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구성, 그리고 빛의 하나님
제 1장, 기록 #1 하톤
1996년 3월 11일 월요일, 7:51 A.M. 9년 208일
1996년 3월 11일 월요일
빛 vs. 환영[LIGHT vs. ILLUSION]
만약 당신이 저널의 주제로 이와 같은 제목을 선택했다면, 이어지는 내용들도 어쩌면 일상적인 것을 완전히 뛰어넘는 내용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이야기하지만, ‘저널’이란 밝혀진 활동들의 기록들입니다. 반면 ‘책’은 대개 소설이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밝히는 내용들로 구성됩니다. 우리는 “저널들”을 쓰고 있습니다. 따라서 만약 당신들 독자들이 보기에 우리가 끔찍한 수준으로 ‘연속성이 없는 이야기들’로 저널의 내용을 채워서 일탈을 일삼는 것처럼 보인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반복하지만, 우리는 저널들을 쓰고 있습니다. 어떻든 간에 우리는 ‘인간들의 환영[ILLUSION OF MAN]’ 너머로 흐르는 ‘영원한 빛[ETERNAL LIGHT]’이라는 주제에 매달리려고 노력할 것이지만, 당신들의 인내심을 테스트하여 짜증나게 하지는 않는 범위 안에서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결코 한 권의 저널을 다 쓴 후가 아니면 그 저널의 제목을 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쓰는 “서문들”은 좀처럼 본문의 내용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는 않으며, 대개 다른 한 편의 글이 되곤 합니다. 또한 이 서문들은 보통의 경우에는 저널을 마무리한 후에 씁니다.
물리적인 밀도 속에 “현실처럼 보이는” 것의 진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실제로 온 사방으로 흩어지게 될 나비들이 들어 있는 병 마개를 여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당신이 당신을 꼬집는다고 해 봅시다. 아주 세게 꼬집으면 당신은 아픔을 느끼고 상처가 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당신은 당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근육과 지방과 뼈로 구성된 당신의 육체가 당신은 아닙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이미지입니다. ; 당신은 당신이 육체라고 부르는 ‘집’ 속에 들어 있는 영혼입니다. 육체를 작동시키고 삶을 살아 나가는데 있어서 곧바로 사용될 수 있는 정보들이 컴퓨터와 같은 당신의 두뇌 속에 저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것의 “일시적인” 상태는 지나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가 생각해 봐야만 할 ‘진짜의 것[the REAL THING]’은 죽지 않는 것으로, 즉 보이지 않는 영혼[THE SOUL INVISIBLE]이 되는 것입니다. 이 보이지 않는 영혼이야말로 무한하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인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당신이 겪는 경험의 질에 따라, 물리적인 형태 속에 현현되는 경험들, 바로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지나가는 경험들’을 겪어 나갈 뿐입니다. 요컨대 무대와 연극은 환상인 반면, 영혼은 무한 속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당신이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당신이 행하려는 것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제외하고, 영혼이 겪는 잠깐의 여행 동안, 당신이라는 자아의 조각이 나아가는 행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무한의 경험을 통한 영원한 체류 속에서, 당신의 “의도”를 통해 “실제”를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환영[Illusion]”과 “변형[Aberration]”의 뜻을 정의하려고 하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이 표현들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한 상태에서 참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들의 언어들, 그리고 속임수를 통한 그 의미의 “변화들”은 당신들에게 잘못된 인상을 남기곤 합니다. 우선 나는 예를 들어 “홀로코스트[holocaust]”라는 표현에서 당신들이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당신들은, 이 시대에 그리고 이 세대에 항상, 홀로코스트가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서 유태인들에게 가해진 어떤 것이라고 여깁니다.(‘1조달러짜리 거짓말, 홀로코스트’ 참조--역주) 그렇지만, 흥미로운 점은 젊은 세대는 그러한 일이 2차 세계 대전 중에 있었다는 것 자체를 모르고 있기도 하고, 심지어 독일이 어디 있는 지도 모르는 데다, ‘쉰들러 리스트’와 같은 종류의 이야기 이외의 다른 일들은 왜 벌어지지 않았던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아해 합니다.
홀로코스트의 정의는 실제로는 다음과 다른 것입니다. :
“홀로코스트[HOLOCAUST]: 1. 대량 파괴와 인명의 손실, 특히 화재에 의한 것. 2. 불에 의해 완전히 소멸된 희생 공물.” (사전적 정의)
당신들의 정부가 텍사스 와코[WACO, TEXAS]에서 다윗파 신도들을 상대로 저지른 일이 분명코 그 대표적 사례일 것입니다.(‘우주 문명과 인간 의식’ 참조--역주) 그렇지만, 어쩌면 독일에서 벌어진 일도 여기 나오는 정의와 부합되는 것은 아닐까요? 아닙니다. 이 정의와 아주 잘 부합되는 사례는 (당신들) “연합군”이 독일 드레스덴[Dresden]의 주거지를 대상으로 폭탄 세례를 퍼부은 일이지, 결코 강제 수용소에서 벌어졌던 일은 아닌 것입니다. 죽음은 분명코 다가왔지만, “홀로코스트”를 통한 죽음은 아니었습니다. 요컨대 당신들은 ‘사실[fact]’로부터 ‘환영[illusion]’을 분간해 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또한 당신은 “빛[light]”을 “본다[see]”는 ‘환영[illusion]’을 갖고 있습니다. 틀렸습니다. 당신은 오직 물체로부터 반사된(튕겨져 나온) 빛의 존재를 시각화시킬 수 있을 뿐입니다. 말하자면, 당신은 물체를 보는 것이지, 빛을 보는 게 아닌 것입니다.
