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공원에 조성된 광산김씨 조형물.전면/대전중구 | ||
작품명
조각가 : 박병희
작품설명 : 광산김씨의 화목하고 풍요로운 모습의 가족상과 훌륭한 가문을 두 손으로 받드는 형상으로 천대만대 조상을 섬기며 자손이 번창하는 아름다운 광산김씨 기상을 상징한 것이다.
뿌리공원에 조성된 광산김씨 조형물.후면/대전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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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공원에 새겨진 광산김씨 유래>
광산김씨는 신라 왕자인 흥광(興光)을 시조로 받든다. 왕자께서는 신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아시고 광서동(光西洞) 지금의 광주시 서일동에 터전을 잡고 살으셨기 때문에 광산(光山)으로 관향(貫鄕)을 삼게 되었다.
아드님 식(軾)이후 대대로 고려의 높은 벼슬인 평장사(平章事:정2품)로 오른이가 여덟 분이나 되어 동네 이름을 평장동(平章洞)이라고 했다. 그 후손을 크게 문정공 태현(文正公 台鉉) 문숙공 주정(文肅公 周鼎) 양간공 연(良簡公 璉)으로 나누고 있다.
조선에 들어와서 더욱 가문이 번창하고 많은 인물이 배출돼 삼한갑족(三韓甲族)의 일컬음을 얻게 되었다. 시조의 18대손 정(鼎)은 추성보리공신(推誠輔理功臣)으로 중대광(重大匡:고려때 문산계로 1308년(충렬왕 34) 종1품으로 제정되었다. 뒤에 벽상삼한(壁上三韓)의 칭호를 위에 덧붙였음)으로, 대호군(大護軍:종3품)에 올라 광성군(光城君)에 오른분인데, 세 아드님 관찰사공 약채(觀察使公 若采) 척약재공 약항(惕若齋公 若恒) 직제학공 약시(直提學公 若時)께서 다 과거에 오르셔서 크게 현달하셨고, 약채(若采) 선조께서 조선조 초기에 충청도관찰사를 지내면서 연산(連山)에 자리잡게 되어세칭 광김(光金)을 중심으로 한 기호유학(畿湖儒學) 의 본거지가 되었다. 약채(若采)의 증손 국광(國光)께서는 적개공신(敵愾功臣). 좌리공신(佐理功臣)이라는 두 개의 공훈(功勳)에 책록(策祿)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정1품품계)로 의정부(議政府) 좌의정(左議政:정1품정승)에 올라,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으로 책봉(策封)되었으며,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지었다.
국광(國光)의 5대손 사계 장생(沙溪 長生)선생께서 기호유학의 거대한 봉우리를 일으켰다. 사계는 구봉송익필(龜峰 宋翼弼)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적전제자(嫡傳弟子)로 성학(聖學) 성리학(性理學) 예학(禮學)에 두루 통달한 거유(巨儒)로 그 학통이 아드님 신독재 집(愼獨齋 集)에게 전해졌고 두 분의 문하(門下)에서 동춘당(同春堂) 宋浚吉 우암(尤庵) 宋時烈 등 우리 역사를 빛낸 큰 학자가 줄을 이어 나와서 드디어 기호학파(畿湖學派)의 거대한 맥을 형성했다.
연산의 돈암서원에 기호학맥(畿湖學眽)의 자취가 남아있다. 광산김씨 가문이 영예로운 것은 우리 역사를 통틀어 으뜸가는 도학자(道學子) 열여덟 분이 오른 국학 성균관(成均館)의 문묘(文廟)에 두 분이 배향(配享) 되었고 특히 부자(父子) 사계와 신독재라는 사실과 조선시대 당대 최고의 석학만이 누릴 수 있는 대제학(大提學)을 일곱 분이나 배출한 사실이다.
또 사계선생의 삼자(三子) 허주반(虛舟槃)의 손자인 서포 김만중(西捕 金萬重)선생께서는 충효소설 구운몽(九雲夢)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지어 우리문학사를 크게 빛내시었다. 그 밖에 정승판서 장군 충신열사는 이루 다 적을 수 없다. 그 대략은 뒷면과 같다.
