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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M이 행운의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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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현, 박정태, 손자 스크랩 통도사 자장암 [조용헌의 靈地(영지) 기행 ⑩]
만다라 추천 0 조회 34 12.11.18 13: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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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ㅣ동양학 박사 조용헌의 靈地(영지) 기행 ⑩]

영남알프스 '북극성' 터에 자장율사가 세운 통도사 자장암

 

삼보(三寶) 사찰이라 하면 양산 통도사, 합천 해인사, 순천 송광사를 가리킨다.

불보(佛寶)는 통도사이고, 법보(法寶)는 해인사, 승보(僧寶)는 송광사이다.

세 군데 모두 한국에서 규모가 큰 사찰에 해당한다. 이런 이야기는 책에 나와 있는 이야기이므로, 책만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정보이다. 책에 없는 이야기를 해야 독자가 즐겁다.

여기서부터는 필자의 느낌과 체험이다.

해인사는 절의 느낌이 속세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맑고 깨끗한 기운이 있다. 내륙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서 옛날 같으면 깊은 산속에 위치하고 있어서 그런 느낌도 들고, 가야산이 1,000m가 넘는 날카로운 바위산이기 때문이다. 가야산은 오행으로 보면 화체(火體)의 산이다. 불꽃이 이글거린다. 정신이 번쩍 나는 산이다.

반대로 송광사는 아주 부드럽다. 넉넉하고 편안한 감을 주는 절이다. 조계산이 흙이 많이 덮여 있는 육산이라서 산세가 부드럽다. 그래서 나온 우스갯소리가 ‘해인사에서 3년 살면 주먹이 되고, 송광사에서 3년 살면 새색시가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주먹이 된다는 것은 돌산인 가야산의 정기를 받으면 그만큼 강건한 기운으로 충만해진다는 말이다. 강건한 기운이 있어야 화두를 뚫을 것 아닌가!

송광사는 새색시처럼 유순한 기운이므로 포용하는 덕이 있다. 포용이 어디 쉬운가?

 

 

▲ 영남알프스 7개 봉우리가 북두칠성이고, 그중 북극성에 해당하는 영축산 중심에 자장암이 자리 잡고 있다.

 

 

문제는 통도사이다. 필자가 보기에 통도사는 해인사와 송광사를 합쳐 놓은 것 같은 분위기이다. 뒷산인 영축산(靈鷲山)이 1,000m가 넘는 높은 바위산이다. 낮은 산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이 영축산이 병풍처럼 통도사를 한 바퀴 둘러싸고 있다. 날카롭게 솟아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대나무 소쿠리처럼 사찰을 둘러싸고 있는 점이 묘미이다. 바위산의 강건함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소쿠리처럼 포용하는 형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강건함과 폭넓은 포용력을 두루 갖추고 있는 산이 영축산이고, 통도사의 가풍이지 않나 싶다. 

영축산은 그 이름대로 풀어보면 신령스런 독수리를 가리킨다. 독수리 ‘취’(鷲)자를 쓴다. 때로는 ‘취’를 ‘축’이라고도 발음한다. 산이나 지명 가운데 조류과의 이름이 4종류가 있다. 닭, 기러기, 봉황, 독수리이다.

닭 이름이 들어가는 명당은 금계포란(金鷄抱卵)이 있다. 경북 풍기(豊基)에 가면 금계포란 자리가 있다고 전해진다. 금닭이 알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산의 모습은 둥그런 봉우리가 하나 솟아 있는 형국이다. 둥그런 봉우리는 닭의 머리로 본다. 봉황이 들어가는 지명은 둥그런 봉우리인데, 닭머리보다는 그 봉우리 크기가 더 큰 경우이다.

진주에 가면 시내 남쪽에 대봉산(大鳳山)이 있다. 기러기는 닭보다 더 작은 봉우리가 가운데에 하나 있고, 그 좌우 옆으로 2~3개쯤 둥그런 봉우리들이 포진해 있는 형국을 가리킨다. 평사낙안(平沙落雁)의 명당이 있다고 전해지는 전북의 칠보면에 가 보면 이런 산 모습이 보인다.

독수리는 기러기보다 봉우리의 사이즈가 더 큰 경우이다. 기러기보다 큰 형국을 독수리로 보는데, 영축산이 바로 그런 형국이다. 독수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있는 모습으로 보았기 때문에 옛날 어른들이 독수리 축(鷲)자를 써서 영축산이라고 이름 붙였지 않나 싶다. 물론 인도에 가면 영취산이라는 이름이 있다. 이름 자체는 인도의 영취산에서 유래했겠지만 풍수의 물형론(物形論)으로 볼 때도 이 산은 독수리 같다.


