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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말하고 나하고
나는 자랑스런 마천 섬말 출신 농부 짚신의 아들이다 14살에 진주 하씨 하석임 어머님은 심심산골 섬말로 시집 오셨다 17살에 나를 임신 하신 채로
일본에 먼저 건너가신 남편 나의 아버지 오문달님을 찾아 가셨다
동경에서 멀지 않는 눈이 많이 내리는 다까야마에서 나를 낳아 주셨다
유치원 다닌 추억이 생각나고 우리집에 온 오경남 고모가 눈비탈에 나를
썰매 태워준 기억도 떠 오른다 내가 일본에서 태어났다는 기쁜 소식을 들으신
함안 조씨 우리 할머니는 장손자 낳았다고 섬말 오문철 숙부집 싸립문 위에
겅긋줄에 빨간 고추와 숯을 꽂아 놓고 장손자 태어난 소식을 섬말동네에
알렸다 작은며느리<박복순>가 애 뱄다는 말도 없었는데 언제 아들 손자 봤느냐는 동네사람 말도 없지 않았다 나중에 일본에서 태어난 장손자임을 알게 되고 그 장손자의 미래를 비는 정화수 한사발에 집 앞의 샘물을 깨끗이 퍼 다 치우고 난 뒤에 그 샘물안도 맑게 씻은 샘물을 길어와 담아 두고 49일간 7주를 정성 드려 기도를 쏟아 주신 할머니 사랑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지금 섬말 곰달래산 소정의 흙이불 속에 주무시고 계신다
당시 교회가 없었으니까 막연히 하늘님이나 삼시랑에게 장손자 나의 장래를 빌어 주셨을 것이다 그리고 나주 오씨 족보항렬 뿌리 근자<根>에 관계 없이 낫놓고 기억자도 모르시는 할머니는 내 이름을 동춘東春으로 지어 주시고 오문철 숙부를 시켜 마천면사무소에 가서 민적에 올리게 했다 1937년 정축년 음력 4월 12일에 태어 났고 양력으로는 세종대왕의 5월 15일 탄생일 있는
계절의 여왕 5월에 나의 생일도 들어 있다 한글 만드신 세종임금과 같은 5월에 내 생일도 있어 늘 기쁨이 넘친다 싱그런 5월에 생일 맞는 나의 이름 할머니가 지어 주신 오동춘 나의 이름 시적 리듬이 곱게 흐른다 모르긴 해도 우리
할머니도 시정이 풍부하여 장손자 내 이름을 시인이 되도록 시적으로 지어
주신 것이다
금강산이 아름다워 금강산 봉래산 풍악산 개골산 네 이름이 계절 따라 있듯이 내 이름도 고 홍웅선<1918-1998> 연세대 교수<뒤에 덕성여대 총장 지냄> 고 장수철<1916-1993> 아동문학가 이 두분이 나를 보면 내 이름을 금강산처럼
계절 따라 부르면 참 아름답겠다고 유난히 내 이름에 관심이 많고 송골 시인을 사랑해 주셨다 오동춘 오동하 오동추,오동동 이렇게 계절 따라 달리 부르면
오동춘 시인 이름이 더욱 아름다울 것이라 했다 고마운 말씀이었다
비록 교회 출석은 없었으나 박꽃처럼 순박하고 마음씨 어질고 인자한 할머니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장손자를 위해 빌어 주신 간절한 할머니 기도를 다 응답해 주신 것으로 생각된다 극진한 할머니 사랑 영원히 잊을 수가 없을 것
이다 잊어버리는 불효가 없도록 늘 조심해 살아가야 하겠다
나의 출생을 누구보다 기뻐하고 이름도 예쁘게 뜻깊게 지어 주신
할머니 병환이 위독하다는 긴급 국제전보를 오문철 동생으로부터 받은
나의 아버지는 가족을 함께 대동하고 1944년 여름 선조 뼈가 묻힌
마천 고향 섬말로 왔다 할머니의 뇌졸중 병환은 자식들 정성으로 곧
회복되었다 섬말 입구 송알소 냇가에 갔다가 길가 숙부네 논에 피어 있는
자주색꽃이 너무 예뻐보여 숙부댁에 사는 고모에게 무슨 꽃이냐 물어보니
감자꽃이라 했다 나는 아름다운 식물 감자꽃에 반했던 것이다