<광산김씨 현대인물>
김희수(金熺洙:논산양촌출생.공주고.세브란스의대졸업.1962년 김안과 병원개원 원장.건양학원 설립자.2000년 대전에 건양대병원 설립.자랑스런충청인상.건양대학교 초대총장~제7대총장 취임,2006년 민간인이 받을수있는 최고훈장인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상,광산김씨 대종회전회장).김수환(추기경).김춘수(현대시사의 양대산맥.시인).김익수(대종회고문.동양효문화연구원 초대이사장).김대중(언론인.조선일보주필).김우중(전대우그룹회장).김용(대종회회장.용한의원원장.국민훈장수상).김용순(학교법인심석학원설립).김광호(전전북종친회회장.국민훈장모란장수상).김황식(국무총리).김숙희(최연소박사.제34대교육부장관).김용옥(호는도올,고려대철학과교수,김숙희 동생).김하중(통일부장관).김장수(국방장관.국회의원).김종철(대종회고문.건국포장전수).김용대(대종회고문.광산회회장.(주)양진텔레컴회장.SBC인터넷시사방송개설).김성규(대종회고문 2010년7월 자랑스런중소기업인선정).김천두(호는소천.서예가.도자기그림).김덕수(김덕수사물놀이패).김선원(서예가.KBS진품명품감정위원.대동서학회원장).김용균(영화감독).김성환(한국방송연기자협회이사장).김병조(코미디언).김영상(치과의사개그맨).김익중(한성실업대표이사).김택수(탁구국가대표).배우김아중.김용건.개그우먼김현숙.프로골퍼김나리 등등
광산김씨(光山金氏)
대제학(大提學;정2품문형)7명 최다 배출,조선 예학의 종조 사계 김장생
구운몽.사씨남정기의 저자 서포 김만중
조선조 4대서가(書家) 김 구(金絿,기묘명현)의 인수체(仁壽體)라는 필체 생겨
인재(人材)의 산실 광산김씨(光山金氏)는 신라 신무왕의 셋째 아들인 김흥광(金興光)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문헌에 따르면 김흥광(金興光)은 향후 국내의 정세가 혼란스러울 것을 알고, 광서동(光西洞:현재의 광주광역시 서일동)과 담양에 정착해 살았다.
시조가 신라왕자라고 정립하는데 결정적인 문헌은 1307년(대덕 大德 11년,고려 충렬왕 33년 정미丁未)6월에 지은 제안황대전고(提按黃臺典誥,임금의 명령을 일반에게 알릴목적으로 적은 문서를 담당한 관직) 벼슬을 지낸 김이(金珥)의 찬(撰:지음)이라 전하는 광산현제영시서(光山縣題詠詩序)이다.
이 광산현 제영시서는 광산김문의 최고(最古) 문헌인데, 그 내용에 "차현내신라시..왕자김흥광예지장유난리출작서인래우차지복서일동이거(此縣乃新羅時 ........ 王子金興光預知將有亂離出作庶人來于此地卜西一洞而居.........) 즉,이 고을은 신라 때 왕자 김흥광이 장차 난리가 있을 것을 미리 알고 왕궁을 버리고 서인이 되어 이 땅 서일동에 와서 사셨고.........."로 되어있다. 후손 통정대부(通政大夫:정3품당상관 품계) 김현뢰(金賢賚)가 쓴 평장동유허서(平章洞遺墟序,양간공파보)에도 "명호평장동즉아선조신라왕자공복거지지(鳴呼平章洞卽我先祖新羅王子公卜居之地..........) 즉, 아 ~평장동은 우리 선조 신라왕자공께서 터를 잡아 사시던 곳으로 ......"로 되어 있고, 통정대부 김진상(金鎭商)이 쓴 왕자공 휘(諱) 흥광 유허비 음기(陰記)에는 "광주치지..평장동..아시조신라왕자김공지유허야(光州治之......平章洞......我始祖新羅王子金公之遺墟也....)즉 광주고을...평장동은..우리 시조 신라왕자 김공의 유허다..."로 되어있다.
후손들은 본관을 광주의 옛 이름인 광산(光山)으로 하게되었으며, 김흥광의 아들 김식(金軾)이후 대대로 고려때 평장사(平章事:중서문하성의 정2품 부총리,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은 고려 문종때 서무를 총할하고 간쟁(諫諍)을 맡아보던 관아로 내사문하성을 고친 관청)가 연이어 8명이 배출되자, 세상사람들이 그 곳을 평장동(平章洞) 이라고 했다.
그 후손을 크게 문정공(文正公) 김태현(金台鉉), 문숙공(文肅公) 김주정(金周鼎), 양간공(良簡公) 김연(金璉)으로 나누고 있다. 한편, 광산김씨 정유대동보(丁酉大同譜)에는 시조(始祖) 김흥광(金興光)은 신라 45대 신무왕(神武王) 셋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신라 49대 헌강왕(憲康王)의 셋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광산김씨(光山金氏)는 시조의 10세손인 김 체의 아들대에서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 진다.