울주칠봉은 북두칠성, 그게 영남알프스

영축산은 영남알프스 가운데 하나다. 어떤 이는 영남알프스의 7개 산을 가리켜 ‘울주칠봉’(蔚州七峰)이라고도 부른다. 1,000m급의 고산이 연달아 포진해 있는 이 7개의 봉우리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언젠가 경주의 어떤 도사를 만나 경주의 지세를 놓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 도사는 신라통일 이후에도 수도를 옮기지 않고 그대로 둔 이유는 경주가 북극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북극성이 옮기는 것 봤냐?”

“그렇다면 북두칠성은 어디 있냐?”고 필자가 물었더니 “영남알프스 7개 봉우리가 그 칠성이다”는 대답을 했다. 일리가 있다. 북극성에 해당하는 경주를 싸고 있는 7개의 칠성이 바로 영남알프스라는 이야기다.

영축산은 그 7개 봉우리 가운데서도 중요한 위치이다. 북두칠성의 제일 첫 번째 별 이름이 추성(樞星)이고, 두 번째 별이름이 기성(機星)이다. 추성은 국자 모양의 제일 앞부분이다. 칠성이 매일 한 바퀴씩 하늘에서 회전하는데, 이 추성이 가운데 중심이 된다. 영축산은 추성으로 볼 수 있다. 약간 과대 포장하자면 영남알프스 7개 봉우리의 중심이 영축산이다.

 

 

▲ 자장암의 돌계단 위로 올라가면 마치 용이 승천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통도사는 왜 이름이 통도사인가?  ‘통만법(通萬法) 도중생(度重生)’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만법을 통해서 도를 깨달은 다음에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이리라. 그래서 그런지 통도사는 우리나라 불교사찰의 종가라고 부른다. 불지종가(佛之宗家)인 것이다. 통도사 경내에는 본사 외에도 12~13개의 암자가 있다. 이 암자 하나 하나의 크기도 어지간한 사찰의 규모에 해당한다. 대찰이다.

통도사는 한국에서 가장 큰 절이다. 억불정책의 조선시대에 통도사는 유자들로부터 집중적으로 견제를 받았다고 한다. 견제는 종이와 차를 왕실에 바치라는 공출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통도사 승려들이 종이 만들고, 찻잎 따서 차를 만들어 올리느라고 이루 말할 수 없이 고생했다. 하도 징글징글해서 경내에 있는 차나무와 종이 만드는 닥나무를 모두 갈아엎어 버렸다고 전해진다.

‘불지종가’인 통도사를 처음 개창한 인물은 자장율사(慈藏律師)이다. 그는 원효보다 한 세대 위이다. 원효 선배세대라고 보아야 한다. 통도사와 그리고 통도사 내에 있는 암자인 자장암은 그의 안목으로 잡은 터이다. 터를 보면 안목의 정도를 안다. 자장암은 어떤 터인가. 자장율사는 636년에 중국으로 유학을 갔고, 643년에 신라에 귀국했으니까 자장암은 643년 이후에 세워진 암자로 추정된다.

이미 그는 당나라의 정신적 지주였던 종남산(終南山)을 비롯해 여러 유명 사찰들을 둘러보고 난 다음이었으므로 안목이 국제화된 상태였을 것이다. 그리고 수도를 해서 몸의 기경팔맥(奇經八脈)이 열리고, 정신세계가 확장되면 산세를 보는 안목이 범인과는 다르게 된다. 반경 30리 안에서 일어나는 산천의 기운작용을 감지하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보통 사람은 눈앞의 산봉우리만 보지만, 인천안목(人天眼目)을 갖춘 도인은 주변 30리까지 그 산천의 기운이 뻗치는 모습을 보는 법이다. 통도사를 건립하기 전에 자장율사는 처음 이 자장암 터에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현재 자장암에서 보면 영축산이 빙 둘러싸고 있다. 자장암 정면에도 산이 둘러싸고 있다. 트여 있지 않다는 말이다. 자장율사보다 한참 뒤인 9세기 무렵의 도선국사가 잡은 터도 앞이 트여 있지 않다. 앞이 적당한 높이의 산으로 막혀 있는 곳을 도선국사도 선호했는데, 자장암도 보면 이와 같다. 앞이 가로막혀 있지 않고 터지면 기운이 빠지는 것으로 본 듯하다. 앞이 적당한 높이의 산으로 잘 막혀 있는 곳을 ‘관쇄’(關鎖)가 잘 되었다고 한다. 도선국사가 말년에 주석한 광양 백운산 자락의 옥룡사(玉龍寺) 터도 관쇄가 잘 되어 있고, 속리산의 복천암(福泉庵)도 관쇄가 잘 되어 있는 암자 터로 기억된다. 관쇄가 잘 되어 있으면 기운이 빠지지 않고 저장되는 작용을 한다. 공부가 완전히 끝난 고단자에게는 암자 터의 관쇄 여부와 상관없지만, 일반적으로는 관쇄가 잘 된 곳이 무난하고 좋은 것이다.

