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요즘 'Facebook'이라는 최첨단 정보통신기술을 통하여 우리 경향교회 청년들과 좀 더 가깝게 만나게 되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데, 딱 한 가지 제게 '조금 거슬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 'Facebook'을 통해서 우리 임마누엘 청년회원들 사이에서 서로 애인으로 사귀고 있는 사람들, 제가 줄임말로 '임청 커플'이라고 명명한 짝들을 많이 알게 되었는데, 게 중에는 정말 '닭살 돋는 애정 행각'을 너무 노골적으로 과시하는(?) 커플들이 있는 것입니다. 설악산인지 어딘지 산 속 깊이 있는 레스토랑까지 찾아가서 파라솔이 달려 있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둘이서 서로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누가 보아도 '설정(?)이 뻔한' 사진을 올리는 커플도 있고, 무슨 '만난 지 백일 된 증표'라고 하면서 커플링을 낀 두 사람의 손을 함께 포개고 있는 사진을 올려놓고서 '앞으로도 변함없이'라는 좀 식상한(?) 타이틀을 붙여 놓은 커플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서로 만날 약속을 그냥 개인 휴대폰으로 하면 될 것을 굳이 뉴스피드 게시판에 올려서 '오늘 나랑 데이트 좀 해 줄래?', '나 지금은 운동하느라고 바빠. 하지만 나중에 끝나고 나서 내가 데이트 신청할 테니까 그때 받아 줘', '그래, 빨리 보고 싶어,' '나도.'라고 아예 만천하에 공개하는 등, 아직도 제 짝을 찾지 못한 솔로들의 '가슴을 긁어 놓는' 커플의 '얄미운'(?) 게시물들이 연일 페북에 올라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 백미는 단연 우리 교회의 모 교육전도사님과 그의 예비 사모님 커플이었습니다. 그 교육전도사님의 예비 장모님께서 예비 사위의 몸보신을 시켜 준다고 크게 한 상을 차려 준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그 예비 사모님께서는 바로 그 밥상 사진을 자랑삼아 페북에 올렸던 것이었습니다. 무슨 '오리고기'와 '오골계'라는 것을 비롯해서 '모듬회'까지 정말 몸에 좋다는 것들만 다 모은 한 상이었는데, 그 사진 밑에 제일 처음으로 댓글을 단 사람이 석기신 목사님이었습니다. "아악! 경악!!! 아ㅏㅏㅏㅏㅏ 부럽다.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 그래도 부러운 걸 어떡하냐?"
안 그래도 그동안 앞에서 언급했던 여러 '임청 커플'들의 닭살 행각에 이미 약이 오를 대로 올라 있던 저 역시 그 사진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질투심(?)이 극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도대체 누구 열 받게 하려고 아예 작정을 하셨나? (나는 결혼 30주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장모님한테 이런 밥상 한 번도 못 받아 봤는데, 아직 결혼하기도 전에 벌써부터 저런 대접 받는 예비 사위도 있으니... 에효, 나는 인생 헛살았어... ㅜㅜ)"라고 댓글을 달았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밑에다가 "(가만, 내가 결혼식 주례 안 해 주면 되는 거 아닌가? 흠~...) ^-^"하는 댓글을 연이어 달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석기신 목사님이 저의 댓글에 즉시 '좋아요'라는 '엄지손가락' 클릭을 하나 올려놓더니 자기도 "가만, 나도 (저 교육전도사님) 이번학기 수업 그리고 졸업고사 패스 안 시켜 주면 되는 거 아닌가? 흠!!!!!!!그래!!!!!!"라고 덧붙이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두 형제 목사들이 정말 유치한(?) 댓글들을 다는 것을 보고 다른 페북의 친구들이 모여 들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 전화평이라는 학생이 "ㅋㅋㅋ목사님들께서 질투하시내욤"이라고 댓글을 달았습니다. 석기신 목사님은 즉시 "화평아, 세상에서 제일 질투가 많은 사람이 목사들이란다!"라고 응답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그 전화평이라는 학생이 정말 멋진 댓글로 그 말을 받기를 "'질투가 많으신 하나님'을 닮아서 그런 건가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전화평' 군의 기가 막히는 해석을 보고 '야! 이 친구는 정말 신학교로 와야 하겠는데.'라고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던 와중에, 아까 처음에 말씀 드렸던 그 '예비 사모님'께서 그 밑에다가 '얄미운 댓글'을 또 하나 더 달았습니다. "아, 원래 사위한테는 씨암탉 잡아주는 거래잖아. 근데 오골계가 좀 더 몸에 좋데! 몸이 온통 새까만 닭! ㅎㅎ 우리 농장이 있어서 거기서 직접 키운 토종 오골계."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제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거의 진심으로'(?) 짜증을 내는 댓글을 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휴~ 이제 제발 그만 쫌!"
