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글을 짓되, 비갈명지(碑碣銘誌)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그만한 사실이 아니면 굳게 거절하고 받아주지 않았으며, 마음속으로 혼자서 말하기를, “남산(南山)의 돌이 무슨 죄가 있기에 그 아름다운 바탕을 다듬고 깎아 내어 분에 넘치는 말을 쓸것인가.” 하였다. 그러나 윤공이 세상을 떠나게 되매, 그만한 사람을 얻었고 또 그만한 사실을 었었으니, 그것을 서술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공의 휘(諱)는 승해(承解)요, 자(字)는 자장(子長)인데, 수주(樹州) 수안현(守安縣)이 본향이다. 삼한공신 내사령 명의공(三韓功臣內史令明義公) 윤봉(尹逢)의 7대 손이다. 증조부는 검교태자첨사(檢校太子詹事)로 휘는 형(衡)이며, 조부는 대악서승(大樂署丞)으로 휘는 수(壽)이며, 부친은 검교호부상서 행상서호부낭중 사 자금어대(檢校戶部尙書行尙書戶部郞中賜紫金魚袋)로 휘는 유연(裕延)인데, 공은 실로 상서부군(尙書府君)의 둘째 아들이다. 소년 시절에 부지런히 공부하여 1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문과에 두 번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였으므로 음문(蔭門)으로 벼슬길에 나가, 지수주사 판관(知水州事判官)에 보직되었다. 수주는 풍속이 후한 곳으로 일컬어져서 사람들이 모두 가려고 하기 때문에 청렴하기가 어려웠으며, 정사는 모두 그럭저럭 넘기려하여 아전들은 그것이 버릇이 되어서, 자못 완만하고 해이하며 기율이 없었다. 그런데 공이 도임하여서는 모든 것을 법으로 다스리니, 아전들이 두려워하고 꺼려서 감히 바로 보지 못하였으며, 모든 약속을 전부 금지 조문대로 하니, 감히 범하는 자가 없어서 정사를 잘한다고 알려졌다. 임기가 차서 현덕궁(玄德宮) 녹사(錄事)에 제수되었다가 마침내 좌우위녹사 참군사(左右衞錄事叅軍事)에 전근되었다. 얼마 후에 진도 현령(珍島縣令)이 되었는데, 청렴하고 간략함은 한결같이 수주에서 다스리던 것처럼 하였으며 위엄과 사랑은 그보다 더하였다. 고을이 바다 가운데 있으므로 더럽고 누추하기가 오랑캐의 풍습이었으며, 모든 빈객을 응대하는 데에 있어서도 연로의 다른 고을과는 같지 않으므로 봉명 사신들이 이를 괴롭게 여겼는데, 공이 모조리 개혁하여 큰 고을과 같게 만들었다. 또 백성들이 고기 잡고 소금 굽는 이익을 믿고 농사를 매우 게을리하였는데, 공이 독려하여 농토로 돌아가게 하니, 처음에는 백성들이 싫어하는 기색이 있었지만, 수입을 얻게 된 후로는 도리어 즐겨 따랐으며 흉년이 들더라도 부족함이 없었다. 들어와서는 신호위 녹사참군사(神虎衞錄事叅軍事)가 되었다. 계사년에 서울에 병란이 일어나자 점잖은 집안 벼슬하는 이들은 도망해 숨지 않는 이가 없었지만, 공만은 관직을 지켜 움직이지 않고 안색이 태연하니, 임금이 듣고 가상히 여겨 불러 면대하여 권장하기를, “앞서 나는 네가 충성되고 용감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번에 그 실지를 보았다.” 하며, 다시 신호위별장(神號衛別將)을 제수하였는데, 무관직은 공의 본뜻이 이니었으므로 받지 않았다. 후에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임명되었다가 이어 감찰어사에 발탁되었으며, 나가서 서북도(西北道)의 분대어사(分臺御史)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성주(成州)의 세력 있는 무리들이 제멋대로 관청 기생을 죽였는데, 전후 사명을 받들고 간 이들이 처음에는그 형편을 캐어다스리려 하였지만, 평민들에게까지 사실이 번지고 모두 잡아가두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온 고을 안이 소란하여지자 바로 불문에 붙여 두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항상 뇌물질하는 소굴이 되었다. 공은 고을에 들어가 국문하고 안찰하기를 자세히 하여, 수모자와 하수인을 찾아내어 목베고 나머지는 모두 다스리지 않으니 고을 안이 편안해지고 내외에서 모두 경하하였다. 들어와서 상식 봉어(尙食奉御)가 되고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았다. 또, 상서도관 원외랑(尙書都官員外郞)에 전임되고 금인 자수(金印紫綏)를 하사받았다. 임금이 일찍이 간관(諫官) 송단(宋端)을 남쪽 지방에 보내어, 10년이래 전후 수령들의 정사 성적의 우열을 알아보게 하였는데, 수주에서 공의 다스린 사실을 제일로 든 지가 무릇 30년이나 되었다. 송공이 말하기를, “조정의 취지가 10년 내의 일을 한계로 삼았는데, 이것은 매우 요원하게 지나간 일이니, 조서 조례의 뜻에 어긋날 것 같다.” 하였다. 수주의 아전과 백성들이 말하기를, “천자께서 사신을 보낸 것은 무엇보다도 특이한 정사를 구하시려는 것입니다. 윤공의 끼친 은혜가 아직 가시지 않아, 민심이 오히려 전일 같기 때문에, 들어 말하는 것이오니 어찌 시기의 원근을 논하겠습니까.” 하며, 모두들 땅에 엎드려 머리를 숙이고 청언하기를 지극히 애통하게 하였다. 송공이 머리를 끄덕이고 돌아와서 아뢰니, 임금은 더욱 가상히 여기고 감탄하였으며, 담당 관원도 그 일에 대하여는 감히 헐뜯지 못하였다. 모년(某年) 월일에 집에서 돌아가니, 나이는 많지 않았으며 모 월일에 모 산에 장사지냈다. 부인 장씨(張氏)는 대부 경(大府卿) 충의(忠義)의 딸이다. 아들 둘을 낳았는데 송균(松筠)ㆍ송죽(松竹)이다. 송균은 일찍이 밀성(密城) 의원이 되었는데, 청렴하고 엄하기로 알려졌으며, 송죽은 아직도 산관(散官)으로 있고, 딸 하나는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공은 타고난 천품이 단아하고, 정직하여 어디서나 할말을 하며 가는 곳마다 청렴하고 검소하였다. 집에는 남아도는 양식이 없지만 집안일을 묻는 일이 없고, 즐겁고 화평한 모습으로 아침 저녁으로 관직에 충실하고 직책을 다하는 것만을 생각하였으니, 참으로 조정의 바른 사람이었다. 그런데 벼슬은 원외랑에 지나지 못하였으니 아까운 일이었다. 아들 송균 등이 그의 세계(世系)와 관작을 기록해 가지고, 내가 전부터 아는 사람을 통하여 와서 나에게 명문(銘文)을 청하니, 나로서 감히 거절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선친께서 일찍이 공과 더불어 동료지간이었으며, 언제나 와서 방문할 때를 보면 그칠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었는데, 나로서는 비록 그 깊이와 근원을 알지는 못하지만, 약간은 알고 있으며, 또 적혀 있는 옛 사적은 모두 사람들이 입으로 전하여 오는 것이요, 그의 자손이 특별히 나열하여 가지고 와서 청하는 것만도 아니니, 이야말로 그만한 사람, 그만한 사실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붓을 들어서 명문을 아래와 같이 적는다.