 

 

▲ 법당을 지을 때도 바위를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지은 자장암. 암자 바로 앞에 마애석불이 있다.

 

 

 

북극성 영축산이 자장암 둘러싸고 있어

앞산이 너무  높으면 답답한 느낌을 준다. 감옥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앞산이 너무 높아도 기피한다. 적당한 높이가 좋다. 마루에 서서 눈으로 쳐다보았을 때 눈높이 정도의 산 높이가 좋다. 자장암 터는 영축산이 용(龍)처럼 한 바퀴 휙 둘렀다가 다시 그 시작 부분을 되돌아보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를 회룡고조(回龍顧祖)라고도 한다. 용이 고개를 돌려 자기가 출발했던 지점의 조산(祖山)을 쳐다본다는 의미이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영축산은 독수리가 아니라 한 마리 커다란 용(龍)으로 볼 수 있다. 용의 품안에 통도사와 열두세 개의 암자가 둥지를 틀고 있는 셈이다.

거시적인 국세가 이렇다면 미시적인 지점도 살펴보아야 한다. 자장암에는 바위가 돌출되어 있다. 현재 법당 마루에 바위가 돌출되어 있는데, 이는 거북이의 꼬리에 해당하는 바위라 한다. 법당을 지을 때도 일부러 이 바위를 제거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 살려두고 지었던 것이다. 법당은 거북바위의 몸통에 눌러 앉아 있는 형국이다. 거북이 머리는 법당 뒤로 나와 있다고 본다.

그런가 하면 법당 뒤에는 호랑이 바위도 있다. 자장암에 전해지는 옛날 스님들의 유촉(遺囑)에 의하면 법당을 혹시 개축할 때에도 법당 뒤의 호랑이바위를 상하게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왜 그런 부탁을 특별히 남겼을까? 바위에서 나오는 기운 때문이다. 바위를 제거하면 땅에 흐르는 에너지 흐름에 이상이 온다. 이상이 온다는 것은 맥이 빠진다는 의미이다. 맥이 빠지면 도인이 안 나온다. 그래서 법당을 지을 때도 거동하기에 불편은 하겠지만 바위를 함부로 건들지 말라고 당부를 남겼다고 보인다. 땅의 기운을 감지하지 못하고, 이런 유촉을 그저 전설의 고향으로만 받아들이는 요즘 사람들은 이해가 잘 안 가는 대목일 것이다.

그 옛날 자장율사가 처음 거처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지점이 현재 자장암 암주(庵主) 스님의 거처이다. 필자도 작년에 차를 한잔 마시느라고 이 거처에 몇 시간 머물렀던 적이 있다. 차를 마시면서 몇 시간 이야기를 해도 피곤이 잘 느껴지지 않는 자리였다. 엉덩이 부근에서 기가 들어오더니만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기미가 느껴졌다. 이런 자리에서 글을 쓰면 오랜 시간 작업해도 피곤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파트와 이런 명당 터는 확실하게 기운이 다르다.

 

▲ 양산 통도사엔 13개의 암자가 있다. 이 암자들이 다른 절 같으면 독립 절에 해당할 정도로 크다.

 

 

자장율사가 용을 제압하고 절 창건

자장암에는 금와보살 이야기가 있다. 금개구리가 산다는 것이다. 법당 뒤의 바위에는 어른 손가락 하나 들어갈 만한 크기의 작은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 바위 구멍 속에 금개구리가 산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자장율사가 손가락으로 바위에 구멍을 뚫었고, 그 뒤로부터 금개구리가 이 구멍에서 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자장암 방문객들은 이 금개구리를 보려고 몇 시간씩 그 바위 앞에서 기다리기도 한다. 가끔 그 개구리가 나타나기도 하면 사람들은 금와보살을 보았다고 좋아한다.

필자는 2011년 가을에 자장 암주 스님의 배려로 3일간 스님 처소 옆에서 머물렀던 적이 있다. 약 1,400년 전에 자장율사가 공부했던 그 터에서 잠을 자 본다는 것은 의미가 깊다. 유리창문 앞으로 200~300년은 되었을 성 싶은 적송들이 암자 터를 둘러싸고 있다. 높고 장엄하면서도 매우 점잖은 영축산이 둘러싸고 있어서 자동차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는 곳이다. 경치가 아무리 좋아도 자동차 소음이 들리면 별로다. 그곳에 바위맥이 내려와 터를 받치고 있는데, 금상첨화로 노송들 수십 그루가 터를 호위하고 있는 형국이다. 바람이 불면 저 앞산의 녹색 숲들이 흔들리고, 창문 앞의 낙락장송의 가지가 흔들거린다. 푸른 하늘과 청산과 바위와 소나무가 어울린 궁합이다. 게다가 신라불교의 틀을 정립한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자장율사가 머물렀다는 역사적인 암자 아닌가. 한국에서 1,400년의 역사를 지닌 건축지(趾)가 불교 절 말고는 어디에 있겠는가.

