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 대장정(大長征)의 끝을 찾아서
1.
1920년 7월 코민테른 2차대회(레닌그라드에서 개최-41개국 200여명 참석)가 끝난 뒤 러시아의 레닌(Vladimir Il'ich Lenin 1870-1924)은 중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생각을 가졌다고 하는 진독수(陳獨秀)를 선택해 중국 공산당을 조직케 하고, 손문(孫文 1866-1925)의 국민당을 이용하여 통일전선을 펴게 하였다.
중국 공산당(共産黨)은 1921년 상해(上海)에서 결성되었고, 1927년에는 국민당 세력에 의한 공산당(共産黨) 대숙청이 벌어졌으며, 농촌지역의 게릴라 사회주의(社會主義)와 항일투쟁 시대가 이어졌다.
중국의 노동자와 마르크스-레닌주의가 결합된 데는 5.4운동의 힘이 가장 컸을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5.4운동은 1919년에 일어나 계속 이어져 중국 곳곳에 작은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 집단을 탄생시켰고 마침내 1921년7월1일 중국 전역의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들이 대표 12명을 파견해 상해(上海)에서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 제1차 대표회의를 열게 되면서 한족(漢族)의 공산주의(共産主義)운동이 시작되었다.
레닌의 비서 마링(Hendricus Maring 1883-1942. 네덜란드)은 손문을 설득하여, 1923년 당시 소련의 특별전권대사였던 아돌프 요페와의 손문-요페공동선언을 이끌어 내고, 이른바 제1차 국공합작이 성공하여 1923년부터 일시적인 제휴를 1927년까지 지속시키게 된다.
그러나 1926년 국민당 제2차 대표대회에서 손문(孫文)의 뒤를 이어 실권을 장악한 장개석(蔣介石)은 그동안 세력확장에 온힘을 써 온 공산당(共産黨)을 견제하기로 하고, 국민혁명군(國民革命軍)총사령관이 되자 북벌군(北伐軍) 동원령을 내렸다.
다시 고찰해 보면 손문(孫文)은 1923년 소련과 제휴하여 공산당과의 협력관계 즉 국공합작(國共合作)을 민족운동의 기둥으로 삼았던 것인데, 손문이 사망한 1925년 상해(上海)에서 일어난 5.30사건(영국경찰이 중국인 시위대에 발포하여 13명이 사망한 사건)으로 시작된 반제국주의(反帝國主義)운동 고취를 배경으로 다음해에 장개석(1887-1975)의 지휘하에 소련의 적군(赤軍)을 본보기로 삼은 국민혁명군(國民革命軍)이 각지에 분립한 군벌(軍閥)을 무너뜨리며 북상하여 중국(中國)의 통일을 실현하는 북벌(北伐 1926-1928)을 추진했던 것이다.
장개석(蔣介石)은 북벌(北伐)직전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으로 공산세력이 확산되자 상해(上海) 쿠테타를 일으켜 공산당(共産黨)을 탄압하게 되는데 이로부터 국민당(國民黨)과 공산당(共産黨)의 군사대립이 시작되었다.
1928년 동북군벌(東北軍閥)인 장작림(張作霖)이 베이징에서 추방(追放)되어 중국 국민당에 의한 통일(統一)이 불완전하게나마 이루어지게 되었다.
공산당(共産黨)은 1931년 강서성(江西省) 서금(瑞金)에서 중화(中華)소비에트공화국(1931-1937)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공산당(共産黨)의 성장에 불안을 느낀 장개석(蔣介石)은 1933년 공산당 정부에 대한 5차 포위공격을 실시하게 되는데 이때 50만병력과 비행기 200대를 동원하였다고 한다.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정면대결을 펼친 공산당(共産黨)의 잘못된 전술로 인해 거의 모든 전선에서 공산당을 패배하게 되었고, 결국 1934년7월 강서(江西) 소비에트를 포기하고 중국 공산당사(共産黨史)에 말하는 대장정(大長征)을 결행하게 되었다.
이때 일어난 중국공산당의 구명도생(苟命徒生)과 관련하여 위대한 독립투사 장준하(張俊河)선생은 그의 책 <돌베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산군(共産軍)은 2만5천리를 쫓기어 대서천(大西遷)을 하게 되었다.
2.
장개석(蔣介石) 국부군(國府軍)의 추격은 30만의 공산군을 1만으로 줄였다. 최후로 강서성(江西省)에서 연안(延安)으로 쫓길때에는 식량과 탄약의 결핍과 질병으로 거의 재기불능의 말로를 걷고 있었다.
만 1년동안 18개의 대산령(大山嶺)을 넘고 24개의 하류(河流)를 건너 13성(省)을 통과한 퇴로는, 30대1의 생존자를 산속으로 안내하기 위해 있었을 뿐이었다.