김 체의 아들 김위(金位)와 김주영(金珠永) 형제대(代)에서 두갈래로 나뉘어져, 김광세(金光世)와 김광존(金光存)의 양대 산맥으로 이어진다.
김광세는 중랑장(中郞將:고려때 정5품)을 지내고 상서좌복야(上書左僕射:상서도성(尙書都省:백관을 통솔하던 어사도성의 바뀐 명칭)의 정2품 부총리)에 추증(追贈:공이 많은 벼슬아치가 죽은 뒤에 나라에서 그의 관위를 높여 주던 일)되었으며 그의 아들 김경량이 대장군(大將軍:종3품)에 올랐고 손자 김 수(金須)는'삼별초의 난'때순절(殉節:나라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림)하였다.
김수의 손자 김광재(金光載)는 공민왕때 난정이 시작되자 두문불출하였으며 어머니가 죽자 무덤가에 여막(廬幕:궤연 옆이나,무덤옆에 지어 상제가 거처하는 초막)을 짓고 거상(居喪)하였으며 임금이 그의 효성을 가상히 여겨 그가 사는곳에 영창방효자리(靈昌坊孝子里)라는 정표(旌表:어진 행실을 칭송하고 세상에 드러내어 널리 알림)를 세우게 했다.
공조판서(工曹判書:정2품 장관)를 지낸 김예몽의 아들 김성원은 세조때 동국여지승람(東國與之勝覽:성종 때 왕명으로 김성원,노사신 등이 각 도의 지리.풍속 등을 적은 책.55권 25책)을 편찬했고 손자 김 구(金絿)는 중종때 조광조의 혁신정치에 동조 김정,김식,한충과 더불어 기묘명현(己卯名賢:조광조,김정 등의 사람파들이 지치주의의 실현을 위해 혁신정치 시도하다 훈구파의 공격으로 사사된 사림들)으로 일컬어졌다.
그는 뛰어난 필법과 명문장으로 외교문서를 작성했으며 그가 살던 인수방(仁壽坊)의 마을 이름을 붙여 인수체(仁壽體)라는 필체가 생겼다.
당적보(黨籍譜)에 의하면 김 구는 중국 사람들이 자신의 글씨를 소중히 한다는 말을 듣고는 글씨를 쓰지 않아 세상에 남은것이 많지 않다고 한다.
중종 때의 우의정(右議政:정1품 정승) 김극성은 30여년간 벼슬에 있으면서 뛰어난 경륜으로 명성을 떨쳤다.
김광존의 후손을 보면 그의 현손(玄孫:고손자) 김진이 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문형)에 올라 유명했으며 김 진의 증손이자, 시조의 18대손 김정(金鼎)의 세아들 김약채(金若采)등 부터 광산김씨(光山金氏)의 화려한 명맥이 이어졌다.김정(金鼎)은 추성보리공신(推誠輔理功臣)에 책록되고 중대광(重大匡:고려때 문산계로 1308년(충렬왕 34) 종1품으로 제정되었다. 뒤에 벽상삼한(壁上三韓)의 칭호를 위에 덧붙였음)으로, 대호군(大護軍:종3품대장군)에 이르러, 광성군(光城君)에 봉군되었다.김정의 세아들로 관찰사(觀察使:종2품 감사.도지사)를 지낸 김약채(金若采), 척약재(惕若齋) 김약항(金若恒),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김약시(金若時) 모두 과거에 올라 크게 현달하였다.
고려 말에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한 김약채는 대사헌(大司憲: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 잡던 사헌부의 종2품 검찰총장)을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충청관찰사(忠淸觀察使:종2품 감사)를 지냈으며,그가 충청도관찰사를 지내면서 연산(連山)에 자리잡아,세칭 광김(光金)을 중심으로 한 기호유학(畿湖儒學)의 본거지가 되었다.
<광산김씨 논산시 연산면 입향조 김약채 재실> | ||
아버지는 광성군(光城君) 김정(金鼎)이고 어머니는 전법판서(典法判書) 이방(李昉)의 딸로서 연안이씨(延安李氏)이다. 광산김씨의 연산 입향사적은 불분명하나 입향조는 김약채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실전된 김약채의 묘가 경기도 양주 풍양에 있었고 아들 김문(金問)의 묘는 장단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관직 생활 때문에 개성에 근거지가 있었다고 한다. 김문의 부인 양천허씨(陽川許氏)가 청상과부로 수절하면서 자손을 잘 키웠고, 그녀의 묘소가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있으며, 후손의 묘도 연산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어, 진정한 입향조는 양천허씨로서, 본격적인 세거는 양천허씨의 손자 김국광(金國光) 대부터라고 한다. |
동생 김약항(金若恒,호는 척약재 惕若齋) 은 공민왕때 대사성(大司成:성균관의 정3품)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표문(表文:임금에게 표로 올리던 글)이 공손치 못하다며,황제의 노여움으로 양자강변에 유배되어 돌아오지못했다고 한다.후에 김약항의 여종이 중국 남경에 가서 유골을 찾아왔다고 한다.