몇 년 전에 프랑스의 권위지인 <르몽드> 사장 부부가 자장암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자장암의 이러한 풍광을 보더니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라고 찬사를 보내면서, “다음에 한 번 다시 올 테니까 그때는 꼭 하룻밤만 재워 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한국 사람이 프랑스에 가서 1,000년 넘는 역사를 지닌 수도원의 특별한 방에 잠 좀 재워 달라고 하면 그 사람들이 재워 줄까? 아마 안 재워 줄 것이다.

자장율사는 중국에 가서 여러 명산을 참배했다. 중국의 청량산에 가서 기도했더니 문수보살이 나타나 가사 1벌과 사리 100과(果)를 주었다.

“이걸 가지고 너희 나라에 가라. 너희 나라에 독룡(毒龍)이 사는 영취서산(靈鷲栖山)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쌓고 거기에 가사와 사리를 봉안하거라. 그러면 부처님의 진리가 오래 머물며 하늘의 용이 그곳을 보호하리라”는 가피(加被)를 받았다. 그 가피를 받고 자장율사가 세운 절이 오늘날 통도사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통도사 금강계단 앞의 법당 옆에는 자그마한 연못이 있다. 독룡이 살던 터 임을 암시해 주는 연못이다. 통도사 터는 원래 용이 살던 연못과 늪지대였고, 자장율사가 돌아와 그 용들을 제압해 절을 세운 것이다. 통도사의 출발점이 바로 자장암이었다고 보면 된다. 자장암은 자장율사의 스케일과 안목을 읽을 수 있는 영지이다. 


 

/ 월간산

 

 

 

 

 

 

 

자장율사(慈藏律師)(590-658)

 

자장율사는 신라 선덕왕(善德王) 14년(서기 645)에 당(唐)나라에서 모셔온 석가모니 부처님의 정골(頂骨)과 사리(舍利)를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 성지(五대山 聖地)에 봉안하고 적멸보궁(寂滅寶宮)과 마애보탑을 세워서 한국 불교의 본거지로 삼고

곧이어 국왕에게 황룡사(黃龍寺)에다 구층석탑(九層石塔)을 세워서 신라의 통일의지(統一意志)를 국내외에 천명하도록 건의하여 2년 후에 완성함과 동시에 대국통(大國統)에 추대되어 승려(僧侶)들의 기강을 세우고 강원도에 상주하며 전국 각지에 사찰을 건설하여 국민교화에 힘써 불국정토(佛國淨土) 건설에 정진하다가 통일 전에 입적(入寂)한 암하고불(岩下古佛)의 도시조(都始祖)이다.

 

① 탄생설화(誕生說話)

 

자장율사는 신라가 중흥대도(中興大道)를 지향하던 진평왕(眞平王) 12년(590)에 진골(眞骨) 가문에서 17관등 중 제3위에 해당하는 소판(蘇判) 관직에 있었던 김무림(金武林)의 아들로 태어났다.

늦게까지 아들이 없었던 그는 불교에 귀의하여 아들을 낳으면 시주하여 법해(法海)의 진량(津梁:진粱)이 되게 할 것을 축원하면서 천부관음(千部觀音)을 조성하였는데 어느 날 그의 아내가 품안에 별이 떨어지는 태몽을 꾸고 석가모니 부처님이 탄생한 4월8일에 낳았다는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자장은 민족의 조상신앙(북두칠성)의 별 꿈과 불교의 문수보살(文殊菩薩)의 감응(感應)이 어울린 위대한 인물로 운명(運命)을 타고난 고불(高佛)이다.


② 출가설화(出家說話)

 

자장은 어려서부터 마음이 맑고 슬기로우며 문장(文章)과 생각(生覺)이 풍부하여 세속(世俗)에 물들지 않았다. 부모를 여인 뒤 인생이 무상(無常)함을 깨닫고 자기집을 원녕사라 하여 수도(修道)의 길로 들어섰다.
구도(求道)에 혼신의 정열을 쏟고 있을 때 조정으로부터 여러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에 선덕왕(632-647)이 “취임하지 않으면 목을 베리라.” 하여도 끝끝내 굽히지 않고
“내 차라리 하루라도 계(戒)를 지니고 죽을지언정 백년을 살자고 파계(破戒)하고 살기를 원치 않는다.” 고 마음을 출가에 두고 있으니 왕이 고불(高佛)이 되기를 기대하여 출가(出家)를 허락하였다고 한다.

