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부터 한결 같았던 국산화의 꿈, 기아자동차 브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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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 파밀리아
시작부터 한결 같았던 국산화의 꿈, 기아자동차 브랜드 ‘기술욕심’은 기아자동차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마쓰다 파밀리아 반면 기아산업은 자체 기술로 엔진을 개발하며 자동차 기술 국산화의 꿈에 한 발짝씩 다가섰다.
차체설계 기술이 없으니 밑바탕이 필요했다.
기아산업은 삼륜차 K-360을 통해 제휴했던 동양공업(현 마쓰다 자동차)에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었다.
기아산업이 점찍은 모델은 마쓰다 파밀리아 2세대 모델. 1963년 데뷔한 4도어 세단으로, 브리사의 원형이었다.
파밀리아 디자인은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맡았다. 폭스바겐 1세대 골프와 파사트, 알파로메오 쿠페 2000, 페라리 250GT
등을 빚은 주역으로, 특유의 반듯한 라인을 파밀리아에도 녹여 넣었다.
현대차의 첫 고유모델 포니 디자인 또한 그의 손에서 태어났다. 이후 대우자동차 디자인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이래저래 한국 자동차 산업과 깊은 인연을 지닌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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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 앞세워 인기 몰이한 브리사
마쓰다 파밀리아는 직렬 4기통 985cc 가솔린 엔진을 얹고 4단 수동변속기와 맞물려 뒷바퀴를 굴렸다.
2도어 쿠페와 5도어 왜건, 픽업 등 다양한 가지치기 모델도 만들었다. 기아산업은 마쓰다 파밀리아를 가져와서
그대로 팔 생각이 없었다. 뼛속은 어쩔 수 없이 마쓰다 기술을 빌렸지만, 내용은 자체 기술로 채우고 싶어 했다.
브리사는 디자인도 파밀리아와 차이를 뒀다. 차체 디자인은 밑바탕 삼되 그릴과 램프를 새로 그려 넣었다.
차명 뒤에 붙은 S-1000은 소하리공장(S)과 배기량(1,000㏄)을 의미했다.
길이 4m가 채 안 되는 짧은 차체와 790㎏에 불과한 공차중량, 작은 배기량에 힘입어 당시 현대자동차의 포드 코티나,
신진자동차의 토요타 코로나보다 뛰어난 연비를 뽐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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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사
1970년대 초, 제1차 석유 파동으로 기름 값이 빠르게 치솟았다.
그래서 브리사는 택시 등 영업용으로 뜨거운 인기를 끌었다.
경쟁사의 승용차보다 상대적으로 덩치는 작았지만, 짧은 오버행과 높은 지붕 덕분에 실내 공간도 기대 이상 널찍했다.
‘팔방미인’ 삼륜차 K-360을 통해 소비자 사이에 꾸준히 쌓은 신뢰도 인기에 한 몫을 톡톡히 보탰다.
당시 브리사 신문광고에서는 “하루 50㎞ 주행 시 2,000원 정도 유류비로 운행할 수 있습니다” “비싼 기름 값 때문에
주저하시는 분을 위해 브리사를 권해 드립니다” 같은 문구를 볼 수 있다. 경제성을 앞세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삼천리호와 C-100, K-360, 복사 등 대표 차종을 연도별로 나눠, 1944년 막을 올린 기아차의 30년 역사도 강조했다.![](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1912/02/daumauto/20191202140904075ghhf.jpg)
브리사 광고 후발주자 현대차의 도발, 그리고 반격국내 자동차 산업은 완성차를 수입하거나 주요 부품을 통째 가져와 조립하는 ‘SKD(Semi Knock Down)’에 머물렀다.
기아산업은 국산화에 가속을 붙였다. 브리사가 대표적으로, 부품 국산화율이 데뷔 첫해 65%, 이듬해엔 80%에 달했다.
1975년, 기아산업은 1년 만에 브리사 1만757대를 팔아 승용차 시장의 58.4%를 장악했다.
이처럼 브리사는 ‘산들바람’에 머물지 않았다. 그러나 강력한 맞수가 등장하면서 열기가 식었다. 현대자동차 포니였다.
포드와 결별 이후 현대차가 독자 개발한 최초의 모델로, 데뷔 첫해 1만726대를 팔아 브리사(6,916대)를 제치고 단숨에
1위를 꿰찼다. 당시 판매가격은 현대 포니가 자가용 기준 227만3,270원으로, 브리사보다 약 70만 원 더 비쌌다.![](https://t1.daumcdn.net/news/201912/02/daumauto/20191202140905933bxul.jpg)
브리사 광고
기아산업은 브리사Ⅱ로 곧장 반격에 들어갔다.
파밀리아 롱보디 버전인 그랜드 파밀리아를 밑바탕 삼아 이전보다 차체를 키우고 고급스럽게 만들었었다.