자, 그럼 다음 두 가지 정의는 어떨 것 같습니까? :
환영[ILLUSION]
환영[ILLUSION] : 1. 가짜 인상을 만들어 내어 속이는 것. 2. 속임을 당하는 상태나 조건; 잘못된 이해. 3. 속임을 당하는 경우. 4. [심리학] 현실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나타내는 인식 상태. 5. 거미집과 같은 모양을 가졌으며 장식용이나 베일처럼 가리는 용도로 쓰이는 아주 얇고 부드러운 비단 또는 나일론으로 된 천. 6. [관찰] 속이는 행위: 속임수; 현혹; 모방.
이제, 다음에 주의하십시오.
동의어. 1. 변형[aberration], 환상[fantasy], 가공의 괴물[chimera], 기타 등등.
“환영[illusion]”은 거짓의 정신적 이미지 또는 이해 상태로 실제 현상을 잘못 해석하거나 상상의 어떤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흥미롭고, 무해하며, 심지어 유용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제 나는 “변형[aberration]”을 정의할 것인데, 우리는 이 표현이 연금술에도 쓰이며, 다른 가정적 상황에도 쓰인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변형[ABERRATION]
(이미지의) 변형[ABERRATION] : 불완전한 시각적 요소(예를 들어, 렌즈, 프리즘, 거울, 스크린 등)에 의해 야기되는, 이미지의 형태, 색깔, 포커스, 밀도의 왜곡. 비대칭 수차(收差)[coma], 비점수차(非點收差)[astigmatism], 시야 만곡[field curvature], 왜곡[distortion], 그리고 색 수차[chromatic aberrations]와 구면 수차[spherical aberrations].
“천문학”에 있어서, 관찰자가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생겨나는, 천체 위치의 명백한 각 이동[angular displacement]은 관찰자의 움직이는 속도와 빛의 속도의 결합에 의해 야기됩니다. 당신은 “변형 상수 또는 행성 변형 상수”와 같은 표현을 직접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시차(視差)[parallax]도 한 번 확인해 보고 비교해 보십시오. 광학에 있어서 완벽한 이미지로부터 여러 가지 변형이 생기는데, 예를 들어, 구면 수차[spherical aberration], 비대칭 수차[coma], 비점수차[astigmatism], 시야 만곡[curvature of field], 왜곡[distortion] 등이 있습니다.
당신들은 문제에 접근해 나갈 때, 이런 모든 형태의 변형들을 반드시 다루어야만 합니다. 특히 소위 말하는, 원자 핵 주위를 도는 전자들이 보이는 현상의 왜곡 또는 실체를 파악함에 있어서, 또한 거짓된 상황에서 당신들의 ‘정신적인 바라 봄’을 통해 제시되는 인식의 왜곡 또는 실체를 파악함에 있어서도 이를 분명히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내가 의미하는 것과 당신들이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갖고서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갖는 두 가지 궁극의 환영들
인간이 “빛”에 관한 실체를 간파해내기 위해서는, 잘못 인식하고 있는 두 가지 궁극의 환영들을 제대로 이해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두 가지 중에서 더 큰 환영이 있다면, 그건 우주 그 자체에 관한 것입니다. 인간은 결코 현실 속에 존재하는 자신의 우주를 이해한 적이 없습니다. 인간은 오직 자신의 감각이 자신으로 하여금 믿게 만드는 것만을 인정할 수 있을 뿐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감각이 인간을 속이게 되는데, 거의 완벽하게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다른 한 가지 환영을 살펴 보자면, 이건 인간 자신에 관한 것입니다.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인간은 지금까지 결코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안 적이 없습니다. 우주와 자기 자신의 관계에 대해 안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서는 더더욱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과 우주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게 있다면, 그건 자신의 눈과 귀가 자신과 우주에 대해 보고 들은 대로 말해 준 몇 가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영혼도 눈과 귀를 가지고 있으며, 이 영혼의 눈과 귀는 감각의 눈과 귀가 결코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아직 이러한 역량의 전개에 있어서 너무나도 초기 단계인 것입니다.--하지만, 인간이 보다 큰 우주적 표현에 접어듦에 따라 이러한 시기는 거의 “끝나 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육체적 “감각들”
인간은 감각을 갖습니다. 인간은 움직임, 변화, 시퀀스, 복합성, 시간, 활동, 삶, 죽음, 그리고 선과 악을 느끼고 압니다. 인간은 이러한 것들을 아주 확실히 아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이를 “느끼고”, “맛보고”, “만질 수” 있으며, 기타 여러 가지 감각을 통해서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전 생애에 걸쳐, 그것이 길든 짧든 간에, 자신에게 익숙한 우주 속을 살아가는 현실에 직면하여, 이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두가 환영일 뿐이라는 진술을 받아들이기란 결코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한 환영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눈이 두뇌에게 건네는 분명한 인식에 따라 기차 레일이 지평선 끝 어딘가에서 만난다는 환영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차 레일은 겉보기에 “만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만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최소한 기차 레일은 환영을 제공하는 근거로는 계속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도시나 오아시스의 신기루가 일종의 환영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이것이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그러한 도시의 이미지를 담아 내는 대기의 빛 파동의 거울과 렌즈를 통해, 실제처럼 보이는 도시가 귀신처럼 반복해서 등장한다는 사실도 압니다. 그 인간에게 도시의 신기루뿐만 아니라 그러한 도시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은, 자신의 신뢰와 인내(주로 인내가 될 것입니다.) 위로 너무나 무거운 깨달음의 짐을 내려 놓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바로 비밀스러운 빛의 미스터리가 알려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예컨대 성직자들이나 과학자들에게 공히, 아주 단순하면서도 알아 들을 수 있게 알려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표준적인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납득이 가는 방식으로 설명해야 되는 것입니다.
