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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청마산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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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온 . 명 산 .후기 스크랩 가족산행지로 딱 좋은 부드러운 능선길, 이구산-흥무산(`14.12.21)
청마 추천 0 조회 63 15.07.01 13:0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구산(尼丘山, 378m)-홍무산(興霧山, 454.7m)

 

산행일 : ‘14. 12. 21()

소재지 : 경남 사천시 정동면과 사남면의 경계

산행코스 : 예수리마을선황사선황당산이구산369임도홍무산:소산마을(산행시간 : 3시간40)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사천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산이 와룡산(臥龍山)이다. 그만큼 유명한 산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사천이라는 지역 이름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데 일조를 하고 있으니, 사천은 와룡산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와룡산의 유명세(有名稅)에 가려 피해를 입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구산과 흥무산도 그중의 하나이다. 오지(奧地)를 찾아다니는 산꾼들 조차도 낯설어할 정도로 철저하게 외면 받아왔기 때문이다. 사천시내 사람들이나 운동 삼아 다니던 산이 언제부턴가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더니 근래에는 이곳을 찾는 외지(外地) 산악회의 숫자가 점차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이는 사천시청에서 등산로를 깔끔하게 정비한 것도 원인이 되겠지만, 그보다는 의외로 산세(山勢)가 뛰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내세울 만큼 커다란 바위들은 없지만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고, 흙으로 이루어진 길은 곱고 편하다. 거기다 능선을 울울창창한 소나무들이 가득 채우고 있으니 힐링(healing) 산행지로 안성맞춤이다. 특히 산행 중에 우리네 조상을 모신 단군성전(檀君聖殿)까지 들러볼 수 있으니 역사공부 삼아 가족들이 함께 찾아볼만한 산으로 추천하고 싶다.

 

산행들머리는 예수리마을(사천시 정동면 예수리 702-3)

남해고속도로 사천 I.C에서 내려와 ‘3번 국도를 타고 사천, 남해방면으로 달리다가 지주교차로(交叉路 : 사천시 사천읍 사주리)에서 빠져 나온다. 국도의 아래를 통과하면 곧바로 나오는 사천시 농업인전용회관앞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들어가다 사천교()를 건너기 바로 직전에 우회전하여 2~3분 정도 들어가면(사천강2) 오른편에 선황사의 들머리임을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이곳이 바로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선황사까지 도로가 나 있지만 대형버스는 진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버스에서 내려 빈 들녘 가운데로 난 오른편 소로(小路)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소로라고 하지만승용차가 다니기에 충분할 정도로 넓고 거기다 들머리에 산행 중에 들르게 될 선황사의 들머리임을 알려주는 커다란 입간판이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들머리에서 선황사입구까지는 10분 이상이나 걸린다. 산행을 즐기는 사람들이라면 포장된 길을 걷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길 주변에 볼거리까지 없다면 더욱 싫어할 것은 뻔한 일일 것이다. 선황사로 들어가는 길이 바로 이런 길이다. 거기다 가끔 오가는 승용차까지 피하면서 걷다보면 짜증이 날 정도이다. 이런 길에서는 억지로라도 콧노래를 흥얼거려보는 것이 좋다. 아직 산행을 시작도 안했는데 기분을 다운(down)시켜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옛말에 시작이 절반이다.’라는 말이 있다.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한다면 틀림없이 즐겁게 산행을 마칠 수 있을 것이다.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침곡저수지는 물속에 나무들이 잠겨 있는 것이 주왕산 근처에 있는 주산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비록 왜소하기는 하지만 여름철에 찾으면 제법 볼만한 풍경을 만날 수도 있겠다.

