규직 문제에 있어서 논란을 만들어 왔다. 1972년에 크록은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거액의 선거 자금을 기부했는데, 그 직후에 10대 직원의 급료를 최저 임금보다 더 낮게 지급해도 된다는 이른바 ‘맥도날드 법안’이 통과되어 구설수에 올랐다. 쇠고기 안전성 문제, 제3세계 노동력 착취 등등 맥도날드를 둘러싼 논란은 여러 가지였다.
이 같은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패스트푸드를 찾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어째서일까? 단순히 판매자의 술수 때문에 그런 인기가 생겨난다고 보긴 힘들다. 미국 저널리스트 에릭 슐로서는 맥도날드로 상징되는 ‘패스트푸드의 제국’을 두루 살펴보고 나서 다음과 같은 대안을 제시한다. “미국에 살고 있는 어떤 사람도 패스트푸드를 (먹으라고) 강요 받지 않는다. 그러니 의미 있는 변화를 위한 첫걸음은 너무도 쉽다. 사지 않으면 된다. 패스트푸드 회사를 운영하는 임원들은 악당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사업가들일 뿐이다. 사람들이 원한다면 그들은 유기농 농법으로 재배한 목초를 먹은 쇠고기로 햄버거를 만들어 팔 것이다. 이윤이 생기는 한 그들은 사람들이 요구하는 바로 그것을 팔 것이다.…소비자들의 힘은 아직 표현되지 않았다.”
크록은 독창적이지는 않았지만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용병술의 달인
젊은 시절부터의 친구인 월트 디즈니의 명성, 그리고 맥도날드의 명성과 비교해 보자면 레이 크록이라는 이름은 사실상 무명에 가깝다. 디즈니와 크록의 묘한 공통점이라면, 정작 본인들은 그 회사의 최고 히트작의 탄생에 기여한 바가 없다는 점이 아닐까. 즉 디즈니는 미키마우스를 직접 고안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그리지도 못했으며, 크록 역시 맥도날드 시스템의 고안자가 아니라 판매자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역사는 레이 크록을 맥도날드의 진정한 아버지로, 그리고 1955년 4월 15일의 그 제1호 지점을 맥도날드의 시작으로 인정한다.
크록의 장점은 독창성이 아니었다. 그가 고안한 메뉴도 몇 가지 있었지만 실패작으로 퇴출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뛰어난 인재를 발굴해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용병술의 달인이었다. 맥도날드 형제와 레이 크록의 삶은 상당히 대조적이다. 형제는 뛰어난 아이디어로 패스트푸드 방식을 만들어냈고, 크록은 이를 세계 최고의 브랜드 가운데 하나로 일궈냈다.1961년에 이들 형제는 연 0.5%의 로열티를 포기하고 “맥도날드”라는 상표권까지도 모두 넘기는 대가로 크록에게 현금 270만 달러를 요구했다. 30년 동안 일한 대가로 세금을 떼고 각기 100만 달러씩 나눠 갖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형제가 받던 로열티 금액으로 따지면 15년 어치를 단번에 받겠다는 것이었다. 막대한 금액이었지만 크록은 그 기회에 이들과의 관계를 정리한다. 물론 맥도날드 형제도 막대한 부를 움켜쥐고 은퇴했으므로, 크록에게 사업권을 넘긴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현금 270만 달러 대신 연 0.5%의 로열티로 만족했다면 어땠을까? 15년 뒤인 1976년도에는 50만 달러, 1980년도에는 500만 달러, 지금 같으면 매년 1억 달러 이상의 수입을 계속해서 올렸을 것이다. 이들의 판단이 역사상 가장 큰 황금 알 가운데 하나를 쉽게 걷어찬 결정으로 두고두고 회자되는 것도 무리는 아닌 셈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레이 크록 [Ray Kroc] - 미국의 사업가 (인물세계사, 박중서)
맥도날드 CEO 레이 크록
레이 크록, 오늘 우리가 주목할 인물이다. 그는 맥도날드의 실질적 창업자이자, 맥도날드를 세계화한 주인공이다. 수십 년 동안 종이컵, 믹서기 영업사원으로 살던 레이 크록이 맥도날드 햄버거를 발견한 나이는 53세 때이다. 지금이야 50대 초반이면 한참 일할 나이라고 하지만 레이 크록이 살던 1950년대만 해도 50대는 은퇴를 준비하는 시기였다. 하지만 레이 크록은 그 나이에 맥도날드의 매장 확장을 위한 프랜차이즈화, 맛과 품질의 세계 표준화, 생산과 공급의 스피디한 시스템을 구축해 ‘햄버거 제국’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레이 크록은 1902년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평범했다. 그의 어린 시절 유일한 기억이자 평생의 습관을 들인 인물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유독 청소와 설거지를 싫어했고 실제로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집안의 모든 청소와 설거지는 레이 크록의 몫이었다. 어린 크록은 청소, 설거지를 통해 청결과 위생에 대한 관념을 갖기 시작했고 이는 훗날 그가 맥도날드를 창업하고 가장 강조한 매장의 청결과 위생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다.
