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소시집 | 김 완
적막에게 묻다 외 4편
동안거에 들어간 불갑산 아래 겨울 호수에서 보았다
결가부좌로 묵상에 잠겨 있는 눈 덮인 겨울 산
적막을 품고 있는 눈꽃들의 눈부신 화엄華嚴을 보았다
간간이 사선으로 날리던 눈발이 수직으로 내려앉아
형체 없이 스러지는 호수에는 작은 새 하나 보이지 않았다
대지의 생명들 모두 숨죽이며 자발적 위리안치 중이었다
서해 바다로 눈보라가 몰려가는지 중천에 뜬 해가
제 모습을 잃고 비틀거리는 한낮 연사흘 내내
나뭇가지에 쌓인 눈 무게를 못 이겨 적막을 깨운다
뽀드득 눈 밟는 소리에 스스로 놀라는 발자국을 따라간다
하늘에서 만들어져 지상에 머물다가 가뭇없이 사라지는
찰나의 생(生) 가여운 눈이여 집에도 길 위에도 나는 없었다
적막이 적막을 물어 나르는 산중에 막막한 생生의 그림자여
중천의 해가 드러났다 사라지는 아득한 그곳에 눈보라 칠 때
외로움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언젠가는 나로 돌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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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노래
불갑사 누각의 숲에서 다음 생(生)에 당신에게 전해줄 말들을 찾다가 출구를 잃어버렸다 살면서 길을 잃은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길을 잃어야 새로운 길을 찾는다는 말, 언제나 길을 잃어야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호수로 가는 오르막, 얼었던 땅이 녹아 질척거리는데 바람도 없이 홀로 비틀거리며 마음속 길을 찾는 사내를 보았다
중천에서 서편으로 비스듬히 어깨 기운 해 호수의 반짝이는 윤슬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자유롭게 비상하는 새들 왜 보이지 않을까 화두처럼 중얼거리는데 햇살 환한 얕은 호수 한편에 크고 작은 잉어 떼 소리 없이 유영하고 있다 소한 지났어도 해오름 달 중순인데 오늘의 봄 같은 날씨가 봄기운 대기에 풀어 한 겨울의 용맹 정진을 깨웠구나
호수 가장자리 지난주 대설로 설해목(雪害木)이 된 나뭇가지들, 통째로 물에 잠겨 시나브로 소신공양하고 있다 사찰의 범종 소리 경전 삼아 동안거에 들었던 뭍 생명들 묵언 정진하고 있었구나 해독되지 않는 경계의 가파른 생을 사는 호숫가 길 위의 나무들 나그네 발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다 적막이 갇혀 있는 북소리 목어(木魚)소리 걸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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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운장산
산이 높아 오래 구름에 덮어 있는
겨울 운장산(雲長山)을 간다
애써 올라왔던 길을 다시 내려가는 산
낮에는 햇살에 녹고 밤에는 찬바람에 어는
거칠고 사나운 겨울 산속을 헤치고 간다
뒤돌아보면 그렇게 저 먼 길을 지나왔다
우리 인생길처럼 드디어 그곳에 올라선다
천지사방 황량하나 더 깊이 있는 겨울 산
끝나지 않은 길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아직은 봄의 소란을 그리워하고 있는데
오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가슴 떨리는
혁명 보다 흔들려도 쓰러지지 않는
내 삶에 스며드는 일상의 황홀을 꿈꾼다
바람 세찬 생소한 겨울 산에 오르는 일은
스스로를 오롯이 내려놓기 위한 것일 터
진안은 마이산, 구봉산, 운장산이 있다
산이 높아 오래 구름에 덮여 있다는
운장산 그 가보지 않은 겨울산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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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하루
-일상 5
오늘은 매출이 별로 없는데도 새로 온 직원의 급여
친구와 지인들의 경조사 등에 많은 비용을 지출했다
사람이 사는데 있어 공감 능력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마음이 우러나지 않아도 허위로 슬픔을 기록할 수는 없다
어떤 시인은 놀랍게도 뛰어난 공감 능력으로 금새
상황에 딱 맞는 시를 뚝딱 지어 모두를 놀래키기도 한다
사람은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해’라는 어머님의 말을
