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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실패의 본질
1997년 11월 18일, 위기대책과도정부.
나가이: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리즈코프 의장님, 그리고 사블린 부의장님.”
타라소프:
“몰염치도 이 정도면 병 아니겠습니까? 경제 회복을 위해 중동에서 전면전을 일으키자는 건 당신 아이디어 아니었나?”
나가이:
“그 자리에서 반대의견이라도 제대로 낸 사람 있습니까? 사샤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고.. 사블린 제독님도 딱히 막지는 않으셨던 것 같은데요.”
리즈코프:
”자, 자. 여긴 과오를 성토하는 자리가 아니오. 대책을 마련하는 자리지. 그래서, 당신의 복안은 뭡니까?“
나가이:
”지금까지 나온 대안들은 여러가지지만 결국 그 골자는 체첸을 강경하게 진압하고 중앙아시아 정부들에 도움을 주며 우크라이나와 협상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부분이 못내 아쉽더군요. 다들 말씀해보시죠. 언제부터 우크라이나가 주권국가였습니까?“
사블린:
”내부 민심이반이 강력하오. 또한 체첸, 중앙아시아 문제를 감당하면서 우크라이나와도 전쟁을 감수할 수는 없소. 명분도 없는 일이니 곧바로 서방 전체와 대립하게 되겠지. 당연한 사실을 굳이 말해줘야 하나?“
나가이:
”내부 민심이야 확실히 통제 아래 둘 방법이 있습니다.“
리즈코프:
”..그 방법이란?“
1997년 11월 19일, DCh-14 지하벙커.
람스도르프:
”꼭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있나?“
나가이:
”당신의 실패가 러시아의 실패로까지 번지게 둘 수는 없으니까요.“
1997년 11월 19일 저녁 7시, 러시아 공화국 위기대책과도정부는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단체 “신의 검”에 의해 예브게니 람스도르프 전 총리가 암살당했다는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람스도르프의 행방은 극비에 부쳐져 있었던 데다 CIA 등 서방의 정보기관들 역시 그의 신상을 확인할 수 없었기에, 이 소식은 곧바로 매체를 통해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함께 총격을 당한 것으로 ‘되어있던’ 알렉세이 메스너 역시 병원에서 당시 상황을 증언했고, 실제로 체첸 또는 중앙아시아 무슬림들로 이루어진 테러단체들이 각지에서 크고작은 테러행위를 벌이고 있었던 터라 신빙성이 없는 정보는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이 사실을 공표하자마자 이라크로 추정되는 모처에서 수 개의 민병대 단체가 자신들을 “신의 검”이라고 주장하는 아이러니까지 펼쳐졌죠.
알렉세이 메스너는 상황판단이 아주 빠른 남자였습니다. 그는 전국의 언론사들과 연결되어 있었고, 람스도르프의 암살 사실을 발표하기가 무섭게 각 방송사들은 “민주화 투사”로서 람스도르프의 면모를 부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제위기의 원흉으로 지목된 이는 다름아닌 경제 부문의 사령탑 아미나트 나가이였는데, 과도정부는 실제로 검찰을 동원해 나가이를 배임 등 혐의로 기소하면서 이 사실을 입증해 주었습니다. 물론 의문을 제기하는 몇몇 용감한 이들이 있었습니다만.. 신문 15면 쯤에 모 언론사의 기자나 대학 교수가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다는 기사가 날 뿐이었습니다.
소련 붕괴 이후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던 배급제와 주택공급제도가 부활한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다만 생필품 배급은 일시적인 조치라고 못박아두었고, 주택공급의 경우 아직 활발히 활동하고 있던 협동조합들이 담당했다는 것이 이전과의 차이점이었죠. 당장의 민심을 억누른 과도정부는 곧바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 체첸에 대규모 공습을 동반한 군사작전을 실행했습니다. 생각보다 출혈이 크긴 했지만 작전은 결국 성공했죠. 조하르 두다예프 대통령은 러시아 공군의 항공폭탄에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절명했고, 그로즈니에서 알렉산데르 레베드 장군과 아흐마트 카디로프 체첸 임시정부 수반이 평화조약에 서명하며 이 문제는 일단락나게 되었습니다.