하여튼 그날 페북 대화의 화룡점정은 "질투가 많으신 하나님을 닮아서 목사님들도 질투를 하시나요?"였는데, 곰곰 생각해 보면 참으로 엄청나게 심오한 신학적 해석입니다. 똑같은 사실을 두고 똑같이 질투를 한다는 것은 정말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석기신 목사와 제가 그런 젊은 연인들의 '닭살 행각'을 보면서 똑같이 '질투심'을 느끼는 것은 우리 둘 다 '중매결혼'을 하느라고 '연애'라는 것을 제대로 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오해하거나 사모님들한테 일러바치면 안 됩니다. 석기신 목사나 저나 둘 다 지금은 정말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 둘은 요즘 청년들처럼 깨가 쏟아지듯이 알콩달콩하는 연애를 맛보지 못한 '동병상련'이 완벽하게 통했기 때문에 그처럼 '똑같은 질투심'까지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하나님과 똑같이 질투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는 것을 두고 똑같이 질투할 줄 아는 신자라면 정말 하나님과 '호불호'가 같고 '한 편'인 것이 분명하며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공감대'가 완전히 일치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똑같이 질투할 줄 아는 신자'란 곧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자기도 사랑하며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은 자기도 미워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비느하스를 가리켜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한 자', '나를 위하여 질투한 자'라고 아예 별명까지 붙여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민수기 31장 16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지금 이 본문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은 브올 출신의 이방 선지자 발람이 계획했던 일이었습니다. 모압 왕 발락의 청을 받아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던 발람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인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기는커녕 오히려 축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발람은 그 이후에도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저주를 받도록 만드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교묘한 계책을 꾸며서 이스라엘을 패망시키려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브올의 바알신', 즉 자기 고향의 우상신에게 빠져 들게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만들려는 것이었습니다. 발람의 그런 계책은 부분적으로 잘 맞아 떨어졌고,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 중 일부가 하나님의 벌을 받아 죽게 되는 것이 오늘 본문에 기록된 사건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패망에 이르게 했던 미혹에 조금도 동요되지 않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한 자'라고 불린 비느하스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똑같은 것을 두고 똑같이 질투할 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바알 브올의 죄'에 넘어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기꺼이 앞장서서 순종했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진정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할 줄 아는 청년'이라면 자동적으로 이길 수 있는 미혹이 무엇이며 또한 동시에 자기도 절로 좋아하게 되는 일이 무엇인지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경향의 청년들은 '불신자와의 교제'에 휩쓸리지 말고 '교회중심으로 성도와 교통'하는 것을 좋아해야 합니다.