 

 

침곡저수지를 지나면 도로는 두 갈래로 나뉜다. 선황사로 가는 길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크게 방향을 틀며 임도(林道)로 연결된다. 들머리에 이구산 입구임을 알리는 이정표(이구산 2.3, 성황당산 0.9) 가 세워져 있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이구산입구 삼거리에서 선황사까지는 15분 남짓, 시멘트포장 임도로 연결된다. 제법 가파른 임도는 아까보다는 볼거리가 많은 편이다. 가는 길에 가끔 보이는 잘 지어진 민가(民家)들은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하고, 길가에 세워진 효행비(孝行碑)선황사도로포장공덕비에 적힌 비문(碑文)을 읽는 재미 또한 나름대로 쏠쏠하다.

 

 

선황사 앞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이정표(이구산 1.5Km, 성황당산 0.5Km)를 보면 성황당산은 왼편으로 진행하도록 되어있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사찰을 통과해서 올라가는 길이 잘 닦여있기 때문이다. 선황사에 들어서면 반듯하게 지어진 3칸짜리 대웅전 제법 우람하다. 한국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寺刹)이란 것 말고는 아무 기록도 찾아볼 수 없는(조계종 홈페이지의 소속사찰 검색에도 나오지 않는다) 사찰치고는 의외의 규모인 것이다. 그 외에도 종각과 요사(寮舍) 등의 부속 건물들을 거느리고 있다.

 

 

 

성황당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선황사의 종각의 오른편에서 열린다. 잘 닦아 놓은 돌계단을 오르면 체육시설이 보이는 오른편이 성황당산이다. 사천시(泗川市)와 사천만(泗川灣)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고 날씨가 맑은 날에는 지리산의 천왕봉과 웅석봉까지 눈에 들어오는 등 조망(眺望)이 뛰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난 조망보다는 왼편에 보이는 단군성전에 마음이 끌려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결과적으로는 성황당산을 들르지 않고 곧장 이구산으로 가버리는 우()를 범하고야 말았다.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기는 돌담에 둘러싸인 단군성전(檀君聖殿)이 나온다. 정사각형으로 쌓아올린 돌담 안에 있는 성전은 전각(殿閣)이 없이, 가장 안쪽 한가운데에 단을 만들고 그 위에 단군상(檀君像)을 모셨다. 그 앞에 제사(祭祀)를 모실 수 있도록 단()이 만들어져 있음은 물론이다.

 

 

 

단군성전 옆에는 돌담으로 둘러싸인 또 하나의 정사각형 공간이 있다. 그러나 이번 것은 성전과는 달리 장식이 없는 직사각형의 제단(祭壇) 외에는 아무런 시설도 없다. 제단의 뒤편 담에 19회 산성제 봉행이라고 쓰인 현수막(懸垂幕)이 걸려있는 것을 보면 이곳이 혹시 성황당이 있었던 터가 아닐까 싶다.

 

 

성황당터 옆에 서면 사천 시가지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성황당터를 지나면 넓고 움푹하게 꺼진 곳이 나타난다. 아마 옛날 성안에 있었다는 연못 터인 모양이다. 한가운데에 있는 우물이 그 증거가 아닐까 싶다. 또한 그 우물의 뒤에 세워져 있는 촛불까지 켜진 제단(祭壇)은 이를 보완(補完)하는 것일 테고 말이다. 신성함도 없는 곳에 제단을 세울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물 안의 물은 너무 흐린 탓에 마실 수는 없었다.

 

 