독자들이여, 우리의 작업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우리는 각자 각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또 저마다의 인식의 영역 안에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작업’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자, 당신들은 하나님에 대해, 또 그 분의 우주[His universe]에 대해 그리고 ‘인간[Man]’에 대해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여기서 말하는 ‘인간’은 당신의 감각의 눈과는 ‘다른 눈’을 가진 인간을 의미합니다.
영혼의 눈은, 인식의 관념들이 “감각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시각화되는 것을 “아는 방식[KNOWING]”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앎이라는 현실을 잘 인지한 채로, 자신의 “하나의” 아이디어가 궁극적으로 꽤나 명백하게 표현되도록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출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깨달음과 사고 과정이 없는 한, “하나의 아이디어[one idea]”는, 무대 위에 올려져 있는 당신을 포함하여, 결코 많은 “하나의 아이디어들[one ideas]”로 발전될 수 없는 것입니다.
“움직임”이라는 인식은 그 다음에 오며, 이것은 경험을 절대적으로 강제하는 것입니다. ‘움직임’ 없이는 ‘그 분의 우주적 연극’은 펼쳐질 수 없으며, 연극의 등장 인물들도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변화’ 없이는 ‘그 분의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아이디어’가 전개될 수 없습니다. 당신들이 “시간”이라고 표현하는 것 없이는 사건들의 어떠한 “시퀀스”도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하나의 아이디어를 갖고 있으며, 그것은 펼쳐집니다. 당신을 포함하여 현현하는 형태들 속에서 표현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생각 투사[THOUGHT PROJECTION]입니다. 움직임, 시간, 변화, 시퀀스 없이는, 하나님의 마음을 통해 상상하는 것의 전개는 ‘셋팅된 무대’처럼 ‘잘 조정된 공간’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빛을 투사할 어떠한 스크린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겪는 경험 속 ‘인식들’은 ‘하나님의 상상들[God’s imaginings]’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렇지만, 그러한 ‘인식들’은 단지 ‘그 분의 앎[His knowing]’이 ‘그 분의 생각[His thinking]’을 통해 직접적으로 투사된 전개 패턴들[unfolding patterns]일 뿐이라는 사실을 아십시오. 이러한 앎 속에서, 육체를 가진 인간은 저마다 자신의 환경 속에서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감각’에 대한 참된 이해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 속에, 당신은 시간은 무[naught]이며, 변화를 일으키고 움직이는 그 어떠한 것들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그 분의 놀라운 우주 속에는, 삶도, 죽음도, 추위도, 더위도, 선도, 악도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당신은 하나님을 볼 수 없는가?
당신은 하나님을 실제로 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 분은 당신의 빛[YOUR LIGHT]의 반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바로 당신이 그 분의 빛[HIS LIGHT]의 반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분[HIM]’이라고 부르는 아버지 하나님은 태초부터 ‘영혼의 빛[LIGHT of SPIRIT]’으로, 어떠한 인간도 그 분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시는 곳은 천상의 왕국으로, 어떠한 형태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사실상 당신들이 공허[void]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당신들이 원한다면, ‘텅 빈 무대’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빛 속에 씨앗이 놓이게 됩니다. 나아가, ‘존재’는 이 빛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씨앗 속에 존재의 욕구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아이디어”를 압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하나”의 아이디어의 ‘단위’로서 알고 있으며, 이것은 나아가 다양한 측면들을 가진 ‘하나의 아이디어[ONE IDEA]’로 표현되며, 결국 에너지 표현 상의 이원성 속에 놓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러한 아이디어의 어디에 들어 맞는 것일까요? 삶의 궁극의 목적은 진실과 법칙 속에 하나님을 현현시키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 특별한 배움은 대단히 얻기 어려운 것인데, 왜냐하면 인간 자신이 법칙에 대한 무지로 인해 이를 어려운 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 자신 속에 내재해 계신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목적과 이 법칙에 대해 서서히 알아가게 되고, 이에 따라 삶은 점점 더 아름다운 것이 되며, 인간은 자신이 가진 역량의 현현 속에서 보다 강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진정한 힘은 “주는 것” 속에 있습니다. 인간은 자연이 그러하듯 “주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독자들이여, 모든 주기[cycle] 속에는 주는 부분과 받는 부분이 존재합니다.--반반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줌과 다시 줌[giving and regiving]’이라고도 불립니다. 자연은 영원히 많은 것들을 펼쳐 내지만, 단 하나를 다시 펼쳐 내기 위해서 매번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각각의 인간들도 이러한 법칙을 현현시킬 수 있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우주적 법칙으로, 한 번만 펼쳐지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영원히 타인의 삶을 자신의 삶을 위해 이용하려 합니다. 그렇지만, 이를 성취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다른 한편, 당신은 타인을 위해 살려고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더라도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타인을 위해 살려고 노력하는 동안에도, 당신은 여전히 당신 자신의 삶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대방은 더 적은 경험을 겪을지는 몰라도, 여전히 “자신의” 경험을 겪어 나가는 것입니다. 또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그 상대방은 스스로가 해야 할 일을 ‘빼앗기고’ 있는 셈이기도 합니다.