'사람이 이웃하고 잘 사귀며 친하게 지내는 일이 어떻게 잘못 될 수 있을까?'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때로는 그 단순하고 순수해 보이는 교제 속에 신자가 죄악으로 끌려 들어가는 유혹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1절로 5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1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2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3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의 두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리라 5모세가 이스라엘 사사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관할하는 자 중에 바알브올에게 부속한 사람들을 죽이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앞 장들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지금 이스라엘이 모압 변경 부근 싯딤에 진을 치고 가나안 진군을 위해 준비하고 있던 어간이었는데, 이스라엘이나 모압이나 피차 서로 전쟁할 의사는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자연히 이스라엘과 모압의 평민들 사이는 서로 지나가다가 자주 만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얼굴도 좀 익어지는 관계가 되어 갔습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습니다. 물론 그것만 해도 이미 간음죄를 저지른 것이 되었지만,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상 숭배에까지 이르게 된 일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 사건의 발단은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동네에 지금 큰 잔치가 있는데 놀러 오시지요."하고 초대를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정말 귀가 솔깃해질 만한 일이었습니다. 평생 광야생활만 하면서 본 것이라고는 모래사막이요 먹은 것이라고는 만나밖에 없었던 이들에게 좋은 구경거리와 기름진 먹거리가 풍성한 기회가 찾아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평소에 얼굴도 알고 지내는 가까운 이웃 민족이 그처럼 좋은 자리에 정중히 초대해 주는데 그런 청을 거절한다는 것은 오히려 큰 실례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단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초청을 받고 잔치에 참석했을 때부터 그들은 이미 암초의 바다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잔치는 보통 잔치가 아니라 그 모압의 바알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잔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젯밥을 "먹고" 난 후에 뒤이어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게" 된 것은 이미 정해진 식탁의 코스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가나안의 대표적인 우상이었던 바알은 토지의 생산력과 가축의 번식력을 주관하는 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바알을 섬기던 이방 민족들은 그런 소위 '생산과 풍요의 신'을 즐겁게 해 준다는 구실로 그 우상 앞에서 온갖 음란한 짓을 제사라는 미명 아래 버젓이 저질렀습니다. 문자 그대로 먹고 마시고 벌거벗고 제멋대로 노는 것이 그런 우상을 섬기는 제사순서였던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처럼 난잡하게 노는 잔치란 것을 생전 처음 보는 일이었으므로 일단 눈이 휘둥그레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음란한 분위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순식간에 압도해 버렸고 그 결과 그들 역시 함께 흥청망청 '뛰놀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발람이 획책했던 계교였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간단히 도매금으로 넘어가 버리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를 두고 본문은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되고 말았다고 표현했습니다. 여기 '부속되다'라는 말은 '결합하다, 딸려 붙다, 멍에에 걸리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점잖게 번역해서 '부속되다'이지 사실은 바알이라는 우상에게 완전히 빠져 들어가 '코를 꿰이게 된'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시고, 그 일에 앞장 선 "백성의 두령"들을 잡아 처단하라고 모세에게 명하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였던 잔치 자리에 초대받아 갔던 일이 이처럼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그저 단순한 사교적인 자리 같지만 실상은 이처럼 신자의 신앙을 위협하는 자리들이 오늘도 우리 주위 곳곳에 산재해 있습니다. "술 한 잔 나누어야 서로 말이 잘 통한다."라는 것은 소위 거래처 사람과 만나는 자리에서는 불문율처럼 여겨지고, 회식 자리에서 상사가 권하는 술잔을 거절하면 당장 그 상사의 눈밖에 나게 되어 있는 것이 직장생활하고 있는 우리 청년들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신자가 왜 그런 초대에 꼭 응해야 하고 그런 자리에서 스스로 맞장구를 쳐 주어야만 합니까? "술 먹고 정신 몽롱할 때나 말이 통하고 맑은 정신 아래에서는 진실을 말할 수 없는 그런 사람과는 거래할 수 없다."