김약채(金若采)의 증손 김국광(金國光)은 적개공신(敵愾功臣;세조 때 함경도에서 일어난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이 컸던 44명에게 3등으로 녹훈(錄勳)하고 공신에 책록, 전지(田地)를 하사함)과 좌리공신(佐理功臣; 성종 2년(1471년) 김국광.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 등 73인에게 임금을 잘 보좌하고 정치를 잘하였다는 공로로 내린 훈명勳名) 두 개의 공훈(功勳)에 책록(策祿)되고, 성종때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문산계(文散階) 정1품 상(上)의 품계명으로 종친.의빈.문무신에게 주던 조선시대 최고 품계)로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정1품정승)에 올라,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으로 책봉(策封)되었다.
일찌기 황희(黃喜)가 손녀사위로 맞아들여, 손녀사위임에도 황희가 그를 대할때는 반드시 갓을 썻다고 한다.
세조 때 경국대전(經國大典:조선경영의 헌법전)의 편찬에 참여한 김국광은 뛰어난 업적을 남겨, 세조가 김국광같은 사람은 "문.무를 겸비한 재사"라며, '사지제일(事知第一)'이라는 친필을 하사했다고 하며, 세조가 편전에 있으면서 자기의 음식을 떠먹여 주었다고 한다.
김국광의 아들 김극뉴는 대사간(大司諫:임금에게 간하는일을 맡아보던 사간원의 정3품)에 올랐으며, 김극복은 찬성(贊成:의정부의 종1품)을 지냈다.
김국광의 동생인 김겸광은 성종 때 '이시애의 난'을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좌리3등공신(佐理三等功臣)으로 광성군(光城君)에 봉해졌고,아들인 김극핍은 연산군 때 갑자사화(甲子士禍:1504년(연산군 10)에 일어난 사화,연산군이 어머니 윤씨의 폐위 사실을 알고,성종의 후궁들과 왕자 그리고 김굉필,윤필상 등 십여명의 신하를 죽인 사건)에 연루되어 전북의 고산현으로 유배되었으며 권신 김안로의 탄핵을 받아 그곳에서 일생을 보냈다.
김극뉴의 손자 김 개(金鎧)는 명종때 호조판서(戶曹判書:정2품 장관)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증손인 김계휘는 선조때 대사헌(大司憲;사헌부의 종2품 검찰총장)을 지냈으며, 김계휘의 동생 김은휘(金殷輝)는 송익필(宋翼弼)의 아버지인 송사련(宋祀連)의 잘못으로 세인의 증오를 받아 큰 어려움에 처하자, 10년동안 도움을 줘 선조의 잘못으로 누를 입은 현량(賢良:어진사람과 착한 사람)을 구원하였다.
광산김씨(光山金氏)가 자랑하는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1548~1631,시호 문원)은 조선 예학의 종조(宗祖)다.
그는 1548년(명종3년) 대사헌(大司憲:백관을 규찰하던 종2품 검찰총장 )을 지낸 김계휘의 아들로 태어나 당대의 '8문장가'로 유명한 거유(巨儒) 송익필(宋益弼:여산송씨)에게 예학(禮學)을 배우고,이율곡에게서 성리학을 전수받아 예론(禮論)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아들 김집(金集,호는 신독재)에게 전승시켜 조선예학(禮學)의 거두로 예학파의 주류를 형성했다.
사계 김장생(1548~1631) 고택(古宅)-충남 계룡시 두마면 두계리 96번지 |
그의 후손에서 7명의 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문형)이 배출되어, 이때부터 광산김씨(光山金氏)는 전성기를누리게 된다. 사계(沙溪) 김장생은 벼슬이 가의대부(嘉義大夫:종2품 문.무관의 품계)로 형조참판(刑曹參判:종2품 법무차관)을 지냈으며, 83세에 논산시 연산에서 생을 마감하며 후손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영정(影幀)은 머리칼 하나가 틀려도 제모습이 아니니 쓰지말 것",내 후손이 수십대에 이르더라도 의(誼:옳음)를 두터이 지낼 것"이었다.