이와 동일한 원칙은 ‘전쟁 게임’을 하는 동안에도 반드시 고려되어야만 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 줄 때, 마찬가지의 것을 받게 됨을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기 전까지, 다른 인간들과 끝없이 전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내어 준 것에 대한 보상으로 “되돌려 받는 것”이 아닌 한, 결코 타인의 것을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우기 전까지, 마찬가지로 다른 인간들과 끝없이 전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는 단지, ‘주고 다시 주는’ 문제가 아니라, ‘빼앗고 더 빼앗는’ 무력 행위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균형은 문명을 파괴시키고 말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앎[KNOWING]의 성취를 이뤄 낼 수 있을까요? 당신은 우선 “힘의 원천[Power Source]”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하며, 또한 이로부터 생겨나는, 우리가 “빛[LIGHT]”이라고 부르는 것의 정의를 알아야만 합니다. 빛은 연극 무대를 시각화시키는 목적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빛은 연극 속의 비밀 행동들 위로도, 은밀하게 감춰지는 대화 위로도 비춰질 수 있습니다. 한편, 빛은 한 영혼[SOUL]을 구제할 수도 있는데, 누군가가 빛이란 자기 자신 안에 영원히 살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이러한 현실 위로 빛의 비춰짐을 허락하게 될 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앎[KNOWING]’의 순간이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요컨대, 진실 속에 얻게 되는 “지식[knowledge]”이 삶의 경험들 속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앎에 도달하지 못하는 한, 당신은 자아에 대한, 혹은 이 우주에 대한, 보다 높은 이해로 나아가는 데 알맞은 “방향”을 잡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재난의 순간을 맞아, TV가 어떻게 화면을 내보내는 지에 대한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두뇌로 이를 지각하고 위험을 모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하나님을 외경하고 인정하고 알지 못하는 한, 보다 높은 표현의 차원들로는 결코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나, 하톤은 놀라운 앎의 빛[LIGHT of KNOWING] 속에 왔으며, 이 빛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이디어 속에서 허락된 표현들인 한, 우리 모두 위로, 우리 모두를 통해, 그리고 우리 모두 속에 공유되는 빛인 것입니다. 아, 그렇다면, 우리가 단순히 그 분의 “아이디어”를 표현해 내기만 한다면, 이 빛은 더 놀라운 모습을 펼쳐 보이지 않겠습니까?
자, 그럼 나는 누구일 것 같으며, 내 이름 속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 것 같습니까? 아무것[Nothing]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의 “존재” 속에 들어 있는 것은, 동시에 ‘모든 것[ALL]’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빛 속에서 나 자신을 표현하고 있으며, 봉사 속에 그리고 내어 줌[giving] 속에 있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존재를 공유할 것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공유할 것이며, 또한 당신이 받게 될 것을 공유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도, 다른 누구도, 그 이상의 것을 할 수는 없습니다.
다음 오래된 진실 한 가지를 잘 기억하십시오. : “하나님이 빛입니까?” 하나님이 빛입니다![GOD IS LIGHT!] 그 반대말은 어둠[DARKNESS]입니다. 그런데, 내가 “흰색과 검은색”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의하십시오.--나는 “빛[light]”과 “어둠[darkness]”이라고 말했습니다. (진실과 거짓, 보는 것과 보지 않는 것, 앎과 무지, 등). 당신들은 “빛”을 단순히 “흰색”으로 인식할 수도 있는데, 왜냐하면, 그 이외의 표현들, 예컨대 “모든 색깔을 포함하고 있는, 투명한 어떤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 다른 표현을 당신들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둠이라는 단어도 묘사에 있어서 마찬가지의 문제점을 갖는데, 왜냐하면 이것 또한 단지 “검은 색”과 어울릴 뿐이며, “어떠한 색깔도 갖지 못하는 부재 상태”를 묘사하는 다른 표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방사와 방사의 결여[radiation vs. lack of radiation]’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빛입니다.
어떤 언어에서든 그러하고 사실 모든 언어에서 다 그러하지만, 하나님을 가리키는 묘사적인 표현으로는 “빛”이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에 현존하며, 모든 존재들과 함께 하는, 빛으로 인식됩니다. 우리가 더 나은, 혹은 더 높은 깨달음을 갖지 않는 한, 이러한 정의들은 우리의 목적에 잘 부합합니다.