또한 레이 크록은 어려서부터 이것저것 물건을 파는 데 소질이 있었다. 소다수, 악기 등 다양한 품목을 주변에 팔았고 또한 장사 수완도 뛰어나 동네에서는 그를 공상가, 도전자를 뜻하는 ‘대니 드리머(Danny Dreamer)’라고 불렀다. 또래에 비해 조숙하고 사회를 일찍 경험한 것이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자 레이 크록 역시 군 입대를 자원했다. 하지만 고등학생 신분이라 입대를 하기엔 나이가 어렸다. 레이 크록은 학교를 중퇴하고 나이를 속여 가며 자원했지만 결국 거절당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적십자사의 구급차를 운전하기도 했고 클럽의 피아노 연주자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러다 종이컵 세일즈를 하기 시작했고 얼마 후 믹서기를 파는 영업 사원이 되었다. 고단한 삶이었다. 그러나 레이 크록은 매일 밤 잠들기 전에 꼭 하는 것이 있었다. 그는 ‘긍정의 힘’이란 녹음테이프를 매일 들었다. 그리고 희망을 잃거나 ‘한 번의 기회가 온다’는 기대를 포기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이를 지켜본 그의 아내 에델조차 레이 크록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레이 크록은 멀티 믹서기를 주로 팔았다. 한 번에 많은 양의 셰이크나 주스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기기였다. 하지만 영업은 신통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전표를 점검하던 레이 크록은 깜짝 놀랐다. 한 가게에서 무려 6개의 멀티 믹서기를 주문한 것이다. 도대체 어떤 물건을, 어떻게 팔고 있기에 이렇게 많은 멀티 믹서기가 필요한 것일까. 레이 크록은 그 가게를 방문하기로 했다.
1954년, 레이 크록이 찾아간 곳은 샌버너디노의 햄버거 가게인 ‘맥도날드 바비큐’였다. 레이 크록은 그곳에서 ‘새로움’을 발견했다. 그가 영업 사원으로 수많은 음식점을 상대했지만 이 같은 곳은 처음이었다. 맥도날드 바비큐는 햄버거 등 9가지 메뉴를 빠르고, 저렴하게 만들어내고 있었다. 물론 음식은 질과 양은 가격 대비 수준급이었다. 또한 매장 내의 모든 물품도 종이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일회용품이었다. 레이 크록은 그곳을 운영 중인 맥도날드 형제를 만났다. 그들은 레이 크록에게 “우리가 주문을 잘못했다. 멀티 믹서기 6개가 아닌 8개를 갖다 달라”고 말했다. 그만큼 햄버거와 같이 판매하는 밀크 셰이크가 많이 필요했던 것이다.
맥도날드 형제, 리처드와 모리스 맥도날드는 원래 동부의 뉴햄프셔 출신이었다. 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한창 붐을 일으키던 극장 사업을 하기 위해 1933년 캘리포니아로 갔다. 그리고 LA 글렌데일에서 4년간 극장 사업을 했지만 실패했다. 그 과정에서 맥도날드 형제는 극장보다 극장 앞 핫도그 가게가 장사가 더 잘된다는 것을 알았다.
1937년, 형제는 캘리포니아 아카디아 ‘에이드룸’이란 핫도그 판매점을 열었다. 장사는 잘됐다. 그리고 캘리포니아에 사람이 몰리고 경기가 좋아지자 급격히 늘어난 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햄버거 가게를 열었다. 바로 ‘맥도날드 바비큐’였다. 이때가 1948년이었다. 이들은 빠르게 만들어내고, 일회용품을 사용하고, 셀프 서비스 시스템을 이용해 단가를 낮추었다. 그들이 파는 햄버거 값은 단돈 15센트였다.
장사가 잘되자 맥도날드 형제에게도 지점을 내자는 제안이 많았다. 형제는 약 10개의 지점을 냈지만 맥도날드 형제가 운영하는 가게 외에는 그리 큰 이익을 내지 못했다. 지점은 프랜차이즈 시스템을 완벽하게 적용하지 못했고, 맥도날드 형제 역시 사업을 확장하는데 큰 관심이 없었다. 레이 크록은 직감적으로 이 사업의 성공을 예감했다. 그는 햄버거와 밀크 셰이크를 사기 위해 줄을 길게 서는 손님들을 보고 ‘이 식당을 전국의 각 도로변에 세우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 형제를 설득했다. 오랜 만남과 설득 끝에 레이 크록과 맥도날드 형제는 프랜차이즈 사업의 계약서에 사인했다. 조건은 매장 이름, 메뉴, 매장 구조, 운영 방식, 금색의 노란 색 아치까지 모든 것은 맥도날드 형제가 쓰는 것을 그대로 쓴다는 조건이었다. 세 사람은 손을 마주 잡았다.
