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드 족은 의심의 여지없는 단일 민족 집단이다. 연관성 있는 언어라든지 공유하고 있는 문화, 동일 지역을 그들의 고향으로 생각하는 것, 그리고 정체성등은 그들을 한 민족으로 묶어주는 중요한 공통점들이다. 이들은 인근에 뒤섞어 살고 있는 민족들과 많은 차이점을 갖고 있다. 아랍국가나 튀르기어 사용 민족, 페르시아 민족들과도 구별된 민족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런 공통점과 유사성을 가진 민족집단이면서도 하나의 정치 집단으로 형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렇기 때문에 쿠르드 민족이 중동의 정치상황이나 국가 기반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역할을 하지는 못한다.
이 쿠르드 민족은 몇가지 중요 요소에 따라 몇그룹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언어와 종교에 따른 구분이고 전통적인 가계 구조도 민족 그룹을 구분하는 한 요소가 되고 있다. 아래의 도표는 쿠르드 민족 집단을 분류한 것이다. 이 표에 의하면 20개의 민족 그룹이 형성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몇개의 그룹은 다시 5개의 중요 집단으로 구분하고 있다.
① 아직 고원지대에 살고 있는 집단
② 페르시아 정권에 의해 1500년대에 북동 변두리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어 형성된 집단
③ 고원지대 외부와 구소련의 코카서스 지역에 걸쳐 이주한 집단.
④ 경제적 빈곤으로 인해 2차대전 이후 중동지역으로 이주한 집단.
⑤ 유럽내에 형성된 집단
고원지대의 쿠르드 족
터키 고원지대의 쿠르드족(Kurds in Turkish Kurdistan) 5,500,000
터키의 뎀리 쿠르드족 (Demli(Zaza) Kurds in Turkey) 1,000,000
이라크 쿠르드족 (Iraqi Kurds) 3,000,000
이란의 북부(수니) 쿠르드족 (“Northern'(Sunni) Kurds in Iran) 3,000,000
이란의 남부(시아) 쿠르드족 (Southern (Shi'a) Kurds in Iran) 800,000
시리아 쿠르디스탄 쿠르드족(Kurds in Syrian Kurdistan) 650,000
터키와 이라크의 옛지디 쿠르드족 (Yezidi Kurds in Turkey and Iraq) 100,000
이란과 이라크의 알-에-학 쿠르드족(Ahl-e-Haqq Kurds in Iran Iraq) 20,000
페르시아 개척 쿠르드족
동부 이란 쿠르드족 (Kurds of Eastern Iran) 200,000
터키스탄의 쿠르드족(Kurds of Soviet Turkistan) 60,000
아프가니스탄 쿠르드족(Kurds in Afganistan) 20,000
중동의 미정착 쿠르드족
서부 터키의 쿠르드족(Kurds of Western Turkey) 2,000,000
남부 시리아의 아라비아 쿠르드족(Arabized Kurds in Southern Syria) 100,000
시리아/레바논의 도시 쿠르드족 (Urban Kurds in Syria/Lebanon) 650,000
쿠웨이트의 쿠르드족 (Kurds in Kuwait) 255,000
요르단 암만의 쿠르드족(Kurds in Amman, Jordan) 5,000
코카서스의 쿠르드족
아르메니아와 조지아의 쿠르드족(Kurds in Armenia and Georgia) 70,000
아제르바이젠의 쿠르드족 (Kurds in Azerbaijan) 175,000
카자흐스탄과 기리기지아의 쿠르드족(Kurds in Khazakistan and Kirgizia) 25,000
유럽의 쿠르드족 590,000
만약 국가 기반을 형성하려 했다면 1,250만명에 이르는 쿠르드족 독립국가가 형성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 중동과 고원지대등에 16개의 자치적인 집단으로 남아있고 동일한 정치적 통일을 이룰 가능성도 희박하다.