나는 마천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소나무반 대나무반으로 나누어 오전 오후로
나누어 다녔다 나와 한반은 박병천 박찬시가 있었다 후배로 강명호도 있었다선배 학년은 강정수 강재주 오대근 오동선 박병기 강길순 등이 있었다
할머니는 십리길 초등하교 1학년을 데리러 고모 앞세워 학교까지 오시어
하교하는 나를 고모 등에 엎히어 섬말로 오시면서 실덕 입구 묵집에서
도토리묵도 사 주셨다 할머니 사랑이 너무도 따뜻했다 오갑선 할아버지는
장손자 짚신을 삼을 섞어 가며 곱게 삼아 주셨다 그 짚신을 신고 땅벌
마천초등학교에 다녔다 신작로 길에 짚공을 차며 다녔다 게바우소에 멱을
감고 가도 학교 수업은 늦지 않았다 1학년 겨울 추워서 혼자 가는 길이
두려워서 나는 본의 아닌 결석을 했다 이튿날 결석 사유를 묻던 야나데에키
체격 건장한 담임 선생이 곤나야로 하면서 유도식으로 교실 바닥에 나를
내던졌다 무섭고 정신이 아찔했다 넘어져 그 일본 선생을 바라보다 가만히
내자리로 와 앉았다 교실바닥이 목조였기에 타박상은 입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1945년 여름에 농사 지은 쌀을 가지고 일본 시모노세키로 다시 가려했으나
감격의 광복을 맞이하여 우리집은 일본에 판자집을 그냥 둔채 섬말에 머물러
살게 된 것이다 일본 살던 아버지 동생 오문길 오문환 두 형제도 오문철 숙부댁에 합류했다 4형제와 고모 5남매가 부모님 모시고 한집에 살게 되었다 차차
분가해 나가고 우리집은 동산 아래 새집을 짓고 살았다 1936년 병자년 수파로
섬말 동네가 물에 떠내려 가서 그 물을 피해서 마을 위쪽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동산 밤나무 단지가 있는 바로 앞쪽에 다섯집이 모여 살았다 우리집을 중심으로 옆에는 마을 이장과 뒤에 마천 민선면장을 지낸 강화춘씨댁과 그 옆에
4촌 형제간인 강재춘씨집이 나란히 있었다 우리집 앞에는 강판조 친구집이 있고 우리집 뒤에는 신주식 후배집이 있었다 우리집에서 더 올라가 지리산교회에 이르면 거기 우리 고모할머니집이 있었다 오갑선 나의 할아버지 누이동생이 강씨댁에 시집 간 것이다 그 할머니는 강재문 강두금 강두임 3남매를 둔 것으로 알고 있다 강재문 아저씨는 징용으로 일제에 끌려가 끝내 소식이 없었다 강두금 아줌마는 고종 4촌 외4촌간인 오경남 나의 고모와 처녀시절에 섬말
뒷산인 곰달래산에 처녀 둘이서 나물 뜯으러 갈 때 초등학교 1학년 나를 데리고 갔다 내가 어려도 남자인지라 든든하게 생각한 것 같다 돌너덜 속을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나는 혼자 머루 다래 익는 모습 바라 보며 놀았다 그런데
두 처녀 노래 소리 그때는 몰랐으나 어른되어 생각하니 분노가 불쫓 이는 노래였다 “산차지 물차지 다 총독부 차진데-”로 시작되는 민요였다 조선민족 재산을 수탈하고 압박과 설움을 주는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우리의 산과 물을 다
차지했다는 노래가 일제에 대한 적개심을 높혀 주었다 1945년 8월 15일 원자탄 두알의 하늘 심판 받은 일본이 망하고 우리가 35년간의 일본 압제에서 풀려나던 그 때 마천초등하교 운동장에서도 대한독립만세소리가 높았다 그날 비로소 우리 태극기 얼굴을 처음 보았다 마천지서 주임 일본인 경찰 부인이
자기 관사 다다미방에서 전신에 똥물세례를 받고 비참하게 머리 푼채 앉아
있던 모습 아직도 내 눈에 남아 있다 그간 일본 순사에게 인권유린 당한