그가 남긴 가례집람(家禮集覽) 3권,경서변의(經書辯疑)8권 등 총21권의 저서는 한국의 예전(禮典)으로 평가된다. 김장생의 예학은 아들인 김 집(金集,신독재)에게 이어지고 우암 송시열,송준길,윤증에게 전승되어 조선 예학파의 주류를 형성했다. 사계(沙溪)는 1688년(숙종14) 문묘(文廟:공자를 모신 사당.성묘)에 배향되었고 안성의 도기서원(道基書院)과 연산의 돈암서원(豚岩書院)등 10개의 서원에 제향(祭享)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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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암서원(遯巖書院)은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에 있는 조선중기에 건립된 서원이다. 1634년 문원공(文元公)김장생(金長生,사계)를 모시기 위해 지어졌고, 1660년 사액을 받았다. 돈암서원은 김장생의 문인들이 스승을 추모하여 사우를 건립한 뒤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 오다 사당 앞에 강당을 건립하면서 서원의 단초를 이루었다. 또한 돈암서원은 1659년(효종 10)에 이어 1660년 (현종 1), 두 번 사액을 받았다. 돈암서원은 호서 지역 전체 뿐만 아니라, 호남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 때에도 보존된 충청 지역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
사계(沙溪)의 학문을 계승한 아들 김 집(金集)은 18세에 진사(進士;소과와 진사과에 급제한 사람)가 되고 참봉(參奉:종9품)을 지냈으며, 광해군의 문란한 정치때문에 한때 은퇴하였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후 부여현감(扶餘縣監:종6품수령)으로 등용되었다.
이후 지평(持平: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정5품),집의(執義:사헌부 종3품)를 거쳐 공조참의(工曹參議:6조인 공조의 정3품 당상관 차관보)에 올랐다. 그러나 공서(功西:서인(西人)에서 갈라진 당파)가 집권하자 다시 퇴직했다가 뒤에 좌찬성(左贊成:의정부의 종1품)을 거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왕명을 출납하던 중추부의 1품 재상반열)를 역임했다.
신독재 김 집(金集)은 아버지의 학문을 이어 받아 이를 더욱 깊이 연구하여 예학(禮學)의 체계를 세웠으며 문묘와 효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어, 역사를 통틀어 으뜸가는 도학자(道學子) 18인이 오른 국학 성균관(成均館)의 문묘(文廟)에 특히 부자(父子,사계와 신독재)가 배향(配享)되는 영예를 누렸다.
신독재 김 집은 충신효제(忠信孝悌)를 근본으로 삼았는데, 1646년(인조24) 산적 류탁등이 난을 일으켰을때의 기록이 전한다.
산적 류탁이 자신의 무리들에게 말하기를 "김승지(金丞旨;김집)의 집을 지나가서는 안된다"고 하였다.나중에 왕이 이 말을 듣고는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흉악한 무리들도 어진사람을 두려워하고 피할 줄을 안다"고 하였다고 한다.
김장생(金長生:호 사계)의 아들 김반(金般)은 김집(金集)의 동생으로,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으나,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사색당파의 하나인 대북파가 일으킨 옥사)가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10년동안 벼슬길에 나가지 않다가, 1624년(인조2) 정시문과(庭試文科:나라에 경사가 있을때 대궐안에서 보던 문과)에 급제하고,전적(典籍:성균관의 정6품)을 거쳐 형조좌랑(刑曹佐郞:정6품 법무차관) 등의 관직을 지냈다.이후 대사간(大司諫:왕에게 간하던 일을 맡아본 사간원의 정3품)을 역임한 후,이조참판(吏曹參判:종2품 차관)에 올랐다.
김반.김익겸 묘(대전시 유성구 전민동 산 18-17.문화재 자료 제7호) |
허주공 김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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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반(金槃.1580~1640) 김반은 김장생의 아들이며, 김계휘의 손자이다. 사람됨이 충직하고 인정이 두터우며, 가훈을 잘 지켰으며 요직을 역임하였다. 사람들이 말이나 행동을 조심스레 한다고 칭하였다.<조선왕조실록 인조 18년4월5일>, 김익겸(金益兼, 1614~1636.시호 충정,김장생의 손자)1636년 청나라의 경축행사(후금의 국호를 청으로 고친 것을 축하)에 참가한 사신과 청나라 사신 용골대의 주살을 주장하였다. 병자호란 때 강화에서 성을 지키다가 함락되기 전에 김상용을 따라 남문에 올라가 분신 자결하였다. |
그의 아들 여섯명 중 둘째 김익희(金益熙)는 인조때 대사성(大司成:성균관의 정3품)을 지내고 효종때 형조 및 이조판서(判書:정2품 장관)를 역임했으며, 셋째 김익겸은 병자호란때 어머니 서씨(徐氏)와 함께 강화에 들어가 성(城)을 사수하다가 함락되기 직전에 김상용과 함께 성(城)의 남문에 올라가 자폭하였으며,영의정(領議政:정1품 정승)에 추증되고,광원부원군(光源府院君)에 추봉되어, 강화(江華)의 충렬사(忠烈司)에 제향되었다.