Ⅰ. 민족의 분열을 가져온 주요 요인
오늘날 쿠르드족을 이해함에 있어 가장 복잡한 요소는 언어의 문제이다. 이들은 3개에서 많게는 9개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언어는 ‘쿠르만지’(Kurmanji)로서 쿠르드족 문학은 이것으로 되어 있다. 약 7, 8백만명이 이 언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들 대부분은 터키에 살고 있다. 시리아와 구소련, 유럽에 있는 그들 대부분도 이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란과 이라크의 일부도 이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쿠르만지’어도 쿠위이, 학가리, 제지리, 헤르기, 쉬카키, 수르치등 6개의 방언으로 나뉘어져 있고 뒤의 3개 방언은 거의 독립된 언어처럼 차이가 있다. 의사 소통의 장벽을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언어를 쓸 줄 아는 사람이 15%를 넘지 못하는 문맹률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중요 언어로는 이라크와 이란 등지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쿠르디(Kurdi)어와 터키에서 사용되고 있는 뎀리(Demli)어이다. 이 언어들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그래서 각각 다른 지역에서 온 쿠르드족끼리도 서로를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울 정도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여기에 더더욱 의사소통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어떤 쿠르드족 언어도 말할 줄 모르는 사람이 20~30%나 된다는 사실이다. 3,4백만의 쿠르드족은 오스만어, 터키어, 아랍어, 투르그만어, 알제리어, 화르시아어, 아르메니아어, 러시아어등을 주요 언어로 사용하고 있다.
쿠르드 민족을 분열시키는 또다른 요인은 종교이다. 적어도 5개의 쿠르드 민족집단이 이 종교문제로 갈라져 있다. 이라크, 터키, 시리아등지의 예지디족들은 이슬람교와 조로아스터교를 믿고 있다. 구소련의 코카서스 지역에 살고 있는 쿠르드족이 분열된 주요 원인도 종교문제이다. 터키의 뎀리 쿠르드족은 다양한 종교를 가진것 때문에 다른 쿠르드족으로 부터 경멸을 받아 그들의 본래 이름인 자자(Zaza)는 인종적인 멸시로 인식되기도 했다.
이 민족집단이 분열된 세번재 중요 요인으로는 지역적으로 완전히 떨어져 살고 있기 때문이다. 1500년대에 이들중 일부는 중앙아시아의 페르시아 지역에 정착했다. 이때부터 아프가니스탄, 동부 이란, 구소련 투르기스탄 지역에 400년 이상을 정착해 살고 있다. 그리고 북쪽에는 구소련과 중국에 연하는 지역에 이 민족은 흩어지게 되었다. 이들은 자기의 고향에서 적어도 2,000마일이나 떨어진 지역에 살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근래들어 이 민족집단을 분열시키는 요인으로는 경제적인 문제이다. 300만명이 실업상태에 있다. 그래서 이들은 쿠웨이트, 앙카라, 이스탄불, 유럽등지로 직장을 찿아 떠나고 있다. 시리아에 살고 있는 쿠르드족들은 하밥이나 다마스커스, 레바논 등지로 흩어지기도 한다.
Ⅱ. 쿠르드족의 역사적 배경
쿠르드족은 비아랍권에서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최초의 민족이다. 7세기에 이미 아랍국가의 침략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7~ 9세기 사이에 이슬람이 전래된 것으로 나타나있다. 그리고 이들은 이슬람 음악을 전파하는 역할을 했으며, 멀리 스페인과 북아프리카에 까지 예술적인 영향을 주기도 했다.