마천사람들 분노가 도망간 일본인 지서주임 대신 그 부인에게 똥물세례로
오래 쌓인 일제 만행에 화풀이를 한 것이다 우리는 일제의 마지막 조선총독
9대 아베 노부유키가 조선은 해방 되어 좋아하지만 우리는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지교육을 시켜놓았다 조선민족은 다시 갈등을 일으키고 민족 분열이 될 것이다 반드시 일본은 조선에 다시 온다는 소름 끼치는 말을 남기고 일본
섬나라로 쫓겨 갔다
지리산 한줄기인 창암산窓岩山 923미터 정상에는 비녀 바위가 우뚝 서 있다 바로 그 아래 상투바위가 있고 그 옆에 7대 장군대좌설의 오씨명당 묘자리에 나의 6대조 할아버지 오양원 조부가 주무신다 가을 묘사 지낼 때 어른들 따라가 절을 한 축억이 있다 갑부로 살던 오양원씨댁 사랑방에 5년을 묵고 가는 단지斷指스님이 보은 차원에서 잡아준 오양원 어른 묘자리였던 것이다 6대조 선조가 명당에 묻혀 있는 마천의 창암산은 마천의 수문장이기도 하고 지리산 사랑을 직접 쏟아 주는 마천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이 창암산에 날마다 뜨는 해를 바라보는 섬말에 살며 광복 직후 지리산 공비 피해가 컸던 마천의 슬픔이 아직 남아 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 주둔 14연대가 제주 4.3폭동 진압
출동 정부 명령을 거부하고 지창수 선임하사관 지휘 아래 반란 사건을 일으켜여수 순천 일대를 장악했으나 정부군에 밀리어 거의 전부가 지리산으로 들어가 거점을 삼았다 이 여수 순천 반란사건이 마천에 미친 것은 김지회 홍순석이 총 지휘하는 반란군이 지리산을 넘어와 삼정리 양정부락을 통하여 국군복장에 엠원 소총에 태극기를 달고 “양양한 앞길을 바라볼 때에”군가까지 부르며 마천지서를 습격했다 순경 3.4명 함양 거창 연초조합직원 6명이 사살되었다 당시 마천면 면서기였던 강청 허문오님은 내가 서울 숙부댁에서 용문고교
다닌 학생일 때 우리 숙부댁에 친구 방문차 오신 일이 있다 나와 돈암동 삼선교 근처 목욕탕에 갔을 때 그의 엉덩이에 큰 흉터를 보고 연유를 내가 물었다
마천지서가 공비 습격 당하던 날 면서기 완장을 두룬채 땅벌 조그만 개울 돌다리 밑에 쪼그리고 앉아 있을 때 공비 엠원<M1>소총 8발을 다 맞은 총자국이라 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은 것이 참 다행이라 했다 남원시 인월면 부면장을 끝으로 그 때 공직에서 물러나 쉬고 계셨다
1948년 12월 16일 3연대 15연대 국군병력이 섬말 뒷산 곰달래산<일명 응달산>의 공비토벌을 하기 위하여 민보단 대원들 길잡이 삼고 공격하러 올라 갔다 공비들은 미리 전투준비를 해 두고 산을 오른 국군을 유효사거리 안에서 중무기로 휘둘러 사격했다 선재공격 당한 국군은 갑자기 많은 전사자를 내게 되었다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번 싸워 백번 이긴다는 병법을 무시하고 무지한 전략으로 공비토벌 나섰던 국군들이 곰달래산 800고지 전투에서 참패의 고난을 당한 것이다 그 당시
국군의 시체를 우리집 앞 논바닥에 끌어다 놓은 것을 보고 어린 내 마음이
슬펐다 백무동에 아지트를 둔 공비들은 1948년도 가을 어느날 대낮에
반동분자로 낙인 찍힌 강화춘 이장집 전 재산을 몽땅 털어 갔다 유일하게
섬말 기와집에 살던 강구옥씨는 공비를 잘 피해 살다가 1949년 1월 어느 밤