 

③ 도당 유학(渡唐 留學)

 

자장은 선덕여왕 5년(636)에 승실(僧實)등 제자 10여명과 함께 당나라에 건너가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머물고 있는 청량산(淸?山) 문수보살 석탑(石搭)에게 문수보살의 음밀한 감응(感應)을 기도 하였다.
7일 동안의 기도 후 꿈에 문수보살이 나타나 4구계(四句偈)를 주었다.
꿈에서 깨어서도 그 네귀의 글은 기억할 수가 있으나 모두가 범어(梵語)여서 그 뜻을 전혀 풀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 갑자기 중 하나가 붉은 비단의 금색(金色) 점이 있는 가사(袈裟:스님의 옷) 한 벌과,
부처님의 바리때(식기) 하나와, 부처님의 머리뼈 한 조각과, 사리(舍利)를 가지고 법사의 옆으로 와서는 어찌해서 무료(無聊)하게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하여 법사는 대답하였다.

“꿈에 네 귀의 글은 받았으나 풀지 못하는 때문입니다.” 하였더니 중이 번역하여 말했다.

 

첫째 귀는 일체의 법을 깨달았다는 말이고,
둘째 귀는 본래의 성품은 가진바 없다는 말이고,
세 번째 귀는 이와 같이 법성(法性)을 해석 한다는 말이고,
네 번째 귀는 노사나불(석가모니부처님의 진신)을 곧 본다는 말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물건을 법사에게 주며 다음과 같이 부탁했다.

“이것은 본사 석가 세존(本師 釋迦 世尊)이 쓰시던 도구이니 그대가 잘 보관해 가지십시오.” 그는 또 말했다.
“그대의 본국의 동북방 명주(溟洲)의 경계에 오대산이 있는데
만(萬)의 문수보살이 항상 그 곳에 머물러 있으니 그대는 가서 뵙도록 하시오.”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않았다.

 

그 뒤 수도 장안(長安)으로 갔는데 당나라 태종(太宗)은 사신을 보내 그를 위로하고 승광 별원(勝光에 別院)에 머물게 하였다.

어느날 한 장님이 그의 설법을 듣고 참회하자 곧 눈을 뜨게 된 일이 있었다. 이 소문이 퍼지자 그를 찾아와 계(戒)를 구하는 사람이 매일 1,000여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자장이 당에서 한참 활동하는 시기에 선덕왕은 자장에게 귀국을 청하였다.

 

④ 환국(還國)

 

귀국길에 오른 자장율사는 신라에 불상과 불경 그리고 문화가 미비함을 생각하고 대장경 한 길과 번당(幡幢) 화개(華蓋) 등을 마련하고 데리고 가서 불교문명을 배우게 한 제자 10여명을 거느리고 7년 만에 화려하게 선덕왕 12년(643)에 고국에 돌아왔다.

 

⑤ 문수보살 친견(文殊菩薩 親見)

일연선사(一然禪師)가 이야기로 역사(歷史)로 엮은 삼국유사 제3권편 오대산 오만진신조에서 산중의 고전(古傳)을 상고해보면 이렇게 말했다.

이 산을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살던 곳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자장(慈裝法師)법사로부터 시작되었다.

 

⑥ 오대산 적멸보궁(오대산 寂滅寶宮)

 

자장이 당나라에 유학 가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머물고 있는 청량산에서 문수보살의 감응(感應)을 받고자 7일 동안 기도하여 꿈에 대성(大聖)이 나타나서 4구게(四句偈)를 주고 또한 부처님의 정골(頂骨)과 사리(舍利)를 주면서 환국 하거던 오대산에 모시고 큰 절을 세우라고 당부하였다.

 

사구게는 화엄(華嚴) 사상의 묘지(妙旨)이므로 자장이 도(道)를 깨쳤다는 뜻이고 사리를 오대산에 모시라 하였기에 청량산을 중심으로 한 산세를 자세히 살펴 보았다가 돌아와서 지금의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서 당나라에서 본 문수보살이 머문다는 지형을 찾아내어 석가모니 부처님의 정골과 사리를 정중히 봉안하고
그 표식으로 “마애보탑”을 설치하고 참배하는 적멸보궁(寂滅寶宮)을 최초로 세운곳이 지금의 월정사 상위에 있는 상원사(上院寺)이고 월정사(月精寺)는 적멸보궁을 관리하며 참배자에게 편리를 공여하며 도(道)를 닦는 인재 양성소 이다.

