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생(敎生)들 가운데 모습 하나
교생(敎生)은 글자 그대로 교육실습생이다. 교사가 되는 과정의 하나이다. 나의 경우도 물론 교생기간이 있었다. 또한 내가 공립의 교사로 있을 때 몇 번의 교생지도교사도 했다. 사립에 있을 적엔 전혀 없었다. 교생을 받지 않는 학교에 근무를 했기 때문이다. 5월에 학교에 교생들이 온다면 나의 경우는 지도교사를 자원을 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인연을 맺고 싶었기 때문이다. 교사와 교생의 인연은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일종의 사제(師弟) 간으로도 볼 수 있다. 지식전달체계세계에서는 직계 그 자체이다. 중요하고 귀중한 인연이다. 또 교생들이 남기고 간 수업과정안과 수업자료는 나에게 추억과 큰 자산이 되었다. 약간만 나에게 맞게 수정을 하면 좋은 자료로 활용이 가능하고, 내년의 교생지도 요목자료로도 제시하여 쓸 수 있다.
1981년 나의 대학졸업학년 4월에 모교에서 교생에 대한 사전지도가 있었다. 비(非)사범대학이지만 교직과정이 설치된 학교로서 교생으로 나갈 학생들이 제법 많았다. 강당에서 교생에 대한 사전지도 때 지도교수 한분이 전달 마지막 말 때 다소 엉뚱한 말씀으로 매듭을 했다. 내용인즉 교생으로 나가 있을 때 실습학교에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반드시 대학에 연락을 하여 도움을 구하고, 동시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교생신분으로 학생들의 집에 가정방문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나는 놀랐다. 교생들이 가정방문을 한다고? 지도교수는 이런 일이 매년 일어난다고 경고(警告)를 주었다. 교사도 아닌 학생이 가정방문을 한다고? 이건 간(肝)이 배 밖으로 나온 짓이다. 그래도 실제로 매년 야기되는 일이라면서 알리는 행정담당 지도교수의 공적인 경고성이니 일단은 알 필요가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난 곧 바로 잊어 버렸다. 매년(每年)이라니 너무나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드디어 그해 5월에 우리의 교생 팀도 학교로 파견학습을 나갔다. 부산 동래구 충렬사 근처에 있는 H여중이었다. 사립학교이다. 교사 분들 가운데 모교선배님도 많았다. 나의 지도교사도 나의 모교출신으로 나보다 2년 먼저 졸업한 케이스이다. 친근감이 별로 이지만 그래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마지막 수업인사 때 한 학생이 나에게 어느 고등학교를 나왔느냐 물어 답을 해 주었다.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 오니 지도교수가 자기도 그 학교를 나왔다고 하였다. 늦게나마 알고 보니 고교 2년 선배이다. 나중에 성적표를 보니 교생실습 점수가 B+이었다. 보통 A-이상 주는데 지도교사를 잘못 만난 케이스이다.
그 학교에 도덕교사 두 분이 계셨는데 교육학과 출신으로 두 분은 서로 간에 동기동갑으로 다 나의 대학 2년 선배이다. 수업참관 시에 보니 두 분 다 학습목표를 칠판에 잘 명시하고 수업 언어 등등 배울 점이 무척 많았다. 수업도 아주 재밌게 진행을 했다. 나의 공개수업을 보고도 재능이 있다고 과찬을 해 주었다. 교감 선생님도 나름 칭찬을 해 주었다. 그런데 나의 지도교사와 교감과는 사이가 별로이었다. 교감이 월권을 자주 한다고 나의 지도교사가 불평을 악의적(惡意的)으로 몇 번 했다.
교생은 모두 14명으로 7명이 여자이었다. 다 부잣집 딸들로 순수했고 귀티가 줄줄 흘렀다. 남자인 경우 군필이 나를 포함하여 4명이고 3명은 미필이었다. 남자 미필가운데 한명이 교생대표로 열심히 일을 했다. 능력도 있고 교양도 있고, 개성적이었다. 과학으로 물리학과 출신이다. 당시 육군징병의 병역의무복무는 2년 10개월로 거의 3년이기 때문에 남자의 경우 햇수로 그 3,4년 간 개성이 몰살(沒殺) 당하여 사라진다. 나의 경우도 군입대전엔 감수성이 풍부하고 마음속에 아름다운 꽃들의 수목의 정원이 만개(滿開)하여 있었으나 3년 군 생활 중에 모조리 뿌리째 객토와 벌목과 벌초, 심신(心身)의 누적된 파괴 등으로 말살(抹殺)을 당하고 말았다.
봉급을 받는 직업군인이 아니고, 후진적 빈국(貧國)의 군대로 일정 복무기간의 의무병이기 때문에 대우도 거의 무보수(無報酬)로 바닥수준이고, 피해로 당하는 농도가 심했다. 포탄(砲彈)이 나는 전시(戰時)가 아닌데도 전라도와 경상도 등의 남부후방해안에 포진한 전투경찰이었지만, 여기저기 부대별로 대원들이 근무 중에 각종사고로 신체 훼손 및 익사(溺死) 등등 불명예가 많았다. 나 역시 신경과 감정, 정서상으로는 입대전, 예전에로의 회복이 아예 영영 불가능한 참혹한 상처투성이의 수준이었다. 오로지 총칼과 경계의 야전에서 살아남아 무사히 제대하는 것만이 목표인 셈이었다. 나는 그런데, 그 교생대표는 미소년의 풋풋한 미(美)가 아직 잔여(殘餘)로 살아 있었다.
