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가 꼭 알아야 할 백가지-
비슈누 신과 대승불교
비슈누 신의 샨스크리트 명은 비슈누(Visnu)이며 그것을 음역한 것이 비뉴천(毘紐天)이다.
쉬바신을 섬기는 샤이바(Saiva)파와 더불어 힌두교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는 바시슈나바(Vaisnava)파의 비슈누신은 자애로운 모습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최고신으로서의 위격을 간직하고 있다. 비슈누신과 쉬바신은 하나의 통합된 개체로서 하리 하라(hari hara)라고도 불리는데, 쉬바가 파괴의 영역을 관장하는 하라(Hara)의 모습을 지닌다면 비슈누는 세계를 보호하고 유지하는 구제주 하리(Hari)의 형상을 띠고 있다. 그만큼 그는 자애로운 신격으로서 인도 민중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로케쉬 찬드라(Lokesh Chandra)는 한국 불자들이 많이 독송하고 있는 『천수경(千手經)』의 관세음보살인 그 청경관음(靑頸觀音)을 하리 하라의 신격화로서 이해하고 있지만, 사실 『천수경』의 그 심묘장구 대라니에는 비슈누신을 일컫는 칭호가 쉬바신보다 더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한국불교의 종교성에 끼친 비슈누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중 탱화나 밀교계 경전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는 거의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빈약하기 그지 없다.
그렇지만 비슈누가 세상이 위기에 처했을 때 여러 가지 모습으로 화현하는 아바타라(avatara) 사상은 불교에도 영향을 끼쳐 화신불(化身佛) 개념을 잉태하게 만들 정도였으며 영원한 부처님(法身)에 대한 헌신과 신앙의 길을 열어놓은 것도 이 비슈누 신에 대한 박티(bhakti: 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사상에서 연유한 것임은 두 말할 여지가 없다. 인도의 대통령을 지내기도 한 유명한 인도철학자 라다크리슈난은, 힌두교도는 붓다를 비슈누의 화신으로 간주하는 반면, 불교도들은 비슈누를 관세음보살이라 불렀다고 확신에 찬 말을 하고 있다.
이 신의 산스크리트 명은 비슈누(Visnu)이며 그것은 음역한 것이 비뉴천(毘紐天)이다.
비슈누신은 베다 시대에는 그다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나(인드라와 더불어 종종 언급될 정도임) 서사시 시대에는 창조 유지 파괴를 관장하는 최고신으로 군림한다. 특히 『마하바라타』에서 비슈누 신의 위치는 절대적인데, 그의 주된 영역은 세계를 보존하고 유지하는 데 있다. 비슈누가 세상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여러 가지 모습으로 화현하여 구해내는 것은 그의 이러한 자비심 때문이다.
비슈누는 검은색 얼굴에 네 개의 팔을 지니고 있다. 각각의 손에는 방망이(gada), 소라 고동(sankha), 연꽃(padma), 날카로운 원반(cakra), 그리고 때로는 활을 들고 있다. 그는 노란색 가사를 걸치고 푸른 발을 지니고 있으며 언제나 금시조 가루다를 타고 다닌다. 그의 부인은 길상천(吉祥天) 락슈미로 대양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서 나온 행운과 미의 여신이다.
비슈누는 대양 위에 떠 있는 영원한 뱀 세사(Sesa) 위에 누워서 명상에 잠겨 있다. 인도 신화에서 물의 상징은 뱀이기에, 비슈누는 보통 한 머리 거대한 뱀 사리 위에서 휴식을 취하는 모습으로 표상되고 있는 것이다.
칠흑 같이 어두운 태초의 시절에 그는 지수화풍 4원소와 에테르를 창조하고는 뱀 위에서 명상에 잠기자 그의 배꼽에서 연覹이 피어나고 그 연覹 한 가운데 머리 넷인 브라마가 4베다를 지니고 탄생했다. 이윽고 브라마는 거기에서 일어나 세계의 갖가지 삼라만상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브라마가 창조를 마치자 비슈누는 명상에서 깨어나 최고신으서의 활동을 개시한다.
마야(maya)의 비밀
이 비슈누 신의 두 가지 큰 특성은 강력한 요가의 실천자요 자비스러운 중생 구제자라는 점이다.
그는 요가 행자다. 그래서 그는 위대한 요가 행자(mahayogin) 또는 요가 마야(Yogamaya)라 불린다. 마야(Maya)는 그 요가행을 통한 신비스러운 그의 움직임이다. 그것은 쉬바의 샤크티와 대응하는 개념으로 창조력 또는 형성력 내지는 인생과 세계의 수수께끼, 꿈, 환상, 마술, 환영, 착각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네 인생살이, 삶의 실상을 의미한다. 사실 우리네 인생살이와 세상의 갖가지 사건들은 수수께끼로 가득차 있으며 꿈이요 환상이요 연극이지 않은가. 나는 이 대목에서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조신의 꿈을 소설화한 이광수의 그 꿈과 관련된 얘기의 원형을 비슈누 신화에서 들추어내지 않을 수 없는 충동을 느낀다. 바로 비슈누의 마야와 관련된 얘기다.