넷째아들 김익훈(益勳)은 형조참판(刑曹參判:종2품 법무차관)을 역임하고,광남군(光南君)에 봉해졌으며,막내 김익경(金益炅)은 어려서 송시열(宋時烈) 의 문하에서 글을 읽었으며,1662년 (현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나라에 경사가 있을때 기념으로 보던 과거)에 급제하고,집의(執義: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종3품)를 거쳐,형조참의(參議:정3품 차관보),동부승지(同副承旨:정3품 당상관)를 역임한후 호조참의(戶曹參議:정3품 차관보)를 지냈다.
김익경은 1674년(현종15) 예조참판(禮曹參判:종2품 차관)때 죽은 인선왕후(仁宣王后)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에 송시열 등과 함께 대공설(大功說:상복을 9개월 입어야 됨을 주장)을 주장했으나, 허목(許穆)등의 기년설(朞年說:만1년)이 채택되자, 양성(陽城)에 유배되었다.
김 반의 아들로 김익겸의 동생인 김익훈은 숙종때 '경신대출척'의 주역으로 '기사환국'때 남인(南人)이 정권을 잡자 강계로 유배되었다. 한편 경신대출척은 경신환국(庚申換局)이라고도 하는데,1680년(숙종6) 남인(南人)이 대거 실각하여 정권에서 물러나고 서인(西人)이 득세한 것을 말한다.남인끼리 청남(淸南),탁남(濁南)으로 갈라져 싸우고 이들에 대한 염증이 있었던 숙종의 작용도 있었다.
기사환국(己巳換局)은 남인(南人)이 1689년 숙종의 환심을 사서 서인(西人)을 몰아내고 재집권하면서,숙종의 정비인 민비가 폐출되었으며, 장희빈은 정비(正妃,왕의 정실인 왕비를 후궁에 대하여 일컫는 말)가 되고, 우암 송시열은 정읍에서 사사된다.
인경왕후(숙종의 비)의 아버지인 김만기와 효자 김만중은 김익겸의 아들로, 형제가 같이 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문형)에 올라 광산김씨 가문의 명성을 크게 떨쳤다. 한편,복상문제는 현종 때 궁중의례의 적용에 대한 문제였다.복상(服喪)기간을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크게 논란이 벌어진 두차례의 사건을 말한다.
유명한 조선의 소설가 김만중(萬重)은 김익겸(金益兼)의 유복자(遺腹子)로 1665년(현종 6) 정시문과(庭試文科:나라에 경사가 있을때 대궐안에서 보던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정언(正言:사간원의 정6품).지평(持平:사헌부의 정5품).수찬(修撰:서책을 편집 찬술하던 홍문관의 정6품).교리(校理:홍문관,승문원의 정5품)를 거쳐,1671년(현종12)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경기와 삼남(三南:충청 남북도,전라 남북도,경상 남북도의 세지방)의 정사(政事)를 조사하였고, 서기 1679년(숙종5) 예조참의(參議:정3품 차관보)를 지내고, 1685년(숙종11)에 홍문관 대제학(弘文館 大提學:왕의 자문에 응하고 경서와 사적의 관리를 맡아보던 관아의 정2품 문형)에 올라 이름을 떨쳤다.
주위의 탄핵으로 귀양갈 때 외에는 효성이 지극한 그는 노모 곁을 떠난 일이 없었고, 어머니를 위로 하기 위해 전문을 한글로 쓴 구운몽(九雲夢)을 집필하여 소설 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특히 서포 김만중은 유복자로 태어남을 평생의 한으로 갖고 있었으며, 홀어머니 윤씨의 곁을 한번도 떠난적이 없다 하며어머니를 즐겁게 하기위해 동물흉내,어린이 흉내도 냈다고 기록에 전한다.