쿠르드족의 정치적인 발전은 10세기부터 시작되었다. 부족들이 모여 한 촌락을 이루었고 이것이 시효가 되어 쿠르드족 역사 수천년동안 왕정이 지속되었다. 20세기까지도 부족을 중심으로 형성된 정치 조직이 유지되고 있었으며, 2차세계 대전까지 왕족이 계속 집권하는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쿠르드족은 20세기들어 다시한번 독립된 국가를 세우려는 목표를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실제 독립된 쿠르드 공화국이 1920년대에 구소련 아제르바이잔에서 몇년간 존재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아제르바이잔의 정치적 압력으로 결국 이 공화국은 무너져 버렸고 러시아의 역사책은 이것을 기록조차도 하지 않는 실정이다. 1925년에는 쿠르드 민주당이 이란에서 태동되었고, 1946년에는 독립 마하받 공화구을 선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도 1년만에 끝나고 말았다. 1963년에는 절호의 기회를 맞기도 했다. 3년간의 치열한 전쟁끝에 이라크 정부는 자치구를 세우는 것으로 협상안을 내놓았지만 쿠르드족간의 암투로 인해 결국 자치구 형성은 성공하지 못했다. 1979년에는 이란에서 쿠르드 자치구가 구체적으로 세워지려 했지만 결국 폭동은 실패하고 말았다.
Ⅲ. 선교적 관점
쿠르드족은 터키나 아랍국가들, 페르시아 지역에서 다른 민족들과 뒤섞여 살고 있다. 이들은 서로 결혼을 하기도 하고, 생업이나 식생활들도 함께 하고 있다. 그러나 터키인들은 전체인구의 20%밖에 안되는 그들을 자멸시키려 하고 있다. 정치적 힘을 길러 언젠가는 이 고통에서 탈출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막으려는 것이다. 또 수백명의 쿠르드족들이 정치조직에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터키의 감옥에 갇혀 있고, 이라크에서는 화학무기로 쿠르드족 어린이와 여자들을 죽이고 있다. 그리고 이란 정부는 1989년 베트남에서 쿠르드 민주당 지도자들을 암살했으며, 터키, 이라크, 시리아등은 그들을 민족성 동화 정책을 쓰며 민족 말살을 꾀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이 독립국가가 세워진다고 해결되겠는가?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상적인 정치적 결합은 민족의 정당한 권리를 바탕으로 쿠르드족이 생존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역사속에서 연합, 평화, 조화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쿠르드 족은 민족간의 세력다툼이 극심해 국가가 세워진다 해도 문제는 더욱 심각해 질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이들을 방치해 둔다면 핍박과 학살로 인종 자멸의 결과를 볼 지도 모른다.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이들에게 ‘평화의 복음’을 긴급하게 전해야 한다. 정의의 사역을 이들에게 해야할 의무가 기독교인들에게 있다. 그것은 이들도 하나님께 버림받은 민족이 아니고 이ㅋ들에게도 사랑의 손을 내미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우즈벡공화국의 우즈벡 사람들
중앙 아시아의 우즈벡 사람들은 소련 체제의 몰락으로 다시 독립을 하게 된 것에 대해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들에게 이슬람은 수세기동안 전해 내려오는 전통이 되었다. 그러나 구공산 정권의 압력으로 신앙 생활을 마음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자기 조상들이 믿었던 이 이슬람을 받아들이는 것에 갈등을 느끼고 있다. 젊은이들은 이런 갈등으로 영적인 불안 상태에 있고, 여러 이단들에 빠지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이런 위기속에 복음을 증거할 아주 효과적인 때를 맞고 있다.
우즈벡족의 역사적 배경
우즈벡(Uzbek)이란 이름은 “우리 주인”또는 “우리의 왕”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우즈벡 사람들은 자기들이 다른 모슬렘 성도들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다. 왜냐하면 징기스칸과 13, 15세기에 러시아와 세르비아를 통치했던 몽고의 골든 호드가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우즈벡 칸은 18세기까지 통치했었다. 그러나 19세기에는 러시아 침략자들에 의해 우즈벡은 점령되었고, 1925년에 공산정부가 들어섰지만 1991년 12월 25일 우즈벡키스탄은 다시 자유를 얻게 되었다. 소련을 무너뜨리기 위해 대학생들의 반공산정권 시위와 모국어 되찾기 운동이 한몫을 했다.
