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서 분지를 둘러싸는 산이 보이고 분지 내에 시내가 형성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때 아쉽게 사진으로는 찍지 못했지만 언덕에서 봉황산이 보이고 그 바로 아래에 공주사대부고가 위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공주사대부고가 위치하고 있는 자리는 바로 조선왕조 시기 충청감영이 위치했던 곳이었다. 1707년경 봉황산 아래에 충청감영 시설이 들어섰었다고 한다. 그리고 1896년 8도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실시될 때 공주는 충청감영 소재지에서 충남도청 소재지로 바뀌었다.
충청감영이 위치했을 정도로 공주는 조선시대에도 충청도의 중심 도시적 기능을 하였다. 금강이 흐르고 분지라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공주는 배산임수, 풍수지리상의 길지에 입지해 있어 조선시대의 지방행정중심지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공주는 조선시대 내내 충청도의 수위도시로서 군사적 요충지, 금강수운의 주요하항이었다.
사대부고와 그 인근의 답사 코스는 두 번째 답사에서 방문하였다.
다리를 건너 시내의 큰 사거리 쪽으로 걸어가다 제민천을 지나 사대부고 앞을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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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옛 충청감영의 흔적을 찾아보려 했으나 그러지 못해서 아쉽기만 했다.
어쨌든 공주는 충청의 중심 도시였고 19세기 즈음까지도 뒤쳐지지 않는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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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고에서 제민천 쪽으로 다시 나오면 대통다리가 있는데 1914년 당시 공주 중심가는 이 대통다리 인근이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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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오래돼 보이는 약국도 있었다.
약국 안에는 약을 넣어두는 통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드라마에서 몇 번 봤던 서랍같이 생긴 옛날 약통이 있어서 매우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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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래된 읍사무소 건물도 있었는데 일본식으로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일제시기 공주인구의 20%가 일본인 이였다고 한다.
옛 중심가를 돌아보면 다 오래된 건물인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사진으로는 찍지 못했지만 이 옛 중심가에 위치한 중앙분식이라는 분식점에서 끼니를 해결했는데 네 명이서 떡볶이, 오뎅, 쫄면 등등 이것저것 시켰는데도 그 값은 7000원도 들지 않았었다......!
주인아주머니, 아저씨께서 매우 정이 넘쳐 보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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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니를 해결하고 다시 시내로 나와 중동초등학교로 갔다.
1906년에는 공주보통학교(지금의 중동초등학교) 및 영명학교가 설립되었고 그 즈음에 여러 사립학교들도 세워져 있었다.
1925년경까지 공주가 대전보다 인구규모로 보나 도시기반시설으로 보나 훨씬 더 큰 도시였다. 이렇게 공주는 많은 발전을 이뤘었던 곳이었다.
하지만 어떤 큰 사건을 계기로 공주는 조금씩 쇠퇴하다 1932년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이전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이 사건은 바로 철도의 개통이다.
경부선과 호남선은 공주를 지나지 않고 대전, 조치원, 천안, 논산을 지나는데 철도가 지나는 이 네 도시들은 큰 성장을 하였고 철도가 지나지 않는 공주는 쇠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공주는 충청의 중심 도시였으면서 철도가 지나지 않았을까?
이 이유는 참 신기하게도 이때까지 공주가 중심 도시적 기능을 한 요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공주분지는 광대한 공간을 전제로 육상교통의 결절기능, 육상 및 해상교통의 적환기능 등을 지향하는 근대도시의 입지조건에 부합하지 못했던 점, 금강과 주변의 산지들은 지형적 개방성을 지향하는 근대도시의 입지조건에 부합하지 못했던 점 등이 공주시가 일제시대에 이르러 쇠퇴하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충남도청을 대전으로 이전하면서 공주는 큰 타격을 받아 충청도의 수위도시로서의 위치는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공주 사람들의 강력한 항의와 운동으로 인해 일제는 보상물으로서 공주공립농업학교(1933), 현 공주교대의 모체인 공주여자사범학교(1938)등 각종 고등교육기관과 금강교를 설치해주었다. 그래서 공주는 교육기능을 주요 도시기능으로 갖게 되고, 수도권과 호남권을 연결하는 도로교통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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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이 금강교이고 답사를 하러 강을 건너올 때 찍은 것이다^^
그리고 해방이후 미군정 시기 영명학교 출신들이 충남도지사와 충남도청 간부, 충남도내 각군 군수와 경찰서장으로 대거 증용 되었는데 1948년 당시 충남도지사 서덕순(徐悳淳)등의 공로로 현 공주대의 모체인 공주사범대학(중등 교원 양성기관)이 설립되었고 1962년에 공주교대가 설립되었는데 이때부터 공주를 교육도시로 많이 지칭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공주가 교육도시라는 지금의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은 국가적인 외부적 힘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공주 사람들의 노력으로도 만들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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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초를 나온 다음에는 중동성당에 들렀다. 공주도 종교와 관련된 역사가 나름 깊은 곳이라는 것을 몰랐는데 새로이 알게 되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황새바위와 같은 종교적인 사건과 관련된 유적을 둘러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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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성당에서 내려오다가 찍었다. 사진이 흔들려서 잘 찍히진 않았지만 공주의 야경도 예뻤다. 여기서도 분지의 형태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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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답사를 다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조명이 켜진 공산성을 찍었다.
밤의 공산성도 매우 예쁘다!
공주는 분지라는 지형적 특징으로 인해 도시가 번성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했다. 이런 번성과 쇠퇴의 과정에 따라 사람살이, 인간의 삶은 달라져왔다. 사람은 이처럼 자연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으면서 사는데 이렇게 자연환경과 인문환경과의 관계를 탐구하는 것이 지리이다. 답사를 통해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을 종합시키는 지리적인 안목을 키우는 경험을 해서 매우 의미 있었다.
그리고 원래 나의 집은 공주가 아니어서 학교로 맺어진 인연으로 이렇게 공주 답사도 해보게 되었는데 공주라는 지역이 새롭게 다가오면서 앞으로 많은 도움도 될 것 같다! 동기들에게 앞으로 학교를 다니는 동안 꼭 공주답사를 다녀오라고 말해주고 싶다^^
참고 :
공주시 홈페이지 <공주시지>, 한국의 근대와 공주사람 게시판 강의노트
첫댓글 '공주는 분지다'라는 주제의식을 좀더 구체화시킨 엣세이를 쓸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긴 했습니다만, 어찌되었든지 잘 쓰셨습니다. 공주는 분지이기 때문에 고개를 넘거나 나루를 건너지 않으면 드나들수 없는 곳입니다. 곰나루나 장깃대나루, 또는 우금티와 하고개 등이 유명해진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공주교대 교수님이셨던 나도승 교수의 <<공주 금강권의 역사 지리>>(도서실 소장)를 읽고 시내답사를 했더라면 더욱 유익한 답사가 되었을 것이라 믿어집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문제의식이 식기 전에 한번 빌려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도서관에서 관련책은 찾기가 어려웠었는데.. 제가 더 찾아볼걸 그랬나봅니다...... 꼭 찾아서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