그가 남해의 유배지에서 지었다는 한글소설 "구운몽"은 부귀공명이 일장춘몽이라는 내용으로, 그의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편집자 주-(구운몽은 이전에는 남해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쓴 것으로 알려졌으나, 근래에 발견된 서포연보(西浦年譜)에 따르면 선천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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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남정기(南征記)라고도 한다. 숙종이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위시키고, 희빈장씨를 왕비로 맞아들이는 데 반대하다가 남해도(南海島)로 유배, 배소에서도 흐려진 임금의 마음을 참회시키고자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김만중(金萬重:1637~1692,호는 서포(西浦), 시호는 문효 文孝)은 1665년(현종 6) 정시문과(庭試文科:대궐에서보던 과거)에 장원, 정언(正言:왕에게 간하던 사간원의 정6품).수찬(修撰)·교리(校理)를 거쳐, 1671년(현종 12)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경기·삼남(三南)의 진정(賑政)을 조사하였다. 이듬해 겸 문학(兼文學).헌납(獻納)을 역임하고 동부승지(同副承旨:정3품당상관)가 되었으나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작고하여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서인(西人)이 패하자,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후 다시 등용되어 대사헌(大司憲:백관을 규찰하던 종2품 검찰총장)이 되었으나 조지겸(趙持謙) 등의 탄핵으로 전직되었다. 1685년 홍문관대제학(大提學:정2품문형),지경연사(知經筵事)때 김수항(金壽恒)이 아들 김창협(金昌協)의 비위(非違)까지 도맡아 처벌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상소했다가, 선천(宣川)에 유배되었으나 1688년 방환(放還)되었다. 이듬해 박진규(朴鎭圭).이윤수(李允修) 등의 탄핵으로 다시 남해(南海)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구운몽>은 종전까지는 남해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쓴 것으로 알려졌으나, 근래에 발견된 서포연보(西浦年譜)에 따르면 선천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 작품은 김만중이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쓴 것으로 전문을 한글로 집필하여 숙종 때 소설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한편, 한글로 쓴 문학이라야 진정한 국문학이라는 국문학관을 피력하였다. 1698년(숙종 24) 관직이 복구되고 1706년(숙종 32) 효행에 대해 정표(旌表)가 내려졌다. 저서에 <구운몽>.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서포만필(西浦漫筆).서포집(西浦集)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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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6년(숙종 32) 그의 효행에 대하여 나라에서 정표(旌表:선행을 세상에 드러내어 알림)가 내려졌다. 이외에도 조선 초기 한호(韓濩:석봉),양사언(楊士彦),안평대군(安平大君)과 함께 4대 서가(書家)로 유명한 김 구(金絿)는 현감(縣監;종6품 벼슬)을 역임한 김계문(金季文)의 아들로 당대에 이름난 학자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1511년(중종 6) 별시문과(別試文科: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병년(丙年)마다 보던 과거)에 급제하고 홍문관 정자(弘文館 正字:정9품)를 거쳐,부제학(副提學:홍문관의 정3품)에 이르렀으며,기묘사화(己卯士禍:1519년(중종14)에 남곤.심정 등의 수구파가 조광조.김정 등의 신진 도학자들을 죽이거나 귀양보낸 사건)로 개령(開寧)에 유배되었다가 1533년(중종 28)에 풀려나 고향에서 죽었다.
그가 생전에 한양 인수방(仁壽坊)에 살았으므로 그의 서체를 인수체(仁壽體)라 하는데,어느날 옥당(玉堂:홍문관)에서 숙직을 하며 촛불을 밝히고 글을 읽고 있는데,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보니 중종(中宗)임금이 별감에게 술병을 들려 문앞에 서있자 놀라 엎드리자 중종이 말하기를 '달이 밝은데 글 읽는 소리가 들리기에 내 여길 왔으니, 어찌 군신의 예(禮)가 필요있으리오,친구로서 서로 대함이 마땅 하도다'하고 술을 함께 즐겼다고 한다.
그 외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만수(金萬壽)는 김천수(金千壽),김백수(金百壽),김구수(金九壽)의 세아우와 함께 용맹을 떨쳤다.
현달(顯達:벼슬이나 덕망이 높아서 이름을 세상에 들날림.입신출세)한 인물을 배출해온 광산김씨(光山金氏)의 그밖의 인물로는 임진왜란때의 명장 김덕령이 있다. 그는 뛰어난 용맹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이 귀(李貴)가 그를 천거하는 글에 "지혜는 공명과 같고 용맹은 관우보다 낫다"고 하였다.
그가 전투에 나설 때는 항상 철퇴 두개를 허리에 차고 다녔는데 그 무게가 백근이나 되어 신장(神將)이라 불렸으며 왜장 기요마사도 참으로 휼륭한 장군이다 라며, 그를 두려워 하였고 김덕령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제 양호(兩湖)는 걱정이 없다"고 하였다.
