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샤머니즘과 은사주의
자신이 한 말에 내재한 능력으로써 영적인 힘을 끌어오고 그 결과 물질계를 움직일 수 있다는 믿음은 마법의 핵심이다. 신비주의자들은 기독교 내의 긍정적 고백 운동 지도자들이 하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 개념을 주장한다. 찰스 캡스는 “선포된 말이 우주에서 가장 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말이 하나님보다 더 힘이 세다는 것인가? 하나님 자신은 말씀을 하심으로써 그 말씀 속에 내재된 놀라운 힘을 작용케 하신다. 그렇다면 인간도 하나님의 계층에 속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들의 말이란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관계없이 작용하는 영적인 힘을 담고 있는 “그릇”이라는 것이다. 신비주의자들은 주문을 반복하는 특징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말한 내용이 이루어지도록 “긍정적 고백”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한 예로 남묘호랑객교는 “남묘호랑객교”라는 주문을 외워 “내재하고 있는 생명의 영원성을 영원한 법칙(즉 마법)을 통해 밖으로 끄집어낸다.”고 한다.
하나님 자신까지도 일정한 영적 법칙에 예속되어 일하시며 인간도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해 이 법칙을 지키면 영적 능력을 갖게 된다는 것은 모든 신비주의(마법)의 주장이다. 마법사가 수탉의 목을 자르고 특정한 방식으로 그 피를 뿌리고 공식적인 구문을 외울 때, “영적 법칙”에 예속된 영들은 그들의 요청을 반드시 듣는다고 그들은 믿는다. 이러한 미혹이 오늘날 여러 종류의 마귀적 종교 의식 밑에 깔려 있으며, 은사주의의 기치 아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회 안에서까지 행해지고 있다.
마법에서는 일정한 비밀 공식으로 모든 것이 작용한다. 사제(마법사, 주술사, 요술쟁이 등)는 영적 법칙을 알고 있으므로 사람과 신 사이의 특별한 중재자가 되어 왔다(무속 신앙의 무당도 이에 해당됨). 사제와 영적 세계간의 관계는 “마법사의 거래”를 통해 성립된다. 사람들에게 “기적”처럼 보이는 것은 실제로 이러한 “내부 거래”로 얻어진 결과이며, 영적 법칙에 따른 결과이다. 그들은 이러한 영적 법칙이 마법사 자신과 영들(능력을 주는 대신 인간의 혼을 사는)을 지배한다고 믿는다.
성경은 인간이 영계와 접촉하거나 거래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다(신 19:8-14). 비록 그것이 처음에는 진짜로 치유된 것 같고 사랑과 평안의 느낌일 수 있지만, 그것은 훗날의 재난만을 부를 뿐이다. 자신이 영적 법칙 즉 마법을 따름으로써 영계를 통제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 그것은 엄청난 마귀의 미혹에 지나지 않으며, 마귀는 종국에는 그 사람을 파멸시킨다. 오늘날 은사주의 목사들은 사실상 신자들을 마귀적인 신비주의로 인도하고 있으며, 그들의 기도는 겸허하게 하나님의 뜻과 은혜와 자비를 구하는 것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자신이 내뱉은 말로써(마법의 원칙) 하나님께 당당히 요구하고 심지어 명령까지 하는 것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들이 주로 원하는 것은 치유와 성공이다.
조용기 목사(한국의 순복음교회)는 모든 기적들이 그가 주장한 “4차원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고 말할 뿐 아니라 “누구든지(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4차원의 법칙을 적용하여... 기적을 행할 수 있다.”고 말한다. 조용기 목사는 기도 중에 “성령께” 왜 신비주의자들도 그리스도인들처럼 기적을 행할 수 있느냐고 질문하여 답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일본 불교 신비주의자들을 예로 들면서 그들이 “번영의 모습을 구상화하고(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리는 것) 같은 구절을 수없이 되풀이하여... 인간 영의 4차원을 개발함으로 기적들을 행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꾸짖는다. 한 잡지 발행인 프랭크 고인즈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부를 자기에게 오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번영의 법칙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는 그 과학적 적용으로서, 하나의 정확한 법칙을 따르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배교한 교회 목사들은 동양의 신비주의(악령의 힘을 빌려 기적을 행하는)를 배격하는 대신 오히려 그것을 지지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는 조용기 목사의 “4차원”에 대한 가르침이다. 선은 1차원적이고 평면은 2차원적이고 정육면체는 3차원적이라고 설명하면서 조목사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들아...영혼은 4차원이며...3차원은 2차원을 포함하고 통제하는 것처럼 4차원은 3차원을 포함하고 통제하며 질서와 아름다움을 창조해내느니라.’ 땅에는 세 가지 영적인 세력이 있다. 하나님의 영, 인간의 영, 사탄의 영...세 가지 영 모두 4차원의 세계에 존재하므로 자연히 영들은 물질적인 3차원 위를 다니며 창조적인 능력을 행사할 수 있다...성령은 ‘내 아들아, 인간들은 아직도 내가 준 영적 능력을 깨닫지 못하고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나는 ‘그렇습니다.’라고 말했다...거짓 선지자들이 영의 영역에서 능력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시켰기 때문이다.”
조용기 목사가 영혼은 3차원적 우주를 “포함하고 통제하는” 4차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뿐만 아니라 논리와 과학에도 맞지 않는다. 이 주장은 하나님을 물질세계와의 1차원적인 인과관계에 놓음으로써 하나님의 초월성을 부인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곧 만유이며 그 자신으로부터 모든 것이 만들어졌다는 힌두교의 신(神)개념을 나타내는 것이다.
조용기 목사의 “4차원”에 관한 주장에서 가장 혼란을 일으키는 부분은 성령이 그에게 이 사실을 계시했다는 주장이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주체적으로 하나님과 대화한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이 잘못된 개념을 주장하게 된 원인이 단순히 잘못된 논리를 따랐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아서 그것을 전파한다고 주장할 때는 그 거짓 교리가 훨씬 더 심각하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계시”를 거부해야 할 뿐 아니라 “모든 일을 시험하여 보고 선한 것을 붙잡으라.”(살전 5:21)는 말씀을 상기해야 한다. 성령께서는 결코 성경에 위배되는 거짓 교리를 주시지 않는다. 인간이 성경의 건전한 교리를 붙잡지 않고 진리보다 불의를 더 사랑할 때 악령은 성령의 음성으로, 하나님의 음성으로 가장하여 그들을 속이는 것이다.
조용기 목사가 저지르는 또 한 가지 심각한 오류는 하나님의 영과 천사들과 마귀들과 인간의 영이 모두 동일한 차원에 거주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다시 하나님의 초월성이 부정된다. 사실 이것은 “내가 지극히 높으신 분같이 되리라”(사 14:14)는 루시퍼(사탄)의 야망이었으며,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이브에게 그녀도 신처럼 될 수 있다는 사탄의 약속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이단 교리들의 공통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마귀, 예수 그리스도와 마귀를 동급에 놓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성경은 “오직 그분만이 불멸하시며, 어떤 사람도 접근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시며,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분”(딤전 6:16)이라고 하나님께 대해 말씀함으로써 하나님은 전적으로 자신만의 계층과 영역에 거하심을 밝히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물질세계든 영적세계든 그것에 제한되지도 않으시며 속하지도 않으신다. 모든 초자연적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사탄도 얼마든지 놀라운 기적들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탄은 그러한 능력으로써 진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다고 믿게 만든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반드시 구별해야 하며, 그것을 구별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조용기목사는 사실상 오컬트 이론, 다른 말로 하면 마법술을 제시해 왔다. 그는 하나님이 온 물질세계를 “포함”(include)하고 계시므로 자신으로부터 물질을 창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조용기 목사에 따르면 하나님의 창조의 방법은 바로 “품는 것”(incubing)이다. 이 말은 구상화(무언가를 생생하게 머릿속에 그리는 것)를 의미하는 조용기 목사의 용어이다. 그는 “창세기에서 주의 영이 알을 품는 암탉같이...품고 계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온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말할 뿐, 그분이 구상화를 비롯해서 어떤 특정 기술을 통하여 창조하셨다고 결코 말씀하지 않는다. 구상화가 창조의 방법이라고 하는 것은 조목사가 고안해 낸 거짓말에 불과하다. 그가 그렇게 가르치는 목적은 우리 인간도 어느 정도 이와 동일한 기술을 터득하고 사용할 수 있다면 우리도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을 할 수 있다는 미혹에 빠뜨리기 위해서이다. <4차원>의 속편에서 조용기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기도로써 주님께 나아갈 때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진 것을 구상화하고 꿈꾸는...방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원하는 기도의 응답을 결과를 구상화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그런 방법으로 성령의 능력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을 품을 수 있다...하나님은 이와 같은 상황을 구상화하는 과정을 이용하여 아브라함을 도우셨다...아브라함은 구상화하고 연상함으로써...자신의 [미래의] 자손들을 품을 수 있었고 자기 마음으로부터 의심을 쫓아낼 수 있었다...중요한 일은 우리가 구상화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구상화가 그렇게도 중요한 것이라면 성경은 구상화에 관해 많은 부분에서 다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 단어는 성경 전체에서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으며 그런 개념을 가르치기는커녕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이해할 사실은 물질세계에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마음속에 생생한 영상을 구상화한다는 개념은 성경에 등장하지 않을 뿐 아니라 모든 고대의 신비주의 문헌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가장 근본적인 샤머니즘의 기술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기목사는 구상화를 이용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으며, 조용기 목사뿐만 아니라 기독교 심리학자들, 성공 및 동기부여 운동 교사들도 이를 가르친다. 이것은 또한 치유 혹은 기억의 치유와 심지어 원거리 치유를 위해 이용되는 주요 기술이다.