23. When the Hell Freezes Over
“핵전쟁의 위협은 각국에게 있어 평화의 기회비용을 급격히 상승시키는 요인이 된다. 그 누구도 ’조그만 이득‘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잃고 싶어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 케네스 월츠
러시아발 대규모 경제위기가 전세계를 휩쓰는 동안 각 국가들은 잔뜩 몸을 움츠리고 경기회복에 총력을 다했습니다. 미국은 이라크 무기대여법을 통과시켜 중동에서의 전쟁을 최대한 빠르게 종결지으려 하면서도 주요 기업 및 은행들에 구조조정을 조건으로 한 금융지원을 퍼부어댔고, 중국은 경제난으로 인해 빈발하는 크고작은 시위를 총칼과 언론검열로 다루며 내수경제를 탄탄히 하고자 했습니다. 모두가 앞장서기를 꺼리는 현 상황은 ‘새 안식처’를 노리는 우크라이나의 사사노프에게는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NATO의 동방 확장책은 고유가로 인해 러시아와의 관계를 중시할 수밖에 없던 유럽 국가들의 반대로 인해 사실상 스톱되었고, 유럽연합은 우크라이나와의 협력에 대해 명백히 선을 그었습니다. 그나마 사사노프에게 힘을 실어주던 것은 반러 성향의 중동유럽 4개국이었는데, 사실 별 도움은 되지 않았죠.
1998년 3월, 러시아 과도정부는 민정 이양을 선언했습니다. 리즈코프를 대통령으로, 람스도르프 추모 열풍을 타고 총선에서 또다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인민협동당의 메스너를 총리로 한 정부가 출범했죠. 아미나트는 외견상 모든 공직에서 사퇴했고, 사법부는 1심에서 그녀에게 징역 17년을 선고했습니다. 그러나 항소심과 상고심까지 가는 법적 공방은 적어도 수 년이 걸릴 것이었고, 최종심이 나오기 전까지 그녀는 자유의 몸으로서 여러 분야에 목소리를 낼 수 있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고 대중들이 경제위기를 잊기 시작한다면, 아마 ‘결정적 증거‘가 나와 그녀가 무죄라는 ’사실‘이 밝혀지겠지요.
메스너 내각은 곧바로 미국에 제3차 전략무기감축조약(START III) 체결 논의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친서방주의자로 알려져 있었던 메스너는 러시아가 지난 제2차 조약을 비준하여 성실히 이행하고 있다는 점을 어필하는 한편,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의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언급하며 적극적 평화유지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미국의 돌 행정부 역시 지지부진한 전황을 러시아와의 평화무드로 풀고 싶었고, 전쟁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누가 봐도 무리였기에 러시아와의 화해에 나서며 바닥까지 쳐박힌 지지율을 조금이라도 끌어올리려는 유인이 있었습니다. 미러관계의 조속한 회복을 강조하던 유럽연합은 기다렸다는 듯 환영 성명을 발표했죠. 결국 제네바에서 START III 실무협의소가 개소하며 뜨겁게 달아올랐던 세계의 열기는 빠르게 식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사회주의 정책으로 향하는 러시아, 세계의 공장 지위를 잃지 않기 위해 철저한 권위주의 행보를 걷는 중국, 이들 ‘악당 세력’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미국, 서서히 활동력을 잃어가는 일본, 그리고 협조체제의 복귀를 간절히 바라는 유럽. 글로벌 경제위기와 중동 전쟁, 러시아의 급변사태로 많은 이들이 전쟁의 시대의 재림을 예측했지만, 세계는 기묘한 방식으로 그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24. 해야만 하는 일
강대국들이 서로를 조각내는 대신 타협을 택하면서, 우크라이나의 배후 권력자 사사노프는 큰 정치적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배를 갈아탄다는 계획이 좌초되자 동부를 중심으로 한 친러파들이 CEIN 재가입을 부르짖기 시작했고, 서부의 친서방주의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가두시위를 이어가며 쿠치마 대통령의 노선을 결사옹위했습니다. 이대로라면 탈출전략은 고사하고 나라 전체가 두쪽날 위기였죠. 러시아는 이 움직임을 관망하면서 우크라이나에게 어떤 벌을 내릴지 고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일부 친서방주의자들이 급기야 나치 부역자 스테판 반데라의 초상화와 하켄크로이츠를 내걸며 소요사태를 일으키는 지경에까지 이르자, 사사노프는 결단을 내려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1998년 4월 29일, 안드레이는 국무총리직을 사퇴했습니다.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는 폭탄 발언을 던졌죠.