레이 크록의 아내 아델과 그의 친구들은 새로운 사업계획을 말렸다. 그들은 53세의 레이 크록에게 “그 나이는 새롭게 뭔가를 시작하는 나이가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맥도날드 프랜차이즈 사업 확신을 가진 레이 크록은 듣지 않았다. 그는 1년여의 준비 끝에 1955년 4월15일, 시카고의 디플레인스에 맥도날드 1호점을 열었다. 맥도날드 제국의 시작인 것이다.
레이 크록은 매일 1호 매장에 출근했다. 그는 직접 청소도 하고 음식도 관리하면서 프랜차이즈 사업에 대한 매뉴얼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레이 크록은 맥도날드의 모토를 만들었다. ‘품질, 서비스, 청결, 가치 QSC&V(Quality, Service, Cleanliness & Value)’ 등이다. 또한 그는 “완벽이란 성취하기 매우 어렵다. 하지만 나는 맥도날드에 완벽을 바란다. 맥도날드에게는 목표로 하는 완벽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즉 품질, 서비스, 청결, 가치의 명확하고도 완벽한 기준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사업은 점차 안정되기 시작했다. 이제 레이 크록은 각 지역에 맥도날드 지점을 세우는 작업에 착수 했다.
1955년 1호점을 연 레이 크록은 1959년까지 불과 4년 만에 100여 개의 식당을 새로 오픈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다. 각 지점의 프랜차이즈 로열티가 너무 싸 지점은 장사가 잘되는데도 본점의 영업 이익이 늘지 않았던 것. 레이 크록은 맥도날드 본사가 지역 매장을 매입하고 이를 점주에게 임대하는 방식으로 시스템을 바꾸었다. 그러자 맥도날드 본사의 자산도 커지면서 임대 수입도 늘어나는 효과를 낳았다. 그러자 일부 언론에서는 ‘맥도날드는 햄버거를 파는 회사가 아니라 햄버거 가게를 임대하는 부동산 회사’라는 비난이 생기기도 했다.
1958년, 1억 번째 햄버거가 판매되었다. 그리고 1959년 위스콘신 주 퐁뒤라크에 맥도날드 100호점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0년 맥도날드의 지점 수가 200개를 돌파했다. 레이 크록은 깊고 많은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장사는 잘되어 맥도날드 지점을 내겠다는 점주들은 줄을 섰고 본점의 이익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레이 크록에게는 꿈이 있었다. 그는 “맥도날드의 황금 아치를 교회의 십자가만큼 미국에 많이 세우는 것이 내 목표”라며 그 야심 찬 꿈을 감추지 않았다. 레이 크록은 좀 더 전문화 된 메뉴 개발, 프랜차이즈 시스템의 정립 등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맥도날드의 성공을 위해서는 본사, 가맹점, 재료 공급자의 비전이 공유되고 협력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판단했다. 또한 이를 통해 각 지점마다 똑같은 시스템, 서비스, 메뉴의 표준화 작업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레이 크록의 구상은 일명 ‘햄버거 학교’로 결실을 맺었다. 이 학교에서는 약 30여 명의 교수진이 맥도날드 매장의 매니저, 예비 점주들에게 집중적인 교육을 실시했다. 매장의 전반적인 관리부터, 품질, 노무, 고객, 재료 관리 등을 배웠다. 그리고 교육과정을 수료하면 ‘햄버거 전공, 프렌치 프라이 부전공’이라는 학위를 받았다. 이 햄버거 학교는 지금까지 약 7만여 명을 교육했고 시드니, 뮌헨, 런던 등에 분교를 두고 있다. 레이 크록은 햄버거 대학에서의 교육을 통해, 비전 공유, 메뉴의 표준화, 시스템의 효율성 등 지금의 맥도날드의 모든 매뉴얼을 전파하고 또 정비해나갔다. 맥도날드에서 일명 ‘성경’이라 부르는 매뉴얼북은 처음 약 70페이지에서 지금은 약 700페이지 분량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집중 교육이 맥도날드의 통일성, 표준화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레이 크록이 이처럼 맥도날드의 맛과 품질에 대한 표준화에 집착하는 것은 ‘맛에 대한 이질감’을 없애기 위한 목표 때문이다. 누구나 낯선 곳에서 먹는 음식에 대한 거부감과 부담감이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 황금아치의 맥도날드를 발견하는 순간, 대중들은 맥도날드의 보편적인 맛을 떠올리며 햄버거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어진다. 바로 프랜차이즈의 기본 중에 기본을 레이 크록이 강조한 것이다. 맥도날드는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크록이 자서전을 발표한 1976년에 맥도날드는 창립 20여 년 만에 총수입 10억 달러를 넘어섰고, 22개국에 4,177개 매장을 거느리고 있었다. 1980년대에는 총수입 100억 달러에 매장 1만 개를 돌파했다. 2008년을 기준으로 맥도날드의 총수입은 200억 달러 이상이며, 119개국에 3만 1,000개 이상의 매장이 있다. 레이 크록은 <타임> 지가 선정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인물 100인’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1984년 1월 14일, 크록은 8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러나 맥도날드의 행보는 이후에도 거침없이 이어졌다.