인간이 구상화를 비롯해서 그 어떤 기술을 시도하든 간에 인간 자신은 결코 초자연적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그와 같은 능력이 한 인간을 통하여 나타날 때 그것은 성령의 역사이거나 마귀의 역사이며, 인간의 혼을 두고 벌어지는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영적 싸움과 관련이 있다. 두 영적 세력 즉 전능하신 하나님과 사탄이 있으며 이 둘은 서로 싸우고 있다. 하나님은 사탄보다도 위대하시고 전능하지만 인간에게 주신 자유 의지를 침범하지 않으시며, 우리가 스스로 진리를 택하고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신다.
반면 사탄은 인간을 자기의 종으로 만들기 위해 인간에게 거짓말을 제공한다. 즉 하나님 없이도 인간이 각자 내부에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깨워 초자연적 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목사들이 이러한 가르침을 수용하여 우리가 소위 “믿음”이라는 도구로써 그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믿음으로써 질병에게 명령하고 가난에게 명령하면 그것들이 복종하여 떠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능력이 아니라 악령에게 능력을 구하는 것이다.
구상화(마음속에 원하는 바를 생생하게 그리는 것)는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간에 오컬트(악령의 힘을 이용해 초자연적 능력을 발휘하는) 기법이며 이는 사실상 인간을 그의 창조주로부터 독립된, 하나의 신으로 만들려는 시도이다.
조용기 목사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예를 성경에서 끌어오려고 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예들은 근거가 없는 추측으로부터 만들어졌다. 일례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밤하늘을 보게 하시고 그에게 그의 씨가 하늘의 별들처럼 셀 수 없을 만큼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데서 조용기 목사는 아브라함이 셀 수 없이 많은 자손을 구상화하기 시작했으며 이 환상은 이삭의 출생으로 이루어졌다고 제멋대로 상상한다. 조용기 목사는 이와 같은 개념 위에 자신의 모든 구상화 교리를 세우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별을 올려다보았을 때 그가 볼 수 있던 모든 것은 자기 자손의 얼굴이었으며 갑자기 그는 그들이 그에게 ”아버지 아브라함!“이라고 부르는 것을 느꼈다고 상상한다...그는 눈을 감았을 때 잠들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별들이 자기 후손들의 얼굴로 변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그러한 그림들이 그의 마음에 계속해서 떠올랐으며...그의 4차원의 일부분이 되었다...이들 환상과 꿈은 백 살 먹은 그의 육체를 지배했으며, 마치 그의 몸이 젊은이의 몸처럼 변화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인 주석이 아니라 순전히 공상이다. 조용기 목사의 가르침은 오컬트 전승과 완전하게 일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가르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말씀과 주의 깊게 대조(바울의 교훈을 가지고 베뢰아 사람들이 한 것처럼)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는 배교의 씨앗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자세가 구상화를 비롯해 여러 형태의 마법들을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 기독교 저자들은 자신들의 구상화 기법 사용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환상이 없는 곳에서는 백성이 망하나”(잠 29:18)라는 성경구절을 인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환상들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구절은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목적을 위해 원하시는 때와 방법으로 그분이 선택한 선지자에게 주시는 환상을 말하는 것이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상상 속에서 생생한 형상을 몽상하여 자기 자신의 “환상”을 만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은 사람이 스스로 구상화한 “환상”을 만들 수 있으며 하나님은 그 환상을 존중하셔야 한다는 거짓된 교훈을 뒷받침하기 위해 오용된다. 예레미야 23:16에서 하나님은 이러한 오용을 경고하신다. “만군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경청하지 말라. 그들은 너희로 우쭐하게 하며, 그들 자신의 마음의 환상을 말하고 주의 입에서 나온 것으로 아니하느니라.”
모든 샤먼(무당)은 마음속에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구상화하는 것이 영적 존재들(악령들)과 접촉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조용기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기도할 때 마지막 결과를 항상 구상화해야 한다...만일 당신이 분명하게 당신의 마음속으로 바라는 것을 정확하게 그리지 않았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실재가 될 수 없다...우리는 우리 사람들에게 성공을 마음속에 그리는...방법을 가르쳐왔다...구상화를 하고 꿈을 꿈으로써 당신의 미래를 품을 수 있고 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오늘날 조용기 목사를 비롯한 많은 거짓 목사들이 구상화 형태의 샤머니즘을 교회 안으로 들여오고 있는데, 이러한 거짓 교리에 대한 분별력이 절실히 요청되는 바이다.
샤머니즘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영계와 접촉하여 병을 치료하는 신비스런 능력을 가져올 수 있으며, 그러한 접촉은 인간의 정신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가 하는 생각과 말들이 영적 능력의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을 인정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자아(self)로 대치하는 크나큰 미혹의 희생자들이다. 하나님을 배제하고서 초자연적인 능력을 추구할 때 그들은 사탄의 능력을 허용해야 된다. 부인할 수 없는 증거들이 샤머니즘의 사악한 영향력을 증거하는데도 샤머니즘은 현재 대중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며 수용되고 있고, “기독교화된” 형태의 샤머니즘을 교회들(은사주의 교회들)이 점점 받아들이고 있는 추세이다.
이것은 성경이 오컬트(악령의 힘을 빌어 신비한 능력을 구사함)를 경고하고 있다는 사실에 무지한 채 심리학적 이론 및 성공 철학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에 기인한다. 전적으로 샤머니즘에 기초한 구상화(바라는 바를 생생하게 머릿속에 그리는 것 - 기도에 대한 은사주의 목사들의 전형적인 가르침)는 과학적인 것도 성경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므로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그것을 수용하고 장려하고 있다. <월 스트리트 저널>은 최근에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일부 사람들에게 혼동을 주는 한국 기독교의 또 다른 성향은 조용기 목사와 같은 성직자들이 기독교를 물질적 번영을 위한 길로 보는 경향이다. 그러한 경향은 비평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수세기 동안 한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 국가들의 민속 종교인 샤머니즘의 잔재이다. 샤머니즘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건강과 기업의 성공을 확인하기 위하여 샤먼(무당), 곧 일종의 주술사에게...영들에게 중재해달라고 요청한다. 한국의 샤머니즘에서는 샤먼들이 접촉할 수 없으며 다른 영들의 위에 있는 대영(a great spirit)이 있다. 한 루터교 선교사는 그러한 사상이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기반을 제공했다고 말한다. 초기 기독교 선교사가 와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며 당신이 죽은 뒤에 당신을 심판하실 것입니다.’고 전했을 때 한국인들은 ‘아, 예, 우리도 그런 하나님에 관해 옛적부터 들었습니다.’고 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그 사상이 한국인들로 하여금 너무나도 쉽사리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만들었다...많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샤머니즘의 영들과 기독교의 하나님을 동류의 영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샤머니즘에 대한 기호는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어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초월주의자들의 급진적인 가르침의 잔재인 이단적 교리들이 놀랍게도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을 본다. 이들 초월주의자들은 샤머니즘을 지성화하여 19세기 초에 미국으로 유입한 장본인들이다. 초월주의자들은 당시 지배적이던 뉴잉글랜드 근본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을 시도한 바 있다. 그와 유사한 가르침이 오늘날 부활되고 있는데 이번에는 근본주의 내부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초월주의자들은 사고가 모든 것을 조정한다고 하는 소위 “신사고” 개념을 정립시켰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생각의 힘은 물질적인 실재를 창조하거나 파괴시키기에 충분하다고 믿어졌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로 말미암아 일하고 우리의 사고를 구체적인 형태로 실현시키는 대정신(a great Mind)이었으며, 여기서 당연히 귀결되는 결론은 인간이 신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이단으로서 교회에서 배척된 신사고는 크리스천 사이언스, 종교적 과학, 유니티교 등 같은 정신과학 이단들의 기초를 제공했다. 신사고의 부활, 곧 지금은 긍정적 사고, 가능성 사고, 긍정적 고백, 긍정적 정신 태도, 그리고 내적 치유라고 불리는 것들이 오늘날 교회를 휩쓸고 있다. 세상에서 뉴에이지 운동이 하는 동일한 역할을 교회 내에서 신사고가 하고 있으며, 배척되기는커녕 오히려 복음주의 교회 내에 남아서 혼란과 미혹을 가중시키고 있다. 가장 기본적인 신사고 기법의 하나는 구상화이며 그것은 이미 교회 깊숙이까지 침투해 있다.