아들과 바둑 두고 있을 때 공비가 들이닥쳐 집밖으로 도망가다 잡혀 실덕 뒷산 영원사 절 입구 바위 아래 비참하게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지금 마천 비석거리 충혼탑에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곰달래산 800고지 전투가 끝난지 두서너달 지나 음력설 음식을 대접 받은 마천초등학교 국군 3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군기와 전투욕이 해이해진 국군을 공비들이 야밤에 기습 공격했다 완강한 반격 작전으로 공비를 물리쳤으나 갑자기 기습 공격에 당한 피해도 많았다 이때 도망가던 공비들이 마천초등학교를 불질러버려 우리 마천어린이들은 교실을 다 잃었다 3개월간 휴교를 했다 그간 나는 어머니 지도로 강청 표씨댁에서 서당 한문을 배웠다 천자문을 다 배워 갈 때 개교가 되었다 교실은 면사무소 공간,면장사택,숯창고,임업시험장 등의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가 시작되었다 마천출신 양만금<양채용>교장 선생님에게는 일제시대부터 배웠다 그때는 교감이었다 조회 할 때 조회대 위에 선 교장 선생님에게 경롓<일본 말로 고쪼센세이노 가시라 나깟>으로 교감 선생님이 외치던 모습 기억이 난다
마천초등학교 운동장에는 일요일에 여자들을 몸베<일본식 바지>를 입혀놓고 방공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광복이 되고 마천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된 양만금 선생님은 일제시대 손때가 매서워 땡비라는 별명이 있었다 광복 후 양만금 교장 선생님은 인자한 선생님으로 나중에 함양 교육장도 지내셨다 비석거리 공덕비를 허태오 후배가 세울 때 나는 비문을 써 드렸다 제일 먼저 마천초등학교 설립에 공로가 큰 이진우 선생 공덕비 비문을 위시하여 양채용<양만금> 교장 선생님,이병원 신기사 사장님,박경호 원방장학금 설립자님 등 네 어른의 비문을 공덕비 건립에 봉사한 허태오 후배 후원 의뢰에 협력하여 정성껏 네 분의 공덕비 비문을 쓴 것이다
공비가 불질러 학교 건물도 없는 마천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양채용 교장 선생님 후임으로 염동석 교장 선생님이 오셨다 참 어진 교장 선생님이셨다
“자식은 쪽박을 차도 가르쳐야 한다”는 어머니는 나를 1949년 여름 석복면<현 함양읍> 석복초등학교로 전학시키려 했다 그러나 염동석 교장 선생님을 비롯하여 서명문 교감 선생님 서재익 담임 선생님 그밖에 정위현 선생님 김종수 선생님 박한진 선생님 박영태 선생님 등 여러 선생님들이 내가 한학기 남겨놓고 석복초등학교로 전학 가는 것을 만류했다 마천초등학교에서 다 가르쳐놓고
석복초등학교로 오동춘이를 보낼 수 없다고 했다 전학 서류를 해 주지 않았다
어머님도 교장 선생님을 비롯하여 여러 선생님이 아들을 사랑하여 극구 만류함을 아시고 한학기 마천초등학교에서 마저 공부하기로 결정을 한 것이다
염동석 교장 선생님 사택 아래채 방에서 6학년 여러 친구들과 함께 함양중학교 진학의 입시공부를 하며 마천초등학교를 마치기로 했다 안의중학교를 졸업하고 마천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김광수 선생도 우리와 자치를 했다 1950년 전후로 중학만 졸업해도 초등학교 선생이 될 수 있어 어린 나이에 친구 같은 김광수 선생이 우리 6학년과 친구처럼 자취생활을 함께한 것이다 어느날 자취 쌀과 갈아 입을 나의 옷을 기다리던 아버지가 함양읍 이사간 인당에서 나를 찾아 오셨다