“저,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사사노프는 쿠치마 대통령으로부터 총리직을 사퇴하라는 ‘권고’와 함께 우크라이나 국가검찰의 기소장을 받았습니다. 이는 명백한 월권행위이자 정치탄압 행위이며, 대통령의 가장 큰 치부가 될 것입니다. 쿠치마 대통령의 정책은 모든 면에서 우크라이나인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저는 정권의 국무총리로서 대통령의 비정상적인 행보에 끊임없이 맞섰지만, 대통령은 결국 저를 압박하여 헌법에 반하는 방식으로 사퇴하게끔 만들었습니다.
(중략)
쿠치마 대통령의 경제 실패, 외교 실패, 정치 실패는 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에 가입해 러시아와 정면 대립해야 한다는 거대한 망상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IMF에게서 무리하게 자금을 융통하고 총리인 저와 일말의 상의도 없이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남용하여 CEIN 탈퇴를 강행했으며 수많은 부정행위를 저질렀습니다.
(중략)
우크라이나 국민 여러분, 제가 구속되고 수감되더라도 그 뜻은 죽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마이단 광장을 수놓았던 노란색과 푸른색의 빛깔을 기억합니다. 이 나라의 주권자는 국민이며, 여러분은 반드시 이를 기억해야 합니다!“
CEIN 탈퇴선언, 곡물가격 인상, 그 외 수많은 정책실패들은 사실상 사사노프의 기획 하에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이를 발표하고 실행하는 것은 대통령이었고, 그는 이 점을 잘 이용했습니다. 대통령이 보낸 경찰관들이 기자회견을 강제 중단하려던 모습은 이 연설에 신빙성을 높여 주었습니다. 쿠치마 대통령의 실책에 힘입어, 사사노프는 단번에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이루어낸 주역 중 한 사람이자 크라우추크-쿠치마 정권의 정책을 끊임없이 견제한 내부고발자가 된 것입니다.
다음날, 키이우의 마이단 광장에는 수십만의 인원이 모여 쿠치마 대통령의 퇴진을 외쳐댔습니다. 친러주의자뿐 아니라 친서방주의자들마저 쿠치마를 외면했죠. 검찰청 창문으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사사노프는 알 수 없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제서야 람스도르프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죠. 인민은 주권자이지만, 그 주권의 행사까지 도맡아서는 안되는 존재였습니다. 가벼운 선동과 선전에 무방비로 휘말려 그들의 염원사항까지 망각하는 이들을 신뢰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들은 엄연히, 계도가 필요한 존재들이었습니다.
알렉세이 메스너:
“러시아 공화국은 우크라이나 인민들의 의사를 존중하며, CEIN 탈퇴조치의 효력여부를 전인민투표에 맡기도록 한 사사노프 대통령 당선인의 뜻을 환영합니다. 계급간의 영원한 투쟁이 아닌 상호협동, 그리고 자유로운 의사표현에 기초한 ‘질서있는 민주주의’는 우리가 지난 10년간의 시행착오 끝에 얻어낸 성과입니다. 저는 사사노프 당선인이야말로 그러한 가치를 지켜내는 데 가장 적임인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안드레이 사사노프:
“메스너 총리님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투표 결과와 무관하게, 우크라이나 공화국은 주권자인 인민의 의사에 기초해 통치되는 국가이며 이는 앞으로도 불변할 것입니다. 곧 대통령직에 취임할 사람으로서 저는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입니다. 극단주의와 포퓰리즘에 휘둘리지 않는 ‘질서있는 민주주의’야말로 우리가 계속 지켜나가야 할 가치입니다. 그 어떤 위협이 도사리더라도, 저는 제가 가야 할 외로운 길을 꿋꿋이 걸어내겠습니다!”
1998년 9월, 우크라이나 공화국은 국민투표 결과에 따라 쿠치마 대통령의 ‘독단적 탈퇴조치’를 무효화하는 행정명령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CEIN 내에서 우크라이나의 위치는 이전보다 더 높아져 있었습니다. 통합군의 핵무기를 일선에서 통제하는 전략로켓군 사령관의 자리는 우크라이나군의 최선임 제복군인에게 돌아갔으며, 이는 우크라이나의 동의 없이 러시아가 핵무기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물론 우크라이나가 독단적으로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 역시 불가능했습니다.) 또한 사사노프 신임 대통령은 (실질적)여당을 통해 “민주질서수호법”을 통과시켜 스테판 반데라 등 나치 부역자들에 대한 찬양고무행위를 불법화하고 국가 전역에서의 도청과 감청을 사실상 합법화했습니다. 신설된 정보통신관리청에서는 국가통합통신망을 직접 감시해 ’극단주의자‘들을 감지하는 업무를 담당했죠. 서부 우크라이나의 친서방주의자들을 대변하는 정당들은 내부에서 고위 당직자들이 부패 혐의로 기소되는 상황 속에서 친정부 협력정당으로 서서히 바뀌어갔습니다.