오컬트(악령의 힘을 빌려 능력을 행함) 신봉자들이 사고(thought)를 이용하는 가장 보편적이고 강력한 방법은 바로 구상화(바라는 바를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리는 기법)이다. 이 샤머니즘적인 방법은 인본주의적 심리학에 의해 수용되었으며, 기독교 심리학의 비호 아래 교회에까지 들어왔다. 그들의 주장은 마음으로 한 장면을 생생하게 상상하는 행위는 그 장면을 실제 경험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실바 마인드 컨트롤의 창시자 조세 실바도 “어떤 법칙들을 제대로 따르기만 하면 우리가 상상하는 사건은 곧 실제 사건이 될 것이다...구상화하는 법을 더 잘 배울수록 더욱 강력한 마인드 컨트롤을 체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오컬트 신봉자들은 오래 전부터 구상화를 통하여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물질세계에서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구상화 기법은 실제적으로 마법사 또는 샤먼(무당)들이 “영들”이라고 부르는 것(사실은 마귀의 더러운 영)과 대단히 쉽게 접촉하게 해 준다. 하르너는 “샤먼은 최소한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영들’을 개인적으로 부릴 수 있다. 영이 없다면 사실상 샤면이 될 수 없다.”고 설명한다. 그와 동일한 샤머니즘적인 절차를 따라서 동일한 “영들”과 접촉하는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은 그 영들을 “내적 안내자들” 또는 “상상의 안내자들”이라고 부른다.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이 방법은 칼 시몬톤 박사와 그의 아내 스테파니에게 놀라운 결과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시몬톤 부부는 그들이 말기 암환자들에게 구상화하는 법을 가르쳤으며, “내적 안내자들”의 능력으로 그들 중 몇 명은 완치되었고 두 사람은 그러한 성공으로 유명해졌다.
많은 은사주의 목사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라고 종용한다. 그러나 일반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샤먼들이 주장하는 것과 똑같은 절차를 따라 마법사의 세계로 인도하는 “마법의 문”을 여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 단순하지만 강력한 기법들(샤먼들이 오랫동안 영적 존재들과 접촉하고 거래하기 위하여 영적 세계에 들어가는 데 사용해 온)은 오늘날의 의학, 심리학, 성공 동기부여, 교육 분야에서 인정을 받고 있다. 문제는 점점 더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 또한 이를 조장하고 가르친다는 데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구상화하라고 권하면서 우리가 마음으로 창조한 형상이 실제로 예수님이 되어 우리와 진짜로 접촉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그러한 교사 중 하나인 로벳은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약 300년 전 로렌스라는 불란서인 수사가 있었는데, 그는...주 예수님을 구상화하는 기술을 발전시켜서 자신의 삶을 혁신시켰다...상상의 가장 고귀하고 영광스런 목적은 보이지 않는 주님에게 실재를 부여하는 것이다!...주님은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그리는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개의치 않으신다...당신이 원하는 모습의 주님을 그리되 그저 주님을 사랑하기만 하라.”
이처럼 구상화된 “예수”는 사실상 인간의 마음속에 세워진 하나의 “우상”이다. 은사주의 목사들이 가르치는 것처럼 이 예수가 우리가 마음으로 상상할 때마다 “실제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빛의 천사로 나타난 사탄의 영과 교접하는 것이다. “...이는 사탄도 자신을 빛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사탄의 종들이 의의 종으로 가장한다 하더라도 큰 일이 아니니라...”(고후 11:14,15)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사람 안에 성령으로서 “내재하신다.”
오늘날 교회들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내적 치유”는 그 본질상 철저하게 비성경적이며 그 기법은 샤머니즘에 기초한 심리학이다. 많은 목사들이 내적 치유라는 이름으로 자신에게 부정적 영향을 주는 과거의 특정 사건을 구상화(머릿속에 무언가를 생생하게 그리는 샤머니즘 기법)하게 만들고 그 사건을 자기가 원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새로이 머릿속에 구상화하도록 교인들에게 가르친다.
과거의 사건은 물론 우리의 현재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그 사람의 전체 역사”가 “마음과 정신 밑에 깔려있는 원망”을 포함하여 연구되어야 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성경적인 것도 아니며 합리적인 것도 아니다. 한 사람의 생애에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결코 그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떻게 그 사건에 반응하는가이며, 이는 맨 처음에 반응했던 대로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구원받고 주님 안에서 영적으로 성장할 때 교정된다. 따라서 과거의 정신 충격을 머릿속에서 재현하려는 시도는 유익보다 더 많은 해를 준다. 모든 과거 경험을 들추어내는 것은 끝없이 계속되는 쓸데없는 짓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과거에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할 때 우리는 비로소 과거에 매여 있지 않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이시다. 그 생명은 “내적 치유”나 어떤 비성경적인 치료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으로 들어오시는 날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날 이래로 성령이 하나님의 모든 자녀의 생명 속에서 역사하시면서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변화시키신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현재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기쁨을 누리며 성령의 열매를 맺는 비결은 바로 지금 우리 마음속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내의 많은 거짓 교사들은 우리가 지닌 원망을 포함하여 우리가 범한 죄들은 우리가 십자가의 축복을 받기 위해 “일일이 기억되고 회개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것을 일일이 기억하기란 불가능하며 거짓된 기억을 일으키기 십상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정도는 다르지만 절망, 염려, 나쁜 습관, 후회, 죄의식, 원망, 질투, 불안감, 공포, 정욕 등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교회에서 가장 크게 필요한 것 중 하나는 애정과 시간을 가지고 있고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그러한 것들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상담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담은 어디까지나 성경에 근거해야 하며 비성경적이고 때로 마귀적인 심리학적 이론들에 근거해서는 안된다. 많은 사람들이 점성술 같은 것은 추호도 믿지 않으면서 그 논리 및 해석상 그와 똑같이 오류로 점철된 “정신 치료법”에는 수 년 동안 자신을 내맡기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내적 치유는 “문제 해결”을 위해 암시력(power of suggestion)을 이용하는 기독교화된 정신 분석이며, 그들이 다루는 “문제”조차 없던 것을 만들어 낸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른 여러 형태의 “정신 요법”도 마찬가지다. 내적 치유가 실행되기 시작한 교회에서 교인들은 실제로 그들이 인식조차 못했던 깊이 묻힌 상처와 원망에 좌지우지되고 있다고 믿기 시작한 후에 오히려 더 침울하게 되었다는 고백이 일반적이다. 이것은 그들을 구원한다고 생각되는 기억의 치유 과정 사실은 그들을 혼란시키는 거짓 기억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에게 시급히 필요한 것은 거짓 목사들이 주장하는 말보다는 우리 스스로 모든 것을 시험해 보는 것이다. 데살로니가인들도 바울이 이방인을 위한 위대한 사도라고 해서 그의 말한 것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고 “그 말들이 그런가 하여 매일 성경을 상고”했다(행 17:11). 우리는 각자 어떤 사람의 해석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성경 자체에 근거해서 우리가 믿는 것과 우리가 그것을 믿는 이유에 대한 확고한 확신에 이르러야 한다. 그럴 때만이 기독교 속에 만연한 마귀의 미혹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은사주의 목사들은 “믿음의 원리”, “보다 깊은 믿음의 차원” 등의 개념을 강조해서 가르친다. 모두 그럴 듯한 설명으로 포장되어 있으나 대개가 성경에 없는 용어요 개념인데다 사람들을 거짓 교리로 인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연재된 글을 통해 그들의 가르침이 사실상 이교도 신비주의, 마법과 동일한 것임을 증명하였다. 그 중 한 사람인 조용기목사는 그의 <4차원의 영적 세계>에서 “내가 예수 안에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응답을 받는다.”며 근거 구절로 요한복음 14:14을 제시한다(<4차원의 영적 세계> p26).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하신 것이었으며, 사도들은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신 이후로 실제로 그러한 능력을 행했다. 많은 이들이 사도들에게 주어진 능력, 즉 “사도들의 표적”이 자기에게도 있다고 착각 혹은 거짓 주장을 하고 있다. 그들도 조용기 목사처럼 한결같이 요한복음 14:14을 내세운다.
