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타문학, 삼척문협 선후배님께
부끄러운 일이지만, 내가 지도해온 P 시인이 두타시낭송에 나오지 않아, 회원들이 궁금해 하고, 오해를 하여 알려드립니다. 이번에 강원문화재단에 지원금(400만원)을 받아 시집을 내는 데까지는, 그동안 지도해온 작품을 뽑아 제가 편집위원으로 있는 잡지 ‘시와 소금’에 보내게 하고, 시와 소금에서 지원금을 받는 모든 절차- 지원신청서, 그 어려운 E-나라도움 교부신청, 사업등록, 정산 등을 제가 막지 않고, 계속 도와주도록 오히려 부탁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지원금을 받도록 도와준 출판사에서 P 시인이 저에게 시 해설을 쓰도록 부탁했다고 연락이 왔다. 서로 연락을 안 하고 있었기에 잡지사 주간에게 시집 내는 P 시인이 차 한 잔 하자 문자로 연락하면, 큰 원수 진 것도 아니고, 6년 긴 시간 친하게 지냈는데, 이 기회에 서로 풀겠다고 했다. 전화와 이메일로 잡지사 주간이 P 시인에게 중간 다리를 놓아 잘 전했다는 연락이 왔다. 그러나 통 연락이 없어, 만나서 풀고 본인이 그렇게 좋아하던 글쓰기 활동을 두타문학에 나와 하도록 전하라며, 옛날부터 부인들과 함께 만나는 최 시인에게 차 한 잔 하며 풀자고 했는데, 결과는 실망이었습니다.
“나는 이제는 글을 안 쓸 거야!”하고 찻집의 책상을 세 번 내리치고 삿대질 하고 떠난 수제자가, 이제는 삼척두타문학 50년사까지만, 그리고 시집 낼 때까지만 문학 활동을 할 테니, 구지 만날 필요가 없다는 거였지요. 하늘같은 스승이라고 제 입으로 여러 번 말한 제자가 글을 안 쓴다고 제 입으로 소리쳐놓고, 잡지에 작품도 발표하고 있고, 두타동인지에도 대표작품을 고치면서까지 올리고, (내가 소개해 준 잡지와 엔솔리지에 작품을 발표했던, 내가 소개해준 친구가 발행하던 잡지 지역으로 이사를 가려고 하던 사람에게) 뭐주고 뭐 맞고, 내가 삼척 동인활동 못하게 했다 오해 받고, 그런 일이 있어 부끄러운 일이 지만, 그 동안의 사정을 대충 알리니, 읽어보시고, P 시인의 문학행보를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그렇게 좋아하던 글쓰기를 작은 자존심 때문에 접는다는 것이, 수제자를 잃는다는 것이 참 안타깝다. 그냥 만나서 악수 한 번 하면 될 텐데, 그리고 그가 다시 글을 안 쓴다는 것을 나는 믿지 않는다. 다시 언제까지만 쓰겠다. 제3시집 나올 때까지만 쓰겠다고 할 것이다. 자신의 글을 지도해주는 스승이 혹 자신의 맘에 안드는 말을 했더라도, 제자가 스승 앞에서 책상을 세 번이나 치고 삿대질을 했으면, 앞으로는 글을 안 쓰고 안 만나더라도, 만나 커피 한잔 하며 풀고 사는 게 사람의 도리가 아닌가 생각하며, 저 또한 그를 너그럽게 용서하고 찾아가 손을 못 잡는 자존심이 부끄러울 뿐이다.
2019년 6월 7일 김진광
수제자와의 슬픈 이별
아마도 강릉에서인가 퇴임하는 교직자 교육이 끝나고, 삼척에 와서 차 한 잔하자고 내가 제안을 한 것 같다. 예전에 수석을 하면서 서로 조금 알고 지내던 사이었기에 교직 정년퇴직 동기로 오랜 만에 만났으니 그렇게 차 한 잔하며 퇴임 후 어떻게 지낼 것인가 알고도 싶었던 게다. 그는 삼척 모 대학의 교수로, 나는 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을 퇴임하고 연금으로 살아가기에 노후가 보장되고 여유가 있는 편이라 자기가 하고 싶은 취미활동에 시간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다.