자손에게 백금을 물려주는 것은 / 遺子百金 화만을 부르는 것인데 / 惟禍之召 공은 홀로 청렴을 물려주었으니 / 公獨以淸 만세의 보배이네 / 萬世之寶 울창한 저 멧부리에 / 有鬱斯岡 편안하게 묘소를 잡았으니 / 窽安宅兆 공이 이 자리에 보전되셔야 / 公保於此 자손들이 보전되는 것이네 / 迺子孫之保 명을 새겨 광중에 넣어 / 刻銘納竁 후세의 상고를 삼는 바이네 / 爲後之考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 상장군 김공 부인 인씨 묘지명(金紫光祿大夫叅知政事上將軍金公夫人印氏墓誌銘)
이규보(李奎報)
부인의 성은 인씨(印氏)요, 모현(某縣) 사람이다. 모관 모의 손자요, 좌우위 대장군(左右衞大將軍) 영보(榮寶)의 둘째 딸인에, 지금 참정상국(叅政相國) 김원의(金元義)의 배필이다. 비녀 꽂을 나이가 되자 김공에게 출가하였다. 부인은 본가에 있을 때부터 부모 섬기기를 매우 독실히 하고, 형제간에 우애하기를 매우 화목하게 하였는데, 출가하여서는 집에서 부모 섬기던 것을 옮겨서 시부모를 섬기되 예절이 있고 더 공경하며, 형제 화목하던 것을 옮겨서 남편의 집안을 화목하게 하되 더 후하게 하였다. 비첩(婢妾)을 거느리는 데에 있어서는 너그럽고 무게 있으며 까다롭고 세미하지 않으니, 아랫사람들이 무서워하지만 싫어하지는 않았다. 참정공은 원래 장관(將官) 출신이라, 정벌이나 수자리에 나갈 때의 장비 및 준례에 따른 잔치의 비용이 매우 많고 사소한 일이 아니었지만, 부인은 모두 손수하되 정밀하게 하지 않음이 없고 조금도 게으른 기색이 없었다. 공이 벼슬을 역임하여 재상에 이르게 된 것은 부인의 내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집이 원래 넉넉하였지만 그렇다고 손에 여공(女工) 일을 놓지 않았다. 자손들이 간하여 그만두라고 하면 부인은 말하기를, “길쌈하고 누에치는 일은 여자의 직업으로서 너희들의 문서나 필연(筆硯)과 같은 것이니, 어찌 잠시인들 떠날 수 있느냐.” 하였다. 그러다가 벼슬이 정승 지위에 이른 연후에야 거둬치우고 친히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아랫사람들에게 위임하였다. 만년에는 부처 받들기를 더욱 정성으로 하며 항상 《금강경》을 읽었다. 아들을 낳았는데 공수(公粹)라 한다. 아들은 진사로 급제하여 지금 내시감문위 녹사참군사(內侍監門衞錄事叅軍事)가 되어 직한림원(直翰林院)을 겸하였으며, 차자 모(某)는 장관(將官)이 되어 숙위하는 일을 맡았다. 딸은 유창서(劉昌緖)에게 출가하였는데 남편은 지금 장군이 되었다. 공수가 나와 더불어 한림원(翰林院)의 동료이기 때문에 와서 명문을 청한 것이다. 명문에 이르기를,
집을 부유하게 함은 재물만으로 한 것이 아니라 / 肥其家不係財 고요하고 전일한 덕성으로 하였다네 / 秉德之靜專 나라 위해 공 세움은 꼭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 功於國不必身 재주있고 어진 아들을 두면 된다네 / 有子之才賢 아 / 嗚呼 남자 부럽지 않은 일을 / 男子之無羡 부인께서 하였도다 / 夫人其有焉
하였다.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 판예부사 정공 묘지명(金紫光祿大夫叅知政事判禮部事鄭公墓誌銘)
이규보(李奎報)
모 월 일에 참지정사 판예부사 정공(鄭公)이 세상을 떠났다. 장사를 지내게 되자 부인이 울면서 장사 맡은 이에게 말하기를, “장사에는 돌에 행적을 새겨 무덤 길에 표하여 두는 것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을 생각해서 후세에 나타내어 영원히 없어지지 않도록 할 자손이 없으니, 애통함이 이보다 더할 데가 없다. 내가 비록 여자지만 들은즉 정언(正言) 모가 글을 잘한다고 하니, 너희들은 나를 위하여 서신을 가지고 가서 명문을 청구하여 오너라.” 하였다. 모일에 내가 궁중에서 정오를 기다려 막 나오려 하는데 부인의 서신이 이르렀다. 그 사연을 읽어 보니, 동정하고 애석함이 있은즉, 내가 어찌 변변하지 못한 글을 아껴서 그의 뜻을 외롭게 하겠는가. 이에 서문을 짓기를, “공의 휘는 극온(克溫)이요, 전주(全州) 상질현(尙質縣)이 본향이다. 흥위위 중랑장(興威衞中郞將) 모씨가 공에게 조부가 되며, 신호위 대장군 겸 태복경(神虎衞大將軍兼太僕卿) 원녕(元寧)이 공에게 부친이 된다. 공은 처음에 동반에 적을 두어 양온령 동정(良醞令同正)이 되었으며, 불리어 내시(內侍)로 들어갔는데, 진퇴가 예절에 분명하고 또 직무를 수행하기를 정성스럽게 하니, 매우 큰 인물로 여겼다. 이보다 앞서 서쪽 지방을 정벌한 전공에 대해서 아직 상주지 못하였는데, 임금이 그 공으로 금오위 산원(金吾衞散員)을 고쳐 제수하였다. 여러 번 전근하여 신호위낭장 겸 상서공부 원외랑(神虎衞郞將兼尙書工部員外郞)이 이르렀으며, 좀 있다가 형부 원외랑으로 바뀌었는데, 모두 내시직을 그대로 하였다. 또 여러 번 승진하여 흥위위장군 겸 예부시랑(興威衞將軍兼禮部侍郞)에 이르렀다. 마침 강남(江南)지방에 도적이 성하자, 조정에서 삼군(三軍)을 출동하여 토벌하였는데, 공이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싸움에 나갔다. 군사들의 마음을 샀는데, 이때 와서 더욱 군사들을 훈련하여, 싸울 때마다 사로잡는 것이 많으니, 도적이 공의 군사를 만나면 문득 물러가고 감히 그 칼날을 당해내지 못하였다. 들어와서 대장군 겸 태복경(大將軍兼太僕卿)이 되었는데, 모든 역임한 바 중요한 관직은 이 대장군으로부터 시작하였다. 품계에 따라 상장군이 되고, 관직이 바뀌어 상서 우복야가 되었으며, 국가 기밀의 일을 맡아서는 추밀원부사가 되고, 풍교(風敎) 및 헌장(憲章) 관계의 책임으로 어사대부가 되었다. 남대(南臺)에 들어가서는 수사공 좌복야(守司空左僕射)가 되고, 봉각(鳳閣)에 올라서는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가 되었다. 봉각에서 관품이 옮아 참지정사 겸 판예부가 되었으며, 품계가 조산대부(朝散大夫)ㆍ정의대부(正議大夫)로부터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ㆍ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그의 자세한 경력이다. 공이 직무에 임하여 규각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에는 혁혁한 큰 이름이 없었지만 후에는 모두 끼친 은혜가 있었고, 무릇 말고삐를 남쪽 지방에 당길 때나 부월(斧鉞)을 북쪽 국경에서 잡을 때에는 위엄과 사랑이 알맞으니, 사람들이 모두 편히 여겨 지금껏 기리고 노래하여 마지 않는다. 아, 공의 일평생이여. 조심하고 정성스러우며 어질고 화목하였으니, 오래토록 수를 누렸어야 할 것인데 그렇게 되지 못하고, 숨은 덕과 남모르는 공으로 자손이 창성하여야 할 것인데 끝내는 후사가 없으니, 운명을 믿지 못할 일이다. 부인 전씨(田氏)는 양온령(良醞令) 모의 딸이다. 공이 세상을 떠난 것은 사실 정우(貞祐)년 3월(고려 고종(高宗)2년) 2월 모일이었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 애도하며 3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유사에게 명하여 일을 보게 하며 백관을 모아 장사지내게 하였다. 시호를 내려 모 공이라 하고, 뇌사(誄詞)까지 지어서 은총을 베푸셨다. 모 월일로, 모 산에 장사지냈다.” 하였다. 그리고 나는 묘소에 대한 명문에 이르기를,
나타나게 진실하고 어진 아버지여 / 顯允賢考 범과 같은 용맹이 굉장하였다 / 勇虎洸洸 대대로 전해오는 무관들이여 / 仍世戴鶡 모두들 날래고 이름 날렸네 / 皆奮而揚 공에 와서 더욱 크게 떨친 것은 / 至公大振 염(欻)ㆍ장(張) 같은 수염이었다 / 鬐鬐欻張 임금과 신하가 잘 만나 / 風雲感會 멀리 나가 크게 뛰었네 / 遠步超驤 나가서는 장수요 들어와서는 정승 / 出將入相 손엔 부월(斧鉞)이요 허리엔 인장이었네 / 手鉞腰章 기밀과 밀계는 / 機關秘邃 남들이 엿보지 못하였으며 / 人莫窺量 네 조정을 보필하여 / 翼亮四朝 구덕)이 더욱 빛났네 / 舊德彌芳 운수가 좋지 못하여 / 云何不淑 큰 기둥이 쓸어졌네 / 豐棟云僵 백도(伯道)의 후사 없음이여 / 伯道無兒 하늘도 무심하여라 / 天意茫茫 누가 있어 가묘를 이어받아 / 孰承家廟 춘추로 제사 받드나 / 以奉蒸嘗 무엇으로 위로하리 / 何以慰之 나라에서 그 상사 맡았네 / 國典其喪 백관들 모두 분상하니 / 百官奔葬 가시는 길 빛나는 구려 / 祖道有光 남아가 이와 같다면 / 男兒若此 아들 없다 무어 슬퍼하리 / 無子何傷 저 산 언덕을 보소 / 相彼山阿 소나무 가래나무 울창하네 / 松檟鬱蒼 공 계신 좋은 터전/宜公之宮 만세에 남아 있으리/.萬世之藏 슬프고 슬픈지고 그 부인 / 哀哀夫人 눈물 흘려 치마 적시며 / 泣涕霑裳 간절히 명문을 청하니 / 乞銘勤勤 내 마음도 측은하여라 / 有惻于腸 글지어 좋은 돌에 새기니 / 鐫詞樂石 황천에서도 빛이 나리라 / 幽壤焜煌
하였다.
[주D-001]백도(伯道)의 …… 없음이여 : 백도는 진(晉)나라 등유(鄧攸)의 자이다. 등유는 석륵(石勒)의 난리때 아들과 조카를 데리고 피난하다가 사세가 급하여 둘 다 살리기 어렵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우는 일찍 죽었으니 조카를 살려야겠다.”하고서, 자기 아들을 버리고 조카를 살렸다. 그런데 뒤에 후사가 없게되자, 당시 사람들이 이를 한탄하여, “하늘도 무심하다. 등백도로 하여금 아들이 없게 하다니!” 하였다.