라고 오히려 당당하게 맞설 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상사가 권하는 술잔은 거절하더라도 평소에는 '주님을 대하듯이 육신의 상전을 정성껏 모시면' 오히려 회식 자리에서만 상사에게 아양을 떨고 기분 맞춰 주려 하는 불신 동료들보다 훨씬 더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의 형제자매들 쪽에 가까이 있지 않고 그처럼 그저 바알의 잔칫상의 초청에 좋다고 따라다니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바알브올에게 부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청년회 부흥회를 하는 주말에도 불신 친구들과 영화관에 가는 것이 더 재미있는 사람, 주일 오후에 청년회 모임에 참석하는 것보다는 오랜 만에 동창들을 만나 놀이동산에 가는 것이 훨씬 더 즐거운 사람은 이미 마귀의 유혹에 '코가 꿰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페이스북에서도 같은 경향교회 청년회 회원들 친구는 몇 명 안 되고 그 대신에 불신사회의 친구들이 훨씬 더 많은 사람 – 이미 영적으로는 '바알신' 앞에서 '모압 사람'들과 같이 '뛰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할 줄 아는 사람'은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별로 나쁠 것 없어 보이는 사회적인 교제, 보통 사람들이 의레 함께 하는 불신자의 회중 - 사단은 오늘도 바로 그런 자리를 통하여 여러분들을 '바알브올에게 부속'시키려 하고 있음을 깨닫고 더욱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고 신앙의 선남선녀들 사이의 교제를 즐거워할 줄 아는 청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경향의 청년들은 '부도덕한 이성관계'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순결한 결혼관계'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에 빠지는 것, 정말 사람 사는 곳에서 가장 흔하고도 당연하기만 해 보이는 이것도 때로는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의 길로 넘어가는 문지방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오늘 본문이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6절로 13절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6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회막 문에서 울 때에 이스라엘 자손 한 사람이 모세와 온 회중의 목전에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그 형제에게로 온지라 7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보고 회중의 가운데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8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더라 9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사천 명이었더라 10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1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12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13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종류의 간음도 죄라고 여기지 않는 불신자들은 흔히 "사랑하는 것도 죄냐?"라고들 말합니다. 아마 여기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온 이스라엘 어떤 남자 역시 그런 배짱이었던 모양입니다. 미디안인은 아라비아 광야 쪽에 거주하던 유목민이었는데 아마 이 사건이 일어날 즈음에 모압 지경으로 이동해 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여튼 불신 민족이고 우상 숭배자들이었음에 분명한 백성에게 속한 여인을 그 이스라엘 남자가 데리고 왔던 것입니다.
지금 그러지 않아도 온 이스라엘 백성이 바알브올 사건으로 인하여 난리가 났을 때였습니다. 지금 막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시고 해당 범죄자들이 처형을 당했습니다. 또 회중 가운데 염병이 돌아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이고, 그 때문에 백성들은 "회막 문에서 울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이 사람은 버젓하게 이방 여인을 아예 진중에까지 데리고 와서 "형제"들 앞에서 보란 듯이 자기 장막으로 함께 들어갔던 것입니다.
이것은 죄에 익숙해지면 그 죄에 대한 자기 합리화 역시 더욱 당당해지게 되고, 그 결과 다른 사람의 눈도 의식하지 않고 더욱 담대하게 죄를 짓게 되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방 여인과의 불신 결혼, 결혼 전의 부도덕한 관계, 혹은 일부다처의 죄였을지도 모를 그런 악한 일을 그 이스라엘 남자는 마치 '사랑하는 것도 죄냐?'라는 식으로 백주에 온 백성이 보고 있는 가운데 저질렀던 것이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본인이 좋아서 하는 일을 어쩌겠나?'라는 심정으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슨 말 한마디도 못하고 멍청하니 있을 때에 오직 한 사람만 즉각 반응을 나타내었습니다. 바로 엘르아살의 아들, 제사장 아론의 손자뻘 되는 "비느하스"가 손에 창을 들고 일어나 그 장막에 들어가서 그 남녀를 다짜고짜 찔러 죽였던 것입니다.
