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화라는 이름의 비구니 2월 21일, 연중 제7주간 월요일,마르 9,14-29.
오늘 복음도 지난주에 이어지는 산상설교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무나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마는 참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술 더 떠서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도대체 원수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라는 부정적인 느낌이 떠오르는 것이 솔직한 우리네 마음일 것입니다. 부처님이 설법을 펼치시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부처님께서 비구니로 받은 사람 중에 연화색녀라는 여인이 있습니다. 이 여인의 운명은 참으로 기구하다 못해 통절합니다. 불교계의 유명한 법륜 스님이 한 법문에서 이 연화색녀에 대해 들려준 적이 있지요. 저는 법륜 스님의 법문에 다른 자료를 보충해 연화색녀가 주는 교훈을 헤아려 보고자 합니다. 연화색녀의 세속에 대한 배경은 경전마다 이야기가 조금씩 다르지만, 이미 법륜 스님이 언급한 것처럼 본질적인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 그리스도교 성경 안에 여러 복음서가 있는 것처럼 불교에도 여러 다른 경전이 있는 것이지요. 어느 경전에서는 연화색녀가 왕사성의 한 장자의 딸로 태어났다고 하고, 또 다른 경전에서는 득차실라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왕사성의 득차실라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른 아침 봉오리를 여는 해맑은 연꽃처럼 아기가 너무나 예뻤기 때문에 부모는 연화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운명은 알 수가 없는 것이어서 연화는 훗날 한 때 거리의 여인이 되었기 때문에 연화라는 아름다운 이름에 그만 색녀(色女)가 붙게 되었습니다. 불교의 경전에서는 연화색녀라고 쓰고 있지만 저는 이 불행한 여인을 그냥 연화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이미 비구니가 된 여인에게 색녀라는 이름이 온당치 않기 때문입니다. 연꽃의 정기를 머금고 태어난 연화는 자랄수록 미모가 드러나 득차실라 마을을 너머 온 지방에 명성이 알려지고 많은 남자들이 청혼해 왔습니다. 연화네 집은 애옥살이 가난한 살림인지라 연화 아버지는 이웃 고을의 나이가 많은 부자에게 딸을 시집보냈습니다. 돈을 받고 딸을 팔아넘긴 셈이지요. 겨우 열 몇 살의 연화는 아버지뻘 되는 남자에게 시집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모의 딸 덕분에 늘그막에 호사스런 집에 살게 된 연화의 아버지는 주색잡기로 가산을 탕진하고는 병이 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마음씨 착한 연화는 남편의 허락을 구하고 홀로 된 어머니를 모셔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화근이 된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연화는 남편과의 사이에 자기를 닮은 예쁜 딸도 낳고 그런대로 운명에 순응하며 잘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연화는 자신의 어머니가 남편과 정을 통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남편을 잃고 홀로 된 연화의 어머니가 독수공방의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딸의 남편을 유혹했다는 설과, 원래가 여자를 밝히는 연화의 남편이 장모를 유혹한 것이라는 설이 경전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사실이야 어쨌든 참으로 기막힌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연화는 자신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너무도 가혹한 상황 앞에서 반미치광이가 되어 품에 안고 있던 어린 딸을 마당에 팽개치고는 집을 뛰쳐나갑니다. 악몽을 지우기 위해 발 가는대로 방황하던 연화는 바라나시라는 곳으로 흘러들어가 다행히 그곳에서 부유한 상인을 만나 다시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연화는 과거의 슬픔을 지우고 부자 상인과 십 년 가까이 행복한 생활을 했습니다. 어느 날 먼 도시로 장사를 나갔던 남편이 빈손으로 돌아와서는 강도에게 돈을 모두 빼앗겼다면서 집에 있던 돈을 모두 챙겨 다시 떠났습니다. 그 후로도 장사하러 간다고 나간 남편이 상당히 오랜 기간 집을 비우곤 했지만 연화는 조금도 남편을 의심하 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장사로 집을 비운 어느 날의 일입니다. 남편의 친구가 찾아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허튼 수작을 거는 겁니다. “아주머니, 이렇게 혼자 지내는 생활이 외롭지 않으세요?” 연화는 성을 내면서 “어찌 친구의 아내에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지요? 아녀자 혼자 있는 집에 오래 머물지 마시고 속히 돌아가 주세요.” 하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아주머니가 딱해서 그럽니다. 지금 그 친구는 다른 여자에게 푹 빠져 정신을 못 차리는데 아주머니가 아무 것도 모르고 눈이 빠져라 남편을 기다리며 이렇게 사니 말이오.” 연화가 그런 말로 자신을 꾀지 말라고 하자 친구는 “내 말은 거짓이 아니오. 