그러나 같은 문맥에 있는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들을 할 것이요 또 이보다 더 큰일들을 할 것이라.”(요 14:12)는 말씀은 어떤가? 왜 은사주의 목사들은 예수님보다 “더 큰” 일들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것과 “비슷한 수준의” 일들조차 하지 못하는가? 지금까지 문둥병을 낫게 했다거나 물 위를 걸었다는 은사주의 목사는 한 사람도 들어보지 못했다. 반면에 예수님께 그러한 약속을 받았던 “사도들”은 확실히 주님이 하신 것보다 더 큰 일을 했다. 바울의 경우 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만 대어도 질병과 악령들이 떠나갔으며(행 19:12) 뱀에 물렸어도 죽지 않았다(행 28:5). 베드로의 경우도 데려오는 사람 모두를 치유했으며, 사람들은 그의 그림자만이라고 덮이기를 바래 환자들을 길거리에 눕혀 놓았다(행 5:16).
은사주의 목사들의 경우는 어떤가? 왜 그들은 모든 병자를 낫게 하지 못하는가? 이에 대한 그들의 변명은 하나같이 “당신의 믿음이 부족해서”, “하나님의 더 깊은 뜻이 있으므로”이다. 그러나 예수님이나 (오순절 이후의) 사도들은 못 고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더욱이 “그들이(나사렛 사람들) 믿지 않으므로 거기서는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마 13:58)는 구절을 살펴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을 대상으로도 권능을 행하긴 행하셨던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지금도 기적을 행하시고 자녀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그러나 사도들이 했던 것과 같은 사역은 그때 당시로 끝났다.)
※ 참고 - 예수님은 병자 자신의 믿음이 없었어도 치유하심.
마태복음 8장(백부장의 종), 마가복음 9장(아버지의 아이) 등
또한 그는 자신이 “선포된 말씀”이라 부르는 것 즉 그의 내면세계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따라 모든 것을 운영하고 결정해 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음의 일화에서 그 영의 정체는 여실히 드러난다. 그가 교회 건물 건축으로 떠맡게 된 거대한 부채를 갚을 길이 없어지자 자살을 결심하게 되었는데, 이때 했다는 그의 기도를 들어보자. “이제 모든 것이 끝장입니다...이는 죽는 길밖에 달리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죽더라도 지옥에 가고 싶지는 않습니다...지옥이 이곳보다 더 못한 곳이라면 왜 제가 거길 가야 합니까? 그러니 제발 저의 영혼을 받아 주시고 천국에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p156) 그에게는 자기가 죽으면 하늘나라에 간다는 확신도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이런 “목소리”를 들었다. “네가 죽는다면 너는 지옥에 갈 뿐만 아니라, 너를 신임했던 많은 성도들도 지옥으로 끌어내리게 될 것이다.”(p157)
과연 그것이 하나님의 목소리였겠는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받는 구원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자살”했다고 해서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그가 거듭났을 때 받은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며, 자신의 행위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선물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롬 1:17) 그 어떠한 자신의 행위에 따라서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정도의 지식과 믿음조차도 없었다. 또 그 “목소리”는 여기에 한술 더 떠 조용기 목사 자신이 지옥에 갈 뿐만 아니라 그의 성도들도 지옥으로 끌어내리게 될 것이라고 경고를 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목소리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아니라 조용기 목사와 그의 신도들을 온갖 비진리로 미혹한 마귀의 영인 것을 알 수 있다. 한국 기독교를 기복신앙 샤머니즘으로 만드는 데 일등공신인 그를 인도한 영은 더러운 영이었던 것이다.
질병에서 해방되고픈 심정, 부도를 막고 싶은 심정은 당해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을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그런 심정을 이용해 은사주의 목사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먹는다. 그런 사람들 중 많은 경우가 병 낫게 해 주고 사업도 잘된다는 말에 한번 “예수를 믿어 봤다가” 병도 낫지 않고 사업도 잘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마저 부인하게 된다. 그들이 처음부터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올바로 알았더라면, 죄를 심판하시는 공의로우시고 두려우신 하나님, 우리를 경제적 파국이나 질병에서 구해 주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지옥 불에 가야 마땅한 나의 죄를 대신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구주 하나님으로 예수님을 믿었더라면, 하나님의 뜻과 능력의 어떤 한 부분만이 아니라 그분의 전체적인 경륜을 제대로 배웠더라면 어떤 환경에 처해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배웠을 것이고, 성경의 메시지는 C목사를 비롯한 은사주의 거짓 교사들이 가르치는 대로 “성공”을 주는 마법 책이 아니라는 것을 진작 깨달았을 것이다.
조용기목사의 <4차원의 영적세계>를 읽어 보면 온갖 거짓 교리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그가 성경이 말씀하는 바를 그대로 배우고 믿으려 하지 않고 자기 생각과 교리를 미리 정해 놓고 거기에 성경을 끼워 맞추려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얼토당토않은 거짓 교리에 귀착하게 된 것이다. 그의 주장들은 하나같이 그의 자의적 성경해석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책을 읽어 보면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막상 성경의 메시지에 비추어 보면 너무나도 빗나간 거짓 교리로 인도하며, 결과적으로 성경의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도록 만들고 있다. 그가 가르치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욕망(그의 표현을 빌면 불타는 소망)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주시리라는 강한 신념을 말한다. 이것은 절대로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이 아니다.
조용기목사의 책을 읽다 보면 그의 관심은 오로지 물질적 성공과 신유, 교회의 양적 성장뿐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마음을 새롭게 하십시오. 성공적 관점, 승리의 관점, 그리고 여러분께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풍성하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의 관점을 지속적으로 생각하십시오.”(p169), “만약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도 여전히 가난하고 실패한 인생을 살았다면, 그들이 어떻게 1969년부터 1990년 사이에 교회에 연 2백억 원 가량의 헌금을 낼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부유해졌고 엄청나게 성공했기 때문에 헌금할 수 있는 것입니다”(p197). 성공하게 해 준다는 데 혹한 사람들이 분별없이 그의 거짓 가르침에 속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보이는 것들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 이는 보이는 것들은 잠깐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은 영원하기 때문이라”(고후 4:18).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라”(고후 5:7)는 말씀과는 정확히 반대로 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으리라는 말씀, 이 땅에서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할 줄 알라는 말씀, 땅의 것을 사모하지 말고 하늘에 있는 것을 사모하라는 말씀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또한 그는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 하나님을 믿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p84). 그러나 그렇게 믿은 사람들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을 부인하게 된다. 하나님은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믿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신다. 그러나 인간이 원하는 대로 무조건 다 들어주시는 하나님은 결코 아니다. 성경에는 응답 받는 기도의 조건이 많이 나온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너희 정욕에다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3). 게다가 그는 강단에 서서 거짓말까지 했다. 자기가 하나님께 기도한 물건들을 아직 받지도 않았는데 이미 받았다고 말해 버린 것이다(p30,31). 그 사실이 탄로가 나게 생기자 그것들은 사실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자라고 있다.”는 기가 막힌 변명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이런 사람이 70만 명의 교인들을 거짓 교리로 이끌고 있으며,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지도자로 자처하고 있는 실정이다. 조용기 목사의 교인 수가 아무리 많더라도 그의 교리가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는 성경이 경고하고 있는 거짓 교사이다.
지난 몇 주 동안 “시무언” 코너에 이런 글들이 실렸다. “교회에서 병든 자가 고침 받기 위해 기도하는 것을 무속 신앙 따위로 취급하여 무시합니다. 또 이적을 사모한다 하여 크게 잘못된 것처럼 매도합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에서는 예수의 말씀뿐 아니라 능력과 그가 역사하시는 그의 모든 것이 나타나야 합니다...능력과 이적은 교회의 고유한 권능입니다.”, “성도들의 심령이 변화되고 신자들 가운데 한량없이 큰 이적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가사의한 이적을 보여야만 참 예수의 교회입니다. 이런 증거가 없으면 단순한 종교일 뿐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글쓴이는 은사주의자들처럼 기적을 행하지 않고 성경만 가르치는 교회를 “세미나 장소” 같은 곳이요 “단순한 종교” 다시 말하면 “거짓 종교”(참 종교는 하나뿐이므로)에 불과하다고 단정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를 점령한 은사주의 교리는 잘못된 성경 해석에 기초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은 한 마디로 예수님과 사도들이 행한 모든 것(특히 기적)을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모방하기 원하는 예수님은 이런 말씀도 하셨다. “이방인들의 길로도 가지 말고, 또 사마리아인의 성읍에도 들어가지 말고, 다만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그렇다면, 한국인인 우리도 이방인인데, 이방인에게는 복음을 안 전하고 유대인에게만 전해야 할 것 아닌가? “가서 전할 때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하고, 병든 자들을 고쳐 주고, 문둥병자들을 깨끗게 하며, 죽은 자들을 살리고, 마귀들을 내어 쫓으라.”