비느하스가 너무 심하게 행동했다고 혹시 생각되는 분이 계십니까? 이스라엘 백성 중에나 오늘날의 현대인들 중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겠지만 적어도 하나님께서는 조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비느하스의 그와 같은 행동을 가리켜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한" 행위라고 극구 칭찬하셨습니다. 죄에 대하여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그 비느하스가 그대로 대신 발휘함으로써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더 이상 죄짓지 않도록 막았으며, 그 결과 하나님의 징벌 역시 거기서 끝나게 했다는 뜻이었습니다. 또한 바로 그런 거룩한 질투심을 발한 비느하스와 그의 후손은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영원한 제사장의 직분"의 언약 또한 받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요즘 청년들은 불신결혼을 두고서도 "우리 서로 사랑하는데 뭘요?"라고 아주 당당하게 대꾸합니다. 혼전관계를 가지면서도 "나중에 어차피 결혼할 사이인데 어때요?"라고 스스로를 정당화시키는 소리들이 점점 더 대담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부모들까지도 "요즘 애들 저희들끼리 좋아서 하는 것을 어쩌겠습니까?"하는 말로 자기 자식을 변명해 주는 것이 마치 자식을 잘 이해해 주는 길인 양 여기는 것이 이 시대의 조류가 되고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말 앞에는 그 어떤 것도 죄가 될 수 없다.'는 논리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어떤 경우이든지 간에 다 아름답게만 보이고, 그런 관계에서 야기될 수 있는 죄악을 경고하는 목사들은 아예 시대에 뒤떨어지는 속 좁은 사람으로 보이는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무서운 질투를 유발하는 짓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제가 아까 저와 석기신 목사가 우리 교회의 '임청 커플'들을 보면서 '똑같이 질투'한다고 한 것은 물론 저희들 둘 다 그처럼 경향교회 청년회 안에서 남녀교제를 하는 친구들을 지극히 귀히 여기고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그 어떤 '진한 스킨십'도 해서는 안 되며 특히 이 '강서성전 1만 평' 구역 안에서는 손끝 하나도 닿아서는 안 되지만, 이 규칙만 지키면 제발 우리 임마누엘 청년들끼리 자주 만나고 많이 사귀고 더 알콩달콩하고 뜨겁게 연애들을 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진짜로 안타까운 청년들은 이렇게 좋은 선남선녀들이 우글우글한 우리 교회 안에서도 아직 짝을 찾지 못하고 나이만 들어가는 청년들입니다.
언젠가도 페북에서 어떤 여자 청년이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면서 자기가 열심히 책을 읽고 있다고 자랑하는 글을 페북 담벼락에 올렸는데, 어떤 다른 청년이 "아무개 양은 지금 책보다는 남친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시기"라고 댓글을 달았습니다. 저는 당장 '좋아요'의 '엄지손가락'을 클릭하고는 그 밑에다가 "이런 지당하고 사려 깊은 조언을 아무개 양은 절대로 농담으로 듣지 말고 깊이 새겨들어야 합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자 청년이 "당회장 목사님과 같은 사람만 나타나면 즉시 올인하겠습니다."라는 응답을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글을 보는 순간 가슴이 꽉 막혔습니다. '아니, 이 아가씨가 시집을 안 가려고 아예 작정을 했나? 나 같은 남자를 세상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다고 이런 구름 잡는 꿈을 꾸고 있나?'하고 답답하기 그지없어서 "아무개 양이 정말 시집을 갈 생각이라면 눈을 낮추어도 한참을 더 낮추어야 함."이라고 좀 냉정하기는 하지만 저로서는 그 자매를 정말 아끼는 마음으로 진심어린 조언을 댓글로 달아 주었던 것입니다. 사실 지금 이미 짝을 이루고 있는 '임청 커플'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열이면 열 다 '여자 쪽에서' 눈을 낮추어도 한참을 낮춘 결과 성립된 커플들입니다. 정말 모두 다 '예쁘고도 착한 모범적 규수'들이요 반면에 '복바가지가 터진 행운아 머슴애'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며칠 전에는 페북에서 또 이런 아름다운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아마 누군가 자기의 어린 딸 사진을 페북 담벼락에 올려놓고 자랑하던 중에 있었던 일로 기억됩니다. 그 댓글의 대화 중에 어떤 페북 친구가 이성환 목사님에게 "목사님도 목사님의 딸이 제일 예쁘시지요?"라는, 대답이 너무나 뻔한 질문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그 질문에 대한 이성환 목사님의 대답은 청천벽력이었습니다. "아니오!" 