1983년 미국의 잡지 <에스콰이어>는 ‘20세기 미국인의 생활 방식에 기여한 50명’을 선정했다. 그 기사는 그중 한 명을 이렇게 설명했다. “콜럼버스는 미국을 발견했고 제퍼슨은 미국을 건국했다. 그리고 레이 크록은 미국을 ‘맥도날드화(化)’했다. 미국의 이미지를 만든 것은 컴퓨터도, 핵무기도, 예술도, 과학도 아니다. 바로 햄버거이다. 레이 크록은 미국인의 입맛을 맥도날드 햄버거로 표준화했지만 그의 진정한 공로는 이른바 ‘맥도날드 시스템’이라는 프랜차이즈를 창조해낸 것이다. 그는 시대의 리더이다. 이제 우주 비행사들조차 맥도날드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맥도날드는 단순한 햄버거가 아니다. 미국 내에 무려 1만5000여 개의 매장, 한국에서만 1000여 개의 매장이 있고 전 세계에 약 3만5000여 개의 매장이 있다. 그리고 하루에 약 7000만 명의 손님을 맞고 있다. ‘맥도날드’라는 브랜드의 가치는 세계적인 기업들 사이에서도 톱10 안에 랭크되는 고부가가치 상품이다. 즉 맥도날드는 문화이고, 미국을 상징하는 것이다.
1970년 이후 전 세계는 ‘미국화’를 열망했다. 그 첨병에 선 것은 ‘할리우드 영화’, ‘코카콜라’, ‘리바이스 청바지’ 그리고 ‘맥도날드’였다. 빠르고, 간편하고, 비교적 싼 가격에 한 끼를 먹을 수 있다는, 즉 시작부터 ‘백인 노동자 계급의 한 끼’였던 맥도날드의 모토는 어쩌면 복잡한 현대 사회의 틈바구니를 파고든 절묘한 상술의 결정체인 셈이다.
알려진 대로 맥도날드 브랜드는 본래 햄버거 가게를 운영하던 맥도날드 형제의 이름이었다. 이를 레이 크록이 동업 계약을 통해 지금의 맥도날드로 만든 것이다. 어떻게 보면 맥도날드 형제는 그야말로 ‘재주만 부린 곰’ 신세가 되었고 레이 크록은 맥도날드 형제의 노하우를 집어삼킨 탐욕의 비즈니스맨처럼 보이겠지만, 레이 크록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햄버거와 프랜차이즈, 그리고 패스트’의 무궁한 가능성을 간파한 능력이다. 맥도날드 형제와 다르게 그가 세계화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 차이이다.
레이 크록은 창업 이후 단 한 번도 현장을 떠나지 않은 리더였다. 그는 매일 새로 문을 연 매장의 실적을 체크하는 것은 물론, 매장의 주방, 화장실, 좌석 등을 돌며 휴지 하나 떨어진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레이 크록이 신앙처럼 믿는 것이 있다. 맥도날드 회사의 모든 방에 걸려 있는 액자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다.
‘인내 없이 이룰 수 있는 일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 재능만으로는 안 된다. 위대한 재능을 가지고도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많다. 천재성으로도 안 된다. 성공하지 못한 천재는 웃음거리만 될 뿐이다. 교육으로도 안 된다. 세상은 교육받은 낙오자로 넘치고 있다. 오직 인내와 결단력 그리고 끈기만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
레이 크록은 타고난 재능보다 노력을, 많은 공부를 한 지식박사보다 현장을 뛰어다니는 실무자의 가치를 인정한 리더이다. 그가 맥도날드를 지금의 ‘완성품’으로 만들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인내, 노력, 도전을 기본으로 한 인재 발굴 능력, 현장을 파악하고 기업을 지휘할 수 있는 솔선수범의 헌신적인 성실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20세기 가장 논쟁적 리더 중 한 명이 바로 레이 크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