그래서 오대산을 한국에서의 불교성지(佛敎聖地)라 하고 도를 닦는 암하고불의 본거지이다.

 

⑦ 구층석탑 건립(九層石塔 建立)

 

자장율사는 불국토(佛國土) 통일(統一)을 구사하고 국왕에게 황룡사(黃龍寺)에 구층 석탑을 세워서 국내외에 불국토 통일의 신라의 의지를 천명할 것을 건의하여 2년에 걸쳐서 설립하였다.
이 탑은 삼국통일을 기원한 원탑(願搭)이기도 하다.
기공(起工)은 선덕원 14년(645)이고 완공(完工)은 선덕왕 15년(646)이다.

 

⑧ 대국통 추대(大國統 推戴)

 

자장율사가 강원도 오대산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정골과 사리를 모셔놓고 이어 황룡사에 구층 석탑을 세워 통일 의지를 천명하였으니 이제 불국토를 건설을 주도(主導)할 인물로 국왕이 자장율사를 백관회의에서 대국통으로 추대하여 불교계의 기강을 확립하고 국민교화를 위하여 정진(靜振)하게 되었다.

 

⑨ 불국토 건설(佛國土 建設)

 

자장율사의 대공훈(大功勳)은 불교홍통(佛敎弘通)을 통한 국민교화와 불교 교단(敎壇)의 기강확립(紀綱確立)의 능력과 수완 그리고 사람의 감성을 다듬는 강론(講論)에 있다.

승려 수행 진도에 따른 직책이 합리적으로 꾸며지고 교단이 평화스럽고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수행하다 보면 승진하게 되고 사찰을 갖거나 주지가 되며 성불하게 된다.

자장율사는 왕의 요청이 있으면 궁중에 들어가서 자문에 응하고 대승론(大乘論)을 강하여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향상시키고 황룡사에서 7일기도를 자주 열어서 보살계본(菩薩戒本)을 강하였다.

지도층에 있는 고승은 항상 승려들의 수행 진도에 관심을 갖고 토굴이나 암자로 마련해 주어 도와주어 제자를 양성하게 조직화 하였다.

자장율사가 화엄경을 강할 때 52인의 여인이 나타나 법을 듣고 깨달아 그 문인(門人)들이 수만금을 내어 나무를 심어 이적(異蹟)을 기념하였다.

그리하여 신라 통일 전에 지상 극락세계를 이룩하여 불국토 건설을 먼저 하여 호국불교의 길을 터 놓았다.

 

⑩ 양산 통도사 건립(梁山 通道寺 建立)

 

자장율사는 선덕왕 15년(646)에 양산 통도사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고
적멸보궁을 세웠다.

 

⑪ 정암사 건립(淨岩寺 建立)

 

삼국유사 제3권 탑상 오대산 오만진신(五萬眞身) 제4조에 의하면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고한리(古汗里)에서 자장율사가 문수보살을 꿈에 뵙고 석가모니 부처님에 사리를 수마노탑(水瑪瑙塔)에 모시고 적멸보궁을 세웠으며 화암(畵岩)동굴과 약수(藥水)로 유명하여 강원도 문화재 제32호로 보존되어 있다.

 

⑫ 설악 신흥사 창건(雪岳 新興寺 創建)

 

강원도 향교 서원 사찰지에 의하면 자장율사가 진덕왕 6년(653)에 사찰을 세우고
계조암(繼祖?)에 구층석탑을 세워 부처님 사리를 봉안 하였다고 한다.

 

⑬ 백담사(百潭寺)

 

신라 진덕여왕 원년 (서기 647)에 자장율사가 창건하고 한계사(寒溪寺)라 하였다.
아미타불(阿彌陀佛 : 대서지보살.관음보살) 3위를 받들어 봉안하였다.

 

⑭ 강원도 영주(江原道 永住)

자장율사는 만년에 경주를 떠나 명주(溟洲) 땅을 찾아서 수다사(水多寺)를 세우고 상주하여 각지에 사찰을 세우다가 658년에 입적(入寂)했다.

그래서 조정에서 일이 생기면 사신을 보내서 자문(諮問)을 구했다.
그런 관계로 강원도 사람을 암하고불(岩下高佛)이 사시는 곳에 사람이라는 뜻에서 인격자(人格者)로 대우했다고 본다.

 

 


자장 율사가 당나라로 건너가 공부할 때였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피곤해진 자장 율사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쉬면서 경전을 꺼내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곳을 지나가던 어느 스님이 이르기를

"백지를 볼 줄 알아야 붓대를 굴리지. 입으로만 외다가 몸 떨어지면 말도 떨어지고 말것을 ……."

하는 것이었다.

이 말에 충격을 받은 자장 율사는 그 후 청량산 기슭 문수 보살상 앞에 앉아 관하기를 천일 동안 계속했다.