그 페북 담벼락에 들어와 있던 모든 페북 친구들이 충격에 빠져서 어이없어 하고들 있는데, 이성환 목사님의 댓글이 연이어졌습니다. "절대로 '아니오'입니다." - 저를 비롯해서 모든 페북 친구들은 이게 도대체 무슨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소리인지 몰라서 거의 패닉 상태에 빠지게 되었는데, 이성환 목사님의 댓글이 한 줄 더 붙었습니다. "제 딸아이의 엄마가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쁩니다." 우리 경향의 청년들은 우리 교회 안에서 바로 이런 행복한 신앙의 짝, 이처럼 다른 사람들이 '눈꼴시릴'(?) 정도로 부러워할 만한 평생의 반려자들을 꼭 서로 만나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 안에서는 마치 베드로전서 4장 8절의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라는 말씀을 완전히 거꾸로 곡해하고 있는 것처럼 사랑이란 미명 아래 온갖 음행의 죄를 제멋대로 저지르는 일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그런 부도덕하고 불신앙적인 사랑은 오직 '바알브올 앞에서의 음란한 제사'에 자기 몸과 마음이 함께 빠져 들어가 결국 신앙에 대하여서까지 완전히 파선하게 될 길임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는 간음의 죄에 빠지지 말고 '혼전의 순결'과 '결혼 후의 정조'를 지킴으로써 진정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모든 청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우리 경향의 청년들은 '사회적인 성공'에 집착하지 말고 '영적으로 성별된 신앙생활'을 추구해야 합니다.
간음의 죄를 담대하게 짓다가 한 자리에서 함께 죽었던 그 두 남녀를 두고 이어지는 본문의 말씀은 또 한 가지 의미 있는 내용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14절로부터 18절에 기록하기를 "14죽임을 당한 이스라엘 남자 곧 미디안 여인과 함께 죽임을 당한 자의 이름은 시므리니 살루의 아들이요 시므온인의 종족 중 한 족장이며 15죽임을 당한 미디안 여인의 이름은 고스비니 수르의 딸이라 수르는 미디안 백성 한 종족의 두령이었더라 16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7미디안인들을 박해하며 그들을 치라 18이는 그들이 궤계로 너희를 박해하되 브올의 일과 미디안 족장의 딸 곧 브올의 일로 염병이 일어난 날에 죽임을 당한 그들의 자매 고스비의 사건으로 너희를 유혹하였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그 죽은 두 남녀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사회적인 지위가 비슷했다는 사실입니다. 남자는, 우리나라말 번역에 조금 애매하게 되어 있지만, 이스라엘의 한 "족장"의 아들이었고, 그 여자는 미디안 종족의 한 "두령"의 딸이었습니다. 사회적인 지위로 볼 때 양자가 다, 속된 표현을 빌자면, '뼈대 있는 가문'에 속한 자녀들이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의 부모들은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그 두 사람의 관계를 피차 묵인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서로가 사회적으로 유력한 가문을 사돈으로 맞게 되어서 잘 되었다고 속으로는 좋아하고들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불신자인 여자 집안 쪽에서야 그런 생각을 했다 해도 당연한 일이겠지만, 적어도 이스라엘 백성의 한 종족의 족장까지 되는 사람이 아버지로서 그 정도밖에 생각 못했다면 이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두 남녀는 사회적 지위는 비슷한 수준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영적인 지위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과 미디안 족속의 차이는 문자 그대로 '극에서 극'이요 '물과 기름'이나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께서 이 점을 강조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미디안인들을 박해하며 그들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미디안이란 그 무엇보다도 "브올의 일" 즉 우상 숭배에 빠져들도록 유혹한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미디안이란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계속 싸워서 무찔러야 할 상대이지 무슨 사회적 조건이 좋고 출세길이 환히 보인다고 해서 사돈을 맺고 어쩌고 할 관계는 결코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상류사회 출신이고 자기 아들의 세상적 성공에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해서 통혼을 한 것은 결국 "너희를 유혹하는" 손길에 제 발로 끌려 들어간 것이라고 이스라엘 백성을 경책하신 것이었습니다.