빛이 없이는 모든 것이 소멸되고 맙니다. 심지어 대양의 가장 깊은 곳에도 생명체는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곳에 생명체가 존재하는 이상, 빛은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그러한 깊이에 이르기까지 빛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파해 내기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곳에 빛은 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곳에 계시기 때문이며, 빛으로 투사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과 함께 들어오고 나가기 때문입니다. 독자들이여, 그 곳에는 스스로 빛을 발하는 생명체에서부터, 레이저처럼 번쩍이는 빛을 쏘는 생명체에 이르기까지 많은 종류의 조명을 만들어 내는 생명체들이 있습니다. 나아가 실제로, 소리 파동 보다 더 빨리 움직이는 존재들도 있습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인간이 가진 제한적인 감각으로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을 뿐인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우리의 감각을 통해 알 수 있는 명백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러한 것들을 두고 ‘크다 혹은 작다’와 같은 묘사적인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모든 것들도 무한한 우주의 광대함, 즉 더 큰 “모든 것”에 비교해 보자면, 한없이 작은 것들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종종 자신이 가진 가장 놀라운 특성을 간과하곤 합니다. : 그건 바로 인간 자신이 다른 그 무엇도 아닌 ‘빛’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빛이기에, 하나님이 반영된 이미지로서 인간 또한 “빛”인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창조한 대상과 다시 하나[ONENESS]가 되기를 바라며, 그 근원인 하나님을 탐색하고, 찾기를 희망하지만, 인간이 찾으려는 기대 속의 ‘그러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기에, 이를 인정하거나 계산해 내거나 알아보는 데에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당신은 단순히 거대하게 소용돌이치는, 무한의 나선형 빛의 융합이, 놀라운 형태를 갖도록 현현된 모습으로서, 당신이 가진 감각과 위대함을 갖고, 경험을 겪어나가고 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 역시 그러한 당신이 겪는 모든 경험을 함께 겪고 공유하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흔들어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당신이 어디를 가든, 당신이 무엇을 하든, 당신과 늘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신만의 비밀 장소에서 당신이 무엇을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당신이 스스로를 절망과 불명예의 구렁텅이 속으로 몰고 간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그 곳으로 모셔가는 셈입니다. 만약 당신이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 올라 서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면, 당신은 하나님과 함께 거기 서 있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무언가를 당신 자신으로부터 성공적으로 숨길 수 없다면, 당신은 결코 이를 하나님으로부터도 숨길 수 없습니다!
아, 그런데 독자들이여, 당신이 “하나님은 빛이다”라고 선언할 때, 그 의미에 대한 완전한 설명이 존재합니다. 그러한 진술은 과학적 사실과 실체적(물리학적인--하톤) 증거를 가지고 입증될 수 있습니다. 당신들은 그 동안 너무나 신비주의적이고 신화적인 가르침들에 매몰되어 왔으며, 그러한 가르침들은 무지한 자들 혹은, 당신들이 찾아보고 들어 보기만 하면 알 수 있는 증거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당신들이 모르고 있기에,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 주장해 온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마침내, 위대한 스승들이 이야기해 온 “하나님이 빛이다”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모든 인류가 알아야만 할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지금 당신들은 생명과 빛의 진실을 향해 나아가기 보다는, 재앙의 드럼 소리에 발맞춰 어둠 속으로 행진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퀀스 상의 주기는 점점 더 짧아질 것이며, 지금처럼 계속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다가는 당신들은 결국 파멸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당신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현기증이 날만큼 많은 말들을 건넸지만, 여전히 당신들은 어떤 문제에 관해서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독자들이여, 하나님이 “단순히” 존재하는 것처럼, 앎도 단순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앎” 또한 다가와야 하는 것입니다. 지식이 감각을 붙잡고, 감각이 “앎”이 되도록 만들만한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에게, 이제 설명의 조각들이 다시금 주어질 때가 된 것입니다. 자신들의 여행에 있어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외면하지 않는 한, 앎은 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길을 보여 줄 것이며, 또 그러는 것이 우리가 여기 온 목적이기도 합니다.
내가 어떻게 깨달음의 예들을 제시해 보일 수 있을까요? 내가 이 일을 아주 잘 해낼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각각의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예를 하나 들어 볼 것 같으면, 저자 또는 작가들은 프린트된 종이 위에 쓰여진 글들을 통해 남기는 인상, 즉 그러한 “대본”의 전개 속에 자신의 비전을 담아낸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그의 꿈이자, 그의 인생의 업적이며, 그의 고통이자 그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그리 될 것입니다. 이 때 그는 자신을 작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르마도 글을 씁니다! 저런, 그녀는 항상 글을 씁니다. 그녀는 기네스 북의 모든 기록들을 다 경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자기 자신을 저자 또는 “작가”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당신들에게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목적”이 밝혀질 때까지, 스스로가 단지 서기일 뿐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녀는 당신들에게, 아주 가끔씩 그녀 자신의 비전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 매일같이 반복되는 타이핑 속에서 ‘나의 그림들’을 그리고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차이점이 있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인식은 그녀의 인식과는 아주 많이 다른 것입니다. 나의 인식 또한 “다른 사람들의 인식”은 물론이거니와 그녀의 인식과도 다를 것입니다. 나 자신에게 비춰지는 빛으로 인해 그녀의 무대가 덜 조명받게 된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이를 보다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신에게 이해가 되십니까? 나는 어쩌면 이 마지막 질문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 “빛이 물체에 비춰집니까?”