우물 터를 벗어나면 곧이어 길이 두 갈래(이정표 : 이구산 1.2Km, 흥무산 6.6Km/ 선황사 0.3Km/ 성황당산 0.4Km)로 나뉜다. 왼편은 아까 선황사 앞에서 헤어졌던 곳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이구산을 향하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성황당산을 올라올 때부터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던 성황당산성(泗川城隍堂山城 : 경남기념물 제132)을 끝내 찾지 못했다는 서운함 때문일 것이다. 고문헌(古文獻)에도 나와 있을 정도로 유서 깊은 유적지였기에 그 서운함은 더할 수밖에 없다. 고읍성이라고도 부르던 성황당산선은 축조연대는 알 수 없으나, 현재 둘레 1,109m, 높이 3.5m의 토성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특히 남쪽에는 길이 4m, 높이 3m 정도의 석축이 아직까지도 남아있단다. 그러나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이는 내가 미리 파악해 온 지식(知識)의 한계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다만 성안(城內)에 있었다는 성황당(城隍堂) 터와 연못의 흔적을 찾아 본 것에 그나마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성황당산성은 사천읍 남쪽에 위치한 성황산(城隍山) 정상부에 토성과 석성으로 연결된 테뫼식(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성벽을 두른 것으로 마치 사발을 엎어놓은 듯하다고 발권식(鉢圈式)산성’, 시루에 흰 번을 두른 것 같다고 해서 시루성’,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것 같다고 해서 머리띠식 산성이라고도 부른다) 산성(山城)이다. 성벽은 9부 능선을 따라 내탁(內托 : 外壁은 큰 돌과 벽돌로 內壁은 자갈과 흙을 이용해 두텁게 쌓아 올리는 구조)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성안에는 연못과 건물지 등이 남아 있고 주변에는 와편(瓦片 : 기와조각)이나 도자편(陶瓷片)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사천읍성(邑城)이 현재의 위치로 옮기기 전인 조선 전기에 이곳이 사천치소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에 대한 기록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사천읍지의 성곽조(城郭條)’ 사천읍성편(둘레는 1,530m, 높이는 4.6m)고적조(古蹟條)’ 성황당 산성편(둘레는 592m)이 남아 있다.

 

 

성황당산을 둘러보고 나서 이구산으로 향한다. 성황당산을 내려서는 길은 한마디로 곱다. 부드러운 흙길에다 경사(傾斜)까지 완만(緩慢)하기 때문이다. 이번 산행후기의 부제(副題)삼대(三代)가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산이란 문구를 미리 만들어 두었을 정도라고 하면 미루어 짐작이 갈 수 있을 것이다. 쉽게 말해서 성황당산은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누구나 즐길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래서인지 사천시에서는 성황당산을 체육시설을 갖춘 공원(公園) 겸 쉼터로 조성해 놓았다. 성황당산을 내려선지 5분 남짓 지나면 안부삼거리(이정표 : 이구산 0.9Km/ 수청마을 0.7Km)/ 선황사·성황당산 0.6Km)에 이르게 된다.

 

 

 

산행을 이어가다보면 초록색 포장비닐에 둘러싸인 무더기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소나무 재선충(Pine wilt disease)’에 감염되어 고사(枯死)한 소나무들을 약제처리 해놓은 소나무 무덤들이다. 갑자기 눈물이 난다. 토종 소나무들이 죽어가는 것이 애달파서 눈물을 흘릴 정도로 난 감성적이지 못하다. 그럼 이유가 뭘까? 누군가 소나무 무덤을 헤집어 놓았고, 그 무덤에서 흘러나온 엄청나게 독한 약물냄새가 코를 자극하면서 눈물샘까지 건들었기 때문이다.

 

 

삼거리를 지나서도 산길은 잠깐 동안은 여전히 곱다. 그러나 조금 후에 소나무 재선충 무덤을 만나게 되는데 산길이 곱다는 말을 딱 여기까지이다. 이후부터 산길은 무척 가팔라지고, 거기다 길바닥 또한 어설픈 바윗길로 변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다. 길가에 안전로프까지 매달려 있는 등 오르는 게 부담스러울 정도까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심할 정도의 노약자(老弱者)만 아니라면 누구라도 쉽게 오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미리 정해둔 후기의 부제(副題)는 삼대에서 이대(二代)로 고쳐야할까 보다.

 

 

 

안부삼거리를 출발하지 30분 가까이 지나면 드디어 이구산 정상이다. 이구산 정상도 역시 정자와 체육시설을 갖춘 공원 겸 쉼처로 조성해 놓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상표지석은 없다. 다만 기둥에다 이구산이라는 이곳의 지명을 적어 놓은 이정표(흥무산 5.7Km/ 선황사 1.5Km)가 정상석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아구산 정상에서의 시야(視野)는 절반만 터진다. 그러나 그 조망(眺望)은 자못 광활하다. 동쪽에 있다는 동쪽과 서쪽으로 조망된다는 지리산과 와룡산은 나무들에 가린 탓에 썩 좋지 않은 편이다.