이런 시험에 접하게 되는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자녀가 대학입시를 맞이하게 된 부모의 경우일 것입니다. 사춘기라는 중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아들딸이니만큼 더욱 철저히 교회중심, 예배중심의 생활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로, 눈빛부터 또록또록한 학생신앙운동원으로 키워야 함이 마땅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장로, 집사라고 하는 부모들조차 '일단 대학부터 들어가고 나면 신앙교육 같은 것은 나중에 시켜도 늦지 않지.'라고 생각하면서 자녀를 주일예배에도 참석시키지 않고 학원에 보내는 것입니다.
제 표현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자식의 영혼을 부모가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의 그 소중한 아들딸의 영혼을 '바알브올'에게, '사단'에게 아예 갖다 바치고 싶어서 환장을 했습니까? 대입 때부터 자기 자녀를 그런 식으로 키워 놓았으니, 그 아들딸들이 대학교에 들어가고 난 후에도 대학부SFC에 잘 출석도 하지 않고 주말만 되면 대학교의 술친구들과 더 잘 어울리고 다니는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자식을 키워 놓으면 소위 일류 대학을 졸업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처럼 오로지 '사회적 성공 지향식'의 교육을 받고 자란 자녀일수록 사람을 대하고 이성친구를 사귈 때, 아니 교회의 성도들을 만날 때조차 은연중에 상대방의 사회적 배경을 먼저 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같은 교회의 청년회에 있어도 바깥 사회에서의 수준이 자기와 비슷하지 못하다고 여겨지면 자기 마음속으로는 그 형제자매와 아예 담을 쌓아 놓고 삽니다. 이 사람이 돈을 얼마나 버는지, 이 사람의 회사에서의 지위가 어느 정도인지 등등 소위 '사회적 스팩'이라는 것을 '같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거룩한 신자'라는 사실보다 항상 더 앞세워 놓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정작 결혼이 닥치게 되면 더욱 그 문제에 대하여 예민해질 것이 틀림없지 않겠습니까? 청년회 담당 교역자 앞에서 말할 때야 "그저 신앙 좋은 사람만 만나도록 기도해 주세요."라고 하면서도, 막상 당하게 되면 상대방의 인물, 출신 학교, 직장, 집안 배경은 두말할 것도 없고 예단비가 얼마나 되는가 하는 문제까지, 그야말로 불신자 뺨칠 정도로 꼼꼼히 따져 보게 될 것이 뻔한 일입니다. 바로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평생을 살면서 신앙생활의 원수인 '미디안'을 이기기는커녕 항상 도로 '유혹 당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필연적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처럼 미디안 족속을 질투할 줄 아는' 청년은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성공병'에 걸려서 안절부절 못하는 실업자가 아니라, '구원의 확신' 가운데서 늘 기뻐하고 감사할 줄 아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신앙인'이 되기를 부단히 힘써야 합니다. 우리 경향의 청년들은 '출세지향'에 자기 생명 전부를 배팅해 버리는 인생 노름꾼이 아니라, '경건생활'로써 불신사회와 자신을 성별하는 가운데 '예수 목적'으로써 그 어떤 불신 청년들보다 더 큰 '땅의 기업'을 축복으로 받을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라 하면서도 '사회적인 잣대'만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세상적인 성공'에만 집착하다가 결국 '미디안 두령의 딸'과 짝하는 배교에 빠지지 않도록, 매사에 신앙생활에 최우선을 두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격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성령의 지혜와 능력을 충만히 입는 경건생활에서 날마다 진보하며 성숙하는 청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경향의 청년 여러분, 몇 년 전에 '있을 때 잘해'라는 제목의 아침 드라마가 있었다고 합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드라마는 전혀 보지 않지만 워낙 유명해진 드라마의 대사들은 절로 듣게 되는데, 그 중에 하나가 그 '있을 때 잘해'에서도 나왔습니다. 그 드라마에서 남편 김윤석은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다가 아내인 하히라에게 들통이 나게 됩니다. 하히라는 남편에게 당장 이혼을 요구하는데, 김윤석은 이혼만은 못해 주겠다고 하면서 하히라를 보고 '아내와 엄마와 며느리의 자리'를 지키라고 하면서 대판 싸움을 벌이는 장면입니다. 하리라가 "이제 그런 아내니 엄마니 하는 것은 나한테 아무 의미가 없어. 별것 아닌 기집애하고 불륜에 빠진 남편에게는 눈꼽만치도 미련도 없고 애착도 안 가져."라고 소리를 칩니다. 그러자 김윤석은 그 드라마를 시청하고 있던 대한민국의 모든 아내들의 속을 뒤집어 놓은 유명한 대사를 내뱉습니다. "불륜, 불륜 하지 마.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해. 저급하게 불륜이니 외도니 하면서 내 사랑을 모독하고 격하시키지 말란 말이야."라고 한 것입니다.