“교수님, 이제는 좋아하는 그림과 수석을 마음껏 할 수 있겠네요?” “나도 김 선생처럼 글을 시작했어요.” “그럼, 잘 되었네요. 내가 수석은 그쪽보다 잘 알지 못하지만, 문학은 내가 선배니 함께 글을 쓰며 토론도 하고 만나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좋다고 했고, 그래서 둘은 주로 내가 동시 지도를 해주며 차도 마시는 작은 후진 K 시인 찻집에서 만났다. 찻집이 문을 닫는 날은 시내의 찻집에서 문학지도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1주일에 1~2회 정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에게서 전화가 오면 하던 일을 그만 두고 달려 나갔다. 2013년 봄부터 2019년 봄까지 만 6년을 만났고, 이따금 문학행사나 매달 열리는 두타문학 시낭송에서 늘 내 곁에 있어 내가 그의 귀가 되어주었으니, 그 동안 얼마나 정이 들고 서로 사랑이 깊었을까. 나는 정과 의리를 중시하고, 남을 배려하고, 베풀어 주기를 좋아하고, 남의 어려운 일을 잘 처리해주고 내 어려운 일은 혼자 힘들게 풀고, 좀 더 친해지면 속의 창자까지도 빼주었다가 후회하기도 하는 많이 모자라는 성격 소유자인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그가 처음 만났을 때 내 앞에서 두어 번 한 말이 지금도 생각난다. “나는 예술세계에서는 그 사람에게서 다 배울 때까지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다.”는 말을 그림과 수석을 하기에 예술인으로서 갖춘 훌륭한 인격자라 생각했다. 그런데 스승에게서 다 배우고 난 뒤에 부메랑의 비수가 되어 돌아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또 그가 이따금 내 앞에서 진심(?)으로 한 말이 생각난다. “하늘같은 스승님!”이라 이따금 불러주어 좀 그랬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리고 “글을 쓰는 데는 좋은 스승을 만나야 하는데, 나는 열심히 가르쳐주는 좋은 스승을 만나서 행복(?)하고 좋다.” 그런 말을 이따금 던졌다.
언제나 우리는, 그가 부지런히 써서 출력해온 2~4편의 작품과 따로 가져온 여유분 종이에 앞뒤로 빽빽이 시 분석과 첨삭과 이론을 얘기하며 2~4시간을 보냈다. 매번 작품 여백과 빈종이 3~5장이 붉은 볼펜 글씨로 가득 찼는데, 그는 첨삭한 작품과 토론한 종이를 가져가서 다시 공부하는 공부벌레였다. 그는 귀가 안 좋아 서로 대화를 나누기 힘들었다. 처음에는 내가 그가 써온 글을 목소리를 높여 예기하다가 보니, 집에 오면 목이 쉬는 날이 많았고, 옆에서 차를 마시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여 긴 시간 떠드는 나를 흘끔흘끔 이상하게 바라보는 걸 알고 빈 종이에 쓰며 지도를 하게 된 것이다.
그가 대부분 찻값과 간편히 먹는 자장면이나 추어탕 값을 지불했다. 그는 부부가 둘 다 연금을 받고 있었지만, 서울지역에 아파트와 지역의 땅 등에 가진 돈과 대부를 받아 투자를 한 관계로 연금을 받아서 이자를 갚느라 돈의 여유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무료로 해주는 개인 과외 지도지만, 나도 성격상 남에게 얻어먹는 걸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3번에 1번 정도는 내가 비용을 지불 했다.
어느 날, 나를 형님이라 불러서 아우로 지내는 잡지사 <<시선>>발행인 겸 주간인 시와 동시를 쓰고 있는 정 주간이 찾아와, 그의 준비한 작품을 보며 이만하면 등단 가능하다고 하여 시로 등단을 시켰다. 그 때 지금 두타문학 회장으로 일하는 서성옥 회장도 시와 소설로 저울질 하다가, 소설로 등단을 시켰다. 이후 나를 편집자문 의뢰가 와서, 두 사람을 편집 위원(?)으로 함께 추천하였고, 잡지사에서 마음이 안 들면 그는 나에게 얘기해서 전화를 걸어 시정을 해주곤 하였다.
그와 의논하여 장수시낭송회로 우리나라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전통 있는 두타문학에 가입하기로 하였다. 모임에서 내가 추천을 하였다. 그런데, 그가 함께 동인으로 배우고 있는 삼척교육문화관 사람들도 가입을 희망하고 있었기에 형평성에서 그만 가입이 안된다하여, 내가 목소리를 높이고 책임을 진다고 하여 겨우 가입을 시켰고, 그 후 강원문인협회, 한국문인협회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고 있다. 그 후 두어 번 두타문학회에 전원이 반대하는 지인을 날 보고 가입시켜달라고 끈질기게 얘기해서, 그 분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하며 본인이 직접 가입시켜보라고 했다. 그는 그러한 일은 언제나 나에게 맡겼다.
그가 써서 출력해온 작품은 1차로 나에게 가져오는 걸로 알고 있다. 작품 첨삭 순서는 먼저 그가 자기 작품을 낭독하고 시 창작동기를 얘기한다. 다음은 찻집을 하는 K 시인이 철자를 고치고, 시적 표현이 좀 어색한 곳을 지적하여 밑줄을 그었다. 다음은 내가 붉은 볼펜으로 첨삭을 하며, 이론을 얘기하는 편이다. 한 2년까지는 하나나나의 작품을 40~50% 정도 첨삭해주었고, 한 2년은 30% 정도 고쳤고, 그 후로는 각 작품마다 25% 정도 첨삭을 해준 편이다. 한 작품 두 번 첨삭하기도 하였고, 잡지에 발표하는 작품은 더 한 번 첨삭지도를 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발표한 잡지에 <이 계절의 좋은 시>로 좋은 평을 해주기도 하였다. 우리들의 문학 토론과 그의 노력으로 날로 작품이 발전하였다. 그가 모더니즘(혹은 주지주의)성향이 보여, 그 쪽으로 방향을 잡아주었다. 그런데 모더니즘 시들이 좀 난해하고 이해가 어렵고 감동이 적다고 했더니, 감동면에서도 욕심심을 부려, 우리들은 그의 작품을 그런 면도 부족하지 않도록 연구하고 힘써 보았다.