선비들이 출세하기 전에는 조정 대신들의 출처와 거취를 말하여 공박하기 좋아하지만, 자신이 그 자리에 있게 되면 자신이 평소 하던 말과 같이 하지 못하는 점이 있는 것이다. 더구나 벼슬이 높지만 뜻은 더욱 낮추며, 부귀하면서 그 족한 것을 아는 자는 실로 고금이 어진 사대부들이 어렵게 여기는 것이요, 말로만 쉽게 남을 공박하는 자가 미칠 바가 아님에랴. 그러면 누가 그럴 수 있는가. 나는 복야 전군(田君)에게서 이것을 보았다. 공의 휘는 원균(元均)이요, 자는 진정(眞精)인데 전주(全州) 태산군(泰山郡)이 본향이다. 증조부의 휘는 모(某)요, 조부는 모인데, 모두 군사호(郡司戶)가 되었으며, 부친 총문(寵文)에 이르러 비로소 조정에 들어가서, 벼슬이 조산대부 신호위 대호군 겸 예빈경(朝散大夫神虎衞大護軍兼禮賓卿)에 이르렀으며, 공이 귀하여지므로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허씨(許氏)는 역시 태산군 출신으로서, 공의 관계로 여러 번 봉작하여 태산군 대부인에 이르렀다. 공은 타고난 천품이 특출하였으며 소년 때부터 벌써 노성한 모습이 있었으니, 사람들이 본래부터 기특이 여겼다. 나이 17세에 성균(成均) 시험을 보아 합격하였으며, 후에 음관(蔭官)으로 들어가 벼슬하였는데,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삼았다. 그러나 널리 옛일을 배우고 글을 잘 지으니, 노숙한 석학들이 모두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경인년에 명종(明宗)이 즉위하면서, 불러들여 궁중 시종으로 일보게 하였는데, 모든 지시와 사명에 있어 모두 의사에 맞으니, 임금이 재사(才士)로 인정하여 여러 번 상주고 총애하였다. 대정(大定) 20년(명종 10년)에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에 임명되었으며, 임인년에는 전중내급사(展中內給事)의 직위에 있으면서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았다. 나가서 합주지사(陜州知事)가 되었는데 청렴하여 뇌물을 받지 않았으며, 잔약한 백성들을 돌보는 데에 있어서는 일찍이 굽어 보고, 그 의사를 좇아서 슬퍼하고 동정하지 않음이 없으니, 실지로 슬피 여기는 성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간사하고 교활한 아전을 처벌하는 데 있어서는, 그 악을 제거하고 죄를 다스리기를 매우 위엄있게 하며 간악한 것을 들추고 숨은 것을 적발하기를 귀신같이 하니, 한 고을이 모두 공경하고 꺼렸다. 옥사를 처결하는 데에는 더욱 자세히 살펴 하니, 형장을 받는 자라도 모두 말하기를, “전군(田君)이 판결하는데 내가 무슨 원망이 있겠는가.” 하였다. 들어와서 시합문지후(試閤門祗候)가 되었다가 감찰어사로 전임되고, 얼마 안 되어 좌사 원외랑(左司員外郞)에 임명되었으며 다시 이부(吏部) 원외랑으로 임명되었다. 이 때 권세를 횡행 방자하는 자가 그 아들의 취직을 청구하였는데, 사리에 옳지 않은 점이 있으므로 공이 끝내 들어주지 않으니, 그 사람은 깊은 원한을 품었다. 후에 길에서 만나 노하여 꾸짖으며 구타하고 걷어차서 도랑 가운데 떨어지게까지 하였는데, 법을 맡은 관청에서도 못 들은 체하였다. 그러나 듣는 사람들은 그것을 욕 본 것으로 여기지 않고, 공의 바른 대로 하여 흔들림이 없음을 장하게 여겼다. 시어사(侍御史)ㆍ형부 좌사랑중(刑部左司郞中)을 역임하였으며, 모두 금인자수(金印紫綬)를 하사 받았고, 얼마 안 되어 다시 장작 소감(將作少監)에 임명되었다. 다음 해에는 호부 시랑으로 나가서 서경 유수(西京留守)가 되었는데, 서경은 번잡한 고을이라 다스리기 어렵기로 알려졌다. 공은 강한 자를 억누르고 약한 자를 북돋아 위엄과 사랑이 서로 비슷하니, 온 도성 안이 칭찬하고 기리어 감히 속이는 일이 없었다. 근세 이래로 유수가 된 자로서 공의 위에 이를 자가 없었다. 임기가 아직 차지 않았는데, 위위 소경(衞尉少卿)에 임명되었다. 춘주(春州)ㆍ전라ㆍ경상 등 3도를 안찰하면서, 청백한 관리를 표창하고 부정한 것을 적발하되 모두 여론의 인정을 받았으며, 모든 이익이 되고 폐해를 제거할 일이 있으면 용감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고, 상소하여 알릴 때마다 임금이 모두 허가하였다. 어사잡단(御史雜端)ㆍ형부시랑을 역임하였다. 태화 2년(신종(神宗) 5년) 겨울 11월에 동경(東京 경주) 의비(義庇)의 무리가 초적(草賊) 괴수 발우(勃尤) 등과 군병을 일으켜 주(州) 현(縣)을 많이 패잔시키고 장차는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다. 임금이 3군을 명하여 길을 나누어 토벌하게 하고, 공을 선발하여 중군 병마부사(中軍兵馬副使)로 삼았는데, 모든 군막 중의 많은 계획이 공의 모의에서 나왔다. 때문에 중군에서 적의 괴수 의비ㆍ발우 및 이름난 도적들을 생포 참획한 것이 이루 헤일 수 없이 많았는데, 실로 이는 공의 힘이었다. 일찍이 운문산(雲門山)에 진을 쳤을 때, 공만이 청사(廳事)를 완비하고, 구부러진 난간을 세워 의지하게 하고는 외를 그 곁에 심으니, 무려 백포기는 되었다. 어떤 이는 이곳은 외를 심을 데가 아니라고 하니, 공이 웃고 대답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 연고를 몰랐다. 공이 가만히 막하 보좌관들에게 말하기를, “도적은 관군이 먼저 요새지를 차지하는 것을 꺼려, 빨리 옮기게하려 하여 자주 와서 놀래고 소란피우기 때문에, 장차 움직이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여서 도적의 희망을 끊는 것이다.” 하였는데, 그의 계략이 모두 이런 것들이었다. 도적이 패멸되기까지 끝내 운문산에 진쳐서 스스로 굳건히 하였다. 계해년에는 군중에 있으면서 이부 사랑을 더 제수받고, 다음 해에 서울에 개선하여서는 판장작감 겸 태자중사인(判將作監兼太子中舍人)에 임명되었다. 을축년에는 나가서 서북면 병마사가 되었다. 북쪽 지방의 풍속과 성품이 강하고 사나워 교화하기 어려웠는데, 공이 부임한 후로는 거의 기율을 범하는 일이 없었다. 임금이 가상히 여겨 발탁해서 추밀원 우승선 겸 태자서자(樞密院右承宣兼太子庶子)를 삼으며, 특별히 내시 민선(閔瑄)을 보내어 소명(召命)을 선포하고 궁궐로 나오게 하였다. 정묘년에는 공사로 하여 탄핵을 만나 추밀원에서 나가, 광록대부 판태복사 지어사대사지대(光祿大夫判太僕事知御史臺事知臺)가 되니, 세력이 승선(承宣)과 비등하므로 사람들은 더욱 영화로 여겼고 공 또한 부족하게 여기지 않았다. 무진년에는 나아가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어사대부 태자빈객(銀靑光祿大夫樞密院副使御史大夫太子賓客)에 임명되었는데 어비이의 혐의로 어사대의 직위를 고쳐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가 되고, 얼마 안가서 지원사(知院事) 이부상서에 전임되었다. 대안(大安) 3년(희종(熙宗)7년)에는 금자광록대부 수사공(守司空) 상서좌복야에 임명되니, 사공(司空)은 1품관직이다. 공이 이 관직에 승진 된 후, 일찍이 한숨쉬며 탄식하기를, “내가 보잘것 없는 신분으로 국가에 도움이 될만한 문장과 무공도 없이 한갖 행정관리로서 벼슬이 1품에 이르렀으니, 이것으로 이미 족하다. 머물러서 다시 무엇을 바라겠는가.” 하였다. 연로함과 병을 칭탁하며 사퇴하기를 매우 간곡하게 하니, 임금이 부득이 허락하였다. 공이 관계에서 물러난 후에는 흔연히 마음을 펴고, 도성 서쪽 별장에 은거하면서 갈건야복(葛巾野服)으로 마음대로 거닐고 기거하며, 매양 친구들과 더불어 술자리를 마련하고 마음대로 즐기면서 재물을 나누는 낙을 이루었다. 무인년 모 월일에 병으로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5세였다. 공은 천성이 조심하고 주밀하여 모든 정사를 시행하는데 있어서 그가 세운 계획은 사람들이 엿보아 알지 못하고 시행된 후에야 비로소 알았으며 이론을 내는 자가 없었다. 돈독하고 충신(忠信)하며 일찍부터 자신을 낮추고 겸손함으로써 수양하며, 다른 사람과 말할 때에는 숨김없이 터놓고 말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즐거워하여 싫증을 내지 않았다. 그러나 중심은 굳강하여 큰 절개에 임하여서는 확연하여 빼앗지 못할 것이 있었다. 모관(某官) 계씨(桂氏) 딸에 장가들어 4남 4녀를 낳았다. 아들 보룡(甫龍)은 진사 과거에 합격하여 내시 대관 서령(內侍大官署令)이 되었으며, 득량(得良)은 머리깎고 중이 되었는데 승직(僧職)으로 삼중대사(三重大師)에 이르렀다. 보구(甫龜)는 금오 위낭장(金吾衞郞將)이 되고, 보린(甫麟)은 관현방판관 중군록사(管絃坊判官中軍錄事)가 되었다. 딸 하나는 내시 궁전고 판관(內侍弓箭庫判官) 안모(安某)에게 시집갔으며, 하나는 내시 개성 목감직(開城牧監直) 문(文) 모에게 시집가고 하나는 수궁 서승(守宮署丞) 이(李)모에게 시집가고, 하나는 대정(隊正) 이(李) 모에게 시집갔는데, 모두 점잖은 집 벼슬아치의 아들이었다. 보룡 등이 이미 모 산에 자리를 정하고, 장사에 앞서 공의 행장을 갖춰 적어 나에게 명문을 부탁하였다. 내가 일찍이 공을 쫓아, 정동군막(征東軍幕)에 있었으므로 공에 대한 것을 자세히 알기 때문에 부탁을 하는 것인데, 내가 사양할 수 있을 것인가. 감히 눈물을 흘려 글발을 적시면서 명문에 이르기를,
세상이 각박하고 백성이 경솔하니 / 世薄民偸 하늘이 어진 선비보내기에 인색하네 / 天嗇賢士 혹시 태어나더라도 / 假如生之 지위를 빌려주지 아니하네 / 不假以位 도가 굴하여 믿어주지 않으니 / 道屈莫信 백성들이 그 이익 입지 못하네 / 民未蒙利 사공 그이에게 만은 / 獨於司空 널리 큰 뜻을 베풀어 / 豁斷厥意 벼슬과 녹봉을 / 載爵輦祿 모두 다 주셨다네 / 悉輟以畀 공이 받아가지고 / 公受而有 무거운 그릇을 등에 진 양 / 如荷重器 혹시나 차서 넘치지 않을까 / 畏盈忌滿 소반의 물 받들 듯하였네 / 若擎盤水 조심조심 수고도 모르고 / 翼翼忘勞 부지런히 나라일에 종사하여 / 服勤王事 나라를 부하게 하다보니 / 旣肥其國 돌아보니 몸은 이미 여위었네 / 顧瘠其已 남쪽에서 병부차고 서쪽에선 인끈 매니 / 南符西綬 백성은 은혜 입고 / 民受其賜 대각에 출입하여 / 出入臺閣 나라의 기율되었네 / 爲邦之紀 관직은 1품이지만 / 品登一品 등에 가시 진 것 같다가 / 猶背負刺 복을 벗고서야 / 軒裳得釋 사지를 편히 쉬었네 / 四體方肆 물러나 별장에 쉬니 / 退逸于莊 성 서쪽 마을인데 / 城西之里 복건 쓰고 한가히 노니 / 幅巾以遊 지팡이 하나, 신 한 켤레였네 / 一杖雙履 그 모습 그리려 하나 / 願言圖形 참 모습을 누가 그릴까 / 寫眞孰似 몸은 갔어도 이름은 꽃다워 / 身沒名芳 청사에 빛날 것을 / 輝映靑史 공은 죽었으나 살아 있음 같아 / 公死猶生 나는 죽었다 말하지 않으려네 / 吾不謂死 새 집에 편안히 쉬니 / 新宮之寧 자손이 번성하리라 / 子孫其熾 돌에 명문을 새기니 / 勒銘貞珉 저 산처럼 오래 가리라 / 與山終始
하였다.