하히라가 남편의 외도에 대해서 질투를 느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도 정당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김윤석은 자신의 불륜을 사랑이라고 주장하면서 오히려 자기를 모독하지 말라고 큰소리를 치고 있으니, 남편의 입에서 그런 소리를 듣게 된 하히라와 그녀와 똑같은 입장으로 감정이입된 상태에서 그 드라마를 보고 있던 대한민국의 모든 여자들은 기분이 어떠했겠습니까? 정말 분통 터지고 억장 무너질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는 일'을 행하고 있으면서도 그와 똑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너는 오직 네 하나님만을 마음과 정성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 나는 나 외에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질투하는 신이다.'라고 천명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저의 '사교적인 교제'를 두고 '배교'라고 모욕하지 마세요. 우리끼리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뿐인데 '불륜'이니 '간음'이니 하는 저급한 말로 격하시키지 마세요. 제 딴에는 어떻게 해서라도 '사회에서 성공'하자고 열심히 애를 쓰고 있는데 그런 것을 보고 '미디안의 딸의 유혹에 빠지는 죄악'이라고 함부로 정죄하지 마세요."라고 오히려 하나님께 대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이 뒤집어지지 않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들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세상과 짝'하는 음행을 버젓이 저지르고 있으면서도 '내 사랑을 불륜이라고 매도하지 말라.'고, '이런 일을 두고 하나님이 나한테 질투해서는 안 된다.'고 되려 큰소리를 치고 있으니, 정말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신성모독이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똑같은 질투심으로 질투하는 신자'라면 절대로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더 사랑하거나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좋아할 수 있을 리 만무합니다. 우리 경향의 청년들이 진정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할 줄 아는 비느하스'들이라면 영적 기호와 성향과 호불호가 하나님과 똑같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위하여 질투할 줄 아는 신앙인'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처럼 '당신의 질투심을 가지고 세상의 불의와 정욕과 배교를 멀리하며 정죄할 줄 아는 신자'를 바로 '왕 같은 제사장'들로 지금도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는 신자'야말로 하나님께서 특별히 뽑으신, 그야말로 '엘리트 중의 엘리트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사교의 모임들, 그저 달콤하게만 여겨지는 사랑이라는 말,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성공에 대한 욕구 – 아무리 보아도 별 것 아닌 것처럼, 아니 당연한 일인 것처럼만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질투심'을 공감하고 있는 신자에게는 바로 그런 것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들을 정확하게 찾아내고 그것들을 하나님과 똑같이 미워할 줄 아는 것입니다. 오늘도 자신의 영혼과 생명을 죄악으로 유혹하고 있는 '바알브올에 부속된 것'들에 대하여 민감한 경각심을 지키는 가운데 '하나님과 똑같은 질투심을 가지고 악을 미워하며'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함으로써 선에 속하는' 경향의 청년들과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