그러다 문득 자장 율사는 '문수 보살이 나이고 내가 문수 보살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한 노승이 나타나

"네가 나이고 내가 너라면 내가 너에게 내 주장자를 전하노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짚고 왔던 지팡이로 머리를 탕 치는데 그 소리가 하도 요란해서 노승을 쳐다보니 그 노승의 머리에서 사리가 나오는 것이었다.그리고는 사리를 받아 든 노승이 이르기를

 

"이 사리는 부처님의 사리이며 가사 한 벌은 부처님께서 입으시던 것이니라.그대에게 전하노니 그대 나라에 돌아가 절을 짓고 탑을 세워 잘 봉안하라."고 했다.

 

자장 율사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지성으로 삼배를 드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노승은 온데간데 없고 머리에 구멍 난 문수 보살상만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로부터 자장 율사는 종남산에서 수행 정진한 후 신라로 돌아와 월정사, 마곡사, 통도사 등 많은 절을 짓고 탑을 세웠으며 통도사에 사리와 가사를 봉안하고 사부 대중을 교화하였다.

그러나 조선조에 이르러 불교가 탄압을 받으면서 스님들은 끌려가고 절은 부숴져 자연히 도둑의 소굴로 변해 갔다.

그즈음 마곡사도 형편은 마찬가지였는데 어느 날 어떤 고승이 왕명을 받고 그 절로 가게 되었다.

그 고승은 왕벌 속으로 들어가 수십만 마리의 벌 군사를 동원하여 도적들을 물리쳤다.

그 후 그 스님은 조정에서 내린 상으로 망가진 절을 보수하고 도제 양성을 위해 애쓰고 있었는데 어느 날 어느 수좌가 와서 묻기를

"부처님 사리가 문수 보살상 머리에 들어가 있다가 나온 까닭은 무엇이며 스님께서 왕벌 속으로 들어가 싸우다가 다시 스님에게로 돌아간 까닭은 무엇이냐." 했다.

 

그러자 그 고승은 질문한 수좌를 막대기로 호되게 내리쳤다.

이때 '모든 것이 다 무(無)이며 무인 까닭에 바로 있다.'는 것을 홀연히 깨달은 수좌가 스님께 큰절을 하고 일어나서 껄껄 웃으며 걸어 나갔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스님께서 빙그레 웃으며 한마디 던졌다.

"한 놈이 열 놈이 되고 열 놈이 한 놈이 되니 만사형통이로군."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선 도리는 요모조모 생각해서 대답하려 하면 벌써 천리만리 벗어나 버리고 만다.
들이대는 즉시 맞아떨어져야 선 도리라 할 수 있다.

이리저리 맞추고 생각으로 지어내서 답하는 것은 일상생활의 유위법에서나 통하는 것이지 무위법에선 통하지 않는다.

허공에 뼈다귀를 세워 놓으면 세워 놓은 대로 빼면 뺀 대로, 했다 하면 하는 것이고

그렸다 하면 그린 것이지 이 생각 저 생각 할 것이 없다.

그래서 참 자기를 발견해야 당당해지고 무엇이든 들이댈 수 있고 대답할 수 있다.

부처님의 유물은 누가 모시고 있는가.

바로 우리들이 두른 가사와 우리들의 몸이 그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고 네가 나라면 내 주장자를 너에게 전하노라.' 하고선 자기 머리를 때려서 사리를 내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부처님의 사리인데 내가 간직하고 있다가 너에게 주노라.' 했으니
그 가르침이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부처란 만 가지 법, 만 가지 행을 다 하므로
어느 것 할 때의 나를 나라고 할 수 없으니 부처라 하는 것이다."

 

..


경상남도 양산의 영축산에는 세 개의 암자가 있다.

 

그 중에서 "자장암"은 『내 차라리 하루라도 계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파계하고 백년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라는 서릿발같은 말씀을 남긴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창건하기 전에 자리잡았던 암자이다.

 

자장암의 법당 뒤에 절벽 바위에는 자장율사가 『금와보살』이라고 수기를 내린 금개구리가 살고 있다고 전

하는데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세우기 전, 바위벽 아래 움집을 짓고 수도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저녁 자장율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암벽 아래 석간수가 흘러나오는 옹달샘에서 공양미를 씻고 있었다. 쌀을 씻던 자장율사는 그날따라 개구리 한 쌍이 옹달샘에 흙탕물을 일으키며 놀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시고 개구리들을 타일렀다.

 

『허허. 이 넓은 산자락에 어디 보금자리가 없어서 하필이면 부처님이 계신 절간의 샘의 흐리며  놀고 있는고.』

스님은 한 쌍의 개구리를 두 손으로 건져 근처 숲 속의 다른 샘 근처로 옮겨 놓았다.