상자 법원 광명(殤子法源壙銘)
이규보(李奎報)
어린 중 법원은 내 아들인데, 내 성을 버리고 부처를 따른 자이다. 나이 11세에 선사 규공(規公)을 따라, 머리 깎고 고깔 쓴 중이 되었다. 스승 섬기기를 매우 삼가고 천성이 영민하여 심부름을 시키면 시키는 뜻에 맞게 하므로 문득 그의 생각대로 하여 일일이 지시가 필요 없었다. 그러므로 스승이 제일 사랑하였다. 절에서 갑자기 병이 나서, 내 집에 와서 누은 지 하룻밤 만에 저 세상으로 가고 3일을 지나 산에 묻으니, 아, 어찌도 이렇게 빠르단 말인가. 경진년 11월에 머리깎고 중이 되었다가 임오년 2월에 저 세상으로 돌아가니, 중이 된 지 무릇 16개월이었다. 내가 드디어 명문을 지어 석 자 나무 널에 새겨서 무덤 속에 넣으니, 슬픈 마음을 적는 것일 뿐이다. 그 시체나 명문은 빨리 썩어 없어지는 것만 같지 못한 것이니, 어찌 반드시 돌에 새겨, 오래도록 전하게 할 것인가. 명문에 이르기를,
중의 그 옷은 하루만 입어도 족한데 / 僧其服一日足 하물며 두 해 겨울, 한해 여름임에랴 / 況二冬一夏 네가 죽은 것이, 오히려 좋은 일이다 / 汝死猶可
하였다.
경산부부사 예부원외랑 백공 묘지명(京山府副使禮部員外郞白公墓誌銘)
이규보(李奎報)
갑신년 맹추에 경산부 수령 백공이 임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부인이 서울에 와서 초상을 끝내고 장사 지내려면서, 내가 군의 옛친구인 것을 알고, 그 아들 희심(希諗) ㆍ숙명(叔明) 등을 보내어 와서 울면서 명문을 구하므로, 내가 여기서 순서를 따라 논하여 적기로 한다. 군은 사람됨이 돈독하고 근실하며, 항쟁하지만 스스로 높은 체하지 않고, 유순하지만 구차히 순종하지 않으니, 순후 정직한 군자였다. 소년 시절에 힘써 배우고 글짓기를 공부하여, 나이 19세에 성시(省試 주ㆍ현의 시험)에 나가 합격하니, 이는 무오년 5월이었다. 6월이 되자 또 춘관(春官 예조) 시험에 나가 급제에 뽑히니, 대개 연이어 다달이 두 번 합격하는 것은 선비로서 얻기 어려운 일인 데다가 군은 또 연소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욱 기특하게 여겼다. 태화(泰和) 6년(희종(熙宗) 2년)에 적(籍)을 내시(內侍)에 둔 후로 궁중의 지극히 가까운 자리에 있은 지 19년인데, 일 보는데 있어 곧고 확고함으로 알려졌다. 우리 조정의 성례(成例)가 무릇 선교(禪敎)의 인재를 뽑는 일을 근신(近臣) 중 글 잘하는 자로 맡아하게 하였기 때문에, 왕이 조계종에서 인재 뽑는 일을 군에게 위임하였다. 군은 정밀하게 도태하고 뽑아 간택하니, 얻은 사람은 모두 한 때의 명승들이었으며 후에는 설법하는 우두머리가 되어 불교계에 활약한 자들이 많았다. 또 서해도(西海道)가 거란의 침략을 받은 뒤로 피폐하기가 더욱 심하니, 임금이 군을 보내어 소복사(蘇復使)로 삼았다. 군이 형편을 보아 가면서 구제하고 양곡을 꾸어 주니, 살려 준 것은 이루 헤일 수 없으며, 백성들은 이로 말미암아 거의 뼈만 남았다가 다시 살이 붙게 되었다. 역임한 관직은 구복원 판관(句覆院判官)에서부터 비서 교서랑(秘書校書郞), 위위시 주부(衞尉寺注簿), 소부시 승(少府寺丞)을 역임하였으며, 다섯 번 째로 옮겨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이르렀고, 얼마 안 가서 예부 원외랑으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선주 방어부사(宣州防禦副使)에 임명되었는데,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한 해를 건너서 다시 경산부(京山府) 수령이 되었는데, 도임한 지 수월에 병이 다시 나서 그만 일어나지 못하게 되니, 향년이 46세였으며, 이 해 9월 모 일에 모 산에 장사지냈다. 슬프다, 군의 총명과 재간으로 관작과 수명을 얻은 것이 여기에 그치고, 문장은 나라의 정치를 윤색하게 하지 못하고, 도덕은 세상을 편안히 건지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더욱 애석한 일이다. 군의 휘는 분화(賁華)요, 자는 무구(無咎)인데 청주(淸州) 남포군(藍浦郡)이 본향이다. 작고한 조의대부 판비서성사 한림학사 지제고(朝議大夫判秘書省事翰林學士知制誥) 휘 광신(光臣)의 아들이며, 작고한 태복경(太僕卿) 추증 삼중대광(三重大匡) 휘 사청(司淸)의 손자이다. 상서 좌복야 임씨(林氏), 휘 유겸(惟謙)의 딸에 장가들어 배필을 삼았다. 희렴(希諗)은 머리깎고 중이 되었으며, 숙명(叔明)은 겨우 관례(冠禮)를 지냈고 아직 벼슬하지 않았다. 군은 늦게 선법(禪法)을 좋아하며 스스로 호하기를 참선거사(參禪居士)라고 하였다 한다. 명에 이르기를,
슬프다 백군(白君)이여 / 於戲白君 여기에 그치고 마는가 / 止此而已耶 어려서 급제하여 / 束髮飛騰 천리에 뜻을 두었는데 / 意在千里 누가 알았으리 갑자기 가시어 / 孰云暴顚 그 뜻 가지고 땅속으로 들어갈 줄을 / 齎志入地 계시는 자리는 매우 좋으니 / 宅兆孔寧 자손에게 복이 되리라 / 維子孫之祉
하였다.
은청광록대부 상서좌복야 치사 유공 묘지명(銀靑光祿大夫尙書左僕射致仕庚公墓誌銘)
이규보(李奎報)
예로부터 사대부들을 보면, 처음에는 일찍이 염치로 조심하여 가득 차지는 않을까 주의하지 않는 이가 없지만, 부하고 귀한 데에 처하게 되면 대체로 세월이 가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면서 태연히 물러갈 줄을 모르는 자가 많았는데, 우리 복야부군(僕射府君)은 이와 아주 달랐다. 나이 64세에 이미 대신의 지위에 올랐으니, 거기서 3정승까지 가는 데에 몇 등급이 있는데 그 지위를 밟지 않았는가. 이보다 앞서 6년 전에 물러 났으니, 은총이 넘치는 것을 피하여서였다. 그렇지 않으면 오래 전에 벌써 최고 지위에 이르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주역》에 이른바, 진퇴 존망(進退存亡)을 알아서 그 바른 것을 잃지 않는다는 것일 것이다. 유씨(庾氏)는 근원이 금성(錦城)의 무송(茂松)에서 나왔으며, 문벌에 있어서 갑족(甲族)이 되는데, 공은 그 출신이다. 공의 휘(諱)는 자량(資諒)이요, 자는 담연(湛然)이다. 증조부의 휘는 모씨인데 검교태자첨사(檢校太子詹事)였으며, 조부의 휘는 모씨인데 검교태자 태사(檢校太子太師)였다. 아버지 모씨는 종묘에 배향한 공신으로, 문하시중 수문전 대학사 판이부사 증공숙공(門下侍中修文殿大學士判吏部事贈恭肅公)이며, 어머니 장씨(張氏)는 상의 봉어(尙衣奉御) 휘는 찬(贊)의 딸이니, 이것이 공의 세계(世系)이다. 공은 사람됨이 중화(中和)하고 순수하며 장중하고 말이 적은데, 어질고 미더운 것은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며, 청렴하고 검소한 것은 세상을 다스릴만하니, 이것이 공의 타고난 천품이다. 의묘(毅廟 의종) 때에 이르러 문신(山東 즉 동반의 의미)들이 점점 성하였는데, 공의 나이 16세에 귀한 가문의 자제들과 더불어 언약하여 친교간이 되었다. 공이 무관으로 견룡행수(牽龍行首)에 있는 오광척(吳光陟)ㆍ이광정(李光挺) 등을 끌어들여 참여시키려 하니, 여러 사람들이 따르려 하지 않았다. 공이 특히 나서서 의논하기를, “비록 사사로이 노는 중에도 문ㆍ무가 구비하면 역시 잘 될 것이지, 무엇이 불가하겠는가. 후에 반드시 뉘우침이 있을 것이다.” 하니, 얼마 안가서 경인년의 난리가 일어나고 문신들이 거의 탕진(湯盡)되었는데, 무릇 그들과 친교가 있는 사람은 모두 화를 면하니, 이것은 오(吳)ㆍ가(李) 두 장수가 구하느라고 많이 힘썼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이 젊어서부터 벌써 기미를 아는 도량이 있었던 것이다. 나이 들자 재상의 아들이라 하여 바로 수궁서 승(守宮署丞)에 보직되었으며, 마침내 대악서승(大樂署丞)에 전근되었다. 좀 있다가 나가 용강 현령(龍岡縣令)이 되었으며, 정사를 하는 데 있어, 사리와 대체를 잘 알아 적발하기를 귀신 같이 하니, 한 지방에서 이름이 났는데 이는 공이 처음 고을을 다스린 것이다. 여러 번 역임하여 어사 상의봉어 시어사 호부낭중 어사잡단(御史尙衣奉御侍御史戶部郞中御史雜端)이 되었으며, 사금자 대부소경(賜金紫大府少卿)으로 병 형부 시랑ㆍ대부경ㆍ지삼사사(知三司事)ㆍ판대부사재사(判大府司宰事)ㆍ태자첨사(太子簷事)ㆍ판합문(判閤門)ㆍ지다방사(知茶房事)에 이르렀는데, 이때의 관직 등급은 모두 정의대부(正議大夫)였으며, 상서 우복야(尙書右僕射)로 관직 등급이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이르니, 이것은 공의 역임한 관직 차례이다. 동남쪽 지역을 염문 안찰하고, 동북쪽 지역에서 군사를 지휘할 때에는 그 위풍이 미치는 곳마다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어짐과 미더움으로 일을 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편하게 여기니. 이 때문에 공이 사명을 받들어 나가서도 칭찬을 듣는 것이다. 