우즈벡 사람들은 남중앙아시아 지역의 몇몇 국가(투르크만, 카자흐스탄, 타지크스탄, 키르기스탄, 아프가니스탄)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주로 우즈벡키스탄의 남부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자료에 의하면 우즈벡키스탄의 인구는 대략 2천만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중 거의 70%(1천4백만)가 우즈벡족이다. 다양한 언어가 있지만 주로 우즈벡어와 투르기어가 사용된다. 그리고 약간의 아랍어, 카라칼팍, 러시아어등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즈벡족은 원래 중앙 아시아에 정착한 터키족의 한부분이었다. 그러나 후에 아시아로 진출한 몽고족과 인근의 아프간, 페르시아인들과의 혼합결혼으로 섞이게 되었다. 몽고족이 오기전까지 이들은 정령숭배가 주된 종교였고 일부 불교와 조로아스터교가 있었지만 모슬렘이었던 몽고의 티무르에 의해 학교와 모스크가 세워지면서 모슬렘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거대한 모슬렘 건축물들이 이지역에서 발견되곤 한다.
생활모습
중앙아시아 우즈벡공화국의 수도는 타쉬켄트이다. 2백2십만인구의 현대적 도시로 러시아 정부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우즈벡공화국은 북서쪽에 카자흐스탄, 남서쪽에 투르크만, 남쪽에 아프가니스탄과 타지크스탄, 그리고 동쪽에 키르기스탄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우즈벡사람들은 대부분 촌락에 모여 살며 아시아의 모슬렘 가족들처럼 많은 식구가 함께 생활하고 있다. 10명에서 12명은 우즈벡족의 가정에선 보통이다. 그들은 진흙과 갈대로 만들어진 벽과 더러운 바닥의 단층짜리 집에서 살고 있다. 좀 도시화된 지역에서는 아파트에서 살기도 한다. 3대가 한집에서 사는 것은 보통이다. 결혼한 아들(여러 아내를 가지고 있으며 첫째는 우즈벡족이고 두,세번째 아내는 다른 족속일 때도 있다)과 그들의 식구들은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 이런 구조로 인해 외부사람들이 이들을 이해하기란 여간 힘들지 않다. 물론 영향력을 미치기도 쉽지 않다.
종교에 대한 관심
우즈벡에서의 사역기회는 무궁무진하다. 젊은이들은 부모나 조상들이 섬기던 이슬람을 수용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지만, 다른 방법으로 종교적인 만족감을 얻고 싶어 한다. 구소련의 개방으로 국내에 활동중인 이단으로 개종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 통일교, 명상종교(하리 크리쉬나)등이 환멸에 빠진 이런 젊은이들의 마음을 잡으려는 이단들이다. 러시아의 복음적인 교회에 소속된 청소년 사역팀이 그들의 정서적인 면과 신앙적인 면을 고취하기 위해 캠핑등을 실시하고 있다. 이런 캠핑은 한때 공산 청년단들이 훈련하던 장소에서 개최되고 있다. 우즈벡의 젊은이들은 물질적인 안락과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인 격식에 간섭받지 않고 자기들의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갈망하고 있다.