 

 

 

 

정상에 올라온 사람들이 평상(平床)에다 짊어지고 온 짐들을 푼다. 모처럼 시간이 여유롭다보니 첫 번째 봉우리부터 쉬어가려는 모양이다. 견과류(堅果類)와 과일 안주에 술은 막걸리가 주종이다. 당연한 일이다. 내로라하는 산꾼들에게는 산에서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는 것은 금물(禁物)이기 때문이다. 오늘 산행을 같이하고 있는 일행들 역시 웬만한 산들은 이미 답사를 끝냈고, 이제는 남들이 찾지 않는 오지(奧地)의 산들이나 찾고 있는 사람들이니 어찌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Mr. 홍주김사장께서 건네주는 독주(毒酒) 한 잔을 들이키는데 옆에서 보고 있던 김진수선배께서 넌지시 물어온다. ‘무슨 술인지 아나?’, 술병의 외형(外形)부터가 특이하게 생겨서 누가 봐도 진도(珍島)의 특산품인 홍주(紅酒)인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웬 뚱딴지같은 질문이란 말인가. 그러나 어디를 봐도 김선배는 허투루 농담을 던질 분이 아니다. 하긴 그럴 사람이라면 내가 가까이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평소에 사람 사귀기를 즐겨하지 않던 내가 먼저 다가갔을 정도로 그는 매사에 타의 모범을 보이는 분이었던 것이다. 냉큼 답변을 못하고 머리만 갸웃거리는데, 곧바로 이어지는 김선배의 말씀에 커다란 몸짓까지 석어가며 호응을 하고 만다. ‘! 잘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좋은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산행(山行) 뒷이야기를 잘 써달라는 의미의 술이었다는 것이다.

 

 

이구산에서 흥무산으로 가는 길은 또 다시 고와진다. 오르내림이 크지 않은 능선에다 바닥 또한 부드러운 흙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0분쯤 지나면 국관사 갈림길에 이르게 되고, 이어서 7~8분쯤 더 걸으면 주변 풍광(風光)이 갑자기 확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제까지는 순수한 흙길이었는데 갑자기 커다란 바위들이 즐비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산길은 바위들을 좌우로 비켜서 나있는데 마지막에는 아예 바위를 타고 넘기도 한다. 나타나는 바위들 중에는 제법 눈요깃거리 역할을 해주는 것도 있으니 오늘 산행에서 가장 뛰어난 구간이 아닐까 싶다.

 

 

 

 

 

바위들을 구경하며 오르다 가장 꼭대기(369m)쯤에 이르면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주능선에서 오른편으로 약간 비켜난 곳에 숨어 있는 바위 하나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오늘 산행의 백미(白眉)라고 알려진 상사바위가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이름만 들어도 오싹한 느낌이 전해지는 상사바위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바위들은 전국에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많다. 아니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이 근처에 있는 사천의 명산 와룡산에도 상사바위가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바위들은 하나 같이 수많은 목숨들을 빼앗은 것으로 서로를 연결시킨다. 이곳 상사바위도 역시 이런저런 이유로 바위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한 사람들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뛰어내린 사람들의 유서(遺書)일까? 바위에는 무슨 내용인지 알아먹기도 힐들 정도로 수많은 글자들이 빼꼭히 적혀있다.