1998년 10월 1일, 키이우.
사사노프:
“아주 황송할 따름이군. 한번 나갔다가 들어오니 쏟아지는 게 많으니 말이야.”
나가이:
“그게 정말 그 이유때문이라고 생각해?“
사사노프:
”그럴 리가 있나. 당신들과 똑같아졌으니, 안심할 수 있게 된 거겠지.”
나가이:
“서로 남는 장사 아닌가? 당신은 우크라이나의 ‘도전받지 않는’ 1인자가 되었고, 우리는 러시아가 주도하는 세계 한 귀퉁이의 패권을 온존해냈으니까 말이야. 혹시 아직도 죄책감같은 걸 느끼는 건 아니겠지?”
사사노프:
“죄책감이라.. 굳이 이렇게 멀리 돌아올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생각은 드는군. 괜히 사람만 여럿 다쳤잖나.“
나가이:
”건배나 하자고. 자유로울 수 있는 자유를 보장받은 인민들을 위해.“
사사노프:
”자기파괴로부터 구원받은 인민들을 위해.“
- 드디어 마지막화만을 남겨놓게 되었군요. 최대한 등장인물들의 가치관 변화와 결정적 순간들을 충실히 담고자 노력했는데, 잘 됐으려나 모르겠습니다. ㅋㅋ
- 람스도르프 없는 람스도르프 서클(…)은 다시 하나가 되었습니다!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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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법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원작에서 수호법을 막은 사람이 여기서는 수호법을 적극적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 세계의 엄혹함이 더 드러납니다(?)
+ 물론 원래 세계에서도 대중을 못 믿긴 했습니다(...) 그건 같지만 ㅋㅋㅋ...
@dear0904 원작에서도 엘리트주의 에필로그 뜬거 생각해보면 ㅎㅎ..
@dear0904 “당신은 국민의 힘을 믿습니까?” (…)
이 대사 하나로 사사노프의 아이덴티티가 정해진 느낌이네요 ㅋㅋㅋㅋㅋ
@E.E.샤츠슈나이더 이건 "그" 류메이란도 하지 않았던 말이라는 점에서 특이하긴 합니다 ㅋㅋㅋ. 오히려 정부를 못 믿는 발언은 딱히 안했을텐데 ㅋㅋㅋ...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근데 했다간 러시아가 나토 동진 운운하며 군사적 행동 취할 정당성 제공하는거 아닌가 좀 우려되긴 하네요.
이긴다라기 보단 현실에서도 러시아 실드치는 논리중 하나잖습니까
NATO의 동방 확장책은 고유가로 인해 러시아와의 관계를 중시할 수밖에 없던 유럽 국가들의 반대로 인해 사실상 스톱되었고, 유럽연합은 우크라이나와의 협력에 대해 명백히 선을 그었습니다.
@dear0904 근데 가만 생각해보니 나토가 확대를 하든 안하든 러시아가 움직일 구실이나 상황이긴 하네요...?
@dear0904 아 이미 있었네요... 봐놓고도 까먹었네.
+ 그런데 저렇게 되면 비셰그라드는 다시 새가 되는건가?
@돈이 곧 진리 전 이런 장문형 글은 아예 분명히 제대로 읽겠다 해놓고 봐도 놓치는 부분이 수두룩한걸요 뭐...
이런글이 싫다라기 보단 그냥 요즘 들어 전 읽기가 힘들다고 느끼는것 뿐입니다.실제로 참여할때 제대로 읽는게 안되 정보 해석이나 상황 파악에서 문제가 벌어진적이 많아지고 있으니까.저번에 올라간 유고 프롤로그도 마찬가지
형식이야 쓰는 사람 맘이지
@돈이 곧 진리 발트3국, 핀란드와 함께 완충지대 취급이겠네요 ㅋㅋㅋ
@E.E.샤츠슈나이더 빅토도 하니까 완충지대가 있어야 확실히 편하더라구요 ㅋㅋㅋ... 화염방사기건, 화학 무기건 쓰면 땅이 **이 되는데, 그걸 내 땅에서 쓰자니(...)