오래 전에 그 친구가 강도를 만나 돈을 빼앗겼다고 하고서는 집안의 돈을 모두 챙겨 간 적이 있지 않소?” 하고 말했습니다. 이어 “실은 그 친구가 도회지에서 젊고 예쁜 여자를 만나 살림을 차렸다오. 그 여자에게 정신이 팔려 아주머니를 이렇듯 버려두니 내 마음에 안 되어서 그럽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연화가 돌아온 남편에게 남편 친구에게 들은 말에 대해 따져 묻자 그간의 사정을 솔직히 털어 놓았습니다. 연화는 도저히 남편을 용서할 수 없었지만 객지에서의 외로움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 생각하고 남편의 새 여자인 첩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남편에게 두 집 살림을 하느니 차라리 젊은 첩을 데려와 함께 살자고 했습니다. 남편은 연화가 투기를 하지 않을까 걱정을 하면서도 젊은 첩을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남편의 우려와는 달리 연화는 남편의 첩을 진정으로 돌보아주고 사랑으로 감싸 주었습니다. 어느 날 첩의 머리를 빗겨주던 연화는 그녀의 머리에 커다란 흉터가 진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여자는 머리를 빗겨주는 연화에게 머리 속 흉터의 내력에 대해 가만가만 들려주었습니다. 자신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일로 집안사람들이 해준 이야기로, 자기 어머니가 무엇 때문인지 자기를 마당에 팽개치고 집을 나가버렸는데 그때 생긴 흉터라는 것이었습니다. 연화는 심장이 덜컹 소리를 내고 벌벌 떨렸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가족이 어떻게 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제발 아니기를 바랐지만 남편의 첩은 그 옛날 자기가 마당에 내던진 바로 자신의 딸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여자를 처음 본 순간 연화는 남편의 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마음이 일었고 사랑스럽고 마음이 끌렸던 것이었습니다. 연화는 이 너무나도 참혹한 운명 앞에서 기가 막히고 정신이 아득해졌습니다. 남편이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 정을 통하는 것을 보고 거의 실성해 집을 나왔는데, 이제 자신의 성장한 딸이 새 남편의 첩으로 온 것입니다. 연화는 죽을 만큼 괴로웠지만 딸에게 괴로움을 안겨줄 수 없어 다시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자신조차 어찌해 볼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연화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겨졌고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제 운명과 남자에 대한 증오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연화는 고향인 왕사성으로 돌아가 거리의 여자가 되었습니다.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타고난 미모로 연화는 많은 남자들을 유혹해 가산을 탕진하게 하고 신세를 망치게 했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남자들이 연화의 웃음에 홀려 폐인이 되거나 가족에게 버림받고 자살하기도 했습니다. 남자들이 불행해지고 파멸해갈수록 연화는 복수의 쾌감을 느꼈습니다. 남자는 자기에게 원수이고 원수에게 복수하리라는 마음만 불탔던 것이지요.
어느 날 부처님의 교단이 세를 넓혀 가는 것에 위협을 느낀 이교도들이 연화에게 접근해 왔습니다. 그들은 연화에게 많은 돈을 주고 부처님을 유혹하도록 사주를 했답니다. 연화가 이에 응합니다. 연화는 이미 500 명이나 되는 기생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연화는 사실 마음의 허전함을 느끼고 있었고, 세간에 소문이 자자한 부처님을 한 번 만나보고 싶었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람의 심리에는 묘한 이중성이 있지요. 세상에서 남자 중의 남자라고 할 수 있는 부처를 유혹해 보고 싶은 마음과, 다른 한쪽에서는 메울 수 없는 자신의 허전함을 달래며, 그 허전함을 풀 수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싶은 두 가지 마음 말입니다. 왕시성에서 설법을 펼치고 돌아오는 부처님 앞에 아름답게 치장한 연화가 나타났습니다. “사문이여, 당신에게도 많은 제자가 있다고 들었는데 나에게도 500 제자가 있습니다. 당신이 해탈했다면 나도 해탈을 얻었소. 일체의 남자를 굴복시킬 수 있는 힘을 얻었소.” 연화는 당당하게 부처님을 응시하면서 질문을 던졌던 것입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부처님이 말씀하십니다. “불쌍한 여인이여, 그대의 눈을 뜨시오. 그대는 복수심에 불타 수많은 남자를 유혹하고 정복했다고 생각하지만, 다만 수많은 여인에게 그대가 옛날에 겪었던 고통을 안겨 주고 있다는 것을 모르오? 그대는 남자에게 복수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수많은 여인에게 눈물만 안겨 준 것이오. 원한으로는 결코 원한을 없앨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시오.” 이 말씀을 듣고 연화는 곧 눈을 떴습니다. 아무리 복수해도 답답하고 허전했던 자기의 마음을 부처님께서는 정확하게 짚으셨던 것이지요. 연화는 가슴이 환히 열렸습니다. 