왜 문둥병자는 아무도 낫게 하지 못하는가? “너희가 값없이 받았으니 값없이 주라. 너희의 돈 주머니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가지고 다니지 말라.” 그런데 안수기도 해 주고 거액의 감사헌금은 왜 받는 것인가?(마 10:5-10) “너희(사도들)를 영접하는 사람은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며, 또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곧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라.”(마 10:40)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는데(요 1:12), 여기서는 사도들을 영접하면 그것이 곧 예수님,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C목사나 K목사 같은 사람들을 “영접”하면 그것이 곧 구원받는 것인가? “주의 겉옷 단만이라도 만지기를 간청하였으며, 만지는 자는 모두 온전히 나으니라.”(마 14:36). 그런데 왜 그들은 낫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더 많은가? 은사주의자들의 신유 집회가 하나의 거대한 “연극” 무대인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낫지 않은 것을 나은 것처럼 “연기”해야 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예수님께서 표적과 이적이 동반된 천국 복음을 전하신 사역은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들이 그것을 거부하고 메시야를 죽이자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된 것이다. 또한 십자가 이전에 유대인에게 전해진 복음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 받는 복음(고전 15:1-4)이 아니라, 회개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자기의 믿음과 행위를 끝까지 지켜야 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은사주의 목사들에게는 병자를 100% 낫게 해 주는 능력이 없다. 그들은 사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이적들과 표적들이 행해지더라.”(행 2:43), “정녕 사도의 표적들이 너희 가운데서 모든 인내와 표적들과 이적들과 능력 행함으로 판명되었거니와”(고후 12:12) 은사주의 목사들을 향해 성경은 반문한다.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기적들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들을 가졌겠느냐? 다 방언들을 말하겠느냐? 다 통역하겠느냐?”(고전 12:29-31) 그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사도도 아닌 자들이 사도로 자처하고 있는 동안 사람들은 이적과 표적만 따라다니며 더러운 영에게 미혹당하고, 동시에 적그리스도가 등장할 길만 열어 주고 있는 것이다. “그 불법자가 오는 것은 사탄의 역사에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들과 거짓 이적들과 멸망하는 자들 안에 있는 모든 불의의 속임수로 오는 것이니(살후 2:9-12)
● 오순절 운동의 역사
1906년 미국 LA 아주사에서 시작된 오순절 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들이 2006년 한 해 동안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2007년은 ‘평양부흥’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들이 즐비하다. 20세기 라오디케아 교회 시대는 배교가 그 특징인데, 첫째가 바른 성경을 저버린 것이고, 둘째가 미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들을 따라 오순절운동이 확산된 것이다. 배교한 교회들은 미혹하는 영에 사로잡혀 있지만,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바른 성경에 근거하여 오순절 운동의 실상을 바로잡고자 한다.
1. 오순절 운동에 대한 역사적 고찰 – 기원 및 발전 과정에 나타난 문제점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오순절 운동의 기원에 대해 영국에서의 웨슬리 부흥운동, 미국에서의 부흥운동 및 성결운동 등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오순절 운동의 주된 관심은 성결이 아니라 성령침례와 방언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에서 19세기의 부흥훈동이나 성결운동과는 분명히 다르다. 학자들의 설명은 오순절 운동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신학적으로 정리한 것일 뿐이며, 1900년대 초에 시작된 오순절 운동 자체는 학자들의 설명과 같이 체계적인 신학을 근거로 출발한 것이 아니다. 신학적 이론에 바탕을 두지 않고 체험을 중시한 사건들의 연속이었으며, 그것이 확산되어 하나의 운동으로 자리잡은 것이었다.
1) 파함과 캔자즈 수 토페카 시의 벧엘성경대학
감리교 부흥사였던 파함(Charles F. Parham) 목사가 1898년 캔자스 주 토페카 시에 벧엘 치유의 집을 설립하였고, 1900년 10월에는 벧엘성경대학을 설립하여 40여 명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당시 사도행전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 해 마지막 무렵에 파함은 인근에 있는 도시로 천막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해 3일간 학교를 떠나면서 학생들에게 “성령침례의 증거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리포트를 작성케 했다. 그런데 파함이 돌아왔을 때 학생들은 이미 성령침례의 증거가 방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며, 그 학생들은 3일 밤낮을 쉬지 않고 성령침례를 구하고 있었다. 1901년 1월 1일 새벽 무렵, 아그네스 오즈만(Agnes Ozman)이라는 여학생이 성령침례를 받기 위해 파함에게 안수를 요청했고, 파함이 손을 얹고 기도하는 중에 오즈만이 방언을 하게 되었다. 이어서 며칠이 못되어 1월 3일, 12명의 학생들이 방언을 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해서 1901년 초에 소위 성령침례의 증거가 방언이라고 주장하는 오순절운동이 시작되었다.
2) 시무어와 아주사 거리 선교회
오순절을 재현하는 움직임이 그 해에 캔자스, 오클라호마, 미주리, 텍사스 주 등에 퍼지게 되었다. 1905년에 파함은 휴스톤에 또 하나의 신학교를 설립했는데, 그곳에서 흑인 노예 출신의 윌리엄 시무어(William J. Seymour)가 1905년부터 1906년까지 1년 동안 공부했다. 그는 성령침례의 증거가 방언이라고 배웠고 또 신유에 관해서도 배웠는데, 그곳에서 소위 성령침례를 받거나 방언을 하지는 않았었다. 그후 1906년 4월 9일 시무어는 로스앤젤레스 노스 보니브래 가(North Bonnie Brae Street) 214번지에 있는 한 가정에서 설교하게 되었는데, 그때 사도행전 2:4을 펴고 성령침례의 표적이 방언이라고 설교했고 그곳에 참석한 7명이 방언을 하게 되었다. 그 후 사람들이 더 모이자 장소를 아주사 거리 312번지의 한 건물로 옮겼다.
인종과 종파를 상관하지 않고 집회를 했는데, 그곳에서 울고, 노래하고, 춤추고, 황홀경에 빠지고, 방언을 하는 등의 일이 벌어졌다. 이 집회를 계기로 ‘아주사 거리 선교회’(Azusa Street Mission)가 조직되고 이러한 집회가 3년간 계속되었으며, 미국 내에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이곳 집회에 참석했던 더함(Durham)은 시카고에서 오순절운동을 확산시켰고, 더함에 의해 ‘하나님의 성회’ 초대 총회장인 벨(E. N. Bell)이 오순절운동에 참여하게 됐으며, 소위 신유 사역자로 널리 활동한 맥퍼슨(Ainee Semple Mcpherson)이 병고침을 받기도 했다. 바로 아주사 거리 선교회가 지난 100년 동안 오순절운동이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게 하는 진원지가 되었던 것이다.
3) ‘하나님의 성회’ 교단 출범
오순절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힘을 결집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소위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오순절주의자들이 연합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역할을 한 사람이 <말씀과 증인>지에 1914년 4월 2일부터 12일까지 아칸사스 주 핫스프링 시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과 오순절적 성도들의 총회를 소집한다는 광고를 게재하였다. 그 창립총회에서 교단 명칭이 ‘하나님의 성회’(The Assemblies of God)로 정해졌으며, 총회장에는 벨 목사를 선출하고 총무에는 플라워(J.R. Flower) 목사를 선출했다. 이것이 바로 현재 가장 큰 오순절 교단이다.