[번외: 세계는 지금?]
1) 미국
밥 돌 행정부의 인기는 바닥을 뚫고 내려가는 중입니다. 그가 부시 정부의 업적을 계승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명백해보이며, 특히 시장만능주의자들로 구성된 행정부 각료들은 경제위기 국면에서 서민들에게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다는 평이 지배적입니다. 여론은 테네시주 연방상원의원인 민주당의 앨 고어, 그리고 버몬트 주지사 하워드 딘에게 쏠려 있습니다. 전대 선거에서 패배한 뒤 온갖 성추문에 시달린 빌 클린턴을 대신해 그의 아내 힐러리 클린턴이 경선을 준비한다는 소식도 들려옵니다. 일각에서는 공화당 역시 후보 교체를 고려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분석이 들립니다만, 백악관 대변인은 이를 완강히 부인했습니다.
2) 영국
1992년 총선에서 ‘새로운 노동당(New Labour)’, ‘새로운 영국(New Britain)’을 주창하며 소위 ‘제3의 길’ 노선으로 정권교체에 성공한 토니 블레어는 1997년 선거에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패인은 선거를 불과 2달 앞두고 터진 글로벌 경제위기, 그리고 영국이 미국의 패권 부품으로 전락해 열강체제에서 소외되었다는 비판이었습니다. 새로 권좌를 차지한 것은 불과 36세의 젊은 정치지도자
그러니까 진작에 양적완화를 했어야...
+ 원작에서와 달리 잭슨은 후보군에 없나요?
윌리엄 헤이그입니다. 헤이그는 기본적으로 블레어의 경제노선을 크게 바꾸지 않으면서도 외교 분야에서 조금 더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러시아와의 친선관계에 따라 유럽연합과 미국 간의 가교 역할을 수행하고, 중동 전쟁에서 적극적 중재를 시도하는 것이 그 예시입니다. 다만 그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 지는 미지수군요.
3) 독일
1995년 서독 총선거를 앞두고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사민당 내 우파 파벌이 “진보와 개혁“ 그룹으로 분리된 것은 라퐁텐 총리에게 매우 치명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는 기민-기사연합의 볼프강 쇼이블레 총재가 자유민주당과의 연대로 쉽게 총리직을 거머쥘 수 있는 요인이 되었죠. 쇼이블레 총리는 적극적 유럽통합주의자이자 친미주의자로서 동독의 국가자본주의, 유사민주주의 체제를 크게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1997년 경제위기로 인해 동독 경제가 큰 위기에 처하자 그레고르 기지의 민주사회당-독일동맹 연정이 붕괴했습니다. 이로써 지지부진하던 재통일 논의가 다시 불붙었고, 전문가들은 “21세기는 하나된 독일의 세기가 될 것”이라는 예측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4) 일본
제2차 한국전쟁에서 일본은 귀중한 자산을 얻었습니다. 전후 최초로 정규병력을 외국에 파견한 경험이었죠. 일본의 적극적 평화주의 행보에 미국은 매우 환영한다는 입장을 표했습니다. 중국과 러시아가 언짢은 반응을 보이긴 했지만, “전수방위에는 개별적, 집단적 자위권이 모두 포함된다”는 헌법 해석선언은 유권해석이 되었습니다.
한국 준권위주의 정부와의 밀월관계는 일본에 다시 한번 제조업 특수라는 선물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의 후계는 자연스럽게 당내 2인자이자 최대파벌 경세회의 거두 오자와 이치로에게 넘어갔고, 오자와는 “구조개혁”을 내세우며 구조개혁에 나섰습니다.
오자와 총리는 상대 파벌인 청화회의 고이즈미 등을 적극 기용해 우정개혁, 양적 완화(오자와노믹스), 전자정부(!), 고속경량국가 개혁 등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글로벌 경제위기로 인해 개혁은 주춤하고 있습니다만, 이 개혁의 성패가 향후 수십년간의 미래를 좌우하게 될 것임은 명백합니다.
@E.E.샤츠슈나이더 시로사키 홀딩스:
"아이고 우린 이제 살았어!"
@E.E.샤츠슈나이더 근데 평화주의가 맞나...집단적 자위권으로 전쟁 가능 국가가 된것 같은데...
그리고 한국덕분에 일본이 다시 살아난다...이거 6.25의 오마주...?
근데 일본이 전자정부를 지향한다니 천지개벽일세...