대개 정 3품의 작위는, 들어가서 정승이 될 수 있는 자리이지만, 공이 판사재(判司宰)로 있을 때에는 도리어 지방관이 되기를 간절히 청원하였으며, 호부상서로 나가 남경 유수(南京留守)가 되었으니, 이것은 공이 가득차는 것을 사양하고 꺼려서이다. 공은 항상 선군사(選軍使)로 군정(軍政)을 시행하였는데, 청사 위의 기울어진 기둥이 저절로 일어서니, 당시 모두들 이상한 일이라고 떠들어 전하였는데, 이것이 공의 공평무사에서 얻어진 일이다. 관동 지방에 장수가 되어 갔을 때에는 낙산사(洛山寺)에 이르러 관음보살에게 예하였는데, 좀 있다가 두 마리의 푸른 새가 꽃을 물어다 옷 위에 떨어뜨렸으며 또 바닷물 한 움큼 쯤이 솟아올라서 그의 이마를 적셨다. 세상에서 전하여 오는 말이, “이 곳에 푸른 새가 있는데 부처에게 배알하는 자로서 그만한 사람이 아니면 보이지 않는다.” 하니, 이것은 공의 두터운 덕과 지극한 미더움에서 그렇게 된 것이다. 숭경(崇慶) 2년 계유(강종(康宗) 2년)에 연로함으로 하여 퇴직 청원하기를 매우 간곡히 하니, 임금이 부득이 허락하여 은청광록대부 상서 좌복야(銀靑光祿大夫尙書左僕射)로 사면하고 집에 있게 되었다. 당시 경상(卿相)들 중 퇴직하고 편안히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기로회(耆老會)를 만들어서 때로는 혹 술자리를 만들어 마음껏 즐기기도 하였는데 태평하게 놀며 성품을 수양한지 17년이니, 이것이 공의 벼슬을 그만두고 한가로이 지내던 낙이었다. 기축년 8월 7일에, 기로회에 나가서 조용히 잔치하여 마시고 집에 돌아왔는데, 다음날 정오 때에는 문득 팔계문(八戒文 불교의 8개조 계문)을 열람하였으며, 밤에는 세수 목욕하고 편하게 취침하였다. 아침이 되자 집안 사람을 불러 시간을 묻고서는 홀연이 저승으로 가니, 향년 80세인데, 이것이 공의 마지막이다. 이에 앞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죽어서 한 곳에 가니 궁전 누각이 매우 장엄한데, 지키는 자가 있다가 말하기를, ‘여기는 유복야(庾僕射)가 올 곳이다.’ 하였다.” 하였다. 그말이 비록 황당하기는 하지만 생각하면 공의 행적이 이미 부끄러울 것이 없고, 그 세상을 떠남이 이러하였은즉, 그 말도 역시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공이 선한 곳에서 살아 있을 것은 분명한 일이다. 좌승선(左承宣) 김씨 휘 존중(存中)의 딸에 장가들었는데, 3남 2녀가 있었다. 장자 모(某)는 국학학유(國學學諭)가 되었다가 일찍 죽었으며, 차자 모는 지금 판대복사 지어사대사 보문각직학사 지제고(判大僕事知御史臺事寶文閣直學士知制誥)가 되었으며, 계자(季子) 모는 내시의 모 관이 되었는데, 역시 공보다 앞서 죽었다. 장녀는 모 관 모에게 시집갔다가 일찍 과부가 되었으며, 계녀는 모 관 모에게 시집갔다가 지금 과부로 있다. 장사를 지내려면서 지대(知臺) 군이 공의 행적을 갖추어 가지고 와서 나에게 명문을 청탁하니, 내가 글을 받들고 울며 또 말하기를, “아, 옛날에 남긴 정직한 이여, 내가 다시 공과 같은 인인 군자(仁人君子)를 볼 수 없게 되었도다. 명문을 감히 사양할 것이랴.” 하고, 드디어 명문에 이르기를,
드러나게 진실한 대신이여 / 顯允端揆 이 나라의 기강이었네 / 惟邦之紀 백성들은 마음으로 공을 우러르는데 / 民方注心 공은 문득 지위를 버렸네 / 遽釋其位 지위가 지극한데 이르지 않음은 / 位不至極 공 스스로 피하신 것이라네 / 公所自避 공은 스스로 피하였지만 / .公則自避 사람들은 부족하게 생각하였네 / 人歉其意 머릿털 누렇게 오래 사시는 일 / 黃髮壽考 공은 원하지 않았네 / 公所不蘄 공은 원하지 않았지만 / 公雖不蘄 하늘이 진실로 도우셨네 / 天固相之 정직한 마음 신을 감동시켜 / 正直感神 기울어진 기둥서고 새가 날아드니 / 柱立鳥馴 공에게는 보통이지만 / 於公爲常 사람들 보기에야 이상한 일 아닌가 / 怪者維人 아 / 嗚呼 옛 덕 있는 이 가고 마니 / 舊德云亡 세상의 모범 뉘게서 찾으리 / 模範疇倚 저 산은 높고 높은데 / 有山巖巖 물 흘러 그 아래로 감도니 / 水灌其趾 이 곳이 공의 계신 곳 / 是公之宮 서기가 감도누나 / 吉祥止止 돌에 새겨 광 속에 넣으니 / 鑱石納竁 만년토록 밝아 있으리 / 眉目萬祀
대개 하늘의 보시(報施)는, 뿔을 주는 자에게는 날개를 붙여 주지 않는다. 때문에 무릇 선비로서 과거에 우두머리로 뽑히고서 높은 지위에 이른 자가 드문데, 공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미 우두머리로 금방(金牓)에 이름을 빛내어 과거에 올랐으며, 또 높은 관청의 귀한 자리를 다 지내고 게다가 장수까지 하여 슬프고 영화로운 일생이 시종 모두 모자람이 없었으니 이 어찌 이유없이 그러한 것이겠는가. 이는 필시 하늘이 그 중에서도 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자가 있어서, 그런 이에게는 비록 취하기를 많이 하더라도 주기를 싫어하지 않는 것이리라. 공의 휘는 의(儀)요, 자는 절지(節之)이다. 옛 휘는 극의(克儀)인데, 나중에 고쳐 의로 하였다. 그는 삼한공신 휘 용식(容式)의 세보(世譜)에서 나왔는데, 계양(桂陽)의 금포현(金浦縣이 곧 그의 고향이다. 증조부의 휘 모씨는 신호위 산원(神虎衞散員)으로 상장군을 증직(贈職)받았으며, 조부 휘 모씨는 검교태자 소보(檢校太子少保)로 좌복야(左僕射)를 증직 받았다. 아버지 휘 모씨는 창안택 아전(昌安宅衙典)이었는데, 아들 덕으로 좌복야를 증직 받았으며, 어머니 서씨(徐氏)는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휘 숙(淑)의 딸인데, 아들 덕으로 하여 이천군(利川郡) 대부인의 작위(爵位)를 증직 받았다. 공은 젊어서 학문에 힘쓰고 글짓기를 잘 하였는데, 을미년에 태학에 들어가고 뒤이어 과거 시험을 보았다. 급제하기 전에 나가서 청도군(淸道郡)을 다스렸는데, 행실을 닦고 청렴하며 굳세고 정직하여 흔들림이 없이 정사를 하니, 그 지방에서는 청도 철상공(淸道鐵相公) 이라고 칭호하였다. 임기가 차서 팔관보 판관(八關寶判官)에 전보(轉補)되었으며, 그 다음 해에 과거에 나가 장원으로 뽑혀 드디어 내시(內侍)에 적을 두게 되니, 임금이 중히 여겨 일을 시켰다. 여러 번 벼슬하여 장작 주부 당후관(將作注簿堂後官)에 이르렀다가 드디어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임명되었다. 그동안, 빛나고 권세있는 요직으로 말하면, 상서이부 원외랑ㆍ직보문각ㆍ좌사낭중ㆍ기거사인ㆍ지제고ㆍ형부 낭중ㆍ태자사경ㆍ국학 직강ㆍ어사잡단ㆍ중서사인ㆍ사관 수찬ㆍ병부 시랑ㆍ한림 시강학사ㆍ동궁 시강학사ㆍ상서 우승ㆍ우간의대부ㆍ태자 찬선대부를 역임하였다. 공이 일찍이 쌍학사(雙學士)의 관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때 와서는 또 삼대부의 직책을 겸하니, 조정에서 영화롭게 여겼다. 공이 간관으로 있을 적에 적당한 인물이 아니면서 참관(參官)의 직위를 받은 자가 있으므로, 공은 여러 낭관들과 함께 불가하다고 고집하니, 권세를 잡은 자가 기뻐하지 않았으며 이에 모두 성랑관(省郞官)에서 내보내 다른 관직에 보직시켰다. 공도 역시 이 예에 따라 나가서 장작감 지합문사집례(將作監知閤門事執禮)가 되었다. 가장 어렵다고 불리우는 곳인데 공이 비록 처음 시험 당하는 소임이었지만, 진퇴가 자세하고 빛나서 익숙한 구임들보다 나으니, 그의 재주는 어떤 일이나 할 수 있었다. 얼마 안가서 또 좌간의대부 판비서성(左諫議大夫判秘書省)에 임명되었으며, 마침내 추밀원 우승선(樞密院右承宣)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간관직의 제고학사(制誥學士)를 그대로 가지고 있은 것이며, 자급에 따라 지주사(知奏事)ㆍ지이부(知吏部)가 되었다. 공이 여러 해 동안 후설(喉舌)의 관직에 있으면서 모든 주대(奏對)나 응봉(應奉)이 임금의 뜻에 매우 맞으니, 임금이 의지하여 중히 여겼으며 정사도 많이 자문하였다 임신년에 금(金)나라 사신이 와서 정문(正門)으로 들어오려 하므로, 우리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고 통역인을 시켜 왕복하며 안 된다고 하였지만, 저편 사람들이 오히려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날 큰 비가 오는데 여러 관원이 모두 옷을 적시며 서서 기다렸다. 임금이 공을 명하여 가서 효유하게 하니, 공이 가서 먼저 묻기를, “천자가 제후땅을 순행하는 일은 옛날부터 있었는데, 만일 그 대 나라 황제가 소국에 왕림하면 어느 문으로 들어가야 할 것인가.” 하니, 그들이, “천자가 출입하는 곳이야 중문을 버려두고 어디로 들어갈 것인가.” 하였다. “그렇다면 신하로서 임금이 출입하는 정문으로 들어가려 하는 것이 옳으냐.” 하니, 저들이 그 말에 크게 탄복하고 그만 서문으로 들어 왔다. 그가 기회에 따라 계략을 베푸는데 있어서 다른 사람은 생각도 못할 점에 미쳤다. 임금이 아주 가상히 여겨 상을 주었다. 