많은 젊은이들이 환멸에 빠진 만큼 어른들도 마찬가지이다. 공산주의의 몰락이 절박했던 시기에 우즈벡의 어른들은 공산주의가 차지하던 부분을 이슬람으로 단순히 빠꾸어 놓았다. 한 학생은 “오늘날 ‘나는 모슬렘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형식적일뿐, 실제 내 마음은 모슬렘이 아니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이런 특성들은 우즈벡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 사람들의 마음을 이슬람으로 채워줄 수 없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선교전망
그렇다면 어떻게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텅빈 영혼을 채워줄 수 있겠는가? 한가지 방법은 ‘토양 보존’과 ‘정수’하는 것이다. 살충제와 비료 사용으로 인해 오염된 물과 토양으로 수확 감소와 병충해가 심해졌다. 이들이 농사 방법을 배울 필요는 없지만 소련의 집단 농장식의 작농법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새로운 영농법을 재교육하는 것을 도울 수 있다. 영농 지도를 통해 그들의 실생활을 돕고 그런 속에서 선교를 할 수 있는 여건을 잡아가는 것이다. 만약 아시아의 기독교인들 중에 아프가니스탄이나 키르기스탄과 같은 아시아 국가에 각별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우즈벡 사람들의 식량이나 의류등그들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을 뿐만아니라 생명의 양식도 공급할 수 있는 것이다.
서구 사람들(그들의 생태학적인 문제를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이나 아시아 사람들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러시아 사람이나 타지크 사람은 적합하지 않다. 지금 우즈벡키스탄에 살고 있는 타지크 사람들은 우즈벡사람들로 부터 신뢰를 못받고 있다. 수세기 동안 그래왔다. 깊은 적개심이 복음의 진보를 막고 있기 때문에 도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러시아 사람들과의 관계도 비슷하다. 우즈벡 사람들이 모슬렘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시기에 러시아인들이 정치적, 문화적 신념을 주입하려 했다. 그런 이유들로 인해 러시아 사람들에 개해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서구인들에 대한 적개심이 약간 생기기도 했지만 러시아 사람이나 타지크 사람들만큼 싫어하는 정도는 아니다. 이미 몇몇 지역에서는 서구인들을 환영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효과적으로 우즈벡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마할라스(Mahallas)의 옥 소콜(Ok Sokols;우즈벡 공동체속에서 존경받는 원로들)을 통하는 것이 좋다. 결혼이라든가 재정적인 문제와 같은 일들의 결정권을 가진 한 종족의 지도자처럼 옥 소콜은 복음을 일반인들에게 잘 연결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다. 기독교인들이 우즈벡 사람들을 생산적인 삶으로 인도할 수 있고, 그들의 병을 고쳐줄 수 있는 신뢰성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만 심어 줄 수 있다면 복음은 급속하게 진보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티벳족(藏族)
티벳족은 중국내에서 장족(藏;Zang)이라 불리워진다. 주로 서장자치구(西藏自治區)에 밀집해 살고 있다. 그러나 인도와 네팔, 부탄등지에도 흩어져 살고 있으며 약 500만에 이른다. 이들은 비침략적이고 비폭력적인 온순한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불교의 강력한 영향으로 형성된 민족이기 때문에 그들의 생활 기반은 불교라고 할만큼 불교적인 삶이 몸에 배여 있는 민족이기도 하다. 종교적인 의식이라든가 표식, 문양등도 불교의 강력한 영향력을 받아 정착된 것들이다. 그들은 삶과 죽음, 그리고 영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도 불교에 바탕을 두고 이해한다. 이런때문인지 오랫동안 거의 모든 지역과 동네에 수도원을 가지고 있다. 특히 드레풍(Drepung)과 같은 지역에는 10,000명이상의 수도사들이 살고있을 정도로 일부 수도원은 규모가 매우 크다.