4) 이단에서 교회 성장의 중심 교단으로
처음 출발부터 미국 내에서 오순절운동이 일반 교회들로부터 이단이라는 평가가 계속되었지만, 1940년부터 오순절운동을 하는 오순절 교회들과 일반 교회들 사이의 벽이 무너지고 연합하는 상황으로 점차 변해갔다. 1920년부터 1936년 사이에 미국의 일반 교회들은 전체 교인의 약 8%인 약 2백만 명이 감소한 반면, 하나님의 성회는 208.7% 증가하고 하나님의 교회가 98.8% 증가했는데, 일반 교회들이 자신들의 교인들을 빼앗긴 것이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오순절 교단들의 양적인 성장이 계속되자 결국 자기들이 이단시하던 오순절 교단들을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여러 교단들이 거짓을 바로잡지 못하고 미혹의 영에 사로잡힌 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41년 4월에 전미복음주의협의회의 150명의 교단 대표들이 모였을 때, 오순절 교단들의 대표들도 참석하게 되었고, 1943년 전미복음주의협의회의 65개 교단 6백 명의 대표 중 160명 이상이 하나님의 성회 목회자들이었다. 또한 1960-1962년에는 하나님의 성회의 총회장인 지머만 목사가 전미복음주의협의회의 의장을 맡음으로써 이단에서 교회성장의 중심 교단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한편 세계적으로 1947년 세계 오순절 협의회가 창립되어 그 영향력을 계속 키웠고 오늘에 와서는 소위 가장 성장하는 교단의 대명사가 되어 성장을 추구하는 교회들의 모델이 되었다.
5) 오순절 운동의 확산
“방언이 성령침례를 받은 첫 육체적 증거”라고 주장하며 1901년 초에 결성된 오순절 교단들 중심의 소위 ‘정통적 오순절운동’이 시작되었다. 그 다음은 ‘신오순절운동’이 1960년대에 나타났는데, 성령침례와 방언이 오순절 교단들을 넘어 비오순절 교단의 교회에 퍼지게 된 것을 말한다. 따라서 오순절 교단 밖에서 오순절 운동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신오순절주의자라고 부르며, 이전부터 있던 오순절운동과 구분하여 “은사주의 운동”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성령침례를 받은 증거를 방언으로 한정하지 않고, 다른 은사들을 체험해도 성령침례를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1960년 4월 3일 성공회 신부인 데니스 베네트(Dennis Bennett)가 강단에서 성령이 그의 입술을 사로잡아 방언과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찬양과 감사의 말을 했다고 말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특히 ‘국제순복음실업인친교회’(FGBMFI)가 이 은사주의 운동의 주동이 되어 미국의 여러 방송들을 통해서 활동하고 있다.
또한 로마 카톨릭에서 일어난 ‘카톨릭 은사주의 운동’이 있는데 1967년 카톹릭 대학의 교수들과 학생들 사이에 일어났으며, 두퀘슨 대학에서 처음으로 시작하여 노틀담 대학으로 확산되었다. 이들은 오순절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했으며, 그 모임에 소위 오순절 은사들이 나타났는데, 그들 중 대부분이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고, ‘귀신을 쫓아내는’(exorcism) 능력을 받았다고 한다. 주요 인물로는 프란시스 맥너트(Francis MacNutt) 신부가 있다.
현재의 오순절 운동은 ‘제3물결운동’으로 불리는데, 풀러 신학대학의 교수인 피터 와그너(Peter Wagner)에 의해 붙여진 명칭이다. 그는 성령의 역사의 제1물결은 20세기 초반의 오순절 운동을 통해 시작되었고, 제2물결은 50-60년대 주요 교단들 간에 일어났던 은사주의 운동이며 이 두 운동은 계속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1980년대의 제3물결이 오순절 교인이 되지 않고도 다른 교단의 교인들이 소위 성령 체험을 하게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현재 오순절주의자들은 제3물결이라는 표현을 통해 오순절운동의 확산에 더욱 힘쓰고 있다.
미국의 경우 세계 오순절 교단 중에서 가장 큰 교단이 1914년 조직된 하나님의 성회이고, 그 외에 미국에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교회’, 오순절 성결교 협회, 미국 오순절 하나님의 연합 교회, 연합 오순절 교회, 국제 사중 복음 교회 등 여러 오순절 교단들이 존재한다. 또한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적으로 퍼져 있는데, 1987년 8월 통계에 따르면 약 4억 5천만 명이 오순절 운동에 참여하는 교인들이라고 한다.
6)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미국 하나님의 성회의 도움으로 1953년 4월 8일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이하 기하성)가 서울 용산의 남부교회(허흥 목사)에 설립되었다. 이후 기하성은 분열을 겪었으나, 박정근, 조용기 목사 등이 중심이 되어 교단을 이끌었는데, 특히 1958년 천막교회를 개척한 조용기 목사가 1966년부터 10년간 총회장을 역임하여 순복음교회의 외적 성장과 함께 오순절 운동이 비성경적인 한국 교회에 더 큰 악영향을 주기에 이르렀다. 특히 조목사의 삼중축복과 오중복음으로 대표되는 오순절운동은 바른 복음을 가로막고 기복신앙은 물론, 성령침례, 방언, 신유 등으로 치명적인 누룩을 확산시키게 되었다.
1981년 기하성 내에서 조목사에 대한 이단시비 문제도 있었으며 그로 인해 분열이 있기도 했고, 또한 한국 교계에서도 계속 이단시비를 받았었다. 그러나 미국의 사례와 같이 교인 수가 증가하고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한국 교회는 바른 성경도 없는 상황에서 거짓 교리를 바로잡지 못하고 오히려 미혹하는 영과 마귀들의 교리에 동조하여 오순절화되어 버렸다. 1996년 기하성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에 가입하고 또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도 가입함은 물론 양 기구의 회장을 맡기도 했으며, 조목사로 대표되는 오순절운동이 소위 교회성장의 모델이 되어 비정상적인 양적 성장에 몰두하게 되었다. 국내 종교현황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기독교 인구 중에서 장로교, 감리교 다음으로 오순절 교단이 큰 교단이지만, 오순절 운동의 악영향은 한국의 거의 모든 교단들에 침투해 있다.
7) 교회성장에 미혹된 교회들
1965-1994년까지 30년 동안의 미국 교단들의 성장률을 비교하면, 비오순절 교단은 감소한 반면 오순절 교단 교회는 비약적인 성장률을 기록했으며, 또 교단에 속하지 않은 독립교회도 오순절운동에 적극 동참하는 교회들이 성장하고 있고, 미국의 독립교회의 75%가 오순절운동에 참여한 교회에 속한다. 또한 1996년 현재 전체 기독교 인구 19억 5천만여 명 가운데 24.5%인 4억7천9백만 명이 오순절 교단 교인들인데, 2000년이 되면 전체의 26%인 5억5천4백만 명으로 증가할 것으로 추산하고, 2025년에는 약 30억 명의 전체 기독교인구 중 37%인 11억4천만 명으로 증가할 것으로 추산된다.
이와 같이 오순절주의자들은 오순절 운동이 소위 교회성장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고 자랑하는데, 사실 급격한 교회성장은 오순절운동이 미혹하는 영들에 사로잡힌 마귀들의 거처가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성경에 나오는 비정상적인 성장에 대한 경고의 말씀은 겨자씨 비유이다(마 13:31,32). 겨자씨는 씨 중에서 가장 작지만 심으면 푸성귀 중에서 가장 커지고 나무가 되면 공중의 새들이 깃들게 된다. 이는 마귀들의 거처가 된다는 뜻이다. 비정상적인 성장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미혹하는 영과 마귀들의 교리를 따른 그릇된 열매인 것이다. 또한 가루 서 말에 넣어 전체를 부풀게 한 누룩의 비유 역시 작지만 전체를 부패시키는 것인데, 역시 비성경적인 거짓 교리가 크게 확산되는 것을 뜻한다(마 13:33). 특히 지금까지 살펴본 오순절운동의 역사를 통해서 확인된 바는 오순절운동의 특징이 성령침례의 증거로 방언을 주장하는 것인데, 바로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미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들”이다(딤전 4:1).