계유년에 승진하여 은청광록대부 첨서추밀사 좌산기상시 한람학사 승지(銀靑光祿大夫簽書樞密事左散騎常侍翰林學士承旨)에 임명되었으며, 을해년에 상부(相府)에 들어가서 금자광록대부 정당문학 좌복야 보문각대학사 수국사(金紫光祿大夫政堂文學左僕射寶文閣大學士修國史)가 되고, 정축년에 수태위 중서시랑 평장사(守太尉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으며, 무인년에는 문하시랑 수문전태학사(門下侍郞修文殿大學士)가 되었다. 일찍이 팔관회(八關會)에서 그 놀이 모양의 굴려 움직이는 것을 법대로 하지 않는 자가 있었는데, 사헌부 관원이 따라가서 대정(隊正)의 목과 옷깃을 부여잡고 욕보이니, 이에 군사와 장수들이 큰 소리로 떠들고 성내어 돌아보며 그만 기와와 자갈을 어사대(御史臺)의 잔치 장막에 던졌다. 그리하여 날으는 돌멩이가 혹 재상의 연석을 지나기도 하였다. 공이 크게 노하여 급히 뜰 아래로 내려가서 우뚝 서며 목소리를 가다듬어 크게 호령하기를, “너희들이 군신과 상하가 모두 있는 나라에 있으면서 감히 이런 짓을 하느냐. 정말 난을 일으키려거든 먼저 늙은 나를 죽이라.” 하며, 두세 번 소리치자 군사들의 마음이 차츰 저지되어 난이 그만 일어나지 못하니, 그 위태로운 때를 당하여서도 두려워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공이 춘주도(春州道)를 안렴 사찰할 때에는, 아전 다스리기를 매우 엄하게 하고 민폐를 개혁하는 데에 모든 힘을 쓰니, 백성이 덕을 입었다. 일찍이 사마시(司馬試)를 맡아 보고, 세 번이나 과거를 맡아 보았는데 거기에서 뽑힌 사람은 모두 당대의 이름난 사람들로서 문사의 성한 것이 근교에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경진년에 벽상삼한대광 수태보 문하평장사 수문전대학사 판이부사(壁上三韓大匡守太保門下平章事修文殿大學士判吏部事)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있으면서 옛 덕망 있는 원로들과 함께 기로회(耆老會)를 만들고, 날마다 서로 좇아 잔치하여 놀면서 재물을 희사하는 즐거움을 이루었다. 경인년 정월 26일에 차츰 병이 생겼다. 그러나 이 날도 자손들을 시켜 바둑을 두게 하고 구경하였으며, 저녁이 되어서도 태연하게 조용히 담소하다가 밤이 되어 고요하게 저 세상으로 가니, 곁에 모신 자들도 알지 못하였다.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향년 78세였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 매우 슬퍼하며 해당 관청에 명해서 상사를 치르게 하여 봉황산(鳳凰山) 기슭에 장사지내고 시호하여 모 공(某公)이라 하였다. 공은 위인이 풍채가 아름답고 장엄하였다. 젊었을 때의 일이다. 송나라 손님 장천각(莊天覺)이 관상을 잘 보았는데 공을 보고서 말하기를, “후일 반드시 재상에 이르리라.” 하였는데, 과연 모두 그의 말과 같이 되었다. 성품이 굳세고 과단성이 있어 다른 사람과 면대하여 꺾을 때에는 아무것도 숨기는 일이 없으니, 이래서 사람들이 많이 꺼리며 혹은 서로 훼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심경은 평탄하여, 당시에는 욕설하였더라도 후에는 모두 잊어버리고 조금도 남겨두는 일이 없기 때문에, 끝까지 그 몸을 보전하였으니, 활달하고 도량이 큰 군자라고 할 만하다. 추밀사(樞密使) 김씨 휘 광식(光軾)의 딸에 장가들어서 5남 3녀를 두었다. 아들 기(耆)는 호부원외랑인데 공보다 앞서 죽었고, 규(揆)는 공부원외랑이며, 심정(心正)은 머리 깎고 부처를 믿어 선사가 되었다. 휘(暉)는 좌우위 대장군인데 공보다 먼저 죽었으며, 희(禧)는 합문지후였는데 역시 먼저 죽었고, 기(祺)는 잡직 서령(雜織署令)이다. 큰딸은 내시 보승 중랑장(內侍保勝中郞將) 윤유효(尹惟孝)에게 출가하였으며, 둘째는 호부낭중 이덕재(李德載)에게 출가하였는데 먼저 죽었고, 세째는 합문지후 함경균(咸景均)에게 출가하였다. 아들 규 등이 공의 행장을 적어 가지고 와서 명문을 간절히 청하므로, 받아서 명문을 다음과 같이 지었다.
조정의 어느 정승 / 孰相皇朝兮 온 나라에 크게 울렸나 / 大鳴一國 아름다울손 우리 태보)님 / 猗我太保兮 그 중에서 제일 우뚝하네 / 寔人之特 빠른 승진으로 대각에 올라 / 步驟臺閣兮 수염 쓰다듬고 정색하니 / 奮髥正色 간악한 관리 기운 꺾여 / 姦吏屛氣兮 전도하며 포복하였네 / 顚倒蒲北 정문이 높고 높으니 / 正門言言兮 사람들 감히 곁에도 못가는데 / 人莫敢厠 되니라 사자의 더러운 발길 / 戎使迹穢兮 그 문지방을 넘으려 했네 / 欲蹈其閾 우리 님 가서 효유하는데 / 公則往諭兮 한 마디 말로 바로 맞히니 / 一言中的 저들의 짐승같은 마음도 / 彼雖獸心兮 환하게 스스로 풀렸네 / 豁然自釋 국가를 위한 주밀한 계책은 / 廟謀密勿兮 손으로 가리키듯 분명하였고 / 以手指畫 푸른 산야에 돌아와선 / 綠野歸來兮 마음 가는대로 한가히 지냈네 / 任性閑適 신선의 수레타고 편안히 가시니 / 霞輧安往兮 저승길 멀고도 멀어라 / 雲路遐逖 옛 덕 있는 이 지금은 없으니 / 舊德云亡兮 누구를 보아 모범을 삼으리 / 于誰取則 봉황이름의 저 산이여 / 鳳凰之山兮 그 날개도 가벼운 것이 / 有騫其翼 땅은 비옥하고 샘물을 맑고 / 土肥泉甘兮 나무숲도 울창하네 / 灌木植植 어느사이 정해 마련한 곳 / 於焉相攸兮 임 계실 그 집이라네 / 是公之宅 무덤 길에 명문 드리나니 / 納銘隧道兮 남은 광체 무궁하리라 / 流耀罔極
나는 일찍이 말하기를, “용(勇)이라는 것은 반드시 힘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요, 먼저 기(氣)로 근본을 삼고, 의(義)를 주인을 삼는 것이다.” 하였다. 어째서 그러냐 하면, 사는 것이 의보다 중하면 그 기운이 겁나고, 기운이 겁나면 비록 무사의 관을 쓴 용사라도 싸움하는 마당에서 떨 수 있으며, 의가 사는 것보다 중하면 그 기운이 격동하고, 기운이 격동하면 비록 띠를 느슨하게 띈 군자라도 날래게 구군(九軍) 중으로 들어가서 아무런 두려운 모습도 없을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은 이치의 당연한 것이다. 의라고 하는 것은 국난을 구제하고, 만민을 살릴 수 있는 것인즉 그것을 몸으로 담당하여 분연히 살 것을 생각하지 않는 자는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그것을 알아 행하였는가. 오직 추밀상국(樞密相國) 이 공(李公) 한 사람 뿐이다. 정우(貞祐) 5년 병자〔고려 고종(高宗) 3년〕에 거란이 지경을 침범하니, 임금이 3군을 명하여 토벌하게 하고 공으로 우군 병마판관(右軍兵馬判官)을 삼았다. 오랑캐와 더불어 관화역(貫花驛) 남쪽 언덕에서 싸우게 되었는데, 오랑캐가 이긴 기세를 타서 진격하여 오니, 우리 군사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나고 한 사람도 뒤돌아 보는 자가 없었다. 공이 홀로 눈을 부릅뜨고, 바로 앞으로 나가서 손수 오랑캐 두어 명을 죽이고 난 후에 드디어 무리를 꾸짖어 함께 나가니, 도적의 무리가 그만 물러갔다. 이 날 공이 아니었드라면 관군이 거의 위태할 뻔하였다. 다음 해에 좌군병마부사에 전임되어, 다시 오랑캐와 더불어 광탄(廣灘)에서 싸웠는데, 공이 먼저 나서서 크게 승전하고 적을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왕이 그의 용맹을 기특히 여겨 좌우위 장군(左右衞將軍)을 제수하였는데, 공이 굳이 사양하며 받지 않으니 마침내 장작감(將作監)으로 고쳐 임명하였으며, 나가서 경상도 안찰사가 되었다. 마침 조정에서 여러 도의 안렴사에게 명하여 각기 그 관내의 군사를 거느리고 3군에게로 나가 우익(羽翼)이 되게 하였으며, 3군에서도 역시 그것을 기다려 구원병을 삼으려고 하여 여러 번 독촉하였다. 이 때 오랑캐 군사가 요해처를 막아 진을 치고 있으매, 원수(元帥)가 비밀히 그 길을 경유하지 말라고 전하여 주니, 공이 말하기를, “싸우러 나가는 데에는 원래가 적을 찾아가는 것이니, 적을 피하는 것은 용감하지 못한 일이다. 지름길을 따라 진군하면 이것은 겁내는 것이 아니냐.” 하며, 드디어 바로 오랑캐의 진지를 뚫고 행군하였다. 오랑캐가 과연 나와서 포위하니, 공이 더불어 싸워서 크게 이기고, 적의 머리 베인 것은 이루 헤일 수 없었다. 포로를 원수부(元帥府)에 바치니 원수가 크게 칭찬하며 상 주었다. 얼마 후에 또 공을 명하여 부하 군사를 데리고 군수품을 순주(順州)로 호송하게 하였는데, 오랑캐가 은주(殷州)로부터 갑자기 나와서 공격하였다. 공이 오직 부하 군사 백여 명과 더불어 싸워서 물리치니, 원수가 성위에서 바라보고 감탄하며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기묘년 3월에는 상서 좌승(尙書左丞)으로 부름을 받았다. 이 해에 도적이 차츰 평정되고 남은 무리가 강동성(江東城)에 들어가서 스스로 보전하니, 조정에서 정예군을 훈련시켜 공으로 하여금 도통(都統)을 삼아 거느리고 가서 치게 하였는데, 공이 굳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는 것을 사양하고, 혼자 말을 달려 나가서 그 고장 군사들을 거느리고 모두 쳐서 평정하고 그대로 머물러 동북면 병마사가 되었다. 