티벳은 1950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침입을 받기전까지 전통적으로 달라이 라마에 의한 신정국가로 불리워졌다. 그후 1959년 3월에는 중국인들에 항거하는 대규모 폭동이 있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티벳 중심부에서만 8만7천명이 죽임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달라이 라마는 정부와 10만명의 티벳인들을 이끌고 인도로 망명하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 정부는 이지역에서 민족주의적인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기위해 많은 중국인들을 이곳에 이주시켜 살도록 했다. 물론 이 가운데는 기독교인들도 포함되어 있어 이들을 통해 복음이 암암리에 증거되기도 했다. 어느 기차역에서 젊은 홍위병은 동료 기독교인과 함께 이런 얘기를 주고받는 것도 목격되었다. "저는 라싸(Lhasa;서장자치구의 수도)로 갑니다. 정부의 지시이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그렇지만 저는 기독교인이고 하나님이 저를 돌봐 주실 것을 믿어요“
현재 티벳은 군사기지로 탈바꿈하여 적어도 30만의 중국군대가 주둔해 있으며 중국의 350개 핵미사일 기지중 1/4이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공식 소식통에 의하면 이지역에서만도 6,000개의 수도원과 전통 구조물, 그리고 사원들이 파괴되고 약탈되었다고 한다. 문화혁명기간에는 80%의 종교 미술품과 문학작품들이 중국인에 의해 팔려 나가거나 훼손되었다. 중국정부는 외부 세계에 신비한 곳으로 알려진 이곳을 개방했다. 1960년대 예수회 사제들이 이곳에 처음 들어갈때보다 훨씬 쉬워졌고 기독교인들이나 교사들도 이곳을 여행하는것 뿐만아니라 티벳인들의 문화를 쉽게 배울 수 있다. 그러나 불교가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이지역에 복음이 침투할 수 있도록 더 많은 기도가 필요하다. 최근에 한 복음적인 기독교단체가 1,000명의 티벳인들을 대상으로 행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불과 5명만이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 지역은 세계의 지붕이라 할 수 있는 높은 산악으로 둘러싸여 있고, 신정통치로 수세기동안 외부로부터 차단되어 있었다. 수년동안 많은 선교사들은 추방을 당하거나 참혹한 순교를 당하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중국과 인도, 네팔등지에 살고 있는 500만명의 티벳족에게 복음을 전하려 수없이 노력했지만 지금까지 불과 수천명밖에 얻지를 못했다. 그러나 고무적인 것은 오랫동안 조상신이라는 사탄의 세력에 얽매여 있던 52개의 티벳 민족그룹들이 차츰 깨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를 따르던 약 10만명의 주민들이 탈출한 북인도에는 12개의 교회와 17명의 티벳 목회자, 사역자들이 사역을 시작했다. 네팔에서는 위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네팔 기독교인들이 복음을 전해 많은 수가 기독교로 개종했다. 최근 티벳을 여행하고 돌아온 여행자들에 따르면 북동부의 티벳인 성도들이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 기도제목
모든 티벳인 교회들이 성장하여 복음으로 훈련된 현지인들이 어디에든 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30여개의 티벳 방언들이 있는데 이 언어들로 된 성경이 번역되지 못한 상태이다. 이들 언어로 성경이 속히 번역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현재 라싸방언으로 된 성경은 재발간을 기다리고 있으며 복음성가는 4개의 방언으로 번역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문명수준이 낮기 때문에 도움이 많이 필요한 종족이고 할 수만 있다면 통일된 언어를 가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면 복음을 전하는데는 매우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 개관
항 목
내 용
주언어
티벳어
산업
양,야크(yak;들소 종류) 방목/벼농사/카페트 제작등
법체계
대부분의 공산국가들처럼 외부적으로 당을 비판하면 죽임을 당하거나 재교육을 받게된다.
문화
1980년대 이후 일부 수도원들이 다시 문을 열고 교육,문화 센타및 공공 예배처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교육
중국 정부의 통제아래 있는 교육이 시행되고 있고 대부분의 고등교육은 중국인들에게 우선권을 주고 있다. 공산정권이 들어서기 전에는 지역의 사원에 있는 수도사들에 의해 교육을 받았다.
의무
맏아들은 부모로부터 권위를 물려받고 둘째아들은 수도사가 되며, 나머지는 형들 아래서 생활하고 일하게 된다.
기타
중국이 점령하기 전까지 티벳인 남성중 20%이상이 수도사들이었다. 당시 수도원은 교육 센타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자신의 아이들이 이곳에 들어갈때 갚을 수 없을 만큼의 빚을 지기가 일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