모든 지식이 빛입니다.
모든 지식은 빛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 속에 들어 있으며, 심지어 빛이 펼쳐내는 보다 놀라운 미스터리들과 함께 나타납니다. 모든 지식은 숨겨진 의도가 있는 미스터리한 비밀 세상 속에 감춰져 있는 게 아닙니다. 빛 속에 모든 것이 투영됩니다. 빛은 인간 주변에 항상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은데, 이는 빛이 너무나 많은 무한의 다른 창조물들을 인간의 감각에 반사시키기 때문인 것처럼 보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볼” 수 없는 것은 얼마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 상황에서 마치 바람이 눈에 보이지 않듯, 하나님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람이 아무리 보이지 않더라도, 바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오류를 범하지 마십시오. 바람은 실제로 “거기” 있으며, 사실상 바람 그 자체는 빛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인간이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면, 인간은 여전히 “물질”이 실제로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물질의 일부를 다루는 방법을 이해함에 있어서는 상당히 진보한 것 같지만, 물질의 참된 근원이 무엇인지, 물질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은 당신들에게 물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이 글을 쓰기 이전에도, 나와 나의 동료들은 이를 위해 분명코 부단히 애써 왔지만, 여전히 소수의 사람들, 소수 중에서도 정말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앎”의 깨달음을 현실 속에 반영시킬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저 당신들을 괴롭히고 나 자신에게 좌절감만을 안겨주기 위해 이러한 수수께끼를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들이 정말로 알고 싶어하는 것은 이러한 종류의 진실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있다면, 그건 금전적인 손해를 볼 가능성이나 지진에 대한 예측과 같은 문제들이라는 사실을 나 역시도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 진실에 대해 알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실에 대한 앎은 책임을 수반하고, 잘못에 대한 두려움을 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당신은 잘못이 되었든 다른 무엇이 되었든 간에, 오직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당신이 한 번 진실을 알게 되면, 당신은 과거에 저질렀던 잘못들을 덜 선택하는 경향을 갖게 될 것입니다. 실로 그러합니다. 당신이 진실을 알고 있는 한, 만약 당신이 잘못된 방식을 다시 선택하게 된다면, 이는 스스로가 의도적으로 그러한 행동을 하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책임의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것이며, 이는 삶의 여정에 있어서 당신이 천천히 그러한 행동을 완전히 멈추도록 만들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경이는 무엇인가?
당신 주위로 널리 펼쳐져 있는 보이지 않는 경이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당신이 알아 보고, 인정하고, 환영하겠지만, 실제로 당신이 이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것들이 제시되는 초기에는, 누가 이를 주장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비웃고, 부인하고, 돌을 던지기도 합니다. 물리적인 인간으로서 당신들은 에너지, 전기, 자기, 중력, 방사라고 알려진 것들이 만들어 내는 패턴의 표면에 ‘긁힌 자국을 내는 일’조차 시작하지 못했습니다. 당신들은 이를 가지고 노는 법을 알게 되었고, 이를 당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사용하거나 혹은 이를 통해 파괴적인 장난감을 만들기도 했으며, 부분적으로 그러한 움직임이 발생하는 몇 가지 지점을 알아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분명코 당신들은 이러한 것들에 대한 최소한의 참된 지식도 얻지 못한 것입니다. 당신들은 이를 이용하여 폭탄을 개발해 낼 수도 있지만, 아직도 당신들이 개발해 낸 것을 통제하는 법은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옥타브, 물질, “보이지 않는” 그리고 “보이는” 세상의 구성 요소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당신들은, 예를 들어, 소위 말하는 “불활성 가스[inert gases]”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혹은 애당초에 그것 자체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 분야의 최고의 전문가라고 할만한 과학자들 조차도 바로 이 “불활성 가스”에 대한 완전한 이해, 혹은 최소한의 “제대로 된” 이해도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를 예로 든 이유는, 불활성 가스는 당신들의 과학 분야의 원소 주기율표나 도표상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 가운데서도 가장 잘못 이해되고 있는 것들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의 주장을 보강해야 한다면, 당신들은 아직 제대로 된 원자의 구조도 알지 못하며, 그 구조를 결정짓는 자이로스코프의 원칙[the gyroscopic principle] 또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습니다.--나아가 당신들은 변형된 원자들을 통해, 단원자로 된 원자들에서 전자들이 축출되는 작용이나 움직임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당신들에게 너무나 기술적인 내용입니까? 왜 이것이 기술적인 문제라고 보십니까? 단지 당신들이 이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다거나,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답변 자체를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닙니까? 모든 물리학의 원칙들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우리들에게는 무효화의 원칙[the VOIDANCE principle](‘물질의 구성’ 참조--역주)이라고 알려져 있는 원칙을, 당신들의 세상에서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저 들어만 보았을 뿐입니다. 