2. 오순절 운동의 거짓 교리들 – 미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들
1) 중생과 성령침례에 대한 무지
오순절 운동의 핵심적인 문제는 성령침례와 방언이다. 기하성의 교리는 다음과 같다. “8. 성령세례의 증거…믿는 자들에게 임하는 성령세례는 하나님의 영이 주시는 대로 다른 방언(dialect)으로 말하는 최초의 외적 표적(the initial physical sign)에 의하여 증거된다(행 2:4). 이 경우의 방언을 말하는 것은 그 본질에 있어서 은사로서의 방언과 동일하다(고전 12:4-10,28). 그러나 그 목적과 용도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다”(기하성 신조). “오순절 신학은 죄인이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몸에 들어오는 구원의 세례와 성령세례를 구별한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교리가 아니라 초대 교회가 생생하게 체험한 것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이 운동의 신학적 기초는 성령세례가 중생의 체험 이후에 나타나는 것이며 중생과 구별되는 것이라는 사실에 있다(행 2:1-4; 8:18; 9:17; 10:44; 19:2-7).(하나님의 성회 교회사). “순복음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성령세례의 필요성을 인정하며 그것은 중생한 자의 2차적인 영적 체험임을 믿습니다…성령세례는 예수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이 말은 우리가 믿을 때에 자동적으로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고 믿는 자는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성도들과 교회가 성공적인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생의 체험과 더불어 성령세례의 체험을 해야 합니다”(조용기 목사)
이와 같이 오순절 운동은 거듭날 때 받는 성령침례를 “거듭남”(중생) 이후에 경험하는 것으로 주장하는 오류를 범한다. 기하성 신조나, 조 목사의 책 <오중복음, 삼중축복>에서 고린도전서 12:13과 에베소서 4:4-6을 근거 구절로 제시하지 못했다. 이 구절을 언급하지 않고는 성령 침례를 말할 수 없는데도 핵심 구절을 빗겨간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한 성령에 의하여 우리 모두가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았으며 또 모두가 한 성령 안으로 마시게 되었느니라”(고전 12:13). 여기서 한 몸은 무엇을 말씀하는가? 에베소서 4:4-6은 한 성령과 한 몸을 말씀하시는데, 그 한 몸은 “그리스도의 몸”이다(고전 12장). 이 몸은 유기체로서의 교회이며, 우리들은 성령을 통해서 태어나, 즉 거듭나서 그 몸의 지체가 된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성령침례”이다. 그러므로 “중생” 즉 “다시 태어남”과 동시에 자동적으로 “성령침례”를 받는 것이지 별개의 동떨어진 경험이 아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는 성령이 임한 것은 주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고 약속해 주신 것(행1:5)의 성취이다. 오순절은 “그리스도의 몸”이 시작된 역사적 사건이며, 이후에 누구든지 성령으로 거듭나서 그 성령에 의해 중생할 때 이 몸 안으로 들어가는 성령침례를 받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행전 2:47에서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들을 그 교회에 날마다 더해 주시더라.”는 말씀은 외적으로 예루살렘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모이는 모임에 사람들이 더해지는 것이었으나 실제 말씀하는 것은 성령침례를 통해서 이제 막 시작된 유기체로서의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뜻이다(행 5:14; 11:24 참조). 그러므로 조 목사를 비롯한 오순절주의자들이 성령침례를 거듭남(중생) 이후 별개의 체험으로 주장하여 사람들을 모으는 것은 결코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미혹하는 영의 역사이다.
2) 사도행전 2,8,10,19장의 방언의 의미
(1) 사도행전 2장의 “예루살렘”에서(행 1:8, 단 9:7) 성령님께서 사도들과 함께한 성도들에게 내주하시는 형태로 임하심으로써 유기체인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은(고전 12:13, 행 1:4,5) “선택 받은 세대”(벧전 2:9)가 시작되었다. 즉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오순절은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초유의 역사였으며,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이루어진 성령침례는 오감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시작된 이 초유의 역사를 알려 주시기 위해 사람들이 누구나 알 수 있는 분명한 표적(sign)을 보여 주셨는데, 그것이 사도들을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어 “방언”을 하도록 하신 것이다.
사도행전 2:4은 “그들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다른 방언들로 말하기 시작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말씀을 통해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성령침례의 증거가 방언이 아니라, 성령침례를 받은 사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다른 방언들로 말한 것이다(행2:4). 성령침례와 성령충만은 다르다.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의 목적은 사도들은 물론, 오순절에 모인 유대인들, 즉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이(고전 1:22) “보고 믿을 수 있는 표적”으로 주신 것이다. 성령침례를 받은 사도들과 성도들 중에서, 즉 120명 중에서 “오직 열두 사도들만” “성령으로 충만하여” 표적으로서의 방언을 했다(1:4,5,11; 2:4,7,11,14).
성령침례를 받은 사도들과 성도들 중에서, 즉 120명 중에서 “오직 열두 사도들만” “성령으로 충만하여” 표적으로서의 방언을 했다. “또 사도들과 함께 모이셨을 때에 그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려야 한다고 명령하셨으니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너희가 내게서 들은 바니라. 요한은 정녕 물로 침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여러 날이 지나지 않아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고 하시더라… 말하기를 “너희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너희는 하늘을 쳐다보고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하늘로 들려 올라가신 바로 이 예수는 너희가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하더라…그들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께서 그들에게 발설하게 하신 대로 다른 방언들로 말하기 시작하더라…그러자 그들이 모두 놀라고 이상히 여겨 서로 말하기를 “보라,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크레테인과 아라비아인들인 우리가 그들이 우리의 언어로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말하는 것을 듣고 있도다.” 하니… 그때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함께 일어서서 목소리를 높여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유대 사람들과 예루살렘에 거하는 모든 사람아, 이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겠으니 내 말에 경청하라.”(행 1:4,5,11; 2:4,7,11,14)
즉 방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사도들이 하나님의 승인을 받은 사역자들임을 유대인들에게 증거해 주기 위한 목적에서 주어진 표적이다. 이것은 방언이 성령침례의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보여 주는 표적임을 뜻한다.
오순절 운동을 하는 오순절주의자들은 사도행전 2:4의 “성령으로 충만하여”라는 말씀을 “성령침례”로 오해하고 있다. 따라서 “성령 세례의 증거는 다양하나 그 대표적인 외적 표현으로는 ‘방언’을 들 수 있다.”고 하는 조목사를 비롯한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은 거짓 교리인 것이다. 한편 사도행전 곳곳의 구절들에서 “그때 베드로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들에게 말하기를 “백성의 관원들과 이스라엘의 장로들이여…그들이 기도를 마치자 그들이 함께 모여 있는 곳이 진동하더니 그들이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여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더라.” (4:8,31) “그러나 그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늘을 주시하여 우러러보니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신 것을 보고”(7:55) “그때 (바울이라고도 하는) 사울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말하기를 “오 모든 궤계와 악행으로 가득 찬 너 마귀의 자식아, 너 모든 의의 원수야, 네가 주의 의로운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일을 그치지 못하겠느냐?”(13:9,10)라고 하시는 말씀처럼 “성령으로 충만해도” 방언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성령 충만한 삶은…방언 기도가 넘치는 삶”(행 2:4)…으로 나타난다.”는 조목사의 오중복음 역시 거짓 교리임을 확인해 주는 증거이다.
더욱이 독자들이 꼭 알아야 할 사실은 성경에서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명령(엡 5:18)인 반면, 방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도행전 2장에서 어떤 사람도 성령침례나 방언을 받기 위해 기도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2) 사도행전 8장은 “사마리아”에서 성령의 역사가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능력을 받으리니 그러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게 증인이 되리라.”고 하시니라.”(행 1:8) “오 주여, 의는 주께 돌아가도 얼굴의 수치는 오늘과 같이 우리에게 돌아오나니, 즉 유다 사람들에게와 예루살렘의 거민들에게와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는 이스라엘 모두에게, 즉 주를 거슬러 범죄한 그들의 허물로 인하여 주께서 쫓아내신 모든 나라에 있는 자들에게니이다.”(단 9:7) 사마리아 사람들은 빌립이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한 일들을 전파하는 것을 믿었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다. 그런데 사도행전 2:38처럼 “성령의 선물”을 아직 아무도 받지는 못했다. “그들이 내려가서 사마리아인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하니 (이는 성령께서 아직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내리신 적이 없고 다만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만 받았음이라.)”(행 8:15,16) 그 이유는 사도행전 2장과 8장 사이에 사람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은 교리의 교차로를 달리는 과도기적인 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오순절주의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 13:8)는 말씀을 자주 인용하는 것은 잘못된 적용이다. 사도행전 7장에서 이스라엘은 스테판을 죽임으로써 십자가 이후에 그들에게 한 번 더 주어졌던 기회를 놓쳤다. 결국 7장 이후로는 예루살렘에서 더 이상의 기적들과 표적들은 나타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사마리아에서는 예루살렘과는 다소 다른 방식으로 성령의 역사가 이루어진다. 즉 사도들의 안수를 통해서 성령의 선물을 받게 하셨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과 10장에서는 안수 없이 성령께서 내주하신 사실을 보여 주셨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역사하시는 성령님은 동일하시지만 역사 방법은 각기 다르다.