 

 

 

바위 위에 올라서면 시야(視野)가 뻥 뚫린다. ‘이구산에서 가장 조망(眺望)이 좋은 곳이라는 소문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멀리 민재봉과 향로봉 등 와룡산의 봉우리들이 차례로 조망되고, 가까이로는 바둑판같은 논들과 어울린 구룡저수지가 정점(頂點)을 찍는다. 그리고 오른편으로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어김없이 사천시가지와 사천만이 버티고 있다. 조망을 즐기다가 시선을 바위 아래로 옮겨본다. 10m 정도 되는 바위벼랑이 아찔할 정도로 높아 보인다. 그러나 이곳에서 뛰어내린다고 해서 과연 목숨을 끊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결론은 아니올시다.’였다. 내 생각에는 죽지는 않고 그저 다치기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상사바위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조금 모라란다는 얘기이다. 다시 말해서 자칫 잘못하다간 죽지도 못하고 고생만 죽도록 할 염려가 있으니 절대 이곳에서 자살할 생각은 하지 말라는 얘기이다.

 

 

 

상사바위에서 흥무산으로 가는 길은 제법 길게 이어진다. 그러나 산길이 곱기 때문에 그 거리가 조금도 부담스럽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흙길을 걷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까지 흘러나올 지경인데 어떻게 지루할 틈이 있겠는가. 모처럼의 여유를 즐기며 여유롭게 걷다보면 용도를 알 수 없는 돌담도 만나게 되고, 15분 후에는 이정표(이정표 : 흥무산 3.7Km/ 성황당산 3.6Km)와 등산안내도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송전탑(送電塔)이 나온다. 이어서 콧노래라도 흥얼거리며 30분 정도를 더 걸으면 널찍한 임도(이정표 : 흥무산 1.7Km/ 학촌마을 1.1Km/ 능화마을 1.4Km/ 이구산 4.0Km)에 내려서게 된다.

 

 

 

 

 

 

 

임도에서 오른편으로 내려가면 만날 수 있다는 안종(安宗)의 능지(陵址)에 들러보고 싶지만 아쉬움만 뒤로 남긴 채 흥무산을 행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곳까지 오는데 너무 늦장을 부린 탓에, 더 이상은 허비할 시간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안종은 고려(高麗) 태조의 여덟 번째 아들인 욱(: ? ~996))이다. 그는 조카며느리인 헌정왕후(獻貞王后)와 사통(私通)하여 아들 순()을 낳았으나. 이 사실이 밝혀짐으로 인해 사수현(泗水縣), 즉 오늘날의 사천으로 유배(流配)를 왔다가 이곳에서 삶을 마감했다. 그의 사후(死後) 순이 현종(顯宗)으로 등극하자 안종(安宗)으로 추존되어 송도로 이장(건릉)하였고, 이곳에는 능지만 남아있게 된 것이다.

 

 

임도에서 산길은 다시 한 번 오름 짓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몸부림은 제법 심하다. 비록 아까 이구산에 오를 때만은 못해도 말이다. 그러나 그 오르막길은 오래지 않아 끝을 맺고 산길은 다시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밋밋한 능선길이 이어진다. 최대한 느긋하게 걸어본다. 그리고 될 수 있는 데로 크게 숨을 들이켜 본다. 코끝을 맴돌던 짙은 소나무 향이 가슴속 깊이 스며든다. 그리고 그 청량한 기운은 혈관과 세포(細胞)들을 따라 온 몸으로 번져간다. 오늘도 역시 난 또 하나의 힐링(healing)산행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호흡과 발걸음을 일치시키며 걷다보면 용소마을 갈림길’(이정표 : 흥무산 0.4Km/ 용소마을 1.2Km, 학생수련원 1.5Km/ 이구산 5.3Km)금곡 갈림길’(이정표 : 흥무산 0.3Km/ 금곡 1.6Km, 금굴 0.5Km/ 이구산 5.4Km)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가파른 오르막길을 잠깐 동안 치고 오르면 흥무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임도에서 45분 이구산에서는 1시간50분 정도가 걸렸다.