면사무소 안에 있는 6학년 교실에서 수업을 마치고 가을학예회 준비 6학년 연극연습 하려는데 면사무소 뜰에 아바지가 오셨다 첫눈에 중병을 앓은 사람처럼 두눈이 십리나 깊이 파여 있었다 “동춘아 나 좀보자”이 한마디 하시고
면사무소 대문밖으로 나를 데려 갔다 날 보고 하시는 말씀 “동춘아,정자가 죽었다”였다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충격을 받았다 청천벽력의 소리였다 나는 그만 넘어져 땅바닥에 데굴데굴 뒹굴며 “정자야.정자야!”슬피 큰 소리로 울고 또 울었다 그날 6학년 학에회 연극연습은 못했다 내가 주연 할아범역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를 처음 오빠라 불러 준 정자는 어려도 참 에뻤다 어머니 모심기 하는데 내가 젖먹이러 업고 가면 동네 사람들이 참 예쁘다고 창찬해 주었다 나도 무척 사랑해 주었다 공비 때문에 마을 전체가 소개 당할 때 우리집은 운학정 정상문네집 조그만 뒷방 하나 얻어 살았다 그 무렵 돌에 턱을 다쳐 피가 흘러도 발라 줄 약이 없었다 된장을 바르고 그냥 나았다
어머님이 진주 친정에 쌀이라도 좀 얻어올까 하고 50리길 오도재
778미터의 높은 산길 고개를 넘어가서 진주행 대한금속 아니면
남선여객 버스를 타고 가야하는데 엄마 외가 다녀올때까지 큰오빠
작은오빠와 함께 놀고 있으라 달래고 달래도 한사코 따라 가려 함으로
참다 참다 못한 어머니는 “따라 오지 마”소리 지르며 다섯 살
귀여운 어린 정자를 사장없이 마구 때려준 모양이다 면사무소 교실에
수업 중인데 어머니가 흐느끼는 정자를 데리고 날 찾아 왔다 큰오빠에게
데려다 달라하여 내게 데려왔다고 했다 연방 어깨를 들석이며 눈물이 눈에
고인 어린 정자를 내가 달래고 있을 때 어머니도 예쁜 어린 딸을 그 모진 가난 때문에 출타중에 때려 주고 홀로 떠나는 마음이 그 얼마나 아팠을까
가채에 사는 먼 친척 아저씨가 면에 민적 떼러 오셨길래 아직 수업이 남아
먼저 운학정 길가 우리집에 데려다 달라했다 정자는 순순히 그 아저씨 따라
먼저 집에 갔다 면사무소 밖 대밭언덕에서 나는 아저씨가 정자를 잘 데려 가나 걱정되어 건편너 신작로를 바라보았다 잘 데리고 가고 있어 안심하고 수업을 다 마쳤다
빨리 집에 오니 뒷방 침침한 방안에 뎅그마니 혼자 쓸쓸히 앉아 있던 정자가
나를 보자마자“야,큰오빠다” 외치며 내게 안겨왔다 밖에 데려 나가 땅 따 먹기를 했다 재미있게 놀아 주고 정자의 손에 이끌리어 나는 운학정 길가에 서서
냇물 건너 신작로에 엄마 오시나 보자는 정자 마음 엄마를 기다리는 어린 딸
정자의 마음을 나는 천번만번 받아주며 또 오도재를 넘어오실 어머니 발걸음을 땅벌 신작로 길에 눈을 뚜러지게 두고 기다린 것이다 정자 누이동생이나
나의 엄마 기다리는 마음은 참으로 처절하게 아름다운 것이다 땅거미가 한참
짙을 때까지 엄마 기다리는 정자와 함께 서 있다가 “정자야 오늘도 엄마가 안 오시나 보다 그만 집에 가자”하며 내가 손을 끌면 정자는 시무룩이 나를 따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집밖에서 과자를 손에 든 정자가“오빠야,엄마 왔어! 빨리 방에 가봐”하며 기쁜 생기가 펄펄 살아 있었다 그 모습 사랑스러웠다
공비 출몰지구 마천에서 자식공부 시킬 수 없다는 어머니 용단으로 섬말
띠엄바구 논 두마지기,나하고 동해 동생하고 새 보던 그 논을 헐값에 팔고
우리집은 함양 인당 먼 친척 아래채 방으로 이사를 나왔다 가을학기 마치고
함양중학교 진학하며 정자하고 오빠 동생이 참 기쁘게 살려 했는데
아,천하에 둘도 없는 그 예쁜 내 누이동생 정자가 다섯 어린 나이에 죽다니!