다음 해에 추밀원 우승선(樞密院右承宣)으로 불러 들이니, 대개 공이 일찍부터 장군을 굳이 사양하였기 때문에 후설(喉舌)의 귀한 관직으로총애하신 것이었다. 공의 휘는 적(績)이요, 그 선대는 지평현(砥平縣)이 본향이다. 증조부의 휘는 모요, 조무의 휘는 모, 아버지의 휘는 모인데, 감문위 대장군(監門衞大將軍)으로 상서좌복야를 추증받았다. 공은 처음 다방(茶房)에 속하였는데 나아가 맹주(猛州)의 원이 되었다. 교대하게 되면서는 8년간을 보직 받지 못하였다. 명창(明昌) 연간에 다시 다방에 속하였다가 이어 내시로 적을 옮겼으며, 여러 번 벼슬을 바꾸어 합문지후에 이르렀다. 나아가 고주(高州)의 수령이 되었다가 들어와서 상사 봉어(尙舍奉御)가 되고 도관(都官)과 병부의 두 원외랑을 지냈다. 거기서 다시 옮겨 군기 장작감(軍器將作監)ㆍ이부 시랑ㆍ상서 우승(尙書右丞)ㆍ추밀원 좌승선ㆍ사재경(司宰卿)ㆍ판대복사(判大僕事)ㆍ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에 이르렀다. 정우10년 임오〔고종9년〕년에 추부밀사로 선발되었으며 갑신년에 추밀원사ㆍ어사대부로 전임되었다. 그 이듬 해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64세이다. 공은 먼저 모 관(官) 모 씨의 딸에 장가갔는데 손이 없으며, 후에 모 관의 딸에 장가들었는 데도 또 손이 없었다. 공은 위인이 단정하고 정직하며 화평하고 공손하여 사람들이 일찍이 그의 성내는 기색을 보지 못하였다. 귀한 벼슬에 이르러서도 항상 한 방에 혼자 거처하여 담담하기가 청빈한 서생 같으며 집안 일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평상시에는 화평하고 유약하여 담기와 용맹이 없는 자 같지만, 싸우는 진터에 나가게 되면 그 용감한 것이 남보다 뛰어났다. 무리 중에 뛰어남이 이러하였으니, 어찌 보통으로 논할 수 있을 것인가. 옛사람에게 찾아보아도 많이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무릇 관직을 역임하는 중, 그 청렴과 높은 절개나, 이익을 일으키고 폐해를 제거한 것은 이루 다 헤일 수 없다. 그러나 공의 충성스럽고 의로우며 용맹스러운 공업이 뛰어난 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이런 것들은 공에게 있어서는 자질구레한 일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갖추어 적지 않는다. 양자인 모관 모가 와서, 명문 청원하기를 간곡히 하므로 감히 받아 다음과 같이 명문을 짓는다.
군자의 용맹은 / 君子之勇 반드시 의에 근본하는데 / 必本於義 의는 정에서 나오고 / 義生於情 격동하는 것은 기운이라네 / 激之者氣 기운으로 격동하고 / 氣以激之 또 지혜로 도우니 / 又輔以智 이것으로 적을 당하면 / 以此當敵 무엇이 두렵고 무서우리 / 何懼何畏 이내 목숨 버릴지언정 / 寧我捐身 사람 살리는 일 귀하다오 / 活人是貴 사람 살리면 군사 완전하고 / 活衆故軍完 군사 완전하면 내 몸도 온전하다네 / 軍完故身全 몸을 내놓아 온전함 얻으니 / 捐身得全 이것이 더욱 더 어진 일 / 是所尤賢 빛나고 빛난 우리 임은 / 烈烈我公 지혜와 용맹 겸하였다네 / 智勇兼焉 온 나라의 성곽이요 / 一國之城 온 군사의 하늘이였네 / 三軍之天 어찌 이렇게 불행하여 / 云何不淑 어느새 유수처럼 가셨는가 / 奄若逝川 빛나는 그 이름만이 / 有焯其名 일월과 함께 달려 있네 / 日月同懸 백도처럼 후손이 없으니 / 伯道無兒 하늘도 무심하여라 / 天意茫然 좋은 돌에 명문 새기니 / 刻詞貞珉 지하에서도 빛이 나리 / 光于九泉
[주D-001]정우(貞祐) 5년 : 고려조의 고종 3년 병자년은 금(金) 나라 선종(宣宗)의 정우(貞祐) 4년이요, 5년이 아니다. 이 글 중에 보이는 거란의 침범 사실도 고종 3년 8월부터 거란 유종(遺種)의 침구 사실을 말하는 것인즉 여기에 보이는 정우 5년은 곧 정우 4년을 잘못 적은 것이다. [주D-002]정우 10년 : 금나라 선종의 정우 연호는 4년으로 끝났으며, 고려조의 고종 9년 임오년은, 금나라와 같은 선종시대이지만 연호는 정우 4년 후에 두 번째 고친 원광(元光) 1년이 된다. 이 글 중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이렇게 본국인 금나라에서는 벌써 바뀐 지 오랜 연호를 고려에서 그대로 사용하고 있은 것은, 이 때 대륙 방면에서 몽고(蒙古 뒤의 원나라)의 세력이 강대하여지고 금의 세력이 점점 쇠퇴하여 가던 시기인 만큼 실지 고려조와 금조와의 왕래 교제가 빈번하지 않았던 사실을 말하여 주는 것으로 보여진다.
용집(龍集) 무술년 10월에, 공부 낭중 오군(吳君)이 자기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 군이야말로 도를 곧게 행한 고인의 유풍이 있는 자일 것이다. 그 벼슬이 뜻에 맞지 않았다고 혐의를 삼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선비가 시골에서 자라 도보로 서울에 와서 비로소 출세하여 내외의 관직을 역임하여 5품관까지 오르게 되었으니, 이것은 사람마다 얻을 수 있는 일이 아닌데 무엇이 혐의라 할 것인가.” 하였다. 군의 휘는 천유(闡猷)인데, 해주(海州)사람이다. 족보를 보면 대대로 모두가 고을 아전이었다. 아버지 모는 주(州)의 부사호(副司戶)이며 외조부 모도 역시 그 고을 사람으로, 권사호(權司戶)가 되었다. 군은 일찍부터 널리 배우고 문학을 공부하였으며, 기유년에 사마(司馬)시험을 보아 합격하고 드디어 태학에 들어갔으며, 또 갑인년에 과거를 보아 합격하였다. 시험을 보려 하는데 꿈에 거북 한 마리를 잡았다. 그리하여 이름을 일구(一龜)라고도 하였다. 방목(榜目)을 발표하기 바로 앞서 시관(試官)이 꿈을 꾸니, 거북 한 마리가 나타나서 말하기를, “같이 공부하고 같이 온 사람들은 모두 급제를 하였는데, 나만이 버림을 받았다.” 하는 것이었다. 시관들이 모두 놀라서 잠을 깨어 밀어 버려둔 중에서 가만히 거북 이름 붙은 사람의 글을 찾아서 병과(丙科)의 우두머리로 뽑았는데, 방목이 나올 때 보니, 바로 오군이었다. 대화(大和) 병인년(고려 희종(照宗) 2년)에 박주 통판(博州通判)에 보임되었다가 체직되었더니, 드디어 정우(貞祐) 무인년(고종 5년, 실은 금(金) 선종(宣宗)의 흥정(興定) 2년)에 연희궁 녹사(延禧宮錄事)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대관승(大官承) 상서도사(尙書都事)에 역임하였는데 모두 군직(軍職)을 겸하였다. 나중에 경성부 주부(慶成府主簿)에 전직되었다. 정해년에 권지각문지후(權知閣門祗候)에 임명되었으며, 다음 해에는 나가서 고부군(古阜郡)의 수령이 되었는데, 백성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너그럽고 화평한 것을 위주로 하니 사람들이 모두 편히 여겼다. 경인년 겨울에 우정언 지제고로 부름을 받았으며 여러 번 옮겨 상승 봉어(尙乘奉御)ㆍ공부 원외(工部員外)ㆍ시예부(試禮部)ㆍ공부 낭중에 이르렀으며, 향년 71세에 졸하였다. 세상을 떠나는 데 있어서도 역시 병이 없이 홀연히 저 세상으로 간 것이었다. 군은 사람됨이 조심하고 진실하며 겉치레가 없으니, 실로 진실하고 순탄한 선비였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이름을 완전히 하고 녹을 보전하며 또한 끝까지 잘하기를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이랴. 앞서 좌우위 낭장(左右衞郞將) 안필공(安弼公)의 딸에 장가들었는데 2남 1녀를 낳았다. 아들 수승(壽升)은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현령(玄齡)은 신호위 낭장(神虎衞郞將)이다. 딸은 모 관직의 아무개에게 출가하였다. 안씨가 세상을 떠나자 다시 중랑장 김의광(金義光)의 딸에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현성(玄成)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며, 딸 하나는 모 관에게 시집가고, 하나는 모 관에게 시집갔다. 김씨가 죽자 다시 공부 낭중 신유보(申惟甫)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자식이 없었다. 장사지내게 되자, 아들 현령 등이 일찍이 군과 같은 해에 진사에 올랐다고 하여 와서 매우 간절히 명문을 청하므로, 내 부득이 명문에 이르기를,
근실한 우리 임은 / 亹亹夫子 옥처럼 온화하고 화살처럼 곧았네 / 溫如玉兮直如矢 행실에 앞서 뜻을 가다듬으니 / 行已礪志 천지에 부끄러움이 없어라 / 俯仰無愧 벼슬이 그릇에 맞지 않은들 / 官不偶器 역시 무어라 마음에 두리 / 亦豈介意 울창한 저 산이여 / 有鬱其山兮 소나무ㆍ가래나무 울창하여라 / 植植松梓 편안하고 좋기도 하니 / 孔寧且臧兮 그대가 거처하기에 마땅하고 / 宜子之寢位 후손에게도 이로우리라 / 以利于後嗣
하였다.