우리와 첨삭을 거친 그의 작품은, 아마도 삼척교육문화회관에서 강의를 하는 K 동화작가 앞에서 숙제로 발표되었으리라. 당연히 그의 작품은 우뚝 빛났고, 사람들의 부러움과 가르치는 K 선생의 총애와 사랑을 받았으리라. “K 선생님이 내 작품을 삼척에서 시를 쓰는 사람 중에 최고라고 해! 하 하 하” 이런 말을 나에게 여러 차례 전했다. 가르치는 선생은 맞춤법 정도 만 강의 하고, 숙제로 써오는 작품을 낭독시키고, 평을 하는 수업으로 이루어졌다는데, 그가 선생님을 대신하여 거의 수업을 가르친다고 자랑하였다.
그는 나와 함께 숙제를 한다고, 가르치는 법을 습득했다고, K 선생님과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나와의 만남은 과정이고, 그의 본심은 아마도 발표하고 칭찬 받고 선생을 대신해서 가르치는 일이 그렇게 즐거웠으리라! - 그걸 이별할 무렵에 스승인 내가 건드린 게다. “삼척교육문화회관에서 K 선생대신 원덕의 이 시인이 개강을 하기로 되었는데, 인원을 도와주는 최 시인이 사람 숫자가 모자란다고 하니, 거기도 나가가도록 해요.” 먼저 나가던 삼척교육문화회관에도 나가라고 한 것이다. “내가 왜 그런 아무게 시인한테 배워야 하는가?”며 크게 역정을 내었다. “아니, 예전에는 K 선생에게는 아무도 배울게 없지만, 심심하여 나간다 하지 않았어요.” 이게 화약의 심지에 불을 붙인 것이다
그가 동해에 집을 지을 때도 이따금 함께 가보았고, 집들이도 하라고 배려하고, 나도 과일 값을 조금 드렸다. 그는 집을 지어놓고도 나에게 말했다. “김 선생, 나는 그림에는 욕심이 없어도, 글에는 아직도 배가 많이 고파!” “이제는 하산을 하여도 되는 분인데, 글 욕심을 좀 줄여요!” 두타문학 시낭송 작품집에 실린 작품 중에 내 작품보다 그의 작품이 더 좋다는 우스개 소리도 들었다. 내가 그런 말을 하면, “청출어람! 하 하 하…”하고 넘어갔다. 그리고 이따금씩 스승인 나와도 글 경쟁을 하였다. 두타시낭송에 올린 내 작품이 더 좋다고 생각되면, 올렸던 자신의 작품을 다시 쓰거나 작품을 퇴고해서 올렸다.
그는 글에 대해서는 욕심이 정말 많았다. 근래에도 “왜? 요즘은 내 작품 첨삭에 전보다 성의가 없어요!” 그는 대어놓고 작품 첨삭에 전보다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이제는 하산할 때가 지났는데 하며, 좀 성의를 덜 보이면, 그럼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서 배우면 어떻겠느냐 이따금 물어서 속이 좀 상하지만, 사진관을 하던 후배 시인한테는 가서 이따금 작품 토론을 하라고 허락해서, 사진관에 몇 번 찾아간 줄 안다. 그리고 두타문학동인인 P와 J시인에게도 찾아가겠다고 하여, 한 사람은 건강이 안 좋고 업무에 바쁜 사람이니, 이제는 작품과 이론도 평론도 많이 향상되었으니, 혼자서 창작을 해도 충분하며, 삼척과 동해, 강원도에서도 작품을 잘 쓰는 사람에 속한다고 얘기해 주었다. 그리고 이따금 차 한 잔 할 때 작품 수를 예전보다 줄여서 한 편이나 두 편 가지로 나오라 했다. 근래 1~2년은 이 외에도 스트레스를 받게하는 일들이 몇 차례 더 있었지만 여기서는 밝히지 않겠다. (마무리를 위해 앞에 글을 가져와 마친다)
그가 그렇게 좋아하던 글쓰기를 작은 자존심 때문에 접는다는 것이, 수제자를 잃는다는 것이 참 안타깝다. 그냥 만나서 악수 한 번 하면 될 텐데, 그리고 그가 다시 글을 안 쓴다는 것을 나는 믿지 않는다. 다시 언제까지만 쓰겠다. 제3시집 나올 때까지만 쓰겠다고 할 것이다. 어떤 일이 있었다 해도, 제자가 스승 앞에서 책상을 크게 세 번이나 치고, 삿대질을 했으면 앞으로는 글을 안 쓰고 안 만나더라도, 마지막으로 만나 커피 한잔 하며 풀고 사는 게 사람의 도리가 아닌가 생각하며, 저 또한 그를 너그럽게 용서하고 찾아가 손을 못 잡는 자존심이 부끄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