엔진도 포니와 같은 직렬 4기통 1.3L 가솔린으로 키웠다. 당시 기아산업은 이 차의 이름을 ‘레나(Rena)’로 정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기존 이름이 소비자에게 친숙하다’고 판단해 출시 전 브리사Ⅱ로 바꿨다.
1978년엔 K303이라는 5도어 왜건까지 선보이며 포니를 정조준했다.
픽업트럭의 넉넉한 적재공간과 세단의 편안함을 양립시키기 위한 기아산업의 묘안이었다.
시장을 선도하는 ‘기술욕심’도 이어졌다. 가령 하이드로 백 타입의 디스크 브레이크로 제동 성능을 높였다.
서스펜션엔 새롭게 설계한 가스식 댐퍼를 물려 승차감을 한층 부드럽게 다듬었다.
잃어버린 7년, 짓밟힌 ‘기술의 기아
기아산업은 위기를 기회로 받아들였다.
예컨대 1978년 12월, 제2차 오일쇼크로 위축된 경기를 기술력으로 헤쳐 나가고자 했다.
승용형 디젤 엔진을 개발해 브리사Ⅱ에 얹고 시험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계획대로라면 1979년 출시가 확정적이었다.
‘원조’인 마쓰다도 1985년에서야 파밀리아에 디젤 엔진을 얹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규제의 파도를 만난다.
1981년 2월 28일, 전두한 정부가 실시한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다.
‘승용차는 현대와 새한자동차, 1~5톤 버스는 기아산업, 소방차와 탱크로리 등은 동아자동차가 각각 만들고, 이륜차는
기아기연과 대림공업이 합병해 효성기계와 이원화한다’는 내용이었다.
‘중소형화물차 및 버스 전문생산업체’로 지정받은 기아산업은 눈물을 머금고 브리사를 단종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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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브리사 또한, 이륜차 사업부인 기아기연을 대림공업에 송두리째 넘겨야 했다. 이 조치로 회사는 발칵 뒤집혔다.
자전거부터 시작해 승용차까지 이어온 30년 역사가 ‘합리화’란 명분으로 짓밟힌 까닭이다.
종합 자동차 회사로 성장하려는 장밋빛 미래도 사라졌다.
설상가상으로, 1976년 상용차를 생산하던 아시아자동차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부채도 503억 원까지 쌓였다.
1982년 7월, 정부는 기존 결정을 1년 5개월 만에 뒤엎는 새 조치를 발표한다.
역시 해프닝과 혼선으로 끝났다. 정부는 자동차 공업이 처한 과도기에서 돌파구를 찾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제시했다.
정부가 실효성 떨어지는 조치를 남발하며 허둥지둥하는 사이, 한국 자동차 산업은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도산위기 맞아 전문경영진 체제로
결국 기아는 도산위기에 몰렸다.
1981년 10월, 창업자의 장남 김상문 회장이 옷을 벗었다. 자본과 경영을 분리한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개인소유 주식 전부를 한국 기계공업의 발전과 기아 직원의 복리후생을 위해 기증했다.
그의 뒤를 이어 전 아시아 자동차 사장 민경중이 회장, 전 기아기공 사장 김선홍이 사장으로 취임했다.
김선홍 사장은 1932년 9월 25일, 전라북도 익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과를 졸업한 뒤 1958년 1월 기아산업에 공채 1기로 입사했다.
이듬해 시흥공장 기술과장을 거쳐 1962년엔 공장장으로 올라섰다.
이후 기획상무와 계열사인 기아기공 사장을 거쳐 기아산업 사장으로 거듭났다.
당시 국내에선 흔치 않은 엔지니어 출신 CEO였다.
![김선홍(앞줄 왼쪽) 기아자동차 회장과 김우중(앞줄 오른쪽) 대우자동차 회장이 1994년 2월 대우차 아카디아 발표 현장에 나란히 서 있다.](https://t1.daumcdn.net/news/201603/14/hankooki/20160314040846601atva.jpg)
김선홍 회장
그는 ①새로운 경영 ②새로운 일터 ③새로운 기술의 3대 목표를 내걸고, 전 사원들에게 ‘회사를 살리자’고 호소했다.
이즈음 기아산업은 기존에 없던 장르의 신차를 한 대 선보였다. 국내 최초의 원박스 승용차였다.
신진 미니버스와 현대 미니버스 포터가 있었지만, 1톤 트럭 뼈대에 캡을 씌운 형태로 엄밀히 따져 본질은 승용보단
상용차에 가까웠다. 기아산업의 신차는 봉고 코치였다. 기술제휴선인 마쓰다 자동차의 기술지원을 받아 만든 12인승
원박스카로, 길이×너비×높이 각각 4,485×1,620×1,995㎜의 차체에 직렬 4기통 2.2L(2,209㏄) 70마력 디젤 엔진에다
뒷바퀴를 굴렸다. 무게는 1,430㎏, 최고속도는 시속 110㎞였다.
봉고 코치 출시 당시만 해도, 곧 이어질 돌풍을 누구도 예상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