다음날 아침.공양미를 씻기 위해 샘터로 나간 자장율사는 어제 보았던 개구리 두 마리가 다시 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놈들 참 맹랑하구나. 내가 너희들의 보금자리로 보내 주었건만 어찌 다시 왔느냐? 어서 너희들이 살 곳으로 돌아가거라.』

그러나 개구리 한 쌍은 스님의 타이름에 아랑곳하지 않고 샘물에서 놀고 있었다.

자장율사는 개구리들이 절간의 옹달샘으로 다시 오지 못하도록 이번에는 산자락의 먼 곳으로 개구리들을 보내버렸다.그러나 다음날에도 절간의 옹달샘에서 천진하게 노닐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자장율사는 개구리 한 쌍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개구리 한 쌍은 다른 개구리와는 다르게 등에 거북 모양의 무늬가 있을 뿐만 아니라 눈과 입가에는 금줄이 선명히 나 있었다.

자장율사는 필시 부처님과 인연이 있는 영물들이라 생각하여 개구리 한 쌍을 샘에서 살도록 그냥 놔두었다.

 

시간이 흘러 겨울이 다가왔다.
날이 점점 추워지자 개구리들이 겨울잠을 자기 위해 어디로 갈 것이라고 생각한 자장율사는 샘물가에 나와 개구리 한 쌍을 살펴보았다.그러나 날로 추워지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개구리가 샘물에서 노닐고 있었다.

자장율사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아무리 영물이라 할지라도 자연의 순리를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다. 이러다가 얼어죽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구나.』

자장율사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개구리는 눈이 오고 얼음이 얼어도 샘물을 떠나지 않았다.

『거 안되겠군. 내가 살 곳을 마련해 줘야겠다.』

스님은 자장암 뒤의 암벽을 단번에 손가락으로 찔러 큼지막한 구멍을 뚫고, 그 안에 개구리를 넣어 주고는 불가사의한 수기를 내렸다.

『불연이 깊은 너희들을 '금와보살'이라 할 것이니 암자의 세상인연이 다하도록 자장암을 지켜다오.』

 

그 후로부터 통도사의 스님들은 이 개구리를 『금와보살』이라 하고 자장율사가 손가락으로 구멍을 낸 곳을 『금와석굴』이라 불렀다.

금와석굴은 지름 1.5∼2cm에 깊이 10cm 정도의 이끼가 낀 바위 구멍인데 그 속에는 항상 금와보살이 살고 있다고 한다.이 금와보살은 자장암에서 지성으로 기도하는 불자들이 친견할 수 있으며 영축산에 길조가 생길 때면 나타난다고 한다.

 

불교를 억압하던 조선 초기에 어떤 관리가 금개구리 이야기를 듣고 직접 자장암으로 향했다.
그 관리는 누군가가 일부러 금개구리 이야기를 지어내어 민심을 현혹한다고 생각하고 금와석굴에 있는 개구리를 잡아 함 속에 넣어 밀폐한 뒤, 단단히 가두었다.그러나 산문을 나와 함을 열어보니 분명히 잡아둔 개구리는 보이지 않고 함은 비어 있었다.
그 관리는 그 금개구리들이 자장율사의 신통력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고 통도사에서 참회기도를 올렸다. 뿐만 아니라 독실한 불자가 되어 자신이 부임하는 곳마다 불교를 탄압하는 일을 저지했다고 한다.

 

그리고 최근까지 금와보살에 관한 영험한 이야기는 현실로 나타났다.

 1901년. 현대의 고승이신 고 경봉스님께서 10세가 되던 해의 일이다.

당시 팔순의 고령이신 용악스님께서는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종이에 탁본하여 여러 곳에 모실 수 있기를 발원하고 통도사에서 백일기도를 올렸다.
기도 끝나기 3일 전, 용악스님은 놀라움을 금치 않았다.금와보살이 통도사의 큰 법당 탁상 위에 나타난 것이다.용악 스님은 불사가 원만히 성취될 징조라고 생각하고 남은 3일간 철야정진을 했다.

용악스님께서 백일기도를 마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과연 시주자가 나타났다.그래서 팔만대장경 3권을 책으로 묶어 통도사·해인사·송광사에 1부씩 보관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통도사 자장암에는 금와보살을 친견하려는 불자들이 줄을 잇는다.

금와보살은 신심이 돈독한 불자들이 한 가지의 서원을 가지고 지성으로 기도해야만 보이기 때문에 쉽게 친견할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부처님과 이웃을 위해 지극한 서원을 세우고 기도하면 『금와보살』은 반드시 나타난다고 한다. 


/ 출처 : 원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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