그런데 오순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변화된 다루심을 알지 못한 채 사도행전 8장으로 성령침례와 방언을 설명하면서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 사마리아인들은 순수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혼혈민족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차별을 당하였으며 (예: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그리스도의 대화를 참조) 구원은 유대인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사도들로부터 안수를 받아야 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 현상은 한번만 있었던 것으로 이 전환기 시점 후에는 사마리아인들이 성령을 받기 위하여 사도들로부터 안수를 받을 필요가 없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음과 동시에 성령을 받는 것이다. 또 오순절 은사주의자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사마리아인들은 성령을 받을 때 방언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점진적인 계시를 이해하지 못할 때 성령론을 알 수도 없고 오히려 수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는 중이다.
(3) 사도행전 10장은 “욥파”에서의 성령의 역사를 보여 준다. 그런데 2장이나 8장은 또 다른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먼저 알아야 할 사실은 사도행전 2장의 대상은 예루살렘에 살거나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었으며, 8장의 대상은 “사마리아인들”이었는데, 여기 10장은 대상이 우리와 같은 “이방인들”이라는 점이다. 10장에서는 베드로가 말씀을 전파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그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셨다. “베드로가 아직 이런 말을 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그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시더라.”(44절). 이것은 사도행전 2:1,2의 성령침례이다. 곧 바울이 말한 한 성령에 의해 한 몸 안으로 들어가는 한 침례로서 성령으로 거듭난 것(중생한 것)을 뜻한다. 이들은 이방인들로 단지 말씀을 들을 때 믿는 순간 성령께서 그들 모두에게 임하여 내주하신 것을 보여 준다. “‘이 사람들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았으니 어느 누가 물로 침례받는 것을 금하리요?’ 하며”(47절). 그런데 이들 모두가 그 순간에 방언을 했다. 어떤 이유에서인가?
“베드로와 함께 온 모든 할례받은 믿는 자들”(45절)은 “성령의 선물”을 이방인들에게도 부어 주심을 보고 놀랐다. “그러므로 베드로와 함께 온 모든 할례받은 믿는 자들이 성령의 선물을 이방인들에게도 부어 주심을 보고 놀라니”(45절). 도대체 베드로가 왜 놀라야 하겠는가? 그는 이미 2장과 8장에서 믿는 자들이 성령의 선물을 받도록 하는데 쓰임 받았는데 놀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베드로는 2장에서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침례를 받음으로” 성령의 선물을 받는 것을 보았고, 8장에서는 사마리아인들이 “믿고 침례를 받은 후에 안수했을 때” 성령의 선물을 받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물침례나 안수도 없이 성령을 받고, 그 증거로 방언을 했다. 이것은 베드로는 물론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도 성령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며, 그들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한 표적이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 선물에 관한 한 유대인과 이방인(“‘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다면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행 11:17) 사이에 차별이 없음을 증명해 주시고, 이방인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바뀐 것을 불신하는 유대인들의 태도를 바로잡기 위한 표적으로 방언을 주신 것이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사도행전 11,15장에서 증언했다. 하나님께서는 시기와 대상에 따라서 다루시는 방법을 다르게 하신다는 사실을 유념하기 바란다. 10장에서 보여진 이방인의 방언 역시 유대인을 위한 표적이었다. 그러나 조용기 목사와 오순절주의자들이 고린도전서 12-14장의 방언을 은사로서 주장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이는 사도행전 10장에서 믿은 모든 이방인들의 방언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12-14장의 방언 역시 표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언들은 믿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표적이지만 예언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믿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전 14:22).
(4) 사도행전 19장은 “에베소”에서 바울의 사역을 통해 기록된 성령의 역사이다. 19장의 대상은 요한의 회개의 침례를 받은 “유대인”이었다(1,3,5,7절). 바울은 이들에게 믿은 “후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그들은 사도행전 8장의 사마리아인들처럼 성령이 있는 것조차 모르며, 단지 요한의 침례만을 받은 상태이다.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하고 믿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그들이 믿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는다. 방법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한 10장과 다르게 2장과 8장에서처럼 믿고 침례받은 후에, 즉 중생의 성령침례를 받은 후에 유대인인 그들에게 눈으로 보아 알 수 있는 표적으로서 안수하여 방언을 하게 된다. 따라서 사도행전 19장의 방언 역시 그 목적이 뚜렷하게 유대인을 위한 표적이었다. 정리해 보면 방언이 나타난 사도행전 2,10,19장은 모두 유대인들을 믿게 하기 위한 표적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성령침례와 성령충만에 대한 무지
죄인이 구원받을 때 성령께서는 그의 죽었던 영을 살리시는데 이것이 “거듭남”(중생)이며, 동시에 성령께서 그를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넣어 주시는데 이것이 “성령침례”이고, 성령께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영을 가득 채우셔서 그분의 능력과 지식과 지혜로 그를 인도하시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시는 영적인 상태가 “성령충만”이다. 중생과 성령침례는 단회적으로 일어나는 역사이지만, 성령충만은 반복적으로 계속되어야 하는 역사이다. 또한 성령충만은 늘 같은 방식이 아닌 다양한 방법으로 역사할 수 있다.
앞서 보았던 것처럼 사도행전 2:4에서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방언을 하도록 역사하셨으나(“그들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께서 그들에게 발설하게 하신 대로 다른 방언들로 말하기 시작하더라.”), “그때 베드로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들에게 말하기를 “백성의 관원들과 이스라엘의 장로들이여”(행 4:8), “그들이 기도를 마치자 그들이 함께 모여 있는 곳이 진동하더니 그들이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여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더라.”(행 4:31), “그러나 그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늘을 주시하여 우러러보니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신 것을 보고”(7:55), “아나니아가 길을 떠나서 그 집에 들어가 그에게 안수하며 말하기를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던 길에서 네게 나타나신 예수께서 나를 보내셨으니 이는 너로 보게 하시며 성령으로 충만케 하려 하심이라.’고 하니”(9:17), “그때 (바울이라고도 하는) 사울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13:9) 등에서는 “성령으로 충만해도” 방언을 하지 않도록 역사하셨다. 그런데 오순절주의자들은 중생과 성령침례, 성령충만을 혼동하여 지난 100년 동안 미혹의 영에 사로잡혀 왔고, 마귀들의 교리들을 가르쳐 왔던 것이다.
결론
오순절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편견과 오류는 성경에서 ‘성령’이라는 말이 언급되는 곳마다 그것을 성령운동의 근거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오늘날 오순절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성경 구절들은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모두 “성령운동”이라고 이름 붙여 자신들의 거짓 교리와 실행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는 것이다. 이것은 칼빈주의자들이 성경에서 선택이라는 말만 나오면, 또 예정이라는 말만 나오면 그것을 모두 무조건적 선택이라는 칼빈의 비성경적인 예정론의 근거로 주장하는 것과 같은 억지 주장과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오순절 운동과 조목사의 오중복음 삼중축복은 육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빵을 얻고자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의 욕구에 부합하는 것이며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시어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기적들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 요6:26) 또 무지한 사람들이 시몬에게 미혹되어 그를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으로 알고 있던 것과 같다(행8장). 또한 마태복음 13장에서 겨자씨를 뿌렸는데 자라면 푸성귀 중에서 가장 커지고, 나무가 되면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드는 비유와 같다. 겨자씨는 푸성귀인데도 “비정상적으로 성장하여”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 즉 마귀들이 와서 깃드는 보금자리가 된 것이다. “씨를 뿌렸는데,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지니,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누구든지 왕국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할 때에는 악한 자가 와서 그 사람의 마음에 뿌려 놓은 것을 빼앗아 가나니, 길가에 씨가 뿌려졌다는 것은 곧 이 사람을 두고 말하는 것이요”(마 13:4,19), “말씀이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니, 즉 말씀을 듣자, 곧 사탄이 와서 그들의 마음속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가는 자들이요”(막 4:15)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후임자로 선정된 이영훈 목사는 “오순절운동이란 기독교 신앙과 성경에 근거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삼위이신 성령님의 절대적 주권에 의한 영적 운동이다.”라고 말하지만, 영적 분별력이 있는 사람들과 들을 귀 있는 사람들은 전세계가 놀랄만한 “비정상적인 성장”을 자랑하는 오순절운동 100년의 역사가 미혹의 영에 사로잡힌 운동임을 깨닫고, 그들로부터 성별하며, 또 그 마귀들의 교리들을 책망하고 바로잡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첫댓글 글이 좀 길지만,,
이 글에 의하면 조용기 목사님은 완전 이단이며 마귀의 영과 교리를 전하는 자로 보입니다..
이런 글을 통해서도 배울 것이 있기에, 올려보았는데요..
판단은 각자에게 맡깁니다..
이단정죄만 할 것이 아니라,, 중보기도해야 하겠어요..^^
권위에 순복하는 성도들이 없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