이 원칙은 다른 이름으로 불릴 수도 있겠지만, “무효화(취소)[voidance]”라는 표현이 이 현상을 묘사하기에 가장 적절한 영어 단어인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당신들 가운데 거의 아무도, 우주의 렌즈와 거울들에 대해서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모든 움직이는 것들에 대한 환영의 원인[CAUSE of ILLUSION]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물질의 전기적 우주 전체가 환영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어떠한 가르침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가 그러하고, ‘현실’이라고 할만한 그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당신들은 계속해서 당신들이 인식하는 물질의 조각들을 가지고 놀 뿐이며, 전체의 그림은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데다, 당신들은 아인슈타인과 같은 자를 갖고 있고, 그는 당신들에게 상대성에 관한 어떤 이론을 던져주기도 했습니다만, 실상 이를 통해 당신들은 보다 어리석은 길로 빠져들고 만 것입니다. 당신들은 공간이 굽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원인에 대해, 파동 장의 경계 면에서 제로 곡률을 갖는 평면의 ‘곡률 무효화’에 대해, 진실에 가까운 지식이라고는 최소한의 수준의 것도 보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지구 상에 단 한 사람도 물리학적인 확신을 갖고서, 결정들[crystals]이 왜 다양한 형태를 띠는 지에 대해 설명하지 못합니다. 지금 당신들이 살고 있는 “구” 세계[“old” world]는 결정들의 형태는 공간 상에서 다양한 물질의 구조들을 경계 짓는 파동 장들의 형태에 의해 정해진다는 사실을 알면 놀라게 될 것입니다. 내가 여기서 조금 잘못 이야기한 것도 있는데, 진실을 깨닫고 난 후에 아마도 자신들의 오류를 인정하게 될 ‘극소수의 사람들’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극소수의 사람들 조차도 어떠한 현실에도 진실에도 기초하지 않은 채, 여러 가지 것들을 계속해서 어설프게 만지고 추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일반적으로, 생명의 원칙이 무엇인지, 성장의 원칙이 무엇인지, 모든 패턴들이 자연 상태에서 순차적으로 반복되며, 그 모든 것들이 반복될 때, 이를 기록하고 또 무효화시켜 버리는, 동시적인 전개와 재전개의 원칙이 무엇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개념조차 보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당신들은 복제인간을 만들어 내고 이를 사람들 앞에 내 놓을 수도 있습니다.(‘로보토이드 & 씬테틱’ 참조--역주) ; 그렇지만 당신들은 진짜 생명체를 모방하는 일은 시작하지 조차 못하는 것입니다. 창조주는 ‘기록의 법칙’을 통해, 한 행성의 최후의 순간까지 그 위로 자신의 전개와 재전개를 펼쳐 보이고 이를 또 다른 행성 위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모든 연속적인 주기의 ‘총 합계’를 통해 수행해 낸다는 사실을 당신들 가운데 그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당신들은 단지 계속해서 “빅뱅”을 소리치거나 “작은 물고기의 창조” 등을 주장합니다.--하지만 그 어떤 이론도 어떻게 그렇게 되는 것인지와 관련해서는 최소한의 연결점도 제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빛”은 여기 나오는 모든 해소되지 못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그 어떤 현자들도 풀지 못한 의문들, 혹은 그 누구도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을 만큼 잘 알지도 못하는, 그 이외의 모든 다른 의문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빛의 섭리를 밝혀내는 것은 이 시대의 인간들에게 남겨진 과업으로, 그 과정에서 인간들은 ‘놀라운 밝혀짐과 이해의 시대’를 경험하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해 보이기를” 원하십니까? 지금 여기, 과학과 종교가 모두 수용할 수 있는 방법과 표준을 제시해 보이는 이러한 방식 속에 하나님의 증거가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의 물질적 과학 위로 영적 기초를 쌓아 올리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당신들이 잘 이해할 수는 없겠으나, 당신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부정확하게 반복되는 신화적 이야기들 대신 종교 속에 ‘진실을 허락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이를 이해할까요?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들이 이를 이해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사실 우리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임무는 당신들에게 진실의 조각들을 제시해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이러한 진실들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은 바로 당신들에게 달린 문제인 것입니다. 만약 인간들이 제대로 주목하기만 한다면, 문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는 과학과 종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만약 당신들이 그 융합을 정의할 수만 있다면, ‘결혼을 통한 단일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이 일을 해낼 수 있을까요? 당신들의 행성, 지구만을 국한해서 보자면, 아마 그러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언젠가 어떤 다른 행성 위에서, 인간들은 마침내 해내고야 말 것입니다. 내가 이 사실을 어떻게 알까요? 왜냐하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투사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렇게 될 것입니다. 나의 의도는 가능한 한 당신들이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도록 만들려는 것입니다. 당신들 가운데 보지 않고 듣지 않는 쪽을 선택하는 자들은, 그러한 선택의 오류에 따른 결과들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성장 과정에 있는 자들을 위한 장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들은 진실을 알게 될 것이며, 모두가 진실에 따라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들은 주기 속에 진행됩니다. 여기에는 문명도 포함됩니다. 새로운 깨달음은 주기적으로 인간을 보다 높은 존재로 변모시킵니다. 새로운 주기, 당신들의 계산 상으로 약 3천년 정도가 걸리는 새로운 주기가, 이제 막 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지, 전능, 전존이 모든 인간들의 의식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 그렇지만, ‘자기 자신의 영혼[their Self-Soul]’과 ‘우주적 자아의 영혼[the Universal Self-Soul]’의 하나됨에 대해 알고 있는 자들은 거의 없는 것입니다. 인간들 가운데 최고의 현자라고 하더라도 주기의 절대적인 패턴을 잊게 될 것입니다. 아, 그렇지만, 각각의 주기들은 인간들이 자아의 원천인 빛과의 하나됨을 아는 쪽으로 조금씩 더 가깝게 데려 갈 것입니다.