되새기며 마음만 앞서는 부족한 나를 자주 부끄러워 한다
초판 13쇄를 찍었다는, 제목이 아주 멋진 시집을 샀다
알 수 없는 은유로 가득 찬 시들이 머리 속을 헤집어 놓는다
살아야 할 필요만 없다면 삶은 그 얼마나 황홀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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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큰 별이 되다
-박관현* 형을 그리며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베르톨드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부분
1
행상하고 돌아오는 모두 잠든 밤
가슴에 박힌 차디찬 어머니의 손
관현의 손을 품던 어머니의 윗옷 앞 섶
아버지의 열리지 않은 입
사람 살리는데 좌우가 무슨 소용인가
모두가 행복하고 평등한 세상
나무는 굴곡도 있고 움푹 팬 상처도 많다
‘어쩌나 보니, 어쩔 수 없으니까’라는 말
분노하고 저항하지 않으면 예속된 삶을 산다
법전만을 들고는 이상 사회 건설을
꿈꾸거나 이야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그날 그의 손에서 짱돌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막걸리 한잔 걸치고 부르는
어머니의 노랫가락에는 걷어낼 수 없는
노동의 고단함과 피곤이 묻어 있다
치켜든 횃불 속에 일렁이는
농민들의 눈빛을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역사 살아 꿈틀거리는 역사를 만났다
여전히 슬프다 우리 앞에는 넘어야 할 산
건너야 할 강이 무수히 놓여 있다
들불야학을 통해 내 누이가 잘 사는 세상
내 동생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광천 공단과 광천 시민 아파트 주변
주민들은 모두 그의 피붙이고 분신이다
2
죽을 결심을 하지 않으면 이 땅의 현실이
좋아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
피하지도 외면하지도 말자
죽을 결심을 하고 당당하게 살자
그것이 진짜 사는 길이다
80년의 봄 민주 학원의 새벽 기관차**가 되다
내 꿈은 판사나 변호사가 아니고
순임이다는 내 어머니 내 누이동생
우리 모두의 어머니와 누이라는
순임이의 아픔과 희망을 끌어안고
이 땅의 민주주의를 뿌리내리는 길로 나가자
새벽에는 춥다며 학생회관 커튼을 뜯어
단식하는 후배들의 등을 덮어주던 농성장
꺼지지 않은 횃불처럼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고
남북통일 이루자는 소망 온 누리에 밝히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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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처럼 산화한 오월의 넋들 영령들
3
발길을 돌린 지금은 죽기 위해 살아남아야 할 때
다락방 시절 날아온 할아버지의 죽음과
전남도청에서 윤상원 선배의 전사 소식
그의 양복과 구두를 붙잡고 슬픔을 삭혔던
가슴 한편이 뻥 뚫려 헛헛한 견디기 힘든 그해 여름
살아남은 자의 부채의식과 부끄러움
죽기 위해 살자 박건욱이라는 일상의 삶으로
공릉동 요코 공장 화랑 섬유에서 먹고 자다
이 땅의 민중과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쳐야 참되게 사는 길이다는
4
1982년 1월, 광주교도소 시무식이 열린다
5·18 민중항쟁의 정당성과 시민 학살에 항의
1, 2차 단식과 불덩이를 토하던 최후 진술
끝까지 싸우리다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그리고 3차 단식 결코 물러서지 않으리다
윤상원 형 댁의 안부와 김영철의 건강을 묻고
어머니 용서하세요 이제 저는 죽어도 좋습니다
울혈성 심부전증의 원인인 급성 폐부종 악화
제 할 일을 다한 듯 붉은 피를 흥건히 토했다
1982년 10월 12일 새벽 2시 15분
그는 떳떳한 생을 내걸어 벽 속의 평온을 끊었다***
손톱 끝이 짓무르도록 삯바느질과 농사지어
가르친 내 자식 6대 장손 5남 3녀의 장남
관현아! 참으로 서럽고 서러운 통곡이었다
그리운 이름 박관현! 그는 그렇게 이승을 떠나
나라가 통째로 어둠 속에 깔려 신음할 때***
어둠 직전에 가장 빛나는 광주의 큰 별이 되었다
* 박관현(1953-1982): 1980년의 봄 당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 이 시의 많은 부분은 『새벽 기관차 박관현 평전』(최유정 지음)을 참고하였다.