연화는 진정 참회와 기쁨의 눈물을 함께 흘리면서 부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부처님은 연화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부처님은 연화의 출가를 허락했던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수제자인 아난다를 포함해서 모든 제자들이 반대했다고 합니다. 연화와 같은 유명한 창녀를 출가시키면 교단이 뭇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으며 공양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당연한 반대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역시 부처님은 다른 분, 그분이 말씀하셨답니다. “그녀는 이미 눈을 떴다. 그녀는 옛날의 연화색녀가 아니다. 세인의 비난은 일주일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그녀의 출가를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그 후 그녀는 열심히 정진하여 비구니 중에 신통이 가장 뛰어난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정말 운명이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요? 연화의 이야기는 때로는 정말 기가 막힌 운명의 장난 앞에 처하게 되는 우리 인간의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가 도저히 우리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너무나 처절한 고통의 상황에서 우리는 절규합니다. 불교 표현으로 우리는 번뇌를 느끼는 중생인 것이지요. 때로는 도저히 풀 수 없을 것 같은 원한을 지니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처님이 연화에게 설법에서 들려준 말씀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원한으로는 결코 원한을 풀 수 없습니다. 미움으로는 결코 미움을 없앨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미움을 없앨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연화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은 하나의 찬가가 되었습니다. 캄보디아의 난민 수용소의 봉사자였던 코우나키라는 사람이 수용소에서 행해진 놀라운 가르침의 장면을 목격했다고 하면서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수용소에는 5만의 난민들이 있었고 이 중에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승려 중의 하나인 마하고사난다가 수용소에 절을 개원하게 되었답니다. 지하 단체인 크메르 루즈의 수용소 지도자들은 누구든지 절에 가면 죽이겠다고 위협했지만 2만이 넘는 사람들이 법회가 열리는 진흙 마당에 모여 있었습니다. 마하고사난다는 천 년이 넘게 불러 온 전통적인 찬가로 법회를 시작했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미움은 미움에 의해선 결코 멈춰지지 않으니 오직 사랑으로써만 치료된다. 이것은 아주 옛날부터 전해져 온 영원한 법칙이다 그가 법문을 반복해서 읊는 동안 모두가 따라했고, 그 구절을 계속 낭송하면서 저마다 흐느껴 울기 시작했답니다. 놀라운 순간이었고, 바짝 마른 사막과 같았던 그들의 가슴이 용서를 결심하고 있음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분명 우리 삶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 불교 용어로 번뇌가 찾아오지만 그 번뇌가 끝없이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둔 밤에는 도무지 어둠이 끝날 것 같지 않고, 혹독한 추위의 겨울에는 결코 다시 봄이 올 것 같지 않지만 긴 밤이 지나 새벽의 여명이 밝아오고, 매섭게 휘몰아치던 겨울바람이 온기를 지니고 봄바람으로 바뀌듯이 우리 삶의 고통, 번뇌도 시간 안에서 변화를 겪게 됩니다. 연화에게는 목련 존자나 부처님과의 만남이 인연이 되어, 변화가 찾아오게 되었지요. 그것이 불교식 표현으로 인연이었지만 우리 그리스도교의 표현으로는 은총이었습니다. 연화가 부처님을 만난 것은 분명 인연이고 은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연화가 부처님을 만난 만남, 그 자체보다는 만남 안에서 연화가 지녔던 열린 마음이 진정 인연이고 은총이었습니다. 연화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마음을 열었기 때문에 그 은총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문득 찾아오는 인연이나 은총에 진정 마음을 열 때, 마치 봄바람처럼 불어오는 그 은총의 작은 속삭임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속삭임이 우리의 고통, 번뇌를 가시게 할 것입니다. 그 은총의 속삭임 안에서 우리의 얼어붙었던 마음의 나무에 은총의 싹이 피어나게 될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 참 쉽지 않지만 아이로닉하게도 바로 그것, 원수를 사랑하는 것만이 진정 원수에게 원수를 갚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실 잊지 않으며, 봄바람처럼 스치는 은총의 속삭임에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도록 합시다. -홍천영혼의 쉼터 원장 류해욱 신부- ![](https://t1.daumcdn.net/cfile/cafe/1674CC3D4D96F68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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