진실 그 자체는 정말로 단순하다는 사실을 인류는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인간들은 또한 균형에 있어서도 궁극적인 “단순성”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모든 반대되는 표현의 쌍들 사이의 ‘리듬감있고 균형잡힌 상호교환[rhythmic balanced interchange]’이 자연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의 우주의 이 ‘궁극의 예술’은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렇데, 이것은 또한 “법칙”이기도 합니다. 이 기본적인 우주적 법칙 속에, 하나님의 “전기적” “파동의” 우주[God’s “electric” “wave” universe] 속의 모든 창조적 표현들의 균형잡힌 연속성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전기적 파동의 우주’란, ‘전체의 아이디어’가 겉보기에는 무수히 많은 부분들로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전체로서 하나인 하나님의 창조[God’s one whole idea of Creation]’를 기록하는, 움직임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조건지워진 빛들[two conditioned lights]’의 우주인 것입니다.
잘못된 인식[MISPERCEPTIONS]
왜 잘못된 인식이 존재할까요? 인간은 자신이 들은 것, 그리고 저마다의 경험들을 표현하는 것 이외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이나 관심 없이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수많은 세월이 흘러가고, 많은 잘못된 정보들을 받아들이고, 또 이에 따라 행동하다 보면, 이 무지의 수준만이 보다 깊어져 가는 주기는 궁극적으로 전체 사회뿐만 아니라 개개인들의 마음-의식을 무지 속에 파묻어 버리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자들에게 있어서, 진실이 들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에 준비되기까지만 해도 무수한 세월이 걸립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은 전기적으로 조건지워진 육체의 감각에 의해 ‘자신의 원천’으로부터 절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 ‘감각의 육체’를 자신의 “마음”과 자신의 개인적 자아의 원래의 존재라고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객관적인(실재하는) 마음’이라고 여기는 것은, 단지 자신의 육체의 전기적 감각일 뿐인 것입니다. 인간이 실수하는 것이 있다면, 단지 자신의 두뇌 속의 세포들이 “기억”이라 표현되는 기제의 반복적인 사용을 통해, 감각하고 기록하게 되는 것들의 ‘전기적 앎’을 두고 “생각”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캐피털 레코드사[Capital Records Company](미국의 음반사--역주)가 자신들이 판매하는 음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듯이, 기억은 인간 안에 있는 ‘우주적 마음의 지식[knowledge of Universal Mind]’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주관적인” 마음이라고 여기는 것은 ‘자신의 의식’이자, 자신의 모든 지식, 모든 권능, 모든 현존의 영적 저장소입니다. 이러한 의식이 바로 그 인간의 자아이자, 그 자의 영원한 자아로서, 자기 자신 안에 그러한 존재가 있음을 천천히 알게 됨에 따라 자기 자신의 전지, 전존, 전능이, 자아를 통해 표현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잠재의식적인” 마음이라 불릴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이것 또한 당신의 존재의 일부로서, 마치 당신의 마음이 그러하듯, 이 ‘잠재의식적인 마음’도 속임을 당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잠재의식적으로 타인에 의해 끝없이 프로그래밍되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이러한 프로그래밍에 따른 책임감을 실제로 통제할 수 있고, 이 로보트 같은 마음을 개방할 수 있다면, 당신은 당신이 바라는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이러한 일은 바로 진실 속에서 성취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항상 그러하듯, 이러한 ‘개방’이라는 기회의 선택은 오직 당신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빛”에 대한 가르침으로 이 장을 시작했던 것처럼, 나는 이제 떠나면서도 빛에 대한 언급을 남길까 합니다. 빛이 있게 하십시오![LET THERE BE LIGHT!] 좋은 아침입니다, 학생들이여. 진실과 이해를 향해 나아가는 이 장엄한 여행 속에서, 만약 내가 좋은 “교사”[“cohan”(professor)]라고 한다면, 가르침을 성실히 배우려고 하는 한, 어쩌면 당신 역시 좋은 “학생”[“chela”(student)]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Gyeorgos Ceres Hatonn, 게오르고스 세레스 하톤
피닉스 저널 제 168권 (미간행 저널), 제 1장, pp.8-16.
http://www.fourwinds10.com/unpublished_phoenix_journ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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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s://m.blog.naver.com/truthinlight/221484436318
영혼의 구성, 그리고 빛의 하나님
제 15장, 기록 #1 하톤 1996년 3월 10일 일요일, 8:57 A.M. 9년 207일 1996년 3월 10일 일요일 타임 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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