공산당(共産黨)은 생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국민정부로 하여금 일본과의 전쟁에만 몰두하게 만드는 것이 최후의 토벌(討伐)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공산당은 동북군(東北軍)의 장학량(張學良)을 꾀어 장개석을 감금하는 서안사변(西安事變 1936년12월)을 일으키게 하였다. 결국 모택동(毛澤東)의 의도대로 장개석은 북진(北進)을 중지하고 목숨만을 간신히 살려 돌아오게 되었다.
서안사변(西安事變)에 앞서 중국 공산당은 1934년1월11일 귀주성(貴州省) 준의(遵義)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이른바 모택동 노선을 확립함과 동시에 준의(遵義)회의에서 중공군 행군의 목표를 설정하게 되는데화북(華北)으로 가서 항일투쟁의 근거지를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8월1일에 이른바 8.1선언을 발표하여 항일구국통일전선을 제창하였고 약 2개월 후 공산군(共産軍)이 섬서성(陝西省)에 도착하여 새로운 기지를 수립함으로써 장정(長征)을 끝을 맺었는데 그 곳이 현 대륙 섬서성 연안(延安)이라고 중국 공산당은 간교한 가짜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후 조선이 빠져나가고 일제(日帝)가 태평양전쟁에서 패한 후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되어버린 거대한 대륙 전체의 패권을 놓고 벌인 장개석(蔣介石)의 국민당과 공산당간 마지막 전투의 격전지였던 현 만주(滿洲)의 장춘(長春)전투에서 가녀린 가쁜 숨을 몰아쉬며 멸망을 기약했던 중국 공산당(共産黨)은 북한 김일성의 막대한 지원에 힘입어 기사회생하게 되면서 결국 장개석(蔣介石)을 무너뜨리고 대륙 전체를 어부지리(漁父之利)로 차지하는 행운(?)을 거머쥐게 되었다.
지금도 중국공산당이 북한 수뇌부에 대해 백골난망(白骨難忘)이라며 머리를조아리는 것은 1949년 당시 북한의 지원이 없었다면 지금의 중국공산당은 존재할수 없었음을 그들 자신이 너무나도 명백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은 현 지명이동된 베이징의 천안문(天安門) 광장에서 100만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함으로써 중공(中共)이라는 역사의 실체를 수립하게 되었다.
3.
중국 공산당(共産黨)의 부끄러운 대장정(大長征)과 관련해 펄벅여사(Pearl S. Buck, 1892-1973)는 그의 책 <살아있는 갈대>에서 그 장정(長征)의 끝이 어디였는지 우리에게 정확히 알려주고 있다. 현 연안(延安)은 조선의 황해도(黃海道)지역인데 어찌 한족(漢族)의 모택동과 공산당이 올 수 있단 말인가?
홍군(紅軍)은 굶주림과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용감하게 싸웠지만, 압도적으로 수가 많은 국민당 군대를 당해낼 수 없었다. 농민들이 음식과 옷가지, 신발 등을 지원하고 나섰을 때에야 그들은 계속되는 패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애당초 홍군의 큰 실수는 처음부터 적과 맞붙어 싸운 것이었다. 정면으로 싸웠으니 패배가 있을 뿐이었다. 대장정(大長征)도 끝이 나 이제 중국 공산당은 북서쪽 오지에 자리를 잡았고, 국민당은 남경(南京)에 있었다.
펄벅이 고발한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의 공격을 피해 도망가 둥지를 튼 곳은 바로 현 타림분지 아래쪽 자달목 분지(紫達木盆地-차이다무 분지)였던 것이다.
이를 그림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2022.10.01. 松溪
첫댓글 모택동이 기사회생 할 수 있었던 것이 관동군의 무기를 소련이 지원해줘서 모택동이 장개석을 이길 수 있었다고 알려졌으나 실상은 김일성이 지원해서 이겼군요.
한때 중국혁명사를 거의 다 읽었는데 송계님의 상기 글로 다시한번 대장정을 알게 됐습니다. 대장정의 위치가 바로 이거군요.
장개석도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군수지원을 받았고, 또한 당시 미군 50만명이 인도차이나로부터 중국대륙에 이르기까지 주둔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강력한 장개석군에 의해 장춘으로 몰려 아사지경에서 북한 김일성의 트럭지원과 의약품지원 그리고 중국공산당원의 우회침투라는 지원을 얻고 모택동은 기사회생하게 되었습니다. 역사의 숨겨진 페이지를 열면 변조된 역사의 본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듯 합니다,
고맙습니다
백성의 맘을 얻지 못한 장개석이 권력만 가지고는 대륙에서 승리를 못 하고 모택동에게 당하는 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