김덕령(金德齡)은 김붕섭의 아들로 1567년(명종 22) 광주 석지촌에서 태어나 당시 성리학(性理學)의 대가(大家)인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성현감(縣監:종6품 외관직)이던 이 귀의 천거로 호익장군(虎翼將軍)의 호(號)를 받고 1594년 (선조27) 의병을 모집하여 선전관(宣傳官:선전관청의 3품에서 9품)으로 권 율(權慄)의 휘하에서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아 공을 세웠으며 고성(固城)에 상륙하는 왜군을 격퇴하여 왜군이 가장 무서워하는 의병장의 한사람이 되었다.
그후 '이몽학(李夢鶴)의 난'(부여 홍산을 중심으로 일어남)을 토벌하다가 내통했다는 신경행(辛景行)의 무고(誣告:없는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 남을 모함,고소,고발하는것)로 국문(鞠問:중죄인을 국청에서 심문하던 것)을 받다가 억울하게 옥사하였다.
그는 1661년(현종 2)에 관작이 복구되었으며 뒤에 병조참의(兵曹參議:정3품 국방차관보)에 추증되었으며 1788년(정조12)에는 좌찬성(左贊成:의정부 종1품)에 가증되었다.
영조때 알성문과(謁聖文科:왕이 성균관에 알성한뒤에 보던 문과)에 급제한 김양택은 부제학(副提學:홍문관의 정3품)과 대사성(大司成:성균관의 정3품)을 지내고 우의정(右議政:의정부 정1품 정승)을 거쳐 1776년(영조52년)영의정(領議政:의정부 정1품 정승)에 올랐으며, 김상복은 영의정을 역임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왕명을 출납하고 궁중을 숙위하던 일을 맡아보던 중추부의 정1품)에 전임되었다.
고종때 대제학(大提學:홍문관의 정2품 문형)을 지낸 김영수(永壽)와 판서(判書:6조의 정2품 장관)를 역임한 김영덕(金永德) 그리고 독립운동가 김영숙(金永肅)등은 '광김(光金)'의 가통을 지킨 인물들이다.
특히 김영덕은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이를 통탄하여 자결했으며 일본(日本)이 주는 은사금을 거절하고 왜적의 위협과 유혹을 물리치며 지조를 지키다가 자결한 김지수(金志洙)등 수 많은 인물들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 광산 김씨를 빛나게 하였다.
이외에도 무수한 인재를 배출한 광산김씨는 특히 조선시대에 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문형)7명을 배출시킨 최대 명벌(名閥:문벌이 좋은 집안,명가)이다.
광산김씨(光山金氏)는 조선시대에 대제학 7명,정승5명,청백리 4명,왕비 1명과 문과(文科:대과)에 269(265)명,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7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275명,역과(譯科:중국어.몽고어.일본어.여진어에 능통한 사람을 역관으로 뽑아 쓰기 위하여 보이던 과거)에 15명,의과에 4명,음양과(陰陽科:천문.지리.명과학(命課學)에 밝은 사람을 뽑던 과거)에 1명,율과(律科:형률에 능통한 사람을 등용하던 잡과의 한 가지)에 1명,주학에19명 등 584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인구조사에 의하면 광산김씨(光山金氏)는
1985년에는 174,912가구에 750,702명,2000년에는 258,936가구에 837,008명이었다.
광산(光山)은 현재의 광주광역시에 위치한 지명으로, 757년(경덕왕 16) 무주(武州)로 고쳤다.진성여왕 때는 견훤(甄萱)이 이곳에 후백제를 세워 도읍을 정하기도 하였으며, 940년(고려 태조 23)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하고 군현을 정비하면서 무진주를 광주(光州)로 개편하고 도독부를 두었다.
995년(성종14)해양도(海陽道)소속이었다가 1259년(고종46) 기주(冀州:일명 기양주)라 고쳤으며, 1895년(고종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나주부(羅州府) 관할의 광주군(光州郡)이 되었다가 1935년 광주읍(光州邑)이 부(府)로 승격됨에 따라 광산군(光山郡)이 되었다.1995년 광주광역시 광산구로 개편되었다.
<파별 문과급제자 표>
<문정공파>-의랑공파(1명).문민공파(6명).문간공파(5명).녹사공파(2),<문숙공파>-화평부원군파(3).삼사좌사공파(10).상호군공파(1).예조판서공파(6).밀직사사공파(3).판도판서공파(4).<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8).의정공파(허주공파 (91).공안공파(19).판교공파(2).총제공파(5).퇴촌공파(5).척약재공파(7).직제학공파(29).사온승공파(1).밀직부사공파(10).<낭장공파>-6명,<사온직장공파>-25명, <별파>-감찰어사공파(3).비순위낭장공파(4).현령공파(3명) 기타 10명 총합계 269명(265명)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