@931117 “적극적 평화주의”는 아베 정부의 대외정책 슬로건이기도 합니다. 더 이상의 설명은…
@E.E.샤츠슈나이더 아 평화주의를 빙자한 재무장화군요.ㅋㅋㅋㅋ
@931117 현실적으로 다시 군국주의, 팽창주의 하기는 힘드니까 미국 패권에 편승해 인태지역에서 2인자, 마름 노릇 하겠다는 거죠 ㅋㅋㅋㅋㅋ
@E.E.샤츠슈나이더 역시나 일본.예상을 벗어나지 않아!!ㅋㅋㅋㅋㅋ
@931117 그리고 한국에게는 만년 3인자 자리가 돌아갈테죠… 허허…
@E.E.샤츠슈나이더 한국은 어차피 권위주의~독재정부인 이상 일본,미국에게 나라를 팔아넘기지만 않음 다행일테니까.
그래도 뭐 저만큼은 안가겠죠...ㅎㅎ...
5) 한국
구 군사정권의 후계자들이 제정작업을 주도한 통일헌법은 총리에게 실권이 있는 이원집정부제의 형태를 띠었습니다. 직접선거로 선출되는 대통령은 그저 상징적 권한만을 가진 직위로 물러났고, 총리와 국무위원에는 원외인사를 지명할 수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내각은 테크노크라트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구 군부 출신의 실력자들은 관료 및 법집행기관과 유착했죠. 총선 및 대선 결과와 무관하게 ’거국내각‘이라는 명목 하에 관료내각이 수립되는 이러한 경향은 여론과 정권 간의 괴리를 만들었습니다.
글로벌 경제위기(IMF 사태)는 정치혐오에 빠져있던 한국 국민들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습니다. 고건 내각이 강판되고 새로 출범한 이회창 내각이 강력한 구조조정을 예고한 가운데, 민중의 힘이 대세를 바꿀 수 있을 지에 대한 귀추가 주목됩니다.
@E.E.샤츠슈나이더 ...생각보다 괜찮네요
@E.E.샤츠슈나이더 “이번에 금융정책1과 과장 올라가는 기… 최상구 서기관이라 캤나?
“예, 부총리님.”
“금마 아부지가 누고? 그 양반도 군인이가?“
“최교수라는 사람입니다.“
“최교수? 어데 교수고?”
“그게 아니라 이름이 최교수입니다. 서울대 국문학과에서 교수 하고 있고요.“
”교수인데 이름도 교수라꼬? 신기하구마… 영 국장아, 금마 어떻드나? 쓸만하나?“
”묵묵히 자기 일 열심히 하는 친구입니다. 지켜볼만 합니다.“
”그래… 영 국장, 우리같은 정통 관료가 꽉 잡고 있어야 고마, 나라가 산다. 알제? 무식한 군바리 쉐끼들한테 빙신맹키로 뺏기가 되긋나?”
“물론입니다. 제가 잘 단도리 치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래… 고마, 아부지는 잘 계시고?“
”여전히 정정하십니다.“
”안부 전해드리라. 이번 추석때는 꼭 함 찾아뵈겠다고 말씀드리고.“
”이소성 경제부총리께서 꼭 찾아뵌다고 하셨다고, 아버지께 꼭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버지께서도 부총리님께 언제나 감사한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허허, 그래? 잘 됐구마이…“
@E.E.샤츠슈나이더 확실히 다들 능력은 있던 사람이라 이런 정국에서 잘 살아 남네요 ㅋㅋㅋ...
@E.E.샤츠슈나이더 경제부총리 상태가 ㅋㅋㅋㅋ 하지만 불가능하지도 않을 것 같네요(!
@E.E.샤츠슈나이더 이... 소성이요? 걔 공산당 아니었어요?
+ 그런데 영강은 지금 78인데 꼴랑 국장 밖에 못 올라갔네.
@돈이 곧 진리 영강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이소성이 인사드리겠다는 그 분이 영강인거죠 ㅋㅋ
중앙부처 국장급이면 보통 고시출신 50대 초중반이 대다수니까요 ㅋㅋ
@E.E.샤츠슈나이더 아아~
그런데 돌 행정부 다음의 미국 행정부는 바위 행정부일까요, 아님 자갈 행정부일까요?
...이번엔 피식조차 안나오네요...
"델몬트"
@통장 아앗...ㅋㅋㅋ
@통장 그에게 주어지는 합격목걸이…
@E.E.샤츠슈나이더
@통장 그리고 미국은 기업국가가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