물론 5월의 교생기간 동안 교생들의 행동 가운데 미흡한 점들도 많았다. 내가 바로 잡을 수도 있었는데 그런 생각을 미처 못 했다. 교생 마지막 모임 가운데 여자교생들은 먼저 집에 가고 남자들의 마지막 이야기 가운데 예상 밖의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나는 그 이야기가 너무나 쇼킹하였다. 바로 교생대표가 어느 학생 집에 학생의 요청으로 가정방문을 한 것이다. 내용인즉 요청한 학생의 그 아이는 혼외 자녀로 고민이 무척 많았다. 동갑내기 형제에게 언니라 불려야하는 등등 계모산하에서 마음고생이 심했다. 그런 문제로 자신이 가정방문을 하여 그 학생의 애로사항을 부모님께 말씀 드리고 선처를 부탁하였다는 것이다. 교생에게 가정방문을 요청한 3학년 중학생도 대단했지만 그렇다고 학생의 담임에게는 상의도 없이 가정방문을 간 교생의 행동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정신이 아찔했다. 그런 후로 나는 좀처럼 인간들을 책대로는 바로 믿지 않았다. 수시로 확인하고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선배들과 누구들의 경험담을 중시했다.
그런 후 시간이 흘려, 1년 후 온천장 목욕탕 골목을 지나는데 그 교생대표였던 그가 지나가다가 나를 만났다. 반갑게 인사를 했다. 나보다 4년 연하이지만, 졸업을 같이 해서 그런지 후배나 선배보다는 동기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의 근황을 묻기에 밀양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고 하니, 자신도 곧 미국유학을 간다고 하였다. 미국 유학? 물리학으로 미국유학을??? 그리고는 헤어졌다.
미국유학? 그리고 보니 나의 대학 졸업 동기로 외국유학을 간 친구들도 제법 있다. 미국은 당연하고 독일과 프랑스, 이태리 등등 많았다. 남녀불문으로 이과도 많았고 문과도 많았다. 모교가 사립대학이다 보니 대부분 자비로 갔다. 국비가 아니기 때문에 귀국의 의무가 없었다. 교생동기로 도덕과인 교육학과 여학생 하나도 미국으로 졸업과 동시에 유학을 갔다. 커피를 중독 수준으로 너무 좋아하는 소녀이다. 나름 여자 절친, 나보다 네살 연하 영문과 A도 미국으로 사회학을 공부하려 갔다. 졸업식 때 미국에서 온 그의 동생을 봤는데 자태가 언니 못지않게 출중했다. 나의 리즈시절(Leeds時節) 후기가 그렇게 대미(大尾)를 장식했다. 언젠가 방송국 대학자랑 코너를 TV로 보니 외국 유학한 선배나 후배들도 동문으로 많이들 참여를 했다. 당시 나는 유학은 꿈도 꿀 수가 전혀 없었다.
교생 후 2학기 즈음 교생동기 가운데 수학과 한 명은 교생 학교로부터 연락이 와서 그 학교에 교사로 부임(赴任)해 갔다. 대학교정 잔디밭에서 만난 그는 자신의 꿈이 교사라면서 수학교사로 그 자신의 일을 해 나가고자 하였다. 열의에 차 있었고 그 일에 큰 만족을 하였다. 군필이기 때문에 바로 가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군미필 교생 가운데 한명은 2년 후 동부산전문대학에 도예과 전임강사로 갔다. 이른 나이에 전문대교수가 되었다. 도예전시회도 하는 등 나름 부산지역 전문가로 활약을 하다가 재직학교가 폐교가 되기 직전에 정년을 다해 나왔다. 2005년 경 반송중학교 교사로 있을 때 '가수 윤도현의 야외음악공연행사'차 갔다가 그의 연구실에서 만났는데, 교생 때 못지않게 센스와 교양이 있었다. 괌에서 도예전시회를 한다고 준비 중이었다. 몇 개월 후 해운대의 한 카페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같이 있던 사모님도 품격이 대단했다.
그리고는 이젠 나도 긴긴 시간이 흘러 세상도 많이 변했다. 오로지 단순한 수작업전담의 아날로그 시대를 지나 복잡다단(複雜多端)한 디지털 스마트 시대를 한참 달리는 중이다. 이제는 복합적이고 다중적인 무한히 공허한 양자역학까지 서서히 실제(實際)로 등장하니 미처 따라가기도 힘들다. 이런 와중(渦中)의 시간에 짬을 내어 먼먼 아득하게 지나간 나의 교생의 시기를 한번 추억해 본다. 아카시아 꽃 냄새가 거리와 교정의 여기저기에서 물씬 했던 1981년의 5월이 이제는 그림자도 없는 망각으로 흐른다. 시대적으로는 계몽과 야만과 지성이 변색하는 상아탑과 함께 낭만이 멸(滅)하여 꺼지는 작은 공간의 대하(大河)의 시간이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