*** 김시종 시 「입다문 언어-박관현에게」 부분에서 일부를 변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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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노트>
동백꽃에 홀리다
김완
해마다 3월이 되면 동백꽃을 보러 강진 백련사 동백숲에 다녀오곤 합니다. 고려 시대 원묘 국사가 백련결사를 일으켰던 유서 깊은 사찰인 백련사에는 약 1,500여 그루의 토종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어 자생하며 천연기념물 151호로 지정된 동백나무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뚝뚝 떨어져 지면서도 아름다운 꽃, 동백꽃에 언제부터 깊이 매혹된 것일까요? 동백꽃을 보면 자연스럽게 제주 4·3 민중항쟁을 상징하는 동백꽃, 여순 10·19 민중항쟁을 상징하는 애기 동백꽃이 떠오릅니다. 그렇습니다. 등단 후 자연스럽게 한국작가회의의 회원이 되면서 우리나라의 제대로 된 역사와 이름 없는 이웃들의 아픔에 새롭게 눈을 뜬 것입니다. 통째로 송이송이 떨어져 지면을 붉게 물들이는 동백꽃을 보면 치열하고 잔혹했던 삶, 역사의 현장을 잊어버리고 사는 이 시대의 망각을 깨우는 조용한 외침처럼 느껴집니다. 백련사 동백숲에서 만덕산으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언덕길로 올라서면 해월루를 거쳐 다산 정약용이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면서 학문을 집대성한 다산초당으로 이어집니다. 당시 백련사 주지였던 혜장 선사와 종교를 떠난 우의를 나누며 다산 초당에서 이 동백 숲길을 오고 가고 했다고 합니다. 200여년 전의 다산과 그 시대를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나라를 걱정하지 않는 건 시가 아니라고 했다는 다산의 말과 역사를 떠올리며 말(言)을 찾아 무언가에 쫓기듯 살아온 나의 시(詩)를 되돌아볼 수 있습니다.
“햇살 환하고 낮은 음계로 바람이 우는/백련사 동백꽃 해낙낙 해낙낙 떨어지는 봄날/찢어진 물처럼 곧 아물 것 같은 상처/상처의 얼룩과 그늘이 얼굴에 남아 눈물에 닿는다/봄, 백련사 동백꽃, 우주의 한순간이 저물고 있다”-졸시 「봄, 백련사 동백꽃」 부분.
조국이 위태롭습니다. 아시아 문학 공부하기 모임이 쉬는 이번 겨울 동안 방현석 작가의 『범도』를 읽었습니다. 한평생 식민지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풍찬노숙하며 헌신한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역사 속에 스러진 의병, 독립투사들의 고투, 배고픔과 슬픔에 대하여 오래 생각했습니다. ‘가지 않는 겨울도 없고, 오지 않는 봄도 없다’라는 말, ‘홀로 가며 홀로 가는 것을 아는 자, 홀로 가는 자를 홀로 가게 하라’라는 말, 백년 전 그때와 지금 조국의 현실은 어떻게 다른가요? 그분들이 꿈꾸었던 조국의 자유, 독립, 민중에 의한 참된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는지 의문입니다. 여전히 불안정한 분단체제 속에서 친일부역자에 대한 역사적 단죄가 완성되지 않았고, 주변국들의 한반도를 둘러싼 끊임없는 위협과 간섭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잠이 오지 않는 날들. 쓴다는 것은 꿈을 만질 수 있는 형태로 바꾼다는 것인데, 내 방식대로 쓰고 가는 방향이 어떤 길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면 부끄럽기 그지 없습니다. 말 때문에 말이 많은 세상입니다. 시를 쓰면서 기다리는 말은 언제나 쉽게 오지 않습니다. 밤의 도둑처럼 조국의 독립, 통일, 완전한 민주주의, 그날은 올까요? 나만의 색깔을 가지고 이 세상을 아름다운 빛깔로 물들이는 말(言)들을 찾아 언제쯤 제대로 나의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동백꽃 피고 또 지는 봄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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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
1957년 광주광역시 출생
2009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 『지상의 말들』, 『바닷속에는 별들이 산다』, 『너덜겅 편지』, 『그리운 풍경에는 원근법이 없다』
제4회 송수권 시문학상
남도시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