나는 정자 죽음의 슬픈 마음 아지도 생생히 남아 있다
함양군청으로 나가는 추럭 뒤에 염동석 교장 선생님과 함께 타고 정자가 죽은 뒤 함양읍에 나와 어머니를 만났다 서로 안고 정자생각에 한참 울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인당 뒷산에 묻었다는 정자 무덤은 가지 않기로 했다 무덤 앞에
솟구칠 울음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고 안 가 보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
싶어 가보지 못한 정자의 무덤 이젠 흔적도 없겠지! 섬말이 낳은 어린 다섯 살
미녀 오정자는 송골 큰오빠 가슴에 사랑의 그리움으로 살아 있고 송골시나 수필로 아름답게 정자는 살아 숨쉬고 있다
자치기하며 썰매 타며 정월 대보름 달집 즐기며 놀던 마천 섬말에서
작두에 오동해 오른손 손가락 두 개가 한마디씩 날아가게 된 형제의
작두사건이 평생 아픈 한으로 내 가슴에 남아 있고 동생에게 항상 죄스럽고
미안하기만 하다 1947년 마천초등학교 4학년 때 일어난 아픈 추억이다
일본에서 나와 백일해 걸린 둘째 남동생 시게루가 1944년 어느날 밤
약한첩도 써 보지 못하고 죽었다 어머니는 부엌칼로 무명지에 피를 흘려
죽어가는 시게루 입에 넣어 주었다 지극한 어머니 사랑을 보았다 시게루는
송알소 아카시아밭에 단지에 넣어 어린이 무덤 돌로 만들어 주었다 그 후
몇 번의 큰물이 지나가고 시게루 돌무덤도 지금은 아무 흔적도 없다 세월이
무상하다 어느 여름 섬말로 가는 송알소 근처 길에서 지금 서울 강서문화원
직원 박정서 시인의 아버지 박기정 형님이 나를 보고 어떤 사람하고 오동춘 동생이 대학교수가 되었으니 당신마을 군수나온 그 군수보다 우리 오동춘 대학교수가 더 높다고 말한 자기 말이 옳지 않느냐고 내게 판단을 요구했다 나는 대학교수가 장관이 되기도 하니 “형님 말씀이 이긴거요”라고 기운을 돋아 드렸다
여름되면 섬말 뒷냇물에 멱도 감고 감자상굿도 하며 냇가에서 감자멱던
어린 날이 그립다 뒤동산 밤나무 아래 주은 밤을 부엌 나무광에 단지 하나
묻어 두고 밤을 하나 하나 세어 넣던 그 추억도 그립다 갑니 순이 어린 소꿉 가시내들 다 어디가 살까 어린날 누님처럼 따랐던 고모 오경남,백무동 양지새터 신경우 총각한테 시집가는 가마 타고 “오매 없이 우애 살고”울고 시집가던
나들이농원 신평수 사장 어머니 강두금 아즘마는 이제 모두 하늘나로 떠나셨다 악착같이 잘 살아 보려 논 사고 밭 사고 산도 사서 부자된 오동선 형님도
커피를 주전자로 끓여 대접해 주시던 형수님도 뒤동산 흙이 되어 자고 있다
섬말 떠나 객지에 산 섬말 사람으로 오씨 가문에서 부산의 고 오성근 형님 아들 고 오상렬군이 서울대 화학과를 나와 미국에서 경영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큰 회사 간부로 있다가 안타깝게 일찍 세상을 떠났다 나와 오동해 아우를
서울로 불러 올려 나는 용문고교,아우는 용문중학 교육을 시켜 준 고마운 오문환 숙부 마천초등 6회 출신 오문환 숙부 맏아들 오명근이 고려대 상대 경영과 수석합격하고 졸업후 주택은행 간부가 되었다 시인 오동춘은 연세대학교 국문과에서 외솔 최현배<1894-1970>,한결 김윤경<1894-1969> 두 스승에게서 한글사랑 나라사랑을 배우고 문학박사로 연세대 한양대 등에서 교수로 교편 잡으며 국문학자,