고행자 나라다(Narada)가 가루다를 타고 나타난 비슈누에게 마야의 비밀을 묻는다. 그러자 비슈누가 더 이상 그 비밀을 캐묻지 말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리자 그에게 연못에 뛰어들라고 명령했다. 그후 나라다는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으로 태어나 한 나라의 왕과 결혼하여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남편은 불행히도 자신의 친정 아버지가 다스리는 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운명에 처하고 만다. 이 전쟁에서 그녀는 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로 화한 남편이며 아버지, 자식들을 영겁속으로 흘려보냈다. 그리고 그녀 역시 불에 뛰어들었다. 이윽고 그 화장터는 연못으로 변하고 그녀는 다시 나라다의 모습으로 돌아와 비슈누의 손에 이끌려 나왔다. 비슈누는 나라다에게 이것이 나의 마야의 모습이라고 설한다.
마야와 관련된 또 하나의 신화가 있다. 여기서도 마야의 비밀을 묻는 주인공도 나라다이다. 비슈누는 나라다를 이끌고 불모의 광야을 횡단하다 심한 갈증을 느낄 무렵 한 민가를 발견했다. 비슈누가 나라다에게 물을 얻어오라고 하자 그는 그 집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아가씨가 살고 있었는데 그만 그의 영혼이 그녀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결국 그 둘은 모든 가족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렸다. 12년의 세월이 흘러 그는 3명의 자식을 두고 행복한 생활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해에 무시무시한 장마가 일어 그의 자식과 부인이 급류 속에 휘말려갔다. 그도 역시 의식을 잃고 말았다. 한참 후에 눈을 뜨자, 어디서 한 소리가 들려 왔다.
'얘야, 네가 나를 위해서 가지러 갔던 물은 어디에 두었느냐. 반시간이 지나도록 줄곧 너를 기다리고 있었느니라'
나라다가 뒤를 둘러보자 노도와 같이 흘러내리던 검붉은 물줄기 대신 하얀 사막이 눈에 들어왔다. 신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면 말한다.
'이제 나의 마야의 종지를 이해할 수 있겠느냐?'
이 대목에서 낙산사의 시미승 조신이 강릉 태수의 딸을 만나 그녀와 결혼한뒤 자식들까지 두었으나 결국 그들을 모두 잃고만다는 그 꿈을 떠올리는 것은 나의 지나친 비약일까. 그런데 사실 마야는 꿈이지 않은가.
마야는 이렇듯 창조와 파괴, 진화와 해체, 신의 내면을 향한 환상의 꿈속 같은 목가적 풍경과 황량한 허무, 허허로움의 공포, 고통스러운 무한 바로 그것이다. 마야는 모든 것을 낳고 그리고 그것을 다시 채워가는 억년의 전체 순환이다.
세상의 구제자로서 비슈누
다음 대비 구제자로서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나타난 비슈누의 화현(avatara)을 살펴보자. 화현이란 권화(權化)라고도 하는데, 쉬운 말로 해서 이것은 절대자가 중생을 구제하려고 이 세상에 내려오는 강림이요 임재다.
비슈누신이 이 세상에 임재하는 모습은 모두 열 가지다. 물고기(Matsya), 거북이(Kurma), 멧돼지(Varaha), 인사자(人獅子, Narasimha), 난장이(Vamana), 영웅 파라슈마라(parasumara), 라마(Rama), 목동의 신 크리슈나(Krishna), 붓다(Buddha), 예언자적 구제자 칼킨(Kalkin)으로 말이다. 이 중에서 멧돼지, 인사자, 크리슈나는 신묘장구 대다라니의 주인공인 청경관음의 또 다른 이름으로 예찬되고 있다. 뿐인가. 그 청경관음이 곤봉, 연꽃, 소라 고동 등을 지니고 있다는 대목에서는 비슈누가 바로 불교의 보살로 다시 태어나고 있음을 충분히 읽어낼 수 있다.
불교에 들어온 비슈누의 영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마하바라타』 제6권에 포함되어 있는 『바가바드기타』는 힌두교의 성전으로, 거기서 크리슈나로 화현한 인격적 최고신 비슈누의 역할은 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 줄거리는 대략 이러하다.
판다바족(Pandava)과 그의 사촌 카우라바(Kaurava) 족 사이에 왕위 계승권 문제로 전쟁이 벌어졌다. 판다바족의 아루주나(Arujna) 왕자가 그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싸우기를 머뭇거리자 비슈누신의 화신인 크리슈나는 그의 마부로 등장하여 전쟁을 해야하는 이유를 들어 아루쥬나를 설득했다.
결국 크리슈나는 신으로서 자신의 놀라운 형태를 보여주어 자신을 지고자로 섬기게끔 했다. 신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있다. 이 신에 대한 헌신과 그 신의 사랑을 통해서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바카바드기타』는 노래하고 있다.
신에 대한 헌신과 사랑을 박티(bhakti, 信愛)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지혜(jnana)의 길과 행위(karma)의 길과 더불어 해탈에 이르는 세 가지 길 중에 하나라고 그 책에서는 역설한다. 이 중에서도 이 박티를 통해서 아무리 연약하고 가난하며 비천한자 일지라도 신의 구원을 얻어 해탈의 길로 들어선다. 이러한 점에서, 신에 대한 헌신과 사랑을 강조하는 비슈누 신앙은 힌두교로서의 대중적 지지 기반을 확고히 다지게 된다. 더불어 이러한 신 개념이 대승불교의 불타관과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게 되었다.
☞ 출처 : 조계사 : http://www.ijogyes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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