 

 

 

 

 

 

흥무산 정상은 헬기장으로 이용해도 충분할 만큼 너른 공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잘 찾지 않은 탓인지 정상은 온통 어른의 키만큼이나 웃자란 억새들로 가득 차있다. 이곳 흥무산도 역시 아까 지나왔던 이구산과 마찬가지로 이름표를 단 이정표(새마을도로 1.8Km/ 이구산 5.7Km)가 정상표지석을 대신하고 있다. 나무들로 둘러싸인 정상은 조그만 조망(眺望)까지도 허락하지 않는다. 참고로 흥무산은 흥보산(興寶山)이라는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이곳 산자락에 있다는 흥보사지(興寶寺址)와 관련된 이름이 아닐까 싶다. ‘뱃속이 따뜻하지요?’ 잠시 멈춰서서 숨을 고르는데, 김사장이 홍주(紅酒) 한 잔을 건네며 넌지시 물어온다. 그의 별명은 ‘Mr. 홍주’, 물론 다른 사람들은 이 별명을 모른다. 본래 이 별명은 우리 집사람이 지었었고, 그 후 우리 부부만이 그렇게 부르고 있으니까 말이다. 산에 올 때마다 홍주를 챙겨 온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역시 몇 병을 챙겨왔나 보다. 그의 말마따나 겨울 산에서는 독주(毒酒) 한잔이 큰 도움이 될 때가 많다. 몸에 열을 올려서 추위를 몰아내주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알코올(alcohol)40()가 넘는 홍주는 겨울 산행에 제격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많은 양을 마시면 안 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제는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마침 길도 곱다. 흙길에 경사(傾斜)까지 그다지 가파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앞에 두고 따라야할 모델(model)만 잘 선정하면 오늘 산행은 유종(有終)의 미()’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내 앞에는 'Mr. 홍주김사장, 그리고 그 앞 저만큼에 날씬한 여성분이 보인다. 김사장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양해도 구하지 않고 앞질러버린다. 좋은 작품을 위한 일이니 이해해 줄 것으로 믿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이 있듯이 어찌 계속해서 좋은 일만 있겠는가. 그녀는 냅다 뛰기 시작했고, 그녀의 뒷모습에 포커스(focus)를 맞춘 나 또한 뛸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엄청난 충격이 동반된 엉덩방아로 마무리를 짓고 말았다. 산행 후에 그녀로부터 원인 제공에 대한 대가로 술 한 잔을 건네받았지만 말이다.

 

 

산행날머리는 새마을도로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도 역시 곱기는 매한가지이다. 흙길에 경사까지 부드럽다보니 걷기가 여간 편한 게 아니다. 솔가리(소나무 落葉)와 섞인 떡갈나무 잎들 때문에 조금 미끄러운 게 흠()이라면 흠이나 조금만 조심하면 이 또한 문제 될 게 없을 것이다. 나 같이 앞사람을 ?는데 정신을 빼앗기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흥무산을 출발해서 30분쯤 지나면 새마을도로에 내려서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끝을 맺는다. 앞사람을 ?느라 조금 바쁘게 내려왔다고 보면 될 것이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40분이 지났다. 막걸리를 마시느라 중간에서 쉰 시간을 감안할 경우 3시간30분이 걸린 셈이다.

 

 

에필로그(epilogue), 사천의 옛날 지명인 사수현(泗水縣)의 사수(泗水 : 사천강)와 오늘 롤랐던 이구산(尼丘山)은 중국 노()나라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중국(中國)의 산동성에는 수수(洙水)와 사수(泗水)라는 두 갈래의 강()이 흐르는데, 공자(孔子)와 맹자(孟子)가 수수나 사수가에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설교하였다고 하여 이를 수사지학(洙泗之學) 곧 공맹학(孔孟學)을 뜻하기도 한다. 또한 공자의 어머니 안징재는 노나라에 있는 이구산에서 기도를 드린 끝에 공자를 얻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공자의 이름이 구()이고 자가 중니(仲尼)라는 것이다. 이곳 사천을 우리나라 유학자(儒學者)들이 존앙(尊仰)의 대상으로 삼아온 중국의 산동성, 즉 공자와 맹자가 태어난 곡부현 및 추현과 동일시함으로써 추로지향(鄒魯之鄕 :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라는 뜻으로, 예절을 알고 학문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을 이르는 말)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선조들이 집념이 만들어 낸 지명(地名)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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