한글운동가,시조시인,화성교회 원로장로로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 섬말 나주오씨 가문에서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세 명문대 출신이 나온 것이다 후배 강인호가 부산고교를 거쳐 서울 사대로 진학 졸업 후 고교 교편을 잡다가 일찍
하늘 나라로 떠나 아쉽다 몇집 안 되는 섬말에서 스카이<SKY>대학교 곧 서울 연고대 출신이 4명이 나온 것이다 자랑스런 섬말이다 섬말은 섬도島마을촌村
島村의 한자 뜻만 따서 섬마을 줄여 섬말이 된 것이다
신라시대부터 존재했던 마천 섬말 뒤는 곰달래산이 웅장하고 왼쪽 삼정에서 흘러 오는 냇물이 오른쪽 백무동 계곡에서 흘러 오는 냇물과 송알소에서 합류된다 소알소도 강씨집안 장군이 나온 전설이 얽힌 깊은 물이다 지금은 깊이가 얕아져 있다 실덕마을쪽 송알소 위에는 강청교 도촌교가 없을 때 긴 바드나무 두 개를 걸쳐놓고 흙다리를 만들어 건너 다녔으나 큰물 홍수나면 다리가
떠내려 가곤 했다 지금은 송알소 위로 강청교 튼튼한 다리도 놓이고 도천교
다리도 놓여 교통이 좋아졌다 강청앞 도촌교 근처 송알소 주변에 헬프HELP클럽에서 헬프공원이라 이름 짓고 헤파정 쉼터도 지어 놓았다
초기헬프회원 전원이 천사령 군수로부터 함양명예군민증까지 받았다 부산의료봉사단체로 초대 회장 최성길 학장 수필사의 피와 땀의 노고가 컸던 것이다
내가 이끄는 짚신문학회는 1999년 3월 1일 삼일운동 일어난 제80주년 삼일절날 서울광화문 한글회관 강당에서 창립 되었다 당시 연세대 사회교육원 송골
제자들 중심으로 만들어 한글정신 삼일정신 짚신정신으로 문학활동을 하고 있다 기도가 있고 도산 안창호가 지은 애국가 4절까지 다 부르는 애국문학단체
기독교 중심의 신앙문학단체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짚신문학 창립 20돌을
기념하여 <마천 섬말이 낳은 짚신문학20돌기념비>를 지리산교회 앞에 10월
9일 제573돌 한글날 세운다 약 40년 전에 하나님 뜻에 따라 천안에서 마천으로 내려오신 김태근 목사님 조옥자 전도사님 내외분이 마천 복음 심기에 일생을 다 바치고 있는 지리산교회 앞에 우리 짚신문학20돌기념비가 세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헤요 짚신회원과 짚신에 관심 있는 분들의 기도의 힘이다
우리 고모할머니 사시던 집터에 이미 지리산교화가 서 있고 그앞에 마천 섬말이 낳은 짚신의 어머니 짚신문학20돌문학비가 서는 것이다 짚신문학20돌기념비 옆과 위는 박노식 문봉열 두 농부가 살던 집이 있었다 마천 섬말이 낳은 짚신문학기념비 서는 자리는 곰달래산 <일명 응달산>기슭이다 어린날 누님 같은 고모 오경남 강두금 아줌마 나물 뜯는 뒤를 따라 올라가 본 이 아름다운 곰달라래산에 오문달 하석임 나의 부모님,오문철 숙부님,오문환 막내 숙부님,
장손자 나를 끔직이 사랑해 주신 함안 조씨 나의 할머니 산소가 다 있다
지리산 천왕봉의 한줄기 800미터 높이의 곰달래산은 마치 우리집 선산같은
느낌을 준다 그 마루 같은 아늑한 터에 한글정신,3.1정신,짚신정신 길이
꽃피는 우리 짚신문학회 회원일동 주최로 짚신창립20돌에 <마천섬말짚신문학비>
가 서는 이 자랑스런 우리 짚신 기쁨 지리산 냇물처럼
참삶 뼈삶 빛삶으로 꿈 푸른 짚신회원들이여!
짚신사랑 뜨거운 우리 짚신겨레여!
우리 다같이 길이길이 기뻐하자 사랑하자
2019.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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