[주D-001]용집(龍集) : 연차(年次)를 의미한다. 하늘에 용(龍)이라는 이름의 별이 있는데, 이 별은 1년마다 한 번씩 자리를 옳기는 데에서 온 말이다. 집(集)은 머문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옛날에는 이 용집이라는 말을 간지(干支)나 기년(紀年)의 첫머리 또는 끝에 써서 연차를 표시하였던 것이다.
군의 휘는 세화(世華)요 자는 거실(居實)이며, 관향은 진주(眞州)이다. 아버지 휘 모는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이요, 어머니 해양군부인(海陽郡夫人) 김씨는 모 관직 휘 모의 딸이다. 군이 어릴 적에, 아버지가 비록 장관(將官)이지만, 그의 천성이 영특하므로 반드시 스스로 통달함이 있을 것을 알고 일찌감치 학문을 배우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학문에 힘쓰고 글짓기를 공부하게 되었다. 무오년 봄에 성균시(成均試)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임술년에 와서 과거를 보아 병과(丙科)에 뽑혔다. 정묘(貞廟 희종)조에 다방(茶房)에 적(籍)을 두었는데, 얼마 후에 공사로 하여 사면하였으며 후에 다시 내시(內侍)에 적을 두었다. 마침 강종(康宗)께서 붕어하시니 준례에 의하여 면직되었다. 군은 지방관을 지내지 않았는데, 녹을 받는 벼슬자리로 견주 감목(見州監牧)에 제수되었다. 병자년에 도병마 녹사(都兵馬錄事)에 전보되었으며, 정축년 가을에는 나가서 정융분도(定戎分道)가 되어, 원수 조공(趙公)의 신임을 받았으며, 갈리게 되자 공이 표문을 올려, 막하에 머물게 하고 일을 맡기며 매우 중히 여겼다. 공이 조정에 돌아와서는 힘써 천거하여 대영서 승(大盈署丞)에 제수되었다. 경진년 봄에 나가 백령 진장(白翎鎭將)이 되었는데, 고을 다스리기를 청렴하고 공평하게 하였다. 이 고을은 전에는 향교가 없었는데 군이 처음으로 설치하고, 아전들의 자제를 모아 학문을 가르치니, 수년이 못 가서 모두 인재를 이루게 되었으며, 공거(貢擧)에 응시하는 사람이 있게까지 되었다. 온 고을이 사모하며 여러 번 글을 올려 찬양하였다. 임기가 차니 신호위(神虎衞) 녹사에 제수되었으며, 얼마 후 다시 도병마 녹사를 겸하게 되고 이어 여러 번 전직하여 내원서령 비서랑(內園署令秘書郞)에 이르렀다. 갑신년 여름에 중서 주서(中書注書)에 전임되고, 그 해 겨울에 우정언 지제고에 임명되었다. 얼마 후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에 전임되었으며, 비어대(緋魚袋)를 하사 받았고, 얼마 안가서 우사간 지제고에 전임되었다. 정해년 봄에 나가서 남원부(南原府)의 원이 되고, 이듬해 옮겨 동주(東州)의 원으로 전임되었는데 또 다스리기를 제일 잘한 것으로 보고 되었다. 경인년 봄에, 시어사 금자(侍御史金紫)로 부름을 받았고, 다음해 가을에는 나아가 경상도를 안찰하게 되었다. 마침 몽고가 크게 변방에 침구하니 5도(道)의 염안사(廉按使)가 모두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가게 되었는데, 군이 재촉하여 군사를 다스려서, 여러 도에 앞서 제 때에 나가고, 또 군사 통솔하기를 오랜 장수같이 하니, 듣는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임진년에는 예빈소경 어사잡단(禮賓少卿御史雜端)에 임명되었다. 그 해 여름에, 국가에서 오랑캐의 침구로 도읍을 옮기려 하면서 광주(廣州)가 중도의 큰 진(鎭)이라고 하여, 조정의 의논으로 인물을 간택하는 데 공을 보내어 나가 지키게 하였다. 겨울 11월에 몽고의 많은 군사가 와서, 수십 겹으로 포위하고, 몇 달 동안을 온갖 계교로 공격하였는데, 공이 밤낮으로 수비를 마련하고 기회를 보아 응변하되, 그들이 예측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혹은 생포하고 죽인 것도 매우 많았으므로 오랑캐가 어찌 하지 못할 것을 알고 그만 포위하였던 것을 풀고 갔다. 고을이 남쪽 길 요해지에 해당하니, 이 성이 함락되면 다른 성은 알 수 있는 일이었은즉 군이 아니었더라면 일이 위태할 뻔하였다. 옛날 장순(張巡)이 수양(濉陽)을 지키는 일로 말하면 절개는 가상히 여길 바 있다고 하지만, 오히려 몸이 죽고 성이 함락됨을 면하지 못하였다. 군은 능히 죽음으로써 지키고, 살 땅으로 돌이켜서 마침내는 몸도 보전하고 성도 완전하며 만민을 온전히 살렸으니, 그 공업이 장순보다 낫다고 하겠다. 그 때 모두들 곧 은총을 입어 부름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오히려 3년간이나 머무르게 되었으니, 이는 조정의 의논이, 공에게 수어(守禦)의 재주가 있다고 하여 그 사람 바꾸기를 어렵게 생각한 것이 아니겠는가. 을미년 겨울에 조산대부 예부시랑 우간의대부 보문각 직학사 지제고(朝散大夫禮部侍郞右諫議大夫寶文閣直學士知制誥)로 불러 돌아오게 하니, 이는 공에 대해 상을 준 것이었다. 얼마 후 이부 시랑(吏部侍郞)으로 전임되고 간의대부는 그대로 하게 하였으며, 정유년 여름에 또 나가 청주(淸州) 산성을 진수(鎭守)하게 하였는데, 이미 공이 방어에 익숙한 것을 안 몽고군은 끝내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겨울에 조의대부 사재경(朝議大夫司宰卿)에 임명하고, 간의대부는 전대로 하였다. 무술년 중추절에 집에서 아들과 사위들을 불러 달 구경하고, 술 마시면서 조용히 즐기는 중, 잔을 들다가 갑자기 엎어지며 일어나지 못하다가 밝을 녘에 세상을 떠났다. 아, 이상한 일이다. 어찌도 그리 빨리 가시기를 그렇게 한 것인가. 공은 사람됨이 위의와 자질이 침착하고 확실하며, 먼저 글로써 세상에 이름나고 또 행정과 전략에 있어서도 모두 잘 응용하였으니, 이야말로 온전한 인재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정승이 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니, 이것은 명이 아니겠는가. 처음에 예빈 소경(禮賓少卿) 허경(許京)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세상을 떠나고, 흥위위 장군(興威衞將軍) 설모(薛某)의 딸에게 재취하였는데, 소생은 아들 셋 딸 여섯이었다. 아들 수진(守眞)은 남원부 통판(南原府通判)이요, 수년(守年)은 안경부 녹사(安慶府錄事)이며, 수심(守深)은 아직 관례(冠禮)도 지내지 못하였다. 맏딸은 당후관(堂後官) 유경로(柳卿老)에게 출가했으며, 다음은 모 관 다음은 모 관 모에게 출가하고, 두 딸은 아직 어리다. 장사를 지내게 되자, 아들 수년과 사위 경로 등이 행장을 갖춰 적어서 나에게 명문을 청구하니, 영구히 전하게 하려 함이다. 나 역시 일찍이 군과 더불어 아는 사이라 의리상 사양하기 어려우므로, 드디어 명문에 이르기를,
남쪽지방 광주라는 곳은 / 南紀曰廣 바로 요충지인데 / 衝要是扼 성상께서 의지하시기 / 帝所倚重 온 나라 수호하듯 하셨네 / 如護全國 그 당시 우리 임 / 時惟我公 나가서 방백 되었는데 / 出作方伯 오랑캐 와서 포위하니 / 方虜之圍 운명을 알 수 없었네 / 寄命不測 기운으로 진압하고 / 能以氣 담소하며 적 물리쳤네 / 談笑却敵 몸을 돌보지 않고 환란을 구제하니 / 橫身濟難 드러난 공업이 이러하였네 / 顯烈如此 만민을 온전히 살리니 / 全活萬人 음덕이 저와 같도다 / 陰德若彼 세상의 떠들썩한 공론이 / 物論僉騰 모두 정승으로 기약 했네 / 期以三事 등급 따라 올라 가는 것이 / 計級而升 반 걸음 밖에 안 되는데 / 亦跬步耳 하늘이 어이 좀 더 빌려주지 않아 / 天不少借 어느사이 아침 이슬처럼 사라졌네 / 奄若朝露 얼기설기 엃힌 일 / 糾纏紛軋 뉘라서 그 연고를 말하리 / 孰詰其故 찬란한 그 공명 / 爛然功名 천고에 빛날 것이니 / 暉映千古 구구히 명문 새기는 것은 / 刻銘區區 큰 붕새의 한 깃이나 될까 / 大鵬一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